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면."


그녀의 향기가 화악 풍겨왔다.


"소독해줘요. 제대로"


다가오던 그녀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멈추고 속삭였다.


달큰한 내음에 어찔해짐을 느끼며 시진이 홀린 듯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조심스레 그녀를 보듬고 파고드는데 그녀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뻣뻣이 굳어 부자연스럽게 응하는 그녀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오자니


"계속해요."


시진은 웃으며 항복했다.

상관의 명령엔 언제나 절대복종.


벅차오르는 가슴에 그녀를 안고 최대한 아프지 않게 구석구석 소독해주었다.








"강선배!!"


"세상에, 윤중위!!"


명주가 달려와서 모연을 끌어안았다. 그 가는 팔로 모연을 번쩍 들어 한바퀴 휘돌리자 모연이 기겁했다.


"어우, 깜짝이야. 윤중위 힘 세네?"


"중윕니다, 저. 이래봬도."


"어떡해, 보고 싶었어, 전우야아."


"내가 원래 여자한텐 간지러운 말 잘 안하는데 오늘만 하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두 여자가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는 걸 보고 시진이 피식 웃었다. 여자라서 봐 준다, 내 여자 끌어안는 거.


"근데 태국엔 웬일이야. 설마 파병 온거야?"


"설마요. 서상사 파병 기간도 끝나가는데 엇갈릴 일 있습니까? 휴가 온 겁니다."


명주가 흘끗 모연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근데 서상사는요? 서상사 어딨습니까?"


"야 윤중위, 넌 상급자를 보고 경례도 안하냐? 난 안보여?"


시진이 투덜대자 명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 상급자? 저 파병 온 거 아니라고 방금 말했지 말입니다. 서상사 어딨습니까."


하여간 암수가 쌍으로 맘에 안들어.

제대로 못 잔다는 거 모연에게 일러바친 일로 대영에게 골이 나 있던 시진이 불퉁한 얼굴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출장 보냈다, 내가."


"선배!!!"


"아이, 귀청이야."


명주가 소리를 빽 지르자 시진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나 오는 거 선배는 알았잖습니까! 근데 어딜 보내요? 선배가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알았지. 한참 전부터.


[딸자식이 유리한 부당함 쓰는데 점점 거리낌이 없어져서 걱정일세.]


한숨을 푹 쉬던 사령관님에게 시진이 웃으며 대답했었다.


'윤중위 일 열심히 하고 잘하는 특출난 군인입니다. 포상휴가 정도 크게 부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명주는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쏘아댔다.


"선배는 내가 이 모든 해피 엔딩의 일등 공신인 건 압니까? 뒷간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아주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할 땐 언제고."


명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갖다대며 목소리를 착 깔았다.


"윤중위. 네게 유리한 부당함 딱 한번만 쓰자. 나 태국 좀 보내줘."


"어머, 이 사람이 그랬어?"


"야이씨 적당히 까불어라? 너 군인 아니어도 내 후배다?"


"아, 그러니까 서상사 어딨습니까아! 하도 안돼보여서 내 남자 잠깐 빌려준건데, 인간적으로 너무 오래 빌려쓰고 있지 말입니다."


"니 남자 아름다운 해변에서 섹시한 구슬땀 흘리고 계실테니 가 봐. 너를 위해 선정한 로맨틱한 재회 장소다."


"아이...이...센스쟁이."


명주가 앙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비키니 입고 갈까? 가져왔는데."


"거기 중대원들도 있다. 서상사 눈 돌거다."


"눈 돌아가라고 입는 겁니다, 비키니는."


신나서 돌아서 뛰어가려던 명주가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시진선배 다크써클이 아주 무릎까지 내려왔습니다. 강선배, 밤에 좀 재워가며 하십쇼."


"야!"


시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모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장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정말로 열심히 그러려고 하는 중이었다, 모연은.


기어이 자기가 재우고 말겠다며 낮이고 밤이고 안가리고 졸졸 쫓아다니며 침대로 밀어넣는 모연 때문에 시진은 미칠 것 같았다.


"제발 나 좀 봐줘요. 나 진짜 자고 싶어요, 이제."


"자요. 자. 자자니까? 오구오구, 우리 유소령님 눈 감습니다아."


"말 했잖아요, 강선생 여기 있으면 내가 못 잔다니까."


빅보스도 사람이다.

무박삼일로 술을 퍼도 끄떡 없는 강철 체력이긴 하지만 사람이다.

모연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조금씩 자며 버티던 그는, 모연이 한순간도 곁을 비우지 않고 쫓아다니며 재우려 들자 한 숨도 자지 못해 바싹바싹 말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내가 있으면 잠을 못 자요? 여자친구가 뭐 잡아먹어요?"


