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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키스 타임 2

W.대니


(BGM: 나만 봄 - 볼빨간 사춘기)









“별쓰-. 너 SNS 안 하지?”

“응. 나 그런 거 안 해.”

“그럼 이거,”

“야, 야! 5회 말 여신 왔다!”



5회 말 여신은 정말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두 손을 입가에 댄 동기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끅끅 웃는다. 별이는 5회 말 여신이란 단어를 듣고 자연스레 한 사람을 떠올렸다. 중간고사도 깔끔하게 끝났겠다, 5월이 되면서 야구장을 가는 동기들이 많아졌다. 바로 그런 동기들이 의기투합하여 탄생시킨 별명이었다. 예상과 한치의 다름없이 5회 말을 장식한다는 뜻에서 나온 별명. 


하지만 뒤에 따라오는 단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심이 잔뜩 들어간 단어 같았다. 키스 타임 때 카메라에 잡힌 횟수만 해도 벌써 9번, 별이는 양손에 쥔 백팩 지퍼를 맞붙이자마자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5회 말 여신님이 오셨는데 꾸물거릴 수는 없지-.

 


“야아-. 문벼리! 카톡 봤어?!”

“아직 못 봤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별이는 다른 건물에서 넘어온 용선을 마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뛰어온 거야. 혹시 강의 마치기 전에 나왔나. 별이는 보다 멀쩡해 보이는 용선을 보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지금부터 2시간 동안은 공강이었다. 용선도 저도. 어차피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뭐가 급해서 이렇게 뛰어왔을까. 별이는 백팩을 메며 용선의 옷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엉덩이를 덮는 박시한 흰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이다. 동기들이 좋아 죽는 차림이었다. 왜냐? 맨 다리가 훤히 드러났으니까. 별이는 양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동기들을 주먹으로 연달아 내리쳤다. 아, 좀! 가만히 있어! 시끄럽게 할 거면 나가, 나가! 두 손을 허벅지 옆에 딱 붙인 동기들이 눈을 흘긴다. 별이는 질색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딴 시선 쏘지 마라, 진짜….

 


“가자.”

“응? 어딜?”

“우비 사러.”

“응?!”

 


날이 이렇게 쨍쨍한데?! 요, 용선아?! 다짜고짜 팔을 붙잡힌 별이가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가는 팔을 붙잡았다. 오늘 비 올 확률 0%인데 어딜 가? 기상 캐스터는 비의 ‘ㅂ’도 안 꺼냈는데? 인상을 찌푸린 용선이 팔을 놓고 핸드폰을 매만지기 시작한다. 별이는 용선을 빤히 바라보았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책상에 슬쩍 걸터앉았다. 핸드폰에 집중한 용선이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한다.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해도 의리를 운운하며 발을 떼지 않는 동기들에 혀를 찬 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봐. 내일 비 온대.”

“어? 아까까진 먹구름이었는데?”

 


분명 먹구름이었는데…. 두 손으로 용선의 핸드폰을 잡은 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 경기인데 왜 갑자기 비가 온대?! 별이는 3시간마다 날씨 아이콘이 박혀있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가 이마를 긁적였다. 차라리 내일 쨍쨍하고 오늘 비나 오지. 이 무슨….

 


“아, 여기 왜 이렇게 더워? 에어컨 안 틀어? 다들 학구열 장난 아니네.”

 


밑단을 쥐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린 용선이 이마를 두드린다. 헉. 별이는 황급히 일어나 용선의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끈나시 너는 왜 끌려 올라가! 찰나였는데도 복근을 너무 선명하게 봤다. 11자 복근을 머릿속에 박제한 별이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기들이 모두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별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아, 뭐야. 더워. 저리 가.”

“일단 나가자.”

 


핸드폰을 고스란히 돌려준 별이가 용선의 어깨를 잡고 슬슬 밀었다. 돌려받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용선이 팔을 휘젓는다. 어깨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 멈춰 선 별이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는 용선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날씨 봤어?”

“응?”

“오키, 고.”

“아윽-.”



