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너 해리포터 잘 모르잖아.

공: 아냐. 3권까진 봤어. 중학교 때 좋아하던 애가 빌려 줬거든.

조: 아. 네. 그러세요? 

공: 웃게 하는 주문이 뭐더라. 스포티파이?

조: 그건 음악 어플이겠지! 

공: 뭐야. 넌 알아?

조: 릭투셈프라!

공: ?!?!? 으하하학. 으학. 간, 간지러워!!! 그만. 아하하. 미안. 흐아. 중딩 어쩌고 한 거 거짓말이니까. 끄악. 그냥 4권부턴 뭔 책이 권수가, 개많아서.

조: 네가 거짓말쟁이 머글이어도 난 널 사랑해. 

공: …웃게 만드는 주문이 여기 있었네. 크흠. 아무튼. 어설프지만 가 보자고.



제2막. 조희수와 독수리의 둥지



I. 

그리핀도르 4학년인 조희수에게는 한 가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엄마가 머글이라는 것?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고, 학년 초에 슬리데린 애들이 무시하다가 친구인 유민, 지수와 그리핀도르 선배들에게 얻어 터지고 잠잠해졌기도 했다. 

다만 아빠의 낡은 다락에서 발견한 한밤중의 외출 루트만은, 희수만의 오롯한 비밀이었다. 그리핀도르 역사상 가장 얌전하다고 알려진 희수가 이런 야밤의 산책을 하고 있을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거 보면 모자가 틀린 게 없다고 희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몰래 움직였다.

물론 친구들이나 슬리데린 망나니들 또한 야밤에 학교를 헤집고 돌아다닌다는 건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게 뭐라고 자랑하고 다니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그 소문을 들었기에 더더욱 비밀스레 움직였다. 


"가위 바위 보! 좋아…."


화장실 다섯 번째 거울에서 가위바위보를 3번을 연달아 지니 거울 속 희수가 씨이익 웃으며 반으로 갈라졌다. 뻥 뚫린 터널에 한 발을 내딛으니 마법같이 공간이 오무라들었다.

뭐. 마법이 맞지만.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발을 디딘 희수는 휴 하고 한숨을 쉬고선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눈앞에 놓인 이빨이 나간 낡아빠진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으아. 이 감각은 영 익숙해지지를 않네."


옷을 탈탈 털고 일어나니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희수를 맞이했다. 루프탑이라고 해야 할까, 베란다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세상 이상한 장소였다. 처음 이 장소를 개척하고 포트키를 만든 선배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호그와트의 출입이 금지된 첨탑 한 구석탱이, 빗자루를 타고 지나가도 보일까 말까 한 4평 남짓한 공간은 희수만의 아지트였다. 

평소엔 솔직히 루모스로 밝혀야 겨우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둑한지라 영 올 생각이 안 들었지만 오늘처럼 달이 밝은 날에는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선인이 집광마법이라도 건 건가 싶었다. 어찌됐든 참 애매한 공간이었다. 다락방에서 찾아낸 지도 속 비밀 아지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그 때문이리라. 


"좋다~!!!"


그래도 희수에겐 이만한 공간이 없었다. 기숙사 생활이 맞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세상 외향적인 그리핀도르 친구들을 희수는 사랑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어둑하고 너저분한 공간이 좀 무섭기는 했지만 달을 구경하며 음료를 마시며 책이나 신문을 읽는 이 시간이 희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휴식 시간이었다. 오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응?"


새들이 영역 싸움이라도 하는 건지 새들의 노성이 편안한 휴식을 방해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리 크지 않은 독수리 한 마리가 까마귀들에게 쪼이고 있었다. 1 대 다의 상황에 상처가 가득한 독수리를 보니 희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몸을 바깥쪽으로 바싹 내밀고선 살피던 희수는 결국 망설이다가 결국 마법으로 까마귀들을 쫓아내었다. 마법을 맞은 까마귀들은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도망갔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자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뒤를 도니 상처입은 독수리가 겨우 숨을 붙인 채, 베란다에 떨어져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에 희수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달려갔다. 


"으아아. 피가 철철나네. 괜찮아?"


'방금 고개를 끄덕인 건가?' 희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품에 쏘옥 안았다. 그리 크지 않은 독수리는 품안에 쏙 안겼다. 희수는 얼마 전에 플리트윅 교수님께 배운 페룰라를 사용해 응급처치를 해 줬다. 

피가 엉겨 눈도 뜨지 못하는 독수리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일단 데리고 보건실이라도 가야 하나 싶어 안절부절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손안의 작은 생명이 스러질까 조마조마했다. 희수는 아기 독수리를 안은 채 곧 바로 포트키를 만졌다. 

폼프리 부인은 피떡이 된 독수리를 보자마자 자신은 수의사가 아니라며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희수의 눈물이 가득 고인 표정 때문일까, 부인은 새의 용태를 잠시 살피더니 희수에게 옮겨 받아 안고선 알겠다며 어디서 재를 데려왔고 이 시간에 왜 돌아다니는지는 불문에 부칠 테니 기숙사로 돌아가라고 언질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폼프리 부인을 찾았지만 새의 안부는 알 수 없었다. 부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희수는 그뒤로 불쌍한 독수리가 생각나서 죄책감에 몇 달 동안을 아지트에 갈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고, 가을밤의 헤프닝이 잊혀질 무렵. 희수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조심스레 다시 아지트를 찾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이게 뭐야?"


