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보도블록에 닿을 때마다 하얀색 셔츠가 휘날렸다. 하얀 햇살이 소년의 머리 위에서 금빛으로 산산히 부서졌다. 소년이 발을 딛는 곳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이었다. 주차된 자동차의 보닛들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저 멀리 대로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덕분에 파리는 안전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소년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추가 지나 바람이 선선한데도 햇살을 고스란히 쬐며 달리는 바람에 목덜미에서 땀이 솟았다. 입이 탔다. 의심을 사기 전에 경호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변신하는 게 더 빨랐으나 오늘은 미처 여분의 치즈를 챙기지 못했다. 하필 치즈를 까먹을 줄이야! 아드리앙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달리는 사이 머리 위로 뭔가 휙 하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아드리앙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사람이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채 바로 옆 건물을 건너가고 있었다.

 

“레이디버그?”

 

부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다른 건물 테라스에 착지한 레이디버그가 그 말에 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부른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자 아드리앙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볼 때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테라스 너머 창은 다행히 짙은 커튼으로 가려져, 건물 안 사람들은 레이디버그가 있는 걸 모르는 듯했다. 멈춘 레이디버그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입이 살짝 달싹거리는 게 제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했다. 아드리앙은 다시 말을 걸었다.

 

“레이디버그.”

“아드리앙?”

“맞아요. 저예요.”

“왜 여기에 있어요?”

“네?”

“아, 오늘 새로운 광고촬영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바람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디버그의 슈트가 화사하게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가 충분히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취소됐어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햇빛이 직접적으로 그의 얼굴에 내리쬐었기 때문에, 결국 아드리앙은 손을 들어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빛을 가리니 레이디버그의 표정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레이디버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다가 검은 나비가 나타나서요. 숨을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지 뭐예요.”

“그럼 제가 데려다 줄까요?”

 

그렇게 묻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서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거기에 괜히 마음이 달떴다. 제안을 승낙하려던 차, 순간 그는 이게 자신에게 찾아 온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 블랙캣의 모습으로 보았던 레이디버그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오늘 광고촬영이 있다는 걸 아는 거 보니 저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달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안에 담긴 기쁨이 희석되어버렸다. 아드리앙은 말을 내뱉고 나서 뒷말을 하지 않을 걸 하고 후회했다. 억양이 얼핏 들으면 당황하거나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을 들은 레이디버그가 허둥댔다.

 

“그게, 제가 아니고, 그 주변에 아드리앙 팬인 친구가 있어서……. 미안해요.”

“아녜요. 저에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기뻐서 그런 건데 이상하게 들렸네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말하면서 아드리앙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레이디버그가 소리없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테라스 난간에 자신의 상체를 기댔다. 몸을 숙이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그나저나, 불렀어요?”

 

다행히도 레이디버그는 바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드리앙은 오늘 그 둘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요.”

 

 

* * *

 

 

블랙캣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가로등 몇 개가 분홍색 케이크로 뒤덮인 후였다. 열기에 반쯤 녹아가는 생크림에서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났다. 거리 곳곳에서 녹은 케이크에 달라붙은 사람들이 발을 빼내지 못하고 비명 지르는 게 보였다. 블랙캣은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다행히 빌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민들과 케이크들을 빙 둘러 피해 벤치 뒤에 숨을 고르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이번에 검은나비에 지배당한 사람은 누구야?”

“삐에로. 어린아이들 생일파티에서 공연을 하던 사람이래.”

“오 그럼 이 케이크들은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건가?”

 

평소처럼 가볍게 농담을 던진 건데, 핀잔을 주거나 가볍게 받아칠 레이디버그가 아무 말이 없었다.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디버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있었다.

 

“너 오늘 생일이야?”

“아니, 농담이었어.”

“블랙캣. 우리 정체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면 안 돼.”

“물론이지, 마이레이디. 영웅은 생일 같은 거 없잖아.”

 

전혀 비꼬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억양도 그에 맞춰서 장난스럽게 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어색한 침묵 끝에 나온 말은 “그렇지.”였다.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물에 잠긴 것처럼 희미하고 금세 흩어질 것 같아 블랙캣은 뒤늦게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렇게 보여요?”

 

레이디버그가 한쪽 팔을 들어 자신의 턱을 괴었다. 머리카락으로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맑고 선명한 눈동자가 하늘과 같은 색으로 빛났다. 심장이 옥죄이는 것 같아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저라도 괜찮으면 말해줄 수 있나요?”

“별일 아니에요. 그냥……. 아드리앙 내일 생일인 친구 있죠?”

 

레이디버그가 꺼낸 말은 예상 외였다. 아드리앙은 어렵지 않게 내일 마리네뜨의 깜짝 생일파티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제 광고 이야기를 했던 게 마리네뜨인가요?”

