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것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인사말. 하나마키는 교수님이 무어라 하시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가방에 황급히 노트를 우겨넣는다. 터질 것 같은 가방의 버클을 애써 당겨 잠그자 옆에서 동기들이 혀를 찼다. 씨발, 바빠 뒤지겠는데.


“쟨 또 뭐가 저리 바쁘더냐.”

“약속 있다던데.”

“아이고, 하나마키. 바쁘다 바빠.”


며칠 전부터 오늘은 중대한 약속이 있다고 떠벌린 효과가 나온다. 다급한 행동에 동기들은 혀를 내두르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단합 술자리가 있었지만 오늘은 면제다. 웬만하면 군소리 없이 술자리에 출석도장을 찍어왔던 걸 알기에, 어지간히도 급한 약속인가 싶어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냥 술이 좋아서 출석도장을 찍었던 건데 이것 하나쯤은 괜찮은 효과였다. 하나마키는 짧은 인사만을 남겨둔 채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은 정말로 급한 날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존잘님의 선착순 통판 공지가 올라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철에서 초조하게 손목시계만 자꾸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대로 갔다간 아무래도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게 뻔했다. 그 무슨 불경한 일이란 말인가. 이번에도 존잘님 책을 놓치면 자신은 자살할 것이다. 기필코 자살하고 말 것이다. 전철이 열리기 무섭게 달음박질치는 그의 주위로 시선이 두어 개 따라붙었으나, 익숙한 일이었기에 하나마키는 그대로 무시한 채 자취방으로 내달렸다. 씨발, 씨발 제발. 제발요, 하나님. 몇 번이고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으며 내달리자 시계는 정각 십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가방을 내던지며 노트북 전원을 누르고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초조하게 방바닥을 두드렸다. 컴퓨터가 부팅되기 무섭게 인터넷 창을 켜며 익숙한 주소를 띄운다. 흘끗, 컴퓨터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주소 따위를 입력하고 시간을 보니 일분 전이다. 아, 씨발. 인생에 몇 번이고 겪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주 끔찍한 기분이다.


“제발. 제발. 존잘님 제발요.”


이제는 하다못해 상대방을 부르짖으며 하나마키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이걸 위해 어떻게 왔는데. 오늘 단합 술자리를 빼겠다고 선배들에게 아양까지 떨면서 쨌단 말이다. 있지도 않은 제사를 팔아넘기면서 이 자리에 왔는데. 신사에 동전도 던지고 왔는데! 그런데 안 되면 이 세상 다 좆까라. 멸망해버려라.


그리고 자정이 되기 무섭게 덜덜 떨리던 손가락이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다소 겸허한 마음으로 멈춰버린 화면을 바라본다. 익숙한 일이다. 이 존잘님 책은 언제고 이따위로 인기 폭발이었지. 로딩을 기다리며 하나마키는 그제야 핸드폰을 켰다. 몇몇 연락이 와있었으나 그건 그대로 씹은 채 그가 들어간 것은 트위터였다.


“이런 씨발, 또 지랄 맞게 업데이트 해놨네.”


툴툴대며 달라진 인터페이스를 둘러보는데 알림창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훑어보니 책 성공 하셨냐, 자기는 어쨌네 저쨌네 하는 지인들의 멘션이었다. 흘끗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주는데 화면은 여전히 하얬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로고침을 하면 다 망한다는 걸 이미 오래 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마키는 그저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타임라인을 슥슥 올려보다가 관심사용자 알람이 뜨기 무섭게, 보지 않고도 하나마키는 이것이 자신이 기다리던 소식일 거라 여겼다.


감사합니다. 통판 매진되었습니다.


松. 소나무 송이란 단어 하나를 닉네임으로 설정해둔 자신의 존잘님은 언제나 별다른 말이 없다. 이번에도 통판 때문에 고생하시겠네. 송님은 통판 한 번에 몇 백 권씩 하시는 것 같던데 포장 혼자 하시려나? 아무래도 지인들이 도와주시겠지? 하지만 평소 존잘님의 주위 인맥을 둘러보자면 친하게 지내는 지인은 별로 없는 것 같았는데. 애초에 극악한 팔로잉 숫자가 그러했다. 고작 팔로잉 5인 계정을 보면 알만한 일이었다. 그것조차 전부 지인이 아닌 두어 개는 행사 계정이었으니까 실질적으로 친한 지인은 둘 정도?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컴퓨터 화면이 뒤늦게 부팅되는 걸 발견했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깔끔한 문장 하나가 떠오르는 걸 보며 하나마키는 저도 모르게 흥분감에 바닥을 걷어찼다. 그 뒤 통증에 발을 붙잡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성공했어요!


타임라인에 우렁차게 한 마디를 남겨두며 존잘님 퍼블릭에 수고하셨다느니, 고생하셨다느니 저도 모를 횡설수설한 답멘을 달아두는데. 자신보다 앞서 답멘을 달아둔 사람들을 보자니 묘한 회의감이 들었다. 아, 존잘님 알림창 터지실 텐데 자신이 괜히 귀찮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멘션을 보면 참 포카포카하니, 잘도 말하는구나 싶었다. 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같이 말주변이 병신인 사람보다 백배는 말을 잘 하기에. 아, 역시 말 잘하는 법 같은 책이나 사야하는 건 아닐까?


하나마키 타카히로는 SNS 중독을 자랑할 정도로 트위터를 끊임없이 붙들고 사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무언가 장르에 빠져서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유일하게 핥는 존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송(松)님이다. 그분 지인들 사이에선 송님을 마츠, 라고 부르는 것 같았지만 그건 왠지 개인적인 별칭이나 이름일 것 같아서 구독러들이 부르지는 않는 닉네임이었다. 송님은 주로 19금 쪽을 그리는 존잘님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그냥 19금이면 몰라. 스토리면 스토리, 캐릭터면 캐릭터, 연출이면 연출,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는 인물이었기에 팔로워 수가 십만을 찍은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1차 창작이던 2차 창작이던 항상 워낙 잘 팔려서 존잘님 신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통판도 항상 하시는 건 아니었고, 행사를 따라다니자니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다. 프리미엄은 이미 몇 배로 붙어서 팔리기 일쑤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물이 없어서 난리다. 그런데 이 존잘님은 항상 오프 모임은 참석하지 않고 그다지 친목을 도모하지도 않기에 여러모로 베일에 싸인 존잘님이셨다. 행사야 매번 참석하시지만, 그거 외에 통 친분을 쌓지 않으시기에 그냥 원래 그러신 성격인가 보다, 하고 다들 생각할 뿐. 귀여운 인상의 여성분이신데 성격은 꽤나 화끈한 타입이라는 후기가 좀 돌았던 적이 있었으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몇몇 알계들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하며 들러붙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존잘님은 칼같이 블락을 먹였을 뿐, 별다른 대처를 하진 않았다. 때문에 굉장한 성인군자가 아닐까…… 하는 말까지 나오던 참.


“씨팔, 존잘님 연성 존나 좋아…….”


한가롭게 바닥에 드러누워 존잘님 갤러리를 둘러보는 삶 최고다. 이게 이번 신간인가. 몇 개 크롭샷이 올라와 있었는데 살색 가득한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번 신간인 것 같았다. 며칠 전에는 외주하느라 바쁘시다더니 이젠 외주 끝나셨으려나. 아. 개처럼 벌어서 존잘님에게 외주 넣고 싶다. 역시 사람은 돈이 많아야지. 내 존잘님 사실 집 하나 사서 존잘님 평생 연성하게 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하나마키의 덕심이 날로 깊어지는 가운데, 송님은.


“좆같아.”

“또 왜 지랄이야.”

“통판 좆같아서 못 해먹겠어.”


……이렇게 짜증을 토해내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자신의 지인을 보며 마츠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래서 통판을 잘 안 하는 건데. 또 이따위로 주소 좆같이 적지. 우편번호 적으라는데 안 적는 새끼 꼭 있고, 연락처로 연락해도 안 받는 새끼 꼭 있다.


“통판 문제가 생겨서 연락했더니 갑자기 전화가 오더라고.”

“그래서?”

