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즈음부터 우리는 월요일 밤마다 만나는 약속을 30분 미루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해가 늦게 지면서 저녁 7시에도 태양이 하늘에 드리우는 빛이 하늘을 보랏빛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았을까, 야구장에서 오후 운동을 하는—어디까지나 취미로 야구를 할 뿐인—야구부원들이 저녁 7시 반까지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약속은 해가 다 지고 운동장의 조명을 제외한 모든 인공적이지 않은 빛들이 사라진 뒤에야 이루어졌다. 나는 그에게 곧 있을 시험—어디까지나 요식적인 기말 시험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들 중에서 일반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신에 목숨을 걸지 않았으니까—준비는 어떠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어깨에 걸었던 카메라의 밴드를 풀어내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말이야? 아, 기말고사. 이번에도 39등 아니면 40등을 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너는?"

"저번에는 7등이었는데, 내신 준비하는 애들이 세 명에 공부가 중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애들이 세 명이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1등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렌즈의 조리개를 조절하면서 그가 반문했다.

"작가도 공부가 중요한 직업 아냐?"

"물론 중요하지. 그런데, 작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가 꼭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나한테는 있어. 그게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너도 그래. 아무리 사진가가 공부할 필요가 없는 직업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학년에서 꼴지를 하냐.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최소한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무시받지 않지."

나의 대답에 놀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전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되물음으로써 나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한 것처럼 정곡을 찔렀다.

“무시 당해도 상관 없어. 너는? 너는 무시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7등이 되려고 하는 거야? 차라리 1등을 노려 봐."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맺었다.

"됐어.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1등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7등으로 나는 만족해. 아무리 그래도 40등은 심하다는 말이었어.”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제는 안다는 말이 역겹게 들릴지라도, 이제는 알기 때문에 ‘이제는 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사진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말고사 성적이 39등이든 40등이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나는 소설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으므로 기말고사 성적이 39등일 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7등일 때 말하기 어려운 안심감을 느꼈던 것이다.

국가 혹은 정부 혹은 교육부는 특수 목적의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는 40명의 어린 고등학생들이 모두 성공할 거라는 믿음이 있고, 그걸 젊은 부모와 학생도 믿어야 하는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유전자 정보와 심층 면담에서 얻은 심리적 정보에 기반한 예측 시스템은 때때로 실패하였고 개중의 몇 명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평범하게 대학생이 되거나, 예술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나중에 전공을 경제학이나 심리학 같은 전공으로 바꾸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집에서 하는 가게를 물려받거나 창업을 해서 완전히 예술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몇몇 학부모들이 교육청의 예술고등학교 입학 권유가 실은 강제적이라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원하면 1학년 때 자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소원은 각하되었다.

이런 모든 웃긴 일들이 벌어지는 작은 나라 안의 작은 공간에서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떠드는 것도 무의미하고, 그렇게 따지면 예술을 한다는 자의식에 차 있는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고등학생이 전국에 2천 명이나 있다는 것도 너무나 웃긴 일이었다. 나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그는 사진을 찍었다. 오직 둘만의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기를, 숨을 뱉으면서 나는 기원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올 9월에 축제 열리는 거 알고 있지? 기말고사가 끝나면 누가 무슨 역할을 할 건지 정할 테니까 그때까지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올해는 지원금이 2천만 원이나 들어와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거니까. 영화도 찍겠다 이걸로.”

물론, 올해 들어온 40명의 학생 중에서 영화 감독이 직업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특수분장 디자인을 하는 친구가 한 명, 그리고 사진가를 하는 친구가 세 명 있었기 때문에 담임이 말한 "영화도 찍겠다"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평소에 들고 있는 DSLR을 이용하면 4k로 영상을 찍을 수 있고 학교에는 파이널 컷이나 애프터이펙트가 설치되어 있는 아이맥 프로도 있었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누가 뭘 할지, 이번 컨셉으로는 반에서 찻집을 할까 아니면 일본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직접 만든 메이드복을 입고 카페를 할지 등등의 이야기로 왁자지껄했다.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작가가 학교 축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학교 방송실에 들어가서 나레이션을 하거나 아무도 들으러 오지 않을 낭독극을 위한 대본을 쓰거나, 아니면 교실에 틀어박혀서 기타 연주자가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 말고는 작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었다.

사실 난 교실에 틀어박혀서 음악을 듣는 걸 꽤 좋아했다. 어릴 때 보았던, 고등학교 취주악부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명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하고, 그 속에서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서로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다른 가족과 십여 년을 살아온 친구들이 취주악부에 모여서 전국 대회에 나간다는 일념 하나로 꿀같은 여름 방학까지 반납하면서 아침부터 연습을 한다는 게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면 대체 뭐가 감동적일까? 중학교 친구가 나에게 해 준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잘 모르겠는데. 음, 너 있잖아.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혼자서 일하면서, 고독하게 글을 쓰면서 어떤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는 이미지가 있거든. 그게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작가의 이미지일 테고. 그런데 너는 몇십 명이 취주악부라는 이름 하에 모여서 악기를 불어대는 그런 애니메이션이 좋다고 이야기를 하는 건데, 난 잘 모르겠거든. 네가 좋아하는 건 문제가 없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슨 말인데?"

"진짜 몰라? 작가들은 누군가와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을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취주악부는 모여서 연주를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이것들만큼 서로 모순되는 게 없다고. 레알로."


갑자기 생각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음주 월요일 저녁에 만난 그에게 이야기해 줬더니 대답이 돌아왔다. 예상하지 못한, 언제나 그렇지만 돌발스럽다는 말이 걸맞은 대답이었다.

"네 말이 맞아. 애초에 돈을 받고 연주하는 것도 아닌데,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서 이야기하는 건 이상하다."

"뭐라고?"
나의 물음에 그는 자판기에서 갓 뽑은 뜨거운 조지아 커피를 책가방에서 꺼내면서 대답했다.

“네가 맞다고. 니가 옳고 친구가 틀렸다고. 어차피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악기를 불고 전국대회에서 상을 타든 말든, 거기서 끝나는 일이잖아. 그런데 네가 일하는 소설, 아니 글을 쓰는 소설가는 거기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동안 남들에게 글을 보여주면서 살아가야 되는 거고. 고등학교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뭐가 나빠? 어차피, 나중에 되돌아보면 좋은 추억으로 남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고—저기 야구부원들이 훈련을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거 아냐?"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열심히 일할 때 인간은 현실의 세속적인 가치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고, 적어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축제 때 뭘 할지 정했어? 이번에 돈이 2천만 원이나 들어왔대."

"나? 일단 첫째 날에는 밖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와서 그걸 하게 되었고. 둘째 날부터는 자유로운데. 아직 뭘 할지는 구체적으로 정한 게 없어."

"그러면 우리 반으로 와서 사진이나 찍어 줘. 어차피 한가하잖아?"

나는 부탁했고 그는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사람들이 의미라고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것,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인식하고 이해하는 의미가 곧장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어떤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고 해 보자.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의미란 언제나 사후적으로 타인에 의해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삶에는 의미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는 의미가 없고, 예술에도 의미가 없고,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나 사건들에도 대다수의 경우를 놓고 보면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취주악부에서 열심히 오보에나, 튜바나 유포니엄을 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문득 생각한다. 바로 저기에는 인간이 그토록 열심히 찾았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나의 유한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에 어떠한 의미도 없을지라도 저기에는 의미가 있고 저기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은 나 말고도 있을 거라고. 그런 믿음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늘은 이제 점점 더 밝아졌고, 그에 발맞추어 밤의 공기도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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