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흐름을 느끼는 데엔 저마다의 편차가 있다. 누군가는 찰나의 단서만으로도 알아차리는 기민함을 가진 반면, 다른 누군가는 눈앞에 증거를 내밀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기 마련. 유정은 전자의 경우에 속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교류하는 일에 능숙했고, 순간의 감정들에 항상 솔직했다. 기쁘거나 즐거우면 웃고, 서럽거나 억울하면 울었으며, 화가 날 땐 소리내 표현할 줄 알았다. 일련의 감정 표출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그녀에게도 소극적이게 되는 순간은 존재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 그랫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지난해 여름, 성경학교에서 알게 된 또래의 경우에도 그랬다. 분명 함께 있으면 좋고 설렜지만 그뿐. 유정은 그야말로 돌 같은 사람이었다. 진정한 확신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셈이었다.

2010년 6월. 그무렵의 유정은 심란함을 느꼈다. 선풍기 청소를 해두지도 않았는데 날이 급격하게 더워진 탓이었고, 덕분에 쉽게 구겨지고 통기성도 좋지 않은 하복을 입게 된 탓이었다.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아침밥을 반이나 남겻다가 엄마에게 한소리를 들은 탓도 있었다. 일곱살 터울의 오빠, 유민이 그런 저를 비웃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채로 올라탄 통학 버스에서는 에어컨이 미약하게 나오고 있었다. 듬성듬성 채워진 좌석을 비껴간 유정은 뒤쪽의 창가자리에 앉아, 옆자리는 가방으로 막아두었다. 다다음 탑승지에서 올라탈 세린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음 탑승지에서 올라탄 제윤과 눈이 마주쳤고, 이윽고 유정의 가방이 그의 손에 들렷다. 유정은 기가 차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제윤이 유정에게 물었다. 


“왜?” 

“세린이 앉으라고 맡아둔건데.” 

“네가 버스 전세 냈어?” 

“……아니.”


유정은 제윤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뽀송하던 이마엔 어느새 땀이 삐질거렸다. 제윤은 그런 유정을 되려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눈빛을 참지 못한 유정이 제윤에게 물었다. 


“아. 왜?” 

“왜 더 안 해?” 

“뭐를.” 

“성질내는 거.” 

“내가 맨날 성질만 내나, 뭐.” 

“대체로 그렇지.” 

“아니거든.”


그제야 제윤은 무심하게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탄 세린은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하곤 그 앞 빈자리에 앉았다. 유정은 제윤이 자리를 뺏었다는 설명을 덧붙였고, 제윤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세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리에 앉아 가방을 앞으로 돌려맬 뿐이었다. 그 공간에선 오직 유정만이 제 옆자리에 앉은 제윤의 의도를 해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유정은 여전히, 심란했다.

한편, 등교를 마친 아이들 앞엔 종이 한장이 내밀어졌다. 겨우 그 한장의 갱지가 불러온 파급력은 가히 대단했다. 정체는 바로 수련회 신청서.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빠질 생각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 방에서 묵고 활동을 함꼐할 명단 작성칸 또한 신청서 양식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유정, 세린, 은수는 자연스레 서로의 이름을 적고 비슷한 구묘의 무리를 찾아 조를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주변에선 장기자랑을 나가느니 마느니, 누군 몰래 술을 사오겠다느니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곤 했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온갖 선택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한순간 막히고 말았다. 체험활동을 세가지 정도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대체로 셋은 몸으로 하는 활동을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별안간 은수가 서바이벌 게임을 화두에 올리는 바람에 한차례의 논쟁이 일었다. 


“웬 서바이벌이야? 우리 지리산 가는 건데? 힘들지 않을까?” 

“그러니까. 실내에서 하는 활동에도 재밌는 거 많은데.” 

“해보고 싶어서. ……나 혼자 해도 돼. 진짜로.”


유정과 세린의 염려 가득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수는 고집을 부렸다. 


“뭘 또 혼자 한다고 그래.”


세린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유정은 말없이 갱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세린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한 눈치였다. 


“아니다. 그래. 실내 활동으로 하자. 힘들 것 같아.”


은수는 멋쩍게 웃으며 서바이벌 게임을 아예 샤프로 쭉 그어버렸다. 그렇게 막을 내린 듯 하던 논쟁은 몇시간 뒤까지 이어졌다. 중심에는 여전히 은수가 있었고, 상대는 광수로 바뀌었을 뿐이다. 은수가 갑작스레 즐겨 하지도 않던 야외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발언한 배후에는 광수가 있었다. 벚꽃이 필 무렵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비밀스레 연애를 시작한지 겨우 한달 남짓 되어가던 두 사람은 수련회에서 활동을 함께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무리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은수는 결국 광수에게 활동을 따로 하자는 식의 통보를 날렸다. 광수는 당연하게도 납득하지 못했다. 석식을 먹고 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학교의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 겸 타협을 시도했다. 


