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토니피터

아이돌 토니 & 히어로 피터


2019년 홈웨딩 발간 회지 유료공개

(추가내용 없음)






CONTENTS


Find me


Define me

Love me


Love Scandal








FIND ME



피터의 손에서 반도 먹지 않은 샌드위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아득히 먼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라 몇 층 아래 테라스로 떨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평소라면 큰맘 먹고 주문한 더블 미트 샌드위치가 아까워 앓는 소리를 냈겠지만 지금 피터는 잔뜩 금이 간 핸드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 본 것일까 두 번, 세 번 문자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본 피터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악!”

기쁨에 겨워 몸부림치던 피터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진 건 순간이었다. 샌드위치와는 달리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핸드폰에 반만 드러난 피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승리의 주먹질을 해대던 피터가 악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핸드폰을 따라 겁도 없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핸드폰을 향해 뻗은 손끝이 간절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봐도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 피터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 높이에서 바닥에 떨어진다면 안 그래도 거미줄같이 금이 죽죽 간 핸드폰이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 저기 봐! 스파이더맨이야!”

올려다보기도 아찔한 고층 빌딩에서 구형 아이폰과 누가 더 빨리 떨어지나 시합이라도 하는 듯하던 피터가 제 손목에 장착한 웹슈터라는 편리한 물건을 생각해 낸 것은 핸드폰이 – 그리고 피터의 몸이 – 지면과 충돌하기 겨우 몇 초 전의 일이었다. 가속도가 붙어 거의 붉고 파란 점으로 보이는 피터를 용케 알아본 꼬마 덕분이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핸드폰을 손에 쥘 수 있던 피터는 한 손으로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제게 열렬히 손을 흔드는 꼬마에게 허공으로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이번에는 떨어뜨리지 않도록 핸드폰을 꼭 쥔 피터가 기분 좋게 건물 사이로 비상했다.

【토니 스타크 팬 사인회 당첨】

21살, MIT 장학생, 그리고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아이돌 토니 스타크의 남팬이었다.

 

*

  

언어 강의의 특성상 일주일 내내 있는 고급 스페인어 강의는 정확히 오후 4시 30분에 끝났다. 피터는 초조한 표정으로 여전히 강의를 이어가고 있는 교수님과 강의실 문 위에 붙어있는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오후 4시 18분 37초. 38초. 39초. 다른 사람들보다 배 이상으로 예민한 감각은 평소와 달리 교수님의 강의가 아니라 초 단위로 움직이는 시계 소리에 한껏 집중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당첨자가 발표되었던 토니 스타크의 사인회가 바로 오늘이었다. 당첨자 발표 직후 당첨된 사람이 있기는 한 거냐며 한가득 쏟아진 눈물로 절여진 트윗들이 반증하듯 피터가 당첨된 사인회는 소규모 비공개 사인회였다. 거의 환상 속의 동물 취급당한 이번 팬 사인회 당첨자 중 한 명, 피터 파커는 당첨자 발표 후 매일 같이 설레는 마음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내다 지난 밤은 기어이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장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도 게을리할 수 없는 학업과 누구에게도 – 네드와 MJ는 예외였지만 – 말하지 못하지만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서 양질의 수면은 필수였다. 하지만 몇 년째 사그라들 줄 모르는 팬심은 유전자 조작된 거미보다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고는 했다.

『그렇게 조바심내지 않아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 걱정마』

평소와 달리 왁스로 한껏 멋을 부린 머리가 무색하게 잠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온종일 좀비처럼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옮겨 다니다 이제는 다리까지 덜덜 떨기 시작한 피터의 모습을 못 봐주겠는지 옆자리에 앉은 MJ가 노트 한 귀퉁이에 메모를 휘갈겨 쓰더니 피터 쪽으로 쭉 밀었다. 그 메모를 흘끔 보기만 하고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시계만 쳐다보는 피터의 모습에 다시 한번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꽂은 MJ가 다시 노트를 회수해 갔다.

『토니 스타크가 그렇게 좋아?』

그걸 말이라고.

쓱쓱 휘갈겨진 메모에 시선을 주었던 피터가 딱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MJ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지금 강단에서 수업이 8분 남았음에도 열심히 수업을 이어가는 교수님만 아니었어도 토니 스타크의 위대한 점 101가지를 읊었을 피터를 아는 MJ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미드타운 과학고등학교에서부터 MIT까지 함께 진학하며 피터의 토니 스타크 덕질의 산 증인 중 한 명인 MJ가 과장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앓느니 죽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이 수업이 수강생 대부분의 마지막 강의일 것이 분명함에도 융통성이라고는 거미 눈물만큼도 없는 교수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MJ의 옆자리 의자가 큰 소리로 덜컹거리며 밀려났다.

“나 갈게!”

말의 여운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도 전에 강의실 문밖으로 사라진 피터의 모습에 MJ가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퇴근 시간과 겹쳐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버스 속에서 피터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웹슈터를 사용한다면 사인회가 열리는 곳에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오늘 아침 한껏 멋을 부린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 것이었다. 왜 하필 오후 8시람. 직장인과 학생인 팬들을 배려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퇴근 시간,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 위에 멈춰 있는 버스에 갇혀 있다 보면 초조함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법이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대신 심호흡을 한 피터가 뒷주머니에 아무렇게 쑤셔 넣었던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피터는 버릇처럼 토니의 노래를 찾게 되었다. 금이 간 핸드폰 위로 익숙하게 몇 번 손가락을 굴리자 이제는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노래가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낮은 저음으로 속삭이듯 시작하는 노래는 이번 앨범에서 피터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입술만 달싹이며 노래를 따라 부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심의 마천루 사이를 활강할 때처럼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스페인어 강의가 끝나자마자 뛰어나와 버스를 탔으니 차가 아무리 막히더라도 사인회가 있을 곳까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 할 리 없었다. 사인회 전 이 두근거림을 조금 더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피터는 어차피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면 그때까지 새로 발매한 앨범 노래나 한 번 더 복습할 생각이었다.

[…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이어폰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 사이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만 섞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버스가 겨우 3블록을 전진했을 무렵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터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피터는 평소와 같이 바로 튀어 나가려던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오늘 스파이더맨은 휴업이다. 친절한 이웃에게도 사생활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것도 친절한 이웃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팬질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생활이.

“사이렌?”

“경찰차네. 사고라도 났나?”

피터가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는 중 이번에는 피터와 함께 버스 안을 콩나물시루로 만들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도 경찰차의 경광등이 파랗고 빨갛게 번쩍이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하긴, 평범한 사람들에게 꽤 먼 곳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피터는 조금 전 자신이 들었던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와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가장한 주차장 위에 갇혀 있는 경찰차 사이의 간격을 가늠해 보았다. 도움을 요청한 이는 경찰차가 있는 곳에서 못해도 5블록은 떨어져 있었다.

[누가, 좀, 제발…!]

“… 아저씨! 저 여기서 내릴게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버스와 똑같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경찰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피터가 손을 번쩍 들어 버스 기사에게 소리쳤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하차는 할 수 없다며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피터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겨우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골목을 찾아 헤메며 오늘 같은 날도 가방 속에 고이 챙겨 넣은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찾아 손에 쥔 피터가 몰려오는 서러움에 코를 킁 들이마셨다. 신축성이 없는 마스크에 한껏 멋을 낸 머리가 사정없이 눌리는 것을 느끼며 피터가 하늘 높이 웹슈터를 쏘아 올렸다.


 *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무사해서 다행이다, 꼬마야.”

뒤늦게 도착한 경찰에게 사건을 인계한 피터가 웹슈터를 높이 쏘아 올려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진 거리 위에는 오늘도 활약한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보였지만 평소와 달리 피터는 그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줄 정신이 없었다.

이미 사인회는 대지각이었다. 비공개 사인회인 만큼 지각한 자신을 안 들여보내 줄지도 몰랐다. 피터는 다시금 서러워지는 마음에 코를 훌쩍였다.

피터는 팬질에 더럽게 운이 좋으면서도 운이 없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인회, 팬미팅, 공방, 콘서트 등 한 번도 티켓을 쟁취하는 데 실패해 본 적이 없었으나 운명은 마치 피터의 팬질을 방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하필이면 그 날마다 피터를 사건에 휘말리게 해 돈 주고도 못 구한다는 티켓들을 휴짓조각으로 만드는데 선수였다.

평소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주된 업무는 나무에 올라가서 못 내려오는 고양이 구해주기, 길 잃은 꼬마 경찰서에 데려다주기, 걸음이 느린 할머니와 횡단보도 같이 건너주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 스타크와 관련된 행사가 있는 날에는 은행 강도, 인질극과 같은 대형 사건이 터지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꼭 피터가 지나는 길목에서.

오늘은 유괴 사건이었던가. 하하.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 물론 유괴 사건이 일어나도 괜찮은 날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필’ 오늘 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 이런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제압할 때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범인 제압을 핑계로 평소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힘을 실었던 주먹 한 방에 범인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사인회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어두운 골목에 착지한 피터가 서둘러 마스크를 벗었다. 하지만 신축성이 나쁜 마스크에 잔뜩 눌려 엉망이 된 머리는 이미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도 떨치지 못한 미련에 두 손으로 연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터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고작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질 거면서 왜 그런 범죄는 저지르는 거지. 

스스로가 6톤 트럭도 두 손으로 멈출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 피터의 아랫입술이 조금 더 앞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재빨리 마스크를 아무렇게 가방 속에 쑤셔 넣은 피터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

  

잠시 쉬어 가겠다는 사회자의 말에 토니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시작부터 내내 웃고 있던 입꼬리가 작게 경련했다. 사인회는 이제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소규모 팬 사인회라고 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팬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었다. 200명이 넘는 당첨자와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이름을 물어보고, 짧은 대화를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인을 해주는 일은 홀로 감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고된 일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토니가 자리를 옮기려 일어나기 무섭게 대포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비공개 팬 사인회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토니는 저에게 초점이 맞춰진 렌즈에 웃어 보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사진 좀 찍힌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휴식 시간에 사진 몇 장 정도는 찍혀줄 수 있지. 이런 사소한 일을 너그러이 넘어가 주는 것도 아이돌 가수의 미덕이지, 아무렴. 지금도 제 옆에 바짝 붙어 경호하는 해피가 들으면 싸가지 없는 제 도련님을 어떻게 했냐며 기겁할 만한 생각을 속으로 삼킨 토니가 다시금 아이돌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저의 환한 미소에 팬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제 뒤로 사인회장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을 끝까지 확인한 토니가 그제야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냈다.

“아, 피곤해.”

“아직 80명 정도 남았어요.”

“아직도?”

“네.”

“하.”

젠장. 사인하는 기계라도 만들어야 할까 봐. 아이돌 가수로 연예계에서 구른 날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비속어를 입속으로 삼킨 토니가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좋지는 않네.”

“허.”

지랄도 그 정도면 병인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한 해피의 표정을 흘끔 바라본 토니가 소리 내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 철없는 도련님을 어떻게 하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해피가 저 좋을 대로 움직이는 토니의 모습에 재빨리 뒤에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바람 좀 쐬러.”

“그렇게 마음대로 동선 바꾸시면 경호에 문제 있다고요!”

얌전히 뒤에 마련된 휴게실로 가시면 안 될까요?! 뒤에서 해피가 환장하는 소리를 하건 말건 토니는 제가 좋을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니 스타크, 5년 전 17살의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해 가요계를 휩쓴 슈퍼스타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심사가 꼬인 인물이었다.

Stark Industry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15살에 이미 MIT의 교수들과 함께 저명한 과학 논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토니 스타크는 21세기 과학계를 이끌어갈 유망주로 데뷔 전부터 유명했다. 그런 그가 돌연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사건’은 Fox 뉴스에서도 며칠에 걸쳐 언급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MIT에 진학해 SI를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와 큰 갈등을 빚어 데뷔 전 절연했다는 이야기는 – 물론 그 소문은 부풀려진 것으로 정확한 사실은 토니의 데뷔 앨범을 보고 뒷목을 잡고 절연하자고 하워드가 소리치기는 했으나 조용히 그의 발을 밟아온 마리아에 의해 이뤄지지는 않았다- 가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모두가 토니 스타크의 아이돌 데뷔를 전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기업의 외동아들의 소소한 일탈 정도로 생각했다. 돈 많은 집 도련님은 연예계 데뷔도 심심풀이로 하나 보지. 요즘 같은 세상에 돈으로 안 될 일이 무어 있겠는가. 한때 유튜브를 강타했던 Friday 뮤직비디오를 떠올리며 사람들은 스타크가의 외동아들이 어떤 흑역사를 생성할지 주목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공개된 토니 스타크의 데뷔 앨범은 미국 가요계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남았다. 자정에 공개된 MV는 처음부터 끝까지 토니 스타크가 어두운 방 가운데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도, 조명도, 특수효과도, 그 무엇도 없었다. 마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리고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토니 스타크의 데뷔 MV는 최단기간에 1억 뷰를 기록했다. 후에 그의 데뷔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을 작사, 작곡한 아이언맨이 사실은 토니 스타크의 예명이라는 것이 공개되고 나서 그의 인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데뷔 전 토니 스타크의 흑역사 생성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제 그의 다음 앨범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광적인 팬이 되어있었다.