“전화를 받았더니 그냥 웃던데. 누구시냐 했더니 깜짝 놀라서 끊더라.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통판자더라고. 장난하나…….”

“그거야 널 여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니까. 네 목소리에 놀랐나보지.”


심드렁하게 한탄을 받으며 손을 번쩍 들더니 ‘이모, 여기 고기 1인분 추가요’하며 한가롭게 주문하는 모습이 익숙하다. 하긴. 둘의 주 만남은 이곳에서 이뤄졌으니까.


“과제도 지랄 맞은데.”

“코딩 날아갔다며.”

“원고 날아가는 것보단 낫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짓씹는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닉네임 얌냠. 배고플 때 지은 닉네임이었다며 마츠카와를 어이없게 만들었던 여자. 오랜 인터넷 지인으로 대략 십년간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보통은 마츠카와의 첫인상만 보고 도망치기 십상인 여자들 가운데에서 꽤나 대단한 인상을 남긴 여자였다.


“행사 참여할 거지?”

“부탁해.”


그녀의 물음에 짧게 답하며 빈 술잔을 채웠다. 그녀는 예전부터 마츠카와를 대신해서 자신의 행세를 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행사장에 그 얼굴로 떡하니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겁먹고 도망친다나 뭐라나. 남자가 그런 책을 파는 게 문제냐고 물었더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얼굴이 문제라고 했던 여자다.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평소 인상 쓰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하지 않느냐고……. 정곡을 찔렸다.


“야, 이번에는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앉아 있어라. 진상이 끝이 없어.”

“왜.”

“저번엔 어떤 새끼가 책을 들먹이며 이런 것 당하고 싶어서 그린 거 아니냐고.”

“한 마디 해줬을 것 아냐.”


귀여운 얼굴 때문인지,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실제로 그녀 취향도 하늘하늘한 원피스 종류로, 레이스 잔뜩 달린 치마를 개시하며 행복해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수위가 난무하는 책을 팔고 있자니, 몇몇 한심한 놈들이 와서 시비를 트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마츠카와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실고추 가지고 깝치지 말라고 했지.”


음산한 얼굴로 술잔을 그대로 원샷하는 그녀를 보자니, 절로 나오는 건 실없는 웃음이다. 하여간 성격 하고는……. 트위터에서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쌓이는 건 태반이 그녀 영향이 컸다. 성녀라는 소문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만.


“그래. 다음엔 짐 나르고 그냥 가지 말고 옆에 앉아있을 테니까.”

“토끼면 뒤진다.”


말본새 하곤. 쯧 혀를 차며 그녀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자니 주인 아주머니가 시뻘건 고기를 세팅한다. 고기를 불판에 펼치며 마츠카와는 시간을 가늠했다. 내일 1교시 그냥 쨀까? 아. 정말이지. 종강 언제 하지?

 

마츠카와 잇세이는 대학교 4학년으로 현재 공대 재학생이었다. 그는 본인의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으나 크게 불만은 없었다. 성미에 맞지 않을 뿐이지 강의 자체는 따라갈만 했고, 배우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의 분위기가 조용해 마음에 들었다. 어영부영 눌러앉은 게 벌써 졸업반이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생활을 하는 과 특성 탓에 굳이 학생회에 들지 않는 이상, 과에서 사람을 부르는 일 따위로 귀찮게 굴진 않았다. 때문에 단합이 가장 안 되는 과로도 유명했는데, 대부분의 동기들이 서로의 이름도 거의 모르고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대 진학을 1g도 고려하지 않았었는데. 고등학생 때는 주위에서 그를 보고 미대를 권유한 인물이 특히 많았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그 모든 권유에 심드렁했다. 그림은 그저 취미다. 특히 수위를 그리는 건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에 가까웠다. 취미를 전공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전문적인 게 요구되면 피곤해진다. 그의 정석이 그랬다.


요 최근, 마감에 시달리느라 잠이 부족해진 탓에 그는 강의 내내 꾸벅꾸벅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고개를 흔들며 잠을 깨우려는 그의 가상한 노력을 보았는지, 교수는 몇 번 그를 눈 여겨 보는 듯 싶더니 곧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마츠카와의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그는 교수님께만큼은 싹싹하게 구는 현명한 사회인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강의의 끝을 고하며 교수님은 책을 챙겨들고 강의실을 벗어났다. 지금이 몇 시더라. 비몽사몽한 정신 속에서 어렴풋이 시간을 가늠했다. 이 다음이…… 아. 별로 관심 없던 교양. 본래는 수강신청 할 생각이 없었는데 교양 학점이 부족한 탓에 억지로 밀어 넣은 강의였다. 역사에 관한 교양으로 학생들의 야유가 대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택한 건 고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학기 수강신청은 영 꽝이었다. 널브러진 노트와 펜 따위를 챙겨들며 그는 가방을 고쳐 멨다. 건물은 그리 멀지 않았으나 시간이 촉박했기에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안 돼!”


짧은 비명소리.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모퉁이를 바쁘게 돌아서다 상대방을 발견하지 못해 낳은 참사였다. 마츠카와는 황급히 상대방의 핸드폰을 주워들었는데, 가뜩이나 케이스가 끼워있지 않은 지라 쯧 혀를 찼다. 유심히 앞, 뒤를 돌려보며 확인하는데 다소 거칠게 상대방은 쥐여진 핸드폰을 앗아갔다. 무언가 들여다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해했나.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군. 단순하게 긍정했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상대는 자신을 모르겠지만 자신은 알고 있는 상대였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트레이크 마크인 그는 대학 내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타과인 마츠카와가 알 정도로. 댄스 동아리에 들었다고 하던데 축제 때 번번이 장기자랑을 나와 분위기를 휘어잡기도 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화려한 성적을 거머쥐기도 한 인물이라 들은 적이 있다. 거기다가 성격까지 좋다며 몇몇 여자애들이 얼굴을 붉히던 게 떠올랐다. 때문에 마츠카와는 현재의 사고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확인하질 않아서.”


이런 식으로 나올 테니까. 화를 낸다거나 혹은 혹시 모를 배상을 요구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나마키의 성격은 절대적으로 좋다. 다소 이상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을 부정하는 인물은 없었다. 마츠카와는 대답 대신 하나마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저렇게 살면 피곤하지도 않나. 착한 척인지, 정말로 착한 것인지. 하나마키는 퍽 초조해보였는데 입술을 짓씹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시간이 부족한가. 길어지려는 생각을 종식하며 마츠카와는 입을 열었다.


“미안. 휴대폰은?”

“……멀쩡한 것 같은데. 제가 너무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로스백 가방끈을 꼭 부여잡고 쏟아내듯 말을 토해낸 하나마키는, 마츠카와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마츠카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아까 자신이 봤던 장면을 곱씹었다. 얼핏 익숙한 걸 봤었던 것 같은데……. 마츠카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기억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자신이 본 게 잘못되지 않았을 거라고 마츠카와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花.”


꽃 화. 자신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닉네임 중 하나였는데. 그거 분명히 트위터였지. 아는 척 하진 않았지만, 계정 아이디도 확실히 그 사람이었고……. 그의 생각이 좀 더 깊어지려던 참에, 마츠카와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했다. 교양이 먼저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나쁘지 않았다.


“음?”


