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반하지 않는거면 대체 뭐란 말이냐.





* 아 군인은 모름지기 삽질이라지만 니들 삽질 진짜 시렁









".................."



파소는 양눈을 한일자로 가늘게 찢고 입을 세모꼴로 비쭉 내밀었다. 누가봐도 나 불만많음의 표시였는데, 그가 그런 시위를 하는 까닭은 제 눈앞의 광경 탓이었다.


"당나라 놈들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사정거리밖 훨씬 뒤로 물러난대다가 저번처럼 연기를 피우거나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침상에 반쯤 일어나 앉은 만춘이 파소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언제 기습으로 변할지 모르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네. 성주."


"성주.약입니다."


"어. 그래."


이러다 주댕이가 오징어같이 뾰족해지겠단 생각을 하며 파소는 만춘에게 다가와 약사발을 건내는 사물을 굉장히 마음에 안드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 사물에게 불만이 있는게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이 풍경 자체가 맘에 안드는 것 뿐이었다. 일주일째 사물이 만춘을 시중들고 있는, 이젠 익숙해진 요 풍경이.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다. 곧 일어나야지"


"......네. 제발요."


원래 같았으면 더 쉬라고 난리였을 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파소는 만춘을 친형님처럼 오래 따랐다. 3일동안 의식이 못깨는 만춘 옆에서 백하와 함께 간병을 도맡기도 했었다. 근데 묘하게 불퉁한 얼굴로 얼른 일어나라 독촉하니 옆에 서있던 추수지가 힐끗 파소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그러다 어깨가 상하시면 안되니 좀더 쉬셔야 합니다. "


추수지의 말에 파소가 콧김을 내뿜더니 그런다.


"지금 바쁜데 여기 중추인력이 셋이나 있으니 정신이 없어 그럽니다."


이때 여기란 성주의 처소, 중추인력이란 만춘, 추수지, 사물을 말함이었다. 성주는 부상때문에 여기에 누워있지, 사물은 그 성주를 시중드느라 여기 잡혀 있지, 추수지는 그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여기를 지키고 있지. 파소는 고개를 픽 돌리고 툴툴거렸다. 


만춘이 돌려주는 약사발을 받던 사물이 파소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채고 일어났다.


"그럼 저도 오후에는 파소님의 일을 돕..."


"안됩니다. 사물님은 여기 계셔야 합니다."


대체 저양반은 왜저러는거야. 파소의 이마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일할줄 아는 한 사람이 아쉬운데, 추수지가 이렇게 성주 옆에 붙어있을거면 사물이는 저한테 줘도 되잖습니까?"


"저는 성주를 지키는거지, 실제 수발은 못들잖아요. 그리고 사물님이 모든게 처음인데 그리 일을 막 시키셔야 됩니까? 그리고 성주의 부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면 곤란하니 우리끼리 해결해야합니다."


만춘의 부상상태를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내보내고 사물에게 그를 보살피게 하고있다는 게 답이었다. 추수지의 말투는 강경했고 파소는 주댕이가 기어이 오징어입처럼 뾰족해졌다. 


"이미 비상경계령을 내린 이마당에 새삼 보안은...."


전시상황에서 만춘마저 부상을 당해 안시성 전체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워낙 바쁜 터라 보좌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사실 파소는 사물에게 말하자면 현장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파소는 태학을 수료하고 첫 임관이 전방에 있던 만춘의 부장으로 왔었다. 그 당시 전장의 영웅이자 전설적인 선봉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만춘은 파소가 처음 현장에서 만난 태학 직속선배였다. 그때 그가 본 만춘은 정말 멋있고 존경스런 선배 그 자체였었다. 비록 자길 복날에 잡는 장닭처럼 쥐어패긴 했지만. 각설하고.


무뚝뚝했지만 만춘은 자신의 오랜 부관들과 그를 다르게 대우했다. 파소가 자신을 돕는 부관이 아닌, 앞으로 지도자로 다른 병사들을 이끌게 될거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그냥 부하가 아닌 키우는 후배로 엄하고 자세하게 가르쳤고 진심으로 이끌어주었다. 


그 덕에 파소는 다른 태학 동기들이나 또래 부장들에 비해 훨씬 더 능력있는 대장급 장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공을 세워 왕실근위대에 입성하고 안시성에서도 기마대장으로 당당하게 싸울수 있는 거였다. 누굴 만나 어떻게 배우는지가 이렇게나 중요하다. 그는 항상 그 경력에 뿌듯함이 있었는데 이번에 사물이 안시성에 오자 파소는 기대를 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얘도 좀 배우는게 있어야지......." 



