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아라에 올라온 [마법사가 아이를 기르는 방법]과, 리디북스에서 연재 중인 [어느 용사님의 트루 엔딩]을 둘 다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외전입니다.

 

* 작중의 용사팀은 용트루 2스테이지 초반 시점입니다. 아직 멜레트가 없어요.

 

 

1.

 

[꿈을 꾸었다.

아주 이상하고 즐거우면서도 슬픈 꿈이었다.]

 

 

*

 

 

풀대 죽만 먹고 살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스승님은 요리를 꽤 좋아하신다.

 

“크리스마스 음식을 만들자, 데미.”

 

정확히 말하자면 요리하는 것까지만 좋아하신다. 한번 마음이 동하면 열 종류는 넘는 음식을 만드시지만, 정작 그걸 먹어 치우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 스승님은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요리를 아주 조금만 드셔서, 음식 열 접시를 만들면 그중 반 접시를 스승이 먹고 나머지 반 접시를 데미안이 먹다가 절반쯤 남기는 수준이다.

 

그래도 크게 곤란할 일은 없다. 어차피 남은 음식은 마법으로 얼려 두었다가 데워 먹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저택에는 종종 손님이 찾아오곤 하니 그들에게 대접해도 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프랜과 가주님, 그리고 레오폴드가 방문할 예정이어서, 스승님은 데미안과 함께 테이블이 가득 찰 만큼 많은 요리를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클로드와 데미안이 본가에 들르는 쪽이 순리에 맞지만, 작은 레오가 데미안이 사는 집에 놀러 가고 싶다며 떼를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크리스마스 이브 당일, 아침부터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눈이 쏟아졌다.

 

[스승님] [눈] [많아요] [!]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누님께서 폭설을 예지하지 못하셨을 리 없는데….”

 

커텐을 열고 창문 너머를 보아도 하얀 눈과 까만 하늘뿐이었다. 바깥을 보고 온 스승님의 말에 따르면, 데미안의 허리까지 눈이 쌓여서 마차는커녕 걸어가기도 힘들다고 한다. 이래서야 아무리 프랜과 가주님이 오고 싶더라도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쩐지 누님과 연락도 안 되고. 무언가 마법적 이변이 생긴 것 같은데 감이 안 잡히니….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하나.”

[가주님] [프랜] [레오] [못 봐요] [?]

“그렇게 되었어.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너와 단둘이 보내야겠구나. 남은 음식은 연말 동안 천천히 먹자.”

 

스승님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데미안은 손님을 못 본다는 생각에 조금 풀이 죽었다. 물론 바깥이 아무리 차가워도 저택 안은 따뜻하고, 스승님과 단둘이 지내더라도 명절은 충분히 즐거울 거다.

 

그러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일단 우리끼리 저녁부터 먹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래, 데미?”

 

데미안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 자기 접시에 놓았다. 커다란 케이크의 귀퉁이도 덜고, 구운 야채와 스파게티도 덜고, 스프도 한 그릇 덜어서 접시에 올려놓았다. 스승님은 데미안의 케이크 위에 딸기를 올려 주고 야채 위에 구운 고기도 몇 점쯤 올려 주었다. 스승님은 본인도 야채만 먹으려 드는 식성이면서, 유난히 데미안에게 고기를 많이 먹이려 든다. 정작 데미안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데도.

 

두 사람은 각자의 접시를 들고 식당에 왔다. 비록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명절을 즐기는 방법 같아서, 데미안은 괜히 기분이 들뜨고 즐거워졌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쾅, 쾅.]

 

스승님, 누가 문을 두드려요. 이렇게 날씨가 나쁜 날 누가 찾아올 리 없는데. 어쩌면 가주님과 프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데미안은 조금 들떴지만, 곧 스승님의 표정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스승님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던 탓이다.

 

[스승님] [?]

“이변의 원인이 찾아온 모양이구나. 데미, 내 뒤에 잘 숨어 있으렴.”

 

데미안의 어깨를 토닥여 다독인 스승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을 지은 채 현관으로 나섰다. 평소에는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커다란 지팡이를 든 채로.

