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클라운 -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 (feat. 볼빨간사춘기)

슈갈님 :)

민윤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15




핸드폰이 없었으니 당연히 알람도 없었다. 겨우 눈을 뜬 여주는 노트북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피씨로 로그인한 카톡에 윤기의 연락은 없었다. 서러워진 여주가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앙 물었지만 이미 퉁퉁 부어버린 눈에는 물기가 차올랐다.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화낼 사람이 누군데. 서운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거짓말한 거 미워 죽겠는데도 연락하기 위해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떡볶이집 간 건 나라구. 윤기를 원망하는 소리가 집안에 가득 찼다.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애 같대. 나쁜 민윤기. 세상에서 제일 나쁜 민윤기.

병원에서 붕대를 풀고 나온 여주는 곧바로 승완의 집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윤기의 집에 찾아가고 싶었지만, 어제 처음으로 크게 화를 내던 얼굴이 떠올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승완은 본가 인터폰 화면에 가득 찬 우는 여주의 얼굴을 보고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승완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호석이 왜 그러냐고 소리칠 때도 여주는 울기만 했다.



"나는 진짜루 내가 잘못한 거 모르겠어.. 너네두 알자나. 내가 민윤기랑 다시 사귀구 나서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헤어지자고도 안 했구, 시러하는 것도 안 해써. 술은 못 줄이긴 했는데... 그리고, 그리고 내가 뭐가 애 같았는데! 너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래?"



여주의 서러움은 누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쏟아졌다. 여주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준 호석은 윤기에게서 온 카톡을 확인하고 입을 떡 벌리고는 몰래 승완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주 집에만 잘 데려다줘. 고마워.] 이거 너무 심각한데. 유여주가 술 먹는데 윤기가 데리러 오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저 거짓말한 건 민윤기란 말이야......."



대체 이 둘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한 여주를 보고 지민이 토끼 눈을 했다. 누나 눈이 왜 그렇게 부어있어요? 지민이 묻자마자 여주가 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틀 동안 누가 말만 걸면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여주가 울려고 하니 지민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막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온 태형의 표정이 굳었다.



"누나 왜 그래요?"

"야, 내가 울린 거 아니야..."



허둥대는 지민의 말을 무시한 태형이 여주에게 재차 물었다. 히끅, 민윤기가, 나한테. 흡. 애같다구. 두서없이 나오는 말이었지만 금방 이해한 태형이 휴지를 뽑아 여주에게 건넸다.



"윤기형이랑 싸웠어요?"

"응....."

"왜요?"



여주는 울면서도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쏟아냈다. 실험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연락은 하지도 않은 것에서부터, 오지도 않는 연락을 하려고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 아픈 다리를 이끌고 떡볶이집까지 간 것, 핸드폰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대뜸 화를 내던 윤기의 모습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민은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윤기가 아무리 사람들에게 무뚝뚝해도 여주 한정으로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왔던 터라 믿을 수가 없었다. 굉장히 여주 쪽으로 치우쳐진 이야기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태형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굳은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하나둘 출근하는 직원들이 출근해 울고 있는 여주를 이상하게 쳐다봤고, 태형은 그제야 여주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대화를 해보는 게 어때요, 누나."

"민윤기 그 개새끼가 나 쌩까고 가버렸단 말야..."



과격한 여주의 표현에 지민이 혀를 내두르며 자리를 피했다. 태형은 그 옆에서 꿋꿋이 시선을 맞춰가며 자리를 지켰다. 태형아... 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애 같아? 여주의 물음에 태형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애 같아도 사랑스러운데요. 윤기형도 그럴 거고요. 차마 뱉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유여주~"



알바 시작과 동시에 뷔페에 나타난 정국이 여주에게 아는 척을 했다. 여주가 퉁퉁 부은 눈으로 정국을 쳐다봤다. 태형은 껄렁거리는 정국의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뭐라 할 자격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저 입술만 깨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또 왔니. 돈도 많다."

