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맥주 두어 모금 만에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것도 정말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맨날 내가 먼저 전화하고, 먼저 보고 싶다고 하고, 먼저 좋아한다고 하고. 억울해. 내가 하도 매달리니까 그냥 불쌍해서 만나주는 거예요?"


어이없다는 듯한 숨소리와 웃음이 함께 터졌는데 피터는 그마저도 내가 재밌어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이 작은 차이도 피터가 구분하긴 어려운 모양이지.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먼저 손잡은 것도, 먼저 키스한 것도, 먼저 안아준 것도 나였는데 만나주는 거라니.


"진심이야?"

"심장 소리 들으면 알잖아요."


너무 진실되게 울리는 그 소리에 솔직히 어이없음을 넘어서 살짝 화가 나기까지 한다. 너는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손도 잡고, 끌어안고, 키스도 하냐고 되묻고 싶은 걸 고도의 인내력으로 겨우 참아냈다. 직접 묻는 건 내 입장에선 좀 치사했으니까.


그 이후 '네가 말한 대로' 손 잡을 것처럼 하고 안 잡고, 키스할 것처럼 하면서 안 하고, 안아줄 것처럼 하면서 안아주지 않는 등 내 나름대로의 시위 활동을 해봤지만 그런다고 내 마음을 알아줄 리 만무하다. 내 마음을 알긴커녕 한층 더 우물거리기만 하니...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혈기왕성한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고백을 해보기로 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저녁 약속도 잡고 피터가 좋아할진 모르지만, 고백엔 꼭 필요하다는 꽃다발도 준비해야지.


"어떤 꽃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받으시는 분이 어떤 꽃을 좋아하시는데요?"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는 얘기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사랑스럽고 수줍음이 많은데 중요한 순간엔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이거든요. 그런 마음을 담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지 않게 튀어나온 사랑꾼 발언에 꽃집의 직원들이 작게나마 술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받으실 분은 엄청 좋으시겠어요."


꽃 냉장고 뒤쪽 창고에서 들리는 '어휴 오글거려', '세상사랑은 지 혼자 다하네'라는 말은 덤이겠지.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레스토랑에 앉아 옆자리에 둔 꽃다발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무슨 무슨 꽃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 향기에 압도되어 있던 바람에 꽃에 대한 설명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터의 향기가 이 꽃다발과 섞인다면 아마도 난 오늘 아마도 그를 집에 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손을 주억거리며 생각에 빠진 사이 평소와 다른 향기를 입은 피터가 나타났다. 은은한 향기와 새 옷 냄새, 중고로 마련한듯한 뒷굽이 닳아있는 낯선 구둣발 소리.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데이트는 처음이었으니 피터 나름 가장 신경 쓴 차림이겠지.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조금 전에 왔어."


자리에 앉은 피터는 웨이터가 따라주는 물을 괜히 홀짝거리다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몇 번의 헛기침을 더 했다. 마실 것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피터는 몇 번을 더 우물거렸다. 이렇게 멋있는 곳에 초대했는데 기대심보다 긴장감이 더 크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이런 곳은 왜..."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요?"


그 말에 그의 심장이 더 큰 긴장감으로 울린다. 내가 이런 곳에서 무슨 말을 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내 나름대로 가장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준비해둔 꽃다발을 들어 그에게 넘겼다.


"저... 주시는 거예요?"

"응. 받아줄래?"


그리 크지 않은 꽃다발을 받은 피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손끝으로 꽃들을 만져보는지 진한 향기가 그의 손끝을 따라 울린다. 꽃을 들고 있는 네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래서 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피터."

"네."

"생각해보면 난 한 번도 직접 얘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뭘요?"

"항상 간접적으로 표현하지. 항상 이렇게 함께했으면 좋겠다, 내일 저녁에 시간이 있느냐, 다음에도 함께 이 길을 걷고 싶다."


