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여.”

“응?”

“저기..아니, 야. 너..솔직히 말해봐.”

“뭐를..?”

“너, 왜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호수가 유명한 호수공원. 파릇파릇한 스무 살. 신입생인 호우는 현재 세 번째 마주친 남자랑. 며칠 전에 통성명만 한 ‘태호’라는 이름을 가진 수상한 남자와 호수공원의 유명한 카페에 마주앉아있다.

 

‘이호우.’

 

성은 이 씨요, 이름은 호우라네. 호우의 특이한 이름은 범 호(虎)에 만날 우(遇)를 썼다.


특이한 이름은 더 특이한 태명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동시에 꾼 꿈에서 커다란 백호 한 마리가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부모님께 나타나서 태어날 아이는 딸이고, 그 아이는 어른이 되면 커다란 호랑이를 만날 특별한 운명이라고 했다는 특이하다면 아주 특이한 꿈.


그 때문인지 호우는 호랑이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동물원에 가도 호랑이를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봤다. 호랑이를 만날 거라는 이름 때문인지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아니, 웬만한 동물들은 호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동물을 좋아하는 호우는 그게 짜증나고 불편한 점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호우와 태호는 며칠 전 우연히 만난 사이다. 일주일전에 카페에서 처음 본 사이. 좀 더 보태자면 겨우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는 애매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둘이 분위기 좋은 카페에 다정히 마주앉아있는 것은 둘 사이의 풀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만남이 우연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였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서는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건의 시작은 일주일전. 카페에서 우연히 태호를 만난 것이었다.

 

“앗! 내 주스!”

“..어, 괜찮으세요? 치우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아, 네..”

 

오렌지주스를 한입도 못 마시고 다 쏟아버려서 그게 너무 불쌍해서 치우는 것을 도와줬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면서 웃는 그가 너무 어린애 같아서 더 안쓰러울 뿐이었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닷새 전에 알바를 하는 편의점에서 또 만났다.

 

“저기..이거 다섯 개, 결제해주세요..”

“..네.”

‘블랙카드? 재벌집이었어? 그래서 잘 쏟았구나..그런 걸 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근데 빵은 왜 사지?’


“힝..”

“..?”

‘100만원을 인출..? 현금을 저렇게나 가지고 다닐 일이 있다고?

 

“저, 저기..”

“네?”

“혹시..빵 사오고, 돈 가져오라고 했어요?”

“..네에.”

“그럼 가져가지 마요. 돈도 뽑지 마요. 신고했으니까, 기다려요. 제가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절대로! 정말 감사합니다!”

 

블랙카드를 꺼내기에 재벌 집 아들이라도 되는 건가 싶어서 지켜보다가 인출기에서 100만원이 넘게 꺼내는 것을 보고, 또 빵을 다섯 개나 사는 걸 보고 한눈에 ‘돈을 뜯기고 있구나.’싶어서 또 도와줬다. 


그때도 태호는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그냥 말버릇인가 싶었다. 이때 통성명도 했다.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 태호!”

“..태호? 설마..성이 태고, 이름이 호예요?”

“아뇨, 은태호에요. 성이 은, 이름은 태호. 그쪽은?”

“이호우예요. 성은 이, 이름은 호우.”

“호우..그렇구나!”

 

그리고 오늘. 또 마주쳤다. 호수공원에 산책을 왔다가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는 걸 발견하고 또 사고를 칠까 싶어서 지켜봤다.

 

“야호! 호수다!”

“..? 태호..?”

 

‘이정도면 우연 아닌 것 같은데..왜 여기 있는 거지? 우리 대학 근천데..? 하긴, 항상 대학 근처에서 마주치긴 했지..’

 

그리고 역시나, 또 사고를 쳤다. 호수의 잉어를 보려고 고개 숙이다가 깊기로 소문난 호수에 빠지려는 걸 뒷덜미를 잡아 겨우 막은 것이다.