이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에는 안락해 보이는 방석과 두꺼운 담요가 놓여 있었다. 이전보다 배는 아늑해진 공간이었지만 희수는 패닉했다. 누가 봐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누군가 이곳을 발견이라도 하고 영역 표시를 한 걸까. 희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 멍하니 방석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 방석 위에 깃털……? 그 순간.

푸드덕!

날갯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맹렬히 돌진해 희수의 가슴에 부딪히듯 안겼다. 희수는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품안에 날아든 것을 살피니…. 


"어? 어어어?!"

"삐약."

"너 그때 그 독수리? 세상에 살아 있었구나?!"


독수리인데 왜 울음소리가 삐약인진 모르겠지만, 꼬마 독수리는 즐거운 듯 삐약거렸다. 그리곤 다시 푸드덕 날아올라 방석에 안착했다. 느긋하게 앉는 뽄새가 아무래도 한두 번 앉은 것 같지 않았다. 


"아. 깃털……."


그 순간 희수는 직감했다. 동물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어쩌면 조금은 이상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는 호그와트. 오늘도 거울과 가위바위보를 한 번도 비기지 않고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희수 역시 이미 4학년, 변신술 수업을 배웠기에 알고 있었다. 


"너야?"


짐짓 모르는 척 날개를 다듬었지만, 그 행동조차 너무나 인간다웠다. 희수는 잔뜩 경계하며 지팡이를 들었다. 


"아니마구스?"

"……."

"…정체가 뭐야?"


끼이. 불쌍한 소리를 내며 독수리는 방석에서 내려와 방석을 희수 쪽으로 밀었다. 희수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폼프리 부인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마구스가 얼마나 드문지 희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마법부에 등록해서 관리를 당해야 한다고 했는데…. 


"끼이끼."

"독수리인 척해도 소용 없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독수리가 날아왔다. 희수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독수리는 희수의 어깨에 앉아 다정하게 몸을 댈 뿐이었다. 


"해치려는 의도는 없는 거야?"

"끼!"

"근데 왜 이렇게까지."

"끼이."

"혹시 그때 도와 드린 게 고마워서 그래?"


삐약과 끼끼거리는 소리가 뒤섞인 새 울음소리에 희수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독수리는 힘없이 다시 날아가 베란다 난간에 앉았다. 다시 보니 상처가 멀끔하게 나은 독수리는 아주 미려한 독수리였다. 변신술을 해도 본인의 특징을 따라간다고 했으니, 누군지 몰라도 굉장한 미인이 아닐까. 

선해 보이는 노란 눈동자가 왠지 해칠 의도는 없는 것 같아 희수는 약간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곤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호그와트 학생이야?"

"삐약."

"맞구나. 왜 사람으로 변신하지 않아?"

"끼…."

"……등록 안 했지?"


아무 말이 없지만 아까처럼 눈을 또르륵 피하는 게 분명했다. 옛날 옛적에 무모한 기숙사 선배들 중 일부가 아니마구스 주문에 도전했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긴 했지만, 정말 사실일 줄이야. 희수는 아연해졌다. 


"그거 불법이야! 어떡하려고 그래?!"

"끼끼옥."

"모르는 척 울지 마."

"끼이…."

"그래서 이렇게 흉내도 못하는 새인 척을 하는 거야?"

"삐약……."


희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털썩 방석에 앉자 독수리는 철판을 깔기라도 한 듯 무릎으로 날아와 누웠다. 


"진짜……."


삐약거리며 올려다보는 독수리가 새치고도 지나치게 예뻐서 희수는 그냥 안심을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독수리인 걸 보니 1-2학년이나 됐으려나.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건…. 그리핀도르나 하는 짓인데, 기숙사 후배 중에 애교가 넘치는 애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인가. 더 쓰다듬으라는 듯 편히 몸을 뉘이는 새끼 독수리에, 희수는 결국 웃어 버렸다.



II. 


그뒤로 희수의 밤산책은 한 마리인지 한 명인지 모를 독수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독수리는 절대 사람으로 변하지 않고  오직 고갯짓과 울음소리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 시간이 묘하게 조용하고 편안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온 곳이지만, 막상 혼자여서 무서웠던 공간이 새 한 마리로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희수는 왠지 더 자주 그곳을 방문하게 됐다.

독수리는 온갖 맛이 나는 젤리빈 같은 과자 봉지를 하나둘 물고 올 때도 있었고 얇은 책을 갖다 두는 경우도 있었다. 늘 조용히 (끼끼 소리는 내지만) 희수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도 하고, 무릎에 쓰러지듯 누워 삐약거리며 쓰다듬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따뜻하고 편한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두어 달쯤 지났을까. 하루는 백게먼이 들어있는 가죽 보따리를 발톱에 달고 왔다. 


"하자는 거야?"

"끼이."

"꽤 고급스러운 백개먼이네!"

"끼끼."

"좋아하는구나. 좋아. 세팅할게!!"


