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 https://posty.pe/9abhjt


근혁은 다시 한번 옛말의 위력을 실감했다. 사실 '설마'는 세계적인 킬러의 이름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사람을 많이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웃어넘긴 근혁은 시간이 흐른 현재, 고개를 푹 숙이고 하염없이 커피잔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그저 평범한 일상에 느닷없이 초인종이 울렸고, 인터폰을 받았더니 자칭 현걸의 어머니라는 분이 찾아오셨으며, 급하게 집 앞 카페에 끌려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우리 현걸이랑 헤어져 주세요."

이건 마치 아침 드라마. 아니, 스케일은 주말 드라마! 사실 그보다 근혁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다른 데에 있었다.

'어머님……. 뜨거운 커피를 시키셨네요.'

근혁은 드라마에서 주로 나오는 연출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몇 번의 대화, 협상 결렬, 극렬한 분노, 이어지는 물세례. 하지만 현걸의 어머니 앞에 있는 음료는 시원한 물이 아닌 뜨거운 커피였다. 그것도 김이 아주 모락모락 나는! 근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사이, 중년의 여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근혁에겐 정말이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용하고 고집있는, 바로 현걸의 얼굴 그 자체였으니까.

"우리 현걸이는 안타깝게도 근혁 씨와 교제가 힘든 아이예요."

"어머님. 저 정말 현걸이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께도 못 보여드리는 외설스러운 성인 소설로 먹고사는 글쟁이지만, 사실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어쨌든 고료 수입만큼은 쏠쏠하다는-입으로 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근혁은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현걸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뜨거운 커피가 다 뭐냐! 하지만 당당한 외침에도 단호한 반대의 의사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어쨌든. 잘 생각해 보세요. 긍정적인 답변 기다릴게요."

"어머님, 어머…!"

다행스럽게도 뜨거운 커피가 끼얹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근혁은 결국 일으켰던 몸을 다시 주저앉히고 말았다. 나는 정말 소설 속 인물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걸과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수년 동안 현걸을 붙들고 그의 혼삿길을 막고 있느냐 하면, 사귄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인데? 결국 혼란 속에서 근혁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한 마디뿐이었다.

"현걸이 보고 싶다……."


* * *


"근혁아.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아니야."

그토록 기다렸던 현걸이건만! 막상 퇴근한 그에게 투정을 부리자니 그 내용이 조심스러워서 애써 덤덤한 척하려던 근혁이었다. 애석하게도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 편이라 금방 티가 나버렸지만 말이다. 걱정이 가득한 현걸을 마주 보던 근혁은 애써 고개를 휘저었다. 그냥, 글이 잘 안풀려서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양념이 고루 묻은 불고기를 집어 현걸의 수저 위에 올려주며 웃어주자, 그제야 현걸도 표정을 풀었다. 아침에 그런 일을 겪고도 저녁을 차려주고 싶냐고?

"나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현걸아."

근혁은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자기는 자존심이고 뭐고 개뿔 없는 놈이고, 더욱이 그 자존심을 현걸에게 부리고 싶진 않았다. 정성껏 차린 밥을 아기새가 먹이 받아먹듯, 투정 한번 없이 잘 먹어주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별것 아닌 칭찬에도 하얀 뺨을 물들이는 건 또 어떻고? 애석하게도 근혁의 콩깍지는 겨우 반대 한 번에 벗겨질 만큼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현걸을 생각 하며 발을 동동 굴렀던 애절함 때문이었다. 원래 사랑은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더 극적이지 않은가.

"근혁이 너도 참. 아! 오는 길에 과일 사 왔어. 너 사과 좋아한다고 해서."

"그럼 내가 또 환상적으로 사과 토끼 실력을 보여줘야겠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이래 봬도 조소과 출신이거든."

뭐, 재룟값과 먹고 살길이 막막해 일찍이 때려치운 뒤 청소년 시절 본의 아니게 발굴한 두 번째 재능이 먹여 살리고 있지만 말이다. 간만에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 근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과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칼날이 춤이라도 추듯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할 때마다 그걸 바라보는 현걸이 오히려 토끼 눈이 되었다. 술집에서 으레 안주로 내오는 사과 토끼가 아니라 정말 사과로 만든 토끼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으니,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냐마는!

"대단하다, 근혁아! 이 정도 재주가 있는데 후회하진 않아?"

그 물음에 근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떤 후회는 너무 묵혀두어서 후회해야 하는 때조차 놓치는 경우가 있다는 걸 본의 아니게 일찍 알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특히나 현걸에 관해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편 다음, 깊은 심호흡을 마지막으로 근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려던 주제를 털어놓았다.