사물은 파소가 임관 후 처음으로 맞는 태학생도, 그러니까 직속후배였다. 지금까지는 만춘을 위시한 선배들만 드글드글했고, 안시성에 와서는 귀족장교들 가운데서도 태학출신은 성주를 제외하고는 저밖에 없었다. 그런데 첫 맞후배를 본 파소는 좀 설렜다. 현장경험 없이 백짓장 같은 후배에게 첫 선배로써 제가 만춘에게 배웠던 것 처럼 현장에서 배운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만춘이 저를 가르친 것보단 훨씬 더 자상하게. 멋있게. 선배미 넘치게.


"이럴 때밖에 못배우는 것도 있는데... 태학도가 큰전쟁에 나오는건 다 그런 이유도 있다고...."


군사국가인 고구려에서 가장 자랑하는 것이 기마대이고,그 기마대는 대부분 능력을 인정받은 귀족출신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장교들의 정점은 태학출신들이 차지했다. 태학 선배이고 기마대장이기까지한 제 멋짐 오조오억개가 이번 전쟁에서 폭발하는 걸 후배 병아리에게 좀 자랑하고 싶.....이게 아니지만, 여튼 애가 눈치도 있고 똘똘하니 가르치면 보람있을 거 같은데, 현직 기마대장에게 현장을 배우는게 얼마나 좋은 기회냐 이거다.


만춘이 사물에게 관심이 있고 둘 사이가 잘되도록 도와주고 싶고 그런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파소는 팔짱을 꼈다. 이런게 진짜 선배다운거라 생각하면서.



 


"아니 파소님한테 뭘 배워요. 연애질?"


툭 말해놓고 추수지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아니 지금 그걸 배우면 안되는데, 아닌가 배워야되나. 이 상황 몹시나 곤란한건 나뿐인가. 추수지가 급격한 내적방황에 시달리건 말건 다행히 거기까지 눈치가 없는 파소였다. 


"차라리 이럴거면 백하를 들여보내던가.."


"백하님은 지금도 눈이 빠지도록 바쁘신데, 성주까지 돌보라하시면 자기 정인이 눈깔 빠지는 꼴을 기어이 보고싶으신가봐요"


"아 내말은 !!"


"그만해라."


만춘이 손을 들어 둘을 막았다. 그리고는 얼덜결에 중간에 끼어 말없이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사물을 보고는 한숨을 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으니 조용히 해라. 내일이면 비상경계령을 거두고 나도 정상적으로 나설테니 더이상 싸우지 마라. 애 난처하게 만들지도 말고."


그제서야 둘은 입을 다물었다. 만춘은 사물에게 말했다.


"난 이제 괜찮으니 나가서 파소일을 도와줘라."



"허나.."


"괜찮다. 어차피 나도 복귀할거니까."


 만춘의 얼굴을 본 사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주."



그제서야 파소가 속이 풀린 듯, 사물을 향해 손을 까딱까딱 한다. 사물은 상을 들고 일어서 그런 파소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히자, 추수지는 정색하며 그런다.


"아직 덜 나으셨다니까요."



"이미 지나칠만큼 쉬었고 몸도 다 나았다. 오히려 니가 그러고 있는게 더 불편해 그런다. 속내가 어찌됬건 지금은 세상 얌전한 애야. 그리 날 죽일까 불안하면 진즉 나한테서 떨어뜨려 놨어야지"


 

 

그러자 추수지는 뭔가 내키지 않는듯 입맛을 쩍쩍 다신다. 만춘은 겉옷을 위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그런게 아니라..."


추수지는 사실 자기도 제속을 몰라 애매했다. 일주일 전 그 꼴을 봤으니 졸지에 현 상황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가 되어버렸는지라 혼자서 난처했다. 뭔가 해결시켜야 할거 같은게 어쩔수 없는 성주 부관이라는 직업병이라서 사물을 여기 붙들어두긴 했으나, 그렇다고 둘만 두기엔 그 역시 불안했다. 



"....네가 그런 얼굴하고 있는거 보면 내가 체할 거같다니까."


"어떤 얼굴인데요?"


"날 굶주린 개 취급하는거."


그러자 추수지는 헙-하고 옆구리 공격을 당한듯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표면적 이유는 사물의 감시였지만, 사실 사물의 암살계획따윈 이미 추수지의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둘이 있으면 사물이 그를 공격할까 두려운게 아니라 성주가 그앨 덮칠까 불안한거였다. 정말 제 2의 목격담따윈 만들고 싶지 않아. 절대.절대. 절대절대. 


그게 제 진짜 속내였다. 만춘은 혀를 찼다. 


