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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서 16:14



1


자정이 가까운 시간, 버키 반즈는 눈을 감고서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헨리 스트리트를 내달려 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낡은 구두 앞을 비췄다. 잘생긴 얼굴의 볼은 더운 공기와 뜀박질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가쁘게 사거리를 달음박질해 장로교 교회에 도착한 버키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높은 건물 앞에서 쌕쌕거리고는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요일 오전 미사에서 목사와 신도를 형형색색의 빛으로 아름답게 비추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달과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으로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2층 난간의 옆에는 기름 등불이 몇 개 올려져 있지만 넓은 회당을 모두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저 의자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만 비추고 있었다. 

회당은 고적했지만 인기척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중간 의자 즈음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다. 긴 옆좌석에는 노숙자가 곤하게 자느라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지만 그림자에게서는 억제할 수 없는 흐느낌, 신전에서 신을 독대한 자의 흐느낌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작아졌다 커졌다 반복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박한 속삭임이 무어라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나오지만 흐느낌과 섞인데다 워낙 작고 빨라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상적인 교회의 밤이었다. 절박하지 않으면 이 밤에 신을 찾기 위해 교회로 오지 않는다. 버키 반즈 역시 잘 알았다. 그도 절박하고 신 외에는, 인간들로서는 아무도 이것을 바꾸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로 달려왔으니까. 

버키는 쓰러지듯 맨 뒤의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문을 닫아놓았었는데도 사람이 드문 탓인지 교회 안에 고여있는 밤의 공기는 청량하고 맑았다. 걱정과 땀으로 뒤범벅되어 달아오른 몸이 차츰 식기 시작하고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깍지껴 모은 손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하나님.’

스티브 로저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열이 끓고 내장이 모두 뽑혀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침이 계속되었다. 뇌수막염과 폐결핵이 스티브의 얇은 몸을 쥐어짜고 주물러 의사는 그의 보호자인 버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으니 가족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버키는 의사가 그 때 어떤 단어를 썼는지, 어떤 억양으로 말했는지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스무 해를 살아오는 동안 스티브 로저스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의사가 이토록 가망 없다 말하고 스티브 역시 자신이 틀린 것 같다고 속삭이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를 잃는다. 내장이 움츠러들고 작게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제발 스티브를 살려주세요.’

진정하려 했지만 목이 울컥거리더니 울음이 섞인 긴 한숨이 빠져나왔다. 석탄수와 소독약, 사람의 속을 거북하게 만드는 각종 약의 독한 냄새에 감싸여 스티브 로저스가 간신히 잠든 후에야 버키는 교회로 달려올 수 있었다. 

‘제발,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드릴 테니까……. 맹세할게요, 무엇이든지 가져가세요. 스티브만 살려주세요.’

절실하게 기도가 올라갔다. 인간의 힘으론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오로지 기적만이 스티브를 죽음의 늪에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누구든…….’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스티브 로저스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버키는 완전히 사로잡아서 그는 참지 못하고 작게 울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버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손가락이 하얗도록 움켜쥔 주먹 위에 이마를 대고 버키는 눈물로 기도했다. 

어둠이 마치 무게를 가진 것처럼 한 겹, 두 겹 짙어졌다. 더불어 코고는 소리가 완전히 멎고 중얼중얼하는 흐느낌이 점차 커진다. 완전히 자신의 세계에 빠져 이마에 손을 붙이고 있던 버키는 그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회랑의 앞에 흰 꽃에 감싸인 장식 십자가를 올려다보려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눈물로 젖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한 번, 두 번, 눈꺼풀이 깜빡일 때마다 슬픔과 좌절에 빠져있던 눈매에 긴장이 서리고 날카로워졌다. 달이 구름에라도 가린 것처럼 어두워지는데도 회랑의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그 그림자는 그저 어둠이 아니라 싸늘하고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처럼 꿈틀거렸다. 중얼중얼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마침내 누군가 귀 옆에서 악쓰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회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키는 한 마디의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려움을 느낀 버키가 노숙자와 기도 드리던 사람을 억지로 잡아채고 다 같이 도망가야겠다고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났는데, 그 순간 흔들리며 심지를 간신히 태우고 있던 기름등불이 한순간에 모두 꺼지고 온전한 어둠이 코앞까지 장악했다. 잉크 속에 가라앉은 듯 어둠은 질량을 가지고 내리눌러 숨을 막히게 했고 자신의 손발조차도 확인할 수 없었다. 버키는 일어선 채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의 등걸이를 더듬어 꽉 잡고 주변을 살폈다.