 

 

2.

 

<꿈을 꾸었다.

춥고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꿈이었다.>

 

*

 

“로한! 여기가 대체 어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마계가 아닌 건 확실해요!”

 

대체 몇 시간 동안 눈 오는 숲을 헤맸는지 기억도 안 나지 않았다. 매섭게 얼굴을 때리는 눈보라를 손으로 가리며 나는 리키엘에게 대답했다. 일단 여기가 인간계인 것만은 확실하다. 마계의 공기는 독하고 텁텁한데, 지금 이 숲의 공기는 차갑고 날카롭긴 해도 독성은 없었다. 내가 굳이 정화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눈 섞인 차가운 공기는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목구멍과 폐부를 할퀴는 것 같았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온통 새하얘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가늠이 안 간다. 같은 장소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고 있더라도 알 방법이 없다.

 

거의 허벅지까지 쌓이고도 세상을 더 짓누를 것처럼 내리는 눈은 실시간으로 체온을 앗아갔다. 이대로 계속 걷다간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데미안이 화염 마법을 써 준다면 나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아무리 흔들어 봐도 데미안이 깨어나지 않아! 어떻게 하지?”

“틈날 때마다 호흡과 맥박을 확인해 주세요, 레하스! 지금은 저 사람을 깨울 방도가 없어요!”

 

그랬다. 어째서인지 데미안은 이 숲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해 깨어나지를 않았다. 특별히 다친 것도 아니고, 레하스가 살핀 바에 따르면 맥박이 멀쩡하며 숨도 고르고, 심지어 열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을 못 차릴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어쩌면 정신 공격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짐작하지만 대체 누가 걸었는지 짐작조차 안 간다.

 

마음 같아선 자세히 살펴 보고 싶지만 이 눈보라 속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리키엘은 맨 앞에서 사실상 눈보라를 다 받아내다시피 했고, 나와 트리스탄이 그 뒤를 따랐으며, 레하스는 데미안을 업은 채 맨 뒤에서 걸었다.

 

지금은 일단 눈을 피할 곳을 찾는 게 최우선이다. 하다못해 겨울잠 자는 맹수가 있는 동굴이라도 좋으니, 이 눈을 피할 쉼터가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제까지고 이 숲을 헤맬 수만은 없다고!

 

‘아니, 애초에 쉼터가 있기는 한가?’

 

이렇게 눈이 많이 쌓여서야, 숲 어딘가에 동굴이 있대도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정말로 찾아야 할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 숲에 들어온 건지, 애초에 이 숲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저기를 봐, 로한! 저택이…!”

 

트리스탄의 외침에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센 눈보라 너머로, 제법 커다란 2층 저택의 실루엣이 보였다.

 

대체 이런 숲에 웬 저택이지? 대체 누가 사는 곳일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전, 섬뜩한 깨달음이 등줄기를 스쳤다. 어쩌면 저곳이야말로 우리의 목적지일지도 모른다는, 눈보라 몰아치는 숲 따위는 그저 우리를 숲에 몰아넣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직감이었다.

 

망설임 없이 저택을 향해 달렸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저택 창문으로 불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현관으로 뛰어들어 문을 두들겼다. 문 좀 열어 줘, 찬바람에 찢어질 듯한 성대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기생충이 깃든 발로 문을 걷어차 볼까 고민할 때쯤,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탁한 밀색 머리카락의, 어딘가 허약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문틈으로 보였다. 그 뒤에는 작은 아이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3.

 

 

스승님은 눈을 어깨에 소복이 얹은 사람 다섯 명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이 창백하며 입술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은 온몸이 눈에 뒤덮여서 꼭 눈사람을 보는 것 같다.

 

‘손님이 왔어,’

 

모르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어쩐지 낯이 익고 친근하다. 저 사람들과 함께라면 분명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거야, 데미안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스승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스승님은 사람들을 가만히 훑어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스승님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당신들, 어느 시간대에서 왔지?”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하룻밤만 이곳에서 눈을 피하고 싶습니다만.”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정중하게 부탁했다. 데미안은 어쩐지 저 사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어느 먼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저 사람을 닮은 시체를….