"그런 눈으로 날 감시할거면 진작 파소한테 보냈어야지. 왜그러는거야?"


"....감시한거 아닙니다만.."


안그래도 어린 후배한테 잘난척이 하고 싶어서 좀이 쑤시던 녀석이니 꽁지 깃을 뽐내는 장닭마냥 특유의 허세를 떨면서도 분명 사물에게 잘 가르쳐 줄 것이다. 한손이라도 아쉬울 때  이젠 안시성에 익숙해진 아이가 군영 일을 돕는 건 분명 좋은 것이었다. 만춘은 이마를 짚었다. 



"뭔말을 하고싶은거냐" 


"....뭔말을 하셔야 뭔 말을 하죠"


 

추수지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지 모르겠지만 그 속이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허나 만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내가 뭔 말을 해야되는데."


"............지금 저 혼자 예민한거에요. 이런 상황?"


추수지는 만춘앞으로 오더니 털푸덕 주저앉더니 그런다.



"정말 계속 이렇게 계실 거에요? 계속 모르신다고 하실거냐고요"


"......."


둘다 정말 어지간하다 싶었다. 성주의 시중을 부탁했을 때 군소리없이 네 라고 답한 사물은 정말 성심성의껏 그 일을 해냈다. 모두가 표면적으로 보아오던 아이의 성정답게 차분하게. 시간에 맞춰 약과 식사를 준비하고 붕대를 갈고 상처를 돌보고, 손길은 차분하고 일하는 모양새가 정성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딱히 아무런 감정을 읽을수가 없었다. 정말 딱 부상자를 돌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묻는 말에 답하는 거 외엔 말도 없었다. 


그 시중을 받는 성주 역시도 필요한 말 외엔 없었으나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딱 평소대로의 거리감으로 아이를 대했다. 보살핌에 감사를 표하며 예의바르게, 성주답게. 



마치 서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뭐라 말씀이 있으셔야 저도 노선을 정하죠."


"......무슨 노선"


"안시성을 구하러온 태학도로 대할건지, 연개소문이 보낸 암살자로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릴건지"


"....아직도 포기 안했냐"


"성주를 지키는 게 제 첫번째 임무니까요."


제 부관의 고지식한 우직함에 대충 회피하려던 만춘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럴거 없어. 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없을거다."


"아무도 모르는겁니다. 그건"


"아니다. 그앤 더이상 날 노리지 않을거다."


그와 함꼐 있는 일주일 동안 알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단순히 불안감이 지워진 것뿐 아니라, 언제나 등을 긴장시키던 살기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얼굴이지만, 그아이 말대로 심중에 있던 어떤 불 하나는 꺼진게 분명했다.  



당신을, 살리고 싶은데.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소리없이 말하던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부분에 대해선 마음 놓아도 될거야. 신경쓰지말고 동료로 대해줘라."


"........ 그럼 성주는요."


".....뭘"


"성주는 맘을 정했어요?"


"내맘을 정하고말고 할게 뭐가 있냐."



"차라리 성주 권위에 그정도 갖고 뭘 하고 개쓰레기같이 굴면 앞통수에 대고 쌍욕이라도 하겠고만."


 "야!!"


만춘이 고개를 들고 소릴 버럭 지르자, 추수지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이젠 살만한가 보네. 소리가 더 쩌렁쩌렁해진게. 



"합의된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사물님이 이제 성주 죽일 맘을 버린 거 같다매여. 그럼 둘 사이에 뭐가 있는거 아니에요? 아니, 적어도 성주 맘에는 있는거 아니냐고요. 안고싶을만큼"


"......너 지금 그 질문 군법상 가혹행위다..." 




지금 이게 하극상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지만, 추수지 역시 만춘을 한몸처럼 아껴온 오랜 동지 사이였다. 파소못지 않게 그도 성주를 친가족처럼 여겨왔다. 주변을 아끼고 성민들을 지키는 이상적인 지도자로써 삶 외에 다른 모든 개인적인 삶을 지우고 살아온 만춘의 맘을 흔드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건 지금이 일촉즉발 전시상황이라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럼 뭐라 말좀 하세요. 제발. 이 상황을 정리 좀 하시라고요."


"......아무 일 없었던 거다. 너만 입다물면 돼. "


"아. 성주!"


"전쟁 중이다. 추수지. 지금 눈앞에 이세민이 있어."


핑계가 너무 훌륭해서 진짜 어이가 없네. 만춘도 추수지의 뜻이 뭔지 알고 있다. 허나 자신은 성주로써 모든 걸 눈앞의 전쟁을 이기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제 판단은 5만이 넘는 안시성 전체 성민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만큼 제 어깨는 무거웠다. 그앞에선 모든 개인적인 이유는 모두다 무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말 이건 핑계일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성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알겠습니다."



