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곤하지 않아요?
- 음?
- 남의 일까지 그렇게 안고 가면, 피곤하지 않아요?


방금 회의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회의실을 빠져나간 뒤 조금 느릿하게 자리를 정돈하던 입사 2년차 야오왕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이라는 평가가 압도적이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배들도 꼼짝 못한다는 입사 2개월차 신입, 양예밍



-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니까.
- 그러니까, 내 일만 하면 누군가가 할 일은 누군가가 하겠죠.
- ..일이 모자라는 것 같아? 그럼 좀 나눠줄까?
- 일이 모자라서 그 일 떠맡으신 거에요?


동그랗게 눈을 뜬 예밍이 왕이 서있는 자리 앞에 놓인 서류뭉치를 들어 휘리릭 안의 내용물을 스캔했다.



- 어이쿠, 이건 영업부 일이고, 이건 생산부 일이고,
- 내려놓지?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왕이 예밍이 잡고 있는 서류의 반대편을 잡았다. 예밍은 입술 끝을 끌어올려 예의있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서류에서 손을 떼며 손바닥을 내밀어보였다.


- 누가 말해준 적 없어요? 그거, 좋지 않은 버릇이에요.
- ...이봐, 신입.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고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며 회사 생활을 하던 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나온다. 조금 열이 몰리는 것 같은 왕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던 예밍은 한걸음 뒤로 물러셨다.


- 영업부랑 생산부 일은 저 주세요.
- 왜 참견이야.
- 심심해서요. 성실한 선배님이 신입이 놀고 있는 걸 보고 계시지는 않겠죠?


다시 한번 딱딱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예밍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을 나간다. 하아. 한숨을 쉬며 괜히 서류뭉치를 한번 뒤적거렸다가 회의실을 따라나서는 왕이었다.





- 황팀장님, 이건 어떻게 하는거에요? 여기 이 자료 정리된 거는 누구한테 받아요?
- 아, 누가 얘 좀 치워. 장주임, 얘가 왜 이걸 하고 있어. 장주임이 할 일 아니야?




예밍이 자신의 덩치의 절반밖에는 되어보이지 않는 영업부의 황팀장 뒤를 쫓아다니며 질문을 퍼붓고 있다. 왕에게서 자신만만하게 영업부와 생산부의 일을 받아가더니 2개월 신입이 할 수 있을리가 없지.



- 양예밍씨. 왜 팀장님을 귀찮게 하는 거야.
-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영업부 팀장님께서 제일 많이 아실 것 같아서요
- 하...가져와봐, 예밍씨.


정말 하나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서류를 내미는 예밍을 올려다보던 장주임의 시선이 반대편에 앉은 왕에게로 옮겨가자 예밍이 그 시선 사이를 막듯이 끼어들며 몸을 숙였다.


서류에 빨간 줄이 빼곡한 것을 보던 장주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주고 가. 이건 내가 할게.
- 그래주시겠어요?
- 누가 이런걸 신입한테 시켜.
- 그러게요. 이건 장주임님 담당이신데,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죠.



보조개까지 보이며 밝게 웃는 예밍을 뭐라 할 수도 없는 장주임은 짜증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채 예밍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날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생산부 강팀장이 예밍을 피해 도망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커피 사주세요.]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울리고 도착한 웨이신 메세지.

[저는 카페라떼 좋아해요.]

[지금도 괜찮은데요.]

[선배님?]

[바쁘세요?]



1초 간격으로 도착하는 메세지에 왕이 뭐라고 대답하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다.



갑자기 더 강한 진동으로 울려대는 핸드폰. 음성통화를 받아야 하나...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 선배님!
- 왜?
- 커피 사주셔야죠.
- 어째서?
- 제가 일 도와드렸잖아요.
- 예밍씨가 가져간 일 장주임하고 진주임이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 그러니까요. 선배님의 누군가가 해야하는 일의 누군가를 찾아줬으니까요.



제법 길게 설명을 붙여오는 예밍의 뻔뻔함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지금 사주세요.
- 내가 어디있는 줄 알고 지금이야.
- 방금 앞머리 만지셨죠?


마치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히 이야기하는 예밍에 놀라 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럴리가 없잖아. 왕은 자신의 집 거실에 있는데.


- 뭐야, 너
- 지금 둘러보신 거 다 보여요.
- 스토커야, 너?
- 진짜 맞췄나봐. 하하하하


갑자기 웃어버리는 예밍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어 왕은 통화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장난쳐서 죄송합니다.]

[됐어.]

[화내지 말아주세요]

[됐어]

[선배님은 웃는 얼굴이 제일 예뻐요. 내일 회사에서 뵈요]



답장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이제.






- 여기 물이요. 괜찮아요?
- 아...고마워, 예밍씨.

예밍이 옆자리에 앉은 린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수건도 챙겨준다.

- 예밍씨 자상하네
- 그러게요

예밍을 힐끗 쳐다보고 왕은 옆자리의 첸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안주도 없이 맥주만 들이키고 있다.


화장실을 갔다가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왕은 잠시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식당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옆 건물 앞에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 괜찮으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이은 이마에 닿는 서늘한 손바닥의 감촉에 왕이 눈을 떴다.


