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구적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서양 동양, 뭐할 것 없이 제가 아는 모든 지식을 때려 넣은 이야기입니다.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애수(哀愁)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

 







 

 

 




“아! 그럼 제가 본 건……. 그 본뜬 것이겠군요.”

“뭐라고 적혀 있었지?”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지고……. 강이 뚫리고…….”

“………….”

 

태형이 오래도록 지민을 바라봤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추궁을 당하는 기분에 지민의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대가 하늘의 언어를 읽는 것이라면 이상하지 않겠지.”

“……….”

“난 거짓을 몹시 싫어해.”

“……….”
“그대를 믿도록 하지.”

 

 

거짓말. 전혀 믿지 않으면서. 태형은 누가 봐도 속아주는 것이었다. 지민은 전혀 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도조차 않았다. 그저 자신과 있으면 태형은 누구보다도 넓은 아량을 베풀고 바다 같이 깊은 마음을 가진 척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려 노력했다.

 

 

“왜요.”

“자의적인 의지라고 해두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번엔 미안했네.”

“………아닙니다. 제가 더 송구한”

“그대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야.”

“……….”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네.”

 

 

왜요. 나는 알면서도 당신에게 묻지 않는 걸까. 알고 싶지 않아 당신에게 묻지 않는 걸까. 이상야릇한 공기가 둘을 감쌌다. 불필요할 정도로 가까이 닿아있는 둘 사이의 거리 때문이었다. 태형의 눈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담아 놓았다. 그 눈에 휩쓸리면 안 된다. 지민은 조용히 태형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

 

 

알았네. 왠지 모르게 태형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지민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어지러운 융단의 문양을 머리에 담았다. 금색 실이 어지러이 천을 수놓고 있었다. 태형은 지민이 시선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렇게 티 나게 피하지 않아도 되는데. 태형이 입을 열었다. 지민의 고개는 그제 서야 태형을 향했다.

 

 

『7대 죄악이 숨어 있던 '금단의 상자'는 땅을 일컬어 통칭하는 '라시아 대륙' 의 중앙 호수 내부의 무인도에 존재했다.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넓고 물의 수심이 매우 깊어 사람이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해 '망자들이 머무는 곳' 이라 하여 망유호(妄留湖)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신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호기심이라는 건, 때로는 도를 넘을 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오관’이라 불리던 한 사내가 자신의 비상한 머리와 우수한 신체적 조건을 이용해 커다란 배를 만든다. 선원들을 모집하고, 신에 대항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는 이것이 신에 대항할 일이라고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망유호에는 금이 가득하다는 와전된 소문 탓이었다. 금단의 상자는 모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자극적인 존재가 맞았다. 그는 한 달 동안의 여정을 통해 80명의 선원 중 79명을 잃었다. 이 중 55명이 지인, 35명이 천인이었다. 오직 그만이 살아남아 망유호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무인도에 도착한다.』

 

 

이야기하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지민의 시선에 태형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본인도 느껴지는 얼굴이 열기에 태형이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었다.

 

 

“끝입니까?”

“고대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인가.”

“재밌잖습니까.”
“재밌는 사람치곤, 모든 걸 기억하겠다는 듯 열정이 넘치는데.”

“……이 이야기, 책에서 읽은 겁니까?”

“아니.”

“그럼 어디서요?”

 

 

태형이 처음으로 말을 망설였다.

 

 

“어머니께 들은 것이다.”

“……아.”

“지금 살아계시지는 않지만.”

 

 

자신이 폐부를 찌른 것일까. 돌부리는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 있는 것 같다. 지민은 제 머리를 살짝 쥐어뜯었다. 태형의 어머니는, 전장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왜 그걸 바보같이 잊고 있었지. 정국과 태형, 그리고 목국의 왕까지 총 3명이 같은 연도에 즉위한 일은 흔하지 않기에 세간이 떠들썩했다. 심지어 둘은 비운의 왕자라고 엮었으니, 수국의 대신들이 심히 불쾌해했던 일이었다.

 

지민이 태형의 눈치를 슬그머니 봤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려오는구나. 태형은 바람 빠진 웃음을 냈다.

 

 

“송구합니다.”

“그대가 송구할 건 없어.”