"....."



"그런데요 성주. 꼭 지금이어야 하는 것도 있는거에요. 어떠한 상황이 닥쳤다고 해도요.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게.. 사람 맘만큼 결정적인 시점이 중요한 게 없어요"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봐라. 나도 저녁땐 일어날테니"


"성주."


"바쁘다며? 얼른. 쉰소리 고만하고"


더이상 저를 보지않는 만춘을 보고 한숨을 쉰 추수지는 제 검을 집어들었다. 



"..........그럼 그런 표정을 하질 마시라고요..."



"......."



"......말을 맙시다"



눈앞에 있는 애를 놓고 마치 배없는 요하강 너머에 있는 것처럼 그런 시린 표정좀 하지 말라고 이 화상아. 추수지는 혀를 끌끌 찼다.  

















" 아 그럼 그때의 밀집대형은 파소님이 만드신 진법이신가요?"


"...내가 만들었다기보단 그냥 의견을 냈지 의견..."


"와..."


성을 시찰하면서 파소는 어깨에 한껏 힘을 주었다. 그래. 이런 거. 바로 이런거지. 후배가 눈을 반짝이고 듣는 현장수업. 보통 태학에 있는 정도의 어린 나이라면 대부분 실전에서 사용하는 검술이나 궁술, 기껏해야 기마술에 흥미를 보이는데, 얌전한 얼굴에 비해 사물은 진법이라던가 군사운용, 병참구축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당나라 군대의 방패술을 보고 떠올린거야. 밀리지 않는다면 거꾸로 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성주가 내 의견을 들어주신 덕분이지"


만춘이 없으니 다음 서열은 신분상으로나 직급상으로나 파소가 되어 자연스럽게 성주 대리 역활을 맡고 있었다. 만춘의 부상으로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모든 걸 시찰하고 일일이 살펴봐야 하는지라 발은 쉴세 없이 움직이고 몸은 바빴으나, 입은 절대 쉬지 않으면서 제 곁에 따라붙은 사물에게 모든걸 설명해주고 필요하면 시범도 보여주었다. 표정은 한껏 점잖았으나 사실 무척 신난 상태인지라 사물이 뭘 물어도 필요이상 상세하게 말해주며 후배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지난번 기습으로 부상병이 많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인력수급이나 경계 교대하는 것에도 자연스럽게 잘 이뤄지고 있었고,  성민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기제작이나 성곽보수, 부상병치료 등을 순번을 정해 도왔다. 성이 마치 한덩어리같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종종 받아왔었는데, 그건 단순한 기분이라기보단 굉장히 숙련되고 정교한 협동체계에서 나온다는 걸 느꼈다. 


"그래도 성주가 안계신데 경계에 흐트러짐이 없는건 파소님 덕분이겠죠"


"으하하하- 무슨 그런 말을"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으하하 웃어대더니 파소가 사물의 등을 팡팡 친다.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까지 꾸려온건 성주의 공이다. 누가 빠져도 성의 수비에는 전혀 이상이 없도록 정교한 체제를 갖추고 오랫동안 훈련해왔지. 안시성은 외적의 침략이 워낙 많은 성이니까 사람에게만 기대면 성의 안전이 쉬이 위협받거든.."


"그렇군요..."


"특히 다들 성주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크니까. 더더욱 성주가 없어도 성이 지켜질수 있도록 많이 궁리하시지. 이와중에 연개소문까지 성주를 반역자로 몰면서 툭하면 암살자를 보내니까"


"......네"


눈앞에 그 암살자 102호가 있는건 꿈에도 모르는 파소가 씹어뱉듯 말했다.


"아무리 성주가 마음에 안들어도 그렇지. 우리가 왕을 죽였어, 당나라랑 내통을 했어. 세금을 안냈어. 왕도 아니고 대막리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반역자라고 난리치니 아무리 자기 자존심이 상한다고 변방의 위험을 자초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



저도 막연히 든 생각이나 이리 구체적으로 들으니 더 할말이 없어졌다. 늘 연개소문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전쟁에서 뭔가 석연치 않았던 일들이 만춘을 만나며  박살이 났다. 


인정해야 했다. 


그토록 존경해왔던 연개소문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걸.


그가 틀렸다는 걸.



"왜- 별로야?"


"네? 아닙니다."


"하긴 너도 태학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옆에서 많이 봐왔을테니까. 영 듣기 좋지만은 않지?"


"아...아닙니다."