얼굴. 집안, 돈. 문·이과 예체능을 가리지 않는 출중한 재능. 도대체 모자란 게 있기는 하냐며 토니 스타크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글을 볼 때마다 해피는 ‘인격이요, 인격’이라며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고는 했다.

제가 속을 뒤집어 놓을 때마다 언젠가 SI를 퇴사하는 날이 온다면 토니 스타크의 비리를 다 폭로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표정의 해피에게 매년 연봉이 인상된 계약서를 들이밀며 토니는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물론 비리가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 토니는 스스로 생각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가 그리 호감을 살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 생각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경호를 맡고 있는 해피는 곁에 두고 믿을 수 없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 딱 3분 만이에요. 더 지체하면 안 돼요. 한참을 안된다 하더니 깊은 한숨을 두어 번 내쉬고 저리 말하며 자신의 뒤를 착실히 따라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해피가 제 약점을 기자들에게 뿌릴 리 없다는 것을 토니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 저 정말 사인회 당첨된 게 맞는데…”

“입장은 한 시간 전에 마감됐다니까요.”

“지금 잠시 휴식 시간 갖는 거 같은데 지금 들어가는 것도 안 되나요?”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해피의 허락 아닌 허락으로 찬 밤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누군가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앳된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하는 남자와 조금은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그것을 거절하는 또 다른 남자.

“허엉, 저 진짜 들여 보내주시면 안 돼요...?”

반복되는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제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에 토니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조금 전 휴게실로 가지 않고 이렇게 바깥으로 나온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무슨 일이죠?”

“아, 토니씨.”

목소리를 가다듬고 영업용 미소를 띈 채 말을 걸자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자로 쓰인 STAFF 라는 명찰을 목에 걸고 있는 남자가 별것 아니라며 선수를 쳤다.

“앞에 계신 분은 별일이 맞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스태프의 앞에 선, 누가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체크무늬 셔츠와 커다란 백팩,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린 것 같은 머리를 한 어려 보이는 남자에게 눈을 맞추고 묻자 토니가 등장했을 때부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던 남자가 이제는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 아, 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의 스태프에게 잘만 말하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 마냥 말을 더듬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바닥으로 숙여졌다. 고개가 숙여지자 밤톨 같은 갈색 머리 사이로 붉어진 귀가 눈에 들어왔다. 토니, 이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에요. 한참을 우물쭈물 말을 못 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자 조금 떨어져 있던 해피가 가까이 다가와 토니를 재촉했다.

“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해피의 말에 토니가 곧 들어가리라 생각했는지 스태프가 여전히 우물쭈물 서 있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시금 거절의 말을 내뱉는 스태프에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이 빠른 속도로 제 자리를 찾아 올라왔다.

“같이 들어가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200명밖에 안 뽑는 사인회에 당첨될 정도면 앨범을 한두 장 산 게 아닐 텐데, 그런 팬을 조금 늦었다고 돌려보낼 수는 없죠.”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보다 토니가 한발 빨랐다.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토니가 해피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가 말을 걸었을 때는 딸꾹질을 하더니 어깨에 손을 올리자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을 떠는 남자에 토니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

그럼 얼른 사인회 하러 들어가죠.

제 웃음에 이제는 몸을 뻣뻣하게 굳힌 남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토니가 저의 기행에 할 말이 참 많다는 표정을 한 해피를 지나쳐 남자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인회에 남은 인원이 방금 데리고 들어온 남자를 포함해 81명으로 늘었지만 지금 이 기분이라면 100명 정도 추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

  

덕계못. 덕후는 계를 못 탄다. 하루가 멀다하고 출근 도장을 찍던 술집에 술병이 나 딱 하루 가지 않은 날 최애가 방문해 골든벨을 울리고, 몸살감기 기운이 있어 어렵게 심야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타를 구했더니 마침 근처에서 촬영 중이던 최애가 새벽에 간식을 사러 들르는 덕질 참사에 대한 간증은 힘들여 찾지 않아도 인터넷에 넘쳐났다. 하필이면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없던 저 자신을 욕하며 원망하는 수많은 덕후 중 한 명이 바로 피터 파커였다.

콘서트 날에 앞을 가로막았던 은행 강도, 팬미팅 날 눈앞에 벌어진 12중 추돌 사고, 예능 공개촬영 날에 무너진 3층 건물! 플미가 붙어 백 단위는 우습게 뛰어넘는 가격의 티켓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역사가 얼마였던가. 피터는 할 수만 있다면 근처에서 제일 높은 스카이 스크래퍼 위에서 힘껏 외치고 싶었다. 왜!! 덕후는!! 계를 못 타!!!

“입 닫아라. 침 떨어지겠다.”

혀에 미뢰가 살아있다면 근처에도 가지 않을 기숙사 식당의 마카로니 앤 치즈 한 그릇을 앞에 둔 채 꿈꾸는 듯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피터의 뒤통수로 MJ의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소문이 사실이야? 카메라가 토니 스타크의 얼굴을 다 못 담아낸다는 게.”

“… 21세기의 기술은 아직도 한참 멀었어.”

“네드,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또 얼마나 정신 나간 찬양을 들으려고 그래.”

그나마 기숙사 식당에서 먹을 만한 샐러드를 – 아무런 조리도 되지 않은 생야채였기 때문에 – 크게 포크로 찍어 올린 MJ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네드의 입을 막았다. 그럼, 잘생겼지, 잘생겼고말고. 세상에 어떤 카메라가 그 얼굴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또 목소리도 얼마나 좋은데. 귀가 녹는 줄.

MJ가 아직도 십 대 철없는 소년처럼 연예인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한 네드의 입을 단속하는 동안 피터는 익숙하게 혼자 토니 스타크의 찬양을 중얼거리며 다시 몽롱한 눈빛을 했다.

덕계못은 다 거짓부렁이었다. 팬 사인회를 다녀온 피터는 수많은 팬들의 유구한 팬질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진리 하나를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다. 팬사인회 내내 피터의 입은 토니 스타크의 질문이라는 값을 입력하면 정보를 내뱉는 출구에 불과했다.

나이가 몇이에요? 대학생? 그 얼굴로? 아니 나는 고등학생인 줄 알았지. 나보다 한 살 어리네. 아, 그건 이미 알고 있으려나? 학교는 어디 다녀요? MIT? 와, 나 거기 교수님들 잘 아는데. 학교생활은 할 만해요? 난 논문은 써봤는데 대학 생활은 안 해봐서. 앨범은 몇 장이나 샀어요? 이거 한 장? 그러고 당첨된 거예요? 운 엄청 좋네. 하긴, 사인회에 늦어서 못 들어올 뻔했는데 마침 밖에 있던 나를 만난 것부터 보통 운이 좋은 게 아닌 티가 나긴 했다. 그쵸? 앨범이 이거 한 장밖에 없으면 나도 사인 예쁘게 잘해 줘야지.

늦게 들어간 만큼 제일 뒷자리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리던 피터가 마침내 토니 앞에 수줍게 앨범을 내밀었을 때부터, 보다 못한 해피가 토니의 손에서 피터의 앨범을 뺏듯이 낚아채 돌려줄 때까지 토니의 입은 쉬지를 않았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토니의 질문에 피터는 홀린 듯한 얼굴로 제 개인정보를 마구 털었다. 만약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이름의 소유자인 경호원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피터는 토니에게 자신의 사회보장번호부터 얼마 들어있지 않은 제 통장의 비밀번호까지 술술 불었을지 몰랐다. 약간 멍한 정신으로 피터가 단상을 걸어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토니는 다음에 또 봐요! 라며 손을 흔들었다.

“허으으….”

찡긋. 마지막 말을 하며 제가 윙크해 보인 토니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 피터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옆자리에서 살기 위해 샐러드를 퍼먹던 MJ가 질린다는 표정을 했지만 계를 탄 덕후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토니의 윙크에 계를 탄 것은 피터였지만 그 귀한 순간을 영원히 박제한 것은 수많은 대포 여신들 이였다. 한참이나 토니의 앞을 가리고서(사실은 토니가 붙잡고 있던 것이었지만) 촬영을 방해한 이름 없는 남팬이 앞으로 몇 년은 족히 화자 될 레전드 짤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이 된 순간이었다.

“그래도 소원 성취해서 다행이다. 맨날 일 있어서 못 갔었잖아. 토니 스타크가 나오는 행사.”

여전히 덕질에 마음을 빼앗겨 팬사인회 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피터를 무시한 채 식사를 끝마친 네드가 후식으로 떠 온 애플파이 접시를 앞으로 끌어왔다. MJ만큼이나 피터의 스타크 덕질 역사에 통달한 네드는 지금껏 피터의 덕질을 방해했던 수많은 사건 또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한 번이라도 가봤으니 이제 예전보다는 좀 덜하겠지. 그놈의 덕질.”

네드의 말에 MJ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생각이 인생에 있어 덕질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예스!”

그 언젠가처럼 허공에 승리의 주먹을 내지른 피터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쿵쿵 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없는 비명까지 지른 피터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곧 죄 없는 피터의 베개가 사정없이 쥐어 짜였다.

피터의 덕질은 팬 사인회 이후로 승승장구였다. 앨범 발매, 팬 사인회, 그 후는 당연한 수순으로 콘서트였고, 조금 전 피터는 양일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했다. 그것도 양일 모두 스탠딩 n번째 입장 티켓으로. 티켓 예매 창과 티켓 예매 서버 시간을 알려주는 사이트. 치밀하게 두 창을 켜 놓은 채 오후 8시가 되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빠르게 예매 버튼을 누른 후 티켓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나치게 예민한 제 감각이 탐스러운 보라색 포도알에 정신을 놓고 무조건 앞으로 전진!을 외친 탓에 빽이 있는 사람이나 얻는 것이라는 한 자릿 수 스탠딩 입장 번호를 쟁취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참을 침대 위에서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고 허공에 다리를 버둥대던 피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기쁨을 만끽하느라 노트북 옆에 던져 놓고 잊었던 핸드폰이 제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을 풀면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꾹꾹 누른 피터가 팔을 뻗어 진동이 멈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이거 되기는 하는 거야?】

【8시 되자마자 서버 터진 거 같은데.】

【8시 되기도 전에 매진이라니, 이거 사기 아냐?】

MJ와 네드에게 번갈아 온 문자를 확인한 피터의 광대가 다시 볼록 솟아올랐다. 사인회 후 3주 만에 올라온 콘서트 공지를 확인한 후 양일 모두 가고 싶다며 티켓팅 용병을 부탁했을 때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어차피 같은 공연일 텐데 한 번만 가도 되는 거 아냐? 라며 묻는 네드에게 한 번 지나간 공연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하늘 아래 같은 공연은 없어. 같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MJ가 혀를 크게 찼었지. 저게 드디어 미쳤다며 거하게 잔소리를 하더니 그래도 잊지 않고 저를 위해 티켓팅에 참전해준 친구들의 우정에 피터가 핸드폰을 끌어안고 침대 위를 굴렀다.

【ㅎㅎㅎㅎㅎㅎ 괜찮아. 내가 양일 다 티켓팅 성공함. 스탠딩 n번째 입장! 나 펜스 잡고 있다가 펜스 부수면 어떡….】

거기까지 답장을 쓴 피터의 손이 돌연 멈추었다. 어두운 기숙사 조명 아래 블루라이트를 제 눈으로 사정없이 쏘아 대고 있는 화면에 동동 떠 있는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본 피터의 얼굴이 조금 희게 질렸다.

정말로, 토니를 보고 너무 좋아서 펜스를 부수면 어떻게 하지?

다른 팬들에게는 그저 드립에 불과했지만 피터에게는 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였다. 피터는 너무 좋아서 아파트를 부수겠다느니, 전봇대를 뽑아버리겠다니 하는 격한 비유적인 표현을 현실이 될 수 있게 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6톤 트럭을 맨손으로 멈췄던 게 15살 때 일이었으니 지금은 힘이 더 세졌으면 세졌지 약해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왼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본 피터가 여전히 예매 사이트가 띄워져 있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 한 번만 갈까.

한 번이라면 좋아서 성층권을 뚫고 나갈 것 같은 마음을 조금 자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이성이 돌아오니 주머니 사정도 좀 위험했다. 비어가는 통장을 기억하라는 이성의 애타는 외침을 무시한 본능이 물어온 표는 이번 공연에서 제일 비싼 자리로 피터의 한 달 생활비의 3분의 2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좋아서 버둥대던 다리를 갈무리한 피터가 진지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하늘 아래 같은 공연은 없고 한 번 놓친 공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지난 팬 사인회에서 분에 넘치는 계를 탔다고는 하나 콘서트에서 (자신의 덕질을 방해하는) 운명이 다시 훼방을 놓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표 두 장을 다 가지고 있는 편이 로지컬한 결론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토니 스타크가 또 보자고 했다. 한낱 팬인 자신이 양일 콘서트를 뛰어야 하는 로지컬한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본인은 스타워즈 광팬이지만 스타트렉의 팬이라는 토니의 인터뷰 후 오리지널 시리즈와 리부트 시리즈를 3번 복습한 피터가 로지컬, 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 모습을 MJ가 봤다면 덕질하는 데 자기합리화 좀 그만하라며 한마디 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덕후, 피터가 엄지손가락으로 토도독 핸드폰 화면을 두드려 잠시나마 쓸데없는 번뇌에 휩쓸리게 한 문장을 지웠다.