"현걸아. 사실 아침에 너희 어머니가 다녀가셨어."

"뭐?"

그 말 한마디에 현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 미인을 얻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군, 이런 젠장! 근혁은 차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꾹 누르고 당장이라도 뛰어서 움직일 것 같은 토끼 한 마리를 현걸의 앞접시에 내려주었다.

"어머니가 너한테 뭐라고 안 하셨어?"

"하셨지……. 너랑 헤어져 달라고 하시던데."

말만으로도 입이 쓴소리였다. 현걸의 마음이라도 달래보려 괜찮은 척 웃어 보이려 했으나 입꼬리마저 근혁의 뜻대로 굴어주지 않았다. 물론 근혁이라고 객관성이 영 바닥을 치는 건 아니라서, 자기가 현걸의 부모 된 사람이라도 저 잘난 아들을 아무에게나-더군다나 같은 남자에게-덥석 주기란 영 달가운 일이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물론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니, 쉬이 물러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 고집하는 현걸과 꼭 닮은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적립되는 걱정은 복리이자라도 붙은 것처럼 눈덩이 같이 불어나며 현걸과 함께 한 꿈같은 일주일간의 연애가 신기루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나마 믿을 건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이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호언장담이라도 해주는 행복 회로일까?

하지만 역시 현걸이가 나 때문에 부모님과 척을 지는 건 좀…….

솔직히 좀 수준이 아니라 정말 많이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만난 지 오래된 관계도 아니고, 하룻밤 불장난이 너무 좋아서 방화를 저지르듯 유지하고 있는 관계이니 더더욱! 결국 근혁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벌벌거리는 얼굴로 현걸과 눈을 마주쳤다. 아, 진짜 미치게 예쁘다. 저 얼굴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금까지 저리는 그 순간 긴 생각에 잠겨있던 현걸이 입을 열었다.

"근혁아. 여권 있지?"

응? 여권? 느닷없는 소리에 근혁은 말을 더듬으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있지?"

"짐 싸."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난 현걸은 정말로 옷방에서 캐리어를 질질 꺼내 들고 나오기까지 했다. 아니, 현걸이 너는 갑자기 짐 싸라는 소리를 부모님 반대에 부딪쳤다는 애인 앞에서 하니? 영문을 몰라 근혁이 멀뚱히 서있기만 하자, 거의 고함에 가까운 현걸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서!"


* * *


기분 좋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 고운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해변에 선 근혁은 멍하니 자기 뺨을 꼬집었다. 아프다. 꿈은 아니란 소리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껏 신이 난 얼굴로 근혁의 옆에 선 미남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알로하!

근혁은 다시 눈을 끔벅였다. 꿈에서만 그리던 하와이에 서있는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하기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애인의 손에 이끌려 가장 빠른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결혼 허가증을 발급받고, 마침 뉴욕에 거주하던 현걸의 사촌을 증인으로 섭외하기 무섭게-정확히는 허가증 발급 24시간 만에-서약식을 올린 뒤 혼인 증명서를 들고 냅다 하와이로 신혼여행까지 오는 데에 닷새가 채 걸리지 않았다면!

"현걸아."

"응, 근혁아."

"이거 꿈 아니지?"

"너 이젠 성한 뺨이 없는데, 아직도 못 믿겠어?"

그렇게 속삭이며 웃는 현걸의 등 뒤로 꼬리 아홉 개 정도가 보인 기분이었지만, 이내 근혁은 그걸 기분 탓으로 치부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방에 틀어박혀 모니터 앞에서 글자 수와 씨름하던 무료한 일상이 이젠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굳이 사실을 지적하자면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아파트 복도에서 현걸과 마주친 순간부터, 정확히는 현걸이 자신을 향해 웃어준 그날부터. 근혁의 평범한 나날은 산산조각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날린 지 오래였다.

"사랑해, 근혁아."

현걸이 사랑을 속삭이는 중에도 근혁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서는 알림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갑자기 휴재 요청을 던진 작가에게 온갖 쌍욕을 던지는 친구 겸 그의 담당 PD인 주란이었다.

「미친놈아,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미안하다, 주란아. 너에겐 축의금일랑 10원 한 푼도 받지 않으마.

신나게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며 근혁은 코앞에 다가온 연인, 아니. 이제 남편이 된 현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노을이 내려앉는 하와이 해변에서의 달콤한 입맞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반려. 이게 바로 퍼펙트, 인생의 진리지.

그리고 근혁의 주머니에서는 주란의 메시지가 다시금 알림창을 두드리며 처절하게 절규했다.