그 어두운 잉크병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던 사람만이 희끄무레한 빛으로 음산하게 빛났다. 눈치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버키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심하게 뛰었지만 시선은 그에게서 돌릴 수가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려 버키 쪽을 향해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수사처럼 길고 뒤집어쓸 수 있는 후드를 입고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뒤집어쓴 후드 아래는 좀 더 깊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중얼중얼하는 소리는 그가 가까이 다가올 수록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울부짖었다.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굵고 또 얇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목소리였다. 겹겹이 쌓이고 쌓인 그 목소리에는 광채가 있었고 또한 암흑이 있었다. 목소리에 닿은 피부가 짜릿짜릿해서 현실감을 찾을 수 없었다. 버키는 떨며 등걸이를 움켜쥐었다. 손 안에 분명히 등걸이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요일마다 찾아온 장소였고 니스칠한 나무의 결까지도 익숙했다. 그러한 익숙함이 간신히 버키가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혹은 비명지르고 졸도하지 않도록 도왔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신명기1:12)

그러나 버키는 도저히 눈앞의 존재를 신이나 천사와 같은 성스러운 존재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2층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물론 수태고지와 같은 천사들이 나오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일요일마다 버키 반즈는 그 색유리에서 쏟아져내려오는 형형색색의 빛을 받았고 천사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어둡고 음산하며 공포가 뭉친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말하는 무시무시한 악마와도 달랐다. 귀 대신 솟아난 숫양의 뿔, 발굽이 달린 털 달린 다리가 그것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거대한 포대자루와 같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어둠 안쪽에서 유황과 몰약의 독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동시에 풍기고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너의 가장 고결하고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

버키는 간신히 용기를 짜내 말했다.

“뭘 말하는 겁니까?”

『네가 가진 고결하고 가장 귀한 것을 바친다면 그가 살아남으리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은 마치 창과 같이 버키를 꿰뚫었다. 버키는 눈앞의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역시 초자연적이며 그가 목마르게 바라왔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을 확신했다. 그 앞에 선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의심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은 인간이 같은 차원의 존재에게 품는 감정이다.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고 고통에 무감하며 생에 흔들리지 않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이며, 기적으로 스티브를 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간절함이 이해를 넘는 공포를 이겼다. 버키는 팔걸이를 잡은 손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든, 스티브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제발, 스티브를 살려주세요.”

마치 버키의 말에 대한 대답처럼 어둠이 출렁였다. 버키는 자신의 뺨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더운 공기를 느꼈다. 곧 머리카락이 사락사락하게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되었고 회당 안의 태피스트리가 회오리치는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며 내는 팽팽한 소리가 들렸다. 버키는 다시금 공포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네가 받은 사랑이 너의 소원의 대가로 쓰일 것이라』

그것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오르간이 울리는 것처럼 진동했다. 버키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 귀한 것이, 자신이 받은 사랑이라는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그것만이 짙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또한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몸조차 휘청거릴 정도인데도, 그것의 망토는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제가 받은 사랑이라면,”

『환난과 궁핍 속에서 자신의 몸과 같이 너를 사랑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다. 그것을 앗아갔으니 그는 다른 이를 네게 하듯이 사랑하리라』

철판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망토의 팔 부분이 움직여 버키의 등 뒤를 가리켰다. 거대한 목소리가 무게를 지니고 눌렀다. 

『고결하고 귀한 것이 바쳐졌으니 축복 받고 사랑 받는 자여, 너의 소원이 이루어져 그는 여기 있지 않고 네가 돌아온 곳에 있으니 가라』

버키는 그 목소리의 무게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두 팔로 얼굴 앞을 막았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에 지지 않을 만큼 합창과 같이 커지고 그 안에 숨막히게 하는 짙은 향기가 퍼졌다. 버키는 눈을 찡그려 앞을 제대로 보려 애쓰며 비틀거리고 일어나 소리쳤다.

“제 소원이 이루어진 건가요? 스티브는 살 수 있나요?”