【ㅎㅎㅎㅎㅎㅎ 괜찮아. 내가 양일 다 티켓팅 성공함. 스탠딩 n번째 입장!】

한없이 짧았던 번뇌를 뒤로한 피터가 잠시 옆으로 치워 두었던 베개를 품에 끌어안았다. 티켓팅 성공의 기쁨이 아직 반도 표출되지 않은 탓이었다.

 

*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두 남자를 꼽자면 토니 스타크와 스파이더맨, 두 사람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전자는 유명한 SI의 외동아들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었고, 후자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친절한 이웃이라는 미명 하에 미 동부 대도시 치안에 일조하고 있는 히어로였다. 평소에는 주로 동물과 어린이, 노약자를 도와주는 친절한 이웃은 때때로 경찰의 강력범죄 소탕에도 도움을 주고는 했다. 

그가 활약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이들이 마스크 아래 감추어진 스파이더맨의 얼굴을 궁금해했다. 맨손으로 화물트럭도 멈춰 세울 수 있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힘을 가진, 선의의 편에서 활동하는 그는 누구인가. 스파이더맨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어린) 남성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 없는 히어로에 대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토니 스타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네, 뭐.”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은 계산에 없었는데.

온통 검은색으로 껴입은 남자의 등 위에 앉아 저의 안위를 묻는 스파이더맨에 토니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토니의 시선이 범인을 깔고 앉아 잔소리하는 스파이더맨에게서 거미줄에 겹겹이 쌓여 반대편 건물 벽에 붙어있는 피스톨 사이를 오갔다. 진짜 총이었네. 조금 전까지 제 등 뒤에 닿았던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되살아 나는  해 토니가 잘게 몸을 떨었다.

 

*

  

콘서트 준비가 막바지라 연습실에서 거의 먹고 자고 하는 토니를 보다 못한 해피가 강제로 휴식을 선언했다. 평소라면 자신의 컨디션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며 해피의 결정을 번복했겠지만 무슨 변덕인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연습실을 쿵쿵 울리던 음향을 끈 토니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해피, 나 커피.”

“차라리 이온 음료를 드세요.”

“하지만 지금 커피가 마시고 싶단 말이야.”

“… 하.”

어디 가지 말고 연습실에 붙어 있으라며 신신당부한 해피가 사라지기 무섭게 토니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중국집의 계란 볶음밥이 먹고 싶어진 탓이었다. 연습할 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간단한 브런치 후 물을 빼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해피가 연습 중단 선언을 할 만했군. 역시 해피야. 다음 연봉협상에 이 점을 참작해줘야겠다고 다짐한 토니는 커피를 사러 나선 해피에게 전화를 해 주문을 늘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고,

“뭐해. 주머니에서 손을 천천히 빼서 머리 뒤에 올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 느낌에 토니가 얼굴 모르는 남자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이나 더 할걸.

“카드 말고 다른 건 없어?!”

“없는데.”

무기가 없다는 표시로 뒤통수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서기 무섭게 뒤에서 쭉 뻗어 나온 손이 거칠게 토니의 후드를 두드렸다. 조금의 배려도 없는 그 손길에 거의 얻어맞고 있던 토니가 거칠게 욕을 뱉는 남자에 순간 몸을 굳혔다. 상스러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로 더욱 가까이 다가온 총구와 함께 끼쳐온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인맥을 위해 몇 번 얼굴을 들이밀었던 파티의 깊숙한 곳에서나 맡을 수 있던 마약 냄새였다. 

“다른 값나갈만한 건 없어?”

흘러내린 후드 소매로 맨 손목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손목을 잡아채는 남자에 토니가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 격하게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던 사람이 몸에 값비싼 시계 같은 것을 걸치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는 사람만 아는) 재앙의 주둥이 토니 스타크라고 할지라도 목숨을 소중했기에 그런 불만은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삼켜냈다. 손에 총을 쥐고 마약에 절어 있는 사람을 자극해 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었다.

긴장으로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인 토니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멀쩡한 강도였다면 털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무사히 보내줄 수도 있었겠지만 뇌가 마약에 절여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주 조금만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손에 들고 있는 총을 마구잡이로 갈 길지도 몰랐다. 호신용으로 해피에게 복싱을 배우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이 상황을 타개할 만큼 좋지 않다는 것은 토니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없냐고!”

등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뒤통수에 닿아왔다. 남자의 손에 손목을 잡혀 흔들리던 토니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로 죽음에 가까웠던 적이 없던지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비워졌다.

“아저씨,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고 다니면 안 되죠!”

쾌활한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슉, 슉, 퍽, 마치 영화 효과음 같은 소리가 나더니 뒤에 붙어있던 불쾌한 인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괜찮아요?”

그리고 한 템포 느리게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본 토니 스타크의 앞에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중 한 사람, 스파이더맨이 있었다.

 

*

  

로지컬은 개뿔이. 피터는 이제 제 콧구멍을 마비시킬 것 같은 기름 냄새에 진저리를 치며 어깨로 가게 문을 밀어 열었다. 저 좀 쉬고 올게요!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로지컬을 외치며 용감하게 티켓 두 장을 결제한 대가로 피터는 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주말 야간 알바를 구해야만 했다. 토니 스타크의 콘서트 제일 좋은 좌석 티켓 두 장 가격은 정말로 피터의 한 달 생활비 3분의 2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학기 시작에 맞추어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시급이 센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메이 숙모가 요리에 실패한 날이면 어김없이 시켜먹고는 했던 중국 음식에 피터는 나름대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몇 시간씩 기름을 궤짝으로 들이붓는 중국 음식 냄새를 맡고 있자니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옷감 한 올 한 올에 깊게 배인 그 냄새에 매일 같이 세탁도 해봤지만 한 번 밴 냄새는 쉬이 빠지지 않아 큰맘 먹고 아르바이트 전용 옷까지 몇 벌 마련했을 지경이었다.

보스턴 밤의 찬 공기를 맞으며 피터가 발을 콩콩 굴렀다. 고작 십여 분 정도의 휴식 시간이었지만 조금 달리면 기름 냄새가 좀 옅어지지 않을까? 어차피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제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피터는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기름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피터는 아닌 밤중에 조깅을 시작했다.

“다른 값나갈 만한 건 없어?”

가볍게 한 블록 정도만 돌고 들어갈 생각을 방해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심상치 않은 대화 내용에 피터는 달리던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전쯤 수명을 다한 전구가 아직 교체되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왠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왠 강도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모습에 피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매사추세츠주에 돌아오고 난 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스파이더맨 활동 시간을 좀 소홀히 했더니 저런 잔챙이가 다 날뛴다. 잠시 고개를 좌우로 꺾어 스트레칭한 피터가 혹시나 해서 챙겨온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아저씨,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고 다니면 안 되죠!”

중국집 아르바이트생 피터 파커가 아닌 스파이더맨의 등장이었다.

 

*

  

토니 스타크는 머리가 좋다. 특히 한 번 만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는 데는 도가 텄다. SI의 유일한 후계자로,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이돌로 살아남으며 갈고 닦은 스킬이었다.

“와, 정말 토니 스타크? 토니 스타크예요?”

저에게서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스파이더맨은 한참이나 더 바닥에 쓰러진 범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뇌가 마약에 푹 절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범인에게 다른 사람의 물건을 뺏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유치원생도 지겨워할 바른 소리부터 미국에서 일어나는 총기 범죄를 줄이기 위해 총기 규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최근 시사 이슈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토니는 끝날 줄 모르는 스파이더맨의 수다에 슬슬 지겨워지고 있던 참이었다. 누가 알아볼까 봐 눈썹까지 눌러쓴 후드 모자가 답답해 슬쩍 뒤로 젖힌 토니가 눌린 앞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드디어 잔소리를 마무리한 스파이더맨의 시선이 토니에게 닿았다.

그 후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토니는 계란 볶음밥 냄새를 풍기며 제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스파이더맨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같은데. 누구도 정체를 모른다는 스파이더맨을 도대체 어디서 만났던 것일까. 최소한 저 우스꽝스러운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저 웃긴 조리개가 달린 마스크를 쓴 스파이더맨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조리개 사이로 뭐가 보이기는 할까? 여전히 마약에 절어 횡설수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범인의 입을 거미줄을 쏘아 막는 스파이더맨을 바라보던 토니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알아.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아는 체를 하자 스파이더맨이 쑥스럽다는 듯 마스크에 가려진 고개를 조금 숙이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아시네요?”

“그럼.”

요즘 너와 나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가 얼마인데. 피터가 그중에서도 토니 스타크가 언급된 기사만 골라 읽느라 스파이더맨에 대한 기사는 건너뛴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유명한 스파이더맨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영광이야.”

“제, 제가 더 영광이에요!”

정말로 고마운 마음 반, 인사치레 반인 말에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급하게 외치느라 삑사리가 난 목소리에 다급하게 두 손을 입으로 막더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붕붕 젓는 스파이더맨을 토니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제 몸보다 족히 10배는 큰 콘크리트 조각을 레고 블록 가지고 놀 듯이 하는 스파이더맨 맞아? 스파이더링이 아니라? 저 혼자 부산스러운 스파이더맨의 행동을 바라보던 토니는 머릿속에 스파이더맨에 대한 정보를 한 줄 저장했다. 아마, 거의 확실하게, 스파이더맨은 애다.

20대 청년일 거라는 주류의 의견에 반하는 평가를 머릿속에 고이 저장한 토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쯤 해피가 회사의 모든 경호원에게 연락을 넣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녁으로 계란 볶음밥이라도 먹고 나왔는지 부산스레 움직일 때마다 볶음밥 냄새가 폴폴 나는 스파이더맨에 한층 더 허기가 몰려왔으나 목숨을 위협받고도 저녁 하나 사겠다고 다시 어두운 골목길을 헤맬 자신은 없었다.

“고마워, 스파이더맨.”

아니, 스파이더링. 혀끝에서 간신히 그 단어를 잡아챈 토니가 프로 아이돌답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초면부터 놀리는 건 제아무리 토니 스타크라도 못 할 짓이었다.

부산스레 움직이던 스파이더맨의 얼굴이 제 손과 얼굴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나이도 제대로 모르지만 하는 행동이 어려 보여 반말이 절로 나왔다. 얼른 안 잡고 뭐 하냐는 듯 슬쩍 손을 흔들자 조심스레 맞잡아오는 손에는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 자비 없는 손속으로 범인을 때려잡을 때와는 전혀 다른 소심함에 토니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토니 스타크가 남들보다 조금 더 스파이더맨, 정정, 스파이더링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

  

콘서트를 앞두고 대기실에는 중국 음식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제너럴 타오’s 치킨, 오렌지 치킨, 쿵파오 비프, 완탕 스프 등등. 대기실 탁자를 가득 메운 군침 도는 음식 중에서도 제일 먼저 계란 볶음밥을 집어 든 토니가 대기실 한구석에 놓여있는 쇼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살짝 노릇하게 색이 입혀진 볶음밥에서는 식욕을 돋우는 기름진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그 냄새에 작게 침을 삼킨 토니가 전투적으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양 볼을 볶음밥으로 불룩하게 채운 토니가 이 계란 볶음밥이 먹고 싶어 무단으로 연습실을 이탈했던 날을 떠올렸다.

계란 볶음밥이 먹고 싶어 무단으로 연습실을 이탈했던 날, 예상했던 대로 해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핸드폰도 두고 한참을 사라졌다 돌아온 토니에게 지금 도련님을 찾기 위해 헬기까지 뜬 줄은 아냐며 가슴을 치던 해피가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풀었다.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이번에야말로 정말 그만두고 말 거라며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쿵쿵거리던 해피의 발걸음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과에 뚝 멈추었다. 그리고 곧 그 큰 덩치가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어깨를 꽉 쥐어 오는 통에 토니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 것도 모르고 해피는 토니를 앞뒤로 흔들며 외쳤다. 혹시 나가서 뭐 잘못 드셨어요?! 그게 아니라면 제 싸가지없는 도련님(23세,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돌)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눈동자에 토니가 기어이 짜증을 내며 해피의 손을 떨쳐냈다.

“먹긴 뭘 먹어! 오히려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파 죽기 직전이니까 아무거나 좀 시켜봐.”

여전히 제 도련님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의심하던 그 날의 해피는 야식으로 피자를 시켰다가 이유도 모른 채 토니의 짜증 섞인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스파이더링에게서도 이 냄새가 났지. 그날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인물에 토니의 숟가락질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이제는 익숙하게 스파이더맨을 스파이더링이라 칭하며 토니가 입안의 볶음밥을 천천히 씹었다.

그날 어두운 골목에서 스파이더링을 만난 일은 토니만의 비밀이었다. 스파이더링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가 제 앞에 모습을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고, 토니는 그 잠깐 사이에 제가 스틱스 강에 발가락 정도 살짝 담갔었다는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해피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은 그날로 족했다. 그날 이후 시작된 해피의 밀착 경호(라고 쓰고 감시로 읽는다)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토니는 자신을 위협했던 범인이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게 거미줄로 입을 막아버렸던, 제가 아는 체를 하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던, 그리고 제가 내민 손을 소심하게 맞잡아오던 스파이더링을 떠올렸다. 그건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보아도 토니 스타크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스파이더링도 콘서트에 올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토니가 입안에 있는 볶음밥을 꿀떡 삼켰다. 아니, 와도 어쩔 건데? 스파이더링도 생각이 있다면 그 웃기는 조리개가 달린 마스크를 쓰고 콘서트장 천장에서 거미줄에 매달려 공연을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른 팬들 사이에 섞여 평범하게 공연을 관람한다면 그의 얼굴을 모르는 토니가 스파이더링을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쉽네.