나름 신경 써서 입고 온 남방이 용선의 손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진다. 별이는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는 용선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아, 알았어-. 나 가고 있어, 가고 있어-. 아니, 직립 보행을 하면 뭐해. 이거 완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잖아. 용선이 자리를 벗어나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기들이었다. 그런 동기들을 버리고 강의실을 나선 별이가 콜록거리며 허리를 바짝 굽혔다.








*








“또 뭐 살 거 없나?”

“글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온몸을 기분 좋게 휘감는다. 별이는 말을 길게 늘이며 다이소 안을 거닐었다. 쿠킹 호일에 말린 김밥을 한 입 베어 문 용선이 갖가지 타일이 전시된 쪽으로 향한다. 일회용 우의 2개와 쿨팩이 담긴 빨간 바구니를 들고 용선의 뒤를 졸졸 쫓아간 별이가 별안간 멈춰 서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긴 왜?

 


“브끌그, 흐스-.”

“…뭐라구?”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용선이 눈높이에 있는 타일들을 쭉 가리킨다. 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용선의 말을 곱씹었다가 바구니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해석은 포기하자. 무슨 말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용선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한 별이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김에 수납장이나 하나 살까. 아니다. 그럼 오늘 하루 종일 들고 다녀야 되잖아. 해석을 포기한 만큼 빠른 속도로 구매 욕구를 죽인 별이가 별안간 입가에 툭 닿는 무언가를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

 


쿠킹 호일이 아랫입술을 톡톡 때린다. 별이는 입 앞으로 올라온 김밥과 용선을 번갈아 보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난 한 번에 두 개-. 하나하나 조각을 낼 것도 없이 두 개를 물자마자 용선이 팔뚝을 찰싹 때린다. 움찔한 별이는 팔뚝을 문지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나씩 먹어!”

“아까어서, 거래? 큽.”

 


별이는 하마터면 뱉어낼 뻔한 김밥을 간신히 욱여넣고 고개를 높게 들었다. 잘게 조각난 당근이 동그랗게 만 입술 밖으로 쭈욱 튀어나온다. 별이는 손끝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른 채 다시 고개를 내렸다. 질색팔색을 한 용선이 고개를 살살 젓는다. 별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목 막힐까 봐 그러지.”

 


이제 손안에 쏙 담기는 김밥을 하나 더 베어 문 용선이 앞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별이는 제자리에 서서 용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작게 웃었다.

 


“빨리 와-.”

“우응-.”

 


목울대를 슥슥 문지른 별이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은 아무래도 나눠 먹은 김밥 한 줄로 때워야 할 것 같았다. 계획은 다이소 쇼핑 후에 식당에 가는 것이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모자를 것 같았다. 남은 시간 동안 쇼핑이나 느긋하게 해볼까-. 생각을 바꾼 별이는 어느새 바구니 밑바닥을 충분히 가린 물건들을 들고 용선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아주 커다란 대야부터 목욕탕에서나 볼법한 작은 대야까지. 플라스틱 물건이 가득한 공간에서 눈여겨보았던 수납장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별이가 시선을 고정한 채 옆으로 한 걸음 더 옮겼다.

 


“아!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옆에서 오던 사람도 절 못 봤나 보다. 어깨를 부딪치자마자 살짝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편 별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으유으유으랑유다-. 부딪칠 줄 알았어, 너.”

“그럼 말을 해주지 그랬어.”

“어-. 키스 타임 전광판!”

 


(……) 귀에 딱지가 들어앉을 것 같다. 싸늘하다. 투닥거림이 시작되기 전에 싸움을 종결한 별이가 용선과 시선을 교환했다가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어 나왔던 검지가 들어가고 손뼉을 짝짝 친다. 발을 붙이고 서서 함박웃음을 짓는 남자와 뒤늦게 와서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 화들짝 놀란 별이가 용선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용선이 팔과 어깨를 꼭 잡아 온다. 별이는 등 뒤에 숨은 용선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적대심을 끌어안았다.