“맞아요. 내일 마리네뜨에게 저도 생일 축하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면 직접 전하는 게 좋지 않아요?”

 

레이디버그는 아드리앙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늘 두 번째로 보는 표정이었다. 수면 밑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듯한 얼굴.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가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지, 그걸 돌려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디버그, 당신 생일도 알려줄 수 있나요? 축하해주고 싶어요.”

“안타깝지만 안 되겠네요. 영웅은 생일이 없거든요.”

 

아드리앙은 속으로 두 시간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대화가 끊기기 전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게 당신이 오늘 슬퍼 보였던 이유인가요?”

“…….”

 

레이디버그의 침묵을 보니, 생일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슬프게 한 게 분명했다. 아드리앙은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블랙캣인 그에게 생일이 있는 것처럼 분명 레이디버그에게도 생일이 있겠지. 아드리앙은 작년 자신의 생일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그가 축하 파티를 여는 걸 거절했고, 친구인 니노는 그를 위해 나서다 검은 나비에 지배당했다. 조금이나마 친구들과 생일을 즐기고 블랙캣으로 집 밖을 나설 수 있었던 건 좋았으나 여전히 그 일은 죄책감으로 남아있었다.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가 자신의 생일에 본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당신도 분명히 태어난 날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영웅은 생일을 기념할 수 없으니 없다고 하는 거겠죠. 정체를 들켜서도 안 되고, 생일에도 악당이 나타나면 검은 나비를 잡아야 하니까 친구들과 축하 파티는 물론 파리를 벗어날 수 없어요.”

 

아드리앙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디버그를 바라보았다. 턱을 괴던 레이디버그가 어느 순간 테라스에 바로 서 있었다. 햇빛이 눈 부셔서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앙은 자신이 말실수만 안 했길 빌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아드리앙 원래 이렇게 영웅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당연하죠. 당신은 레이디버그잖아요.”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가 자신을 볼 걸 고려해서 해사하게 웃었다. 눈이 따가운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와 말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그에게 커다란 기쁨이었으니까. 그만큼 그녀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도 생일은 생일처럼 지나가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동지애로서, 저에게만 당신의 생일을 알려줄 수 없나요?”

 

끈질기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꼭 레이디버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블랙캣으론 차마 말할 수 없는 부탁이니까. 그렇다면 아드리앙의 모습으로라도…….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영웅은 정말 생일이 없는 걸요. 정 축하해주고 싶으면 마리네뜨에게 생일 축하를 전해주세요. 마리네뜨는 제 소중한 친구니까, 마리네뜨에게 생일 축하를 해준다면 저도 축하받는 기분일 거예요.”

 

안타깝게도 레이디버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드리앙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나마 전보다 더 밝아 보이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위안이 됐다. 저도 모르게 하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아드리앙은 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리네뜨는 제 친구니까 물론 축하하려고 했지만, 당신이 정 그렇다면 알겠어요.”

“고마워요.”

 

레이디버그가 몸을 숙인 덕분에 다시 표정이 잘 보였다.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한 쪽 눈을 감았다 떴다. 아드리앙은 미소를 지었다.

 

 

* * *

 

“마리네뜨,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티키가 걱정스레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마리네뜨는 티키를 안심시키기 위해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요새 검은 나비 출현이 빈번해졌다. 레이디버그 정체만 알게 되면 귀걸이는 물론 미라클스톤 상자도 얻을 수 있으니 별 수 없나? 덕분에 레이디버그는 물론이고 마리네뜨까지 더 바쁘고 피곤해졌다. 마리네뜨는 가방에서 마카롱을 꺼내 티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티키가 마카롱을 오물오물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힘겨운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먹는 것마저 지친지 마카롱을 조금씩 베어물던 티키가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이미 거절했는 걸. 할머니도 알겠다고 하셨고. 여행 갈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그래도…….”

 

티키가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리네뜨는 미소를 지으며 티키의 볼을 쿡 찔렀다. 티키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마리네뜨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라 마리네뜨는 자신의 눈가를 훔쳐야 했다. 어쨌든, 이제 정말로 괜찮았다.

 

“내일도 검은 나비가 나타나겠지? 호크모스 부지런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의자에 앉은 채로 한 바퀴 돌며 마리네뜨가 말했다. 티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마리네뜨 생일 전야였고, 마리네뜨는 작년처럼 친구들이 자신의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동생들을 데리고 치과가 아니라 에펠탑 구경을 시켜달라는 부탁이었으나 큰 틀은 비슷했다. 마리네뜨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제안 하나만큼은 생일파티의 모든 과정이 어그러져도 변하지 않을테니까.

 

“마리네뜨.”