“아쉬워?”

갑작스레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토니가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아니, 뭐가 아쉬워? 스파이더링을 못 본다는 게? 제가 생각해도 맥락 없이 떠오른 생각에 토니가 헛웃음을 뱉었다. 콘서트 직전이라 긴장했나,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네.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쫓아낸 토니가 반쯤 남은 볶음밥에 다시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콘서트 전에 잘 먹어 둬야 힘이 나지. 그래야 좋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토니가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오렌지 치킨 하나를 집어 야무지게 베어 물었다.

 

*

  

남자 아이돌에게 남팬이란 무엇인가.

하하. 피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체 했다. 망할 운명이 자신의 덕질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콘서트 시작 5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옹기종기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다른 팬들 사이에 차마 끼어들 수 없어 피터는 토니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뫄뫄님, 솨솨님!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며 토니 덕질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인파가 늘어 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피터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피터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콘서트 시작 2시간 전, 스태프들이 스탠딩 입장 대기 줄을 세우기 시작하고부터였다. 혹시라도 티켓을 잃어버릴까 현장 수령으로 표를 받은 피터는 구름처럼 몰려든 스탠딩 위너들을 제치고 줄의 앞으로, 앞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피터가 앞에서 7번째 자리를 찾아서 섰을 때부터 피터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어났다.

가뜩이나 예민한 감각에 저에게 쏠리는 관심을 남들보다 10배쯤 강하게 느끼며 피터가 콘서트를 위해 새로 장만한 니트를 죽 잡아 늘였다. 미드타운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해 MIT에 진학한 피터는 모두의 예상처럼 체크무늬 셔츠를 사랑하는 공돌이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까지 피터가 사람들 이목의 중심에 설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남팬 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런데 스탠딩 저 자리야? 대박.’

‘나 저 사람 아까부터 공연장 근처에 있는 거 봤어.’

‘그렇게 빨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공연 엄청 기대 하나 보네.’

남들보다 뛰어난 청각은 저를 두고 수군대는 소리를 아주 정확하게 픽업하고 있었다. 나쁜 말은커녕 토니를 좋아하는 남팬인 자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귀여워하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피터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앞으로 두 시간, 혹은 그 이상을 저 시선들을 받아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점점 쪼그라드는 자신감에 피터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 무렵, 흰 손 하나가 시야를 불쑥 파고들었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든 피터 앞에는 짙은 고동색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토니의 사진이 인쇄된 포토카드가 한 장 들고. 피터가 불쑥 내밀어진 포토카드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마치 아는 사이인 것 마냥 친근히 말을 걸어왔다.

“팬이시죠?”

“ㄴ, 네?”

“토니 스타크 콘서트 보러 온 팬이시죠?”

다 안다는 듯 말하는 여자에 피터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면서 뭘 물어보지, 하는 생각도 잠시뿐, 여자는 피터의 손에 포토카드 한 장을 꼭 쥐여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무료 나눔 한 포토 카드인 데 한 장 받으세요.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선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피터가 제 손에 남은 포토 카드로 시선을 내렸다. 우연인지 이번 앨범에 딸려온 포토앨범 중에서도 피터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고마워, 스파이더맨.’

스튜디오에서 메이크업과 조명을 한껏 받고 찍은 사진을 보며 왜 그때 그 말이 떠올랐는지 피터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악수도 했었지. 매일 밤, 잠들기 전 꼬박꼬박 떠올리고 있는데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좋으면서도 참을 수 없지 부끄러워지는 기억에 피터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토니의 발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피터는 제가 토니 앞에서 얼마나 한심한 꼴을 보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만난 팬처럼 신나서 날뛰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피터는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멋있었지…’

하지만 팬심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었다. 잠깐의 수치심 따위 내 최애의 멋짐 앞에 다 잊혀지는. 잠시동안 이대로 스파이더맨을 은퇴하는 게 어떨까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생각은 금세 편한 트레이닝복 바지와 후드를 입고 세팅 안 된 머리를 한 토니의 자연스러운 멋있음에 잊혔다. 팬사인회에서 토니가 저에게 보여줬던 윙크는 대포 여신들의 귀한 손에 모두의 레전드로 남았지만, 자연인 상태의 토니 스타크는 피터 파커의 뇌리에만 남아있다.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피터 파커는 그렇게 또 한 번 계를 탔다. 갑자기 이렇게 운이 좋다니, 한때는 이번 콘서트에 못 가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엄습했었다. 

‘뭐야, 남팬?’

그 사실이 피터에게 힘을 줬다. 다시금 고막을 파고든 남팬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터가 다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하하, 네, 제가 바로 토니 스타크 남팬입니다. 자랑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들으면 배 아파 죽을 계를 두 번이나 탄 남팬이요.

토니 스타크의 콘서트까지 앞으로 1시간 37분. 피터는 그 길면서도 짧은 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

  

“하아아….”

 그렇게 기다렸던 콘서트가 끝났다. 꿈 같았던 이틀을 보낸 피터는 다시 주중에는 학업과 스파이더맨 활동에 매진하고 주말에는 기름진 중국집 테이블을 닦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콘서트가 끝나면 바로 그만둘 생각이었던 중국집 알바는 토크에서 콘서트 전 무엇을 먹었냐는 질문에 토니가 중국 음식이라도 답하는 순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가게 마감까지 앞으로 30분. 배달 주문 전화도, 홀 손님도 없는 가게에 피터가 슬쩍 주방 눈치를 보다가 제일 구석에 놓여있는 테이블 의자를 빼 앉았다.

“토니 보고 싶다.”

피곤함과 졸음이 묻는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입버릇처럼 ‘토니 보고 싶다’를 중얼거린 피터가 조금 전 제가 깔끔하게 닦은 테이블에 뺨을 대고 누웠다. 피터가 오랜만에 현생에 집중하는 동안 토니 스타크는 해외 투어를 떠나 있었다.

  

*

  

콘서트는 어느새 중반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굳건히 펜스를 쥔 피터의 눈이 무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노래가 한 곡 끝나고 암전된 무대에 피터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눈앞에서 최애가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든 순간이 꿈 같았다. 직접 토니 스타크의 무대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더니. 토니 스타크가 출연한 모든 방송과 직캠을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펼치는 그는 차원이 달랐다.

21세기 기술은 좀 더 분발해야 해. 카메라는 단순히 잘생김을 못 담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멋짐을 10분의 1도 못 담아내고 있었다. 전지적 덕후 시점에서 잠시 토니 스타크의 멋짐과 21세기 카메라의 후짐을 되새긴 피터가 작게 숨을 골랐다. 땀이 찬 손 아래 잡힌 펜스가 조금 찌그러진 것 같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양호한 것이라며 자기합리화한 피터가 한 손을 들어 콩콩 뛰고 있는 가슴 위에 올렸다.

아, 진짜 너무 좋아. 펜스 뽑아 버려.

최애의 멋짐이 수용 한계치를 넘었다. 최애의 멋짐에 함락당한 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생각을 남발했다.

“여러분, 즐거우세요?”

그런 덕후가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넓은 무대 한가운데 핀포인트 조명이 떨어졌다. 무대 곳곳에 놓여있는 물병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빨대를 입에 문 토니의 등장에 등 뒤에 닿아오는 압박감이 한층 거세어졌다. 하지만 토니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자 하는 다른 팬들의 노력 따위, 스파이더맨의 초인적인 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 

전혀 힘든 기색 없이 펜스 앞자리를 사수하고 선 피터가 입술울 꾹꾹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토니, 사랑해요! 같은 부끄러운 말을 내뱉을 것만 같았다. 콘서트장 밖에서 판매 중이던 슬로건으로 땀을 닦아낸 토니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얼굴 보는 거 오랜만이다, 그렇죠? 이번 콘서트 티켓팅 어려웠다는 데 다들 어떻게 표 구하셨어요.”

무대 아래는 조명도 제대로 비추어지지 않아 얼굴이 보일 리 없는데도, 다른 팬들의 목소리에 자신의 대답이 묻힐 것을 알면서도 콘서트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토니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그 사이를 뚫고 간간이 들리는 뱃심 좋은 팬들의 사랑해! 토니 스타크 잘- 생겼다! 같은 말에 쑥스러운 듯 웃던 토니가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럼 그 운 좋은 팬 중에서 나는 이 공연을 보러 다른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멀리서 왔다 하는 분, 손!”

토니의 말에 모든 팬의 손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니, 다들 지구 반대편에서 오셨어요?” 장난스레 말하는 토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팬들은 토니의 이어진 모든 질문에 번쩍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 팬들의 반응에 웃음을 거두지 못하며 토니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번에는 이번 앨범 듣고 입덕 하신 분!”

“와, 이거 다들 지금까지 저 안 좋아했다는 말인가요?”

무슨 질문을 던지든 토니가 찾는 그 팬이 바로 자신이라며 손을 흔들어 대는 팬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질문을 듣지도 않고 다들 손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객석을 둘러보며 이렇게 많은 분이 이번 앨범을 듣고 나서야 입덕 했다니, 앞으로 자신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며 팬들을 놀리는 토니에 팬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번에는 진짜 해당하는 분만 손드셔야 해요. 이건 속인다고 해서 속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금 이 콘서트장에 계신 남자분들 중에 스스로 티켓팅 해서 오신 분!”

“나는 토니 스타크를 보기 위해 직접 피켓팅을 뚫고 티켓을 쟁취했다! 하시는 남자분 계세요?”

토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콘서트장이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번에는 그래도 토니의 말을 들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팬들에 토니가 타박을 던졌다. 

“그렇게 목소리 낮춰서 소리 질러도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객석을 비추는 카메라가 3층부터 2층 지정석을 훑고 내려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피터는 스탠딩 입장을 기다리며 느꼈던 시선이 다시금 제 뒤통수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굳이 높은 스탠딩 화를 신지 않아도 여성 팬들보다 높이 솟아 있는 동그란 갈색 머리에 다부진 어깨.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입장 후부터 무대 정 중앙, 제일 좋은 자리를 사수한 채 버티고 있는 한 남자.

토니 스타크를 보기 위해 직접 피켓팅을 뚫고 티켓을 쟁취한 남팬. 한 자릿 수 입장 번호의 스탠딩 표 소유자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토니가 찾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정작 피터는 펜스에서 손가락 하나 떼지 않았는데 주변 팬들이 더 난리였다. 토니보다 피터를 먼저 발견한 것은 무대 위의 토니를 찍고 있던 카메라였다. 스탠딩석 중앙에서 시작된 소란의 중심에 서 있는, 뻣뻣이 굳어 입술이 보이지 않게 앙 물고 있는 게 앳되어 보이는 남자. 한마음 한뜻으로 그를 지목하고 있는 주변 팬들에 카메라가 합세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네. 바로 무대 앞에 계셨군요.”

본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2, 3층을 훑어보던 토니의 눈이 무대 바로 앞에 서 있는 피터에게 떨어지기까지는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무대 아래가 아니라 무대 양옆에 설치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던 토니가 카메라 감독이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팬들의 함성이 커짐에 따라 피터는 토니가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면 가득 제 얼굴이 잡혔을 때부터 조금씩 숙여지던 고개가 이제는 펜스를 잡은 두 손에 못 박혀 있었다. 살짝 찌그러진 정도였던 펜스가 한 눈으로 보아도 눈에 띄게 뒤틀려 있었다.

“얼굴 좀 보여주시지.”

양옆에 서 있던 다른 팬들이 급기야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팬이 뭐라고 콘서트 진행까지 미루는지. 최근 두 번이나 계를 타기는 했지만 피터는 딱히 토니에게 기억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가수 얼굴 보고, 사인을 받고, 공연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죠. 바닥을 향하고 있는 피터의 시야에 달랑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무대에 걸터앉기라도 했는지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감에 피터의 고개가 조금 더 숙여졌다.

“저 이분이 얼굴 보여주기 전까지 안 움직일 거예요.”

토니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은근슬쩍 피터의 등과 옆구리를 찌르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부끄럼을 타는 남팬과 그런 남팬을 귀여워하는 토니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팬들이 아예 마이크를 무대에 내려놓는 토니를 도와주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아.”

그런 주변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피터가 겨우 얼굴을 들어 토니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토니의 얼굴에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스쳤지만, 그는 곧 프로 아이돌답게 능숙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운이 좋으신 분이네요. 오늘 공연 충분히 즐기시고 돌아가시기 바래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던 것이 무색하게 토니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피터를 남겨둔 채 다시 무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

  

“수고하셨습니다.”

턱을 따라 흐르던 땀이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똑 떨어졌다. 뜨거운 조명 아래 3시간이 넘게 이어진 공연에 땀에 푹 젖은 몸이 찝찝했다. 어느새 따라붙은 건지 해피가 옆에서 차가운 물병을 건넸다.

“아, 죽겠다.”

