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던 로키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둠은 그의 죄를 상기시키고 그를 짓누르며 숨통을 막았다. 꿈에서는 그의 형이 불바다가 된 아스가르드 속에서 오딘과 프리가의 시체를 끌어안고 잔뜩 젖은 경멸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이 네 탓이야, 로키. 그 말과 함께 꿈에서 깨어나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모두를 죽게 만들고 저 혼자 살아남은 주제에 잠드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다니. 그가 자조하였다. 모두가 잠든 후라 더 없이 고요한 복도 위로 로키가 걸어 나왔다. 로키는 사카아르의 시끌벅적함이 그리워졌다. 늘 요란한 사카아르는 그의 과거를 생각할 틈이 없어서 좋았다. 그 속에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던 것이 차라리 더 편했다. 그것은 그가 잘하는 일이니까.


로키가 정처없이 떠도는 발걸음을 옮겨 어느 새 도착한 곳에는 이미 먼저 자리를 차지한 이가 있었다. 주변에 늘어진 술병의 수를 조용히 세어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로키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술을 들이켜며 창밖의 우주 그 어딘가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전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전사의 어깨에서부터 흐트러진 채 늘어진 푸른 망토를 보니 그는 발키리의 벽화를 보고 그 어릴 적에 무기고에서 그 망토를 여러 번 찾아내어 발키리 흉내를 내던 토르가 떠올랐다. 왕이 되셔야 할 왕자께서 왕을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으시다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시면 참으로 기뻐하시겠군. 하며 비웃던 그도, 그러면 로키 네가 왕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며 그의 머리카락처럼 눈부시게 흩날리는 미소도 떠올랐다. 그때는 평생 함께할 생각을 하는 형이 지긋지긋했는데 이젠 너와 나의 길이 다르다고 말하는 형이 미워지다니, 참 재미있지 않은가. 로키가 픽 웃었다.


로키가 회고하는 동안에도 브룬힐데는 꾸준히 술을 들이켠 듯 빈 술병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발키리로 훈련을 받아 살아온 그녀가 자신이 뒤에 서 있음을 모를 리가 없을 테고 경계조차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여지자 로키가 심술이 잔뜩 난 아이처럼 발을 쾅쾅 구르며 그녀의 침묵을 방해하였다. 그 소리에 브룬힐데가 목 너머로 술을 넘기다 말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왕자가 예절 교육이 한참 부족한 것 같으니 이를 어쩌나, 왕께서 알면 슬퍼하시겠어."

"오, 그럼 토르는 자격 박탈이군. 그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글쎄,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겠네. 변장은 확실히 못 하던데."

"고작 발소리로 예절을 논하려거든 왕께 먼저 충고하는 걸 추천하지. 그는 사냥을 할 때도 발소리를 죽이는 법을 모르니."


물론 그것은 토르가 자신이 피라미드 위에 서 있는 자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랬던 것이었다. 보통 발소리를 죽이며 잡는 동물은 약한 것들로, 토르는 그들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작다고 무시하는 버릇이 좋지 않다 핀잔을 주니 저렇게 귀여운 것들을 어찌 잡겠느냐며 그들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싶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로키가 종종 골려주곤 했다.- 토르가 주로 잡는 것들은 덩치가 매우 크고 사나워 몸으로 맞붙어 잡아 오는 것들이라 조심스러운 행동거지가 필요 없었다. 그는 포식자이자 전쟁 영웅이었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먼저 말싸움을 걸어 온 브룬힐데에게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없기에 로키는 그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는 왕의 기사님께서는 예절을 아주 잘 아셔서 왕의 동생께 그리 건방지게 구는가?"

"네 말대로 난 왕의 기사라 왕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어서."

"오, 언제는 왕께 예의를 갖춘 것처럼 말하는군."


브룬힐데는 로키의 말에 으르렁거리듯 짜증 냈으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법지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존댓말이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브룬힐데가 입을 다물고 술을 마저 들이켜자 로키가 킬킬거렸다. 치욕의 순간을 갚아준 것만 같아 뿌듯했다. 브룬힐데가 술을 넘기다 말고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 속에 저만을 오롯이 담는 브룬힐데의 눈을 보니 로키는 기분이 짜릿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발키리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늘 그녀의 시선을 왕, 토르에게 주곤 했으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태양과 같은 토르에게 자연스럽게 쏠리는 애정과 시선들에 심술이나 토르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을 즐겼다. 자신의 것을 따로 만드는 것보다 그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그의 것을 뺏어오는 것에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말할 것이 있나?"

"...그때 했던 거, 다시 한번만 해줄 수 있나?"

"오, 그게 부탁하는 자의 자세이던가?"