백개먼을 좋아하는 독수리라니. 어찌나 잘 두는지 나름 제 기숙사에선 준우승까지 했던 희수였는데,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오기에 이길 때까지 계속 하자는 통에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해 버렸다. 그 결과,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중정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였다. 


"이제 꽤 그리핀도르다운 모습이네."

"아, 유민아."


빨간색 넥타이를 맨 유민이 맞은 편에 앉아 키득거렸다. 희수는 눈을 슥슥 비비며 뜨고선 고개를 도리질했다. 


"커피라도 마시지? 안 마실 거야? 그럼 나 줘."

"뭘? 어?!"


살짝 빗겨나 있었지만 누가 봐도 희수의 것 같은 자리에 놓인 머그컵에는 따끈한 커피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희수는 언제 이런 커피가 생겼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유민에게 물었지만 자신도 방금 왔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후뿌뿌뿌들이 지나가던데. 걔네 중 누가 줬나? 그런 짓 잘하잖아."

"다른 기숙사 친구들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 그만해."

"키히히."

"아…."

"응?"

"아니야."


희수는 머그컵 아래에 살포시 깔려 있던 독수리 깃털을 발견하고 히히 웃었다. 착하기도 해라. 정말 후풀푸프기라도 한 걸까. 


"걔 아냐?. 후풀푸프 반장."

"에이. 설마…?"

"대식당에서도 보던데? 저번에 데이트 신청했다며?!"

"으응, 잘 몰라서 거절했지만……."


남의 연애담에 안경을 빛내며 즐거워하던 유민은 무언갈 발견이라도 한 듯 아! 하며 희수의 팔을 쳤다. 


"맞나 봐! 저기 걔 아니야?"

"어디…. 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재석의 모습이 멀찌감치 보였다. 독수리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누군지 모르는 희수는 설마 싶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재석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날렵하다면 날렵한 눈매가 독수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옆에 여자는 누구지? 되게 예쁘네."

"레번클로 반장."

"오 채지수."


유민의 물음에 답을 건넨 건 초록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두 사람의 친구 채지수였다. 지수는 인사를 건네곤 앉아 꽃받침을 하고 재석과 여자를 바라보았다. 


"되게 예쁘지?"

"아. 응. 아는 사람이야?"

"조금?"

"어? 이쪽으로 온다. 대박. 진짜 쟤가 너 커피 준 거 맞나 봐!!"

"대박."


희수가 당황하는 사이 재석은 성큼 다가와 희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희수 역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지수는 눈을 반짝거리며 재석의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지수. 뭐 해?"

"선배 보고 있었지~"

"날 왜 봐. 친구들?"

"아. 공영인. 너도 알아?"

"아니. 지수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황금색 눈동자. 긴 갈색머리의 여자를 희수는 올려다보았다. 꽤 키가 큰 편인 여자는 과연 분위기 있는 미인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아 보이는 무심한 눈빛에 희수는 살짝 등골이 서늘해졌다. 

공영인이라고 불린 그 선배는 학생회 회의에 늦겠다며 재석에게 턱짓을 했고 두 사람은 세 명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유민은 맞는 거 같다며 꺄악거렸고 지수는 영인이 사라진 방향만 보고 있었다.


"아. 채지수. 레번클로 반장이랑 아는 사이야?"

"어. 좀? 크리스마스 연휴 때 신세를 졌지."

"또 사고 쳤어?"

"조희수. 내가 무슨 맨날 사고를 친다고~"

"사고뭉치잖아. 슬리데린 점수 10점은 네가 까먹었을걸?"

"흥. 사고 아니다. 뭐."

"응?"

"겨우살이 밑에서 키스했거든!!!"

"뭐?!"


아직 아무 썸씽이 없는 재석과 희수의 얘기보다 자극적이고 화끈한 이야기는 세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그날, 어김없이 아지트에 당도한 희수는 또한 어김없이 해바라기씨를 쪼아먹고 있는 병아리 같은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늘 커피 고마워."

"끼이?"

"모르는 척하지 마. 깃털도 두고 갔으면서!"

"끼끼끼."

"고마워. 잘 마셨어."


대답은 없었지만 뿌듯해하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가만 보면 생색 내는 것도 그렇고 좀 유치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다정했다. 


"선배인 줄 몰랐어."

"끼?"


'이래도 인정 안 하는구나.' 비록 모르는 척했어도 긍정임은 알 수 있었지만. 하긴 마법부에 끌려가는 일은 희수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폼프리 부인이야 워낙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유명했지만,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독수리는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조금은 서운해도 희수는 이해하기로 했다. 더 큰 이유는, 더 캐물었다간 왠지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끼?"


걱정스러운 듯 푸드덕 날아와 제 어깨에 앉아 애교를 부리는 작은 존재가, 이제는 없으면 몹시 아쉬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오늘은 뭐 할까?! 나 친구 거 오셀로 갖고 왔어."

"끼끼!"

"게임 진짜 좋아하는구나. 공부 안하고 게임만 하는 거 아니야? 아야!"


