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밤은 흑암처럼 검다.

 

 


"도망칠 거면 좀 그럴 듯한 곳으로 도망치지 그랬냐."

 

언제나 유머러스한 주임신부님이 짓궂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평소대로라면 적당히 웃으며 받아드렸겠지만 도무지 웃을 수 없어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옛말에 뛰어야 벼룩이라고, 있는 힘껏 도망쳐 봤자 원래 있던 곳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공원 화장실을 빠져나와서 고작 찾아온 데가 실습하던 그 성당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알고 지내던 분들이 그대로 계셔서 물에 젖은 생쥐 꼴인 나를 다정히 받아주셨다. 염치불구하고 샤워실과 갈아입을 옷을 빌렸다. 난 민폐만 끼치는구나.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데 탁자 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핸드폰으로 온 문자 한 통이었다. 발신자는 동주 형이었다.

 

[ XX대병원으로 빨리 와. 스승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 ]

 

내가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고 날뛰다가 성당으로 기어들어오는 사이, 정신 차린 태균 형과 동주 형이 그 쪽 상황을 수습한 모양이었다. 가야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내가 가도 되는 걸까? 몇 시간 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나는 스승님을 때렸고, 성우의 목을 조르고, 욕정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 내가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빨리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

 

탁, 어깨를 치며 물어오는 주임신부님 말씀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예, 지금 가 보려고요."

 

그러자 주임신부님이 바깥에 대고 손짓하며 말씀하셨다.

 

"급할 것 같아서 후문 쪽에 콜택시 불러놨어. 어서 타고 가. 몸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급히 돈을 지불하고 내려서 응급실로 들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동주 형이 보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형은 나를 끌고 병원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스승님이 붕대를 감고 누워계셨다. 스승님은 뇌사상태에 빠져 앞으로 깨어나실지 못 깨어나실 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단순히 사령의 힘만으로는 이렇게 될 리 없단 걸 알 텐데, 형들은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쓰러진 성우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스승님의 부상에 대한 건 사령의 짓이라고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쳐도, 성우의 목에 난 진한 손자국은 누가 봐도 내 손이란 게 분명해 보였을 텐데, 그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해 주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왜? 지금껏 허물없이 지내왔던 두 사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차라리 내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나를 단죄해줬으면. 나는 그렇게 바랐다. 가슴 속에 죄책감이 끝도 없이 차올랐다.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좋은 형동생인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든 일은 일대로 처리해야 했다. 우선 절차대로 주교님께 보고를 올리고, 바티칸으로 편지를 썼다. 우리가 대적했던 사령이 보통 사령이 아니라는 내용을 특히 강조했다. 무엇보다 내가 들었던 '지진을 일으키는 능력'은 쉽게 찾을 수 없는 특수한 능력이었기에 그 부분엔 밑줄까지 쳤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우체국으로 달려가 제일 비싼 요금을 치르고 빨리 부쳐달라고 사정했다. 이쪽 사정을 알 리 없는 우체국 직원이 심드렁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손을 통해 뒤로 넘겨진 편지는 과연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신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초조하게 하루, 이틀. 날이 지나갔다.

 

지은 죄가 있으니 스승님 간병은 내가 맡겠다고 자처했다. 안 그래도 사령을 대적하는 과정에서 온갖 근육통과 찰과상을 얻은 둘은 순순히 그러라고 하고 각자 휴식을 취하러 돌아갔다. 덕분에 처음 병원에 도착한 때부터 며칠 동안 스승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굳게 닫힌 스승님의 뜨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루빨리 의식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래야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제대로 사과드릴 수 있었다. 물론 내겐 사과를 드릴 면목이 없지만 말이다. 나는 스승님의 마른 손등을 붙잡고 여러 개의 링거 줄이 서로 엉키지 않게 다듬었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고 대답하자 어느새 낯이 익은 앳된 간호사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박상태님 보호자 분, 김 선생님께서 잠깐 부르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흘긋, 숙면에 든 듯 차분하게 누워있는 스승님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와 더불어 안정된 호흡과 맥박을 나타내는 기계도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동안이라면 괜찮겠지요, 스승님?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갑자기 왜 보호자를 부르나 싶었는데 딱히 별다른 이상이 생겨서 부른 건 아니었다. 이럴 거면 굳이 부를 필요 없지 않았을까. 헛걸음했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스승님 상태에 대해 전해들은 건 중요한 일이니 어차피 한번쯤은 갔어야 했던 거였다. 다시 병실에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는데, 우습게도 안쪽에서 누군가가 먼저 열어젖혔다. 그 사이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나? 형들이나 아는 수녀님들 누구한테도 오늘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의문은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다름 아닌 성우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이 세상에 내가 못 갈 곳은 없어. 어디에도."