공연 관계자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 출입할 수 있는 대기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토니가 죽는소리를 했다. 욕심이 과하면 안 좋다고 해외 투어 일정을 짜며 시차 적응할 시간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더니 무리한 몸이 파업을 선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피곤한 눈덩이를 꾹꾹 누르자 거멓게 번진 아이 메이크업이 웃기게 보이든 말든 토니가 다리를 질질 끌고 쇼파에 몸을 뉘었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었어요.”

“이 이후에 스케쥴이 없던가?”

“미국에서 팬 미팅 두 건 남아있는 것만 빼면 없어요.”

“이번에는 좀 오래 쉬어야지.”

태블릿으로 대신 스케쥴을 확인하는 해피의 모습을 고개만 들어 바라보던 토니가 다시 벌렁 쇼파에 드러누웠다. 있는 집 도련님답게 토니는 신인 시절부터 단독 에이전시를 설립해 활동했다. 단독 에이전시의 장점은 모든 스케쥴을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넘쳐나는 재력으로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치즈버거에 도넛을 먹어야지. 아무리 전 세계에 체인점이 있다고 해도 역시 본토의 맛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어제 저녁 야식으로 먹었던 치즈버거의 실망스러운 맛을 떠올린 토니가 휴식기에 할 일을 착착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즈버거, 도넛, 스테이크, 칠리 치즈 프라이, 계란 볶음밥…

하고 싶은 일 리스트보다는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에 가까운 단어를 나열하던 토니가 마지막으로 떠오른 단어에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콘서트장에서 계란 볶음밥 냄새를 풍기며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스파이더링과 다시 만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토니는 중국 음식을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의 치즈버거를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을 만큼 그리 까다롭지 않은 식성이었으나 음식을 먹는 건지 기름을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기름진 중국 음식을 굳이 찾아 먹는 편은 아니었다.

계란 볶음밥 냄새를 풍기는 스파이더맨 대신 토니는 얼마 전 사인회에서 만났던 남팬을 콘서 장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머리가 좋았다. 특히 한 번 만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는 데는 도가 텄다. 자신에게 쏠린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푹 숙인 동그란 뒤통수가 익숙하다 했더니 제 사인회에 못 들어올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그 팬이었다.

앨범 한 장을 사고 경쟁률이 어마어마한 사인회에 당첨되더니 이번에는 무대 정 중앙 펜스를 잡고 선 모습을 보아하니 스탠딩 티켓도 꽤  번호였던 것 같다. 그 기분 좋은 우연에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토니는 이번에는 그 충동을 꾹 참아냈다. 수 만 명의 팬들이 모인 콘서트에서 한 팬에게만 오래 관심을 주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겨우 마주한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투어 일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스파이더링 대신 운이 좋은 그 남팬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날 콘서트를 끝으로 미 동부에서 스케쥴을 마무리한 토니가 미주 투어를 마치고 해외 투어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MIT에 다닌다고 했으니 아무리 팬이라고 하더라도 학기 중에 토니의 해외 스케쥴을 따라다닐 수는 없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매번 토니는 콘서트장에서 버릇처럼 남팬을 찾았다. 급기야 토니 스타크가 남팬을 편애한다는 팬들의 질투 섞인 콘서트 후기가 온갖 SNS를 도배했지만 토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지만 미주 투어도 못 따라서 온 그 팬이 5개국을 돈 해외 투어를 따라왔을 리 없지만 토니는 조금 전 마무리한 콘서트에서도 남팬들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주문했던 참이었다.

“계란 볶음밥.”

“네?”

“나 미국에 돌아가면 계란 볶음밥부터 먹어야겠어.”

아니 어제는 버거킹에 제일 먼저 갈 거라고 입국장에 버거킹이 있는 공항으로 들어가는 비행 편을 알아보라고 했잖아요? 평소라면 이대로 나 업고 호텔로 돌아가라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아야 하는데 웬일로 조용하다 했더니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토니에 해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버거킹은 어쩌고요.”

“그건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매사추세츠로 들어가는 비행 편 있나 한 번 알아봐.”

“매사추세츠요?”

“어.”

계란 볶음밥 타령을 하더니 이제는 입국 공항까지 콕 집어 말하는 토니에 해피의 표정이 알쏭달쏭해졌다. 미국에 널린 게 미국식 중국집인데 왜 하필 매사추세츠? 변덕이 심한 제 도련님의 속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해피가 핸드폰으로 비행기 편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MIT를 다닌다는 동그란 뒤통수가 귀여운 남팬과 계란 볶음밥 냄새를 풍기는 스파이더맨이 매사추세츠에 있다는 것을 해피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

  

“이렇게 또 만나네요.”

“… 네.”

지금 자기 뒤통수가 예쁘다고 자랑하는 건가? 포스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얼굴을 들지 않는 점원에 토니가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한 달도 전에 무엇을 주문할지 정한 상태였지만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점원이 귀여운 탓이니 제 잘못이 아니었다.

“계란 볶음밥 하나 포장해 주세요.”

한참 뜸을 들이며 곁눈질로 동그란 뒤통수를 훔쳐보던 토니가 오랜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가게에서 제일 저렴한 메뉴 중 하나를 주문했다.

“5, 5달러 75센트입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스기를 꾹꾹 누르더니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점원이 두 손을 공손히 내밀어 왔다. 그 손에 장난기가 발동한 토니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여기요.”

“어, 어…”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해서 그걸 곱게 점원의 손에 건네준 것은 아니었다. 제 손에 닿지 않는 카드를 받기 위해 점원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바보같이 허공에 손을 휘저을지언정 포스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점원에 결국 소리 내어 웃은 토니가 카운터 위로 불쑥 상체를 숙였다.

“이쯤 됐으면 얼굴 봐줄 때가 된 것 같은데.”

“… …”

“나 보는 게 싫어?”

“아니요!”

강제로 들이 밀어진 얼굴에 잔뜩 흔들리는 동공과는 달리 우렁차게 터져 나온 답에 토니가 다시 한번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왜 얼굴 안 봐줘요.”

“부, 부끄러워서…”

제가 싫냐는 말에 커졌던 목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마지막은 거의 웅얼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용케 알아들은 토니가 그제야 피터의 손에 카드를 올려주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해요?”

“네.”

“MIT 다니는데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 안 힘들어요?”

“주말만 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아, 주말에 이 타임에만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네.”

“마감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눈치 없이 주문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정말 아니에요.”

네, 라며 토니의 모든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피터가 토니의 마지막 질문에 두 손을 크게 휘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런 피터의 손에서 카드를 돌려받은 토니가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대신 카운터에 팔을 기대었다.

“한 번 보기도 힘든 나를 이렇게 자주 만나다니.”

“… …”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정말 운이 좋은 분이네요.”

미국에 돌아오고 한 달하고 열흘 뒤, 토니는 계란 볶음밥 냄새를 풍기는 운이 매우 좋은 남팬을 다시 만났다.

 

*

  

다녀왔습니다! 마지막 배달 주문의 배달을 마치고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주방을 향해 외친 피터가 TV 옆에 걸려있는 시계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마감까지 앞으로 45분. 항상 카운터에 놓여있는 배달 주문 노트를 보니 제가 배달을 나선 후 들어온 주문은 더 없는 것 같았다. 배달을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홀을 확인한 피터가 카운터 위에 놓여있는 마른행주를 움켜쥐었다. 

일요일 밤에는 늦은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편이었다. 토요일과 같은 주말이라고 해도 다음 날 다시 바쁜 주중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늦은 밤 야식을 시키는 대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니 오늘 영업은 마무리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었다. 중국집 주말 아르바이트 3개월 짬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피터가 마른행주로 홀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가게 문에서 가까운 테이블부터 주방에 가까운 테이블로 옮겨갈수록 피터의 콧노래 소리가 커졌다. 밤이 늦어서인지 가게 앞 도로를 지나는 차들도 뜸했다. 다시 흘끔 바라본 시계는 마감 3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 주문은 마감 30분 전 까지니 앞으로 5분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곧!

“아직 주문받으시나요?”

퇴, 근…

한없이 높았던 텐션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은 제가 늦은 시간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는지 가게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 주문이 되는지부터 물어왔다. 그 물음에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여전히 가게 문을 잡은 손님을 한 번, 그리고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에 소란스러워진 주방을 한 번 바라본 피터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며 영업용 미소를 띄웠다. 그럼요. 되고 말고요.

피터의 대답에도 손님이 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기까지는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제 대답에 다행이라며 중얼거린 손님은 돌아선 피터의 얼굴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상한 손님의 반응에 그제야 깊게 눌러쓴 모자와 얼굴을 반 이상 가린 마스크가 피터의 눈에 들어왔다. 그 범상치 않은 차림새에 피터가 꿀꺽 침을 삼켰다. 저 차림새에 주머니에서 총이라도 꺼내면 영락없는 범죄자였다. 물론 범죄자로 의심받기 딱 좋은 차림의 손님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면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피터가 아니라 범죄자로 돌변한 손님이었지만 피터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자신을 따라 포스기로 다가오는 (아직까지) 손님을 바라보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직까지) 손님은 품이 넉넉한 후드를 입은 탓에 어디에나 총, 혹은 다른 무기를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눈앞에 선 손님을 이미 예비 범죄자로 확신한 피터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손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어봤다.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피터를 아는지 (아직까지) 손님은 한참 뜸을 들였다. 후드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손이 깊게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위를 느릿하게 오갔다.

그러는 사이 5분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마감 직전에 들이닥친 손님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하게 되어 꼬였던 피터의 심사가 곁눈질로 훔쳐본 시계에 한 번 더 꼬였다. 마감 시간에 딱 맞춰서 들어왔으면 주문이라도 빨리해주던가.

“손님?”

그로부터 또 2분. 피터는 참지 못하고 앞에 선 남자를 재촉했다.

“저희가 마감해야 해서요. 조금만 빨리 주문해 주시겠어요?”

“아, 죄송해요.”

주문 안 하실 거면 그냥 가셔도 되고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불만을 대신해 피터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피터의 재촉에 그제야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마스크를 내린 남자가 모자까지 벗어들며 피터와 시선을 맞추어 왔다.

피터가 방금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보아도. 두 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모자에 눌린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서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여기 뭐가 맛있어요?”

형이 왜 거기서 나와…?

MIT 근처 무명의 중국집에 미국 최고 아이돌 토니 스타크가 강림한 날이었다.

 

*

  

“이 맛이 아니야.”

“그냥 좀 드세요.”

한 입 떠먹더니 이 맛이 아니라며 접시를 저 멀리 밀어버리는 토니의 앞에 해피가 다시 접시를 끌어왔다. 다시 제 앞에 놓인 접시를 한껏 노려본 토니가 고개를 팩 돌렸다. 후. 그 모습에 해피가 요즘 들어 심신의 안정을 위해 시작한 요가에서 배운 복식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계란 볶음밥이 다 같은 계란 볶음밥이지 뭐가 달라요?”

“달라.”

“아니, 이 근처에서 배달 가능한 중국 집은 이 집이 마지막이라구요. 뭐, 5성급 호텔 쉐프라도 불러 드려요?”

아무래도 복식호흡은 큰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기어이 언성이 올라간 해피의 눈치를 슬쩍 본 토니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접시를 주워들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볶음밥을 입에 쑤셔 넣는 토니에 해피가 한숨을 쉬었다.

제 도련님에게 계란 볶음밥 귀신이 붙은 게 틀림없었다. 해외투어를 마치고 난 직후부터 이어진 토니 스타크의 기행은 그 외에 다른 설명이 불가능했다. 미국으로 돌아오면 계란 볶음밥부터 먹겠다는 토니의 계획은 미국에 발을 딛자마자 어그러졌다. 활동을 재개하면서 미국으로 부족해 전 세계를 휘젓고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보겠다며 스타크 부부가 매사추세츠 공항으로 전용기를 끌고 마중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토니는 공항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다시 비행기에 실려 캘리포니아에 있는 본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와는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지만, 어머니 마리아 스타크의 말에는 착한 아들이 되는 토니는 꼼짝없이 다음 스케쥴까지 본가에 머물렀다. 이번 활동을 마무리할 팬미팅 두 건이 다 미국 서부에 있는 주에서 열릴 예정이었기에 딱히 본가를 벗어날 핑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리아의 소원대로 본가에 머무르는 동안 토니는 화목한 스타크 가족이라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열심히 협조해야만 했다.

‘해피. 나 계란 볶음밥.’

‘네?’

‘매사추세츠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 편 좀 알아봐.’

계란 볶음밥과 매사추세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죠…? 그렇게 다시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본가에서 3주, 팬미팅을 하느라 또 2주를 보내고 난 후 갑작스레 계란 볶음밥 타령을 시작한 토니에 해피가 놀란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마지막 팬미팅을 마치고 나와 버릇처럼 메이크업한 눈을 비비던 토니가 계란 볶음밥 타령을 시작했다. 당장 비행기를 탄다고 하더라도 한밤중 에야 매사추세츠에 도착하는 스케쥴 밖에 없다고 해도 토니는 막무가내였다.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다 문 닫았을 거라니까요. 빨리 호텔로 돌아가요.’