사실 이제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냥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적대심을 끌어 올리는 이유는 남자가 들고 있는 차 키에 있었다. 차 키에 달린 키링에는 응원하는 팀 로고가 아닌 다른 로고가 박혀있었다. 심지어 내일 직관하는 경기의 상대팀이었다. 별이의 눈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극도로 가늘어졌다가 어느 순간 원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근데 잠깐만. 우릴 어떻게 알지. 우린 홈구장에서 밖에 활동 안 하는데(……) 저흰 어웨이 안 가는데요….

 


“근데 어떻게 아세요? 어, 키링 보니까 저희랑 다른 팀 같으신데….”

 


손가락으로 차 키를 가리키자마자 용선이 등 뒤에서 훅 튀어나온다. 마찬가지로 궁금한 모양인지 동그란 얼굴이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별이는 어깨 위로 톡, 떨어지는 용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치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SNS 안 하시는구나!”

“네?”

“키스 타임에서 X&D가 9전 9패라구, 흡-.”

“두 분, 그 홈구장 스타던데요-. 아, 그럼 이거 못 보셨겠다.”

 


뭐지…. 뭐가 떠돌아다니는 거야, 대체. 애들은 아무 말도 없었는데. 아…. 혹시 오늘 SNS 하냐고 물어봤던 이유가 이거였나. 무언가를 분주히 하던 남자가 핸드폰을 내민다. 마지못해 받아 든 별이가 나란히 선 용선과 머리를 맞대고 시선을 내렸다.

 


엑스엔디 피닉스 X&D Phoenix

[키스 타임 선전 포고]

우리만의 리그, 9전 9패….

이번엔 성공하겠습니다.

그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카메라 준비마쳤습니다.

1승 가즈아~!

항상 보이는 두 분, 내일도 물론 오실 거죠?(찡긋)

#어서와#선전포고는#처음이지



이, 뭐…. 이게 뭐야! 별이는 재차 읽어 내렸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용선을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른 용선이 다시 한번 화면을 내려다본다. 이윽고 동그란 얼굴이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얽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고 진중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별이와 용선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본다. 허리를 깊게 숙인 용선이 무릎을 짚고 끅끅 댄다. 그런 용선의 옆에서 웃음을 꾹 참은 채 고개를 돌린 별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미치겠다. 정말-.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눈앞의 두 사람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별이가 마른세수를 했다.

 


“저희 내일 두 분 직관하러 가요-.”

“염치 없지만 5회 말에 두 분 아닌, X&D 응원하겠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에 별이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또르르 돌아갔다. 용선은 웃다 못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기세다. 바구니를 꼭 들고 콧평수를 넓힌 별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두 분 진짜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아,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나 전광판으로 확인할 거야!”

 


별이는 갑작스레 벌어진 눈앞의 싸움을 보고 코밑을 긁어내렸다. 동기들만큼이나 호들갑을 떨던 남자가 결국 팔뚝을 얻어 맞는다. 하지만 화해도 빨리 이루어졌다. 비틀거리는 용선을 붙잡은 별이가 작게 웃었다. 아, 죽겠네, 죽겠어-.

 


“그럼 두 분 데이트 잘 하시구-.”

“쇼핑 즐겁게 하세요-. 내일 봬요-.”

“아, 안녕히 가세요-.”

 


어깨높이까지 든 두 손을 이리저리 흔드는 커플에 고개를 꾸벅 숙인 별이가 이제야 허리를 펴는 용선을 돌아보았다.

 


“하아-. 아, 배 아파.”

“다 웃었어? 왜 이렇게 좋아해?”

“웃기니까 그렇지-. 너가 맨날 카메라에 대고 메롱 해서 그래.”

“참나-. 막 할 것처럼 하다가 내 옆에 있는 콜라 가져간 게 누군데-. 너 때문이거든-.”

 


아직 두 자릿수는 채우지 못했지만 이제 카메라를 어느 정도 갖고 놀 수 있게 됐다. 6번째였나, 7번째였나. 7번째였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날 호기롭게 다가온 용선이 저를 지나쳐 옆에 있던 콜라를 가져갔을 때, 실망했던 관중들을 잊지 못한다. 용선과 제가 도대체 뭐라고. 무려 장탄식까지 터진 날이었다. 별이는 그날을 떠올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발치에 떨어졌던 별이의 시선이 용선에게 날아갔다.