"너...."

"빨리 들어가 보지 않아도 돼? 네 스승, 얼마 안 남았는데."

 

나는 그를 밀치고 병실로 들어갔다. 스승님! 하고 크게 외쳐보았지만 그런 내 외침보다도 더 선명하게 공간을 가른 것은, 높고 날카로운 기계의 알림음이었다. 불과 이십분 전만 해도 평온하게 이어지고 있던 스승님의 호흡이 끊어진 것이다. 기계는 시끄럽게 심장 박동이 멈추었다며 울어댔고, 화면 속 그래프는 칼 같은 일직선을 그려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방금 전 병실을 빠져나간 성우를 잡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그 사이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했는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야에 들어온 건 나처럼 당황한 듯 해 보이는 형들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현아!! 대체 이게..."

"혹시, 옹성우, 못, 봤어?"

 

급하게 뛰는 바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짧은 문장조차 끊어서 말해야 했다. 내 입에서 성우의 이름이 오르자 두 사람의 표정이 나와 비슷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우리 셋은 직감이 예민한 사람들이었다.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서도 그가 있음직한 곳을 향해 뛰었다. 일부러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사령은 제 기운을 공기 중에 제멋대로 흩뿌렸다.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라는 건가. 대놓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스승님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사령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죽어라 뛰어 그를 따라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예의 그 공원의 화장실 건물 뒤편에 서 있었다. 우리가 따라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생긋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자, 어떻게 할 거냐, 어린 사제들아."

 

그는 한껏 여유에 차 있었다. 우리가 그를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록 여기엔 제단도, 성수도, 뭣도 없지만 그래도 구마사제가 세 명이나 있었다. 저깟 사령 하나 못 잡으랴. 오기가 차올랐다. 그래서 첫 스타트는 내가 끊었다.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와 몸싸움을 벌이고, 사지를 제압했다. 그가 심하게 버둥거리자 동주 형도 와서 팔다리를 한 짝씩 잡아 눌렀다. 장정 두 명에게 잡힌 그는 꼼짝없이 태균 형의 기도문을 들어야 했고, 얼마간은 그게 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또다시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벽에 뒤통수를 부딪쳐 끊어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기까진 반나절이 걸렸다. 눈을 떴을 땐 우리의 숙소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동주 형이 태균 형이랑 나를 이고지고 옮겨 온 것이었다. 우리 셋은 한동안 충격에 젖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전해들은 오랜 수녀님 한 분이 건네주신 따뜻한 차 한 잔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여태까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보다 더 오래 구마 일을 해온 형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셋 사이에 기나긴 정적이 놓여졌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태균이 형이었다. 그는 평소 성격답지 않게 결론부터 꺼내들며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우리 능력 밖이야."

 

그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스승님과 함께 성우의 방에서 첫 구마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고 깨어났던 때보다 더욱 회의적인 태도로 변해 있었다. 물론 두 번째야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했다고 쳐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그 사령과 우리들의 힘의 차이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을.

 

"그럼 이대로 그냥 놔 둬?"

 

답답한 투로 말하자 그는 침대 머리맡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봉투에는 바티칸 소인이 찍혀 있었다. 기다리던 답장이 온 것이었다. 서둘러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봤다. 내용은 간단했다. 바티칸에서 경험이 많은 구마사제를 두어 명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보내준다는 구체적인 말은 쓰여 있지 않았다.

 

"좀만 기다려 보자."

 

동주 형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편지를 다시 태균 형에게 건넸다. 태균 형이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았다.

 

"못 기다려."

"황민현!!"

"정신 차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고!!"

"바티칸 사제들이 언제까지 온다는 말도 없고, 그때까지 무슨 사건사고가 벌어질지도 몰라. 운 좋게 구마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 단순히 시간벌이용 방패막이로 쓰이고 죽는다 해도, 절대 포기 못해."

"미친놈아, 네 몸 상태를 봐라! 너 다쳤어! 다음엔 이거보다 더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어차피 오래 살려고 이 짓 하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 한참동안 형들이랑 답 없는 말싸움을 벌였다. 어떤 말로 말려도 굽히지 않는 내 모습에 결국 둘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네 마음대로 해."

 

그들의 체념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는 혼자서 하고 싶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작정이었다. 난 그 사람을 절대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이것으로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을지어도, 이 순간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더라도. 그렇게 스승님의 장례기간이 훌쩍 지나갔다.

