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말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마왕이야기 회지에 여덟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주의 요소: 캐릭터 사망 요소 O, 잔인한 장면에 대한 짧은 서술, 기괴한 장면, 시체에 대한 언급이 있음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3부 마지막화 기준의 설정을 차용했습니다. 현재의 원작 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의 5n회차>

 

언젠가 누군가가 유중혁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네가 회귀한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모르지. 난 언제나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를 택할 뿐이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사실은 버려진 세계 따위 자기가 알 바 아니란 소리였다. 유중혁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의 세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유중혁은 몰랐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유중혁은 혼자만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남아 다시, 덜 망가진 세계로 돌아가서 재시작하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세계를 회귀라는 이름의 쓰레기통에 구겨 넣으며, 그 안에서 같이 구겨진 이전 회차의 수많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언제든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망가뜨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회귀자의 현실감각을 결여시켰다. 어차피 버릴 사람들이고, 또 망하면 또 리셋할 사람들. 유중혁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정을 덜 주기로 했고, 덜 줄 수도 있었다.

이 소중한 세계를 지키고 싶어 회귀하면 할수록, 유중혁은 세계를 소중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처절한 모순이었다.

한때 그런 회귀자였던 유중혁은,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회귀하지 않으려고 마음먹기 시작했다.






<3회차>

 

그 모든 것은 오로지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김독자와 함께하여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유중혁도 몰랐다. 언젠가 김독자도 실패하면 자신은 또다시 회귀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심어준, 한 명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방식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이미 처음 회귀할 때부터 마음속에서 버려둔 희망. 그 어떤 가능성. 어딘가에 완벽한 세계가 있고, 완벽하게 살아남는 방법이 있고, 그래서 모두 완벽한 결말을 맞을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한 생각이 유중혁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긍정적인 기생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포기하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포기하는 법을 거세당했다. 그것은 일견 참으로 기분 좋은 변화였다. 유중혁은 인간성을 되찾았고 의지를 갖고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드물게 여유로울 때는, 유중혁은 반복적인 수련 사이사이 모든 일이 끝나면 김독자와 함께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지 그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유중혁은 세 번째의 세계를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유중혁이 세 번째 세계를 버리려고 했던 김독자에게 화를 낸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독자가 그 1863회차의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아주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했던 모든 말들을 기억했다. 김독자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단 하나의 세계도 포기하지 않으려 들었을 뿐이다. 세 번째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처럼 김독자는 천팔백육십삼 개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을 구했듯이, 모두를 구하려고. 만약 김독자가 3회차가 아닌 4회차에 떨어졌다면, 김독자는 그 4회차의 유중혁을 구하고 함께했을 것이고, 5회차에 떨어지면 5회차의 유중혁을, 182회차에 떨어지면 182회차의 유중혁을, 715회차에 떨어지면 715회차의 유중혁을 구하고 함께했을 것이다. 몇 회차의 유중혁이든 그건 유중혁이고, 김독자는 자신이 알아버린, 알아버려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유중혁이든 구하려고 애를 썼을 테니까. 김독자는 원체가 그런 인간이니까. 유중혁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앞으로 회귀해서 도달했어야 할 그 모든 n회차의 자신도 자신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제는 유중혁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발현할 수 없는 미래들이었다. 더 이상 자신일 수가 없는 미래의 유중혁들까지도 모두 포용하고 있는 김독자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고, 바꿔말하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이 세계를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이유.

이 3회차의 유중혁과 함께 결結을 보면 김독자도 더는 그 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유중혁들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며 구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유중혁이 이번 3회차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제는 김독자도 끝까지 이 세계선에 남아서 결말을 볼 것이다. 그리고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 번째의 세계에서 끝을 보고, 행복할 것이다.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크나큰 오판이었다.






<3회차>

 

3회차는 실패했다.

 

어디서부터 이 세계가 망가졌을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유중혁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김독자에 대한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직후 충격을 받은 유중혁이 김독자 컴퍼니를 떠나서 따로 행동할 때부터? 넥타르로 이수경을 살려내고 유상아는 제4의 벽을 통해 가둬 환생시켰을 때부터? 설화의 선악 판정을 선에도 악에도 기울어지지 않게 조정했을 때부터? 아니면 성마대전이 시작될 때부터? 아니면 우리가 성마대전에서 수많은 목숨을 잃었을 때부터? 정확한 것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3회차의 유중혁은 1회차나 2회차와는 너무나 다른 루트를 밟아왔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김독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독자는 예언자가 아니라 그저 1863번 회귀한 유중혁이 행한 1863가지 경우의 수를 알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1863번의 모든 진부한 방법을 가지 치고, 섞고, 덧붙여서 만들어낸 새 길에서는 김독자도 미아가 되기 쉬웠다.

바꿔버린 수많은 미래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현실의 도래를 야기했다. 돌이킬 수도 없이 망가진 시가지, 재건되다 말고 부서진 건물들. 깔린 시체들, 늘어난 재앙과 도처를 잠식한 괴물들. 질서를 이룰 듯하다가도 다시 허망하게 무너지는 체계들. 인간이 극복할 듯하다가 극복할 수 없었던 시나리오들과, 과업과, 그 사이의 죽음들. 혼돈 속에서 모두가 답을 구하는 시선을 김독자에게로 돌렸고 그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나, 둘, 사람들이 죽어갔다. 맨 처음 김독자가 죽었을 때도 그들은 절망했었지만, 그래도 김독자는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 죽은 사람들은 살릴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죽어가는 정희원과 이현성을 자신의 ‘벽’안에 넣으려고 애를 쓰다가 두 시체 옆에서 모든 것을 게워내고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깊게 다친 이설화와 이길영을 살리기 위해 부활에 대한 어떤 설화와 성유물을 모으려고 날뛰다가 혼절해서 실려 들어왔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해야죠!

신유승이 또렷하게 이야기했으나 김독자의 표정은 어두웠다. 유중혁은, 그 표정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많은 말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중혁아, 나…….

그 어느 날 결국 유중혁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던 김독자는 실토해버리고 말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것은 예언자가 아니었던 예언자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였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김독자도 유중혁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 도래할지는 몰랐다. 바뀌어버린 시나리오, 바뀌어버린 미래를 처음 걸어가게 된 그들은, 처음에는 일견 안정적인 행보를 선보이는 듯했으나 빠르게 무너져버렸다. 놓쳐버린 히든피스들과 함께 놓쳐버린 정답의 선택지들이 나중에야 돌이켜 나올 때마다 김독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러나 김독자는 무너졌다.

자신이 바꿔버린 선택지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이 난이도가 올라가 버린 시나리오들을 마주할 때, 그 고난도의 시나리오에 하나씩 격파당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러면서도 죽어가면서 김독자에게 ‘고마웠어요’ 따위의 말을 내뱉을 때는 유중혁도 김독자의 후회를 어찌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내가, 너무, 많이, 바꿔서…….

죄책감은 제아무리 유중혁이라도 대신 이겨내 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 덕분에 여기까지 왔노라는 진부하고 당연한 말은 김독자의 마음에 전혀 닿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김독자는 앞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그저 죽은 것들만 보이는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난자당한 동료들의 시체 앞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한참을 중얼거리던 김독자는,

그래도 살아남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유중혁은 시나리오 해결도 다 내던지고 김독자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유중혁에게는 김독자가 더 급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김독자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김독자의 격이 격이었기에, 그가 한 번 이성이라도 잃으면 어느 작은 마을 하나쯤은 충분히 날아갈 법했다. 그러나 유중혁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독자 본인이었다. 차라리 마을 열 몇 개를 날리고 무사히 돌아온다면 괜찮았다. 그저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김독자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대면에서 유중혁은, 아주 익숙한 표정을 보았다. 사실 유중혁은 그 표정만 보지 않았더라면 김독자를 믿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은,

―난 괜찮아.