파소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은 편인지라 사람관계에 대해서도 제 식대로 좋게 해석했다. 암살자 102호가 제 양심에 찔려 허부적대는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왔을 연개소문에 대해 안좋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안좋은 가 싶은 거였다.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사람은 본디 주변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많이 받는 인간이니까.나도 평양성 있을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안시성을 버린다고 했을때의 막막함은 저도 기억하고 있었다. 



"안시성으로는 당군을 맞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평양성에서 결전을 대비하겠다고.."


만춘은 반역자이고 그를 따르는 성민도 반역자라고 했었다는 말은 뺐지만, 아마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버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합리적인 지도자니까. 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사람이었다. 파소는 이를 갈며 그런다.


"대를 위해 소를 버린다는거겠지. 희생이 필요한거라고."




하지만 성주의 방식은 아냐. 안시성 식은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예로부터 외침이 많은 나라다. 그래서 기본이 군사국가라 모든게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 전쟁이 잦으니 분명 희생이 따르고 때때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일도 있고. 하지만 그걸 백성들에게 접목시키면 안돼. 우린 결국 백성을 위해 존재하니까."



"백성을...위해..."


"그래. 그게 성주가 우리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쳐온 거다. 백성이 바로 고구려다. 결국 이 모든건 백성,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함을 잊으면 안된다는 거지. 단 한명의 백성이라도 우린 온힘을 다해 지켜야 해.그게 고구려를 지키는거라고 하신다"



단 한명의 백성이라도 온힘을 다해 지킨다. 사물은 조용히 중얼거려보았다. 


만춘은 겪어볼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 그 나이에 안시성의 성주인건 그가 물론 아주 많은 공을 세운 훌륭한 무장인 까닭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타고난 신분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고위귀족으로 살아온 사람이 저런 생각을 진심으로 제 이상으로 삼고 실천하기 위해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온몸을 부수어 백성들을 지킨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성주는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저도 모르게 툭 하고 나와버렸다. 파소가 그런 사물을 보고 웃었다.



"그렇지? 좀 쓸데없이 대단한 형님이야. 가끔 사람같지 않다니까."




"...그건 아닌데..."


"응?" 


돌아보는 파소의 얼굴에 사물은 아니라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농담으로 하는 그 말에 사물이 머릿속에 많은 것이 떠올랐다. 저를 하나하나 챙겨주던 모습, 걱정하던 표정, 다정하게 살필줄 아는 말투, 누구보다 사람냄새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  



사물.



제 이름을 부를때 그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만큼이나 묵직하던 향기. 


닿아오던 뜨거운 체온. 


달아오르게 하던 손길.


그 감촉.





"아."



"왜그러느냐?" 

"...아닙니다."


사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그게 떠오를게 뭐람.  

보지 않아도 빨개졌을 것이다. 제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정신차려라 사물. 신성한 시찰시간에 이 무슨 망측한 상상이냐.

사물은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야 농담인데 뭘 또 그렇게..."


"아..아뇨.."



그러다 파소는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사물은 덩달아 파소에게 가까이 귀를 대었다.


'그럼 너도 우리 성주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거지?"


"네? 네...그렇죠..."


우리 성주가 널 어찌 생각하는 줄 알면 넌 얼마나 놀랄까. 파소는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애써 당겼다.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키도 크고 잘생겼잖냐. 좀 깐깐해서 그렇지 영민한 사람이야. 게다가 능력있지,집안도 좋고,제 사람한테는 아주 잘하고 은근 순정파야. "



"네...그러신 거 같습니다."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은 차마 만춘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파소에게 답했다. 파소는 허나 그 대답으론 부족했다. 


"응...그니까..."


널 은근 맘에 두고 있는거 같은데 좀 잘해보면 안되겠니. 아가? 라는 말이 정말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파소는 꾹 참고 말을 돌렸다.



"잘해드려. 그 형님이 제 속내를 잘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긴 하는데...그래도 제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절대 곁을 안주거든. 널 계속 곁에 두시는거 보면 성주도 네가 퍽 맘에 드는거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감사할 일이죠. 뭘 말해도 이런 정석적인 대답. 하긴 니가 너무 어려서 짐작조차 못할 일이라 이런거겠지. 전시상황인게 정말 원망스럽다. 아님 이 연애의 달인 파소님께서  성사 작전을 짜도 정말 오조오억개는 짰을텐데... 눈앞의 그 어린애가 이 전시상황에 성주와 어찌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파소가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성주대리!"


"백하야."


만춘을 대신하여 부상병 돌보기와 성민들 민심 달래는 일로도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백하가 오랫만에 여유있게 마주치는 정인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 사물이도 나왔구나."


