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편의 영화를 보고 자유롭게 씁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영화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는 음악들이 있다. 장면의 감흥과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음악들. 영화를 떠올릴 때 도무지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고 음악이 듣고 싶어 영화를 또 보게 만드는 힘. 음악이 영화를 집어삼켰다고 하기에는 표현이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영화음악이라는 것은 특이하게도 혼자서는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을 다시 본 이유 역시 음악 때문이다. 전주가 흐르는 순간부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떤 장면과 감정으로 함께 빠져들어가게 해주는 OST들. 특히 이 영화의 주요 테마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ystery of love>은 언제 들어도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삽입곡들을 무지 좋아하지만, 간혹 어떤 음악은 부러 듣지 않기도 한다.  자주 듣고 멜로디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음악 자체의 힘이 영화와 섞이지 않은 채 더 커져버리는 순간이 아쉬워서인 것 같다. 

영화를 여러 번 볼 때면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거나 디테일한 구석을 다시 살펴보는 재미가 있을텐데 이번에는 '내가 처음 볼 때랑 똑같은 지점에서 똑같은 걸 느끼네?' 했던 게 오히려 재밌었다. 일단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내 이름으로 부른다는 그들의 핵심 행동에 대해 좀 모르겠다 싶다. (누구 저한테 사랑 좀 알려주실 분...) 뭘까. 그러니까 내가 내 애인한테 "영이야, 사랑해" 이런다는 건데. 내 입에서 내 이름과 사랑한다는 말이 동시에 나오는 순간 닭이 될 것 같다. 미안해. 난 내 정서상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

엘리오가 올리버 앞에서 투명하게 뚝딱일 때마다 공감성 수치를 느끼는 것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보는 내내 '제발 그러지마...' 민망한 마음에 속으로만 속삭여보지만 영화 속 엘리오는 자신의 사랑을 기침만큼이나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주변인의 눈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왜인지 엘리오의 마음에 대해 그들은 입 밖으로 명확히 언급하질 않는다. 그토록 뻔히 보이는 감정 앞에서도 역시나 사랑의 과정에 빠질 수 없는 건 당사자들 간의 삽질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던 중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치는 순간에도 두사람 사이에는 모호한 대화들이 맴돈다.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른다는 엘리오에게 올리버는 중요한 일이 어떤 거냐며 묻고, 엘리오는 당신은 알잖아. 그런다. 올리버는 그 말에 여유를 잃고 바짝 경계한 채로 "왜 이런 얘길 나한테 하는 거니?" 묻는데, 엘리오는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는 듯, 이제 막 알아차렸다는 듯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더듬는다.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 당신이 알았으면 해서." 맞다. 사랑은 들켜야 시작하는 거랬다. 



한번 수면 위로 올라와 불이 붙고나니 둘의 감정은 겉잡을 수 없이 명확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지칭하고 표현하는 말들은 몹시 모호하다. 엘리오는 또래 여자애와 섹스할 뻔 했다는 얘기를 아침 댓바람의 식탁 앞에서도 할 수 있고 며칠을 바람맞힌 그녀로부터 "나 네 여자친구 맞아?" 처럼 관계를 규정하는 단어도 쉽게 듣는다. 그러나 엘리오와 올리버의 감정을 뻔히 알고 있는 아버지조차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정 그 이상' 같은 애매한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아버지 자신 또한 지난날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으나 올리버와 엘리오처럼 드물고 특별한 관계로 이어지진 못했다는 고백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만큼 투명한 것도 없어서 둘의 마음을 엄마도 여자친구도 아버지도 이미 다 알아차린 것이 분명한데 매번 그 투명한 걸 불투명한 언어로 언급하곤 한다. 둘의 사랑이 명확해지는 순간은 오로지 둘 뿐일 때다. 스스로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누구보다 열심히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흐르는 음악은 <Mystery of love>다. 사랑의 미스테리. 그들의 미스테리.

영화의 마지막즈음 아버지가 엘리오에게 해주는 말들은 받아적고 싶을만큼 인상적이다. 그는 아들에게 지금 느끼는 것을 느끼라고 말한다. 지금 네게 있는 슬픔, 아픔, 그리고 네가 느꼈던 기쁨까지. 내내 울음을 꾹 참던 엘리오가 눈물을 터트리는 건 바로 그 대목이다. 네가 느꼈던 기쁨을 기억해. 잊지마. 누군가와 헤어져서 슬픈 거, 누군가가 떠나서 아픈 거 말고,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기쁜 순간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슬픔을 가져다준다는 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왔다. 엘리오는 엘리오의 이름으로 올리버를 부르고 올리버는 올리버의 이름으로 엘리오를 부르던 순간을 두사람 모두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버는 다른 이와의 결혼 소식을 전해온다. 강렬했던만큼 아픈 엘리오의 첫사랑이 떠나는 순간 카메라는 엘리오의 슬픈 얼굴을 조용히 비춘다. 엘리오는 기특하게도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지금 느끼는 걸 충실히 느낀다. 긴시간 그의 눈물젖은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은 어떤 순간을 떠올리고 있을까? 아마 기쁨일 것이다. 올리버가 통보한 이별의 언어 말고, 헤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봤던 서로의 얼굴 말고, 자신이 없을 그의 미래와 그가 없을 자신의 미래 말고. 엘리오가 눈물을 쏟아내는 순간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건 그와 나눈 명확한 기쁨일 거다. 기쁨은 누구보다 큰 슬픔으로 변해 돌아오니까. 그들 사이에 피어났던 감정은 무엇보다 명확했으니까. 사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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