회귀하기 직전 자신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회차에서 김독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몇 개의 골짜기를 넘고 몇 개의 산을 지나 몇 개의 강을 건너고, 서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하며 온동네를 샅샅이 뒤지던 유중혁은 마침내 김독자를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아니,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온 유중혁은 어찌어찌 남은 시나리오라도 진행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한 차례 시간대가 밀려버린 시나리오들은 더 이상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같이 깨줄 동료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유중혁은 인정했다.

우리는 이 3회차에 실패했고, 무릎 꿇었으며, 우리는 이번 생을 포기했다. 그때까지도 유중혁은 제 손의 검이 흉흉하게 날을 빛내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자루를 손에 쥐고 높게 쳐들었다가, 내려쳤다. 그래, 익숙한 일이었다. 목을 파고드는 스스로의 검의 감촉이 너무 오랜만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익숙했다.

회귀하자.

유중혁은 그렇게 3회차를 포기했다. 그리고, 회귀하였다.






<4회차>

 

회귀한 제4회차의 세상에 김독자가 있을지 없을지, 너무나 두려워서 유중혁이 끝까지 미루고 피했던 회귀였다. 기어이 유중혁은 불광행 3707칸에서 눈을 뜨고는 먼저 칸 안을 살펴보았다. 유중혁이 기억하던 것과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같은 표정의 사람들, 같은 옷, 같은 자세, 같은 위치였다. 유중혁은 옆 칸으로 옮겨가려고 했지만 나타난 도깨비와 시나리오는 옆 칸으로 당장 이동할 수도 없게 개연성의 스파크를 만들었다. 유중혁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으로 주머니 속의 라이터를 집어 들어, 천천히 도선에 불을 붙였다.

유중혁은 첫 시나리오를 어떻게 깨고,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깨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의 지하철 옆 칸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폭발은, 이전보다 조금 이르게 시작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차올랐다.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나면서, 비명과 피비린내 사이로 어디선가 고기가 익는 듯한 냄새가 났다. 누군가는 바닥을 뒹굴면서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애를 썼고, 누군가는 불기운에 껍질이 벗겨지고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빨갛게 부푼 피부로 기어 다녔다. 아이가 울었고 노인은 엎드러졌다. 와중에 벌써 폭발의 여파로 기절한 몇몇의 목을 그어버리며, 눈앞에 끊임없이 뜨는 레벨 업 메세지를 무시하며 유중혁은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조급했다. 평화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유중혁의 행동에 경악하여 보내는 비난과 야유의 메세지들, 살해로 인한 코인 획득에 대한 메세지들이 끝없이 올라가다가 유중혁의 말 한마디에 이내 푹, 꺼졌다. 유중혁은 모든 코인을 전부 근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3807칸의 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에 달궈졌던 문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쾅. 다시 한번 내리치자 또다시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문이 끼긱대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너머도 소란스러웠다. 안에는 김남운과, 이현성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쾅.

유중혁은 결국 문을 부수고 옆 칸을 열었다.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들이 어딘가로 튀어나간 곤충을 잡으려고 발악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아비규환 속에서도 유중혁은 샅샅이 칸 안을 훑어보며 단 한 사람만을 찾았다. 아주 익숙한 사람도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유중혁은 제일 먼저 멀거니 서 있던 어린아이를 보았고 그것이 이길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길영이 있다면 여기는……!

유중혁의 눈이 다급히 돌아갔다. 이현성이 보였으며, 유상아가 보였고, 막 누군가와 대치하는 김남운이 보였으며, 그 김남운과 대치하는…….

유중혁은 칸 끝에 서 있던 김독자를 향해 재빠르게 달려갔다. 기억하고 있던 3회차의 마지막보다 훨씬 더 마르고 왜소한 몸이었고, 낯짝이 하얬다. 유중혁은 이현성에게도, 김남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일직선으로 달려가 김독자의 양어깨를 손으로 잡아챘다.

김독자!

김독자의 마른 어깨가 양손에 아주 쉬이 잡혔다. 어깨를 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김독자가 시선을 들어 멍하니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으나 유중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이 가지.

유중혁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어리려는 순간이었다.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

이어진 말에 유중혁은 입가의 미소를 싹 지워야만 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뭐?






<4회차>

 

4회차의 유중혁은, 3회차에 대한 아무 기억도 없는 김독자를 데리고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김독자는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무엇을 생각해내어 스스로 납득했는지 유중혁과의 동행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극 초반부터 함께한 김독자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전 회차 초반부에 가끔 마주쳤던 것과는 양상이 꽤 달라져서, 유중혁이 제법 익숙하게 김독자를 리드했고 김독자는 시종일관 따라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종종 김독자가 던지는―필시 소설 ‘멸살법’에서 비롯되었을 듯한―정보들은 꽤 쓸모가 있었으므로 유중혁은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이현성을 다시 데려올 때도, 김남운을 데려올 때도, 이지혜를 데려올 때도 한 번도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은 손해를 보더라도 유중혁은 김독자를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다행히, 김독자는 이전 회차보단 조금 약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으며 여전히 유중혁에게 맹목적이었다. 가치가 있는 전력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멸살법’이란 소설을 정확히 아는지, 아니면 3회차 이후로 그가 등장인물이 되었는지 궁금해했는데 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소설의 존재에 대해 먼저 고백하길 바랐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이전 회차처럼 그것이 명징히 드러날 만한 계기가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김독자를 감싸는 모종의 벽 스킬은 여전했는지, 여전히 현자의 눈으로도 김독자를 읽기는 어려웠는데, 유중혁은 그 벽이 미묘하게……3회차와는 다른 것이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조금 거슬렸지만 그래도 당장에 큰 문제가 없으니, 유중혁은 자신의 원래 파티에 김독자를 포함한 채 꾸준히 나아갔다.


그리고 4회차도, 실패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귀를 하면서도 유중혁의 마음이 편했다. 안 될 말이지만 그래도, 김독자가 다음 회차에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커져 있었고, 그렇다면 정말 다시 한번 더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회귀한 그다음 세계에도, 정말로 김독자가 있었다.


<5회차, 6회차, 7회차, 8회차……

유중혁은 자신이 얼마든지 회귀를 반복해도 김독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사실들도 차츰 알게 되었는데, 김독자는 ‘멸살법’이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모든 회귀 이야기를 읽은 바로 그 김독자였지만, 3회차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5회차에서는 4회차와 3회차를, 6회차에서는 5회차와 4회차와 3회차를 기억하지 못했다. 유중혁이 회귀하면, 김독자는 회귀 이전의 기억들을 잃은 채, 맨 처음 멸살법의 세계로 떨어져 들어온 바로 그 김독자 그대로 시작되었다.

유중혁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몇 번을 회귀하더라도 김독자는 그 회차에서 끝없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상관없다. 김독자는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다.

<9회차, 10회차, 11회차, 12회차……

유중혁은 이전의 자신이 왜 회귀를 피하려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13회차>

뭐, 어떤가.

<15회차>

큰 문제인가.

<21회차>

처음이 어렵지 다음부터는 쉬웠다. 회귀 횟수가 두 자리를 넘어가고, 서른 한 번째 회차에 진입하여 또 멍청한 표정을 하는 김독자를 데려가면서 유중혁은 왜 구태여 자신이 3회차에 머물려고 그리 애를 썼는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121회차>

회귀의 자릿수가 늘어날수록,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유중혁에게는 그 모든 회귀를 온전히 이해할 김독자가 있었으므로,

<167회차>

대체 뭐가 문제인가?

<379회차…………

 

회귀하고 또 회귀해도,

김독자도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 된 거 아닌가?





