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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ci Yucca - 그땐 이럴 줄 몰랐는데



이동혁을 다시 만났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심사하러 왔다는 소문이 개소리가 아닌 걸 인증한 셈이다. 순서 대기타고 있다가 하품 나와서 이불만 깔아주면 바로 딥슬립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잠이 확 달아났다. 앞에서 점수 매기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지만 그게 이동혁이란 건 지금 안 사실이다. 젊음을 메리트로 삼아 각종 음악 예술 분야에서 뽑은 7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 앉아있는 얼굴을 보자마자 좆됐음을 감지했다. 대학도 안 나오고 고졸 딱지로 만족한 인간이 예대 피아노과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다니. 단언컨대 이럴 줄 알았으면 커리어에 도움 1도 안 되는 유치한 교내 피아노 대회 따위 안 나왔을 거다.

 

<제 1회 도시예대 피아노과 자유 연주대회> 학교 홍보영상 인서트를 따기 위해 각 과에서 한 명씩 뽑은 재학생에게 100만원 상금과 특정 과목에 가산점을 부여해주는 조건. 물론 나는 이 자리에 상금이나 가산점 하나 받겠다고 나온 건 아니다. 영상 인서트에 화려하게 얼굴을 비출 생각도 아니었다. 오로지 반항하려고 참석한 자리였다. 엉망으로 연주하고 아빠를 신봉하는 꼰대 교수를 대놓고 꼽주려던 계획이었다. 클래식이 아닌 곡은 다 쓰레기라 치부하는 교수 앞에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ost 정도를 기가 막히게 뚱땅거려주는 게 목표였다.

 

다들 고상하게 바로크 시대의 기품을 연습할 때 나만 파리넬리를 돌려보며 시간을 때웠다. 이 자리를 망치기 위해 이 갈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왜? 형편없는 연주로 다 얼빠지게 해놓고 아빠 얼굴에 먹칠하려는 지금 이동혁을 다시 만났는지 하늘도 참 자비 없고 무심하다. 1인자, 2인자 그딴 말 만든 인간을 족치고 싶었는데. 그게 너랑 내 순위를 매번 알려주는 게 불만이라 이동혁 근처에도 가기 싫었는데. 지금 꼬라지를 보니 웃음만 나온다. 쟤는 정식 코스를 밟고 어렵게 대학 입학한 애들을 심사하고 있고, 나는 쟤한테 심사받는 일개 피아노과 재학생. 뻥 하나 안 치고 존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김해니 학생?”

 

심사위원석에서 가장 고참인 교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목석처럼 몸이 딴딴하게 굳어있다가 쫄 거 없다는 뇌의 신호에 금방 페이스를 되찾는다. 감정이 결핍된 로봇처럼 눈만 깜박거렸다. 내 무덤덤한 표정이 썩 맘에 안 들어 보이는 꼰대 교수가 언짢아한다. 교수 반응 같은 거 애초에 신경도 안 썼다. 중요한 건 이동혁 눈에 보일 내 모습 따위다. 내 속이 얼마나 난리나 토네이도처럼 마구잡이로 휘잉 도는지 다른 사람 다 알아도 이동혁은 몰라야 한다.

 

근데 저 새끼 좀 봐라. 정말 하나도 안 빼고 그대로네. 뻔뻔해 빠진 얼굴 하며 놀란 기색도 없는 철면피. 손가락 사이를 틈틈이 들어가 재주처럼 부리던 펜 돌리기는 그쯤에서 멈췄다. 독일 유명 대학 간다고 난리 쳤던 애가 여기에 있으니 얼척이 없으신 모양이다. 반응이 저러니 묵혀둔 화가 발화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오는 그 중대한 시간에 대단한 사건을 투척해준 사람답다. 이동혁 덕에 나는 집안의 문제아로 아주 잘 자랐고, 지금도 변함없이 김씨 가문에 오점이다.

 

“내 말 안 들려요?”

“아니요? 잘 들리는데요.”

“근데 왜 그렇게 서 있기만 하죠? 연주 안 할 거예요?”

 

후회막심한 기억에 가로막혀 말을 잃어버렸다. 해야죠. 하려고 나왔는데 지금 상황이 그게 아니잖아요. 딱히 호소하는 눈은 아니었지만 나는 적잖은 사연이 첨가된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 생리현상 촉발로 인한 일시적 연주 거부 반응은 아닐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 없는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시간이 좀 필요한가요? 나는 고갤 젓고 또 침묵했다. 대체 어쩌자는 심보로 저러냐고 수군거린다. 긴 고민은 사실 필요도 없었다. 시간을 끈 것도 쟤 앞에서 연주를 하냐, 마냐, 고민한 게 아니었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 어떻게 돌아서야 그나마 덜 억울할지 계산한 거다.

 

나는 이동혁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 도대체 예명은 왜 쓰고 앉아있어. 본명을 안 쓰고 있으니 내가 그것도 모르고 여길 나오지. 짧은 순간에 빠르게 알아낸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이동혁이 쓰는 가명의 가운데 글자가 내 이름 가운데 글자와 일치한다는 것. 고의인지 우연인지 몰라도 이동혁이 <해찬>이란 예명 쓰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활약할 때, 김해니는 하루 일과 다 마치고 영양분 빠진 태양처럼 지고 있었다. 공연히 기대하게 만든 심사위원들한텐 심심한 위로를 일일이 전할 수 없지만 그냥 내가 변덕 심한 또라이 하고 말지.