 


“내일 필히 가야겠네.”

“상대팀 엔트리에 우리 이름 올려달라 그럴까?”

“좋네-. 내일 한번, 어? 다퉈봐?”

“10패 안겨줘? 아니면 의리 있게 1승 한번 안겨줘?”

 


환한 미소를 띤 용선이 주먹으로 제 입술을 꾹 누른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별이가 마냥 해맑은 용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1승…? 으음, 키스 타임에서 팀이 1승 하려면 우리가…. 용선의 입술을 지그시 쳐다보기 시작한 별이가 눈을 깜빡였다가 혀를 빼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야, 너 뭐야아-.”

 


악! 입술을 누르고 갔던 주먹이 어깨 위에 내리꽂힌다. 자리에서 휘청인 별이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울상을 지었다.

 


“내가 뭐!”

“너 왜 내 입술 보고 입맛 다셔? 변태같이!”

“…내가 그랬어?”

“으휴-. 머리에 뭐가 들어가지고-. 어쩐지 키스 타임 때 남 키스에 그렇게 집중하더라니-. 공부나 하셔-.”

 


머리에 아프지 않은 꿀밤을 연달아 먹인 용선이 뒤돌아 휙 가버린다. 별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억울함을 끌어안고 허리를 곧게 폈다. 내가 언제에-. 그리고 나 집중 안 했거든?! 김용선-. 아, 같이 가-.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을 한 별이가 용선을 쫄래쫄래 쫓아갔다.

 







*








날씨 한번 참 이상하네. 기상청이 이상한 건가. 별이는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해가 쨍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내렸다. 우의 대체 왜 산 거야…. 물론 비가 안 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입고 있는 유니폼을 펄럭이며 땀을 식힌 별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도 경기가 잘 안 풀린다. 이래서-. 우승을 어떻게 할 거냐구-. 답답함에 발을 구른 별이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 벌써 투 아웃에 투 스트라이크야.

 


“아, 오늘 왜 이렇게 더워.”

 


더 큰일 났네. 용선은 곧 형체를 잃고 액체가 되어 경기장에 스며들 것만 같았다. 이마와 목뒤에 쿨팩을 붙인 용선을 잡고 전단지로 만든 부채를 빠르게 흔들기 시작한 별이가 시뻘건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물 좀 줄까?”

“아니.”

“마시는 게 좋을,”

“아아!!! 왜, 왜!!! 왜 스트라이크야!! 눈 없어?!!”

 


어, 어? 다짜고짜 앞 좌석에 발을 올린 용선이 뛰어내릴 기세로 몸을 기울인다. 다행히 앞 좌석에 있는 사람도 일어나 있어서 별반 문제 될 건 없지만…. 진정해, 진정해. 그라운드에 있던 선수들 모두 자세를 풀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별이는 목뒤를 잡는 용선을 의자에 간신히 앉히고 나서야 엉덩이를 붙였다. 5회 말 경기를 마친 탓에 익숙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별이는 용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이쯤 되면 늘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시작부터 남남커플이 잡혔다. 지켜보는 것도 잠시 허리를 숙인 별이가 발치에 있는 물을 급하게 쥐고 따냈다.

 


“한 모금만.”

 


눈을 흘긴 용선이 뒤로 축 늘어진다. 고개를 젖히고 입을 떡 벌리는 용선에 웃음을 터뜨린 별이가 가까이 다가갔다. 나중엔 치킨도 먹여 달라 하겠네. 오늘만 봐준다-. 정말 힘들어 보이니까. 턱을 받친 채 물을 조심스레 흘려 넣은 별이가 이내 용선으로부터 페트병을 멀리 떼어 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떨궜다. 됐어? 느릿하게 일어난 용선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물을 머금었을까 별이는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뒤로 꺾었다. 사람이 거꾸로 보인다. 요상한 자세를 하고 있으니 용선의 시선도 같이 따라붙는다. 별이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갔다.