<512회차>

 

수많은 회귀와 삶의 도전마다, 그들이 걷는 루트는 조금씩 달랐다. 물론 초반부에 할 일은 거의 다 정해져 있으니 초반까지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매회마다 유중혁이 고르는 히든피스의 순서들과 성장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정도였다. 시나리오 50번 대쯤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김독자와 유중혁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최대한 모아서 어떻게든 새로운 길을 뚫으려고 애를 썼다. 종종 김독자는 자신과 아무렇지도 않게 미래에 대한 일을 상의하는 유중혁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듯이 보였지만, 이내 넘어갔다. 어떤 회차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멸살법에 대해 알고 있노라 고백하기도 했고, 고백하지 않기도 했다. 고백한 직후의 김독자는 지나치게 혼란스러워했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으므로 유중혁은 대체로 고백하지 않는 쪽을 더 많이 택했다. 그에게 많은 것을 설명하다 보면, 결국 이번이 너와 나의 처음의 도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만 했고, 김독자가 이미 몇 번이고 유중혁과의 결結을 보는 데에 실패했음을 실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은, 서로에게 안전하게 가기로 했다.

그 몇 번째인가의 도전에서, 이전 회차에서 하지 않은 일을 해 보기도 했다. 이번의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과 계약을 했다. 상대는, 은밀한 모략가였다. 아주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유중혁은 그제야 기억해냈다. 은밀한 모략가는 1회차에도 2회차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등장은 3회차에 김독자가 처음 자신의 회차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때의 그는…….

…모습이 좀 변한 것 같군.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를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안 해도 될 말을 내뱉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형상은 어쩐지 좀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늘 똑같은 어둠이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어둠의 크기는 확실히 3회차 때보다 더욱 더 커져서 부피를 늘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어둠 속에 가려진 희미한 인간의 형체는 조금 줄어들어 있었고,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가 계약을 한다며 내민 손가락은 끝의, 한 마디가 통째로 없어서 기이한 살덩이만 선명했다. 손톱은 물론이고 손톱이 붙어있어야 할 세 번째 마디가 숭덩 잘라낸 것처럼 보였다. 고깃덩이를 잘라낸 단면 같은 것을 보며 유중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별소릴. 이계의 존재에게 형상이라는 게 의미가 있던가?

대답에 유중혁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가 어떻게 변하든지 큰 차이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은밀한 모략가가 덧붙인 말은 조금 이상했다.

…오래 살더니 별생각을 다 하는군.

512회차의 유중혁에게 그 말은 좀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회귀를 알고 있다는 투였다.







<733회차>

 

어느 날부터인가 김독자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중혁아, 우리……우리 예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어?

거의 오백 번을 넘어간 회귀였다. 칠백 번째 회차에서야 김독자는 그런 말을 자주 꺼냈다. 데자뷰.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전의 회차에서 자신과 함께한 일들을 기억해주길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그 말은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유중혁은 은근슬쩍 ‘옛날 일’을 꺼내며, 이번 회차와는 다르게 풀어나갔던 예전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다. 그러면 김독자는 한참 동안 듣다가도,

이상하다, 우리 그거 그렇게 안 했잖아? 아니…아니 그렇게 했던 것 같기도…….

하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유중혁은 은연중에 김독자가 다른 회차의 일들을 떠올려 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독자는 이미 그의 좋은 동료였으며, 그가 천 팔백 번 회귀한 이야기를 읽어내렸기에 그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사실은 칠백 삼십 세 번째의, 지금의 나는, 너와 함께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그 이전에도, 그 이전 회차에도, 너는 3회차부터 꾸준히 나와 함께하며 회귀하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파고들면 들수록 김독자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너무 겁에 질리는 것 같아서, 유중혁은 그 기대를 멈추었다.

데자뷰에 대해 파고들수록 김독자는 자주 악몽을 꿨다. 한밤중에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거나, 잠이 들기를 알게 모르게 두려워하며 불침번을 자처했다. 유중혁은 이전 회차에서는 없었던 그 변화를 기민하게 받아들이며 경계했다. 이전 회차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 김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유중혁은 김독자가 꾸는 악몽이 이전 회차 실패의 기억인지는 궁금했다. 그것만 안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어느 날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바깥을 서성이며 한참 잠을 못 이루던 김독자를 따라왔다.

김독자.

…어? 어, 중혁아.

또 무슨 꿈이라도 꿨나?

김독자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여태껏 유중혁은, 김독자가 그런 기색을 보이면 순순히 물러가 주곤 했다. 그러나 이번의 유중혁은 물러가 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유중혁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붙이면서, 은근슬쩍 호기심을 밀어붙였다. 김독자는 불편해하면서도, 결국에는 유중혁이 요구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줄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정말, 이상한 꿈인데,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전 회차에서 자신과의 일들을 꿈으로 꿨다고 이야기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나온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내가 창조되는 꿈이었어.




<■■■회차의 어딘가>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선의 이야기이다.

그 옛날, 김독자가 멸살법 안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분명히 있었다. 김독자가 유중혁을 따라 회귀하지 않고, 김독자를 모르는 유중혁 혼자만이 회귀를 하던 그런 세계. 그 세계에 맨 처음 도달한 김독자가 부여받은 세계는 분명히 3회차뿐이었다. 맨 처음, 멸살법의 세계로 들어간, 3회차에만 오롯이 홀로 존재했던 김독자는,

어떤 한 존재를 구원한 적이 있었다.

그 구원의 대상이 3회차는 아니었다, 3회차는 실패했으니까. 3회차를 성공했다면, 김독자가 4회차에도 계속해서 유중혁과 함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3회차를 성공했다면, 김독자가 어떤 다른 존재로 기어이 변모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시간선의 장난인지, 이미 미래와 과거, 현재를 초월한 이계의 신격, 은밀한 모략가와 모종의 거래를 맺고 난 직후의 김독자는, 자신이 부여되지 않은 유중혁의 1863회차 세계선으로 가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김독자는 그 유중혁을 구원하였다.

그것이 구원이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그것이 구원이라는 데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회차로 넘어가 버리고, 세계선을 찢고 나간 유중혁에게는 더 영원한 안식이 없을 것이며 그 유중혁은 영원히 세계선 사이를 떠도는 미지가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미지가 되어버린 은밀한 모략가로서는 그게 구원이라는 점에 대해선 한치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분노하였지만, 이내 너무나도 순진하게 보상을 요구하는 김독자를 보며 할 말을 잃고, 대충 그를 돌려보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어리석었다. 그리고는, 더는 구원할 수도 없이 사라져버린 1863회차 ‘였던’ 흰 코트를 입은 유중혁에 대해서는,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유중혁은 김독자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서, 수많은 평행세계와 시간선을 떠돌아다녔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원히 안식 없는 여행은 아니긴 했다. 원한다면, 그 유중혁은 어딘가 안전한 세계에 정착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는 등장인물이 아니었기에 그는 세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로 만들어내 보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유중혁이 처음부터 어딘가에 고정되고 머무르지 않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회귀를 반복해서 지쳐온 그에게도 안식은 필요했다. 더이상의 모험이나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닌, 평안한 생활이 갈급했다. 그래서 그 역시 수많은 세계선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새 삶을 시작하고 마칠 장소를 고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많은 시간 단층 사이로 정말 이상한……아주 이상한 것을 하나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선과 세계선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버려진 존재들이 많았다. 혹부리들은 그 틈을 밟고 나다녔는데, 그들이 버린 것인지 어떤 세계에서 튕겨 나간 것인지 종종 의미 모를 유실물들이 틈의 허공을 떠다녔다. 우주의 쓰레기들처럼 돌아다니는 존재와 물건들을 유중혁도 자주 마주했다. 대개는 의미가 없거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유중혁은 그만, 어떤 유실물 하나를 주워버리고 말았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김독자의 시체였다.