“걱정하지마, 티키. 나는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좋아.”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결국 할머니의 여행 약속을 거절하면서 마리네뜨는 앞으로도 자신이 이렇게 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어디로도 놀러 가지 못하겠지. 생일파티는 항상 엉망이 될 테고. 검은 나비가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난 파티 내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크모스를 신경쓰고 있을 거야. 평범한 소녀 마리네뜨는 이제 없었다.

작년 생일 검은 나비에 지배당한 할머니를 보며 마리네뜨가 탄식하듯 내뱉은 말을 티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바란 생일파티는 이런 게 아닌데.’ 티키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네 생일에 어떤 일이 있든 내가 네 생일을 축하해줄게.”

“고마워.”

 

마리네뜨가 손으로 티키를 감싸들었다. 따스했다. 티키와 시선이 마주친 마리네뜨가 그 온기만큼이나 따스하게 웃었다. 티키도 마리네뜨의 손에 앉은 채 마리네뜨를 향해 웃었다. 마리네뜨가 고개를 숙였다. 마리네뜨의 이마가 티키의 이마에 닿았다. 티키가 손을 뻗어 마리네뜨의 콧잔등을 어루어 만졌다. 마리네뜨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숨을 내쉬듯 말을 내뱉었다.

 

“이제 이런 거에 흔들리면 안 되는데.”

“왜?”

“난 레이디버그니까. 이제 평범하게 사는 건 포기해야지."


마리네뜨의 말이 얼음 물처럼 티키의 마음에 떨어졌다. 티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마리네뜨를 바라보았다. 티키는 서둘러 마리네뜨의 볼을 짚었다.

 

‘똑, 똑.’

 

그 순간 창문으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삼 층에 위치한 마리네뜨의 방을 창문으로 들어올 사람이라면 딱 한 명 밖에 없었다. 마리네뜨는 서둘러 티키에게 곁눈질을 했다. 티키가 그녀의 서랍 속으로 숨었다. 마리네뜨가 창문으로 다가가자 익숙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리네뜨는 창문의 걸쇠를 풀었다. 문이 열리자 블랙캣이 미끄러지듯 마리네뜨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후, 고마워요.”

“무슨 일이에요. 블랙캣?”

“내일이 마리네뜨 생일이니까 첫 번째로 축하해주고 싶어서요.”

 

아, 아직 너무 이르나? 사실 자정이 되자마자 오고 싶었는데, 그 때 자고 있을까봐요. 블랙캣이 너스레를 떨며 손을 내저었다. 그가 한쪽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을 때 드러났던 눈꺼풀 위를 검은색 가면이 매끄럽게 덮고 있었다. 마리네뜨의 시선이 가면 가장자리를 더듬다 다시 그의 눈동자를 향했다. 마리네뜨가 과장된 손짓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세상에! 어떻게 알았어요?”

"작년에도 축하해 줬잖아요! 아 참, 선물은 없는데. 괜찮아요?"


넉살좋게 말하던 블랙캣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가 서둘러 자신의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마리네뜨는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블랙캣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마리네뜨가 외쳤다.


"기억하고 축하해준 것만으로도 선물인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내일 다시 선물을 가지고 올게요.

"아니에요. 저는 블랙캣의 생일에 축하인사도 못했잖아요. 블랙캣은 생일이 언제예요?"

"글쎄요. 영웅들은 생일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블랙캣이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양 손을 든 채로 창문 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축하해주고 싶으면 당신이 정해줘도 돼요. 그럼 그걸 제 생일로 삼을게요."


블랙캣은 모르겠지만, 마리네뜨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아드리앙에게 이렇게 말할 걸! 그러나 곧이어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어떤 날짜를 말하든지 그건 블랙캣의 생일이 될 수 없었다. 진짜 생일은 딱 한 번 뿐이니까. 그래서 날짜를 말하는 대신 마리네뜨는 블랙캣 맞은 편 카우치에 앉았다. 그리고 무릎에 손을 올렸다.


"여러모로 평범하진 않네요."

"제가 좀 특별하긴 하죠."

"역시 영웅이 되려면 평범함은 포기해야 하나 봐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블랙캣이 그 말에 마리네뜨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네뜨는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생일에도 검은 나비 나타나면 가야 하는 거 싫죠."

"피곤하고, 성가시니까 아무래도 싫죠."

"게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파리를 떠날 수도 없구요."

"그 뿐이에요? 생일 파티도 완전 가시방석이죠."


오늘 레이디버그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며 블랙캣은 손을 내저었다. 마리네뜨가 자신의 입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잠깐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꽤 차갑게 식은 여름 밤 공기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가 입을 열었다.


"영웅이 된 거 후회해요?"

"왜요, 생일파티 때문에?"

"그것보다, 본인 생일이 더 이상 즐거운 날이 아니잖아요."