“어차피 게임할 때 같이 있을 거란 보장이 없고, 자유시간에 따로 만나도 되잖아.” 

“아니. 계속 얼굴 보고 그러면 좋잖아. 그렇게 치면 자유시간에 만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어. 넌 애들이랑 놀고, 나도 애들이랑 놀고 그럴텐데.”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해도 못 볼거 재밌게 놀고만 오자니까? 지나가다 운 좋으면 산책이나 하면 되잖아! 다녀와서 놀면 안 돼?” 

“아. 됐어.” 

“아. 왜 또 삐지고 그래.” 

“넌 진짜 무슨 애가 이렇게 정이 없냐?”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튀어?” 

“그 얘기 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다 대화라기보단 말싸움에 가까운 분위기로 번지자, 은수는 답답해하며 머리를 쓸어넘기다 애써 웃으며 먼 산을 바라보는 광수의 앞으로 팔을 불쑥 내밀어 눈길을 끌었다. 


“아니. 광수야. 현광수! 화 풀어라. 어? 진짜 재밌게 다녀와서 서로 얘기해주고 그러면 안 돼?” 

“나 지금 솔직하게 뭐 하나만 말해도 돼?” 

“말 해.”


이런 시점에서 나올 솔직한 이야기래봤자 뻔했다. 은수는 그런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인내심있게 광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던 광수는 결국 입을 열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럴거면 왜 사귀어? 뭐, 닌자 시험이라도 봐? 나는 애초에 우리가 사귀는 거 비밀로 하자고 했던 것도 이해가 안 돼. 차라리 애들한테 말했으면 덜 복잡했을 거 아니야?” 

“그건 내가 다른 애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싫다고 해서 합의 본거잖아. 이제와서 왜 그래?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애들이 알고 있는데 내가 그랬어봐. 분명 말이 나왔을 거 아니냐고.” 

“아니 대체 누가 우리 얘기를 한다 그래? 어?” 

“다 해! 모르는 사이에 다 한다고.”


광수는 놀란 채로 은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본인은 되려 광수보다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은수는 열이 오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광수와 시선을 나누었다. 그가 그대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상황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짓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습관이기도 했다. 할 때마다 스스로가 싫어지는 짓을 또 한번 해내려던 순간, 놀랍게도 사과는 광수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미안.” 

“어?”


은수는 예상치 못한 광수의 발언에 놀라 되물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네가 그렇게 싫어할줄 몰랐어.” 

“……” 

“난 그냥 너랑 사귀는 게 좋아서 애들한테 자랑하고 싶었던 거야.” 

“……나도 미안. 내가 너무했지.”


다만 그제야 힘겹게 뱉은 사과는 진심이었다. 은수는 광수가 사과를 한 순간 지나쳤던 자신의 태도를 돌아봤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화를 내는 제 모습은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그런데도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은수는 제 치기어린 모습에 민망함을 느끼며 광수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광수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너도 괜찮아지면 그때 말하자.”


그 순간 은수는 이유 모를 슬픔을 느꼈다.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이유 모를 슬픔의 진면목은 열등감과 부러움, 존경심이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저는 광수처럼 여유있는 사람이, 따뜻한 사람이,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란 예감이 깃든 복잡한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날 은수는 방과후 수업을 끝낸 뒤 학교를 빠져나와 학교 근처에 위치한 막내이모 은혜의 집으로 달려갔다. 


“또 땡땡이야?” 

“응.”


은혜가 뭐라 한들 은수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듯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바닥이며 천장, 벽까지 전부 호두나무 목재로 뒤덮인 은혜의 집 거실 한쪽에는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통창이 있었다. 4천을 주고 사서 인테리어에만 천을 더 들인 20평짜리 오래된 아파트. 은혜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전경이 인테리어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은수는 그 앞에 놓인 빈백 두개 중 하나에 앉아서 노을이 스며든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발밑으로 가득찬 동네가 주황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과연 고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만을 위해 언덕을 오르느라 꽤나 힘을 들였던 은수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으면, 은혜는 에어컨의 온도를 낮추고 핫초코를 만들어서 제 조카의 앞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손톱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마시멜로 대여섯개가 둥둥 떠다니는 머그잔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은수는 웃으며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작은 스툴을 가져와 머그잔을 올려두고 빈백에 기대앉은 은혜가 말했다. 


“여자는 배가 차면 안 좋아. 더워도 따뜻한 걸로 마셔. 숨도 가쁜데 찬거 들이키다 사레 들리면 고생이야. 차라리 에어컨을 잠깐 트는 게 낫지.” 

“비효율적이잖아. 돈도 두배로 들고.” 

