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그래. 이런 식으로 날 바람맞히겠다 이거지. 연결음이 세 번도 채 울리기 전에 들려오는 안내음을 봤을 때, 내게 할 말이 있다던 개새는 현재 전화를 받을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한창 조교실에 있을 시간이라는 것도, 조교실에서 전화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최온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자식의 핸드폰에 내 부재중 전화가 하나 이상 남아있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카페에서 나온 후,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옛날부터 생각할 게 많을 때면 내가 찾던 돌파구는 언제나 걷기였다. 좀 멍청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어폰도 끼지 않은 채 사람들로 북적대는 거리를 걸으면 시끄럽던 속이 제법 빨리 가라앉으면서 생각 정리에도 도움이 잘 되거든. 



집이 있는 골목과는 반대 방향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난 어느새 시내 한복판까지 나와 있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져서 그런지 배꼽시계가 힘차게 울었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무슨 힘이 있어서 이 시간까지 걸어 다닌 거야. 폰을 꺼내서 자연스럽게 수영이의 번호를 찍으려다 멈칫했다. 오늘 박수영을 만나면 인형이와 있었던 일들을 전부다 불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그려져서. 불기만 하면 다행이게. 오늘, 내일, 그리고 주말 내내 잔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잊어버리고 혼술이나 하자.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동석할 인간을 부르겠어. 뭘 먹어야 하나 경건한 마음으로 메뉴를 선정하고 있던 중에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필수 BGM | 방탄소년단 - 이불킥
















뭐야, 김남준이 이 시간에 웬 전화지?



"어, 왜."

— 어디야?



"나 그냥, 밖에."

— 바빠?



"바쁜 건 아닌데 왜."

— 너무하네. 난 이유 없으면 전화도 못 하냐.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겁나게 의뭉스럽다고."

— 의뭉스러울 것도 많다. 그럼 지금 이유 하나 만들게. 나랑 놀래? 나랑 놀자. 



얘가 왜 이래···? 되게 심심한 것 같긴 하다만···. 김남준도 누구한테 차인 건가. 퇴근 후나 주말에 만나 둘이서 밥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간혹가다 한 번일 뿐. 게다가 열에 여섯은 타이밍 좋게 형성된 만남이었다. 김남준이 전화해서 지금처럼 즉흥적으로 '놀자-!'식의 통보를 해온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녀석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묵직한 손 하나가 난데없이 어깨 위로 턱, 올라올 때까지.



"오여주."

"뭐, 뭐야···!"



"지나가다 뒷모습이 너 같길래 확인차 전화한 건데 혹시나가 역시나더라고."

"시발. 간 떨어질 뻔했잖아. 너 이러다가 언제 한번 누구한테 엎어치기 당할 거라고 내가 누누이 경고했어, 안 했어."



근데 회식한다더니. 지금 한창 배에 기름칠하고 있을 시간에 얘는 왜 여기 있어? 



"회식은 어쩌고 여기 있는 거야?"

"아, 그거. 다음 주에 하기로 했어."



"왜?"

"팀원들이 너 있을 때 다 같이 하자고 그러길래."



흠···. 그럴 리가 없는데···. 좀 아까 사무실에서 회식 소리가 나오자마자 어깨춤을 추며 난타 공연을 펼치던 팀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로, 김남준의 말은 내게 1도 설득력이 없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모르냐고. 누구 한명 빠진다고 해서 회식을 미룰 인물들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알고 김남준도 알 텐데.



"진짜야?"



대답 없이 씩 웃는 김남준의 뺨에 보조개가 예쁘게 움푹 들어갔다. 난 늘 보조개 가진 애들을 부러워하곤 했었지. 근데 잠깐. 내가 잘못 본건가? 방금 교통경찰이 딱지 떼고 간 도로변의 저 차, 아무리 봐도 김남준 차 같은데.



"너 차는?"

"근처에 세워놨어."

"아, 그럼 저건 네 차 아니지?"



내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김남준은 곧 경악에 물든 얼굴로 턱을 떨어뜨렸다. 



"어! 방금 댔는데, 잠시만요-!"



쯔쯧. 안됐구나. 하지만 주차 딱지는 이미 붙어버렸는걸. 긴 다리로 휘적휘적 자신의 차를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참으로 김남준다워 웃음이 터졌다. 








.


.


.








"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액땜했다고 생각해."

"아······. 오여주 부르려고 잠깐 세웠는데. 진짜 잠깐."

"내가 알아줄게. 너 진짜 잠깐 세운 거. 욕봤다, 김남준."



픽, 가볍게 웃으며 등을 두어번 두드리자 금세 기운을 차린 김남준이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정면을 가리켰다. 



"좋아.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오여주가 쏘는 걸로."

"아니, 야. 누구 맘대로. 네 차 딱지 떼인 게 내 잘못이야?"



아아- 안 들린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서 앞으로 전진하는 김남준의 뒷모습은 수트 입은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








쾅-! 생각할수록 열 받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팔을 붙잡은 김남준이 "죄송합니다. 조용히 시킬게요,"라며 주변 테이블에 양해를 구했다. 



"죽어···!"

"누굴 자꾸 죽인대."



"누구긴 누구야. 최온유 그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개호로잡시바새끼지. 그러고 보니 너 이 자식, 지금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거야."