 

“어, 어..!”

“..! 태호!”

“으악!”

“하, 하아....죽으려고 작정했어요?”

“아..호우..? 고,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아..이제 말 놓는 건가..?”

“흑, 흐어엉..고마워어...흐윽..”

“아, 아냐. 울지 마..”

 

이때도 태호는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다. 너무 고맙다며 울기까지 했다.

 

‘확실히, 100% 순수한 우연은 아니지. 그런데 나를 쫓아다녀서 얻는 게 있나? 그냥 우연인가? 아닌가..아, 모르겠네.’

 

호우는 이제는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이끌고 카페에 들어왔다. 솔직히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기도 해서 자리를 피할 목적도 있었다.

 

“뭐 마실래? 내가 사줄게. 그거 마시고 울음 그쳐.”

“웅..난 오렌지주스..”

“.....”

 

지금까지는 자꾸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면 또 사고 칠 것 같아서 마주칠 때마다 도와줬지만, 그의 말마따나 ‘은혜’를 베풀었지만.


이대로는 찜찜했다. 말마따나 저가 태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면, 더 이상 나타나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아무것도 모르긴 하지만 찜찜하니 경고하는 셈으로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태호와 카페에서 한쪽에는 오렌지주스를, 한쪽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고 마주앉은 호우는 이 해맑은 스토커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야, 스토커.”

“내 이름 스토커 아닌데..난 태호야..이름 알잖아..”

 

“알아. 누가 몰라서 그래? 왜 자꾸 마주치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마주치고 그때마다 내가 널 도와주는 거면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원하는 거라도 있어? 아니면 뭐, 더 도와줘?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너.”

“...정말 우연이라니까, 호우야..물론 나도 너를 세 번이나 만나고, 세 번이나 은혜를 받을지는 몰랐지만..”

“은혜..? 너, 은혜에 목숨 거는 스타일이야? 2021년, 21세기에 무슨 은혜..동화도 아니고.”

“힝..그러지마..”

“하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 전형적인 막내아들 같은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길게 늘어지는 말투.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상한 상황.


호우는 머리가 아팠다. 대학 입학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20번째 생일을 넘긴지 얼마나 됐다고, 만 19세가 된지 얼마나 됐다고..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머리가 아팠다.

 

*

 

그 뒤로 한참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일단 피해자인 호우는 상황파악을 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느라 한숨만 쉬어댔고, 사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태호는 호우의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 대화가 시작되기는 글렀다 싶었다.


호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오렌지주스가 담긴 컵을 꼭, 쥔 채로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과 맞지는 않지만 참 특이한 외모다 싶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연예인도 아닌 사람이 은발에 황금색 눈이라니..심지어 그냥 은발도 아니잖아. 검은색도 섞여있는 은발..플러스로 송곳니모양 피어싱까지. 하나같이..특이하다, 특이해.’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새하얀 은발. 게다가 드문드문 줄무늬처럼 검은색도 섞여 있었다. 렌즈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고양이처럼 빛나는 황금색 눈도 특이했고, 양쪽 귓불에 달린 송곳니 모양 피어싱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도 눈에 확 뛰었던 걸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스토커인지 아닌지 모를 수상한 사람인데. 물론 너무 애 같아서 걱정이 될 판이긴 하지만..’

 

짧은 외모 감상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한 호우는 답답한 느낌에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가만히 있던 태호가 퍼뜩, 튀었다. 놀란 것처럼 파닥이는 폼이 고양이라기엔 강아지와 비슷했다. 생긴 건 고양인데 말이다.

 

“.....”

‘고양이처럼 생긴 강아지네.’

 

침묵이 이어진지 몇 십 분. 이대로는 둘 다 굳어서 동상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역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나마 상황파악과 머리회전이 빠른 호우였다.


태호가 정말 스토커인지 그냥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스토커 사건이 일어나면 주로 피해를 보는 건, 피해자 쪽이니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

“응?”