교양 강의실은 그리 넓은 곳이 아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편이었는데, 애초에 그곳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 다소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은 귀찮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는 얼굴을 보게 될 줄 몰랐지. 물론, 자신이 일방적으로 아는 얼굴이지만. 하지만 이제는 상대도 자신의 얼굴이나마 알지 않은가.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며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에게 멀지 않은 자리를 독점했다. 사람에 둘러싸인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퍽 상세하게 들렸다. 아까는 꽤나 초조한 얼굴이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쾌한 표정이다. 피곤하지도 않나. 저런 식으로 요란한 무리들을 상대하는 건 체력 소모다. 이득이 되지 않으면 대체로 무시하는 성격인 마츠카와에게 하나마키란 꽤나 신기한 유형이었다. 그런 게 바로 사교라며 자신의 지인이 몇 번 등짝을 내리친 적이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사교의 필요성을 찾지 못한 채였다. 굳이 사람과 친해질 이유를 모르겠다. 더 바라보다간 시선이 마주칠 것 같아 고개를 숙이며 마츠카와는 한가롭게 노트를 꺼내들었다. 花. 빈 공간에 익숙한 한자를 쓰며 슬며시 웃었다. 의외네. 그런 쪽엔 전혀 관심 없게 생기고선. 완전히 머글 같이 생긴 주제에. 아까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영영 몰랐을지도 모른다. 매 행사 때마다 자신은 자리를 지키지 않고 행사가 끝나기만을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었기에 여태껏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이다. 회지 구매자가 이리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매번 꼬박꼬박 성실한 피드백을 주던 구독러였기에 기억하고는 있었다. 평소 사용하는 이모티콘이나, 귀여운 말투 때문에 남자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만 역시 현실은 또 모르는 법이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편협적이란 사실을 마츠카와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의 회지 구매자는 대부분이 여자였으며 그렇기에 더욱이 그가 여자일 것이라 자연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직도 멀었다. 쯧, 혀를 찬다. 그러고보니 이번 통판에도 있었던가. 아직 폼을 정리하지 않아 기억나질 않는데……. 마츠카와는 흘끗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행사가 이주를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번에는 자리 좀 지키고 있으라며 구박했던 지인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매번 책을 사가선 피드백을 남겨줬었지. 그렇다면 이번 행사에도 참석하리라. 대리구매를 하려나? 하지만 그가 보여준 애정을 생각하자면 직접 올 것 같은데. 마츠카와의 입꼬리가 약간 말려 올라갔다.


이번 행사. 꽤나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보답한 건지, 행사 날에는 유난히 날이 좋았다. 지인은 마츠카와 보다 일찍 행사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행사장 부스입장 줄에 합류하자 주위 시선이 약간 마뜩찮다. 마츠카와의 키가 워낙 큰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한 두 개는 큰 탓도 있겠지만 역시 다른 이유도 있으리라. 마츠카와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나 오늘 좀 험악한가.”

“넌 언제나 험악했어.”


불성실하게 답해주는 지인은 핸드폰을 붙잡고 있기 바빴다. 마츠카와는 흘끗 일반 입장 줄을 바라보았으나 딱히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하나마키를 찾는 것이었다. 하긴 또 안 올 수도 있으니까.


부스 입장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안에 들어가서 책을 챙기고 부스를 세팅한 뒤 트위터 계정에 준비 완료 되었다는 말을 남겨두었다. 마츠카와는 행사 중에는 트위터 문의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공지 알람이 필요할 때만 몇 번 퍼블릭을 남길 뿐, 선입금도 늦을 경우 가차 없이 환불해버리는 탓에 몇 번 원성을 사긴 했으나 그건 호의의 영역이지 의무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다.


“존잘님 연성 정말 좋아해요. 이번 책도 잘 보겠습니다.”


입장 줄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마츠카와의 부스는 유독 줄이 길었다. 웃는 얼굴로 호의를 표현하는 구매자들을 보며 마츠카와는 퍽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린 건 자신인데 인사를 받는 건 제 옆의 지인이다. 지인도, 자신도 동의한 부분이지만 어쩐지 본의 아니게 남을 등쳐먹는 기분.


옆에서 잔돈을 세고 책 수량을 확인하며 선입금 표를 정리한다. 그러다가 일이 얼추 정리되면 틈틈이 옆에서 연습장을 넘겼다. 어차피 자신에게 아는 척 할 사람도 없었다. 마츠카와는 한 번도 온라인에서 친분을 쌓지 않았으니까. 순식간에 빈 공간에 빼곡히 그려내는 크로키 선이 남다른 탓인지, 줄 서 있는 인물들 중 몇 명이 마츠카와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지인에게 옆에 분이 누구시냐며 마츠카와의 정체를 묻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일관성 있게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며 제 할일에만 열심이었다. 부스 줄이 줄어들 줄을 몰랐다. 빠져나가는 인물만큼 뒤에 줄을 서는 인물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마츠카와는 제 앞의 인물이 생각보다 꽤 오래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거 진짜 본인이 다 경험해보고 그리는 건가요?”

“예?”

“이런 일 당하고 싶어서 그리는 건가보네…….”


뭐, 이런 병신 같은 소리가. 펜을 놓고 시선을 들자 웬 낯선 남자다. 비열하게 웃으며 샘플 책을 파다닥 넘겨보더니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그에 지인 또한 얼척없는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부류라는 거지. 몇 번 듣긴 했지만 자신은 경험한 적 없어 잘 모르는 종자들이었다. 설마 정말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남성향 회지를 함께 판매하거든 이런 식으로 와서 성희롱을 하는 호로 새끼들이 있다더니……. 지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뒤에 선 줄에서도 몇 마디 말이 새어나왔으나 제 앞의 남자는 당당했다.


“그럼 넌 여자 붙들고 섹스나 할 것이지. 왜 이딴 꾸금지 사냐?”


터졌다. 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여튼 한심하게도 본인이 한 행동은 생각지도 못하고 하는 꼬라지 봐라. 마츠카와는 쯧쯧 혀를 차고는.


“이봐요.”


남자의 반박보다 마츠카와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마츠카와는 책상을 펜으로 툭툭 두드리며 비죽 웃었다. 비틀리는 입매 가득 짜증이 묻어났다.


“살 거야?”


시작부터 반말이다. 그에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마츠카와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검은 목티를 입은 마츠카와는 제 목을 주무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얄팍한 입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마츠카와의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그리고 곧 마츠카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순식간에 남자와의 눈높이가 달라졌다.


“사던가, 꺼지던가. 좆같게 굴지 말고.”


꾸욱 남자의 미간을 누르는 검지. 명백한 조롱이었으나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뒤에 줄 선 이들 중 몇 명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심한 새끼.


“곱게 갈래, 아니면 기어서 갈래.”


그러나 마츠카와는 순순히 남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새끼들은 곱게 가면 나중에 또 이런 짓거리를 반복한다.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다른 손을 뻗어 남자의 턱을 확 움켜쥐었다. 그에 남자는 갑작스럽게 붙드는 손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마츠카와의 악력은 일반 남성을 훨씬 넘어서는 힘이었다. 턱이 으스러질 것 같은 힘에 남자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약자 앞에서나 강한 새끼들. 하여간 고추 달고 제대로 하는 짓도 없으면 고추 떼던가, 씹새끼야. 마츠카와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경멸하는 부류다.


대답도 못하는 남자를 툭 밀치듯 놓아주자 그는 제 턱을 매만지더니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그에 마츠카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더러운 새끼. 지인이 슬쩍 마츠카와의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으나 마츠카와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이내 상황 종료란 걸 파악했는지 그녀는 다음 분 오시라는 말로 사건을 끊어낸다. 누군가 스텝을 불렀는지 스텝 명찰을 단 이가 다가왔으나 마츠카와는 손을 내저으며 상대를 물렸다. 소란을 피우긴 했으나 명백하게 상대측 잘못이었으니까. 행사 규칙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위반하지는 않았다. 뭐 때문에 일부러 곱게 보내줬는데.


“저…… 선입금 했는데요.”


자리에 앉아 쌓인 책의 각을 맞추던 마츠카와는 문득, 들리는 목소리가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하던 짓을 멈췄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그러자 제 앞으로 신분증이 들이밀어진다. 신분증을 받아들자 역시나. 하나마키 타카히로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자신이 모를 수 없는 이름. 마츠카와는 조금 웃었다. 어쩔까?


“……우리 구면이네, 하나마키.”


턱을 괸 채 시선을 들자 아연실색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나마키가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캡모자를 눌러써 가리고 마스크까지 꼼꼼하게 썼지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야?”

“자리 좀 비울게. 할 수 있지.”


궁금증을 표하는 지인에게 잠시 타임아웃을 선언하며 마츠카와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책 한권 빼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하나마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어쩌지. 좆 됐네.

 

하나마키는 자신의 운이 대체로 좋은 편이라고 생각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운이 인생 최악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동기를 다 만나지. 행사장 뒤편에서 마츠카와는 태연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도 피겠느냐 내미는 담뱃갑을 거절하자 그는 별다른 말없이 손을 거뒀다.


