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 


희수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그리곤 그냥 포기하고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 아니 왜 비밀로 한 거야! 왜!! 저번에 왔을 때도, 세상에 사랑 싸움이었어?!

"귀 따가워…. 조심스러운 문제잖아. 그리고 그땐 안 사귀었어."

- 미쳤다. 진짜? 진짜 영인 언니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프로포즈도 받았어."

- 미쳤다! 엄마 아빤 알아?!

"아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

- 미쳤다. 와! 오졌다! 와아아아.

"뭐야. 나 금치산자랑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거야?"

"영인아."

- 허어어?! 영인 언니다!!

"민서 안녕. 잘 지냈어?"


방 밖으로도 목소리가 들렸는지 영인도 다가와 옆에 앉았다. 민서는 쫑알쫑알 어떻게 말을 안 할 수가 있냐며 항변을 했다. 희수는 미안한 듯 웃었고 영인 역시 (영현한테와 달리) 요새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일이 많았다며 사과를 건넸다. 

그뒤, 희수의 생일을 맞이하여 전화를 했다가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 민서는 잔뜩 흥분해서 이런저런 것을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 뭐 영인 언니 정도면 괜찮긴 하지. 솔직히.

"거 봐."

"…? 내가 언제 싫다고 한 적 있었어?"

- 엄마 아빠한테도 말할 거야? 언제?

"조만간 말하려고."

"꼭 안 그래도 되는데…."

"결혼하자며. 같이 평생 살자며."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놀라실 수도 있고 차근차근…."

- 뭐. 한번 겪어 봤으니까 별로 안 놀라지 않을까? 뭐 나 때랑 언니 파혼 때 이미 평생 놀랄 거 다 놀랐을 거야.

"멘탈갑이네."


영인은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웃으며 이야기하는 민서에 경외심을 표했다. 조희수 다이아 멘탈은 유전이었구나. 그리곤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민서와 대화를 나누는 희수의 손에는 반지가 곱게 끼워져 있었다. 목욕할 때랑 그거 할 때 빼고는 늘 손가락에 자리한 금색 고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 서울에 자가 있고 직업도 좋잖아. 뭐. 괜찮지 않을까?

"저번에도 근데…. 음. 괜찮겠지."

- 영인 언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여자 중에 많이 예쁜 편이지만, 그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아니. 그런 문제는 아니야…."

"응?"

- 뭐. 제주도 올 거죠? 같이 인사드리러.

"응. 1월 중에 갈까 해. 이따 전화해서 날 잡아 봐야지."

"응. 아. 민서야. 부모님 뭐 좋아하셔?"

"선물 거창하게 하지 마. 돈도 없으면서."

"너 얼마 전부터 나 개털됐다고 은근히 무시한다?"

"뭘 무시해. 자꾸 무리하려고 하니까 그러지."


민서는 사랑싸움 듣기 싫다며 웃었다. 그리곤 이따 잘 얘기해 보라며 자신도 영인의 칭찬을 흘려 놓겠다는 든든한 말을 하곤 통화를 마쳤다. 영인은 다정한 자매 간의 통화에 새삼 자신과 영현은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휴우."

"긴장돼? 나 옆에 같이 있을까?"

"으으응. 괜찮아. 저녁에 불고기 먹자! 밥만 좀 안쳐 줘."

"어. 진짜 막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네가 걱정하는 그런 문제는 아닐 거야."

"흠?"


영인은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선 부엌으로 향했고 희수는 후우 심호흡을 하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56.2. 


명색이 크리스마스니까 데이트를 해야겠지 않냐는 영인의 말에 3월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명동 성당을 찾았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명절이라 그런지, 아니면 커플들의 명절이라 그런 건지.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래도 무사히 미사를 드리고 (영인은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자세만 따라했다) 나와서 바가지 쓴 것 같은 탕후루까지 하나 사 먹었다. 어둑어둑해지곤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일루미네이션을 구경했다. 


"뭔가."

"응?"

"진짜 커플 같다. 이런 날에 이렇게 인파 속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별 이상한 걸로 다 실감나네. 너답다."

"응. 근데 뭔가 약간 뭐랄까."

"뭐 무슨 소리 하는지는 감은 와. 이런 거 친구 사이엔 절대 안 하지."

"맞아!!"

"고생하면서 사귀는 거 실감하다니. 진짜 이상해."

"사귀는 사이 아니고 결혼할 사인데!"

"귀여운 소리 해도 밖이라 뽀뽀도 못하니까, 손이나 잘 잡자."

"응!"


크리스마스라고 묘하게 들뜬 희수가 귀여워서 영인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정확한 방법은 잘 몰랐고 솔직히 신의 존재를 분명히 믿진 않았지만, 영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성당에서 감사의 기도를 (척만 하지 않고) 올렸다. 


"진짜 예쁘다. 그치?"

"응. 예쁘다. 자본주의의 꽃이네."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니까 막 돈이 쏟아지는 것 같잖아."

"실제로 그렇지 않을까."

"하긴. 이따 백화점에서 조각 케이크 사가자!"

"그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예약할 걸."

