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을까 변함 없이 사람이 많은 시장 거리에 한 소년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태현으로 그는 오늘 먹을 저녁 거리를 사러 나왔다. 태현은 그 이후로 연준과 멀리 떠났다.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끔 멀리. 단지 범규의 말이 무서워서, 다시 잡힐까 봐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와의 약속을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연준은 이렇게까지 멀리 도망치는 태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태현은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준은 자신과 태현을 이렇게 쉽게 풀어준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태현의 씁쓸한 미소에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태현은 그 날 범규에게 안겨질 때 두려웠지만 애정에 목마른 한 소년의 눈빛을 봤었기에 그 이후로 범규가 안쓰러웠다. 물론 그 날은 정신이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랬었다. 그렇게 떠난 태현과 연준은 정당하게 돈을 벌며 살아가기로 했다. 연준과 태현은 어느 보육원에서 애들을 돌보는 일을 맞게 되었다. 물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 길을 가고 있던 태현과 연준을 발견한 건 보육원 원장이었기에 들어와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 수 있었지만 항상 고마움에 태현과 연준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다. 그저 멀리서 사절단이 많이 온 것 빼고는 말이다.  태현은 소란스러운 틈을 헤집고 다니며 저녁거리를 샀다. 예전 같았으면 얼굴을 숨기며 손을 재빠르게 움직여 물건을 훔쳤을 태현이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여기서는 아무도 태현과 연준의 과거를 모른다. 태현은 잠시 과거 회상을 하며 거리를 걸어 천막 안 정육점에 도착했다. 

"어이구, 태현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늘 먹던 걸로 주면 되는 거지?"

"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태현은 살아있음 느낀다. 고기가 썰어지는 것을 기다리던 태현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천막 밖으로 나갔다. 

"길을 비키고 머리를 조아려라!"

높은 분의 행차인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건가 보더라 생각해 태현은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태현의 앞으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나비는 이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무늬를 가지고 날고 있었다. 이렇게 사절단이 오는 날이면 나비를 풀어 거리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이 지역의 특성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마리만 외롭게 날고 있는 것은 처음 본 태현은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나비는 귀빈이 타고 있을 가마 쪽으로 날아갔고 태현은 그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본 태현은 놀라 눈을 아래로 둘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가마에는 범규가 타고 있었다. 정말 우연처럼 사절단 중 그 누구의 행차를 보지 않았던 태현이 처음 본 귀빈은 타 지역에서 마주친 범규였다. 범규는 나비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전보다 야위었다.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저런 모습으로 마주치자 태현은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거기 머리를 숙이거라!!"

태현을 향해 소리치자 태현은 화들짝 놀래며 고개를 숙였다. 가마가 지나가고 태현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 고기를 받아들었다.

"저 남자가 범규 나리라지?"

"네.."

"참 안됐어. 나이도 어린데 잔병이 많다더군."

"...."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 사절단을 파견이 마지막이라더라."

"아..."

"쯧쯧... 어린데 참 안됐어."

 사내의 말을 들은 태현은 보육원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자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태현아, 왔어?"

마당을 쓸고 있던 연준이 태현을 맞이해주었다. 태현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부엌에 장 보고 온 것을 두고 연준을 찾아왔다. 

"우리 태현이 왜?"

"나.."

태현은 머뭇거렸다. 연준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태현은 연준을 바라보았다.

"범규를 보았어."

"..누구를.."

"많이 아프데."

"강태현."

"죽을 것같이 보였어."

"...."

"그 사람에게 나는 마지막 희망이 아니었을까?"

"태현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태현은 머리를 잡으며 호소했다. 연준은 그런 태현을 그냥 안아주었다. 태현은 연준의 품에서 생각을 했다. 무엇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결말인지.

긴 여행에 지쳤던 범규는 씻고 바로 침대로 누웠다. 태현에게 매몰차게 가라고 했지만 태현이 떠난 다음 날부터 범규는 자신의 방 창문을 열어두었다. 언제든지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게끔. 그리고 정말 우연처럼 태현이 떠나고 얼마 뒤 집안에서 내려오는 유전병에 걸린 것이다. 날이 갈수록 범규는 약해져서 한 번 자면 잘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도 현실에서 맞이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피해 범규는 꿈속으로 달아났다. 꿈속의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았다. 어린 시절이 불우한 자신에게 다가와 단도를 준 죽마고우 휴닝카이와의 만남,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다 사라지는 휴닝카이 대신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는 태현. 그러다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태현으로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빠지는 꿈이다. 오늘도 그 꿈을 꾸며 자는 범규. 꿈속에서 만나는 범규의 희망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희미해졌다.  