“일단.”


하나마키는 불안한 시선으로 마츠카와를 훑어보았다. 그가 먼저 말문을 열자 마츠카와의 시선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책부터.”


다소 다급하게 튀어나간 말에 마츠카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웃는 것도 같았고, 웃지 않는 것도 같았다.


“이게 중요해?”


허공에 한 번 책을 흔들어 보이는 마츠카와의 행동에 하나마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지금 존잘님 책을 가지고 이 자식이 뭘 하는 거란 말인가. 억지로 뺏었다가 손톱 때문에 표지에 생채기라도 날까봐 전전긍긍 하는 하나마키의 모습이 웃겼는지 마츠카와는 조금 웃었다. 이런 거 그냥 뺏으면 될 텐데. 아주 정성이네.


“좋아하나봐.”

“송님 책은 당연 최고니까.”


그 과감한 표현이며 거친 선, 섬세한 선 가리지 않고 뽑아내는 드로잉 실력까지. 스토리 구성은 또 어떻고, 연출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경계하던 얼굴에 서서히 무한한 선망이 떠올랐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츠카와는 괜스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귀여웠다. 귀여웠나?


“내 책을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학교에서 싸인이라도 해줄 걸 그랬나.”

“……예?”


담담하게 말한 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벽에 담배를 비벼 껐다. 꽁초를 착실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퍽 상냥한 얼굴을 한다. 하나마키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입력이 되지 않아 어벙한 얼굴로 마츠카와를 바라보았다. 마츠카와는 그런 하나마키의 품에 쏙 책을 꽂아주었다. 반사적으로 책을 소중히 끌어안은 하나마키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회지. 내가 그렸다고.”

“하지만 송님은 여자 분이시고…….”


더듬더듬 이어지는 하나마키의 말에 마츠카와는 짧게 한숨을 터뜨렸다. 굽실거리는 앞머리를 죽 쓸어 넘긴다. 마츠카와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어딘가 심술이 배어있는 얼굴이다.


“섹스 사진은 주로 남자의 신체만 올라왔잖아.”

“그건 그냥 야짤을 좋아하시는……?”

“그거 나야.”


이런 씨발. 하나마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욕을 뱉을 뻔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릴 듣고 있는 거지. 물론 송님의 계정에 몇 번 수위 높은 사진이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성기 부분은 아주 절묘하게 가려져서 별다른 제재를 받진 않았다. 그간 팔로워들은 그냥 송님이 그런 사진들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자신도 그러했다. 누가 그 계정에 자기 자신의 섹스 사진을 올릴 거라 생각이라도 하겠는가? 그것도 무려 10K가 넘는 계정에서!


“내 책은 꾸준히 다 모으는 것 같던데…….” 곱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위험하게 보인다고, 하나마키는 생각했다.

“날 아는 구독러는 네가 처음이겠다. 그렇지, 하나마키?”


좆 됐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의 손이 하나마키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하나마키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츠카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옷을 몇 번 털어냈다. 담배 냄새를 그나마 없애기 위한 행동이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하고.”


그는 툭 바닥을 구둣발로 두어 번 두드렸다. 얼빠진 하나마키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등을 돌려 몇 걸음 앞서다가 아, 하는 감탄사를 흘린다.


“우리 할 얘기 많을 것 같은데. 일단 내일 마저 얘기할까? 교양 듣지?”


씨발……. 유유히 떠나가는 마츠카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하나마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제 품에 소중히 안긴 존잘님의 책을 한 번, 멀어지는 등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저 사람의 책인가? 정말로? 할 얘기가 많다고? 내일 마저 얘기하자고? 교양이 또 겹친다고? 그냥 나 자살하면 안 될까……. 아니지, 일단 존잘님의 책을 샀으니 죽어도 읽고 죽어야지. 그런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나마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엉켜도 단단히 엉켰다. 집에 돌아가서 책을 읽고 그냥 얌전히 지구가 멸망하길 기다리면 안 되는 걸까. 그러나 지구가 당장 내일 폭발할 리도 없고, 착실히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애석하게도 하나마키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의 핸드폰 상단에는 낯선 트위터 알람이 울렸다. 그것도 그가 잠든 와중에.


송(松)님이 팔로우했습니다!

 

그게 송의 여섯 번째 팔로잉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나마키는 터져버린 제 알람창을 직면해야만 했다.


잘 들어갔어? 내일 봐. @hana_0127


씨발. 마츠카와가 퍼블릭으로 자신을 태그한 탓에 친창이 새벽 내 완벽하게 죽어버렸다. 원체 퍼블릭 사담을 잘 안 남기던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퍼블릭을 남긴 건지 짐작되지 않았다. 결벽적이라는 평까지 있을 정도로 평소 사담 퍼블릭을 전혀 남기지 않던 그가 이례적으로 남긴 사담 퍼블릭. 거기다가 자기를 태그한. 씨발… 거기에 팔로까지 했잖아. 존잘님이 팔로를 주셨는데 왜 행복하지 못하죠? 그 때문인지 주위에서 지나친 관심이 쏟아진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마키는 침착하게 검색창에 마츠카와의 닉네임을 검색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마츠카와의 행동에 지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개중에는…… 원색적인 악의도 많았다만. 이러다가 알계 받는 거 아냐? 그냥 확 블락할까? 아니, 존잘님 그림은 진자 개 최고인데. 못 보면 안 되는데.


“좆 됐다…….”


온 멘션을 확인해보니 송님과 원래 알던 사이냐며 트친들의 질문이 한 바닥이다. 디엠 알람은 쫄려서 굳이 확인하진 않았다. 오늘 교양 그냥 째버릴까. 자신의 평화로운 SNS 일상에 이따위 폭탄이나 투여하고. 하지만 피한다고 언제까지 마냥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하나마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등교 준비를 했다. 학교 가기 싫다. 존나게 싫다.


“그럼 교양 끝나고 연락해, 하나마키.”

“유우지…… 나 오늘 그냥 수업 쨀까.”

“무슨 소리야, 학점 여태 잘 챙겨놓고.”


어디 아프냐며 진지하게 묻는 제 친구를 돌아보며 하나마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연락할게. 유우지는 미심쩍은 얼굴로 하나마키를 한참 바라보더니 돌아섰다. 하기야, 동기들은 자신이 뭐가 고민인지 알 리가 없다. 하나마키 타카히로가 열성적인 트위터리안이라는 걸 더욱이 알 턱도 없고.


“늦었네.”

“그쪽이 빠른 거겠죠.”


쌀쌀맞은 목소리에도 마츠카와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턱을 괸 채 옆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마키는 한 칸 떨어진 의자를 빼 앉았다. 그에 마츠카와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지더니,


“여기 앉지.”

“집중 안 될 것 같은데요.”

“안 건드려.”


그에 하나마키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마츠카와는 그새 평이한 얼굴로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섹스는 좋아해도 수업 때까지 건드리진 않는데. 아, 혹시 그런 게 취향인가?”


씨발. 씨발! 진짜 저 입을 꿰매버리던 해야지. 아무리 봐도 저런 사람이 자신의 존잘님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마츠카와가 더한 헛소리를 할라, 황급히 옆자리를 꿰찼다. 그에 마츠카와의 입도 자연스레 다물렸고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수업에 집중될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마키는 수업 내내 제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츠카와의 시선에 시달려야만 했다. 무시하려고 해도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탓에 무시할 수 없었다.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도망치듯 책을 우르르 챙겨 일어서는데, 강하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할 얘기 있잖아.”

“전 없는데요.”

“일단은…… 그 같잖은 존댓말부터 어떻게 좀 해봐.”


조급한 자신과 다르게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듯 한 마츠카와의 행동이 하나마키를 울컥 짜증나게 만들었다. 막말로 자신이 19금 회지를 사 모으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는 19금 회지를 그리는 인물이 아닌가. 둘 다 피차일반인데 왜 지금 이 남자만 훨씬 제 우위에 있는 것 같지?


“나한테 돈이라도 받을 생각은 아니지?”