“네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마주치면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좀 부담스러워. 게다가 매번 도와줘야 하고..”

“응..미안..”

“그러니까 그 전에 확실히 하자. 우연이야, 아니야. 그것부터 말해.”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큰 키와 옷에 가려지긴 했지만 살짝씩 보이는 근육으로 봐서는 전봇대 하나도 때려 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하는 짓은 작고 여린 아이 같으니..이상했다.

 

“아..”

 

그에게 질문을 한 호우는 질문을 해놓고도 막상 그런 약한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져서 아무 상관도 없는 귀를 후볐다. 평소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가지고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투가 꽤 날카로워진 것이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호우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흠, 흠..저기 말이야. 우연인 걸 알았으니 됐어. 네가 일부러 따라다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응.”

“앞으로 또 마주쳐도 돼. 네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널 믿을게. 그 대신, 또 사고 치면 안 된다?”

“..! 알았어..! 완전 알았어! 나 절대로 사고 안 칠게!”

“풋..사고 안 친다는 말을 뭐 그렇게 열심히 해..”

 

달래는 소리를 하니, 역시 꼬리라도 흔드는 것처럼 신나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리는 것이 정말 좀 있는 집에서 자란 막내아들이겠구나 싶어서 괜히 웃음이 나온 호우였다.

 

“그럼, 이제 우리는 친구지?”

“응.”

“아, 다행이다..네가 나 미워하면 어쩌나 싶었는데..다행이야.”

“내가 널 왜 미워해. 우연인 걸 알았으니 됐어. 설사 우연이 아니었다고 해도..네가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친구가 되면 되는 거지.”

 

서로 손가락을 걸고, 이제 친구가 되자는 약속까지 하고나서야 안심이 된 듯 밝게 웃는 태호에 호우는 ‘이런 순수한 애가 무슨 다른 속셈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태호는 정말로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아.”

 

그때, 태호의 양쪽 귀에 달린 송곳니 모양 피어싱이 반짝였다. 그러자 태호는 뭔가 잊고 있었던 걸 기억했다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하고 호우를 불렀다.


“있지, 호우야. 너한테 꼭 말해야 할 것이 있는데..말해도 돼?”

“어, 그래..”


황금색 눈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본 호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촉이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날카로웠던 무의식적인 감각.

 

‘왠지 좀 무서운데..’

 

그리고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달랐다. 소리가 웅- , 웅- , 거리는 느낌이랄까. 다른 소리가 울려서 들렸다.


마치, 태호와 자신이 있는 곳만 그 공간에서 뚝 하고 분리된 것처럼.


뭔가 싸한 느낌에 팔을 문지른 호우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호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태호? 주변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 것 같지 않아?”

“.....”

“태호야..?”

“호우야.”

“응?”

 

태호의 눈이 한 번 더 반짝였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황금색 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아름다웠다.


그 눈을 보느라 호우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태호가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는 사실도.

 

“호우야. 믿기 어렵겠지만..나는 인간이 아니야.”

“..뭐?”

 

그리고 그 몽환적인 환상은..단 몇 분 만에,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태호의 말 한마디로 인해 와장창, 깨져버렸다.

 

“뭐라고..? 내가 자, 잘못들은 거지? 다시 말해봐..”

“난, 인간이, 아니라고.”

 

잘못들은 것이라는 생각에 더듬더듬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한 자신의 말꼬리를 잡아채 훅 들어온 태호의 이전과 똑같은 말에 호우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인간이 아니라니?”

 

조금의 침묵이 후, 호우가 조용히 물었다. 태호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새하얀 은발과 드문드문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서로 섞여 오묘하게 빛났다.

 

“그 머리카락..”

“호우야. 나는..”

 

반곱슬로 되어있는 오묘한 머리카락을 쓸면서 멍한 얼굴을 한 호우와 시선을 맞춘 태호가 입을 열었다.