'이제는 꿈에도 행복하지 말라는 것인가...'

기구한 운명이다. 꿈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꿀 수 없어 범규는 마침내 결국 희망의 밧줄을 놓았다. 아니 놓으려는 찰나였다. 오늘따라 누군가 자신의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범규는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너무나도 따뜻했고 행복했다. 처음 꾸었던 꿈보다 황홀했고 눈물이 나왔다. 이 달콤한 품에 안겨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대체 누구이기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인가.' 

범규는 겨우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범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다가갔다. 한산한 창문 밖 검은 인영이 보였지만 이내 금방 자취를 감췄다. 범규가 몸을 돌리자 침대 옆 좁은 탁자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더 가까이 가니 밑에 천도 있었다.  물건은 붉은 루비가 박힌 팬던트였다. 단도 끝에 달면 딱 이쁜 크기였다. 물건의 정체를 알아낸 범규는 손을 뻗어 천을 집었다. 잡는 순간 범규는 설마 했다. 몇 번을 보고 눈을 비벼 다시 봐도 천은 몇 년 전 자신이 태현을 보낼 때 입혔던 옷 중 한 부분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때 태현의 모습. 그 덕분에 범규는 이 출처를 알 수 없었던 선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현..."

그 와 동시에 범규는 자신이 느꼈던 시선도 태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희미하게 웃은 범규의 미소는 달빛에 비쳐 더욱 서글프게 보였다. 범규는 천을 손목에 묶었다. 절대 풀어지지 않게끔 꽉 묶어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다시 왔구나.'

태현을 옆에 둘 생각도 없어진 범규의 소원은 그저 하나 태현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태현이 두고 간 천과 팬던트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그날 밤의 범규는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이 잠을 잘 수 있었다.  

"태현아."

밖에 나갔다가 발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들어오는 태현을 연준이 불렀다. 태현은 흠칫 놀라며 안 자고 있었던 연준을 보고 머리만 긁적였다. 연준은 그런 태현을 보며 말했다.

"그 사람한테 다녀온 거야?" 

연준의 물음에 태현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때?"

많은 주어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태현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연준의 질문 못지않게 미묘한 태현의 대답에 연준은 분주히 옷을 벗고 침대에 눕는 태현만 바라보다 말했다.

"다음에 행차가 있으면."

"....."

"나도 데려가 줘."

"...그래요."

연준은 그 말을 끝으로 후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태현은 돌아누워 아까 본 범규를 회상했다. 새하얗게 질린 피부가 죽은 사람이 누워있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혹시라도 범규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마지막에 헤어질 때 입었던 옷을 입고 간 태현은 자신이 간만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몇 일 후, 범규가 탄 마차가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 인파에는 망토를 눌러쓴 태현과 연준도 있었다. 가마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화려한 외관을 가진 마차 덕분에 위치를 빨리 파악 할 수 있었다. 범규 또한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태현을 찾기 위해 바삐 눈을 움직였다. 마차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태현은 사람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 덕분에 마차 안에 있던 범규를 볼 수 있었다. 둘은 확실히 눈을 마주쳤다. 범규는 태현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범규는 태현에게 많은 뜻이 담긴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얼굴에 착잡해진 태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태현도 모르는 사이에 태현의 큰 눈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가득 차 흘렀다. 무표정인 채로 눈물을 흘리는 태현을 범규는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연준이 태현을 뒤따라 붙었고 연준도 아주 잠깐 범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태현에게 전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많이 야윈 얼굴에 연준은 놀랐다. 범규도 연준을 아주 잠시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질투심이 먼저 들었겠지만 지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 너가 있었지.."

연준이라면 태현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범규는 그제야 편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가 너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굴었다면... 아니면 내가 네 옆의 그 아이였다면..'

범규는 여러 생각을 하며 씁쓸해진 마음을 달래며 손목에 묶인 천을 바라보았다. 

"잘 있어, 나의 작은 도둑아."

범규는 자신의 말이 허공에 흩어져 태현까지 닿을 수 있게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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