“돈은 쌔고 쌨어. 책으로 어지간한 건 해결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트위터에서 송님은 대체 얼마를 벌까, 하고 몇몇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은 적이 있었다. 하나마키는 그 때 막연히 먹고 싶은 것 사 드실 수 있을만큼 버시지 않을까요, 하고 답했는데 실상은 그 이상인 모양이었다. 역시 우리 존잘님…… 하고 짧은 감상에 빠지는데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그를 훅하고 현실로 끌어냈다.


“따로 받고 싶은 건 있는데.”


붙들린 채 그의 옆에 서있자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하나마키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의자를 빼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만, 이런 일로 시선을 모으고 싶진 않았다.


“……뭔데.”

“나, 궁금하거든.” 마츠카와의 얼굴이 조금 가까워졌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네가.”


이어진 말에 하나마키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하나마키는 살면서 수많은 말을 들어봤지만, 이런 식으로 정말 대놓고…….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건 아니지?”

“건다면?”


아니 거기서 왜 그 대답이 나오는데요, 씨발. 그럼 안 되는 거잖아.

 

* * *

 

마츠카와 잇세이는 자신과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 송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존잘님이다. 마츠카와는 자신이 송님이라고 밝혔다. 마츠카와가 자신의 존잘님…… 그동안 자신이 존경하던. 이럴수가. 아무리 되새겨 봐도 납득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마키는 얼마 가지 않아 납득해야만 했다.


“집을 보고 싶다 할 줄은 몰랐어.”

“내가 뭘 보고 믿으란 거야.”

“부스에 있는 걸로 충분한 것 아니었나?”


그건…… 또 그랬다. 송님의 부스에 마츠카와가 앉아있던 건 사실이었고 그가 내미는 증거들만으로도 앞뒤가 맞았다만, 하나마키는 진심으로 자신의 존잘님이 이런 녀석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몇 번이나 부정하며 부득불 마츠카와의 자취방을 찾게 되었으나.


“이건 송님의 한정판 회지.”

“음, 그거 잘 팔렸었지.”

“세상에, 재록본 박 옵션도 있어.”

“그건 소장본이라 내 것만 그래.”


마츠카와가 부연설명을 덧붙였으나 이미 하나마키에겐 들리지 않는 듯 싶었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정신없이 책장에 꽂힌 회지들을 뒤적거렸고 마츠카와는 쯧, 혀를 차며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딱 불을 붙이려던 타이밍이었다.


“안 돼!”

“……뭐야.”

“존잘님 회지에 담배냄새 배잖아! 무슨 짓이야!”


그 회지, 내가 그렸는데. 내가 주인인데. 툭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킨 채 마츠카와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하나마키를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샜다. 쓸데없는 데에서 열정적인 얼굴을 하곤. 자신이 담배에 불이라도 붙였다간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저게 그렇게 소중한가. 자신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야한 짓 하는 게 전부인걸. 마츠카와는 불붙이지 않은 필터만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들고 있던 라이터를 책장에 내려놔야만 했다. 빈손을 양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항복 자세를 취해보이자 하나마키의 표정이 조금 개였다.


“됐지?”


극성이긴 극성이네. 이전에 구구절절한 피드백을 보내줄 때부터 열렬한 팬이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거 원. 집에 데려온 김에 이런 짓, 저런 짓도 해보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뭘 해볼 수도 없겠더라. 괜히 김이 샜다.


“봐도 돼.”


책 한 권을 빼들고선 차마 페이지조차 넘기질 못하는 그를 보자니 조금 우스웠다. 허락이 떨어졌으나 하나마키는 펼치지도 못한 채 덜덜 손만 떨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정판 회지였다. 자신이 구하고 싶어도 프리미엄에 눈물을 머금으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책. 존잘님 회지는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런데 이건 살 수도 없어. 왜냐하면 8만엔이거든요……. 거기다가 물량도 없거든요. 하나마키가 재력적으로 아주 부족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용돈의 적정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존잘님 회지를 어떻게 맨손으로 읽지? 집에서 라텍스 장갑이라도 가져올걸. 아…… 그런데 정말 저 인간이 내 존잘님. 정말로? 정말로…… 내 존잘님이 저런 녀석?


“저기, 그렇게 경멸의 표정을 지으면 이쪽도 나름 상처인데.”

“어떻게 내 존잘님이 이렇게 쓰레기 같은 녀석일 수가.”

“그 회지, 내가 그렸다니까.”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마츠카와의 행동에도 하나마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표지만 앞뒤로 살펴보다 공손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마구잡이로 꽂아놓은 회지인데, 타인이 저렇게 정성들여 대하는 걸 보자니 마츠카와는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다리가 저렸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던 탓이었다. 하나마키가 슬슬 일어나려 바닥을 짚었는데, 마츠카와의 손이 지그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응, 하고 돌아보기도 전에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회지만 보고 가려는 건 아니지.”


어……? 하나마키의 몸이 우뚝 굳었다. 순간적으로 그간 송님의 계정에 업데이트 되었던 신체 사진이 떠올랐고, 그게 자신의 섹스 사진이었다던 마츠카와의 말 또한 함께 떠올랐다. 어…… 씨발. 자신은 혹시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온 게 아닐까? 존잘님과 이 녀석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너무 무리수를 뒀던 게 아닐까?


“나는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씨발. 그냥 날 놔줘. 그냥 날 놔달라고. 그러나 정작 내뱉는 말은 없었고, 하나마키의 입술만이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아, 이것 또한 좆된거죠. 그죠.

 

“파렴치한처럼 굴지 마.”


툭 밀쳐내는 힘에도 마츠카와는 순순히 밀려나지 않았다. 하나마키의 행동이 우습다는 듯 손목을 움켜쥐는 악력이 거세다. 하지만 멍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하나마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 남자 자신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이…….


“그러면 어떻게 굴까.”

“이런 장난 재미없으니까…….”

“장난처럼 보여?”


옆을 짚은 손은 틈새를 봐주지 않겠다는 듯 막아선다. 마츠카와의 다리가 하나마키의 다리 사이에 얽힌다. 죄다 옭아매고 놔주지 않는 마츠카와의 행동에 하나마키는 덜컥 겁을 집어삼켰다. 마츠카와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하나마키는 이런 일에 아주 무지하진 않았다.


“잊었어? 올라오던 사진들. 전부 남자의 일부분이었다는 것.”


확실히 그러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송님은 여자일 거라 생각했던 점도 있었다. 사람은 이토록 무지하게도 쉽사리 자기 좋을대로 판단하고 믿어버린다. 자신도 그런 부류였다. 하나마키는 왠지 모를 수치감에 얼굴에 열이 올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타카히로?”


귓가에 속삭이는 말은 느긋하게 기어 들어와선. 귓불을 입술로 더듬어 씹는 행위는 이상하리만치 야했다. 별 것도 아닌 행동이라며 밀쳐낼 수 있는 일인데. 귓불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뺨을 더듬고…… 곧 눈가를 혀로 핥아 올리며, 하나마키는 입술을 짓씹었다.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아픔을 종용하는 것이다.


“깨물지 마.”


마츠카와의 엄지손톱이 입술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벌려지는 입술, 손톱이 입술을 짓누른다. 치열을 문지르는 살갗은 온기가 없다. 하나마키는 당혹감에 헛숨을 삼킨다. 남자의 엄지가 제 입안의 혀를 문질렀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 끝에 맺혔다. 흐른다. 바지가 조금 더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날…….”


와드득 살을 씹는 소리가 들렸다. 마츠카와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와 동시에 가슴팍을 떠미는 힘이 있었다. 마츠카와가 밀려남과 동시에 하나마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는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하나마키는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날, 만만하게 보고 있지. 아주.”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파스라니 떨렸다. 휘청거리듯 일어선 몸은 얕게 떨리고 있었으나 형형한 눈에는 다른 의지는 없었다. 이전부터 계속, 이 남자는 자신을 얕보고 있었다. 마치 제 손에 전부 휘두를 듯이. 물론 자신이 이 남자에게 형편없이 휘둘렸다는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휘두르게 두진 않을 것이다.


“좆같게 굴지 마. 내가 마냥 휘둘릴 줄 알아?”