“그래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야.”

 

 

이 이야기를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를 맞았어. 왜 어린 날의 나를 불러세워 놓고 어머니는 외우게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그대를 보니 이유를 알 것도 같군. 태형이 무덤덤하게 말을 읊었다. 그가 언급하는 어머니라는 애틋한 이름 석자에는, 어떠한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지나가던 행인의 행색을 말하는 것보다 더 가벼웠다. 다만 그의 눈은 조금 더 묵직하고 벗어날 수 없는 애증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가 매우 긴 것 같은데…”

“매 맞으면서 들은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더군.”

“……….”

“재밌긴 하지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심심할 때 곱씹으면 흥미로운 이야기거든. 실젠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런데 나는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추측이라기보단, 확언에 가까웠다. 필시 지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염국은, 상상외로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현재든 과거든. 이 외에도 태형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주로 나랏일에 관한 것이었다. 지민에게 충고를 얻고자 한 것일지, 의견 차이로 인한 자신의 허한 마음을 달래달라는 의미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렇게라도 지민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전하.”

 

 

태형의 얼굴이 드물게 일그러졌다.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태형을 잡은 단 두 글자였다. 지긋지긋한 단어가 설렘 가득한 단어로 둔갑하기도 하는구나. 모순적인 제 심장에 태형이 조소를 띄었다.

 

 

“왜 제게 잘 해주십니까.”

“………….”

“제가 단순히 월인이라는 이유치고는 전하는 허점을 너무 많이 보이 십니다.”

“………….”

“혹, 저를 연모하시기라도 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행동이 변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지.”

“………….”

“과거 때문이거나, 혹은 미래 때문이거나.”

“………….”

“나는 어느 쪽 같나?”

“미래 때문이겠지요.”
“틀렸어.”

“………….”
“내 기억 속 서랍을 마음껏 들추고 간 건 그대이면서 어찌 이리도 무정하게 굴어.”

 

 

태형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도피였다. 끝을 알고 싶었으면서, 내면의 모든 곳까지 꿰뚫어 보려고 했으면서 막상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지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유약한 성정이라 사람을 이용하지 못 하는 것일까. 질리도록 들은 악인의 서사가 너무도 완벽히 불쌍하여 마음껏 흔들지 못한 걸까. 지민이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그 날은 처음으로 지민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날이었다.

 

 

 

 

 

*

 

 

 

 

 

“그거 압니까.”

 

 

*홍염성의 사람들이 다들 품에 바구니를 가득 이고 돌아다녔다. 축제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수연화탄일(水聯和誕日)의 분위기와 꼭닮아 있었다. 지민은 잔뜩 신이나 입에 과자를 우물거리며 돌아다니는 시동들이 부딪힐세라 벽에 바싹 붙었다. 동인이 어릴 적이 생각이 났다. 동인이는 꼭 단 것을 좋아하여 약과를 하루 종일 입에 물고 다니다가 그만 이가 썩어 엉엉 울며 뺐었다.

이가 다시 나기에 망정이지, 다 커서 그랬다면 꽤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지민이 입가에 미소를 잔잔히 띠었다. 

 

 

“뭘 말입니까?”

“곧 있으면 왕의 탄생일이랍니다.”

 

 

그러니 저렇게 신이 나고 분주한 것이겠지요. 흥겨운 노래 가락이 거리 곳곳에서 들려왔다. 자꾸만 이질적인 기분이 들어 지민이 율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 조용한 공간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율은 지민의 의도를 아는 건지 말없이 조용히 끌려갔다.

 


“오늘은 다른 곳에 갈 겁니다.”

“어디로……?”

“언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강의 움직임이 더 잘 보입니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율은 지민의 동의 없어도 그냥 혼자 갈 예정이었다. 꽤 높고 험한 산중이었다. 오히려 헐떡이는 율과 다르게 지민은 별 무리 없이 가뿐히 올랐다. 힘들어 할 줄 알았는데 산을 잘 타는 지민의 모습에 율은 땀을 닦았다.

 

 

“체력이 그렇게 약해서야 되겠습니까?”

“왜 그렇게…. 헉…헉….”

“저 무예(武藝)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아…….”