"백하님"


"성주는?"


역시 가장 먼저 묻는게 오라비의 안부다. 사물은 공손하게 답했다.



"오늘 저녁부터 일어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일부터 정식으로 다시 복귀하시겠다고.."


"아 진짜?"


"그래. 이제 비상경계령도 거둘거다. "



좋긴한데 오라비가 걱정되는 마음도 아직 드는지 백하는 기쁨 반, 걱정 반인 얼굴이었다. 그런 백하의 고민을 알아챈 듯 파소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어. 아까 보니까 멀쩡하더만. 추수지가 너무 엄살부려서 그런거야."


이럴때 아님 안쉬잖아. 파소의 말에 백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긴 하죠. 성주의 부재가 너무 길어지면 성민들도 불안해할테고..."



군사를 뒤로 물려 진을 구축한채 조용히 경계만 하고 있는 당나라 군대였으나, 안시성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 물러가거나 기껏해야 한번더 공격해올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의 한고비를 넘겼다는 분위기가 성내에는 팽배했다. 다들 사기가 한껏 올라있어 한번더 공격해온들 어떤 공격이라도 물리쳐주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다시 대장기가 돌아다니는 걸 보여줘야해. 성주가 견고하다는 걸 보여줘야 당나라놈들도 딴맘을 못먹지"


그만큼 안시성의 견고함을 보여주었고, 평양성쪽에서도 전 군사를 모으고 방어태세 갖추는게 끝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무리 날고긴다는 전쟁의 신 이세민이라고 할지라도 살이 에는 고구려의 겨울을 온몸으로 맞긴 어려울 것이다. 안시성이 버티는 동안 주변 성들도 혹여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돌아서 남하할 경우의 수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하고 당나라 군대를 맞을 준비를 끝냈다고 하니, 오도가도 못하는 판국이었다. 허나 성주가 심한 부상을 입어 움직일수 없다거나 죽었다고 소문이 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성주의 부재를 틈타 결사적으로 안시성을 뚫으려 들 것이다. 



"그동안 사물이 고생많이 했네.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사물이 고개를 숙이자, 백하가 손사레 쳤다.


"오빠가 허허실실해도 정작 믿는 사람 아니면 절대 곁에 두지 않거든. 혼자서 애썼을거야. 하여튼 손 많이 가는 인간이라니까."



백하는 혀를 찼다. 마치 성주가 어린 남동생이나 되는 것처럼 구박하는 모양새가 거꾸로 그녀의 안심을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오라비 대신에 성민들의 사기를 북돋고 그 빈자리를 채우려 애쓰면서 만춘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린 그녀의 애환이 살짝 엿보이는 것 같았다. 파소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게 말했다. 


"그럼 이참에 저녁에 간단히 술이라도 돌릴까?"


"정말요?"


"괜찮아. 경계는 충분히 세울거니까. 성주가 복귀하심을 대대적으로 알려야지."


"오오~복귀 축하~"


백하는 벌써 신난다는 듯 어깨를 들썩들썩 했다. 그러더니 사물을 툭 친다.


"술은 좀 하시나? 우리 태학도?"


"아 네.그럼요."


"좋았으~"



맘에 들지 않으면 곁을 주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 아니면 곁에 두지 않는다. 

들을때마다 사물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만춘이 사물을 믿는다고 말하는거 같아서. 


그가 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거 같아서.



사물은 정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안시성을 위하여~!"


"위하여~!"


벌써 한 백번쯤 말한 건배사일거다. 여전히 찐감자에 주먹밥, 소금반찬뿐인 식사에 물을 타서 데운 술을 곁들였을 뿐이지만, 흥이 많은 고구려 백성들이만큼 모두들 신이 났다. 경계를 서다 돌아오는 병사들은  묽게 탄 술도 달게 마시고 뜻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피곤을 달래며 웃었다.


"성주가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 엄살이라니까"


"너무 잘하면 이세민이 재빨리 도망쳐버릴테니 그럼 성주가 공을 세울 기회가 줄어들잖나"


"푸하하-"



성의 수비경계선을 둘러보고 돌아온 부관들이 술을 돌리며 웃어댔다. 사물은 활보가 넘겨주는 술잔을 받았다.


"술은 좀 하세요?"


"못마시진 않습니다."


여러 술을 섞고 물을 타서 맛은 떨어져도 술은 술이었다. 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있었던 지라 따뜻하게 데운 술이 유난스럽게 달았다. 사물이 천천히, 하지만 한입에 술잔을 비우자, 풍이 어이구- 하면서 술을 더 따라주었다.