그리고 그 순간 꽉 찬 항아리가 깨지는 듯한 퍽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어둠이 걷혔다. 버키는 펄쩍 몸을 뒤로 물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혼자 회랑의 의자 사이 복도에서 서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도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비로소 눈을 뜬 것처럼 주변이 보였다. 기름 등불은 유리 안에서 조용히 1층을 비추고 있었고 귀를 멍멍하게 하던 바람은 씻은 듯이 사라져 고풍스런 자수 태피스트리는 한 점의 흩날림도 없이 그 자리에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노숙자가 드르렁대는 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었지만 앞에서 기도드리고 있던 그림자는 사라졌다. 사위는 고요했고 그곳에서 깨어 있는 자는 버키 반즈뿐이었다. 공포와 불안이 그의 몸 전부를 차지하고 차갑게 핏줄을 타고 흘렀다.

버키는 더듬더듬 의자를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모 마리아와 천사가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는 여전히 어두운 가로등 불로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아까 보았던 그것과는 다르게 부드러우며 엄숙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끔찍한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꿈인지 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버키는 양손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방금 그것이 꿈이 아니라면 천사가 아니라 악마를 본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악마가…… 스티브를 살려준다고 했다. 스티브가 준 사랑을 대가로. 말장난처럼 느껴지면서도 말 안에 담긴 어떤 섬뜩한 예감에 버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금 맡게 된 여름밤의 공기는 청량하고 부드러웠지만 버키는 목 아래가 차갑고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가 입원한 병원으로, 앓아누워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잠시 기도를 하러 왔을 뿐이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우두커니 서서 되돌이켜 생각하고 있는 사이 스티브가 숨이 넘어가 버리고 혼자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왔을 때처럼 있는 힘껏 달리려고 했지만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려 걷기조차 힘들었다. 막 태어난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몇 걸음 부들부들 떨며 발걸음을 옮기고 교회의 계단을 내려간 후에야 힘이 돌아왔다. 그를 손아귀에 쥐고 있던 악몽에서 빠져나온 듯 했다. 그대로 버키는 다시 달렸다.

스티브 로저스의 병실까지 내처 달려 올라간 후에야 버키는 다시 현실에 완전히 발을 디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스름하게 등을 켜놓은 병원의 복도는 건조하고 눅눅한 약 냄새가 났다. 소리내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간호사가 꽂아놓은 화병의 꽃, 고통스럽게 뒤적거리는 통에 구겨진 이불을 덮은 스티브 로저스의 가느다란 몸이 보였다. 창문을 닫아놓은 병실은 후덥지근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버키는 의자를 끌어 스티브의 침대 옆에 앉았다. 여전히 고통에 잠겨 작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스티브를 보자 초현실적인 존재를 만난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좀 더 현실적인 것, 그전부터 버키가 마음에 두며 겁내하던 것이었다. 스티브를 영원히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꿈을 꾼 게 틀림없어.’ 버키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봐, 기적은 없잖아, 다 꿈이었어. 얘가 일어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버키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울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버키 반즈를 사랑하지 않는 세계는 대체 어떨까? 그 애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천식환자용 담배 연기를 마시고 싶어질 때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곳일까? 포옹하고 그의 정수리에 코를 파묻으며 위해서는 변명이 존재해야 하는 세계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스티브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세계는?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히,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이 잦아들어 영영 사라지는 세계보다는 나은 곳일 것이다. 

버키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바로 옆에서 한참을 낮게 훌쩍거려도, 그토록 소리에 예민하던 스티브는 약에 취해 조금의 움찔거림도 없었다. 바깥의 어딘가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의심되는 빛이 잠시 밝게 창문을 비췄다가 타이어 끄는 소리를 내며 곧 사라졌다. 버키는 일어나 스티브의 마르고 까칠한 입술에 짧게 입맞춤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티브의 입술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버키는 다시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의사나 간호사의 눈이 아니더라도 스티브가 죽음의 땅에 한 발자국 걸쳐 있다는 사실은 뚜렷했다. 

그러나 스티브의 숨소리는 한결 편해져 있었다. 




이튿날 스티브는 바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더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임종은 집에서 맞으라는 배려였지만, 그 다음부터 스티브는 상태가 좋아져 일주일 후에는 자신의 발로 걷고 아침 식사를 식탁에서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한 처음에 버키는 조금 자신이 빌었던 소원과 대가를 의식하며 샅샅이 살폈다. 