 

 

잊고 있었다. 율은 정국에 버금가는 검술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가 기본적인 체력을 갈무리하지 않았을까. 정상에 오르니 초련의 모습이 훤하게 보였다. 이색적인 마을은, 아름다움을 가져오고 있었다. 마을의 옆을 지나는 강이 뚜렷하게 보였다. 굽어진 강의 물줄기는 오히려 속도를 낮춰 농사에 잘 끌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주고, 물고기잡이를 쉽게 하도록 배를 띄어주었다.

 

 

“초련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 그렇지요.”
“몇 가지 사실만 없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에요.”

 

율이 땀을 식혔다. 머리카락이 푹 젖었다. 염국의 햇빛은 꽤 뜨겁다. 장시간 맞으면 피부가 익을 정도다. 그늘로 피한 둘은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강의 움직임을 보자고 왔건만 운동을 한 탓일까, 둘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가워진 바람에 예민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지민이 율을 흔들었다. 책은 이럴 거면 왜 갖고 왔냐고 묻고 싶었다. 율의 베개로 전락한 책더미를 보며 지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해가 아예 넘어가면 경사진 곳을 내려가는데 위험할 것이다. 지민이 거칠게 율을 깨웠다.

 

 

 

“그렇다고 발로 찰 건 없잖습니까?”

“제가 언제 발로 찼다고 그럽니까?”

“여기 멍이 들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멍이에요! 엄살도 정도껏 하셔야지요!”

“어딜 갔다 온 건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궁을 정적에 휩싸이게 할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태형이 매서운 눈초리로 둘을 쳐다봤다. 해가 져서 그런지 어둠이 내려앉은 궁에는, 초롱불의 빛만 가득했다. 이 낭만적인 분위기가 어째서인지 살짝 괴기스럽게 느껴져 율은 지민의 뒤로 물러났다. 일종의 책임 전가였다.

 

 

“잠깐 저기 높은 언덕에…….”

“뭐하러?”

“강을 보러 갔다 왔습니다.”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간 거지?”

“움직임을 자세히 보고자 했습니다. 늦어서……송구합니다.”

 

 

지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형의 옆엔 아리따운 여인이 태형의 팔에 팔짱을 끼고 지민을 훑어보고 있었다. 여인의 눈초리가 매서워 지민은 괜히 고개를 빨리 들지 않았다. 붉은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지만 건강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신체의 아름다운 곡선은 특히나 도드라졌다. 가히 어떤 미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여인이었다.

 

 

“수국의 사람들은 대부분 하얀 피부를 가진 것 같습니다.”

 

 

목소리 또한 얇고 곱다. 기다란 머리카락에 윤기가 가득 흐른다. 손에 올려도 금방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다.

 

 

“전하 오늘은 제 방에 오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태 섞인 소리가 잘 어울린다. 전혀 과하지 않다. 적당한 아양이다. 지민은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봤다. 정국이 옆에도 저런 여인이 훨씬 더 잘 어울렸을 텐데……. 화려한 태형의 이목구비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태형의 옆에도 자신보단 여인이 걸맞는 사람이었다. 

 

 

“갈 것이네.”

 

 

태형은 지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겠다는 듯, 강렬히 쏘아보다가 뒤로 돌았다. 무시무시한 그의 성정에 율은 그가 뒤를 돌자마자 숨을 뱉었다. 뭔 기가 저렇게 세……. 율이 지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방으로 가자는 의미였다.

 

 

“갑시다.”

 

 

지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여인을 바라보다 태형을 바라보는 눈길엔 얼핏 애정도 서려 있었다. 여인을 바라보는 눈엔 부러움도 가득 차 있었다. 둘을 바라보는 눈 속에, 외로움에 깊이 사무쳐 있었다. 지민 님, 누구를 생각하기에 그리도 서글픈 눈물을 흘리십니까? 덮쳐오는 불안한 기분에 율이 지민을 이끌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발자국엔, 온갖 뒤엉킨 감정의 잔해들이 가득했다.

 

 

“전하, 저 자가 월인입니까?”

“……….”

 

 

태형은 말없이 여인을 바라봤다. 대답해 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이유가 있었을지라도 태형이 지민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가 매우 오묘합니다. 보통의 남성이 가지지 못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시연.”