 


“두 분 사귀시죠?!”

 


푸흠-. 콜록, 콜록. 고개를 젖힌 탓에 토해낸 물을 그대로 얼굴에 쏟은 별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무 해맑게 물어와서 당황했다. 손이라도 크게 휘두르려 팔을 들었을까 위에 얹히는 묵직함에 고개를 돌린 별이가 앞을 바라보았다. 덥다면서 왜 내 팔을 휘감고 그…. 확연히 커진 웅성거림만큼이나 거대한 별이의 얼굴이 전광판에 떡하니 박혔다.

 


“흡-.”

“…거짓말.”

“이야-. 우리를 이렇게 애태우나!!!”

“서로 마음이 없으면 오히려 진짜 할만한데?!”

 


아니, 잠깐만요…. 진짜 잡았어? 입가를 틀어막은 용선이 말아 쥔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리치기 시작한다. 별이는 고통이 스며드는 다리를 붙잡고 황당한 기색을 뒤집어썼다. 별이는 작은 손이 망치처럼 떨어지는 곳에 손바닥을 두고 남은 손을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안 해! 설마 하면서 왔는데 선전포고가 진짜일 줄은 몰랐다. 오늘은 조금 당황스럽다. 얼른 카메라를 치우라는 듯 손을 휘저은 별이가 고개를 돌렸다.

 


“한 번만 해줘라, 진짜!”

“썸이니까 못 하는 거야, 뭐야?!”

“아니, 동기,”

“흐, 다들 너무 원하는데 한번 할까?! 별아?!”

 


네? 무슨 소리세요? 카메라가 넘어온 지 벌써 꽤 됐다. 별이는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아 내며 돌아서는 용선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으응?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선 용선이 저번처럼 두 손을 쭉 뻗는다.



“우와아!!!”

“아아악!! 드디어 하나 봐!!!”

 


그러나 용선이 제 얼굴을 잡는 동시에 전광판이 바뀌었다. 카메라가 단념한 순간 용선이 손을 뻗은 듯싶었다. 또르르 돌아간 눈동자가 멍하니 굳어선 사람들을 쭉 훑었다. 으음-.

 


“끝났네-. 안 되겠다.”

“그, 그러게.”

 


손을 접은 용선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맞서 자세를 바로 하고 정면을 바라본 별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조용했었나. 용선과 시선을 주고받은 별이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얌마!!! 너네 뭐하는 거야!!!”

“선전포고를 했으면 끝까지 잡아야지!!!”

“이게 뭐냐!!!”

“기다린 우리를 왜 바보로 만들어!!!!”

 


흐학. 폭동이 시작되었다. 다들 발을 쿵쿵 구르며 야유를 날리는 가운데 무릉도원에 있는 것처럼 평온하게 앉은 용선과 별이는 곁눈질로 서로를 흘끔거리며 웃음을 꾹 참았다.








*








- 다소 힘이 빠진 게 아닌가 느껴지는데요. 자, 좌중간에 뚝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2루에서 출발한,

 


시선을 전공책에 고정하고 있던 별이가 별안간 딱,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TV에서 질주하기 시작한, 눈에 익은 타자가 1루를 무사히 밟는다. 별이는 필기를 잠시 멈추고 샤프 끝을 입에 물었다. 공부…. 해야 하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 오질 않는다. TV 중계를 라디오처럼 들으면서 오랜 시간 앉아있던 별이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직관 가고 싶다.

 

늘 가던 곳인데, 발길을 끊은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그동안 홈구장의 마스코트라는 별명도 추가로 얻은 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전광판으로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면 그날 경기는 안 본 것이다. 두 사람을 모르면 스파이다. 다양한 이야기가 돌고 있는 만큼,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홈구장으로 출근했었다. 


그렇지만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야구에 푹 빠졌던 만큼 쪽지시험과 출석을 홈런 쳤던 별이는 TV 왼쪽 상단에 쓰여있는 2OUT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쪽뿐만이 아니라 이쪽도 투 스트라이크다. 기말고사마저 망쳐버린다면 몇 년간 직관을 내려놔야 할지도 모른다. 별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전공책을 눈에 담았다.

