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의 모습이 한 치도 보이지 않게 썬팅 된 리무진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소리도 없이 고급 빌라 앞에 멈췄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홍콩의 시가지 내에서도 상당한 높이와 비등한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빌라 건물 앞에는 항상 주차 요원과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리무진이 빌라 정문으로 다가오기 무섭게 다가와 자리에 멈춰 도어락을 푸는 소리를 확인하는 즉시 뒷좌석 문을 열곤 허리를 깊게 숙였다.

차 안에 있던 인물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인 후에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대충 코트를 두른 채 주머니에 꽂아두었던 가죽 장갑을 끼던 남자는 매우 훤칠한 미남이었다.

뒷목을 아주 조금 덮을 정도의 검은 머리칼은 덥수룩하지 않게 잘 세팅되어 있었다. 간혹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눈은 한 번씩 시선을 앗아갈 만큼 오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려한 선으로 뻗어나간 콧날의 끝은 그의 고고한 자존심을 드러내기에 충분했고, 그 아래 굳게 다문 입술은 담백하면서도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금욕과도 같았다.

그런 그의 얼굴 전체에는 신기하게도 힘이 가득 들어간 포커페이스와 피곤이 공존하고 있었다. 뒤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운 손짓을 전송하며 남자는 우월한 다리길이를 자랑하듯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건물 내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의 그늘이 더욱 짙게 깔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 혼자 들어서고 나서야 완연한 기색을 표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지 못했다. 빠르게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은 다시 아래에 있을 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베이터의 문 바로 앞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양복의 장정이 가볍게 목례하며 남자를 반겼다. 그를 보지도 않고 지나친 남자의 앞으로 새하얀 봉투 하나가 내밀어졌다.

“뭐지.”

“부고장입니다. 티엔님.”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 봉투를 집어든 남자, 티엔은 복도 끝에 위치하다시피한 자신의 현관문에 지문을 확인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뒤따라오던 남자를 돌아보았다.

“추가 보고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티엔은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리곤 집어든 봉투를 금방이라도 구겨버릴 사람처럼 보낸 이를 확인했다. 동시에 피곤함으로 물들어있던 티엔의 얼굴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내다 본 사람처럼 딱딱해졌다. 그리곤 선 자리에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부 고장은 한국에서 왔으며, 거기에 적힌 이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 명. 한국 최고의 인기배우이자 티엔의 오랜 지인, 그리고 지금은 떠나버린 고인이었다.



산을 이루고도 남을 국화무덤이었다. 티엔은 그 국화무덤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만개한 국화를 바라보며 착잡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정확히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헌화를 했는지, 향을 피웠는지, 절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티엔이 그나마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식장건물을 완전히 나와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였다. 그마저도 티엔이 피우던 담배가 아니라 급하게 옆에서 받은 담배였기에 두 모금정도 피우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그 덕에 싸한 민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입 안에서 담배연기를 굴리던 티엔의 머릿속이 겨우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봉투에서 부고장을 꺼내 제대로 확인하면서도 티엔은 뜬구름 위에 마냥 누운 기분이었다. 그 길로 화환과 비행기 티켓을 주문하고서도 티엔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부고장을 다시 읽었다.

한국의 땅을 밟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도 티엔은 쉽사리 손에서 부고장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인파들에 떠밀려, 위선처럼 우는 고인의 어미와 누이들을 지나치고나서도 손안에 구겨 쥔 부고장만큼은 절대 놓지 못했다. 그녀들은 아마도 티엔에 대해서 전혀 모를 테지만 티엔은 척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제멋대로이지만 부조를 내는 손 하나도 느릿함이 서리는 등 티엔에게는 모든 하나하나가 느리게만 움직였다.

“간다.”

벌써 가려냐는 무거운 침묵의 질의 뒤로 티엔은 딱 자르듯 그를 쏘아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빈손에 새 담배필터 한 개와 라이터를 올려놓고, 목례와 함께 주차장 방향으로 금방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티엔은 애꿎은 바닥의 필터를 다시 구두 굽으로 밟아댔다.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연기 가득한 입안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명.”

파하게 어그러진 연기구름이 입김과 함께 흘러나와 티엔의 시야를 가렸다. 흐릿한 안개 같은 그것이 사라진 종래에서 티엔은 일순 숨을 멈추었다.

사람이 많은 아수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눈에 띄는 검정이 거기에 있었다. 그이는 명이었다. 정확히는 명이 남기고 간 아이였다. 티엔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작은 소년은 검은 사람들의 무리 사이에서도 오롯하게 빛나는 한 점같이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행동도 없이 멍하니 서있는 소년의 모습에서 티엔은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 이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티엔은 소년을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피해 다니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티엔은 담배가 저 혼자 쑥쑥 타들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멍한 얼굴의 소년을 지켜보았다. 이내 소년의 뒤에서 가느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년이 갖고 있는 순수한 검정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혈색의 두 손은 티엔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코 가까운 인물은 아니었다. 소년의 어머니이자 명의 여인이었다.

