★첫 화 보기★


#40

 

 

“독수리 말이야. 덩치만 클 뿐이지, 머리는 영 쓸모없어 보이던데. 안 그래, 레빈?”

 

은발의 남성이 레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아름답게 빛나는 백금발이 남성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웠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 남성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레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태양이 새벽을 알리고,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미끈한 표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언제나처럼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레빈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껴안은 남성에게서 내려와 침대 위에 누웠다. 달콤하고 포근한 향이 온몸을 덮었고, 레빈은 푹신한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었다. 

남성은 고개를 돌려 레빈의 뺨에 키스했다.

 

“응? 레빈. 내가 널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 대답도 없는 거야? 난 레빈에게 그런 존재였어?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거야? 레빈. 대답해줘.”

 

서서히 꿈나라로 빠져들던 레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성을 쏘아보았다. 옅은 햇볕이 남성의 등 뒤에 드리워서, 그래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새 당신에게 시달렸는데 아직도 날 못살게 굴다니, 예나 지금이나 더러운 성격은 여전하군. 레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남성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어때, 레빈? 하얀 다람쥐와 검은 도토리를 죽이기 전에, 어리숙한 독수리를 먼저 죽이는 거야.”

 

남성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던 레빈은 순간적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로랑을 죽인다니, 제정신인가. 아니, 이 남성은 하루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레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은발의 남성을 바라보자 남성은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와 재미있는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목을 졸라 죽일까, 약을 먹여 죽일까? 그것도 아니면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고, 천천히 죽음을 맛보도록 고통스럽게 고문하는 방법도 있어. 아! 심장을 조여서 죽이는 거야, 그게 좋겠어. 레빈, 내 말 알아들어?”

 

레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처구니없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남성의 목소리 때문에 금세 잠이 달아났다. 햇볕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빈을 바라보는 남성의 표정은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하리라고 레빈은 생각했다.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남성은 말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남성이 레빈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남성의 품이 따뜻한 한편, 그의 왼쪽 가슴은 한없이 차가웠다.

 

“레빈. 네가 우주 통합 관리국으로 들어오던 날 내가 벌였던 끔찍하고 악랄한 소동 말이야. 혹시 기억나?”

 

레빈은 말없이 남성의 품에서 나와 그를 바라보았다. 남성은 여전히 예쁜 눈웃음을 띠고 있었다.

 

“널 괴롭히던 놈들을 내가 모조리 죽여버렸잖아. 생각 안 나? 그날 밤, 대여섯 무리의 남성들이 산등성이에서 발견되었지. 다른 곳은 멀쩡한데 한 명도 빠짐없이 심장이 파열되어 있었잖아. 신기한 일이지? 피부에는 상처 하나 없는데 안쪽은 끔찍하게 헤집어져 있었잖아. 물에 젖은 손수건을 짜듯이 심장을…”

“그만. 자중해주십시오.”

 

레빈은 그제야 입을 열어 남성을 저지했다. 은발의 남성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레빈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남성의 입을 막았다. 남성의 아름다운 입술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레빈의 차가운 손가락이 피부에 닿자, 남성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곧 남성의 손이 레빈의 손 위에 얹어졌다.

 

“내가 널 구해준 거야. 내가 널 살린 거라고. 내가 널, 내가 널……. 레빈. 넌 나에게 충성해야 해,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내 장난감이 되는 거야. 내 놀잇감이 되는 거야.”


머리가 돌았군. 레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남성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남성이 레빈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등 뒤로 남성의 탄탄한 복근이 닿았고, 레빈의 아랫배 위로 남성의 커다란 손바닥이 닿았다. 레빈은 은발의 남성의 손가락을 살살 매만졌다.

 

“‘이야기의 흐름’을 깨부술 거야, 레빈. 우주 통합 관리국의 주요 임원들은 모두 우리 편이야. 일단 오목눈이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어. 그는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을 줄 거야.”

 

레빈은 남성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서서히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

 

도리와 나는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아무 토끼나 붙잡고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길 좀 알려주시죠.’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토끼들은 모두 온순해 보였지만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불완전해 보였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로봇을 만들 때 부품 하나를 빠뜨린 것, 요리를 할 때 재료 하나를 빼먹은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나는 도리의 어깨 위에서 내 애인의 볼을 꾹꾹 눌렀다. 다람쥐의 작은 손이 도토리의(물론 도리는 지금 도토리 몸이 아니었지만) 귀여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도리 씨, 내가 한 번 말을 걸어볼…”

“토끼님!”

“헉. 도리 씨!”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도리는 두 손을 확성기처럼 펼쳐 토끼들을 불렀다. 도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도리를 바라보았다. 도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토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리의 대답에 우리 앞에 있던 수많은 하얀 토끼의 기다란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귀를 움직이면 그 옆에 있던 다른 토끼가 귀를 움찔거렸는데, 마치 도미노가 하나씩 쓰러지듯이 순식간에 토끼들의 쫑긋거림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와, 다람 씨. 토끼님들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봐요! 신기해요!”

“신기하네요. 사람 말을 알아들었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곁에 있던 모든 토끼가 귀 쫑긋거리기를 멈추자마자 이번에는 한 마리씩 도리의 앞으로 깡충깡충 뛰어왔다. 

도리는 토끼에게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서(나는 도리의 어깨를 꽉 잡고 매달려 있었기에 떨어지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우리는 체르트가 처음이거든요. 저번에 심해어님이 하얀 토끼를 찾으라고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우리가 이제 어떡해야 하는지!”

 

도리가 물었고, 토끼가 대답했다.

 

“펭귄. 펭귄.”

“펭귄. 펭귄.”