유중혁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는 시체를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애를 쓰다가, 거기에서 더 이상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그 어떤 영혼의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그 껍데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원래의 세계에서 김독자가 죽어 세계선 밖으로 튕겨 나갔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되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원래의 4회차부터, 1863회차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김독자가,

각 회차마다 모두 유중혁을 돕고 있는 사실을.


유중혁은 멈칫거리며 세계선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망연히 중얼거렸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잠시 후 그는 두 번째 시체를 줍게 된다.

이 역시 김독자의 시체였다.

 

 




<969회차>

 

또다시 이번 회차도 실패였다.

아예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 눈 깜짝할 새 회귀하는 것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게 유중혁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주 자연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다른 동료들이 먼저 죽어서 김독자가 미쳐버리고, 시나리오 자체가 꼬여서 회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조금 골치 아팠다.

유중혁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김독자 앞에서는 ‘자체 회귀’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중혁이 자기 목에 칼을 찔러넣어 자살하는 모습은 유중혁을 사랑하는 김독자에게 보여주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유중혁이 김독자 앞에서 회귀를 시도해야만 할 때가 왔다. 유중혁의 부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이미 죽었거나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된 몸을 이끌고, 김독자는 배에 뚫린 상처를 손으로 짓누르면서도 유중혁한테 빌빌 기어왔다.

중혁아,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마, 아직, 우, 우리는, 갈, 수 있어. 조금, 조금만, 더, 참아,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유중혁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포션의 뚜껑을 열던 김독자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멈추게 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독자는 그 약을 유중혁이 아닌 김독자 자신에게 써야 했다. 그러면 김독자는 치료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부상이면 굉장히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배후성을 쳐다보면서 유중혁은 눈 앞에 작은 창이 뜨는 것을 느꼈다.


회귀하겠습니까?

네 / 아니오

 

유중혁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회귀를 선택하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이미 다른 소리는 흐릿하게 들리던 유중혁의 귓가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죽기 싫어…….

유중혁은 눈을 크게 떴다. 김독자가 울고 있었다. 유중혁이 죽음을 앞둔 순간 김독자가 울음을 터뜨린 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온 말의 내용이 뭔가 이상했다.

김독자, 방금, 뭐라고, 말했…….

죽지 마, 가 아니라 죽기 싫다, 고? 유중혁보고 죽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미 무거워진 몸에서 소름이 바싹 돋았다. 어딘지 등골이 서늘했다. 말의 함의를 알아내기 위해, 유중혁은 김독자를 쳐다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로 인해 시야가 까맣게 점멸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그 무엇도 더 물어보지 못한 채, 결국 또 다음 기회를 향해 회귀했다.







<1438회차>

 

유중혁은 또다시 불광행 지하철에서 자신과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멸살법의 기억만을 갖고 있던 김독자와 대면했다. 유중혁은 지체 없이 김독자를 데리고, 이현성과 김남운과 이길영, 유상아까지 챙기며 그대로 파티를 구성했다. 자신이 죽을 때 죽기 싫다며 울던 김독자의 얼굴이 기억나서 그에 대한 뭐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전 회차에 대한 기억이 없는 김독자에게 물어봐 봤자였다. 상황을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깨 가면서,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눈 감고도 깰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진행하며 유중혁은 다른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묻어 놓고 있었던 민감한 질문.



내가 회귀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3회차에서 김독자를 만난 이래로 잠시 잊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김독자가 회귀라는 가능성 자체를 잊고 3회차 내에서 결結을 보겠다고 애써줬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3회차를 포기하고 4회차로 회귀할 때는 너무도 절망스러워서, 그리고 회귀한 직후에는 김독자가 4회차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기뻐서 다시 꺼내볼 새가 없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꺼내 보고 나니, 그 질문은 한 꺼풀 벗겨져서는 새로운 형태로 몸집을 불렸다.

1회차 2회차처럼, 기존에 이 세계 안에 있던 사람들은 회귀 지점 시간선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만, 원래 그 시간선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김독자는, 어떻게 매 회차 유중혁과 함께하는 것인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말없이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자 옆에 있던 김독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중혁아?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1644회차>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은 검을 높게 들어 자신의 빗장뼈를 부수며 심장까지 단번에 찔러 내렸다.

그 마지막 광경을 내려다보던 누군가가 탄식했다.

유중혁이 또다시 죽어 회귀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유중혁의 시체를 망연히 내려다보는, 1644번째의 김독자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온갖 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김독자 이 멍청한 놈, 멍청한 놈, 멍청한 놈, 멍청한 놈. 그러라고 보낸 것이 아닌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너는 영원히 파멸하는 것이 나았다. 차라리 네가 거기서 그 대신 죽는 것이 나았다. 어째서, 왜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가. 은밀한 모략가는 입안으로 치밀어오르는 욕을 짓씹고는 손목까지 덮고 있던 검은 케이프 자락을 들추었다. 새하얗게 드러난 손목과 손끝으로, 길게 자라난 손톱. 그는, 자신의 오른손 검지 손톱을 다른 손의 두 손가락으로 쥐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톱이 손가락에서 들리면서, 손톱 뿌리에서부터 피가 새어 나왔다. 원래의 자리에 있으려던 손톱이 힘을 못 이기고 부러지는가 싶더니, 일부분이 살점을 찢어가며 떨어져나왔다. 빠르게 피멍이 들어가며 손톱이 있던 자리가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이 남은 손톱 조각을 빼냈다. 차오르는 피가 뚝,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뽑아낸 손톱을 그 피 위로 떨어뜨렸다. 피 속으로 들어간 손톱이 부글부글대더니, 천천히, 그 안에서 무언가가 덩어리지면서 부풀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명령에 따라 그것은 저들끼리 모이고, 부딪치고, 부풀고, 뼈를 만들고, 근육을 구성하고, 신경을 모으고, 살을 뒤덮더니 인간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통을 동그랗게 뒤덮는 머리칼과 함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이 뒤덮이고, 안구가 제자리를 찾고, 팔 끝에서 살덩이가 갈라져 나오더니 작은 돌기들이 손가락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슴, 배, 다리, 발끝이 촉수처럼 뻗어 나와 흐늘대더니 이내 뼈가 완성되었는지 힘을 찾고 본래 가야 할 자리에 안착했다.

다시 일어나라.

그 모든 과정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은밀한 모략가는, 손안에 들린, 반쯤 만들어진 김독자를 보며 명령했다.

그때였다.

길디 긴 파열음이 들리더니 공간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세로로 쪼개졌다.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검은 검날을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저게 뭐였지,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아주 익숙한 검이었다. 그가 주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서 전혀 신경 쓰고 있진 않았지만, 그것이 흑천마도였음을 깨닫기도 전에, 1863회차의 유중혁이 흉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시간에 또 새로운 김독자를 덮어씌울 생각은 하지 마라, 이계의 신격.

은밀한 모략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래, 고작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서는 찾아온 게 여기란 말이지. 3회차의 내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은밀한 모략가는 후회가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게 안식을 주거나, 그 김독자가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되었어야 했는데, 네가 이야기를 찢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바람에 예상치 못한 일만 가득이군. 네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텅 빈 공간에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유중혁은 어두운 바닥에 발을 내디디면서 주위를 흘긋 둘러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쌓여서 끝 간 데 깊이를 모를 어둠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암흑은, 내려다보이는 스타스트림 우주의 검은색과도 참 많이 닮아있어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어둠의 중심에, 반쯤 생성되다 만 김독자를 들고 선 은밀한 모략가가 있었다.