‘혹시.’ 여전히 스티브가 버키를 보는 눈은 안도로 가득 차 있고 다정했다. ‘혹시 진짜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대가를 받아갔다면……’ 

그러나 스티브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이 선을 긋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를 경멸하지도 않았다. 물수건으로 피부를 닦아줄 때도 피로해하고 머쓱해했지만 그렇다고 버키의 손을 쳐내지도 않았다. 얌전하게 버키의 손길을 받으며 고맙다는 말을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 게다가 병은 말끔하게 낫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아주 힘겹게 목숨을 이어나가는 정도였고 하루에 딱 한 걸음씩 좋아졌다. 당장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그래, 어젯밤보단 좋아졌네.’하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밤새 기침을 하는 일이 잦아들고 세마디 정도는 이어서 말할 수 있게 되고 약을 먹으면 열이 떨어지는 정도. 

만약에 대가를 가져갔다면 이렇게 천천히 스티브를 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단지 스티브 로저스의 강한 운과 건강이 의사조차도 포기한 죽음의 나침판을 돌린 것이다. 만일 악마가 간섭해 스티브 로저스의 생명을 건져냈다면 그의 기나긴 병력, 천식이며 부정맥, 류머티스 열, 심장질환, 신경쇠약과 색맹까지도 모조리 없어졌을 것이다. 악마가 어떻게 하겠다고 말은 하지 않았고 뜻모를 소리만 늘어놓은 뒤 사라졌지만 버키는 순진하게 그렇게 믿었다. 병 때문에 언제나 스티브 로저스의 목숨은 폭풍 앞에 놓인 촛불과도 같았고 버키는 스티브가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을 바랐으니까. 마침내 버키는 교회에서의 그것은 악몽일 뿐이라고 자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주일간 속앓이를 하며 간병하던 버키가 다시금 활기차게 돌아오는 것과 발맞추듯이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고, 거의 폐를 뜯어내던 기침은 잦아들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일어나 식사를 할 만하게 되자 버키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갔다. 이제 그 옛날 사라 로저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를 정도밖에 되지 않은 스티브 로저스를 혼자 두고 가야 했을 사라 로저스를. 그는 버키가 놀러오는 것을 매우 반가워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스티브를 혼자 두지 않을 누군가의 존재를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심장발작으로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진 스티브, 열 때문에 비틀거리다 어딘가에 머리를 찧고 그대로 의식을 잃은 스티브, 그런 그럴 듯한 상상이 끈질기게 들러붙었으니까. 

다행히 스티브는 터무니 없이 야무져서 자기 혼자 이마와 목에 물수건을 갈며 컨디션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버키가 막 돌아왔을 때에는 복숭아 절임과 달걀과 오이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버키는 그 완고하게 등을 꼿꼿하게 세운 옆모습을 보자 마침내 안심했다. 스티브 로저스가 완전히 사신의 손에서 놓여난 것이다. 

버키는 활짝 웃으며 뛸 듯이 달려가 두 팔로 스티브의 목을 감아 그의 작은 머리통을 품안에 꼭 넣었다. 

“나 왔어!”

버키가 방방 뛰는 통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스티브가 마치 어색하다는 듯이 버키의 팔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만해, 숨막혀.”

버키는 바로 팔을 풀었다. 아직 열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 스티브의 목덜미에는 열이 있었지만, 목에는 힘이 있었고 분명하게 나아지고 있었다. 버키는 싱글거리며 스티브의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때, 아직 두통 있어?”

“조금.” 스티브가 짧게 웃었다. “진저에일 펀치 마시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좀 나으니까 술부터 마시고 싶다고 하고 아주 잘 한다,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가 뭉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누가 알콜을 좋아한대냐, 더워서 시원한 걸 마시고 싶은 것 뿐이야.”

“그래, 그게 알콜이라 이거지?”

버키의 이죽거림을 쌩 넘겨버린 스티브가 한숨을 쉬었다. 

“땀도 계속 많이 흘렸는데 씻지도 못하고……. 이것만 먹고 씻어야지.”

“같이 목욕 할까?”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노려보던 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기막히다는 듯이 버키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다섯 살배기 애도 아니고, 지금까지 해준 걸로 충분하거든.”