 

딱-.

 

소리가 귀에 쏙 박힌다. 별이의 고개가 다시 위로 들렸다.

 


“야…. 너 공부한다며….”

“어? 안 잤어?”

“자고 있었는데 어디서 안타 치는 소리가 들리잖아…. 아, 이거 최소 2루타감인데.”



눈을 힘겹게 뜬 용선이 브이를 그린다. 별이는 용선의 가는 손가락 2개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2루타…. 홈을 시작으로 작은 화면을 어지럽게 돌아다니기 시작한 선수가 3루까지 간다. 별이는 샤프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용선을 돌아보았다.

 


“3루타!”

“어이씨, 오늘 잘하네?”

 


벌떡 일어난 용선이 부스스한 머리를 헤집으며 옆으로 다가온다.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옮겨간 별이가 리모컨을 들고 볼륨을 높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말없이 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텁, 소리와 함께 볼이 외쳐진다. 화면에 나타나는 투구 속도를 몇 번이나 보았을까, 용선이 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갈 걸 그랬나.”

“그냥 빡세게 보고, 빡세게 공부할걸.”

“배고파. 라면 끓여줘.”

“…너네 집이잖아.”

“책상이랑 TV 빌려줬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별이는 용선의 자취방을 둘러보았다가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용선과 같이 살고 있는 친언니는 현재 여행 중이었다. 그 틈에 시험을 핑계로 용선의 집에 눌러앉은 별이는 익숙하게 냄비를 찾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계란 넣고, 대파 넣고, 설탕 아주 조금 넣고, 후추. 용선의 조리법을 떠올린 별이가 재료들을 찾아 헤맸다.


용선은 자고 있는 걸까, 경기를 보고 있는 걸까. 꾸벅꾸벅 졸면서도 딱 붙어 앉아 있는 모습에 의아함이 생긴다. 5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근데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있을 일인가. 편히 앉지. 뜨거운 냄비를 조심스레 들고 돌아온 별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전공책 위에 냄비를 내려놓자마자 용선이 눈을 비빈다. 솔솔 올라오는 라면 냄새에 정신을 차리는 용선을 보고 작게 웃은 별이가 몸을 돌렸다. 아직 앞접시와 수저가 남았다. 손에 가득 들고 재빨리 오자마자 용선이 팔을 뻗는다. 별이는 행동이 굼뜬 용선을 대신해서 면부터 건져냈다.

 


“국물 따르게?”

“으응-.”

“내가 할게.”

“싫어-. 내가 할 거야.”

 


앞 접시에 한 움큼 덜어주자마자 용선이 기다렸다는 듯 냄비를 들어 올린다. 별이는 용선의 젓가락을 내려놓고 제 몫의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아, 빨리 먹고 싶다-. 다리까지 덜덜 떨며 용선을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갑작스레 냄비의 기울기가 커진다. 별이는 용선의 손에서 테이블 위로 뚝 떨어지는 냄비를 보고 젓가락을 내던진 채 벌떡 일어났다.

 


“야!”

 


라면 국물을 잔뜩 먹은 필기 노트는 보이지도 않았다. 용선의 오른손이 라면에 덮였다. 뜨거운 국물이 작은 손 위로 쏟아졌다.

 


“아, 뜨거! 아!”

 


생각할 새도 없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용선을 벌떡 일으킨 별이가 큰 보폭으로 거실을 갈랐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욕실 문이 발에 차여 쾅 소리를 낸다. 용선을 내려놓고 수도 탭부터 쳐올린 별이가 용선의 팔을 힘껏 끌어당겼다.








*








“…괜찮아?”

“…몰라.”

 


받아 놓은 찬물에 손을 밀어 넣은 용선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별이는 아직까지도 빨간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쪼그려 앉은 용선이 코를 훌쩍인다. 흐르는 물에 손을 대고 있을 때까지 아프다며 눈물을 보였던 용선이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얼굴을 펴지 못한 별이가 속상한 마음에 수면 위를 퉁 쳐 냈다.