"어차피 사람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하고, 어차피 먹을 밥이면 우리 여주가 있는 곳으로 와야 하지 않겠어?"

"네. 빈자리 원하시는 곳 암데나 앉아주세여, 손님."

"근데 너 왜 이렇게 눈이 부었어?"



=_=뭐가. 여주가 정국을 올려다봤다. 부은 눈두덩은 여주를 더욱 귀엽게 만들었고 덕분에 정국은 웃음이 터졌다. 정국의 친구가 음식을 가져온다며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희 매장 방문 처음이신가요, 설명 필요하세요. 여주가 준비된 멘트를 치니 정국은 한 손으로 턱에 꽃받침을 만들고 다른 손으로 여주의 팔을 당겼다.



"설명이 필요한데, 눈이 왜 그런지."

"...몰라."



이상하게 태형에겐 쏟아냈던 윤기의 욕이 정국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부담스럽다고 하기에는, 태형의 마음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태형은 그래도 윤기랑 사귀고 나서 여주를 크게 부담스럽게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찐친 되고 그러는 거지, 뭐. 여주의 남다른 친구 만들기 스킬이었다.



"아, 맞다. 너 핸드폰 떨어뜨리고 갔더라."

"...내 핸드폰!"



안 그래도 못 찾을 거 같아서 개통하려고 했는데. 여주가 반가운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윤기와의 카톡 방이었지만 그대로였다. 통화목록도 깨끗했다. 민윤기 진짜 나한테 연락 하나도 안 하네... 울컥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이 하늘까지 치솟을 기세였지만 애써 진정한 여주가 테이블 번호가 찍힌 계산서를 툭 내밀었다.



"오늘 대게 상태가 좋으네요... 오면 몇 개씩 드시던데 많이 드시죠.."

"내 최애 음식까지 알아봐 주고. 이거 찐 사랑 아니면 뭐야, 여주야?"




"..."



여주가 콧방귀를 흥, 끼고 돌아섰다. 정국은 여주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열심히 음식을 담고 있는 제 친구 옆으로 향했다. 얘기 다 끝냈냐. 정국의 친구가 대신 빈 접시를 꺼내주며 물었다.



"핸드폰도 돌려주고 왔어."

"쟤 남친이랑 통화한 기록은 다 지웠고? 네가 가져간 거 모르는 눈치야?"

"당연하지. 남친이랑 제대로 싸운 모양이던데. 그 새끼 내가 구라 친 거 바로 믿었나 봐."

"무서운 새끼. 너 그러다 걸리면 진짜 곱게는 못 죽을 거다."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나한텐 더 중요하지. 걱정 땡큐. 집게 좀."



건너편에서 음식을 채우던 태형은 제 귀를 의심했다. 여주가 울며 뱉었던 말의 조각이 딱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여주와 윤기의 사이를 방해한 인물이 정국이라는 건, 누구라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대화였다.








많은 이들의 연결고리인 유여주와 민윤기의 싸움이 오래 지속될수록 고통받는 건 지인들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술자리를 만든 건 석진이었고, 안 오겠다 떼를 쓰는 여주를 억지로 데려온 건 그의 사촌 동생인 호석이었다. 냉랭한 분위기 속 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이 싸우면 우리가 힘들잖니...

윤기가 여주 쪽으로 떡볶이를 밀어주었다. 그 좋아하는 떡볶이가 눈앞에 있음에도 여주는 입술만 삐죽이고는 윤기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왜 안 먹어. 좋아하는 거잖아. 약간의 애정이 묻은 목소리에도 여주는 윤기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둘이 대화 좀 해봐, 제발. 석진이 여주의 고개를 억지로 윤기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 힘으로 여주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여주는 자존심을 세우느라 끝까지 윤기는 쳐다보지 않고 핸드폰만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핸드폰 찾았네."

"응. 전정국이 찾아다 줬어."

"..."



