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민준은 혼자 중얼거리며 연신 심각한 얼굴을 했다. 참나, 뭐라 궁시렁거리는 거야? 보기 답답했는지 준호가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아니, 알잖아요 저. 은근 예민해서 잠자리 바뀌면 못 자는 거."

"응. 그런데?"

"그런 제가 어제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었잖아요..!"



 말도 안 돼…. 심지어 나는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 호들갑을 떨어대며 열변을 토하는 민준이었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준호는 어휴, 말을 말자 싶어 슬며시 귀를 닫았다. 겨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건만 순진한 찬성은 영양가 없는 소리를 또 열심히 들어주고 있었다. '팀장님 그런 것치고는 밥 먹고 바로 곯아떨어지셨어요..' 잠자코 듣다가도 찬성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문장에 입이 달싹거렸지만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셋은 줄줄이 찬성의 집을 함께 나섰다. 찬성은 홀로 외로이 집에 있는 게 일상이었는데 출근길까지 같이하니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정신은 조금 없더라도 왁자지껄한 이 분위기가 꽤나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은 동료이자 가족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럼 점심시간에 봅시다들!"

"민준, 수고-."

"고생하세요."






구미준호뎐_제 10장






"자, 다들 소식은 들으셨죠? 오늘부터 전략팀을 맡게 된 장우영 씨."





"안녕하세요, 장우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영을 소개한 과장의 뒤로 깔끔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3피스 수트를 차려입은 우영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인사하자 사무실 내 여직원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서로 얼굴을 붉혀가며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얘기하느라 바빴다.


- 어머, 완전 내 스타일.

- 뭐래? 나는 원래부터 무쌍 좋아했어.


 갑작스레 거울을 보며 얼굴 점검을 하지를 않나 두 명, 세 명씩 모여 웅성거리는 통에 사무실 안은 꽤나 부산스러워졌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다른 직원들은 슬슬 과장님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막상 당사자는 관심도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들이 속닥 거리거나 말거나 그저 아까부터 사무실을 둘러보는 척 바깥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음·· 이사실은 어디에 있나….



"아, 마침 지나가네. 김 팀장! 여기 새로 오신 전략팀장."

"안녕하세요. 장우영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옆 부서니까 이제 자주 보겠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서로서로 잘 좀 도와주고 그래."



 민준은 서류를 들고 지나가던 찰나에 얼떨결에 붙잡혔다. 과장의 소개로 대뜸 인사부터 나누었다만 민준은 상대의 눈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 사내 인싸로 유명한 민준인데 답지 않게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상대가 별다른 말없이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우영이 먼저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손바닥을 펼쳐 내보였다. 깔끔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성격도 좋아 보였으나 민준은 왠지 살갗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이었다. 형용하기는 힘들지만 뭐랄까.. 그냥 직감적으로 드는 거부감이란 게 있었다.

 우영이 내민 손을 선뜻 붙잡기에는 망설여져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옆에서 과장이 등을 툭- 쳤다. 김 팀장 뭐해? 눈치를 주는 그의 입모양이 보였다. 아무래도 첫 만남에 무시하는 건 아니다 싶어 민준은 손을 고쳐잡으며 악수에 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우영은 민준의 반대 손에 들린 결재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결재란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곧 이사실로 향하겠군. 이준호의 최측근이 바로 옆 부서에 있겠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는 느낌에 우영은 한결 편안해졌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다른 팀원들을 소개받는 와중에도 눈동자를 굴려 민준이 사라지는 뒤꽁무니를 쫓을 수 있었다.












"이사님, 혹시 오늘 새로 온 팀장 봤어요?"

"아니?"

"그 사람 좀 께름칙해..."

"오늘 처음 봤는데 무슨."

"아냐.. 그냥 내 촉이 그래요."



 남자의 육감 몰라요?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내뱉는 민준의 말에 준호는 피식 웃었다. 또 헛소리한다 김민준, 밥이나 먹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민준이 좋아하는 반찬이 보이자 그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따뜻한 마음씨와 달리 행동은 얼른 입 닫고 밥이나 먹으라며 젓가락을 휙휙 저어 보였다.



"아, 그리고 이름이 뭐라더라? 장…"



 민준은 자신 앞에 놓인 두툼한 계란말이를 얼른 집어삼켰다. 음식을 씹느라 입을 우물 우물 대면서도 아까 하려던 말을 이어가려 했다. 급하게 자리에 앉는 찬성이 오기 전까지는.