 


“뭐 해?”

“몰라.”

“화났어?”

“몰라.”

“…라면 내가 끓이면 되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근데 왜 화를 내! 가뜩이나 아파 죽겠는데!”

 


조금 전의 저처럼 수면 위를 때려 낸 용선이 다시금 울먹인다. 별이는 큰 눈에 그렁그렁 고이는 눈물을 보고 아차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다친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 고통은 용선이 끌어안고 있었다. 깜짝 놀란 저보다 더 크게 놀랐을 사람이었다. 미안해. 나지막이 내려앉은 짧은 소리가 용선에게 건너갔다. 눈을 흘긴 용선이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돌린다. 쪼그려 앉은 별이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미안해, 응? 내가 조바심 나서 그랬어. 그래도 끝까지 도망간다. 별이는 뻗은 두 손으로 용선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고 앞으로 돌려 냈다. 눈시울과 코끝이 빨개졌다. 위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던 별이의 시선이 당연한 수순을 밟듯 아래로 떨어졌다. 뭔가 익숙한데….

 


‘한번 할까?! 별아?!’

 


어디서 환청이 들린다. 아, 그때와 자세가 비슷해서 그런가. 인상을 작게 찌푸린 별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용선의 입술이 앞으로 톡 튀어나왔다.

 


‘우리…. 언제 해?’

 


두 번째 환청에 넋을 놓은 별이가 미간에 잡힌 주름을 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어으음….

 


“너 뭐 해?”

“…….”

“어딜 봐, 자꾸!”

 


용선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두 손을 그대로 둔 채 용선을 놓아준 별이가 인상을 잔뜩 쓰며 용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적이 길게 이어진다. 눈을 마주한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손을 당겨 팔짱을 낀 별이가 얼굴을 펴고 용선을 바라보았다.

 


“뭘 봐-.”

 


용선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승은 언젠가 하게 될 텐데 우리도 언젠간 할까? 시즌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키스 타임은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을까. 이렇게나 직관을 포기 못하는 우리인데 나중에는 입술을 맞대야 할까? 잘 넘어갈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린다. 그제서야 정적을 벗어내고 움찔한 용선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별이는 용선이 욕실을 벗어나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머물렀다. 사실 입술을 맞대도 그렇게 기분이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이상한 거다. 왜? 다른 동기들과 입술을 맞댄다는 상상을 하면 소름이 돋는데 얘는 왜…. 아, 동기 하니까 닭살 돋네. 아무튼.

 


“…….”

 


솔직히 용선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은 날, 정말 정말 할 것처럼 굴었던 날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정말로 할까 봐. 별이의 시선이 욕실 곳곳에 닿았다. 처음엔 그저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야구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그다음엔 재미있어서 다녔다. 용선과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어서. 지금은…. 그냥 즐겁다. 경기와 상관없이 용선과 지하철을 타고, 홈구장에 가고, 응원을 하고, 작전을 짜서 키스 타임에 카메라와 밀당을 하고, 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모든 순간순간이 즐겁다.

 


“하아-.”

 


별이의 한숨이 욕실을 채웠다. 의미 없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문턱에 선 용선이 보인다. 별이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없이 서있는 용선을 불렀다.

 


“뭐야? 누구야?”

“어? 등기우편….”

“근데 왜 그렇게 서있어?”

“별아.”



용선이 당황했다. 입술을 물어 뜯으며 머뭇거린다. 별이는 일어서다 말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응?

 


“…경기 보러 갈래?”

“시험 끝날 때까지는 안 가기로 했잖아.”

“티켓 왔어.”

“응?”

“너랑 나, 오래.”

 


초대권 2장과 짧은 편지 한 장을 꼭 쥐고 별이를 바라본 용선이 침을 느릿하게 삼켜냈다. 근데 우리…. 경기도 경기인데 5회 말엔 필히 앉아 있어야 될 것 같아.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농락했던 그 시간에 초대 됐어. 용선은 뒷말을 꾹 삼킨 채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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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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