구글 지도에 나온 세 번째 중국집의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서며 해피가 다시 한번 토니를 설득했다. 토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가장 빠른 비행편으로 매사추세츠로 날아오니 이미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라 공항에서 급하게 렌트한 차에 오르기 무섭게 토니는 차에 내장된 네비게이션에 몇 달 전 콘서트를 위해 빌렸던 연습실을 찍더니 핸드폰으로 그 주변 중국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렌터카 좌석이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면서도 토니는 기어이 해피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네비게이션의 주소를 다시 한번 수정했을 뿐이었다. 그 단호한 모습에 고작 월급쟁이인 해피는 엑셀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4번째로 방문한 중국집에는 다행히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홀 테이블을 닦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불이라도 켜져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토니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안전벨트를 푸는 손이 분주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다시 한번 마스크와 모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확인하는 토니의 모습이 딱 오해 사기 좋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피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저는 됐으니까 빨리 다녀오세요.’

계란 볶음밥 정도면 빨리 나오겠지, 했던 생각은 2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토니에 의해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11시 55분을 향해 달려가는 시계에 해피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가게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반쯤 카운터를 넘어간 토니의 옆에는 계란 볶음밥이 들어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비닐봉지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계란 볶음밥 타령을 하며 미국을 횡단한 사람답지 않게 토니의 신경은 온통 카운터 너머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가 있었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으셨어요. 볶음밥 다 식었겠는데요.”

“괜찮아. 데워 먹으면 돼. 그것보다 내가 저기서 누구를 만났게?”

토니가 가게 문을 나선 것은 문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하늘로 치솟은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탄 토니가 해피가 묻기도 전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누군데요?”

제가 그걸 알았으면 예언서 하나 써서 평생 먹고 놀았죠, 라는 말 대신 해피는 토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매년 인상된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는 해피는 투덜대더라도 토니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알았다.

“사인회에서 만났던 남팬!”

아, 예.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외치는 토니에게 해피는 무어라 반응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남팬이 희귀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토니 스타크 정도의 스타라면 남팬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토니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많은 남팬 중 한 명을 다시 만난 것이 가게 마감 시간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인가? 팬 앞에서 이미지 관리도 아이돌 가수의 미덕 중 하나였지만 힘주어 뜨지 않으면 눈꺼풀이 절로 감길 정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그 정도의 팬 서비스를 해줘야 하는 건지 해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인회에 늦어서 못 들어올 뻔했던 걔 말이야.”

“아, 걔요?”

토니의 부연 설명에 해피가 그제야 아는 체를 했다. 그때 그 팬은 해피도 기억하고 있었다. 늦게 온 것도 모자라서 토니가 남들보다 배 이상의 시간 동안 붙잡고 있었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던 그 팬은 자신의 집문서까지 넘겨줄 기세였던 팬의 얼굴이 흐릿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MIT 다닌다더니 저기서 주말 아르바이트 한데.”

제가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자 그제야 시트에 몸을 묻은 토니가 중얼거렸다. 빨리 가자 나 배고파. 

토니의 말에 그제야 한밤중 중국집 투어를 마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해피는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토니의 남팬과의 인연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

  

“안 되겠어.”

“또 뭐가요.”

“집을 하나 사야겠어.”

“투자 목적으로요?”

“아니. 내가 머물 집.”

“집은 이미 많잖아요?”

“매사추세츠에는 하나 없잖아.”

“예?”

“이런 계란 볶음밥을 먹고 살 수는 없어.”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꾸역꾸역 계란 볶음밥을 마지막 숟가락까지 입에 밀어 넣은 토니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내뱉는 말에 해피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니까 지금, 모처럼 맞은 휴식기에 온 동네 중국집에서 계란 볶음밥을 공수해오게 시킨 거로 모자라서 이제는 제 입에 맞는 계란 볶음밥을 먹기 위해 매사추세츠에 집을 사겠다는 건가? 꽤 오래 토니의 옆에서 일하며 그의 미친 짓과 소비 스케일을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발언은 역대급이었다.

빈말이 아니었는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토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그가 비워낸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에 걸려도 자신이 토니 스타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

  

“나 살쪘어?”

기름진 계란 볶음밥 냄새와 함께 차 안으로 들어온 토니가 심각한 얼굴로 제 뱃살을 두 손으로 꼬집으며 말했다

“주말마다 야식으로 그런 음식을 먹으니까 그렇죠.”

세상 심각한 토니의 표정과는 별개로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답한 해피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제 입맛에 맞는 계란 볶음밥을 먹기 위해 매사추세츠에 집을 사겠다는 역대급 미친 소리는 토니의 불같은 추진력을 만나 현실이 되었다. 휴식기에 굳이 할리우드 근처에 머물러야 하냐, 멀리 떨어져 있어야 기자들의 눈을 피해 제대로 쉴 수 있는 거라며 토니는 마리아를 설득했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해피가 듣기에는 개소리가 따로 없었지만 천재 소리를 듣는 사람이 진지한 얼굴로 하니 개소리도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토니가 마리아를 설득하기 사흘 전 이미 매사추세츠에 있는 집 계약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상태였다는 것을 해피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운동해야 할까 봐.”

“다이어트의 70%는 식단 조절입니다. 체중 감량하고 싶으시면 우선 야식부터 끊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복싱은 그렇게 운동이 안 되는 것 같아.”

아,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생각 없구나. 오랜 시간 토니의 곁을 지켜온 짬으로 지금의 토니는 남의 말 같은 건 귓등으로 튕겨내는 중이라는 걸 깨달은 해피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쉬워하는 마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자주 놀러 올게요, 라는 공수표를 날린 토니는 본가 대신 피터 (토니가 하도 피터, 피터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이제는 해피도 그 억수로 운 좋은 남팬의 이름을 외웠다)가 아르바이트하는 중국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오늘도 마지막 손님이었던 토니가 나가자마자 문에 걸려있던 Open 팻말을 Closed로 돌려놓은 피터가 종종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토니가 그제야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다. 힘없는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한 해피가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엑셀을 밟았다.

식성이 까다로운 편이 아닌 토니의 입맛에 꼭 맞는 계란 볶음밥을 파는 매사추세츠의 특별할 것 없는 중국집. 그리고 그곳에서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운이 좋은 본업 토니의 남팬, 부업 MIT 학생.

“계란 볶음밥같이 기름진 음식을 야식으로 계속 먹으면서 다이어트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정말로 체중 조절하실 생각이라면 야식을 끊으세요.”

아니면 피터한테 샐러드 가게 같은 곳으로 아르바이트를 옮기라도 부탁해보거나. 제일 효과가 좋을 것 같은 충고였지만 속으로 삼킨 해피가 다시 한번 다이어트의 정석을 읊었다.

머리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토니를 오랜 시간 보아온 해피는 그를 잘 알았다. 괜히 (아는 사람만 아는) 재앙의 주둥이 토니 스타크에게서 매년 파격적으로 인상된 연봉의 재 계약서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계란 볶음밥을 소중히 품에 안고 사이드미러에 비친 불 꺼진 중국집을 곁눈질하는 토니의 모습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스캔들은 막아 본 적 없는데. 뭐, 어떻게 되겠지.

토니를 따라 매사추세츠로 강제 이사한 지 2달째. 해피는 계란 볶음밥과 매사추세츠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

  

“이건 아무래도 이상해.”

“또 뭐가.”

한참을 책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번쩍 얼굴을 들더니 낮게 중얼거리는 피터의 말에 MJ가 먹금을 시전했다. 스파이더맨의 Guy in the Chair 자리를 노리는 네드만이 피터의 기행에 장단을 맞췄다. 네드의 반응이 반가운지 이야기보따리를 신나게 풀어놓으려던 피터가 지금 자신들이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 알았어. 이 리포트만 끝내고 나면 들어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집중해. 어?”

입은 다물었는데 입만 빼고 모든 것이 부산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집중력을 순식간에 엿 바꿔 먹은 피터의 손이 책상 위를 방황했다. 괜히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피터에 결국 MJ가 항복했다. 그제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손에 다시 펜을 쥔 피터가 몇 글자 더 끄적이더니 이내 펜 뒤꽁무니를 입으로 가져갔다.

토니는 계란 볶음밥을 좋아한다.

치즈버거, 도넛, 블루베리. 지금까지 토니가 좋아한다고 언급했던 음식 리스트에 중국식 계란 볶음밥은 없었다. 콘서트 직전 중국 음식을 먹었다고 하기는 했지만 배달도 빨리 되고 양도 많아 공연 전 체력 보충을 위해 먹었던 게 우연히 중국 음식인 줄 알았지. 토니의 그 한 마디에 곧 그만둘 예정이었던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지금까지 하고있는 덕후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피터는 진지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이돌 토니 스타크가 지금 2달째 주말마다 제가 아르바이트 하는 중국집으로 계란 볶음밥을 사러 오고 있다.

여차하면 주먹부터 내지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만든 행색으로 토니가 처음 가게를 찾았던 날, 피터는 마스크 너머 나타난 얼굴에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비 범죄자라 확신하고 있던 사람이 

자신의 최애 가수일 경우의 수는? 


마치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부 같은 이야기였지만 피터는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아이돌 미소를 띠고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메뉴가 뭐냐고 묻는 토니는 몰랐겠지만 피터는 여차하면 그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까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품이 넉넉한 후드티를 입고 있다고 해도 저 잘난 피지컬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토니 스타크인데.

그날 포스기를 두드리며 피터는 제 덕후 인생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디 가서 토니 팬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어. 저렇게 대놓고(?) ‘나 토니 스타크요’라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알아보지 못했으면서 무슨 팬이야. 반쯤 넋이 나간 피터가 입술울 꾹꾹 물었다. 이런 못난 팬이어서 미안해요. 내가 다 미안해. 제 얼굴을 보고 급격하게 말이 없어진 피터를 보고 토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피터는 듣는 이 없는 사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피터는 빈말로도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수다스러운 편에 속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몇 명 없었다. 수다스럽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입 밖으로 뱉는 말보다 속으로 삭이는 말이 많았던 피터의 수다스러움은 그가 스파이더맨 활동을 하며 봉인해제 되었다. 과학고등학교에서 MIT 트랙을 탄 공돌이 스테레오 타입에 맞게 체크무늬 셔츠를 즐겨 입는 너드 공대생 피터 파커가 아닌 스파이더맨은 그의 수다스러운 입담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파이더맨 일 때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말을 붙이며 쉬지 않던 입이 토니 앞에만 서면 강력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건 토니 스타크가 몇 달째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확실히 초반보다 발전이 있기는 했다. 처음에는 시선도 못 마주치더니 이제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언제나 똑같은 주문을 받은 다음 간단히 일상을 나누는 대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대부분 토니가 질문하고 피터는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케임브리지 거리를 걸으면 널려 있는 게 MIT와 하버드 학생인데 그런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일 뿐인 피터의 일상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토니는 매번 새로운 질문거리를 가져왔다. 주문을 마치고도 카운터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토니가 던지는 질문에 술술 대답하다가 가끔 피터가 답을 머뭇거리면 토니는 카메라 앞에 서와 같이 웃어 보였다.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물어봤지. 대학은 안 다녀 봐서 궁금한 게 많거든.

계란 볶음밥이 포장되어 나오기까지 고작 십여 분.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다리는 게 지루하면 가게 종업원하고 시시콜콜한 얘기쯤 주고받을 수도 있는 거지. 조금 전 질문은 좀 사적인 질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기는 했냐는 듯 토니의 미소 하나에 피터는 금세 태세 전환을 했다. 개연성 없는 합리화에 이성이 태클을 걸어왔지만 승리는 언제나 잘생긴 얼굴에 약한 본능의 것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한 번에 몰아치면 오히려 불안해지는 법이었다. 토니가 중국집을 3번째 방문했을 때 겨우 용기를 내 물어본 바로 토니는 이번 휴식기는 매사추세츠에서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매주 계란 볶음밥을 사러 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왜 배달을 시키지 않고 매번 직접 주문하러 오냐는 질문은 토니가 5번째 방문했을 때 했다. 마침 제가 배달을 나갔을 때 왔다는 토니는 피터가 돌아올 때까지 주문도 하지 않고 홀의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용 오토바이가 가게 앞에 서는 모습을 보고 저보다 먼저 포스기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던 토니의 주문을 받으며 피터가 물었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보안 문제지.’

매사추세츠에 집을 구할 때 집 전체적으로 보안 시스템도 업그레이드했고 경호원들도 24시간 대기 중이지만 그래도 검증되지 않은 타인을 집 가까이 들이기는 꺼려진다는 대답에 피터는 쉽게 수긍했다. 토니 스타크 정도의 스타라면 당연히 그럴 만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화였다.

‘이 집 볶음밥이 입에도 맞고, 또 날 좋아하는 팬도 있어서?’

손님과 점원의 평범한 대화가 순식간에 팬과 팬을 조련하는 아이돌의 대화로 탈바꿈했다. 겨우 토니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던 피터가 다시 토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 다 부숴버려 진짜. 콘서트 이후 다시금 최애에 대한 애정이 뇌를 잠식해 피터 안에 잠들어 있는 폭력성을 일깨웠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토니의 조련이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것이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숙여진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토니의 웃음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순간 토니가 말해줬던 자신도 몰랐던 버릇이 – 부끄러우면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어 동그란 뒤통수만 보인다고 했다 – 떠올라 피터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매번 와서 이렇게 놀리기만 하는 토니에 대한 서운함이 불쑥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카운터에 상체를 기댄 채 여전히 웃음을 그칠 줄 모르는 토니의 얼굴이 웃느라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온 얼굴을 다 사용해 최선을 다해 웃는 그 모습도 멋있어서, 피터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다 그런 법이죠. 자기 가수한테 이기는 팬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토니가 저를 좋아하는 피터 파커라는 팬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니 다행이라고 그때의 피터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피터는 불안해졌다.