머리를 아프지 않게 쪼는 게 핵심을 짚었구나 싶었다. 희수는 해맑게 웃고선 색을 고르라며 흑백면을 보인 말을 손에 내밀었고 독수리는 망설임없이 까만색 면을 골랐다.



III. 


"나랑 데이트 하는 거. 아직도 별로야?"

"선배."


약초학 강의를 마치고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던 희수는 자신을 가로막고 선 재석에 살짝 당황했다. 유민은 윙크를 날리며 잘 해 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고 떠났다. 


"어…."

"사귀자는 거 아니야. 그냥 호그스미드 가서 놀다 오자는 건데."


불쌍한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매가 독수리와 꼭 닮아 있어서 희수는 매몰차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희수 역시 재석이 커피를 준, 독수리라는 유민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응?" 하며 살짝은 애교 있게 웃는 게 곰살궂은 성격 같기도 했다. 


"언제?"

"와. 가 줄 거야?"

"…응."

"다음주는 내가 좀 바쁘고, 다다음주 주말 어때?"

"좋아."

"와! 정말 신난다. 아! 난 그럼 이만 가볼게. 더 얘기하고 싶은데 반장 회의가…. 이따, 아니. 나중에 얘기해!"


사람인 상태로는 아직 많이 어색했지만,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그가 독수리가 맞다면. 가까워지고 싶었다. 데이트를 수락한 날. 희수는 독수리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래서 아지트를 찾았다. 그러나 그날 거의 밤이 샐 때까지 기다렸음에도 처음으로, 독수리는 아지트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뒤로도 며칠을. 밤늦게까지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를 맞은 희수는 그만 호된 봄감기에 걸려버렸다. 


"콜록 콜록."

"뭐야. 괜찮아?"

"응, 콜록. 계속 얘기해."

"듣지도 못하겠는데. 차라도 마실래?"

"으응. 괜찮…."

"채지수."

"선배~!♡"


냉기가 감도는 느낌은 기분 탓인가. 희수는 그날의 스산함을 떠올리고 살짝 긴장했다. 영인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그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 그대로였다. 그러나 채지수의 수많은 어장 속 물고기 중 가장 우량물건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레번클로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답고 똑똑한, 그러나 비밀이 많은 사람. 영인은 희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지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친구 없구나. 맨날 보던 애랑 노네."

"아니거든? 물론 희수가 내 제일 친한 친구긴 하지만."

"슬리데린 친구인 그리핀도르?"

"아. 응. 4학년이야. 조희수라고 해."

"지수랑 같으니 그렇겠지. 난 공영인. 지수한테 들었으려나."

"만나서 반, 콜록."

"아이참. 괜찮아? 차 갖고 올게. 선배 여기 있어야 해?!"

"지수야! 필요 없, 콜록!"


지수가 영인과 둘만 남겨놓고 자리를 뜨자 희수는 당혹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무표정한 표정의 영인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보니 살짝 미간을 구기고 자신을 응시하는 게,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드는 것 같진 않았다. 

'아.'

짚이는 데가 있어 희수는 말을 꺼냈다.


"그, 나랑 지수는 진짜 친구니까!"

"? 뭐래. 친구 같아. 너네."

"아. 아니. 혹시 오해할까 봐."

"무슨 오해?"

"아. 그게."

"내가 사귀쟀나?"

"뭐!? 쿨럭. 케헥."

"농담이야. 기침 엄청 하네."

"그런 뜻 아니야. 콜록. 둘이 잘 어울리니까…."


영인은 로브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까만색 감초 사탕을 꺼냈다. 그리곤 하나를 입에 넣고 희수에게 내밀었다. 예전에 유민이 사놓은 감초 사탕에 물린 적이 있던 희수는 조금 조심스럽게 그 손을 볼 뿐이었다. 


"감초 사탕. 유감스럽게도 물진 않는 물건이지만."

"아."

"보는 사람이 다 목이 아프네."

"고마워."


희수가 손을 내미는 순간. 


"와앙!"

"꺄악!"


앙 무는 소리를 낸 사람은 영인이었다.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은 영인은 미안하다며 희수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었다. 희수가 당황한 듯하자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말도 돌렸다.


"봄에 웬 감기?"

"아. 요새 밤에…. 아니. 잠을 잘 못 자서."

"일교차가 크긴 하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희수야. 여기 차."

"고마워!"

"그냥. 난 이만 일어날게."

"에?! 나 이제 왔는데? 어디가 선배!!"

"공부하러."

"나랑 놀아!!!"

"놀긴 뭘 놀아. 친구도 곁에 있으면서."


아. 역시 자신이 있는 게 좀 불편했나. 아까 장난에 좀 더 잘 맞춰 줄걸. 희수는 이유는 몰랐지만 무언가 후회가 됐다. 지수에게 조금 미안해지려는 찰나, 지수가 선수를 쳤다.


"희수는 이제 쉬러 갈 거야. 그렇지?"

"어? 아. 응. 맞아."

"흐응."

"그니까 나랑 놀아. 선배. 우리 같이 비밀의 방이나 찾아 볼까? 방해 못 받게."