"죄송해요! 늦었죠. 비서실로 자꾸 이상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아니야 찬성씨. 우리도 방금 막 수저 들었어."

"흐음.. 아침부터 계속 전화 업무 보던데... 내가 선을 아예 확 뽑아놔 버릴까?"



 말만 해, 뭐든 다 해줄 테니까. 그리 말하는 듯 자신만만해 보이는 이사님의 표정에 찬성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아, 귀여워. 오전부터 정신없이 일처리를 하느라 고개만 들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게 이사실인데 고거 잠깐 볼 새도 없었다. 안 그래도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우울하던 참에 괜히 오버해가며 편을 들어주는 준호를 보니 어째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에요. 별거 아니었어요."

"저기요, 이사님? 이상한 데서 권력남용하지 마시고요. 찬성씨 배고플 텐데 얼른 먹어~"

"네- 맛있게 드세요."



 아침에 우영을 만나고부터 계속 알 수 없는 기분에 둘러싸인 민준만큼이나 다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중인 모양이었다. 오전 내내 시달렸는지 혼이 빠져 보이는 찬성이 어쩐지 측은해 보여 민준은 고기반찬을 슬쩍 그의 앞으로 자리를 바꿔 주었다.



"아 맞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준호는 민준이 앞서 하려다 말았던 이야기에 대해 되물었다. 흠.. 이걸 얘기해? 말아? 민준은 젓가락 끝을 물고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말을 꺼내봤자 서로 찝찝함만 나눠가질 것만 같은 느낌에,



"으음… 아니에요. 이거 맛있다고요."



 민준은 결국 싱거운 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힘 빠지는 대답에 준호는 김이 픽, 새 버렸다. 일부러 민준은 헤헤-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괜히 얘기했다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일까 봐 오늘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민준은 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밥과 함께 하려던 말도 꿀꺽 삼켜버렸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도 영 의심스러운 장우영 씨는 혼자 슬쩍 알아보기로 생각했다.












 우영은 무엇이든 혼자 움직이고, 혼자 해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단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 보니 회사에 들어온 첫날부터 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었다. 지금부터 여기서 알아볼게 얼마나 많은데 어찌나 인간들이 붙잡고 안 놔주는지. 도통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우영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꺼냈다. 출근 첫날이니 건물을 좀 둘러보겠다는 한 마디에 온 직원의 관심이 한데 쏠렸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그가 말없이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여직원들이 모두 그를 따라나서려고 하는 바람에 우영은 또 한 번 식겁하기도 했다.



"아뇨!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따라올세라 우영의 발걸음이 자꾸만 빠르게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분명 김 팀장이 10층으로 향했는데 말이지."



 천천히 둘러볼 거라 오래 걸릴수도 있다는 핑계로 겨우 팀원들에게서 혼자 빠져나온 우영은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인적이 드문 건물 내부에 점차 발걸음이 느려졌다. 우영은 속도를 낮추며 층별로 복도를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략 이 회사의 건축 도면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장소는 대충 파악 끝냈으니 이제 우영이 찾는 이만 나타나주면 될 것 같았다. 이사실 위치도 알았고, 다만 안에 있어야 할 방주인이 없네? 역시 이렇게 쉽게 만날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부터 미세한 푸른 기운이 물 흐르듯 우영의 앞까지 흘러 넘어왔다.



"...저기 있다, 구미호."



 꼬리가 길면 아니, 여러 개면 잡히는 법. 분명 정갈한 수트 차림의 남성이었지만 우영의 눈에는 갈라진 하얀 꼬리가 넘실넘실 살랑이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듯해 보였다. 구석으로 쏙 사라지는 꽁무니를 쫓아 우영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놓치지 않으려 그의 등만 따라가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있는 창고 문 앞까지 이르렀다. 우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기름칠이 필요해 보이는 오래된 철문이 끼익- 거리며 거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황비서, 나 혼자 찾을 수 있대도?"



 꽤나 시끄러운 소음에 돌아 볼 법도 한데 먼저 들어 간 이는 별다른 미동도 없었다. 그저 먼지 더미에 쌓인 파일 뭉치를 뒤져보고 있을 뿐. 오히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류를 넘겨보며 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우영은 조용히 있어야 하나, 대뜸 인사를 건네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크음, 어쩌죠. 저는 황비서가 아닌데."



 보아하니 따라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비서인 줄 알았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던 준호가 들고 있던 서류를 그만 놓쳐버렸다. 그 바람에 많은 양의 종이가 눈앞에서 휘날리고 있었지만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우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멋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우영이 통성명도 인사도 없이 창고에 따라 들어와 버린 것을 잠시 후회했다. 