 

“저 기권하겠습니다.”

 

아빠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교수가 이젠 질려 빠진 얼굴로 내 참가서를 휙 넘겼다. 저렇게 말 안 듣고 멋대로 구는 구제 불능은 갱생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한 속내가 드러났다. 망치더라도 대충 피아노 몇 번 치고 내려왔으면 기본 점수라도 얻었을 거다. 그러나 계획하고 있던 형편없는 연주로 이동혁한테 평가 대상이 될 생각은 없었다. 죄송하다고 예의 차려 허리 구십도로 숙여 인사하고 얼굴을 들었다. 좀 전과 똑같은 이동혁의 무표정이 뭘 말하고 싶은지 구체적이지 않다. 눈을 오래 마주했다. 3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불량함. 장난기만 쏙 빠져 이젠 사회적으로 조금 상승한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가 보인다.

 

한편의 무성영화처럼 재생되는 지금 이 순간이 아련한 소나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안 그렇다. 되살아난 기억이 우리에게 지긋지긋한 교복을 입혀 놓았다. 그로써 시작된 과거에 대한 회상이 토 나오게 싫다. 좋은 추억들도 다 부정적으로 만들 만큼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3년 전, 초봄의 도시예고 교정

 

규정이 자유로운 도예고에 혜성처럼 등장한 17살의 이동혁은 환대받았다. 유행만 쫓아가기 바쁜 민감한 예고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유행 주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딱히 노력형 유행 선두자는 아니고 걔는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 따지자면 애들이 따라오는 쪽이다. 빨강, 보라, 애쉬 그레이, 그것도 모자라 무지개색으로 곁들인 브릿지 머리까지 관심 대상이 됐다. 전교생 정수리가 이동혁 머리 스타일에 줄줄 따라갔다. 요즘엔 덜 튀어 보일 목적으로 무난하게 초코 색으로 덮었지만, 워낙 튀는 쪽에 속해 있어 시선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이동혁은 자사고 못지않게 돈깨나 나가는 이 학교에 시험 보고 1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애였다. 예술의 불모지에 등장한 원석 같은 놈. 그 원석이 둥근 구석 없이 날카롭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해진 틀을 벗어난 행동이 주목받았다. 나쁜 짓을 일삼는 불량 학생이라 보기도 애매했다. 면학 분위기는 망치지 않았다. 교우관계도 원만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동혁이 주축이 된 무리가 있는데 늘 시끄러웠고 행색과 말투로 보아 내 기준에 부합한 양아치로 떨어진다. 천재끼 때문에 학교에서 걔를 내치지 못하는 건 팩트였다. 학연, 지연, 혈연의 중점에 선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연도 없이 지 실력으로 버티는 것도 팩트.

 

애들 다 아는 이동혁 연대기를 설명하자면 꽤 복잡하다. 걔는 코찔찔이 때부터 이미 피아노 천재로 영재 소릴 들었고 좀 과장해 말하면 시대별 작곡가 곡들은 악보도 안 보고 칠 수 있는 정도다. 사춘기가 온 건지 회까닥 돌아버린 건지 중학생 때 피아노에 손을 놓기 시작하면서 이동혁 인생 굴곡은 살짝 변한다. 피아노보다 다른 악기를 손에 익혔고 한때 날라리들의 전유물 다름없던 밴드부에 들었다. 지금은 또 다르다. 트렌디한 음악 하겠다고 선생님들이 추구하는 예술과 조금 다른 방향을 걷고 있다. 정통 클래식을 추구하는 학교에서 실용음악 쪽에 가까운 작곡을 한다는 건 도전장을 내민 거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이동혁을 왜 학교에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모셔 놓냐.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트렌드든 정통이든 이동혁 앞세워 우리 학교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 수 있는 일이 많아서다. 학교는 그만큼 이동혁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가끔 선생님 말과 반대로 행동해도 예의는 곧 죽어도 차려 선생님들이 뒷목 잡는 일이 허다하다. 한마디로 걔는 지 하고 싶은 음악만 하는 애였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고지식한 입시 전쟁 지름길을 따라간다면 이동혁은 그 반대로 하는 인간. 그냥 골 때리는 천하무적. 규칙 같은 거 개무시하고 사는 게 습성인 애가 이동혁. 

 

그럼에도 무법지대에서 자란 원석은 존재 가치만으로 각광 받았다. 평소엔 무슨 생각하며 살지? 당최 그 속을 볼 수 없는데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진지하고 심각해지는 모습에 걔를 동경하는 애들도 한 트럭은 될 거다. 정해진 등교시간 넘기고 여유롭게 정문 통과하며 경비 아저씨한테 구십도로 인사까지 하는 대담함도 돋보인다. 오늘은 그나마 시간 안 넘기고 오나 싶었는데 조회 끝나자마자 가방만 던져놓고 이제노랑 매점 가기 바쁜 영혼이었다. 담임이 지 부르는 거 들었으면서 지가 판단하기에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명령 불복종의 반항적인 면모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 즉 교장실로 즉각 호출한 담임 말 같은 건 그냥 지나가는 개 취급한단 소리다. 이유가 구체적일 거다. 교장과 담임 말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무시한 거였다.