"시끄러워."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았는지 영인은 지수에게 팔짱이 끼워진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남겨져 서러워진 희수는 코를 훌쩍이며 진짜 쉬러 기숙사로 향했다. 손에 남은 사탕은,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그때 물린 손이 얼얼했던 기억이 떠올라 먹기가 좀 그랬다. 받은 걸 버릴 순 없었기에 지나가는 후배에게 건네 주었다. 




'오늘은 가지 말까….'

감기가 더 도졌는지 몸이 다 으슬으슬 떨렸다. 집에서 갖고 왔던 오래된 감기 시럽(유민은 냄새를 맡더니 트롤의 오줌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며 오만상을 썼다)까지 먹었음에도 밤이 되니 열이 절절 끓었다. 그래도. 며칠간 보이지 않는 독수리가 걱정됐다. 만약 나와서 하염없이 날 기다리면 어떡하지. 자신은 며칠을 그렇게 기다렸으면서, 희수는 마음이 쓰여서 결국 길을 나섰다. 


"없네……."


역시나. 오늘도 비어 있는 자리. 독수리 먹으라고 가져다 준 견과류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희수가 주로 앉는 의자에는 두꺼운 담요가 얇은 린넨 담요로 바뀌어 있었다. 

'오긴 왔구나.'

희수는 허무하고 아프고 해서 눈물이 핑돌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한층 더 마음이 시끄러워졌다. 뭔가 화가 났나. 아님 데이트 하기로 해서 이제 추운데 야밤에 올 필요 없다고 생각했나. 열이 오르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어디 갔어…. 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그걸 마지막으로. 끓어오른 열에 정신을 잃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곳에서는 차가운 밤공기의 냄새와 함께 아주 희미한 단향이 났다. 어디서 맡아 본 향이었는데…. 


"으으음."

"일어났니?"

"폼프리…. 부인?"

"희수야!!!"

"유민아. 지수야."

"열이 안 내려서 하루를 잤어. 무슨 이상한 약을 먹었다면서?"

"아. 네. 집에 가지고 온 거였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면 버렸어야지. 생약은 쉽게 상해."


유민이 내민 유리병의 냄새를 맡은 폼프리 부인은 오만상을 쓰며 만드라고라 먹은 트롤 입냄새 같다며 이걸 어떻게 먹었냐며 걱정스러운 핀잔을 건넸다. 친구들과 부인의 걱정어린 시선에 희수는 고마움을 표했다.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저, 저 여기로 어떻게 왔죠?!"

"무슨 소리야. 희수야?"

"너 어디서 쓰러진 거였어?!"

"…뭐. 은혜는 갚았다던데. 밤새 보다가 친구들 부르곤 갔어."

"………누가요?"

"그건 말해 줄 수 없단다. 얘야."

"아………."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민과 지수를 두고 희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알고 싶었다. 누구인지. 알면, 제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희수는 제 옷에 붙어 있는 깃털을 떼어내 꼬옥 쥐었다. 




IV. 


"조희수. 너 그 후뿌뿌뿌 걔랑 만나?"

"어? 아니. 외출만 한 번 같이 했을 뿐인데."

"소문 다 났던데?!"

"뭐?!"


희수는 지수의 말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주말의 외출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희수는 독수리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에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대화는 미묘하게 어긋나기만 했다. 그는 어쩌면 희수가 재석이 독수리인지에 대한 의심에 기반한 대화만을 나누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거절을 보낸 건 아니었지만 어디에도 긍정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던 만남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 기숙사 5학년에, 김재석 전 여자친구가 있거든. 이를 갈던데."

"무슨,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리고 헤어졌다면서."

"모르지 뭐. 그 선배 근데 좀 이상한 사람이라.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정말?"

"응. 최유민이랑 나랑 같이 있어. 최대한."

"하아……."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더 잘 거절했어야 했나. 입에 무거워 보였는데, 생각보다 가벼운 모양이었다. 지수는 걱정스레 보다가 누군가를 보곤 반색했다.


"영인아!!"

"이름 부르지 말랬지. 선밴데."

"아."

"뭐 어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우리 태어난 해도 같잖아!"

"또 같이 있네."


영인은 희수와 눈을 맞추었다. 왜 저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지. 그리고 왜 나는 계속 보게 되는 거지. 좋고 예쁜 것만 골라 가지는 채지수의 위시리스트에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눈을 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요새 묘하게 자주 마주 치는 걸 보니, 지수의 위시리스트에서 애인이 되기까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안녕. 김재석 여자 친구."

"응?!?"

"뭐야. 선배도 알아?"

"…그야. 같은 반장이니까. 축하해?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냉소적인 미소. 저번에 살짝은 짓궂었던 장난도 그렇고 희수는 영인이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수를 찾을 때마다 옆에 있어 거슬린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희수는 왠지 모르게 조금 침울해졌다. 그 모습에 지수가 두둔하고 나섰다.


"아니래! 걍 데이트 한 번 한 거라던데."

"응. 데이트도 아니고 그냥 외출이야."

"…흐응?"

"희수 되게 철벽이야!"

"그래?"


믿을 수 없다는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영인에 희수는 알 수 없이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만. 진짜 아니야."

"그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 희수는 속이 상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미안했어."

"어?"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희수는 화들짝 놀랐다. 영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책을 뒤적거렸다. 누구도 사과를 건네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을 만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그때 오해한 거?"