 

덜그럭, 덜그럭. 성수며 십자가며 이것저것이 잔뜩 든 백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품에는 새끼 돼지를 안은 채였다. 생경한 풍경에 주위 사람들 몇 명이 돌아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죽을 각오로 구마를 하는 길이었다. 숙소를 나설 때, 동주 형이 정말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내 태도에 화가 난 태균 형은 뭐 하러 우리가 같이 가줘야 하냐며 성을 냈다. 태균 형이 화내는 이유를 안다. 알면서도 그에 따라줄 수 없어 미안했다. 굳이 말로 전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이 될게 뻔했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숙소를 벗어나 버스를 탔다.

 

익숙한 동네에 내려,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곳은 성우의 동네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십몇년을 살았던 곳이었다. 아파트 단지는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바로 성우의 집이 보였다. 룸메이트 진수는 입원했다고 들었고, 옹성우 역시 집에 멀쩡히 붙어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밖에서 보이는 그의 집은 환했다. 집에 있구나. 설마 날 기다려 준 걸까. 그렇다면 고마웠다. 내게 기회를 준 셈이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 올라가는 내내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환영하듯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실내등이 환하게 켜진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즐거운 듯 웃음을 머금고,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기억해? 예전에 고해성사 들어달라고 했잖아. 그거 뭐였는지 궁금하지 않아? 얘가 너한테 뭐라고 하고 싶어 했을지."

"시끄러워."

 

갑자기 옛날 얘기를 들먹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부마자가 되기 전, 성우와 내가 나눴던 대화와 추억들이 이까짓 사령 때문에 훼손되는걸 원치 않았다. 나는 사령이 제발 닥쳐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이어 나갔다. 두 손을 꼭 마주잡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시늉을 하며 그가 말했다.

 

"아아, 황민현 요셉 부제님이랑 섹스하고 싶어요."

"... 하."

 

기가 차서 웃어버렸다. 내가 맘에 든다고 하더니, 이 사령은 나를 갖고 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딴 식으로 장난치면 재밌나? 두 번 다시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구마 의식에 필요한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웬일로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나 했더니, 그는 뚫어져라 내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신기할 것도 없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들을. 이건 마치, 그의 옆에 잠들어 있다가 눈을 떴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그때도 그는 자고 있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뭘 봐."

 

말이 퉁명스레 나왔다.

 

"그냥 모르는 척 해주면 안 돼? 그럼 너도 나도 좋을 텐데. 우리 섹스도 많이 하고 말이야. 응?"

 

그는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두 번 다시는 저 체온에 넘어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만큼 그의 팔을 날카롭게 쳐 냈다.

 

"개수작 부리지 마."

"개수작이라니. 유혹이라고 해줘."

 

그가 내 목에 두 팔을 감아왔다. 기회였다. 마침 그의 몸을 묶을 틈을 엿보던 중이었다. 제 스스로 양팔을 내밀고 다가와주니 일의 시작이 순조롭다고 해야 할까. 그의 양손을 붙들고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노끈을 꺼내들었다. 그 과정에서 가벼운 몸싸움이 한 차례 벌어졌지만 그를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탄 내가 유리했다. 겨우 피가 조금 통할 정도로 그의 양 팔목을 세게 묶었다. 그 와중에 뭐가 즐거운지 그가 깔깔 웃었다.

 

"묶어놓고 하는 거 좋아해? 나는 엄청 좋아하는데."

"잘 됐네. 발도 묶어 줄 테니 발 들어."

 

일어나며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가 양 다리를 모아서 내밀었다. 자진해서 내밀어주는 다리도 노끈으로 꽉 묶고 보니 바닥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누워있는 성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눈빛에서 몸에 들어간 사령이 뭘 원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불건전한 희망사항은 영원히 희망사항으로만 남게 해주지. 나는 십자가를 들어 그의 가슴팍 위에 놓았다. 기존의 절차와 예법을 모조리 뒤바꾼 파격적인 구마의식이 시작되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수십 번도 더 외쳤던 것 같다. 강제로 무작정 끄집어내는 방법으로 다짜고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한 감조차도 잡히지 않았었다. 난항을 겪으리란 것만 알았다. 예상은 들어맞았고, 지난번처럼 기싸움에 이어 격한 난투극이 중간 중간 벌어졌다. 수차례 뒤엉켜서 싸우다보니 우리의 몸에 울긋불긋한 흔적들이 생겨났다. 사이좋게 성우는 왼쪽, 나는 오른쪽에 코피까지 나눠서 터졌다. 왼쪽 새끼손가락은 얼얼한걸 보니 뼈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둘 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초저녁이었던 시간은 어느새 보름달이 중천에 걸린 한밤중이 되었다. 싸우게 해달라고 빌었던 만큼 정말 원 없이 싸우게 됐다. 끝은 날까? 마침 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처음보단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만 하지 그래? 어차피 넌 날 이길 수 없어."