"제가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데, 그.. 음."

"장우영...?"

"어? 제 이름을 어떻게…."

"..맞아?"

"아, 이미 인사 서류를 보셨겠구나."



 우영은 이미 이준호와 김민준의 이름, 주거지, 그들이 여우라는 것쯤은 다 파악을 끝내 놓은 상황이었지만 상대는 아니었다. 인사 서류는 개뿔. 우영의 개인 정보 따위는 애초에 여기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회사 담당자 한 명을 포섭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이준호가 명찰도 없는 우영을 벌써 알 리가 없었다. 이미 내 뒤를 캔 건가? 하지만 여기서 당황하면 안 된다. 우영 역시 부러 처음 보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제가 앞으로 전략팀을 맡게 된…,"



 우영이 뒤늦게나마 상황 설명을 위해 자신을 소개하려던 차에 준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무래도 첫 만남을 이렇게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두서없이 마주하는 것은 무리였다. 타이밍을 재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들어와버린 것은 매우 충동적이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우영의 행동에 화가 난 걸까.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준호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아무래도 곧 문을 박차고 나가겠다 예상한 것도 잠시, 남자의 몸이 그대로 와락- 포개어졌다. 어찌나 강하게 안았는지 우영의 몸이 반동에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억, 저기.."

"...보고 싶었어."



 이 목소리. 며칠간 그를 심란하게 만든 목소리가 맞았다. 우영은 그날 이후 낯설면서도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음성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준호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확인받으니 오히려 더 혼돈스러웠다.

 ...이준호 당신, 대체 뭐야?






"많이 보고 싶었어, 우영아."



 우영·· 우영아… 혼자 읊조리는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첫사랑 이름이 우영이라도 되는 건가? 막을새도 없이 품에 안겨버린 남자를 떼어내지도 못하고 팔만 벌린 채 멈춰 버렸다. 그 덕에 준호의 몸과 우영의 가슴팍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둥둥둥-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떨림이 빠르게 진동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기.. 이사님? 초면에 이러시면..."



 ...조금 곤란한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을 내치지 않는 상대에 준호는 왠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찾던 장우영, 드디어 만났구나. 그에게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부비적거리는 준호였다. 좁아진 거리만큼이나 가까워진 살결에 우영은 준호에게서 어째 언젠가 느껴본 듯한 따뜻함을 느꼈다. 대체 뭘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혼자 고심하는 와중에 준호의 어깨너머로 백색 꼬리가 스멀스멀 튀어나오려는 것이 보였다.

 역시, 괜히 구미호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저 교활한 여우에게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우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대방의 어깨를 급히 떼어냈다.



"이사님, 저희는 오늘 처음 뵙습니다만."

"......"

"...이사님?"

"아... 아, 아!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울렁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던 준호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때 그 시절의 모습에서 그대로 자란 것이 역력한 남자를 보고 몸이 멋대로 반응해버렸다. 이번엔 진짜 장우영을 만났다는 생각에 무작정 돌진. 심지어 이름 석 자까지 똑같으니 준호에게 의심의 여지란 없었다.

 금방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준호는 멍하니 얼음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번뜩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되돌아 감기 마냥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제서야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준호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수습되지 않는 이 공간을 황급히 벗어나버렸다.



"다, 다음에 봬요. 죄송합니다."



 준호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어두운 창고 안은 가벼운 먼지만이 휘이 날리며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멀뚱히 홀로 남겨진 우영 역시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대체.












"할멈·· 이번 한 번만 좀 봐줘…."

"......"

"응? 진짜 우영이 맞다니깐."

"…너, 10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똑같이 그 말 했어."



 이제 잊고 살겠다더니 갑자기 왜 또 그 타령이야. 준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할멈은 그저 흘러내리는 안경만 고쳐 쓸 뿐이었다.



"뭐, 또 어디서 똑같이 생긴 인간이라도 봤나 보지?"



 아까부터 들은 척도 안 하던 할멈이 드디어 대답이라도 해주자, 준호가 눈을 반짝이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응, 얼굴도 같고 이름도 같아."

"겨우 그걸로 그 사람이 환생했다 확신하지는 못해."

"알아, 근데 내가 느꼈어··. 이번엔 진짜 장우영 맞아."



 흐음…. 확신에 찬 준호의 목소리에 탈의파는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할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생겨버렸구나. 이번 생에는 서로에게 닿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니까, 그걸로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안되는 거 너도 알잖아."