"허 참. 나 걔랑 같은 동아리 딱 한 학기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누구 편은 무슨."



"어허어, 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할까."

"네 편. 오여주 편. 됐냐."



건너편에 앉은 김남준의 반반한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자꾸 내 신경을 거슬렀다. 저게 사람을 앞에 두고 자꾸 픽픽 웃어대잖아. 그나저나 이놈의 술은 왜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을 맑게 해주는 거지? 나를 두고 한때 내 절친이었던 김인형과 붙어먹으며 뒤에서 오지게 호박씨를 깐 최온유. 옛날부터 내게 오지게 집착하다 결국 내 인생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김인형. 그 년놈들을 잠시나마 잊어보려고 들이부은 술이 아까울 정도였다. 에잇 짜증 나. 게다가 분명 방금 전까지 이 접시 가득 파닭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누가 다 먹은 거야. 존나 잘 먹는 김남준 저 녀석인가.



"입가에 묻은 파닭 소스나 좀 닦고 말해라. 네가 다 먹었잖아. 잘 먹는다, 진짜."



"어라, 김남준 너어···"

"···?"



"이젠 관심법도 써?"

"관심법이라기보단··· 네가 주절거리던 독백을 주워들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김남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파닭이나 한 접시 더 시켜야지. 번쩍 손을 드는 나를 보며 김남준은 환멸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더 시켜라, 시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쟤도 참 웃겨.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감자튀김만 깨작거릴 거면 호프집엔 대체 왜 온 거래? 나 혼자 마시니까 괜히 좀 미안하잖아. 



"친구야. 너도 좀 마셔. 나 혼자 마시니까 맘이 좀 안 좋아."

"참 일찍도 권한다."

"자, 언제 권하는지가 과연 중요할까? 언제가 됐든 결국 권했으면 된 거지."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과정이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결과뿐이라고! 연애든 뭐든 인생사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단 말이야! 술은 내가 다 마셨는데 어째서 김남준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킥킥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치만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목요일 저녁의 붐비는 호프집. 맛있는 안주와 시원한 맥주. 열이 오른 볼을 식혀주는 차가운 겨울바람.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아 꿀꿀했던 기분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좋았어. 술과 안주, 그리고 소중한 나의 미각만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다 마셔마셔마셔-! 콧노래와 함께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김남준이, 자자- 두 번 거절 말고 어여 한 잔 받아."

"됐다니까."



"얼랄라-? 왜 안 받아? 내가 주는 거."

"너 데려다줘야지."



"야, 됐어. 나 걸어가면 되니까 그냥 마셔."

"진짜 안 마셔. 술배 나와. 난 운동 안 하고 양껏 먹어도 살 안 찌는 누구랑 달라서 먹으면 바로 살로 가거든."



와하하하.

하하하.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서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잠깐, 운동 안 하고 양껏 먹는 누구라니··· 그거 설마 내 얘기? 별안간 험상궂게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대놓고 흠칫거리던 김남준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왜 또 그러는데. 좀 오랫동안 정색을 유지해보려고 했지만 얼빵하게 얼어있는 김남준의 얼굴이 너무 재미져셔 어쩔 수 없이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저 어벙한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서 사무실에 걸어놓으면 딱인데 말이야. 보기만 하면 빵빵 터지는 웃음 폭탄, 피로 회복제라니까. 내가 한참을 깔깔거리다 제풀에 지쳐 테이블 위로 엎어질 때까지 김남준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매 회식 때마다 팀원들의 기사 노릇을 자처하는 김남준 덕에 나도 꽤 여러 번 얻어탔던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 중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많이 걸었다고? 와, 역시 인간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니까. 조수석에 앉아서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려도, 아무리 시끄럽게 콧노래를 불러도, 김남준은 묵묵히 들어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파리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속으로 큭큭댔다. 박지민이 운전하는 차에서 이 난리를 피웠다면 그 남자는 분명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이렇게 말했겠지. '내 관심을 받기 위해 아주 안달을 하는군. 이래서야 원, 박지민이란 멋진 존재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걸.' 그러면서 밑도 끝도 없이 내 인내심을 시험했을 거야. 박지민 성대모사 대회 같은 거 없나? 제스쳐까지 끝장나게 잘 할 자신 있는데.



갑자기 조용해진 내가 이상했는지 김남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자마자 정확히 눈이 마주친 것이 어쩐지 뻘쭘해 별 생각 없이 질문을 하나 던졌다. 



"넌 연애 안 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냐."



"마음만 있으면 하고도 남지. 너 정도면 사람들이 알아서 모실 텐데."

"난 아무하고나 안 만나."



"얼씨구. 너도 연애 시작하기 전에 호구조사부터 끝내는 스타일이야?"

"또, 또, 막 던진다."



"그게 아님 누구랑 만나고 싶은데."

"좋아하는 사람."



"내년이면 우리도 서른인데,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썸 타고 연애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냐."

"와- 오여주 인성 봐라. 자기 연애 한 번 망했다고 서른인 사람들 싸그리 몰아서 악담하고 있네."



"악담은 무슨. 이게 현실적인 거지. 현실이 동화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만나서 연애하는 게 동화일 것까지야."



그 말과 함께 김남준의 얼굴에 떠오른 수줍은 미소가 더럽게 행복해 보였다. 딱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이 지을법한 미소라서 마음 한편이 아릿해져 왔다. 표정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좋을 때다.'



