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신부가 들어올린 잔 위에 술이 떨어진다. 

주위에 무수히 어른거리는 등불의 빛을 반사한 맑은 줄기는 금실처럼 찬란히 빛나며 멀리 앉은 하객도 그 이채와 향취를 족히 알 수 있음직했다. 어느 자리에나 햅쌀로 빚은 청주가 그득히 채워진 술독이 즐비했고, 이는 배신과 내전이 끊이지 않던 지난 시절이 끝나고 풍요와 화평이 가득한 새 시대가 열렸다는 상징으로써 황제가 친히 하사한 혼인 선물이었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구월의 보름날. 양곡은 넘치고 백성은 무탈하며 천자는 그를 보고 흡족한 계절이었다.

신부는 고개를 조아려 술잔을 두 번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또한 황제가 혼인례를 친히 돕도록 보내온 궁녀가 면포를 들어올린 틈으로 술을 들이켰다. 

처음 절은 천자에게. 두 번째 절은 조상에게. ...세 번째 절은 부모에게.

역적 기정호와 그의 수하들이 처단된지 꼬박 일 년. 선황의 측근이자 지금의 황제가 황위를 얻는데 가장 큰 공신을 세웠던 대장군의 몸으로 그가 직접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것에 누구라도 까무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이자 황제의 애첩 중 애첩이었던 예비의 처소에서 꼬리를 물듯 나오는 증거는 결국 역적들의 거대한 음모를 드러냈고, 이를 밝혀낸 예부상서 백조관은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조용한 성품의 그는 겸손히 황제께 공을 돌렸을 뿐이다.

신부는 잔을 신랑에게 건냈다. 

신랑이 처음 술을 받고, 신랑은 빈 잔을 신부에게 넘긴다. 신부는 빈 잔에 술을 받아 반 쯤 마시고, 신부가 남긴 술을 신랑이 받아마신다면 혼례는 성립되는 것이다. 

우명은 돌려받은 잔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옻칠이 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혼례용 술잔이었다. 이 혼인과 연결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붉었다. 명은 황실의 붉은 문장을 생각했고, 눈 앞에 앉은 자신의 신부를 생각했고, 그 아버지를 생각했다.

안에 남은 것은 약간의 물기 뿐이었지만, 명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잔을 기울였다. 혀 위로 떨어지는 희미한 술 향이 잠시의 망설임을 지워주었다.

주례는 아비 없는 천민 기씨와 문하시중 우소횡의 아들 우명의 부부됨을 선언했다. 하객은 예법에 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적의 씨가 어디로든 남지 않도록, 이라고 말하며 살아남은 역적의 아들을 자신의 젊은 측근과 혼인하도록 명령한 황제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명의 눈에 그는 진실로 신이고 보살이었다. 그의 휘어지는 눈매 너머로 찬란한 빛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제 생각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아비에게 풀지 못한 정욕의 뒤틀린 분출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부상서도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야만족의 족장을 후궁으로 삼아 반란을 잠재운 제종이니 잡아들인 도적떼를 거세하고 여인이 부족한 마을에 신부로 들이게 한 태성군 같은 옛 선례를 다급히 찾아온 것도 그였다. 역적 반란은 타락한 양기가 뭉치는 것이니, 여인으로서 취급하여 음기로 덮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덧붙이면서. 

하지만 명과 그의 신부에게 그 길 밖에는 없었다.

혼인 예식 동안 신랑과 신부의 가운데 내걸린 황제의 친필 족자에 우아한 필치로 그려진 신부의 성은 기妓였다. 

다시금 눈을 돌린 명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아, 저리도 정성을 들인 모욕이라니.

-- 

붉다. 붉은 장막 아래 보이는 것은 오직 컴컴한 핏빛이었다. 이름이 지워지고, 가문이 지워지고, 성별이 지워진 혼인이 끝나가는 동안 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정을 알지 못하고 온 시골 귀족이 있었는지 기의 예민한 귀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신부가 크기도 하군. 어깨가 비리비리한 신랑 두 배는 될 것 같구만. 여편네가 저렇게 우락부락하면 소도 때려 잡겠어. 얼굴은 어떤지 안 봐도 뻔하구 말이지."
"쉬!"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고 뭔가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어? 허어... 그러니까 사내인데... 이제부터는 다같이 계집 취급을 해야한다 이 말인감?"
"쉿!"
"아잇 알았어! 도성놈들은 생각해내는 것도 배배꼬여가지고서리..."

그래, 그렇소다. 기는 잠시 생각하다, 그냥 웃었다.
그래. 그 배배꼬인 도성놈이 배배꼬인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하오.