와악 쏟아지는 소리에 마츠카와는 제 손을 주무르며 하나마키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올려다보는 행위는 한심하게 보일 법도 했지만, 어쩐지 무시 못 할 분위기가 있었다. 하나마키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현관문까지의 거리를 셌다. 뛰쳐나갈까? 지금 당장이라도?


“……사과할 테니까.”

“뭐?”


웃음소리 밴 대답. 마치 이 일이 가볍다는 듯이, 마츠카와는 양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엄지손가락이 형편없이 찢긴 주제에, 남자의 얼굴은 평온하다.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의외인걸.”


중얼거리듯 한 말에 하나마키는 울컥했으나 별로 성을 내진 않았다. 현관문은 마츠카와를 밀치고 가야만 하는 쪽이었고, 괜스레 험한 분위기를 부추길 필요가 없었다.


“내가 너무 과했어. 사과할게. 좋아, 내가 네게 너무 과하게 군 건 사실이고. 그건 네가 화를 낼 만 했지, 하지만 타카히로.”


그러고보니 이 남자의 호칭도 잘못되었다는 걸 얘기해야만 했는데. 마츠카와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방바닥에 핏방울이 똑, 떨어진다.


“그래서 내 손은 어떻게 할 셈이지? 난 며칠 뒤 당장 마감이라고.”


마츠카와가 다친 손은 오른손이었다.

 

* * *

 

그러니까, 이 남자는 다시없을 악마가 틀림없다. 하나마키는 요 며칠간 뺀질나게 마츠카와의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집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지나치게 붙어 다니는 둘의 모습에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으나 하나마키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의 행동으로 마츠카와가 다친 것은 사실이었고, 그가 여러 마감을 앞두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분명히 그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엔 하나마키가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시중이라도 들지 그래. 빈정거리는 마츠카와 말을 단박에 수락한 건 자신이었다.


“물.”

“여기 있습니다.”

“손목 쿠션.”

“여기 있습니다.”


중죄를 저지른 인물처럼 무릎까지 꿇은 채 상시 대기하고 있는 하나마키를 보는 건 꽤나 미묘한 기분이었다. 마츠카와는 사실 적당히 놀리고 그를 놓아줄 심산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충실히 구는 하나마키를 보니 그게 또 마음이 바뀌더라. 이래서 사람이란 간악하기 짝이 없다고 하는 건가. 성악설을 믿는 마츠카와는 홀로 납득하며 펜을 다잡았다.


오른손이 아렸다. 알차게 깨문 탓인지 상처는 쉬이 낫지 않았고 따끔한 통증은 계속되어 쓸데없이 원고만 늦어지고 있던 참이다. 행사까지 시간이 촉박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이번 부스에는 일러북도 함께 내기로 한 탓에 전체적인 그림 퀄리티도 신경 써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술한 책은 마츠카와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보면 부담스러운데.”


저번에 제 집에 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못하는지, 뒤에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마츠카와는 애매하게 웃고 만다. 트위터 상에서 자신의 팬이라고 말하는 인물 중 몇 명을 기억하긴 했지만, 그 중 순위를 꼽아내면 단연 이 녀석이 탑이었다. 자신의 연성을 좋아한다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지, 금세 뭐라도 쏟아낼 듯 한 얼굴로 입술만 꽉 다문 채 지켜보고 있는 게 한 시간이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작업 현장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건, 그리는 이로서 아주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동시에 무시할만한 것도 되진 못했다.


“이거 이번 신간이지…요?”

“말은 편하게.”

“존잘님께 제가 어찌 감히.”


이 새끼 저번에는 잘만 했잖아. 어이없다는 마츠카와의 시선은 쌩으로 무시하며 하나마키는 뱅뱅 주위를 맴돌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하지만 이거 정말로 존잘님 신간인걸! 그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보고 있다고 트위터에 자랑하고 싶었지만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단박에 알계가 열 몇 개는 주르륵 생기면서 너 따위가 뭔데 감히 존잘님에게 빌붙어서 난리냐…… 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나마키의 상상력이 좀 더 가지를 뻗어가고 있을 때 마츠카와는 다시 펜을 잡았다.


걔, 귀엽더라.


얼마 전 만난 지인이 문득 그 얘기를 꺼냈다. 너 책 살 때마다 매번 온다니까.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금 확인 사살을 했고, 마츠카와는 그 말을 꽤 재밌게 들었다. 그게… 날짜로 따지자니 바로 엊그제였다. 엄지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고깃집에 나타났더니 대체 무슨 일을 벌였냐고, 너의 그 문란한 관계가 일을 칠 줄 알았다며 지인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완전 바라고 있는 눈치였지. 그거?


“너무 괴롭히진 마.”

“누가 괴롭힌대?”

“넌 인마, 항상 그딴 식으로 굴잖아.”


소주잔에 술을 채워주며 이죽이는 말을 고스란히 무시한 채 마츠카와는 고기를 뒤집었다. 왼손도 쓰다 보니 아주 못 쓸 건 아니었다. 알싸하게 올라오는 알코올 향을 느끼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때는 걱정도 팔자라고 생각했는데.


“미쳤다…미쳤어. 존잘님 펜선 좀 봐. 채색을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존잘님은 역시 뭘 그려도 쩌는구나…….”


저기, 그 그림은 제가 그렸고요? 자신은 싸그리 무시한 채 제 그림 앞에서 연신 감탄을 토해내는 하나마키를 보며 마츠카와는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어쩌면 이 녀석, 트위터에서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하기로 한 게 아닐까?


“한 권 줄까?”

“뭐요?”


뭘 잘못 말한 거지. 단박에 하나마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그에 마츠카와가 오히려 찔끔 겁을 먹을 정도로. 하나마키는 이전 날보다 더욱 강렬한 투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어떻게 존잘님 책을, 하고 시작한 말은 일장연설처럼 길게도 이어졌다. 간략히 말하자면, 돈을 주고 사도 모자를 판에 이런 걸 어떻게 공짜로 받느냐는 얘기였다. 마츠카와에겐 그다지 와 닿는 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코웃음을 쳤을 뿐이지만. 글쎄. 어차피 그림은 계속 그릴 수 있는 거고. 자신에게 그렇게 대단한 책은 아니었으며 컬렉션처럼 쌓아두는 게 재밌어서 좀 쌓아뒀을 뿐인데.


“아니면 싸인이라도 해줘?”


불꽃같던 하나마키의 기세가 그 말에 툭 꺾였다. 그의 눈동자에 단박에 떠오르는 욕망을 마츠카와는 읽었으나 짐짓 모른 체 한다. 하나마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았고, 마츠카와는 부추기듯 휙 휘파람을 불었다.


“……전부?”

“전부.”

“진짜로?”

“정말.”


이게 속고만 살았나.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는데, 하나마키에겐 그것도 보이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얼굴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홍조가 그의 얼굴을 퍽 앳돼 보이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남이 보았다가는 첫사랑 상대라도 만난 줄 알 것이다.


“존잘님!”


두 손을 꼭 붙들며 황송해하는 하나마키를 보며, 마츠카와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게 그리도 좋은가. 목덜미까지 발개져선 웃음도 채 숨기지 못하는 그가 꽤나 어리숙하게도 보였고, 동시에 귀엽게도 보였다. 마츠카와의 시선이 슬그머니 하나마키의 입술을 향했다가 조금 내려간다. 아, 보다보니 진짜 졸라게 취향인데. 확 꼬여내서 하룻밤 자버리면 안 되는 걸까? 정말로? 상호 합의면 문제될 거 없지 않나? 지인의 충고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장된 지 오래였다.

 

하나마키는 근래 들어 좀 더 바빠졌다. 끊임없이 핸드폰만 붙들고 사는 그의 모습에 동기들은 여자 친구가 생겼냐며 야유했지만 그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 마는 정도였다. 그 때문에 하나마키를 짝사랑하던 몇몇 학생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으나 하나마키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늦었잖아.”

“식사는 혼자 좀 하면 안 돼?”


짜증스럽게 말을 받으며 하나마키는 반대편 의자를 빼 앉았다. 마츠카와가 기다리겠다고 문자한지 이십분이 더 지나서였다. 무작정 먼저 문자로 통보했다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먼저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기다리고 있던 건 좀 의외였다. 물 한 컵만 앞에 둔 마츠카와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여기 해물 파스타가 맛있다더라.”