- 괜찮아. 바람 좀 쐬는 거야.
- 많이 마시던데. 선배님 술이 꽤 세네요.
- 그런 편이지.
- 얼굴색도 그대로고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의 바람보다 차가운 예밍의 손바닥이 왕의 뺨 위에 닿았다.
대답없이 눈만 깜빡.깜빡. 천천히 감았다 떴다.



- 원래 이렇게 스킨쉽이 익숙해?
- 선배님도 익숙하신 것 같은데요?


예밍이 웃으며 왕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놓는다.


-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푹신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고개 좀 숙여봐


왕이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예밍의 얼굴로 손을 뻗자 예밍이 손목을 잡아왔다.
고개를 숙여 왕과 눈높이를 같이 한 예밍은 여전히 손목을 놓아주지는 않은채였다.


- 술 마셔서 그래요. 이해 좀 해주세요.
- 신입이라 봐주는 것도 석달이 끝이야.
- 시한부 인생 통보받는 기분이에요. 왜 석달만 봐줘요
- 석달이면 이제 앞가림은 알아서 해.
- 음...그럼 저 석달 참았는데 진도 나가도 되는거에요?
- 뭐래.


왕은 잡혀있는 손목을 비틀어서 빼려고 힘을 주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 아파. 손 놔.
- 돼요?
- 뭐가.

다시 한번 눈높이를 맞춰오며 예밍이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미소지었다.

- 제 앞가림이요.
- 알아서 해.
- 네.



하얀 피부에 생긴 손가락 자국이 제법 오래 남아있었다. 예밍은 그렇게 힘주어 잡지 않았던 것 같은데, 흰 피부의 붉은 자국은 회식 자리로 돌아가서 앉을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왕은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목을 감싸고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 예밍씨 인기 많은데?
- 네?
- 저기.


첸의 눈짓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예밍이 앉은 테이블에 여직원들이 몰려있는게 보였다. 예밍은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물을 따라주고, 음식도 챙기고, 술에 취한 직원에게는 계속해서 말도 걸어주고 있다.


- 친절하네요.
- 일머리도 있고, 싹싹하더라고.
- 건방지기도 하고.
- 우와. 야오왕씨한테 그런 평이 나올줄이야. 하하. 양예밍씨 회사 생활 힘 좀 들겠는데?


왕은 피식 웃어보이고는 맥주잔을 비웠다.



- 잘 부탁드립니다.

택시에 마지막 여직원을 태워보내고 택시 기사에게 인사까지 마친 예밍이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왕은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고 남아있는 다른 직원들이 없음을 확인하자 왕의 곁으로 가서 선다.



- 저희도 가요.
- 아직 안 갔어?
- 같이 가려구요. 저희 집 선배님 집 근처에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이야기하는 예밍을 잠시 쳐다본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인데 택시를 타기에는 밤이 너무 좋았다.
조금 더 쌀쌀해진 바람이 기분좋게 불어오고 낮게 깔린 불빛과 조용해진 거리를 걷는 기분이 좋았다.
왕의 가벼워진 기분을 읽기라도 한 듯, 예밍도 아무말 없이 왕의 옆에서 걸어갔다.



- 생각보다 머네요.


30분쯤 걸었을까. 왕은 역시 아까 택시를 탈 걸 그랬나...라는 생각을 잠깐 하던 중이었다.
마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왕은 예밍을 돌아다보았다.


- 피곤해?
- 아니요, 선배님이 힘들어보이셔서.
- 아...괜찮아.
- 그래도 산책하기 좋은 밤이네요.



신기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거슬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가 일순 거리를 두고 마음을 읽어온다.



- 나뭇잎 소리 좋아해요.
- 응?
- 흔들, 흔들. 바람 불때 들리는 소리요.



왕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구름 사이로 사라질 것만 같은 초승달이 예밍의 머리 위에 걸려있고, 길가의 키 큰 나무들이 흔들흔들 소리를 내고 있었다. 끊어질 듯 텀을 늘여가는 지나치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고요한 밤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 원래 그래?
- 뭐가요?
- 누구한테나 다 친절한거
- 그래서 싫었어요?


어쩌면 저런 말을 뻔뻔하게 하는 거지? 싶어 왕은 웃음이 나왔다.


- 내가 왜.
- 선배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건데, 싫었으면 안할게요.
- 거짓말하지 말고.


- 술을 잘 못 마셔요. 그래서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 챙기는 일이 많아서 그런 것 뿐이에요.
- 착하네.
- 선배님도 챙겨주고 싶었는데.
- 그럼 지금 해.
- 네?
- 괜히 걸었어. 택시 타자고 할걸.



왕은 술이 늦게 술에 늦게 취하는 편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1시간쯤 지나면 취기가 몰려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왕이 술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지만 본인은 마치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고는 했다.



- 설마...지금 취한 거에요?
- 응!!!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기다 콧소리까지 섞인 말투. 예밍을 올려다보며 짓는 눈웃음
왕이 예밍의 팔을 잡아당겨 어깨를 내리더니 어깨동무를 해왔다.


- 너무 높아. 넌 왜 이렇게 키가 커?
- 반대로 하면 더 편한데. 해도 되요?
- 왜 자꾸 물어봐, 그냥 해.


또 눈웃음. 예밍은 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역시 웃는 얼굴이 제일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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