 

 

태형은 사람의 이름을 잘 읊지 않는다. 그런 그의 습관을 알기에 시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붙잡았다. 부드럽고 육감적인 여인의 몸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그를 보고도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는 태형이 야속했다. 태형의 손 위에 얹힌 시연의 손엔, 으레 여인들이 그렇듯 당연한 질투심이 놓여있었다.

 

 

“어찌 아름다움을 겉에서만 찾으려 할까.”
“………….”

“피상적이고 한순간의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을-”

 

 

태형이 시연을 밀어 눕혔다. 그는 시연에게 다정하다. 시연이 아프지 않도록 온몸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도 놀라지 않도록 속도를 늦췄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다정함이 싫었다. 그는 다정하기만 했다. 절대 사랑이라 할 수 없었다. 다정하기만 했으니까.

 

일종의 쾌락이 선사하는 강렬한 기분에 태형이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바로 일어나 옷을 여며 입었다. 그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태형이 시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태형이 밖으로 나가고, 시연은 소리죽여 울었다. 시연이 사랑하는 건 태형일까, 태형이 주는 다정함일까. 오랜 시간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보지 못했던 면을 낯선 사내를 통해 보았다. 시연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지민의 몸이 발작하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왜? 왜? 왜 그 사람의 꿈을 꾼 거야? 그것도 여인과 동침을 하는 그를? 뻔히 알면서도? 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낼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왜? 뭘 보고 싶어서? 지민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뒤척인 잠자리 끝에 보였던 건, 쾌락에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과 여인과 대조되는, 차분하고도 상당히 다정한 태형의 모습이었다.

 

지민이 이불을 들췄다. 그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축축한 속옷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차마 빨랫감으로 내놓을 수 없어 지민은 이른 새벽 옷가지를 들고 시종들이 빨래하는 터로 향했다. 차가운 물 졸졸 흘렀다. 대충 물을 한 바가지 퍼와 옷을 이리저리 비볐다.

 

화가 나고 속상한 마음에 눈시울이 아팠다. 절대 울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코만 몇 번 훌쩍거렸다. 정국이 정말로 보고 싶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은 싫었다. 힘든 건 싫었다. 지민밖에 없다는 정국이 보고 싶었다.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봐주는 정인이 그리웠다.

 

 

 

 

*

 

 

 

금세 복구되는 궁의 모습에 정국이 떠오르는 여명을 바라봤다. 불에 탔던 벽들은 다시 색을 입고 있었고, 무너졌던 집들이 하나둘씩 뼈대를 갖춰갔다. 속절없이 무너진 현룡성 –염국과 국경선이 맞닿아 있는 성으로 염국이 수원궁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쳤던 곳- 도 한창 복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들었다.

 

지민을, 지민을 구해야 한다. 지민은 그곳에서 틀림없이 울고 있을 것이다. 그 미약한 성정이 어찌 그런 야만인들 사이에서 버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다. 율이 잘 보필해 주고 있을 것이다. 혹여나, 지민의 그 잔정 많은 성격이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을 벌였을까 걱정이 된다. 정국이 발을 돌렸다. 수십만 명의 정예군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톱만 드러낼 것이 아니라, 이빨을 제대로 보여줬어야 했던 것을. 커다란 기함이 연서를 뒤덮었다. 두 눈동자엔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

 

 

 

 

“박지민.”

 

태형의 목소리가 유례없이 격분돼 있었다. 어떠한 시선도 두지 않겠다는 완고한 지민의 고집에 태형의 얼굴엔 노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며칠 동안 자신을 피해 돌아다닌 이 고양이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첫날은 웬일인지 빨리 잠자리에 들어 발걸음도 하지 못했다. 둘째 날은 율의 방으로 가서 잔다는 시종의 전언을 듣고 향수가 가득해 그러려니 싶었다.

 

그 다음 날은, 피곤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잠깐 방에 있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눈조차 맞추지 않았고 대답도 않았다. 벽을 보고 있는 느낌에 태형은 참았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가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 정도면 풀렸을 거라 판단했다. 그가 성난 이유는 몰라도 적어도 대화는 할 줄 알았다. 내가 섣부른 건가? 아니다. 이건 누가 봐도 네가 뒤끝이 긴 거야. 박지민.