 

“동혁이 이노마는 여기가 지 놀이터인가 봅니다.”

“다시 부를까요?”

“그냥 둬요. 올 거 같지도 않구먼. 쌤이 대충 말했다며, 어련히 알아들었겠지.”

 

내년 2월에 열리는 전국 콩쿨에 교사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도시예대 입시 특별전형이 새로 추가되면서 콩쿨 입상자는 내신을 거의 안 보고 합격시키겠단 파격적인 조건이다. 학교는 국내 최고 예대를 보내기 위한 입시 전략에 촉각을 세웠다. 아직 내겐 1년 남은 대회였지만 교장 입장은 지금 준비하는 게 가장 적기라는 판단이다.

 

“동혁이가 도와주는 걸로 하자? 둘이 윈윈하는 거지.”

 

내 의견은 왜 묻나요? 말간 눈 깜박대며 교장을 봤다. 어차피 다 정해놓고 통보하는 식이면서 의견 묻는 척은 딱 싫다. 엘리트 코스에 꽃을 깔아주겠다는 다짐. 그걸 완벽하게 하기 위해선 계획이 필요했다. 출전 조건에 맞추려면 이번 해 예정된 국내 대회도 참여해야 한다. 교내에서 하는 소규모 대회도 무조건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생기부 스펙 쌓기 정도로 보면 된다. 그걸 순리대로 진행하기 전 학교 측은 나와 이동혁을 세우고 좋은 그림 한번 만들어보겠단 굳은 결의를 보였다. 내 의사는 고려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번에 동혁이 교내 봉사 시간 채워야 하는 것도 있고, 벌점도 증발시켜야 하는데 이사장님이 먼저 제안해주셨어. 오케이 하신 일이니까 해니도 다른 의견은 없는 거지?”

 

이사장은 곧 나의 아버지를 칭하는 사회적 신분을 뜻한다. 피아노과와 작곡과가 통합되면서 학부모들 반발이 거셌던 시기였다. 아빠는 딸인 나를 희생양이나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나의 꿈과 미래에 늘 타인이 개입하고 설계도를 그린다. 아빠 계획에 반박 못 하고 따르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논점은, 내 기준 양아치를 판단하는 비모범 문제지에 답안 100점 채우고 남을 애랑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걔는 작곡을 해주고 나는 걔가 작곡한 곡을 얌전히 쳐야 하는 아수라장.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같은 방법을 추구해왔다. 일부러 자극받게 하려고 라이벌을 심어놓는 형식. 토너먼트처럼 일생일대 대결 구도 이어가다가 막판에 이동혁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은근한 재촉을 강요하는 시선이 닿는다. 교장은 족히 3일 정도 똥을 못 싸 누렇게 뜬 듯한 얼굴로 정해진 계획을 어서 낙찰하라는 눈치다. 안색이 구리시네. 관상 같은 거 전혀 볼 줄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안 된다는 건 알겠다. 답하는 시간이 지체되면 핀잔을 줄 거다. 빨리 이 불쾌한 곳을 벗어나는 게 심신안정에 유익하단 판단을 내린다. 그들 의견에 수긍했다. 그래그래. 우리 좋게 생각하는 거야. 알았지~? 솔직히 강요나 다름없는 말이다. 좋게는 개뿔이요. 나이로 보나 위치로 보나 반박할 짬바는 아니므로 대충 동의한단 뜻을 비춘다.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겨우 그곳을 나왔다.

 

복도 창문 틈으로 봄 오기 직전 모든 생명체가 성의를 다해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향이 밀려온다. 찬기운 타고 당도한 향은 맘을 들뜨게 했다. 온냉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진 복도를 지나 반에 들어서니 아침부터 쌩쌩한 애들 체온과 히터로 한껏 달궈져 있다. 어제 이동혁이 지 싸클에 올린 새 자작곡이 핫한 주제였다. 자리에 앉았는데 피아노, 기타 소리가 섞여 들려와 급 짜증이 났다. 옆줄 남자애는 유튜브 영상까지 보기 바쁘다. 시끄러워. 하는 짓이랑 반대로 지 노래는 동화를 그려 넣는 이동혁도 별로다. 

 

“미안한데. 꺼줄래?”

 

비교적 조용한 축에 속한 애가 별안간 뭔 이기적인 소릴 지껄이냔 얼굴로 고갤 휙 돌렸다. 작곡과와 피아노과가 통합되며 딸려온 애였다.

 

“왜?”

“좀…시끄러워서.”

“같이 볼래?”

“아니. 사양할게.”

 

어디선가 “싸가지.” 라는 소리가 들렸는데 굳이 눈깔 굴려가며 그 암담한 발언의 시초를 색출해낼 생각은 없다. 오랜 친구는 나를 보고 싸가지없는 쫄보라 명명했고 대체로 내가 하는 말 중, 막말이라 분류되는 건 오직 나를 지키기 위한 거다. 공격 의도는 0. 그야말로 제로에 수렴한다는 걸 애들은 모른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선뜻 그러지 못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종합 선물세트처럼 너무 알차 주신 덕분이지. 언제든 방어 본능 튀어나오는 게 인간이라지만 나는 정도가 좀 심했다.