왜 갑자기 이렇게 운이 좋지?

놀랍게도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토니가 7번째 매장을 방문한 날, 팬미팅을 마지막으로 지난 앨범 활동을 마무리한 토니가 슬슬 다음 앨범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라는 말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4번째 계란 볶음밥을 사러 왔을 때 이번에는 좀 길게 쉴 생각이라더니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기에는 좀이 쑤신다며 피터의 노래 취향을 물어왔다.

토니의 질문에 여전히 열린 문이었던 입과는 달리 피터의 머릿속에는 한 문장만이 동동 떠다녔다.

왜 갑자기 이렇게 운이 좋지?

… 나 토니가 다음 앨범 활동할 때 티켓팅 다 광탈 당하는 거 아니야?

덕후라는 존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생명체였다. 매주 바로 코앞에서 최애 가수 사생활의 일부를 공유해도 무대 위의 최애를 영접하는 것 또한 놓칠 수 없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발을 동동 구르다 결정장애를 일으킬 사람들이 바로 덕후였다. 그리고 그건 피터 파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피터는 고민에 빠졌다. 제 덕질 운을 이렇게 매주 토니 스타크를 만나는 것으로 까먹고 있는 것이라면 당장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정신 챙기고. 가자.”

피터가 덕질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리포트를 마무리한 MJ가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책과 노트북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제출하기 전 한 번 더 검토해야 했지만 펜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친구를 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터프하게 가방을 챙긴 MJ와는 달리 반 박자 느리게 반응한 피터가 저 또한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물건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쓸어 넣었다.

“별일 아니면 밥 사.”

근처 카페로 자리를 이동하며 MJ가 다시금 부산스러워진 피터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MJ의 말을 듣기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피터의 고개가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별일이지. 완전 별일이고 말고.

피터는 긴장된 표정으로 MJ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토니 스타크가 매주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중국집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지금 처음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토니의 다음 앨범 활동 때 써먹어야 할 자신의 덕질 운을 위해 그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할지도 같이 물어볼 생각이었다.

 

*

  

온몸에서 볶음밥 냄새가 진동했다. 입으로 볶음밥을 먹은 게 아니라 옷으로 먹은 모양이었다. 안 되는데. 1인분 이상은 먹으면 안 돼. 더는 배에 지방 쌓이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요즘 이 볶음밥 먹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운동 하는데.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진동하는 볶음밥 냄새를 맡으며 토니가 웅얼거렸다. 아니, 정말로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후각을 점령한 계란 볶음밥 냄새와,

“괜찮아요, 토니?!”

시야를 가득 메운 웃긴 조리개가 달린 마스크. 조금 전까지 차에 붙어있던 문을 한 손으로 멀리 던져버린 스파이더맨이 토니, 토니 시끄럽게도 제 이름을 불러 댔다.

눈 감지 말아요. 정신 차려요. 나 누구인지 알겠어요?

“그럼.”

멈추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스파이더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종잇조각처럼 차 문을 뜯어 던져버린 것과는 달리 저에게 뻗어진 손이 조심스러웠다. 커다란 두 눈을 꿈뻑이며 그 손을 바라보던 토니가 당연하다는 것을 묻는다는 듯 말했다.

“스파이더링이잖아.”

계란 볶음밥 냄새나는.

 

*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터는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못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써야 할 리포트가 남았다며 커피를 주문한 MJ의 표정이 피터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짜게 식었다.

‘미친놈. 냉수 마시고 속 차려.’

그래서, 나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할까? 길고 긴 피터의 이야기가 그렇게 끝났을 때, MJ는 터프하게 아이스 커피의 얼음을 씹어 먹었다. 리포트 쓰는 것도 미루고 고민 상담해주러 왔더니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불러낸 거냐며 거하게 욕을 얻어먹은 피터는 사죄의 의미로 밥을 사야 했다. MJ의 팩트 폭력에 – MIT를 다니면서 네가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다 – 잔뜩 풀이 죽은 피터는 버릇처럼 그들이 자주 가는 학교 근처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저렴한 가격에 양은 많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학생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잘만 먹던 중국 음식을 MJ가 퇴짜 놓았다. 그놈의 중국집하고 계란 볶음밥 얘기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며 중국집 옆에 자리한 애플비로 들어간 MJ가 열 받은 만큼 음식을 시키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얇은 피터의 지갑이 한층 더 얇아졌다.

 

*

  

“발라드? 의외네.”

“뭐가요?”

“발라드는 딱히 퍼포먼스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 내가 노래도 노래지만 또 한 춤 실력 해서 너도 댄스곡 좋아할 줄 알았지. 보통 남자 팬들은 그런 무대 좋아하지 않나?”

“댄스곡도 물론 좋아하지만,”

지난 앨범 타이틀 곡의 메인 댄스를 짧게 선보이는 토니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피터가 카운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얇아진 지갑을 다시 채우기 위해 피터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없었고 지금도 이렇게 빼놓지 않고 찾아온 토니의 말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노 메이크업 상태로 사복을 입고 찾아오는 손님 토니 스타크에게는 그럭저럭 적응했지만, 가끔 저렇게 튀어나오는 아이돌 같은 모습의 토니 스타크를 가까이서 보는 일에는 아직 면역이 없었다. 게다가 토니가 방금 선보인 동작은 피터가 처음 보자마자 꽂혀서 뮤직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가며 나노 단위로 앓았던 부분이었다. 토니가 그 사실을 알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부끄러워진 피터가 큼큼, 헛기침했다.

“그래도 저는 토니가 부르는 발라드가 좋아요.”

토니는 목소리가 좋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는 노래 취향을 말하는 것뿐 인데도 뒷목이 화끈거리는데 저 말까지 했다가는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가 될지도 몰랐다.

“그럼 이번 앨범은 발라드 위주로 채워볼까?”

“굳이 저 때문이라면 안 그러셔도….”

“아니야. 갑자기 발라드가 너무 부르고 싶어졌어.”

좁은 중국집에서 피터 파커 한정 팬미팅이 다시 열렸다.


팬미팅 참가 조건이 무엇이죠?

토니 스타크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국집의 아르바이트 계약서입니다.

저런,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네요. 그 팬미팅 대상자는 몇 명이죠?

세상에 단 한 명, 피터 파커군입니다!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 후드티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데도 아이돌은 아이돌이었다. 별거 아닌 립서비스라도 웃으며 해주니 심장에 무리가 와서 피터가 다시 큼큼, 헛기침했다. 저 잘생긴 얼굴은 심장에 안 좋다. 제가 초인이 아니라면 벌써 심정지가 왔을 것이 분명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피터를 구해주기 위해 때마침 주방에서 포장까지 끝난 계란 볶음밥이 나왔다.

“주문하신 계란 볶음밥 나왔습니다.”

“작업 끝나면 제일 먼저 들려줄 게.”

속으로 나이스 타이밍이라 외치며 재빨리 건넨 하얀 봉투를 받아 든 토니가 윙크를 남기고는 가게를 나섰다. 매주 봐서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벤으로 걸어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피터의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무사히 제 가수를 영접하고도 주접을 떨지 않고 품위를 지켜낸 안도의 한숨이었다. 

 

*

  

‘티켓팅 광탈이 걱정되면 부탁이라도 해보던가.’

빌지를 든 손을 벌벌 떠는 피터를 바라보며 디저트로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MJ가 던진 말에도 피터의 시선은 빌지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이, 이 금액이면 내 3일 치 식비인데. 눈물을 머금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피터의 모습에 MJ가 입으로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 나르던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그 사람한테 말이야.’

‘뭘?’

‘네가 팬인 걸 알면서도 계속 오는 걸 보면 네가 콘서트 티켓 한 장 정도 달라고 해도 거절 안 할 거 같은데.’

자기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다시 아이스크림 그릇 비우기에 집중한 MJ에 피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역시 덕후가 아니다 보니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머글은 달랐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토니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이면 티켓 한 장 정도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MJ에게 조언을 구했다가 거하게 욕을 얻어먹은 날, 피터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MJ에게 커피 한 잔을 더 사주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대안을 제시해줘서 고맙다며. MJ는 그런 피터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졌으나 감사 인사는 마다하지 않았다.

토니가 올라탄 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게 밖을 바라보던 피터가 이내 양손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토니에게는 팬 서비스 정도일지 몰라도 이 정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면 부탁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티켓 가격은 정당히 지불하고. 팬 서비스일 테지만 제가 좋아한다는 말에 다음 앨범은 발라드로 채우겠다며 가게를 떠나간 토니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문에 걸려있는 팻말을 Closed로 돌린 후 주방으로 걸어가는 피터의 발걸음은 다른 날보다 배는 가벼웠다.

 

*

  

“괜찮아?”

전자레인지로 급하게 데운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대신 받아 든 MJ가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피터의 등을 쓰다듬었다. 머그잔을 넘겨주고 피터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네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흐트러진 잠옷이 두 사람이 한밤중에 급히 침대 밖으로 달려 나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 고마워.”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잠을 깨운 것도 모자라 걱정까지 끼친 피터가 작게 사과했다. 조금이라도 두 사람의 걱정을 덜어보고자 MJ의 손에 들린 머그잔을 넘겨받으려 했으나 여전히 형편없이 떨리는 두 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편 피터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미안, 우유는 조금 있다가 마실게.”

“괜찮을 거야. 네가 구했잖아.”

“맞아.”

그런 피터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는 손이 하나 더해졌다. 그런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피터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토니의 사고 장면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

  

토니는 포장 주문 손님이었기 때문에 마감 시간에 맞춰 가게를 나선다고 해도 피터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일은 없었다. 가게 앞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재차 확인한 피터가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가게 후문으로 나섰다. 자정에 가게가 마감하는지라 버스는 끊긴 지 오래였다. 기숙사까지 7블록이나 되는 거리는 한밤중에 걸어가기에는 조금 먼 감이 있었지만 스파이더맨인 피터에게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은 그리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피터는 토니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한 도시를 걷는 일을 꽤 좋아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토니는 언제나처럼 계란 볶음밥을 사 갔고, 피터는 토니의 노래를 들으며 기숙사에 돌아와 씻고 잠들면 되는.

그런 평화로운 일상이 어그러진 것은 순간이었다. ‘퇴근길’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피터의 플레이리스트가 반쯤 지났을 무렵, 끼긱-거리는 날카로운 타이어가 끌리는 소리가 피터의 귀에 파고들었다. 소리만 들어도 교통사고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에 피터가 재빨리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범죄 위험 때문에 새벽의 도심지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부상자가 있을지 모르는 사고 현장에서 빠른 대처와 신고가 어려운 환경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피터는 망설임 없이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쓰고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교통사고를 당한 부상자를 함부로 옮기는 일은 부상을 심화시킬 수 있으니 지양해야 한다고 했지. 불 꺼진 건물들 사이로 활공하며 피터가 교통사고 발생 시 대처요령을 되새겼다.

급정거했는지 타이어가 마찰열에 녹아 남은 검은 스키드 자국이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타이어 자국은 가로등을 들이받고 멈추어 선 흰색 SUV 차량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 흰색 SUV의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운전석 문을 열고 자력 탈출한 상태였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 있는 차는 한 대만이 아니었다.

하얀색 차에 들이 받힌 것인지 뒷부분이 엉망으로 찌그러진 채 옆으로 엎어져 있는 검은색 벤은 매주 중국집 앞에 서서 토니를 기다리는 차였다.

“… 토니!”

피터는 머릿속이 하얗게 새어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기 무섭게 토니 스타크의 사고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연예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Fox와 NBC 뉴스까지 그의 사고를 보도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새벽에 귀가하던 토니 스타크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돌진한 차량에 들이 받혔다. 술에 취해 중앙선조차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음에도 사고 직전 핸들을 꺾어 자신을 보호할 정신은 있었던 가해자에 대한 질타가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모두 토니 스타크의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고를 수습하고 돌아온 피터와 함께 밤을 새운 네드와 MJ만이 토니 스타크의 사고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토니가 나온 음악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을 모조리 섭렵했던 것과 같이 피터는 토니의 사고 소식에 대해 한 줄이라도 언급한 모든 방송과 기사를 빠짐없이 챙겨 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기사도 피터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피터, 마감.”

“아, 아 네.”

한참을 토니가 언급된 기사를 찾아 클릭하는 피터가 등을 두드리는 손에 퍼뜩 몸을 떨었다. 토니 스타크의 사고 이후 어딘가 넋을 빼놓고 있는 것 같은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주방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제야 시계를 바라본 피터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을 확인하고 가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안 왔구나.

미련이 남은 눈으로 가게 밖을 바라보던 피터가 힘없는 손길로 마른행주를 주워들었다. 많은 기사들이 사고를 당한 토니 스타크를 도와준 스파이더맨을 그의 은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이 아닌 피터 파커는 그저 토니 스타크의 수많은 팬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토니 스타크가 찾아오지 않으면 어디로 찾아가야 그를 만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팬. 다시금 토니와 자신의 관계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우울해진 피터의 손이 힘없이 테이블 위를 훔쳤다.

토니가 사고를 당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매주 자신을 좋아하는 팬이 있는 중국집에 계란 볶음밥을 사러 오던 토니 스타크가 나타나지 않은 지도 3주째였다.