 

 

“나 봐.”

 

 

태형이 지민의 턱을 추켜올렸다. 힘 조절을 제대로 못 한 건지 지민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싫습니다.”

 

 

기어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다.

 

 

“이유라도 알려줘야…!”

“한 나라의 왕이면! 적어도 예에 맞게 행동은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왜 여기 계십니까! 전하가 계실 곳은 부인의 방입니다! 왜 항상 이곳에 방문하십니까!”

“내가 전에도…”
“저 능력 같은 거 없습니다! 미래라도 보실 줄 아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이라도 읽을 줄 아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면 진작에 당신을 속였을 거야! 속여서 여기서! 벗어…!”

 

태형의 강력한 완력이 지민을 침대로 눕혔다. 아무리 무예에 능하다고 해도 육탄전은 결국 힘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더 옥죄어 오는 태형의 강한 팔 힘에 지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분했다.

 

 

“넌 나 못 속여.”

“……….”

 

 

눈물이 흐른다. 뜨거운 물이 볼에 흘러 툭 떨어진다. 나 왜 울어. 왜 울어. 박지민, 이 멍청아 왜 우는데. 지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왜 꼭 독이 든 성배를 손에 넣고자 하십니까.”

“착각하지 마.”

“……….”

“독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태형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태형이 물러나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목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쓰라린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태형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고요하게 식어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태형은, 힘없이 돌아섰다.

 

 

“정인이 있으시면서 왜 그럽니까.”
“………뭐?”

“정인이 있으시면서 왜 자꾸! 왜…….”

 

 

또다시 감정이 차올랐다. 주체하지 못하는 제 감정이 원망스러워 지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터질 듯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내 정인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그 여인이 당신의 정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누가 그래?”

“제가요.”

“뭘 보고?”

“………….”

 

태형의 질문에 지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난처할 때마다 지민은 시선을 피한다. 태형이 다시 지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발자욱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소리가 들킬세라 지민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무엇을 봤느냐고 물었다.”

“……….”

“그대는 미래를 보지 않고, 나를 염탐이라도 하나 보지?”

 

 

태형은 눈치가 빨랐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 밝아야 했고,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칼을 찔러야 했다. 사람들 다루는 데에는 이미 도가 텄다. 지민조차 모르는 지민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아챈 태형이 웃음을 감추기 위해 안면근육에 힘을 줬다. 자신이 말에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른 모양새가 우스웠다.

 

 

“말해봐라.”

“………….”

“내가 여인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

“…………!”

 

 

지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민은 저런 상스럽고 불경스러운 말은 입에 담아본 적도 없었다. 나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태형이 낯부끄러웠다.

 

 

“아니면 내 흉물을 보기라도 한 것인가?”

“아닙……!”

 

 

지민의 말이 먹혀들었다. 태형은 지민을 삼켜버릴 기세로 지민을 입에 담았다. 그의 뜨거운 타액이 지민에게 넘어갔다. 지민의 입안은 달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미지의 세계를 찾기라도 한 듯, 금단의 과일을 맛보기라도 한 듯 자꾸만 보채는 자신의 욕망이 낯설었다. 태형이 지민의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경직된 지민의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을 앗아갈 듯 날카롭고 녹녹한 입맞춤에 지민의 팔이 허우적거렸다. 두터운 혀가 지민의 입안을 훑고 다녔다. 그의 혀를 옭아매기도 하고, 입천장을 간질이기도 했다. 추삽질을 모방하듯 끊임없이 타액을 불어넣는 태형의 움직임에 지민이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달아올랐다. 발끝이 저릿하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자꾸 울고 싶었다.

 

 

“지금은,”

“……….”

“지금은 그냥 지금만 생각해.”

 

 

태형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정신의 쾌락에 좀먹혀 지민은 모든 것을 잊었다. 잊어야만 했다.

 

 


 




 

 

*홍염성 : 염국의 궁





 

작가 왈 : 지민이랑 태형이는 운명입니다. 서로 끌릴 수밖에 없는 관계랍니다♥ 지민이와 정국이가 그랬듯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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