"으응. 한판씩이나 먹고 싶은 건 아니니까 괜춘!"

"그래. 그래."


영인은 웃으면서 희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날이 날인데 호텔 케이크 먹어 보고 싶다고 하면 혼나려나 조금 걱정을 하며. 




"또 인테리어 영상 봐? 푹 빠졌네."

"네 거금 들여서 하는 건데, 제대로 해야지."

"영인이는 뭐든 되게 진심이라 좋아."


뭘 이런 걸 갖고 새삼 또 반하냐는 듯 영인은 피식 웃고선 다시 너튜브로 인테리어 영상을 시청했다. 아무리 커플이고 부부고 동거를 하는 러브하우스였지만, 두 사람은 각자 방을 쓰기로 했다. 각자 서로를 배려한 결과였다. 영인은 출근할 때마다 희수를 깨우지 않고 싶었고, 희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영인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주말에 같이 잘 거니까 네 침대 좀 큰 거 사야 하나."

"으응. 지금처럼 슈퍼싱글에서 딱 붙어 자는 거 좋아."

"음란한 물만두 같으니라고."

"이제 별로 타격 없어."

"드디어 사실임을 인정했군."


뚱한 표정으로 미운 소리를 해도 싫지 않으니, 이게 사랑인가 싶었다. 태블릿 화면 속의 깔끔한 화이트톤의 벽지가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하는 색이 바란 꽃무늬 벽지와 대비됐다. 


"예쁘다. 넓어 보이기도 하고."

"바닥 흰색은 너무 청소 자주 해야 할 것 같아."

"응. 우드톤 어때? 강마루나."

"강마루라…. 괜찮을지도."

"바쁘겠다. 새해."

"원래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야."

"업체는 골랐으니까. 그래도."

"고생했어. 낮에 돌아다니느라."

"으으응. 생각했던 곳이 스케줄이 맞아서 다행이었지 뭐야. 역시 1월 중에 시공하는 게 낫겠지?"

"음. 설이 2월이니까. 설 전에 끝나는 게 좋긴 하겠지. 너도 방학 때가 좀 낫다며."

"응. 아무래도 조금 퇴근이 빠르니까. 주말에도 쉬고 해야 너랑 가구나 가전 보러 다니기도 좋고."

"진짜 무계획적이다. 너나 나나."


탓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싫지는 않는 듯 영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태블릿을 내려놓고 눈을 감더니 고개를 포옥 희수에게 기댔다. 많은 일이 있었던 올 한 애가 져물어 가고 있었다. 

9년을 알고 지냈는데. 희수가 파혼하고, 같이 살게 되고, 서로 좋아하게 돼서, 이렇게 평생을 이야기 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관계가 되기까지, 고작 1년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단 게 신기했다. 


"1년 동안 참 좋았어."

"뭐야. 머릿속 읽은 줄 알았어."

"연말이니까. 올 한 해 네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고마워. 영인아."

"올해 마지막날까지 예쁘게 말하네. 내가 할 말 없게."

"아하하."

"9년을 함께 했지만, 1년 동안 나눈 얘기가 더 많은 것 같지."

"응. 그래도 너랑 친구로 지낸 9년도 좋았어."


"빨리 사귀었어도 좋았겠지만…" 말을 덧붙이는 게 조희수다웠다. 희수 입장에선 파혼으로 시작한 한 해였는데, 그런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한해를 추억하게 만들다니. 영인은 스스로가 무척이나 대견해졌다. 


"나 진짜 쩐다."

"또 무슨 자화자찬이야?"

"너 처음 왔을 때, 우는 모습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목표 달성 완전했어. 초과 달성."

"푸하하. 왜? 울면 못생겨서? 불어터진 물만두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라고. 사람을 무슨 싸이코패스로 알아."

"그때도 너는 참 상냥했어.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몰라."

"흠. 그래?"


칭찬에 짐짓 기분 좋아보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희수는 팔짱을 낀 팔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나 그날 유민이랑 통화하면서는 울음 잘 참았거든. 근데 뭔가 너를 보자마자 눈물이 콸콸 쏟아지더라."

"개새끼 진짜………."

"딱 봐도 네가 당황하는 게 보여서, 멈추려고 했는데도 잘 안 됐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뭔가 오히려 담백한 너여서 더 안도됐던 것도 같아."

"무심하고 사람에 무관심하단 걸 참 예쁘게 표현도 하네."

"포장지 완전 반짝반짝하지?"

"응. 거의 사기꾼이야."

"네 덕분에 행복한 10년이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래. 백년해로 하자. 그 전에 죽을 것 같긴 하지만."

"사족은 부끄러워서 붙인 거지?"

"알면 좀 넘어가."


쑥스러운 듯 어깨 고개를 처박곤 웅얼거리는 영인에 희수는 웃으며 다가오는 새해에는 운동 많이 하고 건강하자는 덕담을 건넸다. 영인은 '뭐 하려고 체력을 늘리게 하는 거야 음란한 물만두'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가 살짝 등을 얻어맞고선 더 품에 안겨 들었다. 



56.3.