버키는 콧방귀를 뀌었다. 같이 씻는 게 뭐가 어떻다고 저렇게 펄쩍 뛰어? 내가 뭐 아직도 아픈 애를 붙들고 욕실에서 한 판 뜨자고 했나, 그냥 좀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잊어버리려고 했던 뚜렷한 목소리가 단 한 번도 잊혀진 적 없다는 듯이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속삭였다. 네가 받은 사랑이 너의 소원의 대가로 쓰이리라. 버키의 환한 미소가 차츰 거두어졌고 빈정거리려던 혀가 얼어붙었다. 얼굴 정중앙에 꽂히는 깨끗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얼떨떨해서 순간순간 머리가 돌지 않고 생각이 끊겼다. 꿈이 아니었나? 그 모든 게 악몽의 파편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래서 소원이 이루어진 건가? 심장 한 편이 써늘해지는 생각이었다.

“그건 뭐야?”

스티브가 샌드위치를 작게 베어물며 물었지만, 혼란스럽게 그 날 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생각하며 곱씹던 버키는 뒤늦게 스티브가 짜증을 내며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 갔을 때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스티브는 편지를 뒤집어 주소를 확인해보고는 펴보지도 못한 채 한숨부터 쉬었다. 

“아, 입원비……. 이걸 열자마자 차라리 죽는 게 나았겠다 싶을 만큼 병원비 청구된 거라면 어떡하지.”

따귀를 맞은 듯이 버키의 고개가 올라갔다. 버키가 스티브를 바짝 노려보며 높은 목소리로 따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농담이야.”

버키는 입을 꽉 다물었다. 스티브는 손으로 편지 끄트머리를 뜯어내고 조심스럽게 청구서를 펴들었다. 그로스 병원의 사인이 들어간 청구서는 고스란히 두달 치의 월급을 요구하고 있었다. 버키는 퇴원할 때 금액에 대해 대강 들었기 때문에 얇은 종이 너머에 얼마나 큰 숫자가 쓰여있을 지 알았다. 

스티브는 병이 도진다는 식의 표정을 짓고 청구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가셨는지 복숭아 절임을 잘라놓은 숟가락은 다시 들지도 않은 채로 그는 한동안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불안에 휩싸였으면서도 보다못해 버키가 스티브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걱정 마. 나 모은 돈 있으니까.”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더 낯선 것이었다. 

“내 병원비를 네가 왜 내. 됐어, 너한테 더 빚지고 싶진 않으니까.”

“왜냐니……, 우리 사이에.”

“됐다니까. 너 결혼할 때 써야지.”

“내가 왜 결혼을 해?”

버키가 얼빠져서 되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스티브는 태연하게 “그럼 안 할 거야?” 하고 되물으며 청구서를 접었다. 만일 친구 사이에서라면 별 놀라운 반응도 아닐 것이다. 버키 역시도 밖에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대체로 늦었다며 어서 서둘러야겠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그럴 수는 없었다. 버키 반즈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식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버키는 창백하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스티브는 여전히 청구서를 생각하며 어떻게 지불해야 할 지 근심스럽게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나 버키가 확신하지 못하고 좁은 집 안을 빠른 발걸음으로 서성거리자 스티브는 여전히 청구서에 정신이 팔린 표정이면서도 버키를 곁눈질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금빛 자수가 드리워진 사파이어처럼 푸른 두 눈동자에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익숙하고 친애의 정이 가득한 눈동자를 보자 불안이 사그러들었다가 다시 폭발하듯 터졌다. 무슨 일이 있어. 당연히 있어. 그런데 너는 아무 것도 모르지. 

어느새 송두리째 빼앗긴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해야 스티브 로저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게 과연 옳기는 할까? 심장이 두려움으로 졸아들었고, 몸속에 불안함이라고 쓰여있는 풍선이 생기고 그것이 한 번의 숨을 내쉴 때마다 놀라운 기세로 점차 부피를 키워가는 듯 했다. 목구멍이 막히고 폐가 눌리는 기분이었으며, 그리고 실제로도 숨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버키는 스티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테이블 다리를 노려보다 현기증으로 조금 비틀거렸다. 

“버키?”

마침내 스티브가 끔찍한 청구서보다 눈앞의 혼란스러운 친구에게 신경을 돌렸다. 