「네놈 자식이 애인 생겼다고 한 게 한 달이 안 됐는데 결혼이 무슨 소리냐고!!!」

아파트 복도에서 첫 만남 이후 이웃으로 일주일,

현걸의 껄끄러운 연애가 정리되는 데에 또 일주일,

그리고 알코올처럼 서로에게 취해 연인이 된 게 일주일.

마지막으로 납치하듯 얼빠진 근혁을 미국까지 잡아 와 식을 올리는 데에…….

"어라?"

날짜를 계산하던 근혁의 눈이 휘둥그레 뜨인 순간 현걸의 속삭임이 주문처럼 귓가에 울렸다.

"평생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자, 근혁아."


* * *


무료하다.

재수 없는 소리로 들리겠으나, 현걸은 굴곡 하나 없는 자신의 인생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지루함의 근원은 역설적으로 현걸의 완벽함에 있었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지 몰라도-아이들 인생이라도 구했나?-그는 인생을 쉽게 살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잘난 얼굴, 건강한 몸과 총명한 머리에 유복한 집안까지. 현걸은 대체로 자기 삶에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딱 하나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존재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게 무슨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소리냐고? 하지만 현걸은 진지했다. 어려서부터 주변 모두가 입을 모아 재수 없다고 평가하는 삶을 살아보라! 자긴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조건이 좋아서 혹은 입바른 소리 하는 것이 얄미워서라는 이유로 세상은 그를 질타하곤 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길 오냐오냐하며 투정을 들어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삶이 될 텐데.

'물론 외형이나 음식 솜씨, 속궁합도 잘 맞아주면 더 좋겠지.'

실로 재수 없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현걸의 눈앞에 그가 꿈에 그리던 남자를 내리시다니! 어쩌면 근혁은 전생에 아주 큰 죄를 지었을지도-사람을 대거 죽였다거나-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련 같은 사랑을 내렸을 리 없지 않은가?

현걸이 자신의 급에 맞지 않는 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건 갑작스러운 이직 덕분이었다. 제아무리 능력 좋은 현걸이라도 이전 연봉보다 2배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헤드헌터를 내칠 수는 없었다. 덕분에 급히 구한 아파트는 신축도 아니었고,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복도식이라 성에 차지 않는 것도 잠시. 처음 근혁을 마주친 날, 현걸은 마치 자석이 다른 극에 이끌리는 듯한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과 더벅머리로도 감출 수 없는 퇴폐적인 눈빛, 슬리퍼 위로 언뜻 보이는 발목까지. 그전까지는 무수히 많은 남성을 보고도 취향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와 마주친 순간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종일 현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숫자에도 주식 창에도 온통 옆집 남자가 보였다. 심지어 맞은편에 앉은 고객의 턱에 삐죽 튀어나온 수염에도 그 남자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그의 발목을 떠올렸을 때 현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고 말았다.

"미치겠군……."

이름은커녕 목소리조차 모르는 남자에게 드는 그 복잡 미묘하고도 꾸덕꾸덕한 감정. 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워 얼굴이나 볼 핑계로 답지 않게 떡을 사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 날, 문이 열리고 드러난 그의 몸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던 현걸이 느낀 것은 분명 노골적인 욕망이었다.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욕망임을 인지한 뒤 마침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던 이성에게 가벼운 연애를 제안했던 것도 그걸 가라앉히기 위함이었다. 상식적으로 옆집 남자가 자신에게 쌍방의 호감을 느껴 몸을 섞는 것보다야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하늘은 현걸의 편이었다. 옳지만 남이 듣기 싫은 소리로 미움을 사는 것은 현걸의 특기라, 흥미가 떨어진 연애 대상을 정리하는 일이야 여느 때처럼 아주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옆집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온 건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었고, 현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현걸 씨……. 예뻐요……. 진짜, 진짜 예쁘다."

동근혁이라고 하는 남자는 그 성격은 물론이고 주정까지도 현걸의 취향이었다. 현걸의 꼬임에 넘어가 와인을 진탕 들이켠 그는 여우 굴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풀어진 얼굴로 하염없이 현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 그 애정 어린 손길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하지만 근혁 씨도 제 성격을 알면 도망갈 텐데요."

"성격이요? 으응, 재수 없는 거요?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좋아요……."

그 순간 귓가에 종이 울렸다. 근혁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의 말은 곧 청혼과 다름없었다.

"재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좋다구요?"