“그야 이모가 은수보단 두배 이상 잘 사니까. 그리고 정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자궁쪽에 엄청 안 좋대. 그럼 나중에 병원비가 남들에 비해 두배로 들지 않을까?” 

“알겠다고. 사실 이렇게 하는 거 엄청 좋아.” 

“왜?”

“왜냐니.” 

“왜 좋은지 생각을 해봐. 그래야 나중에도 이게 좋을지, 계속 이렇게 하고 살 수 있을지 알지. 내가 뭐라 그랬어?”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마음도 똑같아.”


은수는 푹신한 슬리퍼에 감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제 마음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다. 


은수의 엄마, 문애경씨는 집안의 장녀였다. 열여덟이 됐을 무렵 은혜가 태어난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은수가 태어났다. 완주군의 상고를 나와 전주의 회계 사무소에서 일하던 애경씨는 군산과 전주시를 오가며 자란 이금수씨와 일찍이 결혼을 올렸다. 삼칠일을 겨우 채운 애경은 재빨리 사무소로 복귀했다. 덕분에 은수는 자연스레 외가댁 할머니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은혜와 함께 자라며 흙장난을 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러다 은수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무렵, 그녀에겐 남동생 동수가 생겼고 애경씨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럼에도 은혜와 은수는 교류를 계속했다. 이후 전문대를 나와 서울에서 경리 일을 하던 은혜가 퇴사를 하고 전주로 돌아오면서 은수에겐 작은 아지트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은혜는 해가 떠있을 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엔 글을 쓰거나 부업거리를 했다. 쉬는 시간은 조금 적을 지언정 부족한 편도 아니었고 벌이도 나름대로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그녀에겐 여유가 존재했다. 한창 사춘기인 조카가 불시에 쳐들어와도 웃으며 맞이해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 그게 비단 금전적인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은수는 자명하게 알고 있었다. 진짜 어른. 은수가 보기에 은혜는 몇 안 되는 어른들 중 한명이었다. 은수는 어른들을 동경했기에 어른스러운 그녀를 따라 어른이 되고자 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 혼자서 에어컨은 틀고싶을 때 틀고, 예쁜 방에서 예쁜 가구들도 들여놓고, 좋아하는 핫초코도 실컷 타먹고. 여유롭고 평화롭게.” 

“요즘도 그렇게 조급하고 소란스러워?” 

“똑같지, 뭐.” 

“우리 은수. 어렸을 땐 곧잘 웃었는데 갈수록 웃음을 잃어가. 어떡하면 좋지?”


은수는 입을 삐죽 내밀며 짐짓 슬픈 체를 했다. 은혜의 집에서라면 은수는 무한정으로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다. 줄곧 그런 편이었다. 은혜는 집안의 막내였을 뿐더러 그녀의 성장배경은 아이가 귀한 시골이었다. 덕분에 유년 시절부터 받을 수 있는 사랑이란 사랑은 모두 받으며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다 심심해지던 찰나에 나타난 조카 은수의 존재는 은혜에게 꽤나 특별했다. 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그녀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상대였던 것이다. 은혜는 저가 받은 사랑을 은수에게 똑같이 퍼부어줬다. 


“이모.” 

“응.” 

“나는 언제쯤 혼자 살 수 있을까?” 

“일단 대학을 가야지. 넌 엄마나 이모처럼 상업계도 아니고, 특별히 공부하고싶은 것도 있어서 바로 취업을 하진 못할 거잖아. 그러니까 서울로 대학을 가. 그러면 기숙사에서 살든 자취를 하든 할 수 있게 돼. 그것부터 해.” 

“그런데 내가 또 야자를 빼먹었네.” 

“이렇게 자꾸 밖으로 도는 너를 받아주는 게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래서 대학은 가겠어?”


은혜가 장난스레 잔소리를 하면 은수는 꼭 모르는 체를 하며 은은하게 웃음을 지었다. 핫초코는 딱 먹기 좋을 만큼 식었다. 크게 한모금을 들이킨 은수는 입안에 달라붙는 마시멜로를 우물거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혜 역시 요깃거리로 가져온 과자를 느리게 씹었다. 입에 있던 것들을 삼킨 은혜는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내가 최근에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아니, 말 끊어서 미안한데. 야. 대학 못 가겠는데?” 

“아, 이모!” 

“알았어. 쏘리쏘리. 이모 친구들도 고삼때 연애 했는데 다 대학 가고 잘 살드라. 그래서. 걔랑 싸웠어?”