검은색 망토로 인해 거의 모든 부분이 가려졌지만, 모략가의 존재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면서 마음을 선뜩하게 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고, 기가 질리고, 아득하면서, 화려하고, 아름답고, 섬세한,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미지. 지켜보는 자를 압도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처연하고 마르게 홀로 서 있는 하나의 육신. 그건 한때 김독자였다기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3회차의, 맨 처음의 김독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 가득 희망을 담은 웃음을 짓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품은 찬란한 희망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담아 깔때기를 뒤집듯, 바깥 거죽을 안으로 집어넣고, 속내를 밖으로 꺼내며 대칭 시키면 이렇게 될까, 너무 큰 양+에서 한순간에 음-으로 뒤집혀버린 블랙홀같이?

유중혁은 그를 통해 보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와 상상을 뛰어넘는 아득한, 경이에 가까운 절망. 그걸 증명하는 것은 그의 발밑에 있는 수많은…….

네놈이었나?

유중혁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유중혁도 1863번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이계의 신격과 계약한 적은 꽤 많았다. 극소수는 은밀한 모략가와 이루어진 거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공간에 가보면서도,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거래한 은밀한 모략가는 항상 거대한 어둠 속에서 똬리를 틀고, 어둠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 있을 뿐이었으며, 공간 속에는 시야에 잡힐 게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한 어둠 외엔 없는 텅 빈 곳.

그러나 이제 이야기를 찢고 나온 유중혁에게는 진실이 똑똑히 보였다.

끝 간 데 없이 깊은 어둠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조각난 팔과 다리들, 머리와 눈알들. 폐, 심장, 허파, 간, 췌장, 혈관, 근육, 뼈들의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과 몇몇 형체가 분명히 남아 있는 시체들. 머리가 뚫렸거나, 다리가 잘렸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붙잡은 채 사후 경직으로 굳어져 버린 기묘한 자세들의……김독자.

내 회귀를 따라 김독자를 계속 회귀시킨 게, 네놈이었나?

은밀한 모략가의 발밑에, 김독자의 시체 수천 개가 쌓여 있었다.


아니, 그걸 회귀라고 할 수 있을까. 매 회차마다 죽고 살아나는 김독자를, 매 회차마다 똑같은 시간선에서 다시 좀비처럼 되살려 보내서,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유중혁의 회차에 '투입'되어 유중혁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김독자가 회귀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회귀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장에서 복제된 상품을 팔아치우고 처분하고 폐기하는 일련의 과정에 훨씬 더 가까웠다. 자본주의 대신 결結을 보기 위한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장의 생산 라인, 은밀한 모략가가 보내온 분신 김독자들. 죽어간 천 팔백명의 김독자와, 쌓여간 시체들. 쌓여온 어떤 절망들. 사실은 절망이 아니라, 굉장히 오랫동안 시도해오고 실패한 희망의 시체들. 그가 쌓아온 그 엄청난 두께의, 죽어버린 희망과 그 속에서 죽어버린…김독자 그 자체.

‘내’가 ‘나’를 맘대로 하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지? 네가 1863회차에 그 정도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가 이것들을 계속 보낸 덕이 아닌가.

김독자를 짓밟은 김독자, 은밀한 모략가는 태연했다.

살았다가 죽어버렸을 모든 생명과 회차와 시간과 희망들. 가끔은 선택의 오판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때로는 그 시간선을 살아갔을 때의 다소 빠른 포기와 부족한 의지로, 더는 구원받을 수도 없이 버려진 수많은 김독자와 유중혁을 떠받치고 있었던 누군가, 더 이상 구원받을 수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 고작인 시체들의 숙주,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너는…!

시끄럽다, 회귀자여.

검지 하나를 세우자 그 손가락 주위로 스산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깨달은 유중혁은 허겁지겁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하지 마, 더는…!

그 순간, 모략가의 검지손가락의 끝 한 마디가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대가를 지불하자마자 유중혁이 흔적도 없이 공간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을 확인한 모략가는 한숨을 쉬었다. 이 정경을 들킨 것에 대해서 마음에 거리낌이 있진 않았다. 그저……‘더는’, 이라니? 적절하지 못한 단어 선택이다.

그저 마지막에 유중혁이 비명을 지르듯 자신을 말리던 소리가 마치,

그가 유중혁을 쫓아내는 것을 말렸다기보단, 손가락 하나가 또다시 사라지는 것을 말리는 것만 같아서, 찝찝한 감각에 모략가는 오른손으로 사라진 검지 끝부분을 매만졌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육체를 무엇하여 신경 쓰는가. 어차피 모든 일은, 버려지기 위해서 쓰이는 것을.





은밀한 모략가가 쫓아낸 뒤 1863회차의 유중혁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났을 거라는 생각은 모략가의 완벽한 오판이었다. 한 번 공간을 뚫고 들어와 길을 알아버린 1863회차의 유중혁은, 또다시 돌아왔고, 또다시 들어오고, 또다시 들어오고, 또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제 공간에 침투한 자를 다시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은 그리 엄청난 개연성을 소모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귀하지 않은 '그' 유중혁은―이야기를 완전히 찢고 나가 더는 등장인물이 아닌, 세계선 밖의 인물이었기에―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등장인물이었다면 손마디고 자시고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아도 내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유중혁을 공간 밖으로 쫓아내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하기에는, 모략가에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를테면, 허벅다리의 살점을 스스로 베어내, 1524회차에 보낼 김독자를 새로 만들어낸다거나, 귀 끝을 잘라내어, 1309회차에 보낼 김독자를 다시 형성시켜서 보내는 일 따위였다.

그 모든 개연성을 어기는 일들은 은밀한 모략가를 꾸준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된 일이라 본인은 무던하였지만, 고통은 시시각각 정신을 갉아먹어 갔다. 은밀한 모략가는, 기계적으로 살점을 뜯어내고 김독자를 ‘창조’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시체로 돌아온 어느 시간선에서의 김독자를 회수하여 아무렇게나 공간 안에 던져 놓았다. 그 지루하고 끝없는 작업 사이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이 쳐들어오는 것만이 특별히 상기할 만한 일이었다. 다소 언짢았지만, 1863회차의 유중혁의 방문은 그의 삶에서 그나마 유일한 변화이기도 했다.

유중혁은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화를 냈다.

그렇게 네 신체 하나하나를 모두 훼손하면서 시간선마다 ‘김독자’를 보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화를 내고, 달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고, 설득하려고도 했다. 맨 처음엔, 은밀한 모략가는 유중혁이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여, 그가 무언가를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걸 멍하니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유중혁이 말하는 ‘그만두자’는 말의 의미도 깨달을 수가 없어서, ―그런가. 정도의 말을 의례적으로 내뱉었다가, 잠시 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멍하니 손을 내저었다. 그는 유중혁의 말에 추호도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유중혁은 그가 자신의 살을 베어내려 들 때마다,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여 김독자를 만들어내려 할 때마다 화를 내고 치를 떨었다.

오랜 세월을 살며 회귀해온 네게도 그렇게 기괴해 보이는가? 이 광경이.

한 번은, 이계의 신격이 김독자의 시체더미 위에 앉아서 유중혁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대답으로 돌아온 말은 뜻밖이었다.

이것들도 끔찍하지만,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유중혁은 천천히 시체의 산을 올랐다. 몇 회차일지 모를 김독자의 으깨진 머리 위로 첫 발을 내디딜 때, 그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참으려고 애를 쓰는 듯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곤 걸음을 옮겼다. 그 위의 정상 중심에 앉은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걸어 오르다 종내에는 기어오르며, 유중혁은 대답했다.

…네가 이 모든 '김독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략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바친 것은 얼마나 되느냐이다.

하! 은밀한 모략가가 코웃음을 쳤다. 코앞의 유중혁이 자신처럼 회귀하며 죽어간 저 김독자들을 가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동정을 표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시답잖았다.

누가, 누굴 얘기하는가?

