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는 그 날이 생각보다 더 우울한 날이 될 것임을 알았다. 비가 오려는지 달무리가 더없이 밝은 상현달 주변으로 은은히 둘려 있었고, 얇은 구름막 뒤로 별빛이 은은히 쏟아졌으며 여름치고는 선선한 밤공기가 스산히 그러나 자비롭게 거리를 휩쓸었지만 그런 것들은 둘째의 일이었다. 사람이 정말 우울해지기 시작하면, 사실 날씨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날인데 셰리의 다리를 타고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액체 방울이 피부를 좀먹어가는 느낌에 셰리는 눈살을 찌푸렸고, 곧 골목 깊숙한 곳에 주저앉듯이 하여 붕대를 덧대어 감았다. 약이 있으면 먹었을 것이고 시간이 있으면 다 젖어버린 붕대를 찢어냈을 것이고 안전이 보장되면 제대로 된 의사를 찾았을 것이나 그 셋 중 어느 것도 셰리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도망자였다. 그리고 도망자에게는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셰리는 붕대를 대충, 그러나 꽉 눌러 동여맨 채로 다소 절뚝이며 골목을 따라갔다. 그녀는 밤이면 인기척이 뜸한 런던 시내의 뒷골목 중에서도 막다른 곳을 찾아들어가고 있었다. 막다른 곳이 있는지도 의문이었으나, 셰리는 그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좋을 곳이나 바랐을 뿐이다. 시간으로는 5분 남짓이나 그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지난 후에, 셰리는 막다른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찔린 상처가 허벅지 바깥쪽에 깊게 있었다. 몇 겹으로 동여맨 붕대 위로 또 다시 붉은 기운이 번져가길래, 셰리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허리춤에 매인 비단 주머니는 빈 유리병을 딸그락거리며 토해내었다. 내용물이 있는 병을 찾았다 싶으면 상처에 듣는 약이 아니곤 했다. 셰리는 폴리주스 몇 병과 베리타세룸 한 병, 그리고 조그만 펠릭스 펠리시스 병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넣고는 그 위에 빈 병을 대량으로 쏟아부었다.

허벅지에 난 상처를 고칠 생각도 않은 채, 셰리는 그대로 벽에 기대앉아 하늘이나 쳐다보았다. 몸에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갑작스레 셰리를 휩쌌다. 항상 머리에 눌러쓰고 다니던 망토 모자가 벗겨져 옥빛 눈이 오랜만에 달빛을 받았으나 그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눈물 방울이 도자기 같은 피부 위로 미끄러졌다.

"다 싫어……."

중얼거리는 소리가 울리지도 않고 흩어졌다.

"예언이고 뭐고…… 그냥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에 살기가 담겼다. 여느 때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 순간 셰리는 지독히도 힘이 없었다. 복수를 향한 열망만이 남았으나 그마저도 부질없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꽉 차서 가라앉는 기분, 터질 듯이 뛰는 심장에 온 몸이 끌려가는 기분, 축 늘어져 이대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기분, 셰리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았다.

"망할 트릴로니……."

그 불길한 교수, 그 불길한 예언, 쓸데없는 예언!

셰리는 눈물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훔쳐내었다. 일어나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도 셰리는 제가 우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기를 바랐다. 당장에 볼드모트를 찾아내서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이 백 번도 넘게 스쳤다. 그러나 셰리는 죽을 수 없었다. 10년 전의 도망자 셰리 브라운과 현재의 도망자 셰리 홈즈는 살아갈 이유의 갯수가 달랐다.

그리하여 셰리는 곧 바닥에서 일어났다. 남빛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할 차례가 되어 장소를 천천히 물색하는데, 누군가 셰리가 숨어 있던 골목으로 뛰어들어왔다. 두 명의…… 마법사였다. 눈이 마주치기 전, 셰리의 눈동자가 두 사람의 손가락에 걸린 지팡이를 훑고 지나갔다.

"뭐, 뭐야."

두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에 셰리마저 당황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놀라지도 않고, 그저 당황한 후에 뒤로 몇 발짝을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동시에 셰리에게로 지팡이를 겨누었다.

"너 뭐야!"

"뭐야, 왜 그렇게 당황해?"

셰리는 그들 쪽으로 걸어가려고 하다가, 기절 마법이 빗맞는 걸 보고 다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와, 요즘 죽음을 먹는 자들이 많이 컸나봐. 예언 따위는 안 믿는 걸로 방향을 바꿨니?"

셰리의 소매에서 백향목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골목에서 하얀 지팡이를 본 상대가 휘두르려던 손목을 굳혔다.

"쟨 진짜야!"

그럼 가짜도 있나? 셰리는 태연하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밧줄이 적들의 손을 잡아챘고, 지팡이를 뺏은 다음 바닥에 무릎꿇렸다. 셰리는 당당하게 걸어서 다가가려고 했지만, 허벅지에 난 상처가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왜 이런 일이, 셰리는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내게만 계속 일어나는 걸까.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심장에서부터 울컥한 감정이 머리까지 치솟았다. 셰리는 앞에 있는 이의 멱살을 잡았다. 항상 날카롭던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놈들만 없었으면 내가 이럴 일은 없는데."

잡힌 이들이 콜록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셰리는 침묵 마법을 썼다. 그녀는 애초에 소통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알아? 기사단 한 명을 대피시키려고 안전 가옥 주소를 들고 그 앞에 나타났더니, 죽은 척 하고 도망친 사람이랑은 말 섞기 싫다면서 꺼져버리라는 소리를 하더라고. 설득하려 하니까 날 공격했어. 사흘 내에 라디오의 실종 명단에 올라갈 이름이라는 쪽에 1갈레온 걸겠어."

셰리는 눈을 훔쳤다.

"그리고 그게 다 너희 때문이야. 알아?"

백향목 지팡이가 떨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셰리는 그들을 죽이고 싶었다. 깊게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고통에 떨며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예언이 발목을 잡았다. 망할 트릴로니, 하는 생각이 다시 셰리의 머리에 스쳤다.

어쨌든 셰리는 자신의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들이 그녀를 공격하거나, 떨쳐내거나, 도움을 거절하고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더라도 남은 이들을 그녀가 먼저 저버릴 수는 없었다.

오블리비아테. 두 사람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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