잔뜩 취해 강약의 조절이 불가능한 근혁의 머리가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현걸은 생에 처음으로 가슴 깊은 데에서부터 치솟는 소유욕과 애정에 몸을 떨었다. 무언가에 이토록 욕심을 내본 적이 있던가? 동시에 이토록 갖기 힘든 것이 있었던가? 사람의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아서 그 깊이나 변덕을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에 현걸의 입안이 초조함으로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찾은 사랑인데!

연애 같은 불확실한 기간 동안 그를 놓치는 비극은 없어야만 했다. 그러니…….

"우리 동갑인데, 말 놓을까요?"

"응, 좋아요. 아니, 좋아……."

"근혁아. 내가 그렇게 예뻐?"

"응, 응……. 현걸이 네가 정말, 정말 예뻐……."

홀린 듯이 자신을 눈에 담는 근혁을 바라보며, 현걸은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며 웃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지만 사랑 앞에 장사 없다고, 지금은 뭘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근혁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장을 확실히 찍어둬야 탈이 없을 터였다.

"그럼, 근혁아. 나한테 키스해 줘. 그리고 안아줘."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또렷하게 빛을 내는 유일한 존재의 명령이 떨어졌고, 근혁은 감히 그래도 되나 싶어 가만히 현걸의 낯을 살폈다.

"해줄 거지?"

아아, 그건 불가피한 명령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기꺼이 그에게 입을 맞춰야지. 그렇게 근혁은 현걸의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도장처럼 찍어 눌렀다. 그게 자기 인생을 저당 잡히는 계약서에 찍히는 도장인 줄도 모르고!


* * *


고급 주택에 어울리는 우아한 차림의 중년 여성의 입에서는 쉼 없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그에게도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금이야 옥이야 기른 하나뿐인 아들 현걸이었다. 어릴 적부터 인물이 훤하고 총명하기까지 하니 주변에선 칭찬이 마르질 않았지만, 그 실상을 아는 입장으로는 글쎄…….

"고집 세고, 굽힐 줄을 모르니 성격 재수 없다는 평가가 끊이질 않지. 인간관계만 안 좋나? 생활력 없는 녀석이 취향은 또 어찌나 까다로운지. 심지어 입맛도 유별나!"

한숨을 내쉬느라 기껏 내린 커피를 머금지도 못하고 다시 잔을 내린 그는 제 앞에 있는 아들 현걸-의 옆에 뻣뻣한 자세로 앉은 근혁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그래서 그렇게 말렸는데."

아니, 어머님? 제 조건에 아드님이 아니라 제 걱정이 되었다고 하시면 어찌 믿겠습니까! 물론 아무리 억울한 근혁이라도 차마 그 말을 육성으로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근혁과 현걸이 찾은 것은 바로 현걸의 본가였다. 연애를 반대했더니 제멋대로 식을 올린 불효막심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와 도리 아니겠는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근혁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소금과 찬물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를 기다린 것은 진심으로 근혁이 안타까워 가슴을 치는 현걸의 모친이었다.

"어머니가 반대해 주신 덕에, 근혁이가 오해해서 일이 쉬웠어요."

"내가 미안해서 어째, 동 서방."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현걸의 모친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더니 얼마 안 되지만, 못난 자식 책임져주는 데에 대한 보답이라며 근혁의 명의로 돌려줄 건물 계약서와 둘이 살 한강 경치가 거실에서 한눈에 보이는 아파트의 문서를 꺼내 들었다. 동 서방이라는 호칭에 당황할 새도 없이 어마어마한 보상이 내밀어지자, 근혁의 동공에는 그야말로 지진이 났다. 아니, 현걸이와 사는 게 이 정도 가격이라구요? 그와 사는 난이도가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순간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은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근혁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돌아오는 장모님이자 시어머니의 답변은 단호했다.

"환불은 안 돼요."

이제 평범함이 물 건너간 삶의 선택지만이 남은 근혁에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현걸이 살금살금 팔짱을 끼며, 제 어머니의 말을 받아 확인 사살 하듯 물었다.

"근혁아. 나 환불할 거야?"

하나님, 맙소사. 호구 맞고 보쌈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에도 현걸은 여전히 예뻤다. 이미 다 저질렀는데 네가 뭘 어쩌겠냐는 속이 빤한 눈동자는 크고 둥근 알사탕 같고, 재수 없는 하얀 면상은 곱디고왔다. 성경 말씀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근혁은 이제 꼼짝 없이 이웃집의 남자였던 현걸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아끼고 사랑하자면서."

만약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근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도 찾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반려와 부족함 없이 함께하는 인생의 끝이란 참으로 뻔한 것일 테니까. 그 소설 또는 동화의 끝은 이렇게 끝날 것이다.

"사랑한다, 이현걸. 이 여우야."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Abig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