 준호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오래된 구슬 하나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탈의파 할멈이 가진 이 신비한 구슬에는 사람의 전생이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놈이 이 구슬에 대해서 또 언제 알아가지고는.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이 있듯이 무엇이든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도이려 해가 되는 법이다. 할멈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온 준호를 알기에 더더욱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면 할멈.. 환생하면 원래 기억을 아예 못해?"

"...준호 너 정말,"

"물론 모르겠지.. 이전의 삶이니까. 그런데 본능적으로라도 일깨워질 수 있잖아."





 우영이가 나를... 잊을 리가 없잖아. 준호를 처음 보는 듯 당황스러워하던 표정과 조금은 불쾌해 보이던 우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준호는 심란한지 커다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후우-, 마른 한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진짜 장우영이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일말의 불안감과 맞다 하더라도 준호는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뜸 전생에 우리가 만난 사이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우영의 아픈 기억을 들추기보다는 모든 걸 잊고 새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게 맞는 걸까. 이러나저러나 준호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준호. 분명히 말해두건데, 그자가 환생자든 아니든 더 이상 인간과 엮이지 말거라."

"할멈.."

"또 한 번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인생에 개입하지 마.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야."



 날카롭고 무겁게 깔린 탈의파의 목소리에 준호는 더 이상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시 할멈은 다 알고 있었던 거다. 우영이 이미 환생했다는 것도, 우리가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준호는 우영이 환생하기만을 오래도록 바라왔지만, 그 일이 드디어 이루어졌음에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할멈이 마지막에 한 말 때문일 것이다. 또 한 번 잃을 수도 있다라··. 그 경고만이 귀에서 맴돌 뿐이었다. 우영이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 또다시 피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일 마주쳐야 할 그 얼굴을 보고도 준호가 티를 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본인의 앞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 두 번의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얘기는 잘 하셨어요?"

"뭐… 대충."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준이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준호를 발견하고는 곁에 붙어 섰다. 대답과 달리 얘기가 잘 안된 건가. 호기롭게 들어가던 처음과 상반되도록 지금은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정말 500년 전 그 분이 환생한 거에요?"

"응. 할멈은 아무래도 알고 있었던 눈치야."



 이야- 할멈 아직 싸롸 있네. 아까보다 많이 다운돼 보이는 준호를 눈치채고 괜히 우스갯소리도 던졌다. 그 노력에 힘 없이 입꼬리를 웃어 보이는 준호를 보니 민준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졌다. 덩달아 눈치를 보던 민준이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물건 주인 맞죠?"

"......"

"예전에 버려달라고 했던 물건들요.. 제가 제대로 처리 못해서 죄송해요."



 민준은 자신 때문에 준호의 과거를 여태까지 제대로 끊어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워낙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법이 없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물건의 주인이 그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게 오늘 만난 장 팀장이라는 것은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환생한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한 기운을 가지지는 않을 텐데.. 민준은 오늘 우영에게서 느낀 소름 돋는 감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리송한 생각에 잠겨 민준이 별다른 말이 없자 이번에는 준호가 옆을 쳐다보았다. 얘 또 자기 때문인 줄 알고 자책하겠네. 고심하는 얼굴을 보다 표정을 풀라며 민준의 어깨를 작게 토닥여주었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는데 괜히 애꿎은 이에게 마음의 짐을 나눠가지게 해버린 것 같다.



"그런 거 아냐. 나도 못 버렸을 물건들이야."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떡하실 거예요?"

"음.. 아는 척 안 할 거야."

"네?"

"그러니 너도 모른척해."

"그렇지만…. 준호님이 오랫동안 찾아헤맨 사람이잖아요."



 같이 길을 걷다가도 뭐에 홀린 듯 누군가를 보며 뒤를 쫓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준호는 찾는 이가 아니었는지 굉장히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왜 그러는지 민준이 이유를 물어보아도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 말만 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를 만나게 되면 준호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른 척을 하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한 소리 들은 거겠지. 할멈은 이전에도 한 번씩 준호의 과거를 두고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 만나 화를 입은 것이라고 언질 해주고는 하였으니 말이다. 불쌍한 우리 준호님.. 회사에서 어찌저찌 피해 다닐지라도 장 팀장과 결국엔 마주칠게 뻔한데 어쩌시려나 모르겠다. 이번에는 민준이 손을 올려 준호의 어깨를 통통 토닥여주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둘은 참으로 질긴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이들의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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