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rendo da Te




사랑은 시간 틈을 달린다





W. 이소루




 

"아저씨, 좋아해요."



"나도야 꼬맹아. 새삼스레 왜 그래?"



"그게 아니라, 진짜로, 많이 좋아해요."



 어색할 정도로 단호했던 아이의 목소리가 증폭되어 윙윙거리며 귓가에서 울렸다. 매일 만나 소소한 이야기를 하던 사거리의 작은 커피 전문점에서, 매일 마시던 캬라멜 마끼야또와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매일 듣던 이름 모를 세미 클래식이 들리던 그때, 아이의 입술 끝에서는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말이 나왔다. 예의 그 수줍고 고운 미소가 아닌 씁쓸하게 젖은 입가를, 가볍게 움직이던 손동작이 아닌 잔뜩 굳어버린 손가락 끝을, 나를 쳐다보는 맑은 눈동자가 아닌 식어빠진 컵을 바라보는 멍한 눈동자를 나는 차마 견딜 수 없어 그 아이와 텅 비어버린 나의 자리를 뒤로하고 커피 전문점을 뛰쳐나왔다.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불어제끼는 차가운 늦겨울의 바람에 코끝이 적잖이 시려왔다. 굳게 닫혀버린 문 뒤로, 그 아이의 갈빛 머리통이 조금씩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나의 목 안에 주먹이라도 쑤셔 넣은 듯, 목구멍이 콱 막혀왔다. 숨쉬기가 힘들어져 무식하게 가슴을 치며 컥컥, 짧은 숨을 어거지로 뱉어내었다. 혼란에 빠진 머리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제멋대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등으로 느껴졌다. 애달픈 눈물로 젖은 동그란 그 두 눈동자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처연한 그 두 눈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힘이 빠져버린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아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무식하게 뛰기 시작한 다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아이의 두 눈이 진득하게 쫓아오는 느낌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퇴근시간의 길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미친 경주마 마냥 앞만 보고 달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어깨를 부딪히고, 발에 걸려 넘어질 뻔도 했지만 무작정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나 뛴 것일까. 어느새 나의 주변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원하던 바람이 새삼 스산해진 것 같아서 천천히 다리를 늦추었다. 주변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온통 까만색이었다. 검은 배경 위로 그 아이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욱, 헛구역질이 일어, 자리에서 엎어지듯 멈춰서 한참동안 속을 게워냈다. 텅 빈 속은 그저 초록빛 위액만을 게워낼 뿐이었다.


 온몸의 진이 빠져 차가운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로 고개를 쳐박았다. 다리 사이의 어둠 속에도 아이는 있었다. 아이가 나를 붙잡고 울었다. 그 흔한 울음소리 하나 없이,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리는 아이는 입가에 아렴풋한 미소를 띠고 있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득해 보였다. 눈물이 고인 다갈색 눈동자는 이제 희미한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에 급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눈앞에 한가득 들어오는 높은 시멘트 건물은 나에게 익숙한 곳이자, 그 아이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함께 연구하고 탐구하며, 삶을 부대끼던 우리들의 실험실이 말라버린 나무들 사이로 위태롭게 서있었다. 정신없이 뛰던 그 와중에도 나의 다리는 익숙함을 추구했나보다. 이제는 아마 저 실험실에 가지 못하겠지. 다시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지. 머릿속에서는 어서 도망가라며 시뻘건 비상벨이 번뜩거렸으나, 나는 어느새 익숙한 회색의 실험실 계단을 밟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나에게 명령하며 실험실의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그 아이와 나의 첫 만남이 있었던 곳,

그 아이와 내가 제일 소중히 여겼던 곳,

그 아이와 내가 토니 스타크와 피터 파커가 될 수 있었던 곳.