그는 목을 감싼 검은색 망토의 단추를 차분히 풀었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빈 눈, 살점이 패인 허벅지, 누군가가 갉아먹은 듯 뼈가 드러난 팔꿈치께, 발가락 하나가 비어 있는, 기이하도록 앙상한 육체.

결손과 결핍과 훼손의 지도가 거기 있었다.

유중혁은 차마 탄식도 하지 못하고 제 눈을 감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 한 점 변화도 없었다.

도대체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회귀자여. 대답해 보아라. 내 손가락 하나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만.

아니면 눈알이?

그만,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기능할 필요도 없는 사지 오장육부의 육신이 그렇게도 중요하단 말인가?

그만해,

너는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회귀하면서도 그런 게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팔이든 다리든…….

팔. 다리. 손발.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질량. 은밀한 모략가의 호흡을 동여매고 생명을 유지하는 그 모든 것이 그의 세상에서 하나하나 의미가 없게 스러져버려서, 그때부터 그가 죽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는지라, 1863회차의 유중혁은 그 모든 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졌다. 유중혁은 눈을 떴다.

목적? 착각하지 마라, 이계의 신격이여, 아니…….

유중혁은, 제 앞의 흰 나뭇가지 같은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를 그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김독자.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중얼거렸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군.

유중혁은 새삼 그가 여기서 버티고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적어도 푹 패인 살점마다, 훼손된 신체 부위마다 시간선 한 번. 한 번 김독자와 함께 시나리오를 시작하여 기어이 패배하고 회귀할 때까지 평균적으로 걸린 시간은 최소 3년에서 최대 5년. 그리고 그 천 번이 넘는 회귀마다 김독자를 다시 보내고, 다시 시간선을 시작하고, 또다시……. 아, 영겁의 세월 속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자. 유중혁은 목이 미어지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김독자, 생각해 봐, 네놈의 목적이 뭐였지?

목적이 뭐냐고? 내 목적은…….

기억해내라.

은밀한 모략가는, 그제야 자리에서 움찔했다.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는데, 순간 누군가가 물 먹인 솜을 목구멍에 가득 채운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성대는 더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는 기관이었기에 목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의식을 통해 전언처럼 모든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김독자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게 보이질 않았다.

…어째서…….

기억해내.

…….

침묵이 흘렀다. 이계의 신격의 희미하게 쉬어버린 목소리 뒤로는, 더이상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얼어버린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던 유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단호한 말이 꽂혀 들어왔다.

김독자, 너는 날 엔딩으로 보내고 싶은 건가, 아니면…….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이야기들. 퇴색된 목적들.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어떤 회차들>

 

중혁아,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알지?

김독자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아니, 실은 자주 하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그 말을 한 빈도는 대체로 한 회차에 두어 번 정도였다. 그러나 유중혁이 열 번, 백 번, 천 번을 회귀하면서 회귀할 때마다 그 말을 들었으니, 유중혁으로서는 굉장히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럴 때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이 아는 김독자임에 안심했고, 감사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그 말에 토씨를 달지 않았다. 희망은 좋은 것이니까. 김독자가 계속해서 희망을 품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중혁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김독자.

어?

만약 우리가 세상을 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만 구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지?

글쎄……?

우물쭈물하는 김독자는, 답을 정하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이미 김독자의 마음속에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 대답을 유중혁이 맘에 들어 하지 않을 게 뻔하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지긋지긋한, 구원이라는 이름의 희생이나 할 생각이겠지. 유중혁은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김독자, 만약 우리가 세상을 구했는데, 그 와중에 내가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지?

너를 죽지 않게 해야지. 세상도 구하면서.

죽으면?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지.

살려낼 수도 없다면?

중혁아,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해?

김독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누가 들었더라도 되물을 만한 질문이긴 했다.

너, 왜 그런 질문 하는 거야? 그런 질문을 해서 나아질 게 뭔데?

김독자는 되물으며 유중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이어 씨익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중혁아,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어. 너도 죽지 않고 나도 죽지 않은 채로도. 알지?

그 웃음이 너무 해맑아서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믿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회차 어떤 세계에서,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노라 고백했다. 김독자는 다소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래도 그런 유중혁과 정보를 공유하며 최대한 결結 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런 김독자가 기억하면서 말해준 문구는, 어쩌면 에필로그로 가는 핵심일지도 모르는, 멸살법의 마지막 화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가지는 잊어버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라는 점.

 

김독자도 유중혁도 그 말을 오래도록 되뇌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막연한 희망이 그 한 줄 한 줄에 매달려 있었다. 김독자는 그 글귀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었다, 단 한 번도 그 구절을 외워내지 못한 회차가 없었으니. 어쨌든 그 방법을 우리가 알아내면, 우리는 세계를 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유중혁. 김독자는 늘상 웃으면서 진지하게 그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몇 회차를 지나고 또 지나, 김독자가 고민한 방법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유중혁은 다시 그 문구를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또 몇십 회차를 지나 다시 김독자에게 멸살법에 대해 고백했다. 또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며 김독자는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고민하였다.

그러나, 회귀가 천 회차가 넘어가면서, 유중혁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는 세상을 구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혁아, 우리는 세상을 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알지?

하지만. 유중혁은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억눌렀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너는, 살아남는 방법 외의 다른 것은 이야기한 적이 없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잊혀진 어딘가>

 

또다시 이계의 신격은, 1863회차의 유중혁을 공간 바깥으로 튕겨내었다. 그제야 주위는 완전히 고요해졌고, 은밀한 모략가는 다시 원래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평소처럼 어둠 속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붙들고 내던진 말들은, 좀처럼 튕겨 내지지 않았다.

목적

숨이 막혔다. 호흡기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호흡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모략가는 무언가가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을 쥐어짜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모든 말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짓누르고 망치고 있었다.

행복?

행복? 행복이 뭐지. 그건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개념이었고, 단순히 시간만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해 은밀한 모략가가 느끼는 거리감 역시 너무나 멀었다. 이계의 신격에게 인간들의 긍정적 관념 같은 것은 의미가 없어진 지 매우 오래였다. 그렇게 진부하고 우습고 어린아이 같은 말들은 결結을 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들은 말들을 잊으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말들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말을 어떻게 듣고 설득되라고 그러는 건지, 도대체 유중혁은―

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면, 옛날의 자신에게서라도 찾아보던가.

유중혁은, 그런 수수께끼같은 말을 남기고는 다시 튕겨 나가 버렸다.

…….

은밀한 모략가는 다시 제 공간 속에 갇힌 채, 자신을 부수어 김독자를 만들어내고, 죽은 김독자의 시체를 시간선에서 회수해서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복구할 수조차 없는 일부는 공간의 틈새에 던져버렸다. 그런 일을 몇십 번쯤 반복했을 때, 그에게는 시간이 아주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아마 유중혁이 오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누군가 찾아올 만한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무료했던 은밀한 모략가는 자기가 뭘 바랐는지 되짚기 시작했다.

그는 몰려드는 기억의 꿈에 자신을 맡겼다.

은밀한 모략가는 아주 오래된 꿈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몇 번째 시간선이었나? 이제는 기억도 할 수 없는 그 수많은 이야기 사이에서 하얀 코트를 입은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완벽한 이야기가 꼭 최고의 이야기는 아니야.

내가 그 말을 언제 했더라. 은밀한 모략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종종 자신이 보낸 복제들의 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여러 회차에서의 기억들이 뒤섞여 밀려 들어와서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언제 했던 건지 헷갈리게 수천수만 개의 기억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모략가는 한참을 식물처럼 제자리에 앉은 채 호흡만을 간신히 유지했다. 역시, 이건, 지나치게 위험했다. 밀려드는 천 팔백 개의 의식을 하나씩 지우고, 철저히 눌러 내리고, 버려진 세계들이 다시 자신의 의식 속에서도 완전히 폐기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명상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기 위한 시간이었다. 발밑에서 있을 리 없는 핏물이 찰방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의 감각이 기민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 밑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자신들의 시체.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보냈던 수많은 분신들. 다시, 또다시 계속된 시도.