“고작 그런 이유로 문자한 거야?”

“점심 안 먹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나마키의 입술이 까무룩 닫혔다. 마츠카와는 점원을 부르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스타나 음료 따위를 주문하고선 턱을 괸 채 슬며시 웃어보였다. 도대체가. 하나마키는 본인의 시간표를 알려준 적이 있었나 고민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늘은 강의가 내내 연강이라 점심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늦게나 챙겨먹는데 타이밍을 놓치면 귀찮아서 넘어가기 일쑤였으므로 빈 배가 쓰렸다. 마뜩찮은 기분이 든다. 마츠카와는 그 이상 하나마키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고, 하나마키 또한 얌전히 메뉴판이나 뒤적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놓이는 음식이 얼마나 반갑던지. 제 앞에 놓이는 음식을 한 번, 마츠카와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번 보는 하나마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안 먹어?”

“먹었어.”


거짓말이다. 마츠카와는 사실 별로 먹을 생각도 없었고, 그것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생각 또한 없었다. 짤막한 대답에 더 묻는 것도 애매하다 여겼는지 하나마키는 입을 닫았다. 무어라 더 묻고 싶은 게 얼굴에 뻔히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츠카와는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몇 가지 연락이 쌓여있었다. 마감 관련으로 일정을 좀 조정하다보니 시간 빼는 게 퍽 어렵다.


자신을 눈앞에 둔 탓인가 내내 좋지 못한 얼굴이더니 또 음식은 입에 맞는지, 하나마키의 표정이 조금 갠다. 제 앞에 놓인 음료도 밀어주며 마츠카와는 빙그레 웃었다. 원고에 이따금 쓰던 표현이지만, 먹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단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엉망이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에 하나마키의 얼굴은 또 다시 이상해진다. 도대체 마츠카와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려나 싶었더니 이건 또 무언가. 무시한 채 묵묵히 음식을 비우고 음료 잔까지 비우니 먼저 일어나 계산까지 하는 모양새가 꼭.


“점심은 챙겨먹고 해.”


데이트 같은데. 그 미묘한 분위기에 옆에 머쓱하게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서있자니,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마츠카와가 웃는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엔 미묘한 분위기가 묻어있었는데, 그걸 제 입으로 지적하면 안 될 것 같아 하나마키는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렸다.


“바빠서 연락 잘 안 될 거야. 수업 잘 챙겨듣고.”


그 말이 꼬박 한 달은 이어지리라고 하나마키는 그때 추후도 짐작하지 못했다. 신경 쓰지 마. 퉁명스러운 대답 뒤로 거짓말처럼 마츠카와의 연락이 끊겼다. 손을 핑계로 몇 번이고 불러내더니, 정말로 연락이 끊겨버린 것이다. 그 뒤부터 점차 하나마키가 핸드폰을 쥐고 사는 것도 드물어졌다. 시간이 겹치던 교양 시간에도 출석하는 일이 없었다. 매번 마츠카와가 결석계를 내니 정말로 얼굴 볼 틈이 없다.


“너 정말 연애하는 거 아니지?”

“헛소리 하지 마.”

“누구 연락 기다리는 눈치인데. 전에는 뺀질나게 핸드폰만 쥐고 살더니.”


동기의 어이없다는 듯 한 답변에, 하나마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건 그냥…… 신경 쓰여서. 자신이 다치게 했으니까 책임 져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고작 그런 일 가지고 계속 이런 소릴 들으니 하나마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신경 쓰이면 먼저 연락하고도 좀 그래. 매번 받기만 하니 넌 그런 것도 모르지.”


칙 탄산음료 캔 따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하나마키는 오래 핸드폰 액정을 어루만졌다. 녀석에게 먼저 연락할 사이던가, 자신이. 그냥 연락만 받고 말던 사이지 안부를 묻고 그럴 사이는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하나마키는 곧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리며,


“별 일 아냐. 우리 오랜만에 술 마실까?”


말쑥하게 웃는다. 그래, 바쁜가보지. 일 있으면 연락할 테고 그냥 신경 끄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중요한 연락도 없다. 무음으로 설정한 핸드폰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오늘 하루는 생각 없이 술이나 들이붓자. 동기들과의 자리도 자꾸 빠지는 것도 신경 쓰이고. 그런 하나마키의 말에 동기들이 웅성웅성 모이며 술자리를 약속했고, 하나마키는 어깨를 들썩였다. 오늘 밤은 정신 놓고 달릴 생각이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 액정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츠카와는 밀린 원고를 막 끝낸 참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하나마키였다. 사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지냈다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워낙 일정이 밀려들어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을 때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럴 때면 꼭, 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방적으로 혼자 하는 연애. 그게 문제였다.

 

“안 받네.”

 

통 연락이 되질 않는다. 분명 제가 무슨 연락을 해도 꼬박꼬박 받았었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묻자니, 하나마키와 자신의 관계도부터 물을 것 같았다. 번거로워지는 건 상관없지만 하나마키가 신경 쓸 것 같았기에 접어두는 수밖에 없다. 보는 눈을 신경 쓰는 타입 같았다. 행사에서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마츠카와는 아니었다. 트잉여들이란 으레 그렇듯이 자신의 사생활을 트위터에 남겨두기 마련이니까. 하나마키의 타임라인을 내려다보며 짧게 조소한다. 이거, 제대로 스토커 짓이지.

 

술 마시고 있어요, 쨘.

 

술잔 사진이 올라온 걸 보며 마츠카와는 옷을 걸쳐 입었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주워 입던 주제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셔츠에 가디건, 일자핏 바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짧게 웃는다.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얼굴이 거기 있었기에. 상호명은 쓰여 있진 않았으나 가는 술집은 알만했다. 강의가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학교 녀석들이 가는 곳이라면 주위일 게 뻔했으니까. 그런 마츠카와의 상황을 알 턱 없는 하나마키는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척척 쌓여가는 술병을 보며 주위 동기들은 조심스레 눈짓을 주고받았다. 차였냐? 아닐걸. 연애하긴 한 건 맞아? 아니라던데? 손짓발짓을 동원한 수신호들이 몇 번 오가고, 평소라면 그걸 보고 뭐하는 짓이냐며 핀잔을 남겼을 하나마키도 잠잠하다. 쌓여가는 술병을 보다 못한 유우지가 손목을 붙들었다. 그제야 하나마키의 질주가 멈췄다.

 

“너 오늘 좀 이상해. 알아?”

“유우지…….” 하나마키의 말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미안한데 내가 이쪽에 볼일이 좀 있어서.”

 

불쑥 끼어드는 말. 유우지는 제 어깨를 내리누르는 낯선 이를 돌아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알 턱이 없다. 하나마키와 교양이 겹칠 뿐이지 그와 교양이 겹치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를 보는 얼굴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견제하는 이의 얼굴이었다. 대체 무엇을? 채 묻기도 전에 자연스레 하나마키를 챙겨드는 모습을 보며 유우지는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웃음에 가깝기도 한 것이었다. 이것 봐라, 같은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하나마키.”

“……누구세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억양에 저를 정말 못 알아봐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츠카와는 모른 척을 한다. 버둥거리며 벗어나려는 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마츠카와는 친밀감을 과시한다. 사실 그는, 여기 들어서기 전까지는 기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하나마키 선배 여자 친구 있대?

글쎄, 없다는 것 같던데.

그럼 내가 고백해도 되는 거겠지?

 

못된 성질머리가 나올 뻔했다. 그것을 참아 누르며 마츠카와는 없는 인내심을 끌어 모아야만 했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숨만 몰아쉬는 이 술주정뱅이는 영모를 속내겠지만. 마츠카와의 웃음이 짙어진다.

 

“미안한데 먼저 가봐도 되지.”

“그, 그럼 물론이지. 그 녀석 많이 취하기도 했고…….”

