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W: 성폭력 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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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안 주머니에 들어있던 약통 뚜껑을 열고 약을 하나 꺼내었다. 하늘에 매달린 별 몇 개가 광공해 속에서도 뿌옇게 반짝이고 있었다. 혓바닥 위에 올린 알약은 타액과 함께 가벼운 저항감을 남기며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제헌은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통 안을 들여다본 뒤 다시 안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진통제 약효가 돌면 좀 괜찮아질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괜찮아질 거였다. 제헌은 다리를 달달 떨다가 알약을 하나 더 꺼내 억지로 꿀꺽 삼켰다. 약은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지금까진 정말 잘 참아왔는데. 왜 그랬을까? 조금만 더 참으면 됐는데, 멍청하긴.

분수대엔 물이 흐르지 않았다. 야간이라 시간에 따라 꺼둔 건지 아니면 원래 가동을 안 하는 건지 혹은 수리 등을 이유로 임시로 중지를 해둔 건지 제헌이 알 턱이 없었다. 제헌은 덩그러니 앉아서 그냥 그쪽 어드멘가에 시선을 대충 던져두고 있을 뿐이었다. 공원 안이라는 것뿐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 낯선 장소에 갈 곳도 없이 혼자 있는 동양인이라니. 낮이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 시간에는 더욱 어디 갈 곳도 없었다. 제헌의 자신의 처지를 조소하며 겉옷 안으로 스미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바지까진 껴입고 나왔는데 셔츠가 눈에 안 띄어서 위에는 그냥 트렌치 하나만 걸치고 나왔기에 새벽의 추위엔 취약했다. 변태성욕자 같은 차림으로 싸늘한 벤치에 체온을 뺏겨 미지근하게 만드는 건 사람의 자신감을 북돋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제헌은 벤치 등받이에 몸을 아무렇게나 맡긴 채 아무것도 없는 공원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대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억들이 두서없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엉덩이가 축축한 건지 차가운 건지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구질구질하고 답이 없었다. 

싸늘한 새벽 공기를 뚫고 누군가가 급할 것 없는 걸음으로 걸어와 제헌의 옆자리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제헌은 그가 멀리 있을 때 한 번 흘끔 보고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만 보았다. 제헌이 발견할 일은 없었지만 그가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주위에 사람이 깔렸을 거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생각은 좀 정리가 되었나요?" 

스노우는 품이 넓은 검은 외투에 밝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필이면 저 외투라니. 정리는커녕 스노우 탓에 아까랑은 조금 다른 혼선이 끼어들었다. 살색이 질펀히 뒤섞인 기억들이 멋대로 고개를 내미는 머릿속은 비포장도로처럼 돌부리를 정신의 발가락에 계속 놓아두었다. 10년 산 집처럼 정리는 요원했다. 그래서 제헌은 가장 뾰족하게 돋아난 생각을 먼저 입에 올렸다. 

"혹시 그때 알았던 거냐? 나랑…… 다시 본 뒤로 그런 종류의 점잖지 않은 파티 같은 건 안 했잖아. 그것 때문에 한 거야?" 

스노우가 자신의 외투를 잠시 매만졌다. 그도 제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떠올린 모양이었다.

"네. 그 직전에요." 

"나도 보여줘."

스노우가 제헌을 쳐다봤다. 제헌은 약간의 오해를 샀음을 깨달았다.

"그거 말고 내가 찍혔다는 그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에요." 

"어떤 건지 내가 직접 확인을 해야겠어." 

스노우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미인의 슬픈 얼굴은 참으로 아찔했으나 제헌은 미동도 없었다. 너무 자주 봐서 인이 박였는지 아니면 그 정도로 홀랑 넘어가기엔 제헌에게 너무나 중대한 문제였는지 하는 부분은 어쨌든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스노우는 어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신비로운 영향으로 갑자기 제헌이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대답을 유예했다. 하지만 유예는 언젠가 끝이 나게 마련. 스노우는 결국 정해진 답을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제헌은 입을 다물고 볼 것도 없는 어두운 공원을 쓸데없이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제헌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확답을 들은 뒤라 그런지 제헌의 목소리는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그렇게 담담하고 무게감 없는 목소리로 제헌이 말했다.

"내 결정이었어. 내가 하기로 했던 일이고 내가 다 알아서 할 일이었다고. 어차피 처음도 아니었는데 뭐 어때. 영상으로 봤다며. 봤으면 너도 알잖아.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처음처럼 죽이 되도록 맞아가면서 당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내가 원해서 한 거야. 영상 보낸 건 좀 짜증은 나는데 그게 다야." 

"그렇지 않았잖아요." 

제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내가 그렇다는 거에 네가 뭔데 아니라고 하는 거냐? 내가 그렇다잖아. 내가 알아. 내 몸이…… 거기에 반응했다고." 

"그건 다른 거예요. 그냥 반사적인 신체 반응일 뿐이에요." 

제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불쑥 솟구치는 화에 대해 머릿속의 작은 목소리가 침착하게 판단했다. 제헌의 화는 언제나처럼 차갑게 비틀려나왔기에 그냥 그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면 될 테고 지금 방향성도 나쁘지 않노라고.

"너는 내가 다른 사람하고 섹스했다는 게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냥 받아들이지 그래? 바람피우고 속인 거에 화내도 돼. 근데 난 원래 이런 인간이야. 이미 일어난 일을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추해지기밖에 더하냐? 그냥 받아들여." 

제헌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제헌이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걸 보는 스노우는 오히려 좀 우울한 기색이었다. 명화 속 미인처럼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요정의 날개처럼 반짝였다.  

"저는 그런 이유로 화났던 게 아니에요. 저를 믿어주지 않고 위험한 사람을 찾아가도록 내버려 뒀던 건 속상한 일이었어요. 당신에게 화도 났어요. 정말 멍청한 짓이었어요. 하지만 저도 그게 다예요." 

"그럼 왜 화를 내는데?" 

"지금 화를 내는 건 제가 아니잖아요." 

"답답하니까 그러지! 됐다. 이 얘기 더 하지 말자. 기분 더러운 얘기 더 해서 뭐해." 

스노우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새하얗고 깨끗한 손이 한없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제헌의 옷깃을 여며준 뒤 꼭 끌어안았다. 제헌은 어린 애가 가장 아끼는 곰 인형이 된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안정되는 걸 보니 약효가 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제헌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보는 사람도 없고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지켜보는 눈이야 있지만 경호를 하는 사람들은 더한 것도 봤으니 이 정도 본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기분을 좀 풀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성질대로 너무 밀기만 하면 필요할 때 아쉬워지는 법이다. 제헌은 필요한 행동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제헌은 팔을 들어 올려 스노우를 마주 끌어안았다. 폭신한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은 뒤에는 스노우의 턱에 쪽 입을 맞추었다. 새하얀 털이 보송한 복숭아같은 예쁘장한 소년이라기엔 굵어진 선은 그럼에도 여전히 미려했고 관리 잘 받은 피부는 흠 하나 없이 부드럽고 뽀송했다. 지금 수작질을 부리는 건 제헌이었으나 어째 본인이 감기는 쪽이 아닌가 하는 새삼스런 의구심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접촉하는 두 물질은 쌍방에 흔적을 남긴다. 제헌은 상당히 충동적으로 스노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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