천 팔백 번의 실패.

…정말 쓸데없는 것들인데…….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이 실패하여 버려둔 그 쓸데없는 것들을 다시 제대로 찾아보기로 했다.

모략가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변에 널린 자신의 시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으스러져 있었고, 어떤 것은 그나마 자신이라는 걸 알아볼 만큼 얼굴이 뚜렷했고 손발도 잘 남아 있었다. 각 시체의 마모된 정도는,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시간의 뚜렷함과 비례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수천 명의 김독자를 뒤적였다. 몇 시간 넘게 살점과 피를 온몸에 묻혀가며, 기어이 은밀한 모략가는 시쳇더미 맨 아래, 쌓이고 쌓인, 누적된 맨 아래에서, 용케도 으스러지지 않고 굉장히 멀쩡한 김독자 한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그 김독자는 몸이 깨끗하고, 비록 피가 묻었을지언정 얼굴이 밝게 빛났으며, 맑았다. 마치…자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 그것을 손에 쥐어들고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이 김독자는 도대체 왜…

…왜 이렇게…행복해 보이지?

은밀한 모략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멀쩡한 김독자의 육신을 잡아들었다. 그에게서 아주 오래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시작의 냄새가.



그것은 3회차의 김독자였다.


가장 먼저, 맨 처음 이 세계에 들어온 그가, 맨 처음 유중혁을 만났던 바로 그 회차였다. 자신이 몇 번이고 다시 분신을 만들어내서 덮어 씌워버린 다른 3회차가 아니라, 온전히 맨 처음의, 이계의 신격이 아니었던 때의, 결結을 몰랐던 유일한 김독자. 심장에 피가 몰리면서 두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은밀한 모략가는 잔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3회차의 자신에게 천천히 입을 맞췄다.

천천히 기억들이 흘러들어왔다.

은밀한 모략가 자신조차도, 자신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오래 잊어버려서 퇴색된 기억들. 완전히 다른 사람 같던 그 시절. 성좌로서 궁금해하고, 아쉬워하고, 당황하고, 감탄하고, 즐거워하며 관람까지 할 수 있었던, 아주 오래전의 김독자.

어떤 기억은 즐거웠고, 어떤 기억은 고통스러웠고, 어떤 기억은 슬프고, 어떤 기억은 기쁘고……이미 수억 번을 반복해서 보아온 비슷한 시나리오들의 이야기인데도, 그 이전에도 멸살법을 보며 천 팔백 번은 더 봤을 법한 비슷한 뼈대를 가진 이야기인데도, 감흥 없이 임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을 가졌던 단 하나의 회차.

 

천 팔백 번을 실패한 김독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회차의 그 어떤 반복과 도전을 다 모아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었던, 맨 처음.

 

김독자, 기회는 ■ ■ 뿐이다.


어떤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 회귀자의 무수한 실패로 만들어진 한 번. 그리고, 그런 회귀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이계의 신격도 아니요 다른 고귀한 존재도 아니었던, 하잘것없던 인간의 단 한 번.


내겐 늘 ■ ■■■었어.



이 한 번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애처롭고 아름답던 시절의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맨 처음의, 3회차>

 

어느 날 3회차의 유중혁은 꿈을 꾸었다. 1863명의 김독자에 대한 꿈이었다.

그것은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벽에 남겨진 기록일 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훔쳐보았을 뿐이었다.

그 기억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일, 허구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 허구를 이토록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유중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수많은 세계들이 그 벽에 득시글하게 달라붙어서 제각기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그 수많은 아우성 사이에서 누군가가 피로 쓴 글씨 같은 것들이 어른거렸다.

또 다시 도전해. 제발, 포기하지 마.

소리가 금속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것처럼 귀가 먹먹할 만큼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유중혁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같이 벽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포기하지 마―

그는 수많은 비명을 들으며, 한참을 울 듯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한참 가만가만 벽을 쓰다듬더니, 곧 손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큰 흉터를 새긴 유중혁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제발 포기하지 말라는 그 모든 절규 속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이 3회차의 유중혁에게 읊조렸다.

……하지만 실패해도 괜찮아. 그건 포기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천 팔백 가지 울음을 꿰뚫고 울리는 그 목소리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이번 한 번을, 제대로 살아.





<마지막의>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 동안 의식이 없었다. 어떤 물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것 같기도 했다. 꿈에서 깨면서 그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았다. 한수영. 정희원. 유상아. 이길영. 신유승. 이현성. 이지혜……. 한동훈. 한명오. 공필두……. 기어이, 끝끝내 3회차의 결結을 같이 보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들.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 그들. 은밀한 모략가에게는 이미 눈알이 없었기 때문에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한, 천 번째 회차로 ‘김독자’를 보낼 때였나, 그는 스스로의 안구를 뿌리채 적출했다. 울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이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책임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도 쉬웠다. 천 팔 백 번을 다시 시도해도 어차피 되돌릴 수 없었던 사람들. 천 팔 백 번의 죽음만을 반복하였던 나의 사람들. 텅 빈 눈알의 자리에, 어둠만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아주 익숙하게 감각을 불리는, 깊은 절망과 어둠. 다시 또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혼자와 함께할 어둠을 기대하며 이계의 신격은 다시 깨어났다.

그러나 그가 다시 주변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땐,

곁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수많은 김독자의 시체들―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들의 죽음과만 함께 있어야 할 공간에 타인이 있었다. 모략가는 숨을 죽였다. 그는 자기 옆에 있는 존재가 유중혁임을 바로 알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매번 멀리, 아주 멀리 보내려고 애를 썼는데, 그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몇 개의 시간선과 차원을 넘어 시공간을 찢고 기어이. 기어이 다시 돌아왔다. 죽어버리고, 또 죽어버려서, 천 팔백 번을 죽을 운명을 막아주지도 못했는데도, 그가 여기로 돌아왔다. 주변에 널려 있는 팔과, 다리와, 손발 바닥들에 몸뚱어리를 스치면서, 잠시 움찔대던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의 밖으로 나간 자여.

유중혁은 천천히 이계의 신격을 향해 다가갔다. 툭, 하고 그의 발치에서 부딪친 몇 번째인가의 김독자의 두개골이, 도르르 굴러갔다. 마른 숨이 잠시 들이켜졌다가, 내뱉어졌다. 주위에 널린 시체들을 보던 모략가가 웃었다.

괴상한 웃음이었다. 죽어있는 수많은 김독자 사이에서, 3회차의 김독자를 옆에 껴안은 채, 은밀한 모략가는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한참을 웃었다. 그러더니 그 웃음의 끝이 희미하게 잦아들면서 흐느낌으로 변했다.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군.

유중혁은, 그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아니, 전혀.

더이상 두 존재에게 육신의 접촉은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유중혁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찾아 더듬었고, 파고들었다. 그것은 흔히들 키스라고 부르는 성적인 접촉이라기보단―마치 물에서 막 건져진 자에 대한 인공호흡에 가까웠다. 모략가는 아무 거부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앙상한 팔로 유중혁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것은 맨 처음으로 1863회차의 유중혁에게,

1863회차의 김독자가 보내는 구조요청이었다.

 


긴 호흡이 얽힌 끝에, 입을 뗀 이계의 신격이, 의식의 진언이 아닌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무 오래 쓰지 않아 발성기관이 퇴화된 것처럼, 쉬어버리고 희미해서 들리지조차 않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유중혁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부질없는 것들을 끝내야겠다.

수많은 세계선을 내려다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아닌 김독자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중혁아,


우리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자.