"내가 잡아먹을까봐. 여자친구가 너어무 야해서, 생리적으로 잠이 안오지 말입니다."


-어떻게 잠이 들면, 식은땀에 젖어 강선생 이름을 부르며 깨어납니다. 그 모습을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강선생 옆에서는 못 잘 겁니다.


모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왜 못보여? 난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다 보였는데.





"선배, 지금 남자친구 고문 하고 있는 건 알죠? 그것도 고문 중에 제일 무섭다는 잠고문."


명주가 오징어 볶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선배도 진짜 독하다. 나보다 독해. 내가 여친이었으면 지금쯤 맘 약해졌을 거 같아."


오늘 아침에 본 시진은 잠을 못 자 완전히 병든 닭 같이 고랑대고 있었다. 아침밥을 두어 숟갈 뜨다가 생각 없다며 수저질을 멈춘 그는, 입맛 없으면 잠이나 자러 가자며 나타난 모연에게 끌려갔다가 점심 때 쯤 간신히 풀려났다.


"그러게 내가 말 안했습니까? 그 양반 약한 모습은 죽어도 안보인다고, 그래서 빅보스라고."


멀리 보이는 강가에서 삽질을 하다 말고 팔로 하트를 그려보이는 대영에게 끄덕이며 손가락 하트를 뿅뿅 날려준 명주가 칵테일을 쪽 빨고는 말했다.


"일단은 후퇴 하시죠, 남친 진짜 쓰러지기 전에. 빅보스가 깡으로 버틸 땐 아무도 못 꺾습니다."


그러나 모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전투야. 내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투. 깡으론 나도 어디가서 안 져."








[뽀빠이 송신. 타겟 위치 확인 됐습니다. 식료품 창고입니다. 채소 뒤쪽.]


"이쁜이 송신. 타겟 상태는 어떻습니까."


[완전히 뻗었습니다. 제가 한 번 찔러봤는데 꿈쩍도 안합니다. 때려 봤는데도 떡실신입니다.]


모연은 감동했다. 

이병이 감히 자는 소령, 그것도 알파팀 팀장을 때려 볼 생각을 하다니. 정이병이 이 작전에 목숨을 걸어줬구나.


그러나 정이병은 그저 계급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간 지켜본 결과 형수님은 중대장님 윗계급인게 없는 눈치로도 확실해 보였다. 군인은 오직 더 높은 사람 명령에 따른다.


창고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진이 깰까봐 모연은  나는 듯이 달려갔다.



끼이익.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창고 문을 조심스레 연 모연이 두리번 거렸다. 채소...채소 뒤쪽이랬지...


무와 당근 등이 쌓여있는 선반 뒤쪽으로 돌자 구석에 구겨져 박혀있는 내 남자가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편한 침대 두고 왜 불쌍하게 이런 데서 자냐고.


그래도 간신히 자는 얼굴 한번은 보겠구나 하고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강모연!"


아이, 깜짝이야.


두 눈 크게 뜨고 자신을 응시하는 시진과 눈이 마주친 모연은 몸이 굳은 채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가 그녀를 뚫어버릴 듯한 시선을 거둘 때까지, 그녀도 따라서 숨도 쉬지 못했다.


"뭐합니까. 여기서."


시진이 몸을 일으켜 쌓인 당근 중 하나를 꺼내보며 말했다.


"그러는 유소령님은 여기서 뭐해요?"


"보면 몰라요? 식료품 확인하고 있었지 말입니다."


"자고 있던 거 같은데. 나 피해서."


그리고 내가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깬 것 같은데. 생리적으로. 


그녀가 곁에 있으면 생리적으로 잠이 안 온다는 헛소리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고 있던 거 아닙니다."


"방금 나 강모연이라고 부른 거 같은데. 자다 깨서."


그게 또 듣기 나쁘진 않았고.


"강선생 환청 들었습니까?"


"왜 괜찮은 척 해요?"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당근에 이어 양파를 만지작대던 시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것도 왜 하필 내 앞에서만 괜찮은 척 해요? 내가 왜 이렇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덥지도 않은 날씨에 땀에 머리칼이 다 젖었고, 아직도 숨소리가 씨근대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요? 손을 뻗으면 잡아줄거고 안겨오면 안아줄건데.


또르르.


모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흐르자 시진이 당황하며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이씨, 방금 양파 만졌죠. 눈 맵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매워, 이씨, 눈 맵단 말야."