윤기의 눈썹이 꿈틀댔다. 잘못한 거 하나 없다는 듯 당당하게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유여주가 멋대로라지만, 남자, 그것도 전정국의 집에서 술 취해서 잠드는 건 제아무리 보살이라도 참지 못할 거였다. 그걸 왜 유여주는 모르는 걸까. 둘의 연애에 속이 타는 건 매번 윤기인 것 같았다.



"그랬겠지. 같이 있었으니까."



윤기의 날 선 말투에 여주의 얼굴도 잔뜩 찌푸려졌다. 구라 치고 바람 맞춘 게 누군데. 전정국은 그 외롭고 씁쓸한 혼떡(혼자 떡볶이)을 도와준 거나 다름없었다고. 여주가 입술을 댓발 내민 채 소주를 따랐다.





"안주 먹고 먹으랬지. 빈속에 술 먹으면 토하잖아."

"남이사."

"남이사?"



생각보다 골이 깊은데. 남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도 여주보다 백배 천배 이성적인 윤기가 먼저 대화를 걸어주길 바랐으나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석진과 남준, 윤기 셋이서 가진 술자리에서 들었던 여주의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유여주가 잘못해도 백번 잘못했지. 이건 헤어지자는 말을 밥 먹듯 달고 살았던 것보다 심했다.



"너 진짜 그날에 대해서 할 말 없어?"

"오빠는!!!"



짠하며 오가는 술잔이 아닌 날 선 말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남준아, 담배 피우러 가자. 석진이 남준을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호석과 승완도 둘의 뒤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복작했던 자리가 금방 조용해지고, 마주 보고 앉은 여주와 윤기뿐이었다. 여주는 괜히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뒤적였다. 벌써 반 정도 굳어버린 치즈가 볼품없이 엉겼다.



"내가 애 같다는 말 싫어하는 거 알자나."

"내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생각 안 해봤어?"

"어! 난 애같이 안 했으니까!"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그건 연인 사이에 기본적인 예의 아니야?"



애 같다는 말을 왜 꺼냈는지는 정말 헤아려주지 않을 셈인가. 윤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당시야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대화를 피했지만,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은 윤기는 대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네 살이나 어린 여주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서운했을 수 있으니까.




"예의? 나는 거짓말하는 게 더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난 적어두 오빠한테 거짓말 한번두 한적 없어."

"진짜야?"

"뭐가!"




"진짜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 없냐고."

"없다고. 없는데 왜 난리냐고.... 왜 애 같다고 그러냐고..."



사실대로만 말해주라. 윤기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오늘만 해도 또 실험실에서 지환에게 온갖 구박을 받은 윤기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그날 느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사과만 해주면 될 일인데. 유여주는 언제나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고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나... 나 애 아닌데."

"유여주. 자꾸 논점 흐릴래."

"논점 흐리는 거 아니라고!"

"넌 내가 술 먹고 공순희 집에서 잤으면 좋겠어?"

"그, 그게 대체,"

"지금 네 기분이 내가 느끼는 거야."



어떻게 그런 비교를 하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분노보다 먼저 울음이 차오른 까닭에 여주가 나, 나쁜, 나쁜, 계속해서 같은 말만 내뱉었다.



"너는 되고 나는 안돼? 그게 무슨 이기심이야."

"..."

"상대한테 배려를 바라려면 본인부터 잘해야지. 언제부터 우리 연애가 이렇게 일방적이었는데."

"..."

"너 술 먹고 전정국 집,"





"민윤기 이 나쁜 새끼야악!!!!"



결국 울음이 터져버린 여주가 윤기의 말을 끊었다. 허. 윤기가 헛웃음을 뱉었다. 여주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프 밖에서 얘기하고 있던 승완이 커다래진 눈으로 뛰쳐나오는 여주를 안았다. 화가 난 윤기도 여주를 쫓아가지 않고 테이블 위의 소주를 찾았다. 어차피 바깥에 있는 승완이나 호석이가 여주를 케어해줄 걸 알아서 걱정은 덜했다.



"여주야, 왜 울어. 얘기 잘 안됐어?"

"나, 나, 민윤기랑 헤어질 거야!!!!"