마리네뜨가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블랙캣은 그 순간 레이디버그를 떠올렸다. 마리네뜨의 표정이 오늘 보았던 레이디버그의 표정과 엇비슷했다. 블랙캣은 부드럽게 말했다.


"레이디버그 때문이군요."

"네?"


그의 말에 놀랐는지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와 이야기하는 사이였으니, 분명 레이디버그의 고민을 들었을 게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사려깊고 배려심많은 그녀답게 레이디버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했겠지. 레이디버그가 아드리앙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을 어쩌면 마리네뜨는 들었을지도 몰랐다. 블랙캣은 자신의 말이 돌아 돌아 레이디버그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리네뜨, 저는 영웅이 된 거 후회 안 해요. 영웅이 되면서 본 모습으로나 이 모습으로나 예전처럼 생일을 축하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생일은 생일이에요. 저에게 의미 있는 날이고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죠. 당신도 알잖아요, 마리네뜨. 작년 당신의 친구들이 얼마나 당신을 축하해주려고 노력했는지."

"……네."


마리네뜨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그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블랙캣은 말을 이었다.


"제가 영웅이 되면서 포기한 부분이 없진 않아요. 하지만 그게 평범함이고, 그 중 하나가 생일이라면, 그건 아니에요.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봐요. 오늘도 그래서 일찍부터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리네뜨에게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그늘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 레이디버그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소리 없이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와 친하죠?"

"그렇죠?"

"그러면 언젠가 레이디버그의 생일을 알 수도 있겠네요."


마리네뜨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살짝 질책하듯 물었다.


"본인은 생일이 없다면서, 대신 알아봐 달라는 거예요?"

"아뇨. 알려주지 않아도 돼요. 그저 당신이 만약 레이디버그의 생일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말하며 블랙캣은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린 마리네뜨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 대신 레이디버그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그 순간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한 차례 훅 불어왔다. 마리네뜨는 그녀의 피부에 바람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모두 차가웠는데도 블랙캣이 감싸고 있는 손만큼은 따뜻했다. 블랙캣의 금빛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헝클어졌다. 마리네뜨는 목이 메이는 걸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네."

"공주님 생일 축하는 내일 정식으로 선물 가져와서 또 해줄게요. 생일 축하해요, 마리네뜨."


그렇게 말하며 블랙캣이 마리네뜨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가 뗐다. 손등에 닿는 촉감이 뜨겁고 부드러워 마리네뜨는 살포시 웃었다.


"고마워요. 저도 꼭 전해줄게요."



* * *



"티키."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끄기 전, 마리네뜨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티키를 불렀다. 마리네뜨 바로 옆에서 이불에 몸을 거의 파묻고 있던 티키가 물었다.


"왜?"

"항상 고마워."


티키는 고개를 들어 마리네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이불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던 마리네뜨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티키는 그런 마리네뜨에게 다가가 뺨을 맞댔다.


"벌써 생일 축하를 두 번이나 받았네."

"그러게. 둘 다 블랙캣이 해준 축하지만."


티키의 말에 마리네뜨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티키는 가만히 이불 밑 작은 공간으로 전해지는 마리네뜨의 고동을 느꼈다. 일정한 박자로 부드럽게 심장이 뛰는 소리. 몸에 내려앉는 이불의 무게가 안정감있었다. 티키는 그대로 마리네뜨에게 물었다.


"내일 친구들이 준비해둔 생일 파티 기대 돼?"

"응. 다들 날 위해 준비해준 거니까."

"검은 나비가 나타나도?"

"검은 나비가 나타나도."


천장에 달린 유리 문으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티키는 규칙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마리네뜨의 호흡을 들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12시야."

"벌써 자정이구나."

"생일 축하해, 마리네뜨."

"작년 생일 축하도 네가 먼저 해줬는데, 이번 생일도 네가 제일 빨랐네."


마리네뜨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티키도 마리네뜨를 따라 웃었다. 바람이 간간히 지붕을 스치며 창문을 흔들었다. 그 때마다 별들도 함께 흔들렸다. 바람소리에 섞여서 풀벌레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기분좋게 떨리는 소리였다. 마리네뜨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티키, 나 졸려……."

"그래, 그래. 내일 파티도 있으니까 이제 잠에 들자."


티키가 마리네뜨의 뺨을 쓰다듬는 사이 마리네뜨가 호흡이 천천히 느릿해졌다. 감은 눈꺼풀 위로 은은하게 빛나는 별빛이 내려앉았다. 베개 위에서 밤하늘과 같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티키는 마리네뜨가 평화롭기를 바랐다. 이번 생일이 부디 마리네뜨에게 행복한 생일이 되기를, 호크모스가 오늘 만큼은 잠시 안식을 취하길. 스스로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받는 생일이 되기를.

티키는 마리네뜨가 온전히 잠에 들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도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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