무슨 말인지 알아챈 듯 피터의 심장 소리가 조금씩 빨라진다. 내 말에 반응도 못 하는 그가 침을 꿀꺽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건 내 기준이잖아. 사랑하면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할 때도 있는 건데."


꾹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도 터질 듯 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모를 거야. 난 그걸 말로 풀어내는 재주가 없거든."


정말 큰맘 먹고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였다. 이야기 하는 중에 피터의 기뻐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덩달아 흥분하기까지 했는데 고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차분하게 가라앉는 건 무슨 영문일까.


"....맷."

"응."

"만우절 장난치곤 좀 지나치지 않아요?"


...뭐?



-



고백을 듣고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정말 심장 중 일부는 터졌다가 힐링펙터때문에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맷은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가볍게 속삭여 주기만 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분위기에, 저런 옷차림에, 그런 꽃다발을 준비하고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다니 모두 거짓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더라. 오늘이 만우절 이란게.


장난치곤 지나치게 정성스럽긴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이란 게 꼭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주량으로 술에 취해 항상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다음부턴 흔하던 스킨쉽까지 줄어든 마당에 이런 장난은 정말 너무 하지 않나.


"만우절 장난치곤 좀 지나치지 않아요?"


잠시나마 놀란 표정이었던 맷은 한쪽으로 살짝 미소 짓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만우절인 줄 몰랐다거나, 그거랑 상관없는 거라고 한마디만 더 해줬으면 진짜 고백이려니 하려고 했는데 여지없이 고백의 시간이 끝나버렸다. 그리고나서 무슨 식사를 어떻게 한 건지, 그 고급진 스테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났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고, 난 절대 술은 안 된다며 시켜준 탄산수를 한 병 가까이 마셨다. 노란빛의 조명과 잔잔하게 울리는 클래식. 평소보다 더 깔끔한 정장을 하고,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한 말이 아까웠다. 만우절 얘기는 꺼내지 말 걸 그랬나. 그냥 고백인 양 받고 내일부턴 날 책임지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가슴속이 더 아려온다.


최근엔 항상 나를 데려다주기만 했던 그가 오랜만에 자길 데려다 달라기에 천천히 그의 집으로 향했다. 내 팔을 가볍게 잡고 말없이 걷는 그를 바라보면 멍하니 먼 곳을 응시했던 눈빛이 나를 향해 살짝 돌려지며 가볍게 미소짓는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라리 장난을 쳐서 미안하다는 소리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반대쪽 손에 들린 꽃다발이 아래로 향한다. 꽃을 말릴 땐 거꾸로 걸어놓으면 좋다고 했으니까 집에 가면 이렇게 매달아서 말려놔야지.


"잠깐 올라왔다가 가."


집 앞에 도착해 잡혀있던 팔을 조심히 풀어내려 하자 그가 다시 내 팔을 잡아 당긴다. 당신의 집으로 가자며. 늘어진 손에 거꾸로 들린 꽃다발을 꼭 쥐고 알겠노라 따라 들어갔다. 꽃향기가 참 좋았다. 그에게서 어렴풋이 풍기는 와인 향기와 잘 어울렸다. 이 꽃은 누가 추천해줬을까.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옷장에 다시 정리해 넣어둔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아직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받아 소파 테이블 위로 올려 두고 내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긴 소파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낮에는 뭐 했어?"

"수업하고... 뭐 별거 없었어요."


며칠 만에 잡은 손이 아릿해 아직 잡혀있는 그의 손을 괜히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시선을 아래로 한 그가 맞잡고 있는 내 손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쓸며 다시 미소 짓는다.


"오후엔 뭐 했는데?"


목 끝까지 매고 있던 넥타이가 답답했는지 살짝 잡아당기더니 셔츠 맨 윗단추를 풀고 소파에 깊게 기대앉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은 눈가에 남은 안경 자국을 가볍게 문질렀다. 시선이 마주하진 않았지만, 그는 나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받은 선물 중 가장 귀한 그의 따듯한 미소에 다시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후 수업 듣고 일찍 들어와서 과제하고... 소호에 잠깐 갔다 왔어요."