 

“나는..호랑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호우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인가? 현실일까? 사실은 모든 것이 다 꿈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태호는 호우의 안색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은혜 갚은 호랑이 일족이지.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믿어줘. ‘은혜 갚은 호랑이’이야기는 알지?”

 

태호의 말을 듣는 와중에도 호우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은혜 갚은 호랑이? 내가 아는 그 동화? 덫에 걸린 호랑이를 한 청년이 풀어주었고, 은혜를 받은 호랑이는 그 청년과 어머니를 위해 고기를 계속 가져다주었다는..어릴 때 들은 그 이야기?

 

“내가 아는..그 이야기..?”

 

겨우 입을 열어서 내뱉은 말 역시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다는 뜻이다.

 

“음..아주 정확한 건 아니지만..그래. 우리는 그 호랑이의 후손들이야. 수행을 거듭하고, 대를 이어오면서 점차 여러 도술도 부릴 수 있게 됐어.”

“.....”

“그래서 이렇게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거고, 지금처럼 도술도 부릴 수 있는 거지.”

“..도술? 마법 같은 거..? 지금..쓰고 있다고?”

“응.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들려.”

 

겨우 정신 차리자마자 들은 말이 ‘지금 도술을 써서 둘의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린다.’라는 말이라니. 호우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호우의 어깨가 떨리는 걸 발견한 태호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 놀랐지..하지만 사실이야..”

“아..아니야...아무도 모르는 네 비밀을 생판남한테 밝히는 거잖아. 너도 힘들었겠다..”

 

천성적으로 남에게 관대한 호우였기에 너무 놀라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중에도 태호의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주었다. 태호는 안심한 듯 방긋, 웃었다.

 

“그런데, 태호야.”

“응?”

 

호우가 눈을 부릅 떴다. 이제야 지금 상황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간 덕분이었다. 호우가 조용히 물었다.

 

“..나한테 왜 그걸 말해줬어?”

“아, 그건..”

 

우선, 태호가 왜 자신의 비밀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알아내야 했다. 태호와 자신은 지금까지 겨우 세 번 봤고, 겨우 통성명을 한 사이다. 조금 더 보태면 이제 친구사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사이에 자신의 비밀을 알려줄 정도라면..뭔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비밀을 말해줄 수 있지 않나.


아무리 해맑고, 세상 물정을 몰라도, 자신의 안위와 직결된 비밀을 말해준다는 건 다른 이야기.


필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목숨과도 같은 비밀을 쉽게 말해줄 리 없으니까.

 

“세 번밖에 안 만났지만..네가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일 것 같지는 않아. 내가 아는 넌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난 널 믿어.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믿고 솔직하게 다 말해줘.”

“고마워, 호우야. 그래..내가 너한테 그 비밀을 말해준 건 말이지..”

 

담담한 얼굴로 ‘나는 널 믿으니, 너도 날 믿고 솔직하게 다 말해 달라’고 한 호우에 태호는 긴장이 되는지 송곳니 모양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호우야.”

“응.”

“넌..날 믿는다고 했지.”

“..응?”

 

그리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당황한 호우가 황당함이 서린 얼굴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뭔가 더 큰 비밀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긴장이 되서 그런 거겠지. 호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 해석하다가는 피곤할 테니까. 

이미 충분히 정신없고 피곤하니 그 정도는 넘어가야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꼭 믿어줘야 해..?”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해봐. 뭔가 큰 비밀이 있는 거지? 네가 은혜 갚은 호랑이란 것도 믿었는데 다른 것은 못 믿을까봐?”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울먹거릴 것 같이 울상을 지은 태호를 보면 차마 화를 내거나 거칠게 재촉할 수 없었다. 저 울먹이는 얼굴에 어떻게 화를 낼까. 그 정도로 달래고 나서야 태호는 입을 열었다.

 

“나는..은혜 갚은 호랑이 일족의 셋째 왕자야.”