우리는 늘 서로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었던가. 적어도 난 그랬었다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지만 나를 보는 최온유의 눈빛이 어땠는지까지는 명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짜증 나네. 또 그 자식 생각하고 있잖아. 이럴 거면 술은 왜 마신 건데? 정신 차려. 오여주.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층 더 밝아진 목소리 톤으로 김남준을 놀리듯 물었다. 



"얘 좀 봐. 너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구나? 근데 왜 아직까지 고백도 안 하고 있어? 김남준이 짝사랑이라니, 진짜 안 어울린다. 아, 설마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미자는 아니지? 그럼 아무리 친구라도 응원 못 해준다."

"맞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짝사랑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게 어딨냐. 아, 미자는 절대 아니다."



그 와중에 주도면밀하게 질문 하나하나에 답하는 것 좀 보게. 언제 봐도 철저한 녀석이라니까. 



"고백은 왜 안 했냐면,"

"···."



"그 사람은 계속 만나는 사람이 있었어.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쯧. 그럼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거야?"



"글쎄. 고백해봐야 하나."

"아서라 아서. 임자 있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거 아냐.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새로 좋아할 다른 사람을 찾아봐."



"지금은 혼자인 것 같던데."

"아- 그래? 야, 그럼 뭘 망설여. 이 세상에 널 거절할 여자가 어딨다고. 피지컬 훌륭한 데다가 얼굴 훈훈하지, 학벌 좋지, 집안 번듯하지, 게다가 스물아홉에 팀장이야. 끝난 거지. 더 늦기 전에 고백해라. 웬만하면 올해 가기 전에. 감이 좋아. 나 촉 좋잖아."



"그런가. 안 그래도 요즘, 나름 노력하고 있긴 한데."

"어? 남준아. 나 여기 내려줘. 어차피 일방통행이라 이쪽에서 못 들어가."



"돌아서 가면 되지. 문 열지 말아 봐."

"됐네요. 여기서 내리면 바로 코앞인데 뭐."



긴 실랑이 끝에 김남준은 결국 골목 어귀에다 차를 세웠다. 김남준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고맙다, 고백 화이팅!"하고 응원의 말을 건넨 후 조수석에서 내렸다.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 그제야 등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 뭘 하다가 지금 출발하는 거래. 쟤도 가만 보면 은근히 행동이 굼뜬 것 같단 말이야.



오랜만에 마시는 서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다. 바로 집에 들어가지 말고 이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까. 손이 좀 시리긴 하지만 운동하다 보면 어떻게 좀 괜찮아질 것 같긴 한데. 빌라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 들어가서 씻고 자면 참 편할 거야. 그렇지만 오늘 기름진 걸 너무 많이 먹었단 말이지. 


나를 짓누르는 양심의 가책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필시 김남준 때문이다. 나를 '운동도 안 하면서 양껏 먹는' 인간으로 정의하다니. 밟으면 밟을수록 꿈틀대는 성질머리를 가진 탓에 이런 말을 들으면 발끈해서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진다고. 좋아. 오늘부터 매일 밤 달밤의 체조를 해 보는 거야. 
















필수 BGM | 조이 - 말도안돼
















부우웅-



홀로 결연한 다짐을 이어나가던 중, 옆에서 갑작스레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많이 지나다니는 골목이 아닌데 이 시간에 의외네. 내가 돌아봤을 때 차는 이미 저만치에서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골목길 제한속도도 모르는 건가. 왜 저렇게 빨리 달려. 저런 인간들은 벌금 한번 거하게 물어봐야 정신 차리지, 쯧쯧.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차고 있는데 등 뒤에서 웬 생뚱맞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 신데 다 자란 성인이 술 냄새를 풍기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저게 말이야 방구야. 다 자란 성인이니까 이 시간에 돌아다니지. 바보 아냐? 내 성격에 이미 뱉고도 남았을 말이었지만 상대는 박지민이었다. 그가 나타날 때면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난 여전히 파리에서의 (굽실거리던) 생활에 대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고.



"··· 박지민 씨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니 그것보다, 나 여기 사는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뭐, 뭐예요···. 스토커도 아니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박지민이 픽, 웃으며 내게 한발 한발 다가왔다. 빌라 앞,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내 주위로 동그랗게 그려놓은 경계선. 그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온 박지민은 곧 제 정장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딘가 익숙한 비주얼의 꾸깃꾸깃한··· 저게 뭐야.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박지민의 입이 열렸다. 



"내겐 너무 완벽한 박지민 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과의 한 달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파리에 올 일이 생길 때마다 아마 박지민 씨 생각이 계속 날 것 같아요. 혹시 한국에 걸음 하시게 된다면 제 보잘것없는 집이라도 내어드리고 싶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담아, 당신의 영원한 심복 오여주 드림."



쬐금 남아있던 술기운을 완벽하게 떨쳐낼 수 정도로 박지민의 낭독은 정말 형편없었다. 저 샛노란 포스트잇, 내가 두고 온 거 아니지? 크기와 색깔이 내 기억 속의 그것과 일치하긴 하지만 아무리 아침에 비몽사몽으로 썼다 해도 내 손으로 저런 구린 멘트를 적어놨을 리가 없다. 웬 고리짝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멘트냐고. 대차게 고개를 흔드는 나를 본 박지민은 능청스럽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이거. 네가 쓴 거 아닌가?"