 

“넌 이동혁이랑 왜 안 친해? 혹시 너네 서로 견제하는 사이야?”

“난 너랑도 안 친한 거 같은데. 너 나랑 견제하는 사이니?”

“음……. 그러네. 미안. 소리는 줄일게.”

“고마워.”

 

소리 줄인다더니 고작 한 칸 줄여놓고 대단한 배려했다는 얼굴이다. 아직도 오른쪽 귀가 거슬렸다. 애들은 이동혁이 올린 자작곡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그 곡을 듣고 있었다. 떠오르는 이동혁 모습은 집어치우고 능력이라 높이 평가하는 실력을 짚어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 존나 암담하다. 노력형 인간은 기고 나는 천재를 이길 순 없다는 불변의 법칙이 조금 씁쓸했다.

 

아마추어보다 프로가 어울리는 이동혁은 일주일에 세 번. 로데오에 있는 레스토랑 겸 주류가 주목적인 가게에서 알바를 한다. 주된 업무는 연주하고 돈을 받는 식이었다. 생계를 위해 고상한 거 다 포기하고 일명 믹스 테잎과 자신의 음악 철학이 담긴 자작곡으로 수익을 늘린 시점을 딱 찝을 순 없다. 어쨌든 정통과 정통이 아닌 게 짬뽕이 됐지만 그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나는 이동혁이 하는 건 음악이 아니라고 치부한다. 걔는 그러든지 말든지 남한테 관심이 없는 애다. 어차피 지 먹고 살기 바빠서 주변 둘러볼 시간도 없는 거였다. 자기한테 비방 목적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도 굴하지 않는 천재새끼. 천재가 괜히 천재는 아니다. 이동혁은 음악에 관련된 건 뭐든 척척 해냈다. 유명 뮤지션이 러브콜까지 했다는 근거 없는 말까지 돌 정도면 게임 끝난 거지.

 

이동혁에 대한 말은 좀 많았다. 가난한 건 아니지만 집안이 복잡한 사정이라는 게 가장 큰 화두가 된 적도 있다. 어떤 애는 걔네 집에 사채업자가 가서 깽판 친다고도 했는데 정작 말만 돌뿐 본 사람은 없었다. 대가리 숨기고 남의 가정사 퍼뜨리는 게 취미인 애들이라 그렇다. 알바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했으니, 나머지 얘기는 헛소문이라 결론 났을 거다. 어쨌든 책임져야 할 동생들이 있고, 가끔 데모 녹음이나 해주며 쏠쏠하게 번 돈으로 생활한다는 건 사실이다. -걔랑 붙어 다니는 나재민이 게임하며 슬쩍 말했다.- 이쯤에서 이동혁 일대기는 접기로 하자. 호랑이가 지 말하는 거 알고 지 발로 굴러들어왔으니.

 

조금 열린 문으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앞다퉈 비집고 들어온다. 이동혁, 이제노, 이민형. 입이 사포처럼 거친 애들이다. 영어 섞어 말하는 이민형은 준수한 편에 속했지만

 

“Fuck!!!!!”

 

……속하지… 못했구나. 다듬어지지 않고 정화 안 된 단어가 난무하기 시작한다. 문장은 bomb! 폭탄처럼 펑펑터진다. 걸어 다니는 폭탄과 진공 청소기들이 따로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흡수하고 주제는 5초마다 하나씩 바꿔가며 정신없는 대화로 열띤 토론의 장을 펼친다. 원래 청소년기의 언어 구사 수준은 계절로 따지면 여름이다. 폭염에 방치된 고장 난 다이너마이트처럼 잔뜩 긴장하게만 만들고 알맹이는 딱히 없으니 말이다.

 

“아 나는 진짜 쟤 돌아버린 줄 알았다니까.”

“미친 새끼. 피방 사장님이 쟤 이름도 외움.”

“야 잠만. 그거 한입 띱.”

“다 먹지 마라. 내가 말했다아. 어엉? 정말 이럴고니?!”

“내가 먼저 띱. 띱띱. 아 띱이라고!!!”

 

앞, 뒤 문이 같이 열린다. 앞으로는 반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 들어오고 뒤로는 굳이 고개 돌려 보지 않아도 어떤 그림으로 입장하고 계시는지 훤히 예상 가능한 이동혁 무리다. 보나 마나 이제노, 이민형, 아침부터 교무부장한테 불려 내려간 나재민은 부재. 저 셋만으로 교실 분위기는 업된다. 하이톤 목소리와 장난기 어린 몸짓이 소생 기운이 터져 나오는 봄과 닮았다. 재빠르게 피하고 또 순발력 있게 상대를 찌르는 날렵함. 와학학!! 하고 웃음소리가 번질 때, 앞으로 들어온 뉴페이스는 찬물 끼얹듯 내 자리 앞에 이른다. 명찰 색이 다르다는 건 3학년이라는 건데, 등장만으로 후배들 입 다물게 만드는 명찰 색의 조악한 위엄이 반갑지 않다. 이제노 자리 근처에서 지들끼리 놀다가 바닥 뒹굴고 난리난 이동혁은 웃다 말고 이쪽을 쳐다봤다. 제비뽑기 실패로 저 시끄러운 무리들과 가까운 곳에 배치된 건 3월 최대 실수였다.