맙소사. 석진과 남준이 이마를 짚었다. 너무나도 잘 들려오는 여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윤기가 재킷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손님, 흡연구역을 이용해 주세요. 제지하는 알바생의 목소리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주를 쫓아가는 승완과 호석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호프 바깥으로 나갔다. 불이 붙은 담배가 치직 거리며 타들어 갔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돌아보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물이 났다.




OuiOui (위위) - 멀어지지 않게





석진이 이마를 긁적이며 윤기를 위로했다. 네가 이해해, 워낙 어린 애잖냐. 달래려고 뱉는 말이란 건 알았지만 짜증이 솟구쳤다. 어리니까, 아직 애니까. 그것 하나로 윤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았는지 유여주는 몰랐다.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해줘야 돼. 아무리 그래도 술 먹고 남자 집 가는 건 아니지. 유여주가 거기에 대해선 사과 안 하디?"



석진의 물음에 윤기가 고개를 저으며 입으로 뿌연 연기를 뱉었다. 터져버린 감정은 서툴게 메꿔졌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주만 굳건히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주변에서 둘을 가만두지 않았다. 질투보다는 분노였다. 그래도 여주가 싫어하는 말은 했으면 안 되는데. 감정에 치우쳐 홧김에 뱉었던 말에 상처받은 여주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쉽사리 사과를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여주가 잘못한 게 맞았다.



"어?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앞을 지나가던 태형과 지민이 셋을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 석진과 남준이 인사를 받아주었고, 윤기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고개만 까딱였다. 인사를 받아줄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지민은 윤기의 눈치를 보는듯했지만 태형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뭐야. 윤기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태형을 쳐다봤다.



"윤기형.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여주누나에 관한 거예요."



하. 윤기가 헛웃음을 쳤다. 여과 없이 드러난 표정은 태형을 향해 으르렁대고 있었다. 남준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왜 태형까지 저러는지 정말 딱 죽고 싶었다. 슬쩍 본 윤기의 표정은 태형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뷔페에 전정국이 왔었는데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가던 길 가라."

"들으셔야 해요."



윤기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발로 짓이겼다. 그래, 태형아. 다음에 얘기하자. 석진이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윤기형. 태형이 끈질기게 윤기를 불렀다.





"유여주 내 여자친구다. 너 아니고."

"전정국이 여주누나 핸드폰 훔쳐 갔었어요. 뭔진 몰라도 형이 오해하고 있는 거 다 아닐 거예요."



뭐? 너 그거 진짜야? 석진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페에서 들었던 말과 여주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 석진과 남준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윤기는 심각한 얼굴로 태형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회였다.








여주가 부은 눈두덩과 시뻘게진 눈동자를 하고 승완을 올려다봤다. 이대로 두고 가도 괜찮을까, 승완이 호석을 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여기 있을게. 호석도 승완의 말을 거들었다. 아니야... 혼자 있을래. 세상 우울한 목소리에 걱정은 두 배로 들었지만, 여주의 고집이 너무도 완강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나가고 집에 혼자 남은 여주가 울먹이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헤어질 거라고 말한 거 분명 오빠도 들었을 텐데. 볼따구로 흐르는 눈물이 입안으로 들어가 짠맛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민윤기..."



우울함에 몸이 축 늘어졌다. 이대로 그냥 자도 되겠다... 씻기도 귀찮은데. 여주가 중얼대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여주야. 현관 밖에서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대로 멈춰있으니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고민하던 여주가 문을 열었다. 뛰어왔는지 윤기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뭐야."

"들어가도 돼?"

"아니."



단호한 말투에 당황했지만 윤기가 금방 이성을 되찾고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 잠깐 사이에 또 운 건지 양 볼은 푸석했고 눈은 새빨갰다. 여주야.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드니 여주가 싫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오빠 싫어!!!"



여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며칠 동안 윤기에게 쌓였던 서운함이 폭발했다. 왜 거짓말했어, 왜 연락 안 했어. 나한테 왜 애 같다고, 생각 없다고... 생각나는 말을 모조리 쏟아내니 눈물도 터졌다.