잡혀있던 손이 풀어지며 그의 손끝이 내 어깨에 내려앉더니 옷깃을 살짝 어루만진다.


"새로 산거야?"

"...네."


맷은 더 이상 말없이 가만히 미소짓기만 했다.


"난 오전에 오랜만에 의뢰가 있어서 사건조사 했어. 점심은 약속있는 캐런은 보내고 포기랑 태국식 볶음밥을 먹었고."


묻기도 전에 하루종일 있었던 얘기를 풀어놓는 건 처음이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오후에는요?"

"오후엔 정말 한산하고 별일 없어서 둘은 그냥 두고 나만 먼저 퇴근했지.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

"중요한 일이요?"


맷은 고갯짓으로 조금 전 내려놓은 꽃다발을 가리켰다. 꽃집에 들렀다 온 거구나. 다시 그것에 관해 묻지 않으니 그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마주 앉아 바라보기만 해도 좋긴 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인진 아직도 듣지 못했다. 평소라면 늦었다고 집에 가라고 하거나, 아니면 데려다준다고 할 텐데. 맷은 일어날 기미도, 나를 보낼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바보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를 잡아주지 않아도, 입 맞춰주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좋은 걸 어떻게 하나요.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내 어깨를 어루만졌던 손을 내려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너무 늦었으니 가보라고 말하려나.


"피터."

"네."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정말로 너를 좋아해."


다시 어깨로 올라온 손이 어깨선을 따라 올라오며 턱선을 가볍게 그러쥔다. 이 사람과의 키스는 또 얼마 만이지. 왜 이 말을, 왜 이 키스를 오늘 같은 날 하는 걸까. 거짓말 같은 이 고백을 왜 만우절에 해야 했을까. 나를 향해 다가오는 달콤한 입술을 나는 밀어낼 힘이 없다. 거짓말이어도 좋았으니까.

잠시 마주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초점도 맞지 않을 거리에 멈춰서 옅은 미소 하나 없이 달싹인다.


"안 믿네. 내 말."

".... 그러게 왜 오늘 하셨어요."

"만우절 지났어."

"어?"

"12시 넘어서 4월 2일이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그가 다시 내 목선을 가득 잡고 끌어당겨 입술을 묻는다. 몇 번을 물었다 놓아주는 자극적인 움직임과 푹 젖은 소리에 온몸이 나른해진다. 평소보다 더 자극적으로 입술을 물어오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나 역시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탐하며 한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남은 한 손으로 그 어깨를 쥐어 당겼다. 두꺼운 그의 팔이 나를 힘껏 안으며 입속 깊은 곳 까지 유린했다.


"하....이래도 내가 너보다 안 좋아해?"

"....하아... 네?"

"안 좋아하는 사람이 손잡고, 키스하고, 안아줄까?"


그걸... 마음에 담아둔 거야?


"사실 오늘 며칠인지도 몰랐어."

".... 그래요?"

"이제 믿네."


그가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으로 그가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말을 온전히 믿고 나서야.


"맷."

"응."

"나....오늘 집에 안 갈래요..."

"피터."

"....."

"대답해야지."

"네..."

"내가 보내줄 거라 생각했어?"



-



소파 테이블 위의  꽃향기와 내 옆의 피터 향기는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맑게 핀 꽃이 세상의 모든 것을 유혹하는 향기를 내는 것처럼 그는 온몸으로 나를 흔들기 시작한다.

진한 입맞춤도 헐떡이는 숨소리도 마음속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 우린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생리적인 눈물이 꼭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나올 때까지 서로를 탐욕했다.


"더... 더 해줘요.. 하윽..."


나를 요구하는 피터는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나는 기꺼이 그 몸을 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그를 품었다.

이런 밤이 지나더라도 피터는 다시 한번 더 말로 듣길 원할 것이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울 것이고, 세 번은 즐기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다. 

고백도 육체적 관계도 다 마찬가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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