--

신방은 유달리 밝았다. 집 안의 잔등을 모조리 끌어온듯한 실내는 대낮처럼 환했고, 방 안의 그림자가 저자거리의 어린애 연극처럼 보여질 것이 눈에 선했다. 장지 너머로 확연히 느껴지는 기척은 한 둘이 아니었으나 부부가 된 이들은 아랑곳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침대 위에 나란히 걸터앉자 허벅지가 닿았다. 급히 천을 끌어다 쓴 티가 역력한 펑퍼짐한 혼례복 너머 강건한 육체가 느껴졌다. 명은 안도했다. 이름도 잃고 가문도 잃은 채 신부 자리에 앉은 친우는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명은 손을 뻗어 면포를 내렸다.

"원백."

창백한 손가락에 붙잡혀 떨어지는 붉은 천 아래 선이 굵은 얼굴이 드러났다. 명이 평생을 알고 지냈던 얼굴이었다.

"원백."

다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명은 쓰게 웃으며 굳센 이목구비를 선연히 가로지르는 흉터를 더듬었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친 이는 나인데 네가 우는구나. 명."

명은 고개를 젓고 손바닥으로 흉터를 가리듯 쓸어내렸다. 감은 눈꺼풀 아래 떨리는 안구가 느껴졌다.

"...아프지 않은가?"
"이미 다 아물었다."

그렇게 대답한 원백은 명의 손목을 잡고 제 옷깃으로 이끌었다. 

"옷을 벗겨라. 우리는 이제 부부가 아니냐."
"...그래."

남은 밤이 억겁이라도 되는 양 느린 손길로 옷고름을 푼 것도 무색하게, 모양만 흉내냈을 뿐 통짜로 된 혼례복은 지지하고 있는 매듭이 풀리자 어깨 너머로 바로 흘러내렸다. 앞서 궁녀들이 기의 몸을 완전히 훑어본 뒤였기에 두꺼운 혼례복 아래는 완전한 알몸이었다.

젊은 호랑이와 같았던 거한의 웅대한 육신은 무참한 전장처럼 찢겨지고 꿰뚫린 상처가 빼곡했다. 이 처지에 남아있는 일말의 수치가 있었다니. 원백은 자조하며 명의 경악에 찬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더 몸을 열었다. 명은 원백의 열린 팔 안으로 다가가 굵고 맥박치는 몸을 끌어안았다. 어떤 감정이라고 칭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서로의 몸은 터질듯이 떨리고 있었다. 원백은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죽이면서 명의 귀에 속삭였다.

"나 같은 몸을 살리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멍청한 녀석."

짐짓 장난스레 말하는 원백의 목소리에 명은 울음을 꾹 참으며, 우연히 흉터가 없는 곳을 더듬어 찾아 계속해서 매만지고 또 매만졌다. 눈 앞의 사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기원백이었다. 천민 기씨도 역적의 아들도 아닌 멱을 감고 놀고 글공부를 함께 하던 친우 기원백이었다. 억눌린 명의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나는 네가 자결이라도 할 줄 알았다."
"..."
"돌아버린 황제와 붙어먹은 우씨놈이 미친 소리로 또 나를 능멸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줄 알았다."
"...난 옛부터 네가 하는 미친 소리는 언제나 잘 들었지 않으냐."

원백이 옥에 갖혀 고문 당하고 황제가 그에게 어떤 능욕을 줄까 따지고 있던 동안 명은 그와 연락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원백이 혼사를 승낙한 것부터가 기적이었던 일이다.

"...그걸 다오."
"...지금?"
"그래. 첫날밤이다. 저 놈들이 무슨 일이 생기는 줄도 모르는 중에 시작하는 편이 최고니까."

잠시 망설이던 명은 내내 품에 가지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어 끈을 풀었다. 희미한 적녹색을 띄는, 번들거리는 표면을 가진 방추형의 열매 같은 것이 드러났다. 원백이 손을 내밀자 명은 그 열매와 원백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속삭였다.

"...너는 후회하지 않겠나?"
"우리는 이미 부부가 아니냐. 부부가 아이를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명이 원백의 거친 손바닥에 열매를 내려놓자 원백은 그것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태과는 전설처럼 태아의 모양도 아니었고, 생살점처럼 희미한 단 맛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피막처럼 질겅거리는 껍질 안에서 터져나오는 과즙은 피처럼 쇠 맛이 났고, 혀가 문드러질 것처럼 썼다. 원백은 표정에 한 점 미동도 없이 과육을 전부 씹어 맛보고, 남은 씨앗을 꿀꺽, 목구멍으로 넘겼다.

"...쓰군."
"..."
"전에 어머니가 건강에 좋다고 먹이시길래 멧돼지 쓸개를 먹어봤는데, 이런 맛이었다."
"그랬구나. ...그런 분이었지."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피차 사내와의 동침은 이전엔 상상도 없던 차였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거나, 뭐든 곤란하다면..." 

중얼거리는 명의 입을 원백이 막았다. 

"...내가 비명을 질러도 멈추지 마라."
"..."
"약속해라."
"...알았다."

원백은 명에게 입을 맞췄다. 

사람의 살갗은 따뜻하고, 안타깝도록 살아있어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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