집보다도 자주 들락날락거리던 우리만의 공간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길가의 소음은 귀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집중할 때면 반짝이던 눈동자가, 유달리 높던 웃음소리가 나를 덮은 무거운 정적을 깨고 주위를 온통 흩날렸다. 모두가 떠나 차갑게 식은 실험실 입구에 주저앉아, 나는 아이의 사소한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시간으로 재자면 몇 초도 채 되지 않을 그 찰나에, 나는 아이와 유대하고 공유했던 그 모든 감정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린 시절의 첫사랑마냥 철없고 순수했던 설렘, 이상할 정도로 사소한 일에 치밀어 오르던 질투, 땀에 젖은 채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아찔해지던 본능까지. 작고 소소한 느낌으로 시작된 감정이 점점 커져 해일처럼 밀려와, 떨리던 나의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 안았다. 아이가 선물해준 모든 감정이 전부 되살아나 내 머릿속을, 내 가슴속을, 내 온몸을 쥐고 기쁘게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뒤로한 채 도망쳐 나왔는지,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는지 금방 살갗으로 후회가 기어 올라왔다. 혼란스럽던 머리는 금방 가라앉았지만, 이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한꺼번에 흘러들어온 감정에 쿵쿵거리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거칠고 빠르게 뛰었다.


 아이가 그 커피 전문점에 남아있기를, 그 고백을 고스란히 손에 쥔 채로 나를 기다려 주기를 간절히 빌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리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달리며 아이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러시아워이기 때문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와 맞부딪혔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들과 엉켰지만 사과할 겨를은 없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서둘러 아이의 두 눈을 마주하고, 작은 두 손을 맞잡아 주어야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이산화탄소 덩어리와 아이를 혼자 두고나온 커다란 죄책감이 눈물에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늦겨울 바람에 눈물길이 나버린 볼은 시큰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이에 대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감정이 도망간 나를 탓하듯 심장 언저리를 옥죄어왔다. 이렇게 감정에 무딘 나도 괴로운데, 예민하고 어린 나의 아이는 혼자서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아이에 대한 걱정과 뒤엉켜버린 온갖 감정들이 제어되지 못하고 터져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미안하고 아픈데, 한편으론 나의 아이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치를 피해 진심을 벽장 깊숙이 꼭꼭 숨겨놓아 그 누구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았던 나와는 다르게, 그 잔인한 세상과 맞설 준비를 단단하게 한 나의 아이에게 너무 고마웠고, 또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쳐버린 내 자신이 죽을 만큼 싫었다.

 

사랑이 하고 싶었다.

 

 남녀사이의 알콩달콩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못해 알레르기가 있던 나였지만, 나의 아이와는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오랫동안 아이만을 기다려왔던 나의 빛바랜 고백이 미친 듯이 쿵쾅대며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까 아이가 차마 못 다했던 이야기를, 내가 다 듣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소중하게 품에 껴안고 달렸다. 다시 아이의 눈동자를, 목소리를, 아이와 관련된 모두를 내 안에 한가득 담고 싶어 벅차오르는 감정과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아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 몰래 혼자서 간직해오던 그 모든 감정을 나의 서투른 말에 압축하여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했지만, 나는 아이가 나의 마음 전부를 이해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터는, 어리지만 강한 나의 아이는 투박한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는 나의 겉모습만이 아닌, 속에 숨겨져 있는 작은 다정함까지 알고 있는 아이였으니까, 피터는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지만 아이의 깊은 두 눈동자를 생각하며 더욱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도착한 커피전문점에 가득 찬 것은 분주한 발걸음과 어지러운 목소리 뿐, 나의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까맣게 속 타는 마음에 아무리 소리 높여 아이의 이름을 외쳐보아도 아이는, 피터는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에서든 통통 튀던 동그란 머리통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타까운 시간만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커피전문점 한가운데서 홀로 울고 있는 나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눈초리를 뒤로 한채 다시 복잡한 거리로 나왔다.



"꼬맹아!! 피터 파커!!!"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대곤 아이의 이름을 힘껏 불러 제꼈다. 거리의 이름 모를 행인들의 눈빛이 나를 따갑게 쳐다보았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의 아이를 서둘러 찾아야했다. 주인을 잃은 시간만이 뿌려진 거리에서 정신없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분명 아이는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굳게 믿으며 나에게만 허락된 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피터!!"



