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기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초등학생의 열 줄짜리 일기를 나는 두 장이고 세 장이고 쓸 수 있었다. 세상에는 뭐 그리 얘기할 게 많은지. 어제의 날씨, 내일 놀러 가기로 한 친구들과 길거리에 지나치는 꽃까지 별것이 다 흥미로웠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이야기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인생에서도, 이 남자만큼이나 이야기가 많은 사람은 없을 거다.

왕자다. 무려 왕자. 한 나라의 왕자. 둘째도 셋째도 아니고 차기의 왕위가 약속된 장자. 아프리카 한 작은 나라의 왕자라지만, 내가 인생에서 본 가장 기품 넘치는 사람이다. 목소리는 위엄있지만 부드럽고, 손짓 하나하나에 매너가 넘치고, 무엇보다 참 착하다. 아주 착하다. 적어도 나에게 그는 그랬다. 

나는 유학생이다. 이 물가 비싼 영국에서, 대학을 다녀보겠다고 아등바등.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도 하고 과제까지 내려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는데, 아쉽게도 하나뿐이라서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래도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이 사람이 나타났다.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 아니, 요즘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건 비브라늄이라고 하나? 그의 나라가 비브라늄을 만들어 낸다고 들은 것 같으니 비브라늄 수저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비브라늄 수저 왕자님이 나와 같은 수업을 들을 때 나는 참 놀랐다. 우와, 왕자다. 그와 같이 첫 수업을 들었을 때, 그는 강의실 가장 뒷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날 아르바이트 때문에 수업에 조금 늦었으므로 그가 앉은 줄, 맨 뒷줄에 앉아야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다. 나같이 늦은 사람인가,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곁눈질로 스쳐본 그가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강의가 끝나갈 때 즈음, 펜을 떨어뜨렸을 때 그가 주워주기도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그는 아프리카 악센트가 묻어나는 영어로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답했다. 그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첫 수업에 친구나 만들까 생각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그는 자신을 트찰라라고 소개했고,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이름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났다.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서야, 나보다 먼저 와서 저 앞줄에 앉아있던 친구가 후다닥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친구는 내 옆에 앉아있던 게 와칸다라는 국가의 왕자라고 했고, 나는 놀라서 까무러칠뻔한 것을 겨우 다스렸다. 그가 주워준 펜은 고이 손수건에 싸여 아직까지 내 소중한 것들을 넣어놓는 서랍장 맨 마지막 칸에 들어있다. 그날 저녁, 흥분해서 다섯 장 반을 써 내려간 일기도.

다음 수업을 들어왔을 때,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맨 뒷줄, 똑같은 자리에 앉아 초조하게 전공 책을 뒤적이고 있을 때, 옆에서 낯이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튀어나갈 뻔했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웃었고, 내 얼굴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빨개지자 그제야 미안하다며 웃음을 멈추었다. 나는 조금 심술이 났지만, 그래도 왕자에게 멋대로 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수업이 시작했고, 어쩐 행운인지 옆에 앉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활동이 교수님에게서 내려왔다. 나는 뻣뻣이 굳어있었건만, 그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당겨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제야 아주 조금 몸을 움직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그에게 세계 패권국의 권위와 의무에 대해서 생각을 발표했고, 내 말이 끝나자 그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고 칭찬해줬다. 나는 얼굴에 피가 몰리지 않도록 얕은 심호흡을 했다. 그는 곧 그의 생각을 발표했다. 그의 식견은 내 것에 비하여 너무 넓고 깊어서, 방금 받은 칭찬이 조금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나는 조금 더 자세히 경청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누구의 것보다 잘 들렸다. 그의 말이 끝나고, 나는 대단하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지만, 최대한 그 대단함을 다양한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고맙다면서 웃었다.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다 말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날아왔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영국 대학을 다니고 있고, 고민거리라면 나를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기 껄끄럽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가볍게 입을 열었다. 똑같이 공부를 위해서 영국에 왔다고, 많이 배워서 돌아가고 싶다고, 영국 음식이 맛이 없어서 조금 힘들다고-나는 여기에서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의 유일한 접점일 것도 같아서-. 대화가 끝나고, 조금은 친밀해진 기분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일어났고, 시간이 되면 같이 차나 한잔하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기뻐서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웃으며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오늘 일기장을 오래, 아주 오래 붙잡고 있을 걸 알았다. 

그날 나는 강의실에 일찍 도착했다. 아르바이트가 취소되어서 할 게 없었다. 친구들은 다들 그전 시간 수업 때문에 같이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고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른 시간에 수업을 들어갔다. 강의실이 텅 비어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한 확률로, 그가 있었다. 놀라서 자리에 먼저 앉아있는 그를 부르자, 그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보던 책을 덮었다. 나는 그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차가 일찍 도착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그가 덮은 책을 살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책이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친절히 그의 나라 와칸다의 책이라고 설명해줬다. 나는 검은색의 신기한 그림들을 살피며, 글이 참 멋있다고 칭송했다. 그는 고마워했고, 나는 혹시 와칸다가 그리운지 물었다. 서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끼리 잘 맞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칸다가 참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이 세상 석양 중 가장 아름다운 빛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그가 하나하나 나열하는 와칸다의 자연을 새겨들으며, 이런 사람이 난 곳이라면 분명 좋은 곳일 거라고 여겼다. 나는 내 고향에 대해서도 말했다. 하늘도 예쁘고, 사람들도 착하다고. 조금은 횡설수설한 말이었지만, 친절한 그는 내 말이 끝나자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은 나라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상기되어서, 나도 와칸다에 가보고 싶다고 알렸다. 그는 웃으면서, 꼭 와 달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와칸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날 밤 집에 돌아가서, 그가 설명했던 와칸다의 특징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석양, 동물, 산, 비, 그리고 그 사람까지. 페이지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일기장이 예상보다 빨리 다 되어서, 하나 더 사야겠다는 사족도 함께.