 

*

  

[계란 볶음밥 드시고 싶으시면 배달이라도 시키세요. 피터는 믿을 수 있잖아요.]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다니까?”

[식사를 잘 챙겨 드시고 계시면 언론에도 멀쩡한 모습 좀 보여주세요. 회사 측에서 토니가 멀쩡하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는 했지만 사진이 없으면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언론뿐만 아니라 팬들 마음 졸이고 있을 것도 생각해 주셔야죠. 피터도 걱정하고 있을 텐데.]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나아서 퇴원이나 해.”

순식간에 빨간색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린 제 손가락에 놀란 토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해피가 하는 말이 모두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툴툴대기는 했지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고, 그저 해피의 입에서 나온 피터의 이름에 지레 놀랐을 뿐이었다.

【꼭이예요.】

【알았어.】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 위로 해피의 문자가 떠올랐다. 짧은 문자에 차마 받지 못한 다짐을 문자로 받을 생각이라는 게 눈에 보여 토니 또한 짧게 답을 했다. 문자를 보낸 후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토니가 비장한 결심을 한 표정으로 인터넷 창에 주변에 있는 배달 음식점을 검색했다.

사고로 이전에 사용하던 핸드폰이 망가지는 바람에 새로 구입한 신형 핸드폰에는 예전 검색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구글이 나열한 음식점 리스트 중에서 익숙한 이름의 중국집을 찾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이 이미 몇 번은 해본 것처럼 익숙했다. 몇 번의 스크롤 끝에 제가 원하는 식당을 찾은 토니의 손가락이 11자리 전화번호 위에서 방황했다.

누를까, 말까.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토니가 작게 욕을 하며 핸드폰을 쇼파 저편으로 던졌다. 해피와의 통화를 제멋대로 끊어버린 제 손가락이 이번에는 멋대로 중국 음식점 번호로 전화를 걸까 두려웠다. 쿠션에 맞고 떨어져 뒤집힌 핸드폰을 씩씩거리며 바라보던 토니가 이내 손을 들어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연습실 근처에서 만난 계란 볶음밥 냄새가 나는 스파이더맨

연습실 근처 중국집에서 만난 계란 볶음밥 냄새가 나는 피터.

두 손을 공손히 내밀어 악수한 스파이더맨.

두 손을 공손히 내밀어 카드를 받아 간 피터.

웃긴 마스크에 감싸여진 뒤통수가 동그랬던 스파이더맨.

부끄러움에 숙여진 뒤통수가 귀엽고 예쁜 피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토니, 제 이름을 부르던 스파이더맨.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토니,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피터.


사고 후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에 토니가 아악, 소리를 지르며 멀쩡한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니까, 토니 스타크는 머리가 좋았다. 특히 한 번 만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하는 데는 도가 텄을 정도였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는 얘기 아닌가?”

쿠션에 얼굴을 묻고 악, 아악! 소리를 지르던 토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내가 한 번 본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잘 기억한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틀렸을 수도 있잖아?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이번이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게 아닐까? 

하지만 제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그 새벽,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에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자신의 사고 현장에 그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었을까?

왜겠어. 마침 사고가 난 곳이 스파이더맨인 피터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그렇겠지.

“…. 하.”

불특정한 대상에 대해 충만했던 전투력이 맥없이 풀렸다. 몇 번을 부정하려 해봤지만 이보다 논리적인 결론은 없다. 물증 없이 심증만 가득했지만 토니는 확신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정체는 본업 토니 스타크의 팬, 부업 MIT 공대생인 피터 파커였다.

 

*

  

저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보고 가셨잖아요. 네네. 저도 사랑해요, Mom.

두 입술을 맞붙여 쪽 소리를 낸 토니가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오랫동안 이어진 통화에 조금 멍한 기분이 들어 두 눈덩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자 찌르르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오랜 시간 핸드폰에 밀착되어 있던 귀가 뜨끈했다. 자신이 멀쩡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갔음에도 제 어머니, 마리아의 걱정은 그칠 줄 몰랐다.

토니의 사고 소식에 마리아는 바로 전용기를 띄워 매사추세츠로 날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혹시라도 잘못됐을까 봐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못한 마리아가 병원을 둘러싼 기자들을 해치고 토니의 병실로 들어섰을 때, 토니는 병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간호사에게 오렌지 주스를 부탁하고 있었다. 왼팔에 깁스를 하고, 뺨을 반 이상 덮는 거즈를 붙이고 있기는 했지만 토니는 꽤 멀쩡한 상태였다.

‘Mom?’

‘토니 너, 교통사고, 음주운전…’

사고를 당한 자신보다 더 놀란 듯 깁스를 한 왼팔을 더듬으며 묻는 모습에 토니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마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저 괜찮아요.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 스파이더맨이 구해줘서. 팔에 금 간 것만 빼면 찰과상 수준이래요.’

‘해피가, 네가 정신을 잃었다고…’

‘아, 그건 단순한 뇌진탕, 아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검사 다 해봤는데 멀쩡해요. 정말로.’

교통사고 후 뇌진탕 증상으로 가끔 두통이나 어지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말까지 하면 그 자리에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마리아의 표정에 토니가 안심하라는 뜻을 담아 마리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저 멀쩡히 말도 잘하잖아요.

‘그럼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죄송해요. 핸드폰이 망가져서….’

그제야 환자 침대 옆에 놓여있는 보호자용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는 마리아에 토니가 재빨리 용서를 구했다. 제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외아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 새벽에 전 세계 어디로든 전용기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고 당시 차 밖으로 튕겨 나가 액정에 거미줄처럼 금이 간 제 핸드폰을 핑계로 삼은 토니가 마리아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여러 검사를 받고 겨우 병실로 옮겨지고 겨우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운해할 마리아를 알기에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통화 한 번에 배터리가 반이나 닳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침대 위로 던진 토니가 조심스레 그 옆에 누웠다.

빽빽한 스케쥴 탓에 3일 만에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마리아는 매일 같이 토니에게 전화를 걸어 걱정을 늘어놓았다. 병원을 퇴원한 후 토니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그 걱정은 극에 달했다. 21살을 애저녁에 넘긴 아들을 아직도 물가에 홀로 내놓은 어린아이같이 취급하는 마리아는 제 아들이 사고에 대한 후유증으로 집 밖으로 나서기를 꺼린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쉬다 보면 좀 나아지지 않겠니? 이제 곧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 텐데 매사추세츠는 너무 춥지 않을지 걱정이구나.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는 마리아를 겨우 달랜 토니는 마리아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꼬르륵.

아니, 정정. 왼팔에 한 반깁스와 비어 있는 배를 제외하면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뼈에 금이 간 왼팔은 반깁스 6주 처방을 받았다. 보안 등 여러 이유로 병원에서 제일 좋은 1인실에서 약 일주일간 입원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밍밍한 환자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다.

토니가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피넛 버터 앤 젤리 샌드위치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냉장고에서 피넛 버터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토니는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열고는 했던 뚜껑이라 퇴원 전 되도록 팔에 무리가 가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잼 뚜껑을 여는 것도 포함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결과적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는 피넛 버터 뚜껑을 열기 위해 왼손에 힘을 주었던 토니는 곧 왼팔을 붙잡고 부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정작 팔에 금이 갔을 때에는 정신이 없어 아픈 줄도 몰랐는데 잼 뚜껑 한 번 열려고 했다가 지옥을 맛본 토니의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한참을 왼팔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부엌 바닥에서 일어난 토니는 원수 같은 피넛 버터 통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며 맹세했다. 뼈가 다 붙었다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핸드폰보다 무거운 물건은 절대 들지 않겠다고.

핸드폰보다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는다고 해서 토니가 불편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는 원래도 집안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소와 빨래 모두 매사추세츠에 집을 사며 고용한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토니가 현재 겪고 있는 몇 안 되는 불편한 점을 꼽자면 식사와 이동수단의 부재 정도였다.

토니는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딱히 강하지도, 그렇다고 먹는데 욕심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식사(와 약간의 간식)만 주어진다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토니의 식사는 주로 해피가 책임지고는 했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붙어 지내는 바람에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침에는 커피와 블루베리 베이글, 혹은 도넛. 점심은 보통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며 간단한 테이크아웃 음식들. 그리고 저녁은 체중 조절을 위해 간단한 샐러드 종류. 이렇게 식사를 챙기기 까다롭지 않은 토니가 배를 곯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해피가 아직 입원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방에는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간식거리를 꺼내기 위해서만 드나들었던 인물이 할 줄 아는 음식이 있을 리 없었다. 청소와 빨래를 해주시는 다른 고용인들처럼 식사를 책임질 분을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조차 다 해피가 처리했기 때문에 토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해피가 퇴원할 때까지 내가 해 먹으면 되지.

무엇보다 자신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귀찮았던 토니는, 저보다 아픈 사람에게 일을 시킬 정도로 자신은 상식 없는 사람이 아니라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열리지 않는 피넛 버터 잼을 다시 냉장고 깊숙이 처박을 때까지만 해도 토니는 제가 해피 없이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토니는 이틀도 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아주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꺼멓게 탄 세 번째 오믈렛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며 토니는 그제야 제가 음식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토니가 몸을 일으켰다. 음식에 소질이 없는 토니가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찬장에 남아있던 식빵으로 토스트를 해 먹거나, 아니면 냉동실에 보관 중이던 레토르트 식품을 데워 먹거나. 며칠째 그런 음식들로 대충 끼니를 때워 두 가지 모두 그다지 끌리지 않는 옵션이었지만 운전을 해서 마트에 갈 수도, 보안상의 문제로 배달도 꺼려지는 토니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부엌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토니는 오늘 제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은 음식들을 떠올렸다. 아침은 생각이 없어서 걸렀고 점심은 귀찮아서 토스트로 때웠다. 그러니 저녁은 레트로트 식품으로. 부엌까지 걷는 동안 메뉴를 정한 토니가 냉동실 문을 벌컥 열었다. 스파게티, 리조또, 햄버그. 이건 어제 먹었고, 저건 엊그저께 먹었고. 하루에 하나씩 다른 종류의 레트로트 식품을 돌려먹다 보니 이미 한 번씩은 다 먹은 음식뿐이었다. 배는 고픈데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보이지 않자 토니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플라스틱 용기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뒤편 어딘가에 아직 자신이 먹지 않은 종류의 레트로트 식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그렇게 한참을 냉동실을 비우던 토니의 눈에 드디어 처음 보는 포장지가 들어왔다. 역시. 앞에 있는 다른 식품들에 가려 이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종류의 레트로트 식품을 찾기 위해 냉동실을 발굴하는 동안 더욱 배가 고파진 상태였기에 토니는 단숨에 그 제품을 저녁으로 낙점 지었다.

“드, 디어…!”

냉동실 제일 뒤편에 놓여있는 바람에 어깨까지 다 집어넣어서야 겨우 손이 닿았다. 손가락 끝에 포장지가 걸리기 무섭게 힘을 주어 끄집어낸 토니의 입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냉동실에 방치되어 있었는지 포장지 겉면에는 하얀 성에가 잔뜩 끼어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으로 너를 먹어주지. 냉동실을 발굴하느라 전투력이 충만해진 토니가 조리 방법을 찾기 위해 손가락으로 포장지 위를 문대었다.

《XX 볶음밥》

손가락의 온기에 성에에 가려져 있던 식품의 이름이 드러났다. 잠시 눈앞에 드러난 이름을 바라보던 토니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이거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그렇지?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 내가! 어떻게! 볶음밥을 주문하지 않고 냉동실을 뒤졌는데! 갑자기 끓어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토니가 쾅, 소리가 나게 손에 든 볶음밥 용기를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 진짜!”

부엌 한가운데에 있는 아일랜드를 쿵쿵 발소리를 내가며 뱅글뱅글 돌던 토니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렀다. 일주일 전 통화했던 해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란 볶음밥 드시고 싶으시면 배달이라도 시키세요?’ 내가 진짜 계란 볶음밥이 좋아서 매주 먹은 줄 알아?! 내 옆에서 몇 년을 있었는데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몰라! 왜 화가 났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토니의 분노가 애꿎은 해피에게 튀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싱크대 위에 놓인 즉석 볶음밥을 노려보던 토니가 후다닥 침실로 달려갔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 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손에 쥔 토니가 망설임 없이 11자리 숫자를 누른 후 통화 버튼까지 눌렀다. 한 번도 통화 버튼을 눌러본 적은 없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검색했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쯤 토니 스타크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 ….”

끊을까.

패기롭게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 무색하게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토니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누른 몇 초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 지금이라도 끊으면,

[네, XX Chinese Restaurant입니다.]

“… …”

빨간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기 무섭게 통화 연결음이 끊겼다. 수화기를 넘어온 목소리는 귀마개를 하고 들어도 피터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통화를 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못한 채 굳어 있는 토니를 알 리가 없는 피터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수화기를 넘어왔다.

[손님?]

“… 배달되죠?”

계란 볶음밥만 주문하려고 했더니 배달은 10달러가 넘어야 한다고 해서 두 개를 주문했다. 주소를 불러주고 계산은 카드로 하겠다는 말까지 마친 후에도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토니에게 피터는 빨리 배달해주겠다는 말을 남긴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는 바람에 여전히 밝게 켜져 있는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토니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


아, 저질렀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91,960 공백 제외
23,0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