"잘드시네. 우리 사물님.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다같이 먹으니 괜찮죠?" 

"네. 좋습니다."


두번째 잔도 깔끔하게 비웠다. 요즘 늘 심신이 차가운 기분이었는데, 오랫만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추수지가 물었다.


"성주는?" 

"아까 보고도 다 받으셨고, 평소랑 다름없었습니다요."


"그래? 근데 왜 안나와보시지?"


"그동안 밀린 일이 많으시니까 보고서 좀 더 보시고 나오신데요. 먼저 우리끼리 놀라고 하던데요"


평소랑 다름없었고 허락도 받았으니 우린 놀련다. 하고 풍과 활보는 평소답지 않게 죽이 척척 맞아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기울였다. 파소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더니 난간 아래 서있는 백하에게 어느새 쫓아가 둘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추수지는 모두의 모습에 뭐 그럼 됬지 하더니 풍과 활보 옆에 앉았다. 그 옆에서 세번째 술잔을 받던 사물은 갑자기 퍼뜩 생각이 났다.



"아...맞다."


"왜그러세요?"


"아닙니다. 저 잠깐만요."


사물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사라졌다.













'똑똑-'


"들어오너라."



만춘은 문소리에 생각없이 대답했다가 낯익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어쩐 일이냐"


"성주."


약사발과 붕대, 약등을 들고 사물이 다가왔다.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그런다.



"약드실 시간이 된거같아서..."


"허..녀석 참.."


정말 지나칠정도로 이렇게 올곧을 필요는 없는데. 만춘은 혀를 찼다. 다들 오랫만에 즐거운 시간이라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데, 아무도 챙기지 않는 만춘의 부상을 돌보러 그걸 마다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이제 더이상 이러지 않아도 된다. 내일부터 당장 복귀할텐데.."


"상처가 완전하게 회복되신건 아니지 않습니까. 의원도 분명 이달말까지는 약을 드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다같이 재밌게 놀고 있었을텐데.."


아쉽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사물은 슬쩍 웃더니 고개를 말없이 가로젓고는 그의 곁에 다가앉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러자 만춘은 한숨을 쉬더니 들고있던 보고서들을 내려놓고 제 윗옷을 벗었다. 이젠 익숙해진 만춘의 어깨였다. 사물은 붕대를 풀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많이 낫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덕에 아주 좋아 졌다. 갑주는 충분히 입을수 있어."


꿰맨 상처를 닦아내고 상처약초를 개어 얹었다. 아직은 꽤 쓰라릴텐데 그는 전혀 미동하나 없다. 사물은 무릎으로 앉아 상처에 약초를 조심조심 붙였다. 요근래 상처를 돌볼때 그는 누워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앉아있는 그의 상처를 돌보려니 혹여 약초가 떨어질까 싶어 사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다."



약초를 붙이다보니, 그의 어깨에 난 다른 상처들도 보인다. 사물은 괜히 혀로 입술을 축였다. 거의 다 나았지만 아주 희미하게 흉터처럼 흔적이 남았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지나갈수도 있는 흔적, 이건 제가 낸 상처다. 이 상처를 계속 저가 돌보았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았으면 어쨌을까. 새삼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힘들면 어깨를 물어라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지만 그 목소리는 기억이 났다. 차마 성주에게 상처를 낼수 없어서 어깨를 물진 않았는데 대신 손톱자국이 났다. 나중에 상처를 돌볼때 발견하고 아차 싶었었다. 


"왜 그러느냐?"


제가 어떤식으로 그에게 매달렸는지 기억나고 말았다. 사물은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이젠 실을 뽑아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괜히 달아오르는 열을 애써 식히며 사물은 새 붕대를 감았다. 매일매일 하다보니 솜씨가 점점더 늘었다. 붕대를 마무리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자 만춘은 제옷을 걸쳤다. 


"고맙다."


"당연한 일입니다."


남은 붕대를 챙기더니, 약그릇을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아..이거 고만 좀 먹으면 안되겠..."


"드셔야죠"



낮지만 단호하다. 이길수가 없네. 만춘은 쩝- 입맛을 다시더니 사발을 들고 약을 들이켰다. 끝맛이 쓴지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사물이 그런다.


"잘드시면서 뭘요"


"뭐야? 이녀석이.."


마주친 얼굴은 드물게 미소가 떠있다. 잔치에 있다가 나온건지 은근한 술냄새가 나고 늘 새하얗던 뺨에는 홍조가 떠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달콤하고 우아한 향기. 


이 성에서 저만 알수 있는 고혹한 향기.



사물의 향기.