다시 3회차

 

어느 날 개연성을 어기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던 유중혁은, 3일이나 지나서야 다시 일행들에게로 되돌아왔다. 걱정이 가득했던 김독자는 처음에는 반겼으며, 이후에는 짜증을 냈으며, 그 후에는 의심이 가득한 어조로 유중혁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야, 그래서 대체 어디 갔던 거야. 누구야? 우리 중혁이 납치해갔던 건 누구냐?

유중혁은 무심코, 은밀,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말을 바꿨다.

……아니, 이계의 신격이 무언가를 원하는 모양이더군.

김독자의 표정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그놈들 이야기 들어봤자 좋을 게 거의 없는데.

성마대전에서는 절대로 ■■■를 죽이지 않고 시작하라고.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게 앞으로의 시나리오 진행에 조금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김독자는 은밀한 모략가를 믿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했으며 무슨 꿍꿍이를 품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전에 없이 진지한 유중혁의 표정에, 김독자는 결국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지간해선 들으라고 하더군.

내가 그의 뭘 믿고 그걸 들어야 하지?

이번이 자신이 시나리오에 대해 조언해주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멸살법 그 전부를 뒤져봐도 성좌가 시나리오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직접적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시나리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누굴 어떻게 하라는 식인 경우는 더욱 그랬다. 김독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생각했던 그림과는 꽤 다르지만…….

실패하면 어떡하지?

김독자는 눈알을 데룩 굴렸다. 유중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 대답했다.

…뭐, 괜찮다.

그럼, 이번 한 번만 그렇게 해 보지 뭐.

태평한 말에 유중혁이 팔짱을 꼈다. 기회는 애초에 한 번뿐이다, 김독자. 약간 골이 난 듯한 말에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내겐 늘 한 번뿐이었어.







3회차를 내려다보며


더이상 회귀가 없어도, 그들이 잘 할 거라고 믿나?

깊이의 한계를 모르는 어둠 속에서, 모략가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곧이어 할 일을 알아차린 듯, 이공간 전체에서 존재들이 불안하게 꿈틀거리며 희미한 울음을 내뱉었다. 죽어간 지난 수많은 회차가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손톱으로 벅벅 땅을 긁어대고, 은밀한 모략가의 발목을 잡고, 잡아당기고, 무언가를 내뱉고, 삼키고, 씹길 반복했다. 유중혁은 제 옆에 선 모략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잘 할 거라고 믿는다.

이계의 신격은 유중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눈이 없이 감각으로 모든 것을 지각하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은 크게 의미가 없었으나, 그 행위는 사지를 멀쩡하게 가지고 있었을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모략가는, 천천히, 자신의 가는 손가락을 들어 유중혁에게 뻗었다. 유중혁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모략가는 중얼거렸다.

……거짓말.

말이 단단하고 차가웠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회귀자여? 내가 개입했던 시간선에서, 3회차의 유중혁은 결국 자기 손으로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게 자살하여 회귀한다. 그리고 그다음 회차도, 그다음 회차도……. 나와, 나의 분신들인 것과 함께 끊임없이 회귀했지. 내가 있든 없든 너는 1863회차까지 끝없이 회귀를 반복했을 것이고, 그건 모두 정해진 일이야. 나는 잘할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지. 내가 잘 할 운명이었다면, 나는 1863명의 나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말인 듯 내뱉는 데 한치의 쉼도 없었다. 휴지休止가 없는 생각들을, 가만히 듣던 유중혁은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3회차의 너는 나를 구하러 왔고,

그건―

…나를 구했지.

―그걸, 어떻게, ‘구했다’고, 하지?

말에 조금씩 노기가 서리고 있었다. 김독자는, 자기 분노의 방향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1863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김독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한참 유중혁 얼굴의 흉터를 매만지던 중이었다. 형편없이 마른 팔은 힘없이 곧바로 유중혁에게 끌려왔다. 이계의 신격이 되어버린 그에게 더이상 육체의 제약은 의미가 없겠지만, 의미가 없다고 해서 돌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자기 파괴적인 일이었다. 비틀거리는 김독자를 그대로 끌어안은 유중혁은 속삭이듯 말했다.

구했다, 분명히. 너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잘 못 할 수도 있겠지. 잘 못 하더라도, 좋다. 성공은 구원이 될 수 있겠지만, 모든 실패가 구원이 아닌 것은 아니야. 김독자, 3회차의 네가,

아니, 유중혁은 말을 바꾸었다.

여기에 있는 네가 날 구했다.

시체들의 산더미 위에서, 수많은 죽음을 거쳐온 한 존재가, 다른 수많은 죽음을 거쳐온 다른 존재를 끌어안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이야기했다.

고생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가지는 잊어버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라는 점.


하지만 살아남는 것만으론 삶은 충분치 못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살아남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멸망을 피해도 절망이 남는 세계가 있다. 희망을 위해 도전할수록 절망에 질식해가는 자가 있고, 죽음에 이르러도,

죽음에 이르러도, 괜찮을 때가 있으니까.


유중혁은 품에 김독자를 안은 채 마른 눈으로 이 거대한 스타스트림을 내려다보았다. 스타스트림의 우주는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지구가 보였다. 저 아래 시간선에 어딘가에는 3회차의 유중혁도 있을 것이고, 624회차의 유중혁도 있고, 375번째의 김독자도, 1374번째의 김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서 태엽 끊긴 인형처럼 버려진 김독자의 시체들, 그 시체들이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중얼거렸다. 이 모든 수많은 노력들, 벽 위에 누군가가 봐주기조차 바라지 않은 채 써 내리며, 이 낙서들이 세계를 뒤덮어 모든 것을 부수고 깨어, 영광의 승리를 가져와 주길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면서, 피로, 손톱이 빠질 때까지, 지문이 닳고 뼈가 구부러지고 살이 곪을 때까지 처절하게 긁어내리며 써온 모든 이야기들. 처절한 이야기로 뒤덮인 이 세계. 죽은 희망과 구원받지 못할 미래.


……이제 그만하자.


그걸로, 충분했다. 준비는 끝났다.



우리의 세계는, 멸망해도 좋을 세계였다.




3회차

 

그때, 어느 날 검은 밤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김독자도, 유중혁도 그 누구도 멸살법의 세계에서 그렇게 거대한 것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히든 시나리오나 이벤트성 서브 시나리오와 관계가 있는가 하고 낙뢰가 떨어진 지점에 다가갔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흔한 벼락은 아니었기에 김독자는 대지에 남은 미묘한 기운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돌아섰다. 개연성의 스파크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 날 아침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김독자와 유중혁은 다시 무사히 아침을 맞았다.

김독자나 유중혁이나 3회차의 그 누구도 그 이후로 이계의 신격, 은밀한 모략가를 만날 수 없었다. 채널 방송을 보는 성좌들 목록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전혀 몰랐지만, 그 날 어떤 세계 어떤 회차에서는 세상이 멸망하여서 두 존재가 영원한 안식에 빠져들었다. 그때에 두 존재가 쥐고 있던 모든 세계선의 미래도 같이 사라지고야 말았다. 다시 도전할 수도 없는, 다른 기회조차 사라져버린, 현실의 단 하나의 세계선만 남은 세상이 그 아침에 이루어졌다.

그 날, 두 별이 졌는데도 아침이 너무 밝아서 아무도 별들의 종막을 알 수 없었다. 멸망의 아침은 그렇게 희번덕하게, 태연하게, 밝게 빛나는 태양을 띄우며 도래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아침이었다.


미래가 멸망한 그 아침, 두 사람은 여전히 그 현재에 살았다.

유중혁은 자신의 성흔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유중혁의 회귀할 모든 미래가 사라졌고, 다시 돌아올 모든 김독자의 존재가, 그 모든 시간선의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졌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 김독자와 유중혁, 그들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좋을 아침이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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