선량한 친구, 그의 둘도 없는 친구. 여전히 그를 친구로는 생각해주고 있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버키는 그런 확신을 얼핏 받았다. 자신은 여전히 스티브 로저스를 사랑하고 있었고, 분명히 스티브 로저스는 다시 좋아해줄 것이라는 확신. 다시 나를 테리터리 안쪽에 넣어주고, 세상에 다시 없을 파트너로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어 맞대고 손바닥을 마주잡으며 “난 너하고 끝까지 함께 할 거야(I’m with you till the end of the line),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라고 약속할 거야. 갓 잘라 향기가 진한 장미를 네 커프링크스에 달아주고, 시든다 해도 또 한 번 꽂아주겠다고, 그게 또 시들어도 또 새롭게 꽂아주고……. 그것이 버키 반즈와 스티브 로저스가 영원을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괜찮아? 나보단 네가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러나 스티브의 걱정을 들으며, 버키는 이것이 얼마나 크고 아무 의미 없는 희망인지 스스로 깨달았다. 버키는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고 목을 거칠게 문질렀다. 창백한 피부 위에 손톱으로 긁은 붉은 손자국이 났다. 이미 버키 반즈는 도착선 저 너머에 있고 스티브 로저스는 아예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다. 이처럼 불균형한 감정으로는 사이가 어긋나기만 할 뿐이다. 또한 진짜로 그 날 밤의 일로 사랑과 생명을 등가교환했다면 다시금 사랑을 찾을 때 생명도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움이 버키의 등골을 떨게 했다. 

이미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버키는 스티브 로저스의 생명과 맞바꿔 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사랑을 잃은 것이다. 






“너도 참, 결혼해서 나갈 줄 알았는데 직장 때문이라니.”

문지방에 삐딱하게 기대서 팔짱을 낀 스티브가 한숨처럼 말했다. 버키는 등을 돌리고 가방 하나에 짐을 욱여넣으며 고개만 까딱했다. 이불만 따로 동여매놓자 나머지는 빌려온 여행 가방에 어떻게든 들어가는 듯 했다. 이불이나 옷을 제외하고서는 가져갈 것은 거의 없었다. 생활용품은 당연히 스티브와 버키가 공유하던 것이었다. 그것이 당연했다. 룸메이트가 아니라 둘이 서로 사랑을 맹세하고 결혼한 사람들처럼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예전처럼 옆집도 아니고 만나기 힘들어지겠네. 아쉽게.”

스티브가 중얼거렸고, 버키는 잠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듣고 있으면 그대로 착각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티브의 아쉬움과 자신의 아쉬움이 결이 달랐다. 몇 주간 버키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사랑과 우정은 틀렸다. 처음 스티브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버키는 자신의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매우 헷갈렸고 그것이 조금 더 애틋한 우정이 아닐지 의심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온도의 차이는 뚜렷했다. 스티브가 버키에게 하는 것이 우정이었다. 버키가 스티브에게 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혹시라도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결국 스티브에게 구걸하고 매달리고 말리라. 

버키는 뼈에 조각이라도 하듯 똑똑하게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말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 그 사랑은 이제 기억조차 없어.’ 

스티브와의 사랑이 끝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자연소멸되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었으며,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다. 그저 스티브의 사랑이 버키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것처럼. 

스티브의 생명과 사랑을 저울질하면 당연히 생명이었다. 버키는 벌어지려는 가방을 모아 닫아 간신히 단추를 채우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걸 되뇌여도 가슴의 아픔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버키가 유난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색한지 계속해서 한두 마디씩 말을 걸었다. 

“그래도 침대 하나 치우니까 꽤 넓다.” 스티브가 천천히 덧붙였다. “집이 이렇게 삼각형이 아니라 사각형만 됐어도 훨씬 넓었을 텐데.”

“집세도 훨씬 비싸졌겠지. 주인이 옳다구나 하면서 두 배로 올렸을 걸.”

“그럼 감당 못하지. 그동안도 좁긴 해도 월세를 둘이 같이 내서 편했는데.”

스티브가 말하곤 작게 웃었다. 버키는 따라 미소지으려 애쓰며 야릇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스티브가 한 말은 예전에 스티브와 버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변명이었다. 사회적으로 동성애자는 말살당한다. 교화해야 한다며 정신병원에 처넣거나 고문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Q. 왜 남자 둘이서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러한 질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 버키는 여러 가지 변명을 고안했다. 가장 그럴듯한 것은 역시 돈 문제였다. A. 두 사람 다 고아로 책임질 가족이 없으며 월세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스티브는 그 변명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 남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꾸며낸 입발린 말이 진실이 되었다. 

버키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존재에게 감사한 만큼 저주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다. 왜 이렇게까지 스티브의 기억까지 덧씌웠는지. 왜 이렇게 여전히 스티브는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왜 자신의 사랑은 앗아가지 않았는지. 코가 시큰거리고 눈가에 순식간에 무르게 열이 번져서 버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육체의 아픔이 정신의 아픔에 쏠리는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럼에도 버키는 완전히 참지 못하고 악마에게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또한 스스로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 자신에겐 빛나고 고귀한 것이 스티브의 사랑밖에 없었는지. 

