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ympus



사계절 내내 손이 건조한 편이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핸드크림을 바르고는 한다. 

감귤 향의 크림을 손등에 슥 펴바르면 상큼한 시트러스가 코를 넘어 얇은 막이 되어 몸을 감싼다. 

(물론 15살에 베스트프랜드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그린티 핸드크림은 꽤나 향긋했고, 올해 텐텐이 선물해준 Forget me not도 애용 중이다.)

바디워시는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등 온갖 베리가 들어간 향을 좋아한다. 놀랍지 않게도 과일 또한 블루베리와 귤을 좋아한다. 호주에서 백팩커스를 떠돌며 근근이 살아갈 때도 슈퍼마켓에서 블랙베리를 본 순간 잽싸게 낚아챘던 날을 생각하면 과언이 아니다. 칠이 벗겨진 새파란 락커가 떼로 있던 임시 숙소에서의 검푸른 블랙베리 몇 알은 제법 잘 어울리는 식사였다.


과일에서 비롯되는 향을 사랑하는 나에게, 충격적인 과일이 다가왔다. 

때는 텐텐이 천혜향을 후식으로 제공했던 날이었다. 귤과 비슷한 크기지만 묵직했던 그것은 높은 밀도를 뽐내고 있었다. 얇은 껍질 안에 어떤 단단한 향을 감추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잠시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 인사를 하고 스몰토크를 하고 싶었지만 포스가 넘쳐서 눈을 내리깔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껍질째 코에 갖다 댔는데, 폭포수가 흐르기 직전의 터질 듯한 산자락의 강물처럼 내가 여태껏 맡아보지 못한 엄청난 향이 숨겨져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껍질을 깠다. 

폭풍전야가 끝난 순간이었다. 죽기 전에 천혜향 향을 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후회도 들었다. 이 벅차오르는 과일을 남겨두고 지구를 떠나야 한다니. 눈이 제대로 감길는지 모르겠다. 끝내주게 좋았다. 흔히들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은 음악 듣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날 나는, 두 번째 마약을 만났다.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처럼, 삶의 가치를 느끼고야 말았다. 연노랑의 속껍질은 인생을 걸만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앞에서 나의 모든 추태를 목격한 텐텐은 한술 더 뜨는 지독한 친구다.

“아예 코에 넣지 그래?”

좋은 생각이다. 물리적 거리의 0.01mm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0의 간격은 껍질을 코에 넣는 것이었다. 역시 텐텐은 똑똑하다. 껍질을 돌돌 말아 조심스레 코에 밀어 넣었다.


천국의 가장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런 향이 날까? 지금껏 접하지 못한, 신성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암브로시아(Ambrosia)에는 필히 천혜향이 들어가리라. 신의 혈관에 피 대신 흐르는 이코르(Ichor)의 냄새를 죽기 전 맡은 나는 럭키다. 과연 천 리를 가는 향기를 가진 과일 답게, 그것은 올림포스까지 날아들어 구름위의 식탁을 장식했다.


지구의 인구가 78억 8천만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숨 쉬고 있는 행성에는 나와 천혜향만 존재할 뿐이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간헐적으로 텐텐이 웃음을 참는 소리만 들렸다. 껍질은 완전히 나를 매료시켰다. 아주 황홀했으며, 행복했다. 사실 여전히 그 향이 그립다. 하지만 다시 만날 날까지 꾹 참을 생각이다. 삶을 영위하다, 훗날 그를 마주할 때의 기쁨과 감동은 무엇보다 소중할 테니까.




얼렁뚱땅 김제로의 진지하고 코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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