그날은 그와 함께 듣는 강의가 없었다. 나는 공강 시간을 이용해서 새 일기장을 사러 잠시 학교를 나갔었다. 원하는 일기장이 있는 문구점은 조금 멀었기에, 다음번을 대비해서 넉넉하게 몇 권 사 들고 문구점을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꽤나 큰 소나기가. 우산을 사기에는 마침 돈이 다 떨어졌었고, 그렇다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자니 다음 수업에 늦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먹고 빗속을 달렸다. 일기장이 젖지 않게 품속에 넣고 뛰자니, 참 힘들었다. 비는 오고, 횡단보도 신호는 걸리고, 옷은 다 젖어서 엉망이고. 기분이 실시간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내가 막 신호가 변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고, 저쪽 도로변에 서 있는 비싼 차 한 대가 보였다. 나는 그게 그라는 것을 직감했다. 몇 발자국을 더 달려 차로 다가가자,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예상한 대로 그가 보였다. 나는 그가 손짓하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가죽 시트 위에 앉은 후에야 흠뻑 젖은 옷을 알아차리고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으며-왜 차에 수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 싶었다. 롤스로이스는 기사석에 따뜻하게 준비된 우산이 있다고 하니까- 연신 감사를 표했고, 그는 별 것 아니라며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나는 잠시 문구점에 들렀다가 우산이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앞좌석에는 저번에 본 적 있는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다니는 비서인 듯했는데, 키가 참 커서 내가 부러워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맙게도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고, 나는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분명 아주아주 비싼 차를 타고 학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새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열면서,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어내려갔다. Dear T'Challa, 직접 전하지 못하는 편지지만, 참 고맙다고. 덕분에 편하게 왔다고. 적다보니 푸념이나 그에 대한 막연한 칭찬까지 더해져 많이 길어졌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그려내는게 참 재미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날 트찰라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수업에, 딱 하나 그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물론 그는 왕자고, 왕자는 보통 바쁘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거겠지만, 항상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괜스레 마음이 심란했다. 결국 그날 수업은 텅 빈 옆자리를 훔쳐보느라 날려먹었다. 교수님이 시험에 나온다고 했는데. 옆을 돌아보고 칠판을 바라보는 걸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포기했다. 집중 못했다. 집에 돌아가서 일기장을 펼쳤다가, 쓸 마음이 나지를 않아서 덮어버렸다. 

일주일 가량 지나서, 그가 돌아왔다. 나는 강의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그를 보자마자 놀라서 어떻게 된거냐고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고, 그는 잠시 고향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와칸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라면 오래 걸릴만도 하다. 확실히 왕자는 바쁜 모양이지, 학기중에도 돌아가야하는 일이 있는 걸 보면. 내가 그렇게 납득을 하고 책을 펼치려고 할 때, 그가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수업이 시작한 직후라서 무언지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살폈다. 종이. 두꺼운 종이 몇 장. 사진이었다. 화려한 석양과 푸른 초원, 동물들까지 그가 설명한 와칸다의 자연과 꼭 닮은. 수업을 마치고 그에게 무언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바쁜 듯 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를 노려보던 비서 아가씨도 있었다. 여전히 키가 컸다. 그렇게 바쁜가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지만, 그래도 그가 다시 왔다는 것이 기뻤다. 저녁을 먹고 일기장을 펼쳤을때야 나는 알아차렸다. 사진 뒤에 적힌 짧은 편지, 그리고 봉투 깊숙히 들어있어서 보지 못한 작은 펜던트. 펜던트의 끝에는 보랏빛이 도는 작은 돌이 매달려있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먼저 살폈다. 처음 보는 그의 글씨는 참 멋있었다.  마치 그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은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 살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랐다면 미안하다고. 일이 조금 바빴다고. 여기 이 사진들이 그때 말한 와칸다의 자연이라고,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동봉한 작은 펜던트는, 무어라 설명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와칸다의 특산품 같은 물질이라고. 기념품 조로 받아주면 고맙겠다고. 추신으로, 와칸다가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번에는 꼭 직접 와서 보라고. 여행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나는 집 안의 모든 액자를 비우고 그가 준 사진들을 고이 담아 벽에 걸었다. 돌이 어떻게 나라의 특산품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쁘기는 꽤 예뻤다. 아마 제주도의 화산암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일기장을 펼치며, 다음에 한국에 돌아가면 꼭 예쁜 엽서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산품이 뭐가 있을까도 고려해봤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인삼이랑 오레오 오즈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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