이렇게 쉽게 약점을 내보이는 꼴이라니, 로키가 고개를 지긋이 추켜들었다. 저 염병할 주둥아리. 브룬힐데가 짓씹으며 뱉은 말에 로키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브룬힐데가 술병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재수 없는 새끼. 입양되어서 어쩌고 주절거릴 때는 아스가르드 왕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더니 지금의 그는 뼛속까지 아스가르드 왕족 같았다. 술을 거침없이 목 뒤로 넘기던 브룬힐데는 한창 관심이 필요할 핏덩이 같은 왕자를 이해해줘야 한다 자신을 설득했다. 상대는 고작 이천 살 먹은 왕의 동생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ㅡ귀하신 왕자 전하께, 신 브룬힐데가 감히 청을 올립니다. 이제 됐어?"

"쯧, 상스럽기 짝이 없군. 자네는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하겠어. 그리고 사양하지, 난 또 칭칭 묶여서 어디 처박히는 일은 질색이니."


이를 뿌득뿌득 갈며 존칭까지 써주었더니 하는 말이 괘씸해 빈 술병을 던지려던 브룬힐데가 순간 멈칫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 자세히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칼을 들이 밀어달라 부탁할 게 아니라면 네가 내게 부탁할 것은 그것뿐이겠지. 잊지 못해 사카아르로 사라지고 이천 년도 더 지난 세월 동안 결국 잊지 못해 여전히 술독에 빠져 사는 주제에 굳이 내 마법을 통해 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 사카아르는 시간 개념이 달라. 그렇게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고 내가 잊고자 했던 것은 내 수많은 자매들 속에서 나 홀로 살아남았다는 비참함, 그것 뿐이야."


괴로움, 처절함, 외로움... 온갖 비극적인 감정들이 브룬힐데의 주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왕의 기사들이라 불리던 그 전설, 발키리의 역린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에 로키는 더 없는 쾌감을 느꼈다. 역사를 함께 배웠으나 토르는 늘 그렇듯 좋은 부분만 기억하려 했을 것이다.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 생각하니 굳이 그녀의 약점을 들춰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전부를 얻기가 힘들겠지. 약점을 내보인 자에게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 토르가 그녀의 약점까지 안아줄 기회 같은 것은 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얼굴이 기억 안 나. 술을 아무리 퍼마셔도 그 비참함은 잊지 못했는데... 얼굴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

"아, 그 금발의 전사."

"..."

"왜 그런 표정이지? 오, 그녀를 사랑했었나?"

"닥쳐."


술의 열기로 말라가는 입술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가 더 없이 썼다. 사랑이라, 이천 년도 더 한 세월 동안 잊으려 술을 마시고 도망쳐오던 기억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위해 견디려고 하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로키가 비웃으며 브룬힐데를 내려보았으나 그녀는 생각에 잠겨 그의 비웃음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사랑, 연약한 것들이나 사랑의 힘 따위를 믿으며 빌빌거리는 줄로만 알았건만... 왕의 기사인 그 전설의 발키리가 사랑 앞에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왕을 지켜야 할 그녀가 사랑 앞에서 얼마나 큰 약자가 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로키는 사랑 앞에 무너지는 브룬힐데를 상상하고 미소 지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브룬힐데는 번쩍이는 초록 빛에 고개를 황급히 들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 할 때엔 언제고 금새 말을 바꾸는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말을 잃었다. 푸른 망토가 로키가 있던 자리 위로 내려 앉고 밝은 금색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브룬힐데의 앞에 서있는 자의 어깨 위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머리는 로키의 마법임을 알고 있음에도 브룬힐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며 눈물로 볼을 적시었다. 마법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금발의 여신을 가장한 로키가 미소 지으며 브룬힐데의 마른 입술에 입맞추었다. 술의 열기로 입술이 바싹 말라있었다. 정인의 모습을 한 로키를 차마 거절하지 못한 브룬힐데는 고개를 젖히고 부드럽게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보고 싶은 이를 만나게 해주었는데 왜 눈물을 흘리는가?" 눈물에 젖은 볼에 로키가 입을 맞추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글쎄, 왕자의 은혜에 감동했나 보지."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는 로키를 거칠게 밀쳐내며 발키리가 몸을 일으켰다.

"이 로키가 은혜를 베풀어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대가는?"

"갚을 날이 있겠지." 


억지로 쥐어짜듯 브룬힐데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팔을 들어 재빨리 젖은 얼굴을 닦아내는 그녀는 빨리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녀가 반쯤 뒤를 돌아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마법을 풀고 거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로키가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면서도 특유의 우아함이 묻어난 손짓으로 그녀에게 짧게 손 키스를 날렸다.


"기억하고 있지."


로키는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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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로키 맞는지... 잘... 모르겠다... 결박플이 보고 싶은데 손이... 꾸금을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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