 사람들로 꽉 찬 거리 속, 동그랗게 반짝이는 갈색의 작은 머리통이 흠칫, 제자리에 섰다. 뒤돌아선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뒷모습이 피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아이의 뒷모습만으로도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금방 다시 앞을 쳐다보곤 어색하게 걸어 나갔다. 나는 이미 지쳐버려 축축 뒤쳐지는 다리를 이끌고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바닥으로 힘없이 처진 아이의 손끝을 잡아채고는 그를 돌려세웠다. 아이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마음이 애타 서둘러 그를 내 품안에 가두었다. 나보다 살짝 작은 키와, 보기 좋게 마른 아이는 누군가 맞춰준 듯 나의 품에 꼭 맞게 들어찼다. 아이와 살을 맞대자 가슴 가득 충만함이 차올랐다. 아이의 마른 등이 내 손끝에서 잘게 떨렸다.



"왜 다시 왔어요?"



 아이의 미성이 살짝 잠겨있었다. 아마 볼은 눈물로 빨개져있겠지.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올라오는 따듯함에, 나는 아이의 어깨에 살짝 볼을 비볐다. 살을 통해 전해지는 작은 온기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나의 품에서 떼어내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예상대로 눈물로 얼룩진 아이의 하얀 얼굴은 시린 바람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두 손으로 아이의 볼을 감싸 쥐고는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차가워진 아이의 볼이 조금씩 따듯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늘 그리웠던 두 쌍의 애달픈 눈동자에는 오롯이 나만이 담겨있었다.



 "지금까지 말 못했던거, 오늘 다 말해주려고. 지금까지 가슴 속에 꼭꼭 숨겨오던거, 너한테 다 말해주고 싶어서."



 아이의 눈동자를 곧바르게 응시했다. 몇 개의 단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이 감정이 눈동자로 전해지기를, 흘러넘치는 이 마음을 그 깊은 눈동자에 담고 감싸 안기를, 나의 서툰 말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기를.



"...사랑해, 피터."



아이의 고동빛 눈동자가 내 감정을 가득 안았다. 눈물이 새어나오는 아이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아까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지금까지 너 애태워서 미안해, 이렇게 늦게 와 버려서 미안해. 그래도, 용서해줄거지?"



 부족하기만한 나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가 형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우는 아이가 너무나도 소중해 털끝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포슬포슬한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 넘기며 아이의 온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 아이를 껴안은 내 두 팔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두 손도, 내 품에 꼭 안겨있는 나의 아이도, 모든 것이 아직은 불안했지만, 그러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아이를 내 품에서 살짝 밀어냈다. 아이의 눈이 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나의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진하고 깊은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조심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마주하고 숨결을 나누는 입맞춤은 손끝이 떨릴 정도로 설레이고, 머리가 삐죽 솟을 정도로 아찔했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나누는 숨소리는 상상 그 이상으로 애틋하고 절묘했다. 너무 행복해서 울 것 같다는 상투적인 말이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이의 가벼운 콧바람이 살짝 내려앉는 곳이 기분 좋게 간질거려,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버렸다. 나의 아이도 환하게 웃으며 새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어딘가가 텅 비어있던 곳을 가득히 메꾸는 행복이 아이와 나의 사이에서 쿵쿵 거렸다. 


 아마 우리의 사랑은 지금처럼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반대를 하며 우리를 말리려고 온갖 욕설을 퍼붓겠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사라져 버리라고 돌을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두렵지 않았다. 함께 떠날 그 험한 미래도, 아직은 불안하기만한 우리의 모습도 나의 아이와 손을 잡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 전부 사라져 버릴 테니. 나를 가득 담은 눈동자가 나의 옆에만 있다면, 다시 일어나서 아이와 함께 달릴 수 있을 테니. 가만히 나의 아이를 바라보다 다시 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거칠어진 아이의 입술은 충분히 따듯했다.

 

아이의 입술이, 내 위로 살포시 웃음을 띠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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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써버린 글이라 매우 많이 오글거리고 유치합니다...허허...새벽에 술마시면서 노래를 들으면 이렇게 되어버려요...

정재형의 Running이라는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 쓰는 토니피터인데 너무 어색하지는 않나 걱정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스네른/로키른 위주 글쟁이. DROMP/ND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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