“아아, 왕자였구나..어쩐지..”

 

‘블랙카드랑 금으로 된 귀걸이랑 반지하며, 귀한 옷차림이랑, 귀티가 나는 얼굴까지..좀처럼 보기 드문 부잣집 도련님이나 할법한 스타일이다 했어.’

 

태호의 첫인상을 속으로 곱씹은 호우가 눈치를 보고 있는 태호에게 눈짓을 했다. 잘 듣고 있으니까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너무 놀란 탓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미 아주 큰 비밀 하나를 들었는데 거기에 하나 더 얹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비밀을 풀어놓은 당사자인 태호가 너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정작 울어야 하는 피해자 쪽이 더 담담해진 것이다.

 

“아..그리고 말이야..은혜 갚은 호랑이 왕족은..받은 은혜를 갚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거든..”

“죽는다고?”

“응. 왕족은 그 피가 강해서 그런 거래..그래서 받은 은혜를 꼭 되갚아야 해.”

 

뜻밖의 괴상한 정보에 놀란 호우가 큰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려다가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내렸다.

 

“그래서?”

“너한테 받은 은혜가 있으니 갚아야 하는데..문제가 하나 있어.”

“뭔데?”

 

태호는 문제가 하나 있다는 말을 뱉어놓고, 달그락거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태호의 손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반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호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걸 왜 자신을 주냐는 얼굴을 한 호우에 또다시 미안한 얼굴을 한 태호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은혜 갚은 호랑이들은..그 중에서도 왕족은 자신에게 대가없이 세 번의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을 해주어야 해. 그래서 말인데, 호우야.”

“응..?”

 

호우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기를 바랐다.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귀찮아지고, 불편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촉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넌 나한테 세 번의 은혜를 베풀었어. 알다시피 나는 은혜 갚은 호랑이 족의 왕족이고..그래서 난 세 번의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해.”

“그, 그래서..?”

“예전부터 왕족들은 대가 없는 은혜를 세 번씩이나 베푼 귀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해. 동성에겐 부를 누릴 수 있도록 금전을. 이성에겐..단 하나밖에 없는 반려의 자리를.”

 

호우는 정말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길,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기를, 태호가 사실은 그냥 사람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태호가 앞에 놓인 반지를 들었다. 그리고 제 손을 들었다. 왼손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호우야. 너만 괜찮으면 내 신부가 되어줄래?”

 

청혼을 했다. 세 번밖에 안 만난 여자에게. 그 별 거 아닌 은혜도 아닌 것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앞에 있는 태호가 흐리게 보였다. 모든 것이 다 일렁이게 보였다. 몸이 점점 옆으로 기울었다.

 

“어? 호, 호우야!”

“호우야!”

 

호우-

 

다급한 태호의 움직임이 느리게만 보였고, 자신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는 웅- , 웅- , 하고 울렸다.

 

“.....아.”

 

‘이게 뭐람..호랑이를 만난다는 게 이런 뜻이었냐고..’

 

결국 쓰러지고, 자신을 안아든 태호의 품에서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호우는 19년 전, 자신의 태몽에 나왔던 그 호랑이를 원망했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거였으면...그런 태몽...싫다고 했을 텐데.


닿지도 않을 중얼거림을 그에게 보내면서 말이다.

 

**

 

“으윽...”

“..아, 깼어?”

 

천천히 눈을 뜨니 익숙한 곳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기숙사도 싫고 통학도 싫다며 일주일 동안이나 부모님을 졸라 겨우 구한 자취방.


그러니까..혼자 있어야 하는 그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을 기절시킨 남자. 태호였다.

 

“아..뭐야..물수건..?”

 

축축한 느낌에 이마를 짚어보니 이마에 물수건이 올려져있었다. 물수건을 내린 호우가 몸을 일으켜서 태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의 왼손약지에는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방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머리는 안 아파, 호우야..?”

“.....”