 

도리는 우리가 체르트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면 편하게 쉴 수 있는지,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체 왜 같은 대답만 반복해서 하는 건지 몇 번이고 물었지만 토끼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펭귄’이었다. 토끼와 펭귄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처음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득 머릿속에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집 2층에서 하얀 아이와 헤어진 후 네 번째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타난 펭귄 포스터, 그리고 4행성. 나는 도리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도리의 어깨 위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내 몸을 두 손으로 들어달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도리는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하얀 다람쥐의 몸을 들어 올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도리의 살짝 올라간 아름다운 눈매와 동글동글하고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하얀 다람쥐의 눈 안에 또렷이 비췄다.

 

“알겠어요, 도리 씨! 4행성, 펭귄, 그리고 토끼는 연관성이 있는 거예요!”

“연관성이요?”

 

도리는 검지를 들어 하얀 다람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람쥐가 대답했다.

 

“그래요, 연관성! 심해어는 토끼 한 마리를 찾아가라고 했고, 우리는 4행성의 위성인 체르트에서 하얀 토끼를 찾은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는 토끼가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힌트를 주고 있는 거죠. ‘펭귄, 펭귄’이라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기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들은 우리에게 굉장한 말들을 전해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제 펭귄을 찾아 떠나면 되는 건가요? 여기 어딘가에 토끼 말고, 펭귄이 있는 건가요?”

“맞아요! 분명 그런 뜻일 거예요. 우리는 펭귄을 찾아야 해요.”

 

나와 도리는 신이 나서 탁구공이 튀기듯 말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하얀 토끼들은 여전히 ‘펭귄, 펭귄’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 건물이 보였다. 나는 작은 손을 쭉 뻗어 건물을 가리켰다. 도리는 알겠다는 듯 총총총 걸어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힌트를 준 하얀 토끼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리와 나는 이번에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

 

방과 후, 우주 통합 관리국으로 향하려던 슈는 테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얕은 강 하나를 건넜다. 테오는 잘못하다간 슈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다칠지도 모른다며 슈를 번쩍 안아 들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깡충깡충 뛰는 테오는 정말이지 토끼 그 자체였지만, 슈는 테오에게 조금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테오가 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테오? 이상한 데 가는 거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요.”

 

테오의 품에 안긴 슈가 테오에게 말했다. 펭귄과 토끼의 머리 위로 주홍빛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놀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슈의 말을 듣던 테오는 싱긋 웃었다.

 

“이상한 데 안 가. 형아랑 슈랑 우리 아기의 집으로 가는 거니까 걱정 말아요, 우리 슈.”

“또, 또. 그놈의 아기. 그놈의 아기! 아기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요, 테오!”

 

씩씩대는 슈를 둘러업은 테오는 마지막 징검다리를 건너 무사히 땅 위에 착지하고서 그 앞에 있는 작은 아파트 건물로 들어섰다. 아파트에 딸린 놀이터 하나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고, 그 곁에서 땅따먹기와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테오는 슈를 내려 주고서 슈의 손을 꼭 잡았다. 슈는 테오를 올려다보며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아리송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테오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위로 가는 화살표 버튼을 꾹 눌렀다.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둘 겁니다아.”


슈는 테오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테오는 그런 슈의 표정이 너무도 귀여워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하마터면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 슈는 테오가 넘어지지 않도록 테오의 손을 잡아주었다. 테오의 커다란 손과 슈의 조그마한 손이 겹쳐졌고, 테오의 단단한 손가락들이 슈의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테오는 허리를 숙여 슈의 뺨에 키스했고,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테오는 칭찬해달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슈를 바라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슈의 손을 꼭 잡고서.

 

“형아가 너무 대단해서 우리 슈가 놀라면 어쩌지요?”

“대체 뭐길래 그럽디까. 그냥 엘리베이터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 아닙니까요?”

“헤헤, 슈. 너무 귀여워, 우리 슈가 가장 예뻐. 하아, 하아. 우리……엘리베이터에서 할까?”

“윽, 싫습니다요!!!”

 

펭귄과 토끼를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굳게 닫혔고, 슈는 엘리베이터 버튼에 눈을 돌렸다. 문을 여닫는 버튼 외에, 1층부터 20층까지 차례로 버튼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곁에 비상벨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층 위에도 버튼 몇 개가 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슈가 버튼을 빤히 바라보니, 버튼 위에는 1억 층은 족히 돼 보이는 끝도 없는 무한한 숫자가 적혀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뭐랍니까, 테오! 역시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었습니다아!”

“놀랐어? 놀랐어요, 우리 슈? 아아, 너무 귀여워.”

“귀여운 게 아니라, 지금, 앗, 누르지 마십시요오!”

 

테오는 슈의 손을 들어 [100000000.......(점 뒤에는 끝도 없이 숫자가 있었다)]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더니 이내 순조롭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높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로켓처럼, 엘리베이터 내부가 연신 흔들거렸다. 

슈는 덜덜 떨며 테오의 품에 안겼다. 테오는 한 손으로는 슈의 허리를, 또 한 손으로는 슈의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테오가 나긋나긋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형아가 있잖아요. 금방 도착할 거야. 응? 형아랑 뽀뽀할까, 슈?”

“흐윽, 미친 토끼 새끼!”

 

난기류 속에 접어든 비행기가 흔들리듯, 엘리베이터가 끝도 없이 덜컹거렸고, 10센티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갔다가 곧 엄청난 속도로 상행하기 시작했다. 속력이 어찌나 빠른지, 시속 300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슈는 테오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를 꼭 껴안았다. 

토끼와 펭귄을 실은 낡은 엘리베이터는 하얀 구름 속을 뚫고서 더 높은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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