 

혜성처럼 품위 넘치게 등장은 하셨으나 전혀 관심 없단 내 태도에 민망해진 낯에서 머쓱함이 보였다. 나는 명찰을 다시 한번 봤다. 이름도 어려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얼굴은 더 어렵다. 내 무관심한 반응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던진 말은 곱지 않은 입매만큼 참 지랄 맞았다.

 

“너 아역배우 걔라며. 아니다, 지면 모델이랬나? 나 글케 들은 거 같은데 뭐가 맞어?”

 

야 항복 항복! 섞여 들려온 이동혁 외침은 말미가 작아졌다. 허공에 멈춘 이제노 손이 걔 팔에 무심히 닿는다. 골 때린다고 큭큭대며 웃던 이민형도 지 친구들 따라 이쪽을 본다. 


사실 걔들만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불청객 난입이나 다름없는 파란 명찰의 이방인 등장에 웅성댄 관중들도 세트다. 고작 한 살 차이도 차이라고, 집단 반발도 못 하고서 흥미와 불안을 반반 섞은 눈까지 장착했다. 저번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다. 그땐 무용과 남자애였는데, 도무지 고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던 말로 나를 당황케 했다. 말 한마디 안 해본 사이에 고백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소문은 내가 걔를 매정하게 차버렸다고 무근본으로 번졌다. 그 일이 지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이런 반휘혈 같은 등장으로 뻔한 서사구조 만들려는 행동의 의미를 모르겠다.

 

다시 말을 되짚고 출제자 의도를 파악하자. 역시 고난이도 기출문제집 푸는 것처럼 어렵다. 아역 배우란 말도 붙이기 민망하게 두 번 얼굴 보이다 관둔 거고. 지면 모델? 하기스 기저귀 입고 비눗방울 속에서 사진 찍은 거 한번. 6살에 나뭇잎 아이스크림 모델 운 좋게 붙었다가 당시 대히트를 친 아이에게 자리를 내주며 그것도 끝. 횟수까지 아는 사람 없으니 세세한 내역은 모르는 상태일 터. 누가 나에 대한 말을 듣고 사실관계 여부 따지지 않고선 들이닥치는 건 비매너가 맞다. 여기까지가 내 추론이며 마지막에 뭐가 맞냐고 묻는 건 도전장 정도로 받아들이는 결론에 도달했다. 애고 어른이고 남 사정 함부로 말하는 인간들이 아주 젤루다가. 좆같거든.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인데요?”

 

좆같았지만 화는 안 났다. 명찰 색만으로 선배라 불러준 거면 분노 게이지는 없다고 보면 된다. 솔직한 심정은 정말 순수한 의도만 갖고 물은 거다. 갑분싸 만들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허공에서 분산된 시선이 포물선을 타고 내게 떨어졌다. 이런 집중은 정말 노땡큐다. 나는 이딴 보도 못한 불도저한테 예의 같은 거 차릴 줄 몰랐다. 그냥 이 상황이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상관…아니 뭐……. 치, 친하게 지내자구.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제가 아역이든 지면 모델이든 그게 왜 선배랑 친하게 지낼 이유가 돼요?”

“음…왜냐……? 나도 피아노치고, 너도 피아노 치니까?”

“저 피아노 되게 못 쳐요. 거의 망해가는 중이라. 요즘 역대급 슬럼프 정점 찍고 있는데요?”

 

기승전결 중동 간 말은 점점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아역 배우 > 지면 모델 > 친하게 지내자 > 왜? > 피아노 치는 사람들이니까. 이게 어떤 상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씨부린 건지 당최 이해 못 할 노릇이다. 이 와중에 답 고민하는 얼굴을 마주하니 못 봐주겠다. 등신이 꺼지란 소리도 못 알아먹고 있네. 피아노 얘기할 때 출제자 의도를 늦게나마 파악했다. 나를 통해서 이사장 덕 좀 보겠다는 징그러운 심보거나 그거 아니면…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꺼졌으면 좋겠다.

 

“듣던 대로 싸가지가 많이 없구나?”

“전 선배가 누군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얼빠져서 대응할 말을 찾는 눈이 내게 고정됐다. 구세주처럼 뒷문이 열렸다. 

 

“김해니. 담임이 오라는데?”

 

나재민은 심드렁하게 껌 씹으며 발은 전혀 들여놓지 않은 상태에서 손짓했다. 언제 나가는 게 가장 모양 안 빠지는 그림일지 간 보고 있는 내 앞 인간은 곁눈질로 주변 눈치를 살핀다. 지네 반도 아니면서 나갈 생각을 않고 있길래 내가 먼저 일어났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나재민이 애들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발소리가 겹쳐 들린다. 나재민은 쓸데없이 성실하게 내 뒤를 따라와 오른쪽에 섰다.

 

“왜 따라와?”

“구라야. 저 선배 유학 갔다 온 선배래.”

“방금 그 사람?”

“응. 나도 어제 민형이한테 들었어. 저대로 두면 싸움날 거 같아서 내가 너 캐리했다. 존나 멋졌지?”