"뭐…. 그래."

"괜찮아.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단 걸 확인한 계기기도 하고."

"비꼬는 건가 싶지만 아닌 것 같네."

"응…."


지수도 없는데 굳이 왜 말을 건 걸까. 희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영인은 그런 희수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수가 너 혼자 있으면 같이 있어 주랬어. 카타리나의 눈에 띄었다며?"

"아…."

"얼마나 미친 애인지는 우리 학년에선 유명해서."

"그 정도야?"

"뭐. 안 듣는 게 나을 정도."


영인은 희수가 빌려놓은 아니마구스에 대한 책을 보고 있었다. 독수리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빌려온 책이었지만 이렇다할 내용은 없었다. 그나마 얻은 단서는 아니마구스로 변한 동물구 본체에는 유효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그마저도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는 사람마다 달랐다. 영인이 보고 있던 페이지에는 안경무늬가 그려진 무당벌레가 징그럽게도 움직이고 있었다. 


"음? 가방에 깃털 묻었어."

"?! 묻은 거 아니야!"

"아?"


부적과 같이 핀으로 고정시켜둔 독수리의 깃털을 떼어내려는 영인을 희수는 잽싸게 저지했다. 영인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새, 좋아하나 보네."

"…응."

"…흐응?"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신경쓰이는 걸까. 영인은 덮어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고 마른 허우대가 보기 좋았고 얼굴은 그보다 배는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 예쁜 입에서 나온 말은 듣기 나빴다.


"새 같은 게 뭐가 좋다고."

"왜? 새 귀여운데."

"머리가 나쁘잖아."

"……."

"주인도 기억 못 할걸."

"…왜 그렇게 말해?"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굳이 그렇게 못되게 말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

"화났어?"

"조금."


영인은 그렇냐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희수를 바라보곤 미안 심플한 사과를 남기고 도서관을 나섰다. 희수는 잊어 버렸을 거라는 말에 속이 상해 인상을 풀지 못했다. 




"!!! 독수리야!!!"

"끼이! 삐약!"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울적한 마음에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봄의 끝자락인 공기는 싸늘함은 찾을 수 없었다. 독수리는 애탔던 희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에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희수의 어깨에 날아와 앉았다.

희수는 울컥한 마음에 새를 와락 끌어안았다. 삐이 소리를 내던 독수리는 이내 그 마음을 이해라도 했는지 잠자코 안겨 있었다. 


"나 안 잊어 버렸지? 기억하지?"

"끼이."

"응. 진짜 나쁜 사람이야…. 이렇게 머리가 좋은데. 하긴 너는 정말 새도 아니지만."

"끼?"

"……이제 그만 알려 주면 안 돼?"

"……끼."

"네가 왜 등록도 하지 않고 아니마구스로 지내는지 묻지 않을게. 누구한테 말하지도 않을 테니까."

"삐이약."

"네가 궁금해."


독수리는 대답 대신 파드득 날아올라 하늘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리고는 베란다 창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희수는 울먹였다. 


"언제 또 안 오게 되는 널. 계속 기다리고 싶지 않아."

"……."

"만나고 싶어. 얘기하고 싶고. 만지고 싶어."

"끼…. 끼이."

"어떻게 생겼든 어떤 사람이든. 그게 너라면…. 나는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끼이."

"넌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


푸드덕 소리를 내며 독수리는 다시 우는 희수의 어깨로 날아와 부드럽게 머리를 기대었다.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조금이라도 희수의 불안을 잠재우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끼이……."

"보름 뒤에 다시 만나."

"…."

"기다릴게."


희수는 독수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독수리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길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희수는 그뒤로 진득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수와 영인의 경고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함께 있을 때도 음험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부엉이를 통해 하울러가 날라오지를 않나, 책 사이에서 장난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책을 망치지를 않나. 생각보다 도를 넘은 장난의 수준에 희수는 정신이 어질해졌다. 

보다 못한 재석이 뒤늦게나마 카타리나에게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하며 못된 장난질을 멈추라고 이야기했지만(유민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멈출 거면 걔가 미친 년으로 유명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역시 착한 척만 오지는 멍청이 후풀푸프답다며 비난했다가 희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두둔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 


"선배."

"희수야. 진짜 미안. 내가 카타리나한테…."

"아니에요. 선배 잘못도 아니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희수야…!"

"미안하단 말은 내가 해야지. 너무 길게 끌었어. 난 선배 안 좋아해."

"어?"

"이제 확실한 것 같아. 선배. 내가 선배한테 가진 감정은 호감이 아닌 것 같아."

"희수야. 다시 생각해 봐."

"선배. 독수리…. 어떻게 생각해?"

"독수리? 좋아하지! 희수 너도 좋아해?"


확실한 호감의 표명이었지만 희수는 직감했다. 재석이 아니라는 것을. 희수는 고개를 젓고 다시 확실한 이별을 고하고 뒤돌아섰다.



V. 


어느덧 약속한 보름이 지났다. 하필 저녁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희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민과 친구들은 비를 막아주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비가 오면 필치의 감시가 허술해진다며 어디로 빠져나갈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희수도 같이 가자!!"

