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비

연꽃에



세넬리티에게






쏟아진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깜빡이는 시야 속 속눈썹에 걸린 물방울이 인사했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도

하늘이 차마 품지 못한 물방울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내듯이

흘러넘치고 있어요.


*


아침부터 스산한 물안개가 껴있던 것이, 이리도 비가 올 줄 세넬리티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제하와 나가기로 약속한 날이라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오긴 했다만, 결국 비는 내렸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금 그녀는 제하의 ‘단둘이 있고 싶어’ 계략에 말려들어 무리와 이별한 채 제하와 단둘이 숲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제하와 단둘이 있는 것은 좋았다. 호위하는 이들을 한두 번 쫓아낸 것이 아닌지, 호위무사들을 따돌리는 실력이 끝내주는 제하를 지켜보는 것도 즐겁기도 했어서, 세넬리티는 기꺼운 마음으로 계략에 걸려들어 주었다. 비가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연애질하는 말 두 필 위에서 연애질을 하고 있는, 아주 즐거운 상황이었다. 습한 공기, 흐릿한 시야, 눈에 가득 차는 녹빛, 그리고 수분을 머금어 한층 더 밝게 빛나는 제하의 하얀 머리카락. 붉게 물든 제하의 동공은 줄곧 세넬리티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러다가 가끔 나무에 걸려 넘어질 뻔하곤 했다. 그때마다 운동신경이 좋은 세넬리티가 재빨리 고삐를 틀어쥐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제하는 이미 습한 이끼들과 잔뜩 뒹굴었을 터였다.


어쨌든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어서 어딘가에서 비를 피해야만 했다. 제하는 이제 집중해서 말의 고삐를 잡고 숲속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작은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말에서 내린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꽤 최근에도 사람이 지냈던 건지, 모포 여러 장과 흐트러진 장작더미가 한 켠에 쌓여 있었다. 벽에는 전리품처럼 사냥한 동물의 가죽이 잘 말려 걸려 있었는데, 습기가 찬 것인지 조금 축축했다. 세넬리티는 물에 젖은 솜 같이 늘어진 피백을 벗어 돌돌 말아 물기를 짜냈다. 내친김에 배자도 벗어서 말렸다.


제하는 심의를 한참 전에 벗어던지고 내의 하나만 입은 상태로 장작더미 속을 뒤적거렸다. 하얀 옷감이 제하의 몸에 그대로 젖은 채 달라붙어 살색과 근육의 짜임을 드러냈다. 세넬리티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제하가 마침내 도끼를 찾아냈다. 장작 하나에 도끼를 꽂아 놓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윗옷을 벗어 조각상 같은 상반신을 습한 동굴 공기에 노출했다. 세넬리티는 괜스레 말을 붙였다.


“전하, 저 추워요.”


제하는 아무 말 않고 세넬리티에게 다가와 섰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거센 빗줄기 속을 헤집고 세넬리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까워, 전하. 가까워요!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섞일 즈음,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하가 걸어놓았던 사슴 가죽을 빼내어 세넬리티에게 건넸다.


“두르고 있어. 불 피워줄게.”


왜인지 묘하게 시선을 못 맞추는 제하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워서 세넬리티는 잽싸게 사슴 가죽을 낚아채 어깨에 둘렀다. 속적삼이 가슴에 들러붙어 하얀 살결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제하는 볼장 다 본 사이임에도 갑자기 부끄러워져 괜히 어깨를 뚜둑이며 몸을 풀고 도끼를 들어 장작을 팼다. 솜씨 좋게 불을 붙이자, 동굴 내부가 밝아지며 서로의 부끄러운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확히 만천하는 아니고, 동굴천하였긴 하지만.


불꽃이 너울거리며 제하와 세넬리티 두 사람을 위한 그림자 연극을 시작했다. 사슴 가죽에 제하의 냄새가 베어 있는 것 같았다. 가죽에 코를 묻으며 세넬리티가 졸린 목소리로 입을 열려는 순간, 떨어져 나온 나뭇조각을 단도로 깎고 있던 제하가 한 발자국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 모처럼의 사람 없는 곳으로의 외출이었는데.”


그는 장인처럼 나뭇조각을 깎고 있었다. 제하는 손재주가 꽤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넬리티는 대답했다. 따뜻한 불에 노곤해진 목소리가 동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제하에게 다가갔다.


“으응, 괜찮아요. 이것도 좋은 경험인 걸…. 있잖아요, 여기 숲은 황혼 대륙 숲이랑은 느낌이 달라요. 뭐랄까, 황혼 대륙의 숲은 이상한 것이 나온다면 요정이나 마녀일 텐데, 여기는 용이나 커다란 기린일 것 같은.”


제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가 깎아낸 나뭇조각이 튕기며 세넬리티의 무릎 앞으로 떨어졌다. 


“거기까지 날아갔어?”


“응.”


세넬리티는 나뭇조각을 집어 들어 화마의 탐욕스러운 입속에 집어넣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장작도, 세넬리티가 던져 넣은 나무도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뭐 만들어요?”


세넬리티는 불꽃이 안 젖은 피백처럼 하늘하늘 흔들리는 걸 쳐다보다 지루해져서 제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전례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 세넬리티의 허리를 지분댈 때 만큼 집중한 것 같았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정사가 떠올라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빨갛게 타는 불꽃 덕에 얼굴이 이미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어 다행이었다. 제하가 봤으면 분명히 놀렸을 터였다. 


“비밀.”


결국에는 보여줄 것이면서, 제하는 꼭 한 번씩 이렇게 튕기곤 했다. 세넬리티는 흐응, 비음을 내며 젖은 치마를 질질 끌고 제하의 옆에 가서 앉았다. 놀랍게도 제하는 여전히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는데, 세넬리티는 이미 머리가 조금 뜨거워진 상태라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단련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조금 축축해서, 제하의 목에 달라붙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목에 닿는 느낌이 너무 생경해서 제하는 괜히 헛 기침을 했다. 


“뭐야, 감기 걸렸어요?”


“아니야. 사례 들렸어.”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며 제하는 세넬리티의 머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볼에 닿는 차가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다만 한 가지, 너무 붙어 있던 탓에 폭죽이 터지는 듯한 이 심장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섞여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며 세넬리티는 눈을 깜빡였다. 몇 번 허공에 칼질을 하던 제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각을 끝냈다. 


“자.”


그건 나무로 만든 연꽃이었다! 제하는 생각 이상으로 손재주가 좋았다. 투박하지만 사랑스러운 작은 연꽃에 반해 세넬리티는 기뻐하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제하는 즉시 빼앗아 갔다.


“사포질 안 해서 손 다쳐. 나중에 줄게.”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내놓으라고 했지만, 제하는 목석처럼 대응했다. 나무 가시 손에 박히면 아프다는 소리만 하면서. 나한테 준 거 잖아요, 세넬리티는 항의했다. 제하는 손을 높이 들어 놀렸다.


“그럼 가져가 보세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악동같은 말을 내뱉었다. 승부욕이 불타오른 세넬리티는 제하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제하를 자빠트리고 위에 올라타 연꽃을 쟁취했다. 


“흥. 내가 이겼…. 잠깐, 당신 왜 서 있어?”


제하는 마른세수를 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넬리티는 연꽃 값을 하기로 했다. (完)






공방주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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