“엉. 반휘혈 같고 그르네.”

 

크루라고 말하기엔 조금 다르지만 나재민과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다. 일단은 이제노, 이민형. 이민형이 지들보다 한 살 많아도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가끔 형이라고 부를 뿐 보통은 동갑인 수준이다. 거기에 추가된 인원이 존재한다. 유일하게 단시간에 친해진 이동혁이 주축이 됐다. 그들의 우정은 눈물겹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이 알찬 우정이다. 연극부였던 나재민이 이민형 따라 랩 동아리 들은 거면 말 다했다. 내 눈엔 그게 참 한심해 보였는데 눈물겨운 우정 주인공들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단 다짐 같은 걸 주고받은 모양이다.

 

내가 나재민과 친하다고 해서 그 무리와도 친한 건 절대 아니다. 나재민이랑 나뭇잎 아이스크림 광고 찍으며 모부님들끼리 친해져 어쩌다 보니 학교까지 같아졌지만 걔 친구는 걔 친구일 뿐 나와 하등 상관없다. 나재민 외, 걔 친구들이랑 따로 말 섞어 본 적도 없다. 정신없는 이들끼리 노는 것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워 대화를 차단하는 편이다. 간단히 말해 나재민은 나와도 친하며, 나와 별개로 속한 무리가 있다는 뜻. 그리고 내 유일한 친구이자 과거를 기억하는 애가 나재민이었다.

 

“동혁이가 다음 대회 봐 준다며.”

“야. 누가 누굴 봐줘? 아빠가 그냥 끼워 넣은 거야.”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어필한다. 정신 놓고 걷다가 교무실에 들어갈 뻔했다. 담임이 소환한 적 없으니 갈 필요가 없다. 그럼 말하지 않아도 향할 곳은 한 군데뿐이다. 일용할 식량이 비치된 매점.

 

“너는 걔랑 어쩌다 친해졌냐? 아니 왜 친해진 거지?”

“동혁이? 걔 재밌어. 장난이 좀 많긴 한데……그런 넌 왜 그렇게 걔가 싫냐?”

“그냥 싫어. 이유 없이 싫은 사람 있잖아.”

 

친한 사람에겐 비교적 착하게 굴고 퍼주는 스타일의 김해니는 나재민 말고 친한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애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몰라 어려워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마음먹고 친구를 사귀려 했지만 심하게 왕따를 당한 이후로 누구에게나 먼저 거리를 두는 성격이 됐다. 왕따 당한 이유도 어이가 없었다. 피아노 레슨받는 걸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속을 터놓고 비밀 얘기로 화합하는 14살 소녀들에겐 친구의 꿈이 바뀐 걸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거라 추측하다가 종국엔 그것도 포기했다. 점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리에서 내밀리며 나도 지친 거다. 

 

그때도 나재민은 내 친구로 남아 괴롭힘당하는 현장까지 목도했다. 내가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안 그런 척 입 다물고 말도 섞지 않는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얘다.

 

“미니어처 완성은 했고? 저번에 만들다 만 정원은.”

“전구만 달면 돼.”

“취미 참 아기자기하셩. 성격대로 놀면 넌 격투기 쪽인데.”

“맞고 싶단 말을 좀 새롭게 하네?”

“니가 연습시간 빼먹고 집에서 미니어처 만들기나 하고있는 거 애들이 알면 반응 웃기겠다.”

 

알등가 말등가. 입 삐죽대며 말했지만 상상하니 좀 웃기긴 했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 매운 거 개땡겨.”

“콜. 진 사람이 쏘기. 안 내면 진,”

“야 잠만!! 아니이!!!”

 

별안간 가위를 내버리고 도망가는 나재민을 쫓아갔다. 운동장 가로질러 초록색 문이 돋보이는 매점으로 뛰는데 위에서 이민형 목소리가 진동하듯 퍼진다. 

 

“나잼!! 축구하자!!!”

 

뛰다 말고 나재민이랑 내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봤다. 창문에 일직선으로 나열된 나재민 쩔친들이 손을 흔든다. 그리고 맨 끝에 보이는 이동혁은 손 흔드는 거 대신 우릴 가만 보고만 있다.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이동혁이랑 눈이 마주쳤다. 어? 웃네? 웃는다고? 왜 웃고 난리야. 뭘 봐. 씨발?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저런 양아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못 본 체하고 매점 문에 피어난 초록색 풀 모양의 시트지만 한참 봤다. 

 

이동혁을 싫어하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사실 쟤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았으며, 살아갈 건지 안물안궁이다. 내 악감정의 불씨는 작년 축제 때 이미 활활 타올랐다. 1인자, 2인자 따위 말도 안 되는 별명 붙여진 것도 그때다. 여기서 1인자는 이동혁을 가리키는 말이고 밀려난 2인자는 김해니다.