 

태호는 호우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호우가 깨어나자마자 후다닥 몸을 움직여서 구석에 무릎을 모은 채로 쪼그려 앉아있었다.


너무 놀랐고, 기절까지 한 마당에 화낼 기운도 없는 호우는 한숨을 내쉬고 이리로 오라고 손을 까딱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잠깐 호랑이 왕자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리와.”

“..앗!”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건데. 나, 진짜로 너랑 결혼해야 해?”

 

주춤거리며 가까이 다가온 태호의 팔을 잡아채 홱, 하고 가까이 끌어당긴 호우가 물었다. 태호는 강아지 마냥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미안한데, 그래야 할 것 같아..”

“하아..그게 말이 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한숨을 내쉰 호우가 속사포로 말을 쏘아붙였다.

 

“생각해봐. 우리는 겨우 세 번 봤고, 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어. 게다가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이지. 그리고 내가 아는 거라곤 네 이름하고 정체, 직위밖에 없고. 게다가 우린 서로 사랑하지도 않아. 이대로 은혜인지 뭔지 때문에 날 데려가서 결혼했다가 만약에 너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준 은혜를 갚았으니 그 사람을 다시 신부로 삼을 거야?”

“아, 아니야!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해!”

“그래..네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못해, 그 결혼. 사랑하지도 않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긴 호랑이고 왕자이니까 은혜를 갚기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 될 것 같아? 너는 호랑이니까 그게 될지 몰라도, 난..인간이라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결혼은 못해. 게다가 너는 사람도 아니잖아.”

“.....”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 말이 가슴 깊숙이 박힌듯 태호는 더 이상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죄책감이라도 드는 걸까. 아니면 상처를 받은 걸까.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호우는 울 것 같은 얼굴의 태호를 보며 그 말을 삼켜냈다.


“정말 미안한데, 나는..못하겠어.”

 

매정한 얼굴로 말을 마친 호우가 일어섰다.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일주일밖에 안 봤지만 태호는 좋은 친구고, 같이 있으면 좋고, 또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존재이지만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스무 살밖에 안됐는데 누군가의 아내가 되가 싫었다. 결혼은 너무 일렀다. 그 상대가 사람이 아닌 호랑이라면 더욱. 고작 그 정도 친절을 베푼 것을 가지고 결혼까지 해야 한다니.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없는데 죽기 싫어서 하는 결혼이라면 사양이었다.

 

그 은혜를 갚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도 그랬다. 다른 것으로는 갚을 수 없는 건가? 그 정도의 일 때문에 서로에게 묶이게 생긴 서로의 의사는 없는 건가?


호우는 다정하고 친절하고 정이 많지만 명확한 사람이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태호에게서 느끼는 좋은 감정과는 별개로 현실이 이러하니, 절대로 그 청혼을 받아줄 수 없었다.

 

“..나는 네 청혼을 받아줄 수 없어. 정말 미안해. 다른 사람을 찾아봐.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이 있어서..은혜를 세 번이나 베풀고, 너와 결혼도 해줄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

 

왼손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뺀 호우가 스르르, 팔과 손의 힘을 풀었다. 멍한 얼굴을 한 태호의 손에 반지를 도로 쥐어준 호우가 뒤돌며 말했다.

 

“미안한데, 그만 가줘. 쉬고 싶어.”

“.....미안해.”

 

태호는 몇 번을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곧 그만두고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저것도 도술 중 하나겠구나. 하긴, 문을 열고 나가는 것보다는 저게 더 깔끔하고 미련이 없어 보일 테니.’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말 태몽대로 되는 건가..”

 

실없는 생각과 중얼거림으로 애써 지금까지의 일을 잊어보려던 호우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었던 태호와의 만남 속에 있던 즐겁고, 재미있고, 황당하던 일들과 그때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이불에 얼굴을 묻은 호우는 지금 이 감정이 뭔지, 왜 계속 차오르는 건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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