"나는 오빠가 거짓말 쳐두, 폰 찾으러 떡볶이집까지 갔었어. 근데 핸드폰은 없구, 오빠 너는 나 보자마자 화만 냈잖아!!!!"

"..."

"내가 제일 시러하는 말이 애 같다는 거 제일 잘 알면서, 갑자기, 흡. 공순희 얘기는 왜 해서, 걔네 집에서 잔다고, 흡."

"..."




"나 생각 없지도 않구, 애두 아냐. 그리고, 나, 나는 거짓말도 안 했구..."

"..."

"나 진짜 오빠 미워. 세상에서 제일 싫어..."

"미안해."

"미안하다면 다야!!!!"



미안해. 윤기가 한 번 더 말했다. 늦은 시간에 여주가 빽빽 소리를 질러대니 앞집 현관문이 열렸다. 윤기가 죄송하다는 표시로 고개를 숙였지만, 여주는 그런 거에 신경 쓸 정도로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짜증 난다는 얼굴로 여주와 윤기를 흘끗 쳐다본 주민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전정국이 친 거짓말 때문에 내가 눈이 좀 돌았었나 봐. 미안해."

"...전정국이? 걔가 멀 했는데?"



윤기가 입술을 말아 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이었다. 정국이 여주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실험실에서 괴롭힘당했던 이야기는 당연히 해줄 생각이 없었다. 분명 여주가 걱정할 테니까.



"전정국이 네가 자기 집에서 자고 있다고 그랬거든."

"...뭐? 오빤 그걸 믿었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여주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더라면, 그랬다면 앞뒤 따져가며 아니라는 걸 금방 캐치했을 텐데. 그간 정국 때문에 불편했던 심기가 윤기의 감정 고름을 터트려 이성적 판단을 해친 거였다.



"...진짜 나빴다, 민윤기."

"..."

"나는... 나는 만약 그랬으면 오빠 너한테 물어봤을 거야. 진짜 공순희 집에서 잤냐구."

"..."

"오빠는 맨날 내 탓만 해. 내가 어려서 그런 거라구 해. 내가 떼쓰는 거고, 오빠가 제일 똑똑하고 이성적인 것처럼 행동해. 사실은 제일 멍청이면서."



내가 아니라구 말한 것도 하나도 안 믿어준거자나. 똑 부러지게 뱉는 여주의 말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윤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주의 말은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어린 여주에게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이번 일도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철없는 유여주의 철없는 행동일 거라고. 여주는 그런 윤기의 마음을 정확히 캐치했다.



"오빠는 내가 많이 애 같지?"

"..."

"뭔 말만 하면 떼쓰는 거 같고 짜증 나지?"

"...짜증은 안 났고,"



오빠 말대로 우린 서로 일방적이야. 나는 일방적으로 오빠한테 내 마음만 쏟아내구, 오빠는 일방적으로 나한테 맞춰준다고만 생각하잖아. 여주가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누구보다 윤기를 사랑했기에 말을 뱉으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연애하며 받은 상처와 오해는 사랑과는 또 다른 깊이로 여주를 괴롭혔다.



"오빠, 우리 당분간 보지 말자. 나 오빠 보기 시러."

"...여주야."

"잡아달라구 하는 말 아니야. 지금 잡으면 나 오빠 물어버릴 거야. 오빠 너 똑똑하잖아. 잡을 때랑 아닐 때 구분해."

"속상하게 한 거 미안해. 말이 심했어. 앞으로…,"



윤기가 메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그간 투정 부리듯 헤어지자 했던 말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어쩔 줄 몰라 겨우 손을 뻗어 여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툭 떨어진 고개는 쉽게 들 수 없었다. 너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입안을 맴돌다 흩어졌다.

윤기의 손을 뿌리친 여주가 뒷걸음질 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신발장에 주저앉았다. 애같이 군 게 아니라 너무 좋아한다는 표현이었음을 윤기가 알아주길 바랐다. 윤기가 너무 좋은데, 너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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