"아냐. 나는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카타리나 그 개년이 그런 거지. 내 그년을 진짜."

"아. 그 슬리데린 싸이코가 그런 거야?"

"그때 희수가 마법으로 물벼락 맞았잖아."

"정말?! 어떡해. 언니 괜찮아?!"

"응. 민서야. 조심해서 다녀와."


길길이 날뛰며 슬리데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는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희수는 모험을 떠나는 동생 민서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해 주었다. 그리고 휴 한숨을 내쉬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런 날씨면 오고 싶더라도 못 오는 거 아닐까. 그래도 희수는 고개를 저었다. 올 거야. 오지 않는다면 찾으러라도 갈 생각이었다.




친구들이 자리를 빨리 비워 준 덕에 희수는 조금 일찍 기숙사를 나서서 아지트로 향할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아지트에 가지 않았기에 빗소리가 울리는 화장실이 굉장히 음산하게만 느껴졌다. 희수는 살짝 한기를 느끼며 거울속 자신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비밀 공간으로 들어왔다. 포트키를 통해 아지트로 들어온 희수는 아직 아무도 없는 아지트를 확인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비가 쏟아지는 베란다를 내다 보았다. 다행히 지붕 아래라 그런지 안으로 비가 들이치진 않았지만, 초여름임에도 비 때문에 꽤 쌀쌀했다. 독수리가 비를 맞거나 해서 몸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 희수는 무언가 따뜻한 마실 거라도 갖고 올걸 후회를 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희수는 조금 생각하고 다시 포트키를 만져 돌아갔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로 나온 순간.


"꺄악!"


누군가 멱살을 잡고 벽으로 강하게 밀쳤다. 희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초록색 타이와 깔끔한 교복의 미인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지팡이가 형형했다. 희수는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던 이가 바로 눈앞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타리나?"

"…."

"…제대로 거절했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뭔데 거절을 해."

"아, 아파."

"재석이는 이 호박이 뭐가 예쁘다고 차이고도 좋아하는 거지?"

"으윽."

"얼굴이 일그러지면 마음이 변하려나."


지팡이를 얼굴 가까이 들이대며 부라리는 눈은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유민이나 지수가 왜 그리도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었는지. 

영인이 왜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고 했는지. 단숨에 이해가 갔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광기에 가득찬 여자는 더 세게 희수의 목을 죄며 주문을 외우려는 듯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엑스펠리아르무스!!!"


카타리나의 몸이 붕 날아가 벽에 부닥쳤다. 주문을 외운 이는 화장실의 어둠 속에 잠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만은 희수에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카타리나!!"


목소리의 주인이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늘 정갈했던 푸른색 타이가 흐트러져 있었고 비에 젖었는지 셔츠의 연한 푸른 빛이 진해져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노성으로, 영인은 카타리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친 거야? 이건 반장으로서 묵과할 수 없는 행동이야. 알아?!"

"공… 영인!?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내가 다시 한 번 더 이딴 거지 같은 수작을 얘한테 부리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끄윽. 윽."


마법으로 옥죄기라도 하고 있는 건지 영인의 지팡이가 움직일 때마다 카타리나가 괴로워하는 게 보였다. 영인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황금색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저 눈.'

- 아니마구스는 본래 인간이었을 때의 특징을…. 


"죽여 버릴 거야."

"살, 살려 줘.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지금 아직도 네 잘못을 몰라? 얘가 뭘 잘못했는데 이래!!!"

"선배. 나 괜찮아. 안 다쳤어. 그러다 정말 죽어!"

"정말 죽어도 싸. 이거는."

"선배!!"


희수가 팔을 붙들고 흔들자 영인은 미간을 구기며 그제야 지팡이를 내렸다. 카타리나는 땅바닥에 엎어져서는 켈록켈록 기침을 하며 숨을 골랐다.


"오늘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빌어, 콜록, 먹을."

"아직 정신 못 차렸지. 스투페…."

"선배!!"

"알았어. 알았으니까! 살려 줘!!"

"이건은 반장으로서 교장 선생님께 보고할 거야."

"콜록…. 흐윽."

"썩 꺼져!"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카타리나가 절뚝거리며 사라지는 걸 영인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본 뒤 희수를 돌아보았다.


"그니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그, 미안."

"미친 년이라고 몇 번을…. 하아."


머리를 쓸어올리는 모습에서는 초조함과 걱정만이 읽혔다. 여태까지 냉정하고 무감정해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희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폴리주스를 마셔 영인으로 둔갑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왜 여기에 이 시간에 어깨가 젖은 채로 서 있는지. 

'내가 부탁했다고? 아니?! 공영인이 그래?!'

영인에게 지켜 달라고 부탁해 준 거냐며 고맙다 말하니 놀란 듯했던 지수의 반응에 희수는 아니라며 둘러댔었다. 그리고 아까 카타리나의 반응 역시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암시했다. 


"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는데."

"왜 말 안 했어?"

"공격당해서 머리라도 다친 건가."

"금색 눈동자."

"…."

"여기가 화장실 입구였는데…. 분명 카타리나가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들어온 거야?"

"그 전에 와 있었을 수도 있지."