모연은 이때다 싶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명색이 내가 유소령님 여자친구잖아요. 근데 내 앞에서만 못잔다는 게 말이 돼요?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괜찮은 척 해도 나한테는 괜찮은 척 하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왜 내 앞에서만 괜찮은 척 해요? 왜 내 앞에서 제일 힘들어요?"


아예 주저 앉아 펑펑 우는 모연에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던 시진이 방금의 실수를 기억하고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헤매이던 손을 자기 허리에 짚고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단 말 듣기 싫어요."


"...미인이십니다."


"그 말도 듣기 싫어요!"


시진이 쪼그려 앉아 모연과 눈높이를 맞췄다.


"듣기 싫어도 들어요. 미안합니다. 이 정도로 신경 쓸 줄은 몰랐어요."


"몰라? 그걸 왜 몰라? 내가 하루종일 유시진 생각만 하는데 그걸 신경 쓸 걸 왜 몰라?"


시진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등으로 모연의 젖은 뺨을 건드렸다.


"이거 듣기 나쁘진 않네. 근데 강선생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음...시진은 말을 고르며 털썩 편하게 주저앉았다.


"나는... 강선생 앞에서 괜찮은 척을 하는 게 아니라 괜찮은 겁니다."


"무슨 헛소리에요."


"나 악몽을 꿉니다. 잠들 때마다. 강선생에 관련된 악몽이죠."


예고 없이 갑자기 훅 들어온 그의 고백에 모연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되게 무서운 꿈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싫습니다. 그래도 자야 몸이 버티니까 자는데, 되게 무서워요. 근데 깨고 나서 강선생을 보면 괜찮아져요. 그래서 되도록 적게 자고, 되도록 많이 강선생을 봅니다."


-사실 형수님 부패한 시신을 찾아낸 그 날 이후 저도 종종 악몽 꿨지 말입니다.


무슨 꿈일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트라우마라고 하나. 그냥 상처 같은 거에요. 박힌 총알을 제거하고 치료를 해도, 상처가 낫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까."


시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처음 겪는 일 아닙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해결 될 일이란 걸 알고."


그는 알파팀의 팀장이다.

팀장이 되기 전에도 알파팀에 속해 있었고.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 충분히 겪어봤고 극복해 봤다고 담담히 전해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흉터를 간직한 그가.


"상처는 이미 난 거고, 중요한 건 곪지 않게 하는 거겠죠. 박힌 파편을 확실히 제거하고, 약을 바르면서 치료하는 거."


시진이 모연의 얼굴을 만지려다가 손을 내려 모연의 손을 쥐었다.


"강선생이 이렇게 돌아왔으니 박힌 건 제거 됐고, 매일 강선생의 얼굴을 보면서 약 바르고 있지 말입니다."



시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모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괜찮다, 돌아왔다, 아까 그건 꿈이다."


어둠 속에서 깨어나 그의 손을 잡을 때마다 들었던 생각.


괜찮다, 돌아왔다, 악몽은 끝났다.


"낫고 있어요. 처음엔 하루 종일 강선생을 보고 있지 않으면 못 견뎠어요. 요즘엔 내가 오히려 도망다니지 않습니까."


그가 웃었다. 몇 번이나 보여주었던 평온한 미소.


"당신 앞에서만 괜찮은 척 한게 아니라, 당신 앞에서만 괜찮았던 겁니다."


-당신은 이미 그를 지탱해주고 있어요.

의사가 미소와 함께 전해주었던 말.



"근데 문제는"


시진이 모연의 머리를 잡고 이마를 콩 부딪혔다.


"당신이 옆에 있으면 도무지 잠은 못자겠어요. 계속 보고 싶어서. 눈 감으면 악몽이고 눈 뜨면 천사가 앞에 있는데, 누가 미쳤다고 잠을 잡니까?"


양파를 만졌던 손 대신, 시진은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빅보스는 강한 사람입니다. 강선생만큼. 안 다쳐서가 아니라, 회복이 빨라서요."


상처는 숨기지 않고 드러냈을 때 회복이 가장 빠르다.


"그러니까 괜찮으면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그 때까진 좀 봐줘요. 나도 잠 좀 잡시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투에 임했는데, 상대는 백기를 흔들었다. 전투 의지 약해지게.


그래도 미워.


"그 대신 앞으로 드레싱은 내가 해요. 주치의 옆에 두고 왜 숨어서 지 손으로 약을 바른대?"


모연이 괘씸하다는 듯한 눈으로 시진을 째려보다 볼따구를 꼬집어 흔들자 아파파 엄살하던 시진이 흘리는 발음으로 웅얼댔다.


"그러게요.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겠네요, 주치의가 옆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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