은혜는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그래서 은수도 더는 성을 내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마저 이야기를 했다. 비밀 연애를 기점으로 수련회를 가기로 한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여러 단어들이 쏟아지는 내내 은혜는 가만히 앉아 경청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싸우다 내가 걔한테 화를 냈거든? 왜 내 입장은 생각을 안 해주냐면서. 그래서 나는 걔도 화를 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싫어할 줄 몰랐대. 생각해보면 애초에 싸우게 된 건 내탓이었어. 내가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싫어서 우리 만나는 거 비밀로 하자고 했거든. 알잖아. 우리 집안은 비밀이 없는 거. 그래서 내가 그런 것도 엄청 싫어하고. 그런 거 다 모르는데도 진심으로 사과를 했어. 진심으로. 그래서 부러워. 걔는 바로바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고, 상황을 그렇게 잘 넘길 수 있는 성격이라. 나는 평생 노력해도 걔처럼은 안될 것 같아.” 

“그거야 해볼 일이지. 해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알아?”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럼. 세상에 노력 없는 다정은 없어. 그친구도 아마 엄청나게 노력중인 거겠지. 너는 못 느끼겠지만.” 

“왜? 눈치가 없어서 그런가.” 

“네가 눈치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 나이땐 원래 안 보여. 온 신경이 나한테만 집중되어 있거든. 특히나 내 또래 애들 마음은 더 안 보이더라. 같이 커가는 중이라 그런가. 애들 마음이든 나이든 사람들 마음이든, 마음만 먹으면 보였는데 이상하게 내 또래들한테만 그랬어. 꼭.” 

“맞는 것 같아.”


은수는 흐물하게 풀어진 마시멜로 덩어리들을 한꺼번에 털어넣은 뒤 우물거렸다. 입안에 가득 찬 것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쯤, 은혜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모도 요새 만나는 사람 있어.” 

“진짜? 누군데?” 

“서울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사람.” 

“보고싶을 땐 어떻게 해? 너무 멀잖아.” 

“3시간이면 가는데 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너 대학가면 한번 보여는 줄게.” 

“그만 학교로 돌아가라는 거지.” 

“알았으면 얼른 일어나. 해 진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은수는 왜인지 은혜가 상황을 얼버무리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보여주고싶지 않나보네-는 그녀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추측이다.






우려와는 다르게 수련회는 나쁘지 않은 흐름을 탔다. 지나고보면 모든 일이 별거 아니라지만, 은수는 그렇게 싸웠던 게 멋쩍을 정도로 잠잠한 시간을 보내며 속으로 은근히 민망함을 느꼈다. 몰래 숨겨두었던 휴대폰으로 날아든 광수의 문자를 받고 나간 숙소 뒤편은 제법 으슥했다. 산기슭에 닿은 곳이라 자꾸만 달려드는 모기떼들을 손으로 휘휘 쫓아내던 은수는 지척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그것이 광수일 것이라 확신하여, 그를 놀래켜줄 작정으로 드럼통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은은하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에 보인 것은 광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타난 얼굴은 한개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윤과 이름 모를 또래의 여자애. 얼핏 복도에서 마주쳐본 적 있는 얼굴같기도 했다. 


“왜? 할말이 뭐야?”


그와 은수가 큰 친분은 없었음에도, 은수는 제윤이 꽤나 어색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분위기로만 봐서는 분명 저 여자애가 제윤을 좋아한다 고백할 것이다. 은수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해.”


그럼 그렇지. 은수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면서도, 혹여나 제윤이 저 고백을 받으면 어쩌나-하는 고민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유정과 제윤 사이에 어떤 감정이 있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사귀자고?”


무섭도록 차갑고 매서운 말투였음에도, 어쩌면 은수에게만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동급생 여자애는 그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듯 연신 짝다리를 바꿔 짚는 여자애를 잠시 바라보던 제윤이 말했다. 


“그래.”


그 뒤로는 뭐랬더라. 은수는 자세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제윤의 승낙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광수에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윤제윤은 무슨 생각으로? 속으로 그런 질문을 던져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이며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 마음도 알 수가 없는데 남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맘때의 누구든 그러하듯, 그무렵의 은수 역시 심란함을 느꼈다. 


“뭐야. 나 봤다.” 

“……뭐를?” 

“광수랑 너랑. 둘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걸어다니는 거 다 봤다고.”


숙소로 돌아온 은수를 붙잡은 유정이 그런 소리를 했다. 은수는 순간적으로 유정에게 저야말로 본것을 말해야 하나,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겨우 속으로 삼켜내며 입을 삐죽거리다 웃고 말았다. 


“들켰지? 완전 들켰지. 둘이 뭔데. 사귀어?” 

“응.” 

“허얼.”


유정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은수는 여전히 어색한 듯,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유정의 시선을 마주했다. 

은수는 유난히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의 원인을 찾는 일에 더딘 편이었다. 그런 저와는 반대되는 사람이 유정이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유정은 알고 있지 않을까. 김유정은 윤제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 말이다. 너무나 투명해서 보이고야 마는 그 뚜렷한 감정을, 분명 그녀는 알 것이었다. 은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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