1월 1일은 감사하게도 법정 공휴일이었기에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영인은 뻐근한 팔을 들어 눈을 비비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였다. 10시. 대차게 늦잠을 잘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영인은 코를 한번 훌쩍이곤 오리털 이불을 더 끌어올려 덮었다. 

'역시 겨울엔 좀 건조하네. 리모델링 끝나고 희수 방에도 가습기 하나 놔야겠다' 

내려다보니 방 주인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분명 체력은 자신보다 월등했고, 실제로도 따로 잔 주말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는 자신과 달리 브런치도 챙겨 먹는 희수였다. 그런데 같이 자면 세상 모르게 늦잠을 자는 게 신기했다. 자신에게 나오는 음이온이나 아우라 이런 게 뭔가 잘 맞아서 그런 건가. 비과학적인 상상을 하며 영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 중간에 한번 깼는데 너 보다가 다시 자 버린 거야. 그거."

"엥. 그런 거였어?"

"응.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서. 뭔가 포근해서 졸리더라."

"음이온 가설이 아주 틀린 건 아닌가."

"음이온……?"


아점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희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인은 됐다며 고개를 젓고선 우유를 홀짝 들이켰다. 자신 역시 일어나서 희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쏠쏠했으니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깨자마자 "새해 복 많이 받아. 영인아" 하며 배시시 웃으며 새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는 건 쏠쏠 정도가 아니라 째졌지만 말이다. 


"저녁에는 떡국 먹을까?"

"어. 점심 네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끓일게."

"좋아. 영인이가 해 주는 거 다 맛있어."

"닭장 만들려면 먹고 마트 가야겠네. 오늘 하나?"

"W마트는 한다고 했던 거 같아. 닭장이 뭐야?!"

"닭 살 발라서 짭조름하게 조린 장. 닭육수 우려 가지고 그거 넣어서 떡국 해 먹으면 맛있어."

"신기하다. 우리 집은 그냥 멸치육수로 해 먹었는데."

"기대하라고."

"응. 아! 마트 같이 갈까?"

"뭐 필요한 거 있어?"

"으응. 그냥 새해 첫날인데 같이 외출하고 싶어서!"

"차 갖고 가면 나야 좋지."

"그게 좋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잘 먹었습니다. 씻는다."


슬며시 올라가던 입꼬리가 지나치게 솔직해서 희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욕실로 들어가던 영인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희수야."

"응?"

"리모델링 하고 살 거에 가습기도 적어 줘. 너네 방 건조하더라."

"아, 좀 그런가?"

"너 목 칼칼한 거 다 그거 때문이야. 당분간도 거실 거 갖다 쓰던가 해."

"괜찮은데…. 고마워!"


으쓱하고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버릴 것, 살 것 목록에 가습기를 적어둔 희수는 영인의 말을 들으니 왠지 목이 칼칼한 느낌이라 허브티를 우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트에서 사온 닭이 푹푹 삶겨지는 동안 영인은 희수와 짐을 정리했다. 보관이사 업체를 인테리어 업체에서 알선해 주기는 했으나, 모든 게 다 돈이었기에 가급적 불필요한 물건은 이 기회에 싹 정리를 해야겠노라 다짐한 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던 잡동사니들이 해방되자 희수의 눈이 휘동그레해졌다. 


"왜 키보드가 5개나 돼?"

"…다 축이 달라."

"축? qwerty가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키 눌렀을 때 느낌이 다르다고."


색색깔의 키보드는 보기에도 예쁘긴 했지만, 희수의 눈에는 키보드로서의 역할 다 똑같은 것 같았다. 영인은 침을 튀겨 가며 기계식 키보드의 아름다움과 키압, 스위치의 차이를 설명했다.


"봐. 그러니까 이거는 짤칵짤칵 소리가 나잖아? 경쾌하지?"

"응. 근데 이것도 소리 나는데. 똑같은 거야?"

"아냐. 이건 걸리는 느낌은 있지만 클릭음은 안 나잖아."

"아 그렇구나! 클릭음? 마우스랑 비슷한 거야?"

"응. 마우스 소리랑 비슷하지 않아?"

"응. 신기하다. 어떤 게 제일 좋은 거야?"

"그건…."


세상에 나쁜 키보드는 있지만 자신의 키보드 중 나쁜 키보드는 없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더니, 끝날 때쯤에는 무소음 적축인지 뭔지 하는 얄록달록한 키보드가 희수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희수는 삶의 질이 200배쯤 올라갈 거라며 뿌듯해하는 영인이 귀여워서 웃었다. 그렇게 키보드를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고, 영인은 오래된 키캡만 버리겠다며 빼놓았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했건만 버린 건 그거뿐이었다. 


"아! 우리 그때 놀러 갔을 때 카메라다."

"응. 아. 그때 찍은 거 현상해 왔는데. 안 보여 줬지?"

"와! 진짜? 응. 아직 못 봤어. 보고 싶어."


뽀시락거리며 꺼내온 필름과 사진들에 결국 그날 닭이 삶아질 때까지 키캡 외엔 버릴 물건을 찾지 못하고 끝이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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