이 남자가 어디서 문서 조작을 하려고. 종이를 낚아채려 손을 쭉 뻗었으나 박지민이 순순히 내게 빼앗겨줄 리가 없다. 난데없이 포스트잇을 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통에 난 중심을 잃고서 그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이것만큼은 흑심 하나 없는 '사고'였을 뿐이다. 새빨개진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서 들자마자 보이는 박지민의 살짝 휘어진 눈꼬리. 내 심정은 옆에 있는 하수구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딱 그런 마음이었다. 그는 다 안다는 듯 퍽이나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정수리를 툭툭 두드렸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중심이 잡히자마자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담벼락에 등이 바짝 붙었다. 통통한 입술 새로 무슨 말이 나올까 근심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기다렸으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예상 범주를 훌쩍 벗어나 있었다.



"오늘 일. 이 내가 특별히 눈감아주지."

"네?"

"대신,"



젠장. 그럼 그렇지. 저 남자가 순순히 뭔가를 눈감아줄 리가 없지.



"며칠간 오여주 집을 좀 빌려야겠어."

"아니, 제 집을 왜요?!"



어림도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지만 곧 커다랗게 눈을 치켜뜨며 좌우로 목을 꺾어대는 박지민의 기세에 눌려 나도 몰래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니까 제 말은, 돈도 많고, 집도 있고, 주거시설 딸린 식당까지 있으신 분이 왜 굳이 제 집을 빌리려고 하시는 거냐고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 제가 뭘요."



박지민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꾸깃꾸깃 자국이 난 문제의 포스트잇이 그의 집게손가락 사이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지만 뒤가 교묘히 가려진 탓에 난 내용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환장하겠네. 그러니까 내가! 언제! 내 집을 내준다는 내용을 썼냐고 이 사기꾼 망망구야! 기껏 적어봤자 한국 들어오면 연락 한번 하자는 내용이었을 텐데.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다는 표정으로 뒷목을 잡자 박지민은 눈꼬리를 길게 늘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사람을 완전히 홀리는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담벼락에 더 빈틈없이 붙었다. 



"내 손에 증거물이 떡하니 있는데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지금 누가 뻔뻔한 짓을 하고 있는데. 난 애초에 그런 걸 쓴 기억이 없다니까요? 뭐라고 썼는지 보게 좀 내놔봐요-! 필적감정이라도 해볼 테니까!"



헙. 방금 내 목소리 꽤 크지 않았나. 조용한 골목길에 내 목소리가 웅웅 메아리치는 것 같아 잠시 숨을 죽이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때, 좀 떨어진 건물에서 굵직한 고함이 들려왔다. "씨발. 지금 몇 신 줄 알아! 시끄러우니까 집에 처 들어가서 얘기해, 이 X 같은 XX!" 자신의 목소리가 나보다 적어도 2배, 아니 4배는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긴 한 걸까. 


아니, 근데 왜 욕하고 지랄이지. 아저씨 나 알아? 열 받네. 내가 박수영이랑 고1 때부터 짱친 먹으면서 찰지게 욕하는 법 하나는 제대로 보고 배웠거든. 사실 맨정신일 때 욕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의 힘은 늘 내게 새로운 용기를 주니까. 



"네가 훨씬 더 시끄러워, 이 인성 쓰레기 새끼야-!"

"뭐야?! 이 XX를 XXX 할-"



잔뜩 열이 올라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치던 남자가 요란법석을 떨며 창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자연스럽게 내 손을 움켜쥔 박지민이 빌라 담장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 창문을 연 남자는 텅 빈 골목과 홀로 서 있는 가로등 정도밖에 볼 수 없겠지. 담벼락 안쪽에 몸을 숨기면서 졸지에 박지민의 두 팔 사이에 갇혀있게 되자 이젠 그의 뇌쇄적인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높은 벽으로 가려져 있어 담 너머에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한올도 볼 수 없을 텐데, 어째서일까. 박지민은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도 내게서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자세로 있어서 그런가. 아니. 이 남자와 함께 있을 때면 늘, 발끝부터 시작된 간질거림이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불편하지만 기분 좋은, 나른한 긴장감이 심박 수를 높이고 그윽하게 응시하는 짙은 눈빛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나를 사로잡는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가 된 걸까. 레브에서 이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된 순간부터? 아니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 이후인가? 이성마저 앗아가 버릴 듯한 분위기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것 같았다.



레브에 갈 일이 없으면 박지민을 만날 일도 없을 거란 믿음으로 여태껏 미팅에 참석하지 않겠다며 김남준에게 별 지랄을 다 떨었는데 이젠 직접 찾아오는 서비스라니. 인생살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알면 알수록 골 때리는 여자야. 층간 소음 때문에 칼부림까지 나는 세상에 굳이 유혈사태를 만들어야겠어?"



층간 소음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을 박지민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난 실소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나른한 음성이 고막을 자극했다. 털이 곤두설 정도로 지독한 울림에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될 정도였다. 가까스로 몸을 비틀며 박지민에게서 빠져나와 그의 손목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식이라 좁아터진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잡고 있던 박지민의 손목을 미련 없이 놓고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갈 곳 없다는 말은 여전히 못 믿겠지만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해 줄게요. 그치만 오늘만이에요."