"거짓말."


눈을 피하는 모습. 오늘의 영인은 레번클로답지 않았다. 희수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그날. 쓰러진 날 희미하게 기억에 남은 향은, 감초 사탕의 향이었다.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자 영인은 한걸음 더 물러섰다. 다가가려고 해도 한결같은 거리가 마치 이전과 같아 희수는 미간을 좁혔다. 


"어깨는 왜 젖었는데."

"밖에 잠깐 나간 거야."

"…보름."

"…."

"보름 동안 마음 정리돼서 나온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독수리야."

"…."


시선을 올려 마주치는 눈빛이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왜 몰랐을까. 왜 영인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눈을 맞췄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황금색 눈을, 날카롭지만 따뜻한 그 눈빛을 제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독수리와 똑같은 그 부분을 봐 달라고. 알아 봐 달라고. 


"미안해. 늦게 알아서."

"……."

"왜 말 안 했는지 원망하지 않을게."


희수는 잰 걸음으로 다가가 와락 하고 영인을 껴안았다. 찬 기운이 묻어 있는 품은 따뜻했다. 어깨에 붙은 연갈색 빛 깃털은 머리색과도 닮아 있었다. 영인은 결국 포기한 듯 희수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내가 왜 말 안 했는지. 궁금해?"

"어?"


아지트에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손만 꼭 잡고 있던 영인이 침묵을 깼다. 먼저 할지 몰랐던 질문에 희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넌 나 싫어하잖아."

"아니야. 안 싫어해. 그때…는. 독수리를, 아니 그게 사실 너였지만. 모욕하니까 그런 거고."

"계속 불편해했으면서."

"네가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미안해."

"됐어."

"사람일 때랑 독수리일 때랑 왜 이렇게 성격이 달라."

"너도 여기 있을 때는 잘 웃으면서 왜 나한텐 안 웃어 줬는데."

"그건………. 그렇네."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하는 모습은 또 독수리와 닮아 있었다. 알고 나서 대화를 하니 행동이나 습관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몰랐나 싶을 정도로 티가 났다. 

늘 희수만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서로 이야기가 오갔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지수와 키스가 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 그리 듣고 싶지 않던 이야기까지. 빗소리를 배경삼아 편안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 늦은 시간이 되자 영인은 다시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다 조금 고민스러운 듯 후 한숨을 뱉고 다시 이야기했다.


"사실 다시는 안 나타날까도 생각했어."

"왜애?!"

"누가 누구랑 잘되가는 게 보기 싫었거든."

"뭐?"

"나랑 다른 사람을 엮으려고 하질 않나."

"내가? 너를…?"

"잘 어울린다며."

"아."

"그랬는데…. 보고 싶다고. 만지고 싶다고."

"응. 보고 싶었어."

"사람 속도 모르고."


재석의 데이트를 수락한 날부터 자취를 감춘 건, 그런 의미였던 거구나. 희수는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왜 그게 싫었는지. 지수와 잘 어울리다는 자신의 빈말이 왜 불쾌했는지. 뿌연 물속과 같이 영인의 보이지 않던 마음 속이, 부유물이 가라앉은 듯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알려 줘."

"뭐를."

"네 마음.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나는 늘 보여 줬어. 행동으로."

"새일 때만 그렇잖아."

"아직도 내가 독수리라는 걸 못 믿는 거야?"

"말로 해 달라는 거야. 우리는. 인간이니까."


도망치지 못하게 자그마한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든 채 희수는 영인에게 말했다. 영인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는 조금 고민을 하더니 살짝 다가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말보다 행동이라서 말이야."

"아."

"그래도 원하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지."


나는 레번클로 가문인 공 씨니까. 영인은 일부러 조금 재듯 말하곤 약간은 벙찐 희수를, 다시 그 황금빛 눈으리 바라보았다.


"네가 내가 독수리인 걸 알아챘다고 생각했는데, 김재석이랑 만난다고 해서 실망하고 화가 났어. 그리고 다른 사람이랑 잘 어울린다고 해서 분했어. 그래도 나 기다리다가 감기걸릴까 봐 걱정되고, 카타리나 미친 년한테 해꼬지당할까 봐 노심초사했어. 이 감정의 이름은 나도 모르지 않아. 네가 나를 구해준 그날부터 나는 너를…."

"사랑해. 독수리야."

"말을 자르면 어떡해."

"미안. 마음이 벅차서…."

"그리핀도르는 역시 무모해. 뭐. 그런 점까지도 좋아하지만."

"…좋아해?"

"욕심쟁이. 사랑해."


영인은 피식 웃으며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조: 왜 우리 엄마가 머글이야. 너 진짜 나쁘다. 

공: 그 부분이 문제야? 그 그리핀도르 예쁜이 걔도 엄빠 머글이라며. 

조: 그리고 왜 네가 선배야? 게다가 반장?! 로웨나 레번클로 같다고?

공: 그 부분은 좀 봐 줘. 원래 좀 주인공보정이 있는 거야. 

조: 내가 널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공: 그것도 주인공 보정이지. 원래 이런 건 안면인식 장애 좀 있어 줘야 해. 어릴 때 네티 안 봄?

조: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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