티엔은 눈이 마주쳐 날카롭게 저를 후벼 파는 시선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짓으로만 인사했다. 여자는 소년의 모습을 후다닥 감춰버리며 티엔의 목례에 답변하는 대신 조용히 쏘아보고만 있었다. 티엔은 그새 다 타버린 필터를 바닥에 떨어트려 구두 굽으로 짓이겼다.

이제 완전히 끝났다. 그렇게 안도했다.

“안녕하세요, 티엔. 마틴 챌피라고 합니다.”

금발을 단정하게 내린 청년, 마틴이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티엔의 사무실자리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약간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티엔에게 급히 할 말이 있다며 그를 찾아왔고, 거기에 그가 본인 증명으로 내민 물건은 다름 아닌――

“이 마틴이 Mr. Lee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서 많이 불쾌하신 모양이네요.”

“…….”

“아니, Mr. Lee가 당신에게 선물했던 물건이니 당신 것이라는 표현이 맞겠죠?”

티엔은 목소리로 하여 대답하는 대신 침묵으로 미간을 더욱 좁혔다. 그리고 그런 티엔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흥미를 느낀 사람처럼 마틴의 눈초리는 더더욱 호선을 그렸다. 알면서도 휩쓸리는 기분을 떨치는 대신, 티엔은 접대 차 내려놓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그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선 이었다. 그리고 마틴은 그 사실을 잘도 꿰뚫어본 듯 제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다기를 내려놓는 사기그릇의 소리를 시작으로 마틴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화두에 내기 어려운 물건을 다룬다는 심정으로 티엔을 마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이 목걸이를 당신에게 다시 선물해주는 것. 그리고…….”

“갖다버리라지.”

티엔은 삐뚜름한 웃음을 입가에 단 채로 겨우 한 모금 마셨을 뿐인 찻잔의 속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치 술잔을 두고 대작하는 형태에 마틴은 놀라지도 않고 짧게 박수까지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할 일을 잊는 남자는 아니었다.

“이 설명을 먼저 드릴 걸 그랬군요. 저 마틴은 Mr. Lee의 변호사입니다. 즉, 그의 유언을 전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티엔은 아주 사람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듯 치워버렸던 시선을 마틴에게 다시 겨누었다. 마틴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로 어깨를 으쓱였고, 옆 자리에 올려두었던 서류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테이블 위로 꺼내 내민 것은 불과 10페이지 안팎으로 보이는 서류였다.

심지어 영어로 되어있는 서류를 티엔은 굳이 들춰보고 싶지 않은 듯 마틴에게 눈짓했다. 티엔이 보기 좋은 방향으로 돌려놓은 서류를 다시 들춰 보지도 않고 마틴은 가볍게 헛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그리고는 티엔이 원하는 요점 하나만을 고지해주었다.

“나 이명은 아들 이하랑에게 내 재산의 50%를 증여하며,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양육권은 친우인 티엔 정에게 일임한다.”

티엔은 놀라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낼 멍청함은 없었지만 적어도 바짝바짝 타는 목은 어찌하지 못했다. 행여나 팍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올까 손짓만으로 찬물을 가져오도록 시킨 그는 단숨에 물 한 컵을 비워내고 푹신한 소파에 전신을 완전히 내렸다. 파묻히다시피 한 티엔의 모습에서 마틴은 테이블을 보는 것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주었다. 물 한 컵을 다시 비운 티엔은 축축해진 손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이마를 짚고, 탁해진 목소리를 풀어놓았다.

“양육권은 제일 먼저 친족에게 있는 걸로 아는데.”

“꽤 좋은 조건 아닙니까?”

“나에게 돈을 바라라고 할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잡았군, 당신. 그의 어미와 여동생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와이프가 살아계시다?”

티엔의 눈썹 끝이 매우 불만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그것과 반대로 마틴은 매우 흥미로운 눈짓으로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명백한 비꼼의 이야기로 하여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마틴은 전혀 기죽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상황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절차가 끝나있으니까요. 당신은 유언에 따라 형식상의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간단해요.”

강요에 가까운 제안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을 고수하던 티엔이 인내심을 정비하듯 숨을 고르다 입술을 움직이려는 순간, 마틴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티엔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 아이라고 합니다.”

보지 않으려던 이성이 무색하리만치 티엔의 시선은 마틴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명의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그날의 남자아이가 어색한 얼굴로 티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몇 센티 남짓 작은 증명사진 한 장이었지만 남자아이의 얼굴에서 보인 감정과 그것에 이어진 거스러미는 큼직큼직한 것들뿐이었다. 티엔은 결국 금방 거두어버린 눈길을 들어 마틴을 바라보았지만, 마틴의 미소는 한참 더 짙어져있었다. 티엔의 결정을 제멋대로 확신하는 얼굴에 대고 티엔은 아니라는 간단한 부정 하나를 꺼낼 수 없었다.

급 몰려오는 피곤함을 감추듯 손으로 눈가를 가렸지만 가린 시야 틈으로 집요하게 찾는 무의식은 이미 소년의 증명사진에 고정되어있었다. 푹 가라앉아버린 목소리로 티엔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주저를 토로했다.

“생각해보지.”

마틴 챌피를 돌려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엔은 앉은 자리에서 푸싱 한 병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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