 

사방에서 말소리가 쏟아졌다. 조심해서 돌아가라던가, 벌써 가느냐는 야유. 혹은 같이 마시고 가라는 말. 그러나 그런 말들은 곧 마츠카와의 표정에 의해 사그라들고 말았다만. 밤길은 어둡고, 가로등의 불빛도 유난히 희미했다. 술주정뱅이는 무어라 말을 뱉어내는데 그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마츠카와는 잠자코 하나마키를 부축할 뿐이었다. 제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매달린 이에게서는 술 냄새, 그리고 답지 않게도 비누냄새가 났다. 사내새끼가 이런 냄새가 다 나고. 마츠카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하나마키는 죄다 어울리지 않는 것 투성이었지. 그런 얼굴을 하고선 제 작품을 좋아한다느니, 그렇게 열정적인 얼굴을 할 때면 마츠카와는 어쩐지 말문이 막히곤 했다. 온라인에서 온갖 애정을 받는 이였지만 그래도 하나마키의 애정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눈길을 끈다. 굳이 해오지 않던 짓까지 벌이며 하나마키를 붙들어두고 있는 건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마츠카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아무리 외면해도 모를 수 없었다.

 

“너는 모르지.”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흰 피부에 자국을 남기고 싶다. 그간 자신의 섹스 라이프를 잘도 트위터에 업로드 한 주제에, 하나마키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자신만 알고 자신만 알게 두고 싶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중얼거리는 말이 잦아든다. 사람이란 그렇다. 말이 닿지 않을 곳에서 누그러들고, 듣지 못할 곳에서 솔직해진다.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여러 사정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매번 그런 식으로.”

 

그러나 불쑥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말은 저도 예상치 못했던지라, 마츠카와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이 번진다. 하나마키의 뺨이 붉었다. 눈가도 붉었다. 술로 젖은 입술도 붉었다. 온통 붉은 색이다. 아니다, 가로등 색이 붉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앞세우지. 너.”

 

뇌까리는 말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못 알아들은 척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런 마츠카와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하나마키의 입이 다물어진다. 마츠카와는, 그게 참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진중해질 생각이 없는데도 자신은 이상하게 깊어지고 싶은 놈처럼 군다.

 

“혼자 앞세우지 말란 말처럼 들리는데.” 답 없는 이를 내려다보며 마츠카와는 애매하게 웃으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건 배운 적 없고?” 말이 끊긴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여기에 이를 세울까, 그러면 그가 영영 도망칠까 그런 것들을 계산했다. 술에 취한 이에게 분위기가 앞서서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도 술에 취하는 것만 같았다. 네 체취에 묻은 알코올 냄새에 취했나. 마츠카와는 대책 없이 일을 벌이지만 책임지지 못할 짓까지는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충동적인 순간엔 그런 것을 죄다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리 굴면 자신이 짐승 새끼랑 다를 게 뭔가. 너 금수 새끼잖아, 하고 웃던 지인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정말로 금수처럼 굴어서 되는 건 아니지.

 

“먼저 연락하고 그러래.”

“누가.”

“친구가.”

“그래서?”

“몰라. 이거 신경 쓰이는 건가?”

 

술 취한 이의 언사는 가볍고 또 다음날이 되면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묻는 말에 고분고분 답하더니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그런 하나마키를 보며 마츠카와는 무언가 아주 낯선 얼굴. 꼭 타인 같은 얼굴을. 애초에 타인이었으나, 타인이고 싶지 않은 자가.

 

“신경 쓰여?”

“마츠카와……,”

 

말이 끝맺어지지 못했다. 쉼표로 끝난다. 그러나 곧 마츠카와에 의해 문장부호가 닫혔다. “나는 쓰여.” 짤막한 선언은 참으로 간결하다. 오해할 여지 하나 없이 담백한 문장이었기에 하나마키는 오히려 입력이 더 느렸다.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그렇지, 술을 마셨다. 자신이 참 많이도 마셨다. 존댓말을 하다가, 반말을 하다가, 그러다가 또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존댓말을 했는데. 그래서 마츠카와가 다쳤고 그래서……. 머릿속이 꼬인다. 시간 배열이 뒤죽박죽 되어서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다시 의문이다.

 

“신경 쓰여, 타카히로.”

 

허락하지 않은 이름이 또 다시 불쑥 떨어진다. 아주 긴밀한 사이에서나 부르는 이름. 허락하지 않은 이가 부르면 불쾌할 호칭. 그러나 그것이 이번에는 아주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래서 하나마키는 울렁한 이 기분이 숙취 때문이라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이 호칭 고쳐주려고 했었는데. 또 놓쳤네.

 

“온통 붉어. 알아?”

 

뺨을 어루만지는 손은 다정하고. 이전 날 한 번도 그런 얼굴을 한 적도 없던 이가 그토록 다정한 낯을 하면. 아, 하고 탄식해버리고 만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가 자신의 어떤 부분에 약하게 굴지 안다. 그에게 어떤 걸 제시하면 못 이겨 넘어올지 안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휘두르려고 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이제는 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싫어?”

 

충동적인 물음이다. 하나마키는 자신이 뱉어놓고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무슨 쪽팔린 질문인가. 어름어름 시야가 흐려진다. 머리도 아팠고, 속도 쓰렸다. 술을 너무 마신 게 틀림없다. 그러고보니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아니.” 마츠카와는 짧은 웃음을 삼킨다.

“네가 그래도 미치도록 예쁘다면 믿을래?” 쏟아지는 말.

 

말이 너무 다정하다. 그래서 이 밤에 밤이 아닌 것 같았다. 하나마키는 느리게 눈을 깜박인다. 제 뺨에 와닿는 입술은 낯설고, 또 낯설다. 많은 것이 스쳐지나간다. 그가 부린 심술, 혹은 모호했던 식사. 그리고.

 

“연락도 없었으면서.”

“바빴어.”

“바쁘면 또 연락 하지 않을 셈이야?”

 

왜 그게 갑작스럽게도 서러운지.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울음을 삼키는 것처럼. 울고 싶지 않아 하나마키는 숨을 삼켰다. 흡, 하고 폐부에 숨이 차오른다. 그러니까. 울지 않을 셈이다.

 

“미안해.”

 

영 사과를 모르는 놈일 줄 알았다. 뻔뻔하게만 굴고, 그래도 되는 것처럼 굴어서 사과 같은 건 할 줄도 몰랐다. 멀거니 마츠카와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나마키는 정말 죄다 꿈같았다. 현실성이 없어서 땅이 자꾸만 가까이 온다. 몸이 기우는 것 같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단단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

“너는 죄다 예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돌아오는 물음에 마츠카와는 주저 없이 답한다. 뺨을 쓸어주는 손길. 가까이에서 들리는 숨소리. 골목길에 가로등이 고장났나봐. 불이 꺼져있어. 오늘따라 불빛이 더 파리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없네. 뭐가 그리도 예뻐. 그래서 그런 눈을 하고 있어?

 

“그래서?”
“같이 해볼까, 연애.”

“그러면 뭐가 좋은데?”

“네가 그려달라는 건 죄다 그려주고 책도 죄다 가질 수 있지.”

 

어이없다는 듯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마키는 샐샐 웃고 만다. 아, 그러니까 이건 프러포즈다. 틀림없다.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프러포즈를 방금 받았다. 좋아하는 존잘님이 책을 죄다 준다고, 그림을 그려준다고. 좋아한다는 말보다 이 말이 더 와닿게 느껴지면 씨발 자신도 좀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좋았다. 졸라게도 좋았다. 그런 하나마키의 표정을 살피며 마츠카와는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랑 좋은 짓도 할 수 있지.”

“좋은 짓?”
“나 섹스 잘하거든. 타카히로.”

 

씨이발. 단말마와 함께 하나마키의 얼굴이 시뻘겋다. 마츠카와는 웃는다. 뒷목을 붙드는 손. 목을 느슨하게 내리누르는 손톱. 조여온다. 꼭 벗어날 수 없을만큼 그렇게.

 

“그러니까 우리, 키스부터 할까.”

“내 대답, 궁금하지도 않나.”

 

입술이 닿기 직전 마츠카와는 말했다. 웃는다.

 

“네가 날 거부 못할 것 알아.”

 

삼킨다. 숨. 삼켜진다.



더 쓰지 않는 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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