피아노과 모진희 선생님이 애정하는 학생 둘을 음악실로 불렀다. 멋대로 굴러다니는 이동혁과 일탈을 꿈꿔본 적 없이 착하게 말 듣는 김해니가 애정의 대상이다. 정각까지 오래서 갔더니 회의가 덜 끝난 선생님은 끝없는 기다림은 선물해줬다. 어색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있기만 하는 형국이 됐다. 두 대의 피아노가 마주 보고 있는 이곳에서, 반대편에 있는 이동혁에겐 내 숨소리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 짧게 호흡했다. 대기 시간은 기약도 없이 길어졌고, 피아노 의자에 몸을 맞춰 누워 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던 이동혁은 아고고, 소릴 내며 일어나 앉았다.

 

엄연히 다른 장르를 추구하는 얘랑 내가 한 팀이라는 게 떨떠름하다. 실용음악 쪽에 가까운 걸 정통 클래식에 녹여낸다면 그거야말로 대혼란이지 않나. 나는 아직도 적응 못 하고 있는데 쟨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게임도 지겨워졌는지 건반 몇 개를 지 멋대로 손놀려 건드리다가 한 곡조 시원하게 뽑을 준비를 한다. 아까 반에서 들은 곡이었다. 이동혁이 싸클에 올린 아주 몽글몽글한 멜로디. 이민형이 덧댄 비트는 빠졌지만 피아노만으로도 예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나 내 귀에 여전히 거슬리는 소리다.

 

“넌 기본 예의 같은 걸 그냥 밥 말아 먹었어? 여기 지금 너 혼자 있는 거 아니잖아?”

 

유려하게 건반 위를 미끄러진 손이 멈춘다. 고개를 옆으로 쭉 빼고 나를 본 눈이 불량하다. 째려보는 게 아닌데 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멈춰있던 손이 다시 건반과 조우한다. 도레미. 도레미. 도레미. 그 세 음을 반복해 치며 이동혁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넌 기본 예의 같은 거 밥 말아 먹은 나한테 피아노 배워야 되잖아. 참으로 불쌍한 노릇이야. 그치?”

 

명백한 비아냥이다.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동혁은 지지 않고 맞수를 뒀다. 네 얼굴에 하기 싫어서 뒤질라는 거 다 써 있네? 근데 어쩌냐. 나도 돈 받고 하는 거야. 소문 들어서 알지? 나 돈이라면 다 하잖아. 니네 아버지가 이거 잘해서 너 특별전형 조건 채우면 나 장학금 준다더라? 뭐든 꽁은 없징. 당연한 진리야. 그래서 내가 해야 된다고. 싫어도 니가 참아야지 방법 있냐? 수준은 니가 높여. 내가 너한테 맞춰서 내 수준 낮출 순 없자나? 도레미를 치는 박자와 말투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다. 나를 더 빡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계신 거다.

 

“와, 김해니 눈으로 사람 한 대 치겠어. 어? 그치?”

“너 같은 애들하고 말 섞는 것도 싫은데 치긴 왜 쳐? 내 손만 불쌍하지.”

“그래. 남 팰 시간에 피아노 치는 게 낫겠넹.”

 

나른한 눈이 꼴 보기 싫어 고갤 돌린다. 30분이나 지각한 선생님이 드디어 문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은 이동혁한테 먼저 숙제를 내줬다. 내가 잘 소화할 수 있는 곡을 작곡해오는 게 이동혁 임무가 됐다. 겉으로 보면 내 서브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된 건데 이동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넹. 넹. 알겠슴다. 필요에 따라 다른 과 애들한테 도움 요청해도 무방하단 말에도. 그저 넹. 넹. 바이올린, 첼로, 기타, 다 알아볼게요. 긍정봇이 돼서 텅빈 오선지를 넘겨받는다. 그리고 공격도 잊지 않았다. 저는 늘 최고라 뭐 말할 것도 없는데 김해니가 그걸 따라갈 수 있을까여?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얼굴로 진짜 주먹 뻗어서 한 대 칠 뻔했다.

 

선생님 주도 아래 이동혁이 집필하고 허수아비 김해니는 고분고분 말 듣는 회의 시간이 끝났다. 작곡에 큰 시간 할애하지 않아도 오선지에 그림 그리는 대로 명작 뽑아내는 이동혁은 나를 위한 악보를 일주일 만에 완성했다. 음표 그리는 걸 본 적도 없는데 걔가 마감을 쳤다는 건 선생님한테 들어 알게 됐다. 교실로 올라와 비어있는 이동혁 자리를 스캔했다. 필통 하나 없는 책상 위, 책 하나 반듯하게 놓여있지 않고 가로로 쑤시듯 넣은 정리 안 된 서랍의 어수선함이 사진처럼 찍혔다. 10분 뒤에 음악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딜 간 건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나재민도 사라진 걸 보니 지들끼리 또 우정 다지며 어디서 놀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늦게 갈까 하다가 그냥 교실을 나왔다. 이동혁과 한 팀으로 묶였다고 말 나왔을 때부터 애들 시선이 더 불편해졌다. 나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게 겁나서 사람들한테 관심없는 척을 하는, 나재민 말대로 쫄보다. 애들이 모여 얘기할 때도 그렇고 단톡방에서 담임 셔츠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며 깔깔댈 때도 낄 틈이 없었다. 동조 한번 한 적 없이 그저 유령처럼 카톡방에 존재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사람이 무섭고 겁나는 건 해가 바뀔수록 더 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내가 더욱 무서운 사람이 되었고 사나워지거나 살갑지 않은 쪽을 택했다. 의외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쉽다. 진짜 사람이 다가오지 않은 게 좋은지 외로운지 모를 때가 있긴 한데, 그래도 나쁜 일 안 겪고 살면 다행이다.