"그건 어디까지나 오여주의 양심에 맡기지.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난 정말 갈 곳이 없어서 온 거야."



피식. 입술 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이 인간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지금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 삐까뻔쩍한 궁전 같은 집, 한국에도 분명 가지고 있을 거 아녜요."

"당연하지. 그런데도 거길 안 가고 오여주한테 왔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감시당하고 있다고."



"감시? 누구한테요?"

"대답해야 하나?"



쳇.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도 않았어. 오여주하면 눈치. 눈치 하면 오여주. 사실 대충 감은 잡고 있었다. 파리에 있을 때 그의 저택으로 찾아온 세련된 인상의 여자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정혼자라고 했었던가. 애초에 이 남자가 파리에 간 목적이 뭐야.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잖아. (사실 지민은 그 질문에 답을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거 들키면 그대로 끌려가서 억지로 결혼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지. 


돌아가는 상황이 박지민에게는 꽤나 성가신 모양이지만 옆에서 구경하는 내겐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지루한 일상에서 발견한 흔치 않은 흥미진진함에 호기심이 고조되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 속에서 재미를 찾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몰래 이런 생각 하는 건 괜찮잖아? 주말 연속극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가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걸.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이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내색 하진 않았다. 



"됐어요. 그럼 레스토랑은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 딱이겠던데."

"마찬가지야. 정말 한입으로 두말하는 여자네. 한국 오면 홈스테이 시켜준다는 말 먼저 꺼냈던 건 오여주 너야, 기억해?"

"아니, 그거야······."



'언제 밥 한번 먹자' 같은 인사치레로 한 거였는데. 손가락 한번 튕기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 박지민이 내게 이런 부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감히 이 몸을 상대로 인사치레를 한 건 아니겠지?"



따다다단-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1악장의 노크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말도 안 되게 극적인 표정으로 저리 거창한 대사를 치니 장난스레 웃어넘기기도 힘들었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냥?"



"박지민 씨한테는 좀 좁아터진 공간일 것 같아서."

"아. 그게 걱정이었다면 문제없어. 내 인격은 일반 사람들과 달라서 허용범위도 매우 광대하다고 볼 수 있지. 나처럼 인격까지 완벽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믿기 힘들겠지만."



암요, 왜 아니겠어요.



계단식 빌라의 층계를 오르는 내내 앞서가는 박지민을 관찰했다. 크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마치 역사박물관을 구경하듯 건물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는 박지민이 아주 조금, 귀여워 보였다. 언제나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세상의 이치란 이치는 모두 통달한 사람인 양 건방진 자세로 일관하는 그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가끔가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전부 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데려온 시계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와 갸름한 옆선을 흘끔거리다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저 얼굴이 서른이라고? 아무리 많이 봐도 이십 대 초중반인데. 내 또래들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잖아.



"후···. 오여주. 그만 좀 흘끗대지 그래. 그렇게 쳐다보면 내 얼굴은 정말 닳아."

"제가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네요. 자, 다 왔어요. 여기예요."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다고? 의외의 대답에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박지민이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새벽같이 나가서 직접 장 보러 다니는 것도 그렇고,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은 발도 안 들일 것 같은 사람이 군말 없이 6층까지 따라 올라온 것도 그렇고. 좀··· 의외라서."



"그런 게 신기했어? 별게 다 의외로군. 하긴. 내게 푹 빠진 오여주가 박지민이란 존재의 이모저모에 매 순간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출처를 알 수 없는 허세로 가득한 멘트에 인상을 구기기도 전, 나와 시선을 맞추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박지민으로 인해 심장이 쿵 떨어졌다. 뭐야, 갑자기 들이대고. 어이없어 진짜. 다급하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한껏 들이마셨던 숨을 작게 내뱉었다. 박지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게을리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운동이라서 말이야. 계단 오르기 같은 스케줄 외의 운동도 딱히 피할 생각 없어. 누구누구랑은 다르게."



아- 그러시구나. 근데 잠시. '누구누구랑은 다르게'라니? 그 누구가 누구야. 아까 김남준도 그러더니. 이 인간들은 남이 운동을 하건 말건 왜 이렇게 나서서 고나리질이야? 오늘따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위해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상태로 박지민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나도 운동 엄-청, 완-전 많이 하거든요?"

"거짓말."

"허. 박지민 씨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나도 규칙적으로, 매일매일, 한다고요! 운동!"



콕. 콕.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 양심이 찔리는 소리. 팔짱을 낀 채 피식거리던 박지민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다시 한번 나와 눈을 맞췄다. 



"글쎄, 아닌 것 같던데. 몸에 근육 하나 없으면서 그런 말 하면 양심에 안 찔리나?"

"내 몸에 근육이 얼마나 많은지 박지민씨가 봤어요? 봤냐고!"



말을 뱉자마자 아차, 했다. 이젠 내 무덤을 내가 파는구나. 쉣. 쉣. 쉣. 봤다고 하면 어쩔 거야. 머릿속에서는 오여주 주연의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상이 다시금 재생되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시야에서 치우며 거칠게 현관문을 열었다. 뒤에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 젖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온 박지민이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바보네. 보기만 했으면 내가 알겠어?"



능청스럽기로 따지면 구백 년 묵은 구미호와도 견줄 수 있을듯한 이 마성의 남자를 내 집에 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하는 와중에도 난 또다시 내 결정에 대한 의심을 키우고 있었다.
