"난 절대 포기 안 해."

"아, 진짜."

"죽어도 같이 죽어, 우린."

 

나는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도 지지 않고 맞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애써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서 죽을 각오로 왔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해보이듯 온몸 바쳐 돌진하고 기도문을 기계처럼 읊어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성우의 발목을 묶어놨던 노끈이 풀어졌다. 나에게는 낭패였고, 그에게는 기회였다. 그가 죽여 버리겠다며 다가왔다. 그의 손이 눈앞으로 뻗어왔다.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고,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타격이 오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내게 가해지는 충격은 없었다. 이상했다. 도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코앞에 멈춰선 그가 손을 위로 치켜세운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설마?

 

"민현아……."

"성우 형?"

"지금... 지금이야. 이 사령의 이름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까칠하게 일어난 입술이 움직여 만들어낸 여섯 음절의 글자 하나하나가 내 눈에 선명히 박혀들었다.

 

"... 아즈모데우스, 그 몸에서 나와라."

 

커헉, 그가 무너지듯 풀썩 쓰러졌다. 현관 쪽에 묶어뒀던 새끼 돼지가 꽤액 하는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된... 건가? 나는 새까매진 돼지를 한 번 쳐다봤다가, 쓰러진 그를 보았다. 괜찮은 건가? 그의 몸을 편하게 눕히고, 숨은 쉬는지 체크했다. 다행히 호흡과 맥박은 정상이었다.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절한 것 같았다. 그의 팔을 묶고 있던 노끈도 풀었다. 하얀 피부가 짓눌려서 새빨개져 있었다. 안쓰러웠다. 연고를 발라주고 싶었지만 우선은 돼지를 처리해야 했다. 나는 성우를 부탁한다고 동주 형한테 문자를 적어 보냈다. 우리 숙소는 여기서 멀지 않으니 확인하는 대로 곧 올 것이었다. 나도 금방 갔다 올게요. 두꺼운 천으로 감싼 돼지를 품에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쏜살같이 아파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시간이 촉박했다.

 

근처에 강이 하나 있었다. 그 강에 돼지를 버리기만 하면 모든 구마 의식이 끝난다. 조그만 동네라 서울 시내처럼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복잡한 곳이 아니니 가는 길이 위험해봤자 얼마나 위험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사령이 최후의 발악을 부리듯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온갖 방해공작을 펼쳐댔다. 전봇대가 넘어졌고, 공사장에 세워둔 가벽이 무너졌다. 깔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계속해서 달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실패로 돌아갈 순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실패한다면 다음 부마자는 내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게 놔둘 순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내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가뜩이나 몇 시간동안 육탄전을 벌이며 엎치락 뒤치락한데다, 그의 집을 나서면서부터 겪은 온갖 사고에, 시간이 흐를수록 사령이 내 몸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고통까지 더해져 무엇도 괜찮은 게 없었다. 아직 강둑조차 보이지 않는데,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갔다.

 

허억, 허억. 화재의 현장에 선 듯,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온통 뜨거워졌다. 갑작스럽고 큰 자극에 숨구멍이 좁아졌다. 그 틈으로 억지로 호흡을 하려다 보니 쌔액쌔액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생겨났다. 싫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이 돼지를 빨리 강물에 버리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돼지는 천근처럼 무거웠고, 내 몸은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자 멀쩡히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굽혀진 무릎을 바닥에 질질 끌며 비참하게 기어갔다. 온 몸이 찢겨지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생각했다. 누가 이 고통에서 나를 구해줬으면.

 

'아파?'

 

죽을 것 같아.

 

'내가 구해줄 수 있는데.'

 

악마의 속삭임은 너무나 달콤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멋대로 머릿속에 들어와 말을 걸어오는 사령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내 머릿속은 수개의 사령들이 저마다 외치는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온 몸이 인두로 지지듯 타올랐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고통을 줄여보고자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 안았다. 품에 가두고 있던 돼지가 땅으로 떨어졌다. 돼지는 사지가 묶인 채 이리저리 발버둥 치다 이내 비탈길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아, 나는 결국 돼지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의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그 힘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저희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

그레고리안 성가가 너무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비송, kyrie eleison이 가장 좋습니다... 

지난편에 댓글 주신 옹람즤님과 사이다님 너무 감사합니다... 댓글은 저의 원동력...! sz 




이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