 

김해니의 삶은 단출하다. 웃음이 가난한 김해니는 아주 깐깐하고 예민하며 날이 서 있다. 아역배우를 했을 때부터 매일 반에 구경 오는 애들이 이상한 욕을 돌처럼 던져서 어린 나이에 사람을 무서워했다. 싸가지없다고 소문나고 나니 친구 없는 인생이 됐다. 단출한 삶은 학교와 집만 반복했고 바깥세상이란 한정된 동네가 전부다. 혼자 있을 땐 미니어처 하우스 만드는 걸 즐겨하고 집에서 말하고 싶을 땐 지니나 시리를 부른다. 그러다가 나재민이 전화 오면 안 반가운 척 전화를 받지만 사실 속으론 들뜬다. 

 

별안간 예고 없이 외계인 침공처럼 나타난 이동혁이란 존재 때문에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 진짜. 장난하냐?”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이동혁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오른쪽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이 걔 손에 빨려 나갔다. 눈 감고 노래를 듣다가 봉변당한 기분이었다. 이동혁은 맥락 다 자르고 화부터 내고 있다. 왼쪽 귀를 책상에 맞대고 누워있던 나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이동혁 눈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뭐야?”

“뭐야? 뭐냐고? 지금 뭐야라고 했지?”

“왜 짜증인데?”

“여태 열심히 처 말하고 있었는데 뭐냐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동혁 손에 든 악보가 걔 움직임 따라서 팔랑거린다. 화내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이어폰 한쪽 끼고 있던 주제에 지가 열심히 말한 걸 내가 무시하고 답하지 않았다는 게 시비의 주된 요점이다. 

 

“넌 사람 말이 다 개똥으로 들리지. 어?”

“못 들었어. 무슨 말 했는데, 다시 말하면 되잖아.”

“이어폰 한쪽만 꽂고 있었으면서 못 들었다는 게 말이냐?”

“어. 못 들었다고.”

“와아. 얘 진짜 골 때리네.”

 

기껏 설명하고 있었더니 들은 체도 안 하는 내게 앞으로도 계속 이딴 식일 거냐고 물어본다. 기별 없이 와 놓고 사람이 엎드려 있으면 건드려서 지가 왔다고 하면 될 일이지. 못 들은 걸 못 들었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따지지 못하고 몇 번 울컥했다. 

 

“이어폰을 한쪽만 꽂았는데 네 말을 못 들었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내 말을 씹었다는 의미지, 뭔 소리겠냐? 그것까지 해석해드리는 게 내 숙제였나 봐?”

“보통 사람이라면 들었을 텐데 나는 안 들렸다고.”

“야야야.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못 알아들어?”

“뭐를.”

“내가. 한쪽 귀가 안 들린다는 뜻이야.”

“…ㅁ, 뭐?”

 

주름진 미간이 펴지며 이동혁이 전투력 상실해버린 얼굴로 두 눈을 꿈뻑거린다. 뭔. 뭔 소리야? 말을 더듬는다. 지한테 한 번도 장난친 적 없다는 거 알아서인지 그 말이 진짜라는 걸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적인 개념이나 염치는 탑재한 모양이다. 화낸 게 민망해진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말이 구라가 아닐까 조금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음에 닿을 말을 기다린다. 구라가 아닌 걸 어쩌겠나. 나재민 말고 아는 사람 없는 이 사실을 홧김에 불어버린 건, 얘한테 화가 나서였다.

 

“앞으로 니가 날 가르칠 텐데, 계속 이따위로 굴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

“벌점이나 만회하고 장학금 받을 생각이나 해.”

“…….”

 

여러모로 진짜 안 맞는다. 이동혁 손에 있는 악보를 받지도 않고 나왔다. 쟤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기억을 거스르고 올라간 작년 축제 때 일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이동혁을 완전히 싫어하게 된 계기. 축제 때 전교생 앞에서 이동혁과 피아노 배틀을 했고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걔를 이겼다. 맨날 2인자 꼬릿표 달고 살다가 노력 안 해도 1인자 차지하고 있는 애를 정말 처음으로 이겼는데 그때 이동혁 반응이 상당히 쇼킹했다. 진 사람의 아쉬운 얼굴이 아닌 그저 그런 배틀에 지나지 않았다는 담담한 표정. 그런가 보다 하는 말투. 그게 더 화가 난 거다. 더군다나 니가 나를 이긴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란 재수 없는 소감까지 더하니 이겨놓고도 기뻐하지 못했다. 

 

무력감이 느껴질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체내 돌고 있는 피가 미친듯이 끓어 폭발할 거 같다. 핏줄이 팽창하는 기분을 느낀다. 누구에게 한 번도 져본 적 없었는데 양아치 같은 놈한테 코앞에서 정상을 갈취당했다. 걔는 노력하는 티도 안 나면서 척척 해내는데, 손톱 까지게 연습하는 나를 경쟁 상대로도 취급 안 한다는 건 제일 열 받는다.

 

그런 양아치랑 한팀이라니

생각할수록 암담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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