18



집의 청소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일요일에 본가에서 돌아온 후 큰맘 먹고 집을 뒤집어가며 청소한 보람이 있었다. 여전히 만족스러울 만큼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다. 대청소 전, 혼돈 그 자체라 할 수 있던 집에 박지민을 데려왔다면 분명 사랑과 전쟁 시어머니급의 잔소리를 들었겠지. 박지민도 청결함이 물씬 풍기는 집의 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거실을 둘러본 그가 "오여주," 하고 나를 불렀다. 뿌듯함을 감추며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왜요."

"··· 누가 널 이 창고에 감금한 거야?"



근데 저 마가린에 간장 넣고 비벼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가. 순간 발끈해서 그에게 소리쳤다.



"창고라니! 이 정도면 혼자 살기에 딱 괜찮은 빌라거든요?!"

"후···. 저건 또 뭐야."



박지민은 내 말을 죽어도 인정 못하겠다는 얼굴로 거실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커다란 비닐 백을 가리켰다. 이번 주 안에 처리하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최온유의 흔적은 여전히 내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그건··· 그냥 쓰레기예요."

"쓰레기를 왜 집안에 둬. 그때그때 갖다 버리지 않고."



"아······."

"···."



"그게······."

"···?"



"임자가 있는 거라서."

"아, 임자 있는 쓰레기였나.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박지민은 티비 맞은편에 위치한 천으로 된 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파 끝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왜. 뭐, 세균이라도 있을까 봐서? 



"잘 때 덮을 거 갖다줄 테니까 박지민 씨는 씻고 여기서 자면 돼요."

"뭐···?"



놀라는 리액션이 과하다.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박지민에게 절대 협상은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



"설마 집주인을 내쫓고 하나뿐인 침대를 차지할 생각은 아니죠?"

"침대가 하나뿐이야? 어째서."



"어째서라니···. 잘 모르셨나 본데 여기 저 혼자 사는 집이거든요?"

"게스트룸도 없어?"



있겠냐 인간아. 양손을 허리에 짚고서 단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충격에 물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박지민이 우아하게 든 손등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폼만 보만 비련의 남주인공이 따로 없어, 아주.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난 침대 아니면 못 자. 내 인생을 통틀어 이런 곳에서 눈을 붙인 적은 없다고."

"그럼 박지민 씨는 오늘 큰 도전을 하시겠네요. 너무 걱정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좋아. 내가 한발 양보하지. 너도 함께 쓰게 해 줄게."

"뭐를···?"



"너도 나와 한 침대에서 자도록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딜이 어디···.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박지민 씨는 여기 거실 소파에서. 나는 내방 침대에서 자는 거라고요. 잘 자요."



논쟁의 여지는 티끌만큼도 남겨두지 않겠다, 불타는 의지를 보이며 쌩-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되었던 하루의 끝. 씻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나는 오늘만 사는 인간이 아니기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문 앞의 욕실로 향했다. 


완벽하게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운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침대에서 못 잔다 어쩐다 하더니 박지민은 벌써 불 끄고 잠들었나 보네.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곳에서만 생활하던 박지민이 이런 열악한(?) 장소에서도 꽤 잘 버티는 것이 기특했다. 거실에 잠들어 있을 박지민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 근데 내가 이불을 가져다줬던가? 내 정신 좀 봐. 곧장 옷장 안쪽에 들어있는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 얇은 감이 있긴 하지만 보일러를 조금 올리면 괜찮겠지.  



거실로 나와 불도 켜지 않고 그가 자고 있는 소파로 향했다. 베란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몸의 윤곽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자는 거야. 그냥 침대에서 자라고 할 걸 그랬나.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박지민은 여전히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왜인지 마음이 짠해져서 웅크리고 있는 몸을 반듯이 펴준 후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평소에는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춰두는 보일러를 3도 정도 높게 설정하고 나서야 길었던 하루를 마치고 기절하듯 잠에 빠질 수 있었다.
















필수 BGM | 10cm - 매트리스 (반복 NO)
















삐리리리- 삐리리리- 



시끄럽게 고막을 찔러오는 알람 소리에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머리맡 어딘가에 있을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 내 손에 찰싹 달라붙는 부드러운 맨살의 감촉. 뭐, 뭐야······.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의를 탈의한 채 내 앞에 누워있는 박지민이었다. 이게 뭐지 시발.



내 위아래 착장은 다행히도 어젯밤 침대에 들어갈 때와 달라진 바 없었으나 박지민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헐겁게 끌어안고 있다던가 내 한쪽 다리가 그의 다리와 얽혀 있는 상황은 당황스러움을 뛰어넘어 충격이었다. 이 남자는 대체 언제 침대에 기어들어 온 거야. 맨살이라도 꼬집어서 깨우고 싶었지만 새근새근 아기천사처럼 자는 뽀얀 얼굴을 보니 막대한 죄책감이 밀려와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나부터 이 난잡한 침대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다리부터 풀어야겠지. 그의 허벅지를 감고 있는 다리를 최대한 조심스레 들어 밖으로 빼내려는데 이제껏 자는 줄 알았던 박지민의 손이 슬쩍 올라와 내 허벅지 뒤쪽에 안착한다. 미친.