"왜그러십니까?"


왠일로 질문을 해왔다. 사물을 바라보던 만춘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사물."


"네."



"저번에 당나라 군대 기습이 있었던 날."



 그러자 웃고있던 사물이 굳었다. 



"내가 널 품었던 건..."


"그건 더이상 말씀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몸의 상처도 모두 나았고, 신열도 내렸다. 오히려 머리가 맑고 차분해졌다. 

사물은 그것으로 되었다 싶었다. 무릎을 모으고 자세를 가지런히 했다. 



"사물."


"제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과로와 계속되는 악몽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요."


마치 준비된 대답같았다. 나아가 그의 말을 더 듣고싶지 않다는 벽을 치는 말투처럼 들리기도 했다. 만춘은 얼굴을 굳혔다. 





".......너는..."


"성주에게 칼을 겨눈 절 죽이셨어도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허나 성주께선 절 그냥 받아주신 겁니다."


"....."



"그걸로 되었습니다. 그걸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마치 감사를 표하는 듯한 자세. 만춘은 뭐라 더 말을 이으려다 한숨을 쉬었다.



"니가 정말 그걸로 된다면...."



"......"



"그게 니맘에 편하다면...그래..알겠다."



"...네."




사물은 일어나더니 소반과 약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만춘은 그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머리를 손에 기대고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하하하하-"




술로 시작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누군가가 시작한 노래와 연주에 사람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춤추는 이들을 보며 주변사람들은 잠시마나 전쟁을 잊고 축제인양 즐겁게 박수를 치고 박자를 맞추었다. 사물은 담장의 그림자에 제 몸을 숨기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널 품었던건...



만춘의 얼굴이 생각났다. 어느때보다도 시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그건 그냥 사고였어.



사물은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적 흥분이 지나친 상태로 피를 보았고 살기에 대한 흥분은 성적인 흥분으로 연결되기도 하니까. 전쟁속에 그런일은 정말 아주 흔했다. 만춘은 전쟁을 아주 많이 겪어온 장수이니 그런 저를 받아주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아님 뭐겠어.



성주에게 대체 무얼 기대했느냐 사물. 그는 스스로를 조소했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그의 마음 무얼 알고싶은거냐. 너.





내마음.



내마음은 뭐지.



그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고, 존경스러운 사람이야.

그가 죽는 건 안시성 전체를 죽이는 일이고, 고구려를 망가뜨리는 일이야.

그를 죽이는 건 옳지 않아.


그가 살았으면 좋겠어.



당신을, 살리고 싶어. 





당신을 죽여야한다는 내 악몽의 불은 꺼졌는데, 또다시 타오르는 이 뜨거움은 무얼까. 

사물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사물"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저를 불렀다. 

완전한 어둠속에 들린 목소리에 사물은 굳어버렸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난 아무것도 말할수가 없다"



"........"



"그리고..니가 원한다해도 마찬가지야. 난 아무것도 말할수 없어."



사물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어둠속으로 완전히 잠겨들자, 누군가가 제곁에 다가와있다는게 느껴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향기로 느낄수 있었다.


부드럽지만 묵직하고, 포근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향기.



"정말 나는 몹쓸 인간일거다. 그래서 결국 너에게 상처 밖에 줄수없을텐데.."



아마 이 성내에 저만 알수 있는 그런 향기.



"이런 나쁜 나라는 인간이, 그런데도 네게 다가간다는게 얼마나 큰 죄인지 나도 알지만...."



"......."


"나도 이제 멈출 수가 없구나."



천천히 다가온 그가 바로 눈앞에 섰다.

온기와 향기가 오감으로 느껴질만큼. 

그의 눈이 제 눈을 보고있는 게 보일만큼 

그렇게 가깝게. 



"........저는....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물"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건지...나는 뭘 어쩌고 싶은건지....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빛하나 없는 완전한 어둠속인데, 오히려 그래서 그가 잘 보였다.

오롯히 그만 보였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는 제게 다가올 수 조차 없는 그가.



"허나 저는 당신이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만은 알수 있어요"




당신을, 살리고 싶어.



당신이 살아서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어.




사물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역시 아무것도 말할수 없으니까요. 그저 살아있으세요. 당신이 살아있어서 주는 상처라면 받겠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어둠에 완전히 잠긴 시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니 제게 상처를 주세요."




"사물."



"상처입지 않을테니까."





제 말을 떨어지기 무섭게 눈가를 쓸어주던 손이 제 턱을 당기는 걸 느끼고 사물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단단한 팔이 제 허리를 단단히 감았고 사물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저를 삼킬듯 쏟아지는 향기와 입술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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