스티브가 몸을 돌리고 문 옆에서 이불을 둘둘 말아 끈으로 묶어놓은 뭉치를 들었다. 

“이것만 챙기면 돼?”

버키는 돌아보지도 않고 여행 가방과 씨름하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응.”

그 대답을 하고도 조금 더 미적거린 후에야 버키는 여행 가방을 두 개를 들고 일어섰다. 그릇이며 냄비 같은 것도 스티브는 반을 나누려고 했지만 버키는 딱 잘라 거절했다. 도저히 스티브와 함께 쓰던 그릇을 혼자서 쓸 자신이 없었다. 스티브가 이 정도는 가져가라고 우겨서 이불도 들고 가지만 그마저 곧 버려질 것이다. 

버키가 곁을 스쳐 나갈 때,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작게 말했다. 

“네가 없으면 외로울 거야.”

버키는 문간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속에서 불길이 갑자기 홱 타올라서 내장이 비틀리는 듯 했다. 외로울 거라고?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떠나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뭘 잃고서 여기서 싸움에 진 개처럼 떠나는지 모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짜증을 부리고 외면하는지 모르지, 내가 널 사랑하는지도 모르잖아. 아무 것도 넌 모르잖아. 입술이 화로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버키가 분노로 붉어진 얼굴을 홱 스티브에게 돌렸을 때, 스티브가 여전히 문지방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화는 봄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쉽게 수그러들었다. 

스티브의 정수리가 보인다. 짙은 금발의 아래에서 반듯하게 뻗은 이마, 짙은 눈썹과 눈썹뼈, 그 아래에 곧게 뻗다가 살짝 구부러진 복싱 선수 같은 콧날. 그런 것만 보아도 버키는 스티브가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만이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어째서 자신만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을까 날뛰고 싶다가도 스티브의 이런 모습을 보자 그저 애달픔만이 남았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랑을 잃고 이가 빠진 것처럼 기운없이 그 빈 자리를 더듬는 스티브. 

버키는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지으면서 스티브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채서 품에 끌어당기듯이 어깨동무를 했다. 

“야, 솔직히 여기까지 전철로 한 시간도 안 걸려. 일이 거기 있으니까 그렇지 솔직히 브루클린에 아는 사람도 더 많고, 너도 있고, 당연히 여기로 자주 놀러올 걸. 그리고 너 나한테 병원비 갚기로 했으니까 돈 받으러라도 와야지. 안 그래?”

스티브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자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창백한 얼굴에 드디어 약간의 화색이 돌았기 때문에, 버키는 분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서글픈 빛을 띤 기쁨이 차지하는 것을 느꼈다. 사랑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는 스티브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스티브가 떨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일부러 조롱조로 말했다. 

“맞아, 그래. 너 돈 받고 싶으면 꼬박꼬박 오는 게 좋을 걸.”

버키가 입술을 살짝 물고 웃었다. 몸은 바짝 붙어 있었고 친숙한 스티브의 몸 냄새가 났다. 좋은 향기. 만일 여기에서 버키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아, 수없이 달라지겠지. 스티브 로저스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무리해서 한 번에 빚을 갚고 다시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허물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회는 턱없이 줄어들고 그 몇 번의 기회에서도 경계심이 서린 대답만을 받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게 낫다. 친구 자리라도 차지한 채로. 

“야, 요앞은 아니더라도 맨하튼 쪽에 코코넛 케이크 파는 데 또 생겼더라. 한 판 정도 먹어줘야지. 네가 사야지? 그치?”

“참 나.”

스티브가 기막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버키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일부러 앞으로 향했다. 스티브를 보고 있으면 자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랑하고 사랑받았을 때처럼 그의 이마에 입맞추고 싶어질 것 같았다. 버키는 자신의 입술을 데우는 스티브 이마의 체온을 알았지만, 고백한다 해도 그 체온을 다시 느낄 날은 오지 않으리라. 스티브가 주는 사랑은 악마가 두 손으로 들고 사라졌다. 영영 스티브 로저스의 마음에 버키 반즈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시 깃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버키는 자신이 바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스티브의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다른 이를 네게 하듯이 사랑하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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