 

어쩐지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데미안은 흠칫 몸을 떨었다. 스승님은 제자가 겁을 먹었다 여겼는지 곧바로 데미안을 뒤로 숨겼다. 지팡이를 들어 앞을 가로막는 모습은 마치 위협적인 존재를 막아서는 것만 같았다.

 

“원래 이 숲에는 결계가 있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어. 다시 묻는다. 어느 시간대의 사람이지?”

 

하지만 데미안은 계속 고개를 내밀어 사람들을 구경하려 했다. 아이가 생각하기에 저 사람들은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 데미안은 문득 한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빨간 머리카락의 아저씨에게 업혀 있는 긴 머리의 청년이었다.

 

'업혀 있는 걸 보니 분명 어디 아픈가 봐.‘

 

아픈 사람이 눈을 맞고 있으면 안 된다. 어서 들여보내야 한다. 게다가, 데미안은 어쩐지 저 사람이 깨어나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저 사람이 눈을 떠야만 중요한 무언가가 찰칵 들어맞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두려움도 잊은 채 그 사람에게 다가가려 하자 스승님이 소리쳤다.

 

“그 사람을 만지면 안 된다, 데미안!”

 

스승님이 날카롭게 외치자 데미안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스승님은 데미안에게 꾸중을 한 거지 손님들을 탓한 게 아닐 텐데, 그들은 불에라도 데인 듯 화들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4.

 

 

나는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가설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금발의 사내가 소리를 지른 탓에 긴 머리의 아이, 그러니까 어린 데미안은 적잖이 놀란 듯 후다닥 도망가 사내의 망토에 몸을 묻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사내의 대답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내가 하나뿐인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쫓아내기 전,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스무 살. 이쪽의 데미안은 스무 살이야.”

“그런가.”

 

사내는 레하스에게 업힌 데미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린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어린 데미안의 앞에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데미, 이건 꿈이란다.”

 

꿈이라고? 저건 대체 무슨 소리지? 내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사내는 거듭해 말했다.

 

“너는 지금 꿈을 꾸는 거야. 지금 이 저택에 방문한 손님들은 전부 꿈속의 사람들이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이의 눈이 희미하게 풀렸다. 당황하던 나는 가까스로 깨달았다. 저건 마법이다. 저 사내는 지금 어린 데미안에게 암시를 거는 중이었다. 아이가 ’미래‘의 자신을 보고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절대로 다가가면 안 된다. 잘못했다간 이 꿈이 깨고 말아. 알겠니, 데미안?”

 

아이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아이를 놓아 줬고, 데미안은 방금의 두려움을 전부 잊은 듯 멍한 눈이 되었다. 사내가 레하스에게 가볍게 턱짓해 보이자, 레하스는 그 뜻을 금방 깨닫고는 데미안의 몸을 망토로 칭칭 감았다. 실수라도 과거의 자신에게 닿지 않도록.

 

“들어와. 일단은 식사를 대접하지. 마침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었던 참이니 자네들이 먹기엔 충분할 거야.”

 

혹시 저 사내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저쪽 또한 우리처럼 뭐가 뭔지 모르는 걸까? 어느 쪽이든 지금은 이 저택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온기가 훅 풍기는 집 안으로 휘청휘청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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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트윗 타래로 짧게 남겼던 외전을 글로 다듬어 올립니다.
 원래는 한꺼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상편만 먼저 올려 봅니다.


 마법사가 아이를 기르는 방법(마기방)은 조아라에서 올리던 스핀오프입니다.
 용트루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는 소설로 계획하고 있었는데(결국 용트루에서도 다 설명될 예정이고 그저 게임적 해석이냐 판타지적 해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벌써 몇 년째 연재를 멈추었네요.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올려 보고 싶네요. 물론 용트루 마감이 잘 될 때의 이야기지만.
 외전 하편은 내일 일어나서 천천히 작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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