고개를 드니 어느새 눈을 뜬 박지민이 노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나머지 뒤구르기를 하며 바닥으로 내려오다 화장대 다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이건 다 박지민 때문이야. 방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붙잡고 낑낑대니까 박지민이 침대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걱정스러운 얼굴이긴 한데 어딘가 좀··· 왜 저렇게 즐거워 보이지? 



"괜찮아? 쯧. 그러니까 아침부터 왜 장난을 쳐."



장난? 넌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눈꼬리에 대롱대롱 달린 이 눈물방울이 안 보이냐고! 저주할 거야, 박지민. 당신도 내일 아침에 새끼발가락을 찧게 될 거야. 분명히.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치고 침대에 모로 누워 흥미롭게 나를 관찰하는 그에게 투덜거렸다.



"장난 같은 소리 하네. 뭐예요 진짜. 누구 맘대로 들어오냐고요!"

"알잖아."



"···?"

"나 혼자서 못 자는 거."



아 참, 그랬었지······ 가 아니고, 애도 아닌데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줘야 하냐! 한바탕 소리를 지르려고 하던 차에 박지민이 꽤 오랜만에 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여는데, 그 모습은 흡사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불면증이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심지어 수명까지 단축할 수 있다는 말, 못 들어봤어?"



아니,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오여주의 따분하고 평범한 일상에 또 다른 거대 위기가 찾아왔다. 박지민의 거처에 대해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양심적으로 딱 하나 뿐인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마음 같아선 꼬장꼬장하게 잔소리를 퍼붓고 이 자리에서 작별하고 싶지만 이제까지 도움 받은 게 있는데 갈 곳 없다는 인간을 입 싹 닦고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도무지 결론을 낼 수 없었기에 일단 상황을 대충이나마 정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 출근해야 되거든요. 부엌에 시리얼 있으니까 그쪽도 먹고 나가요."

"간단히 오믈렛 해줄게. 먹을 시간 있으면 먹고 가."



"옛···?"

"왜."



"우리 집에 계란 없는데."

"어떻게 집에 계란 하나가 없어?"



"아하핫."



내가 지난주에 장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재빨리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휴···. 얼굴 달아올라서 혼났네. 저 남자는 쓸데없이 웃통을 벗고 있어서 눈을 둘 곳이 없게 만드냐 이 말이야.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걱정으로 내 안에 짱짱한 내성이 생긴 것 같았다. 마음이 마침내 평형상태를 찾은 건가. 여기서 걱정거리가 한두 개 정도 늘어난다 해도 내 일상에 이제까지처럼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라 더 떨어질 곳은 없을 것 같거든. 무슨 일이 또 일어난다고 해도 이제까지 내가 겪은 것에 비할 바겠어? 


그리고 난 언제나처럼 오여주답게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박지민을 도와주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야. 신세를 입었으면 갚는 게 사람 된 도리잖아? 난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라고 교육받은 적은 없다고.



씻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집안은 구수한 된장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자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꽤 친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된장찌개에, 멸치볶음, 알감자조림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냉장고를 부탁해를 찍은 건지, 테이블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은 냄새부터 비주얼까지 훌륭했다. 군침 도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테이블 앞에 앉아 밥공기를 가져다주는 박지민에게 물었다. 



"재료가 있었어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박지민은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여기 네 집이거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내 몫으로 떠진 새하얀 쌀밥을 크게 한술 뜨려다 식탁 건너편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져 수저를 내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쪽은 왜 같이 안 먹어요?"

"이제 나를 향한 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건가? 색다르긴 하군."



"이보세요, 박지민 씨."

"난 Rêve에서 먹으면 되니까 내 걱정은 접어둬."



"아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레브까지 태워드려요?"

"이 비서가 곧 도착할 거야. 함께 Rêve로 가지."



왓. 내가 왜.



"저는 왜요? 전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연락을 못 받은 건가? 오늘 미팅 잡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김남준이 그런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눈막 귀막하고 내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으니 기억이 날래야 날 수가 없지. 



"그래도 박지민 씨 차 타고 나란히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요."

"누가 할 소릴. 근처에 세워줄 테니 넌 거기서 걸어와."



"됐어요. 그냥 내 차 타고 갈 거예요."

"우리 주차장은 직원이랑 손님 전용이라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어. 레스토랑 주변에 차 댈 곳도 마땅치 않을 테니 고집부리지 말고 나랑 가."



쳇. 주차장이 축구 경기 뛰어도 될 정도로 넓더만 괜히 없는 말 지어내기는. 미팅이 오늘로 잡혔으면 김남준도 레스토랑으로 갈 테니까 가는 길에 나 좀 태워 가라고 해야겠다. 아무래도 박지민 차를 타고 가는 건 좀······.



"어젯밤에도 이 비서님이 여기까지 태워준 거예요?"

"어."



"이 비서님은 파리에서도 서울에서도 고생하시네." 

"내 비서로 일한다는 것에 대해 늘 긍지를 가지고 있지. 이제 그만 말하고 밥 좀 먹어."



여전히 보글거리는 뚝배기 속 된장찌개를 한술 떠서 하얀 쌀밥과 함께 넘겼다. 이··· 이건···!



미(美) 미(味).



와···. 이 남자는 못하는 요리가 없나 봐. 조미료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 없는 재료를 가지고 이런 맛을 낸다고? 그 짧은 시간에? 양식이면 양식, 한식이면 한식. 나 또한 요리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는 클래스가 달랐다. 사실 당연한 거지. 요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니까. 온기가 남아있는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멸치볶음과 고슬고슬 익어 간이 잘 밴 알감자조림은 행복 그 자체로, 그 효능은 피로 회복제 저리가라였다. 


난 의식주 중 '식'이 차지하는 행복의 지분이 가장 크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 더 정신을 차릴 수 없는지도 몰랐다. 박지민의 음식은 퍽퍽한 밤고구마 같은 내 인생에 그야말로 사이다처럼 등장한 구세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침부터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상을 치우다 박지민 님께 공손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겠지만 요리 진짜 잘 하시네요. 전 양식도 좋지만 역시 한식 파인가 봐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픽 웃으며 머리를 정돈하던 박지민이 팔짱을 낀 채로 개수대 옆에 몸을 기대며 대꾸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나가는 길에 저것 좀 들고 나가지 그래."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은 최온유의 물건들이 가득 담긴 비닐 백이었다. 그럼요. 그렇게 합죠. 고무장갑을 벗어서 설거지통 옆에 걸어두고 거실 구석으로 걸어가 투명한 비닐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거 버리고 나 먼저 가요?"

"장난해? 밑에서 기다려."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요."



일회용 칫솔과 —그 와중에 자기는 극세사 모로 된 칫솔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박지민에게 열 내지 않기 위해 참을 인자를 다섯 번은 새겨야 했다— 세면도구들이 어디 있는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고 뒤를 도는데 그가 나를 한 번 더 불러세웠다. 



"현관문은 어떻게 잠그는데."



"뭐래. 그냥 닫으면 잠기는 거예요. 그것도 몰라요? 완전 옛날 사람이네."

"이런 데는 다 수동으로 잠가야 하는 줄 알았지."



순진함을 방패막이 삼는 저 툼툼한 악마의 부리. 콰직. 어디선가 내 화병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날 타일렀다. 릴랙스. 릴랙스. 오늘만큼은 저 인간한테 화내지 말자고. 그냥 웃으면서 조용히 나가자. 입술에 경련이 날 정도로 기계적인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며 현관문을 열었다. 박지민이 그건 또 무슨 표정이냐는 듯 뭐 씹은 얼굴로 날 바라보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 소리가 나게 현관문을 닫았다. 그것 봐. 잘 참을 수 있잖아. 아주 대견하다 오여주. 



"여주야."



혼자서 키득거리고 있는 중에 난데없이 들려오는 차분한 음성은 익숙하다 못해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뒤돌자마자 보이는 최온유의 얼굴에 입가의 미소가 순식간에 흔적을 감췄다. 아침 댓바람부터 왜 찾아온 거지. 어젠 만나자 해놓고서 전화도 씹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최온유의 낯짝을 보면 따귀부터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의 온화한 미소와 마주하니 판단력이 흐려졌다. 내 몸 어딘가에 자리한 눈물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코끝이 찡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다.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최온유는 지금쯤 내 기분을 완벽히 파악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이거 가지러 온 거야?"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비닐 가방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제 손에 들어온 가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최온유를 지나쳐 계단으로 향하는데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오전에 시험감독관 들어가는 거 취소돼서. 랩 가기 전에 들렀어."

"마침 잘됐네. 버리러 내려가는 중이었거든. 가지고 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최온유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를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와 계속 한 공간에 있다가는 내가 지난밤 머릿속에 수백 수천 번 그렸던 치열한 복수극이 아닌,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애절한 신파극을 찍게 될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체 없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내내 쭈뼛거리던 그가 조심스레 내 손을 붙잡았다. 계속해서 내 눈을 피하던 최온유가 오늘 아침 처음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며 차분한 음성을 내보냈다. 



"나한테 30분, 아니, 20분만 줘. 잠깐 얘기 좀 하자."



그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최온유의 등 뒤에서 끼릭,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그와 나의 시선이 문을 열고 나온 인물에게로 향했다. 살짝 헝클어진 백금발과 군데군데 주름이 간 하얀 와이셔츠가 숨 막히게 잘 어울리는. 한쪽 어깨에 정장 재킷을 걸친 채 삐딱하게 서 있는 박지민에게로. 아주 잠시 동안, 박지민의 서늘한 시선이 최온유가 잡고 있는 내 손위에 머무는 듯했다. 비소인지 조소인지 모를 웃음과 함께 열린 입술 사이로 나른하지만 날 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가뜩이나 협소한 공간에 쓸데없이 머릿수가 이렇게 많아."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와 박지민을 번갈아 보던 최온유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당신 누구야. 왜 거기서······."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박지민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리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박지민의 냉랭한 시선이 최온유의 얼굴에 고정되었을 때, 그 눈동자에 묻어있는 서늘함은 옆에서 보고 있는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시선만 최온유에게 고정했을 뿐, 그가 말을 건네는 상대는 바로 나였다.



"우리 애기, 오래 기다렸어?"



아이고 머리야. 이런 상황에서도 상황극을 펼쳐대는 박지민으로 인해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었다. 파리에서 했던 그 재미도 감동도 없는 상황극의 연장선인 건가. 뭐가 됐든, 오늘 하루도 호락호락하게 보내기는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노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