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풀기용..



원작 516화의 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나리오는 끝났고, 세계는 온전하고 멀쩡하게 돌아갔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았고,


그리고 세상에서 겨울이 사라졌다.




겨울의 왕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는 결코 유료화 이전보다 많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상기할 만한 점은 살아남은 이들 대다수가 생존에 굉장히 집착적이고 끈질긴 이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대다수는 살아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며 공동체를 이끌 만한 사회성도 있었다. 새 인류를 끌어갈 사람들은 제법 알짜배기였다. 생존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 심지어는 그 생존의 위협을 이기기 위해 모아둔 능력과 재화, 자원들조차 박탈되지 않고 세상이 유지되자 사람들은 굉장히 여유로워졌다. 마음이 넉넉하자 인심이 절로 나왔다. 그들을 제일 먼저 소집하고 규합하여 연대를 만든 것이 김독자컴퍼니의 사람들인 것도 긍정적인 분위기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제일 큰 악몽이 끝났고 악몽이 끝나고도 악몽 속에서 차지했던 지위는 남아 있으니 사람들은 적당한 해피엔딩에 만족했다.

제일 먼저 다시 시작된 것은 식량의 수급이었다. 마치 아마존의 동물들처럼 남아있는 괴수종 개체들은 있었으나 더이상 괴수들의 고기로 삶을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매하게나마 농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시작되었고 멸망한 세계에서 테이밍을 하던 이들은 작은 괴수종들의 가축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인류는 다시 한 번 농경시대의 장을 열었다. 멋도 모르고 그저 아직도 몇몇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좋았던 신유승이 그 필두가 되어버린 건 사소한 일이었다. 멸망 이전에도 미래식량으로 각광받던 곤충 종류의 괴수종 개체 역시 이길영을 필두로 가축화가 진행되었다ㅡ기실 이길영은 그들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전에 애완동물과는 거리가 멀었던 괴수들(차마 '동물'이라고 표기하기에 기괴한)을 기를 수 있게 한다는 점 자체가 고무적이었기에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당장에 식용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어찌되었든 인류 재건을 위해 무언가 돌아가고 있고, 회복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모두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

당연히 아이들만이 이런 일에 앞장서도록 놔둘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이현성은 안 그래 보여도 군대의 조직체계를 기억해내고 유상아를 도와 하나의 연락망과 지휘 시스템을 만드는 데 협조했다. 이설화는 당연히 의료분야에서 일당백을 해내고 있었고, 정희원은 행동대장으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여기저기 모든 현장에 안 보이는 법이 없었다. 땅의 구획을 다시 정해 할 일을 정하고 재건하는 것에는 공필두가 소질이 좋았고, 의외로 멀리 갈 듯하던 장하영은 곧잘 놀러와 품을 보탰다. 세계는 착실하고도 꾸준하게, 안정적으로 다시 세워지고 있었다. 유료화 이전의 지구에 비하자면 몇몇 부분이 빠지고 바뀌고 변했지만, 모두가 직전의 죽음 가득한 시나리오 세상에 너무 익숙해있던 터라 차라리 이게 나았다. 아예 멸망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오히려 더 버티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마치 누가 일부러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딱 마시기 좋은 미지근함을 만든 것마냥 세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유중혁은 그럭저럭 괜찮은 세상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자리잡았다. 유중혁은, 이것저것 돌아다니며 많이 힘을 보태고 일을 돕기는 했으나 하는 것에 특정한 분야가 없었다. 유중혁 본인이 워낙 다재다능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또 특정 낯선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한 곳에 오래 몸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멸망을 헤쳐나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유중혁은 재건 현장에 얼굴 한 번 비추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소임을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명성도 명성인데 워낙에 잘생긴 얼굴이었으니 상징적인 슬로건의 몫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유중혁은 본의아니게 여기저기 얼굴 한 번 비추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얼굴마담이 되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유중혁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하면 그건 심각한 어폐가 있었다.

굳이 서술하자면 유중혁의 분야는 김독자였다.


엔딩 이후 김독자는 집안 바깥으로 잘 나가질 않았다. 거의 걷지도 않았고, 당연히 뛰거나 다른 일체의 격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재건에 참여하기는커녕 인류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그 현장을 눈에 담으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거부하는 것은 아닌데, 밖에 나가서 살아남은 사람들 있는 거 볼래, 하면, 응, 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길 반복하니 사실상 거절 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번은 그 모습에 답답해서 웬 때아닌 히키코모리 행세냐며 한수영이 팔을 잡아 끌어내려고도 했는데, 김독자가 정말로 비틀거리며 힘없이 끌려오는 바람에 되레 한수영이 놀라서 팔을 놓아버렸다. 팔다리가 조금 더 마른 것 같기도 했고, 조금 더 얼굴이 허옇게 뜬 것 같기도 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마를 짚어보니 열은 나지 않았다. 어디 병 난 거 아닌가, 시나리오를 깨면서 몸에 누적된 피로가 한번에 몰려온 게 아닌가 싶어 일행은 김독자가 방 안에서 쉬도록 놔두었다. 그러던 것이 하루, 이틀을 지나 한 달, 두 달을 넘게 저 상태다.

저러다가 오히려 더 처박아두면 병 날까 싶어 끌고 나올까도 싶었으나 그렇다고 김독자가 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고 나가지 않는 것만 잊자면, 김독자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아보였다. 그 어느때보다 자주 웃었고, 웃음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다른 성좌들을 상대하면서 으레 짓는 그 뻔뻔스러운 웃음가면과는 질이 달랐다. 김독자의 표정은 많이 헤퍼졌다. 유중혁을 비롯한 일행들은 그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또 김독자의 정신적인 상태가 많이 나아진 것 같아서 내심 안심하기 시작했다. 유중혁 역시 김독자의 본래 속마음은 이랬을까, 매일같이 새로 나오는 진솔한 호불호의 표현들을 마주하며 새로이 또 적응해가는 중이었다.

엔딩을 맞이하면서 그 심경의 변화가 어떘는지, 또 성좌로서의 몸에 어떤 타격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쉽사리 짐작해내지 못했다. 유료화 시절에도 오징어처럼 흐느적대는 모습은 잦았으니까 원래 천성이려니 싶기도 했다. 원래부터도 집 안에 박혀 살았냐고 할 때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이 진심이 아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가 나아져서 스스로 밖에 나가겠다고 할 때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김독자랑 같이 있는 데에 썼다.

두 사람 다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기에 집안은 항상 고요한 편이었다. 유중혁은 주로 김독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내고, 그를 통해 김독자를 살찌우는 데에 집중했다. ㅡ그렇게 말랐으니 움직이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요리 자체가 유중혁의 몇 없는 취미임과 동시에 멸망 이후에도 꾸준하게, 죽음과 관련없이 할 수 있는 행위인 점도 중요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유중혁이 조금 거친 쌀을 씻고, 물에 불려놓는 동안 낡디낡은 버너로 불을 켜 기름에 야채를 볶다 보면, 기름이 치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조용했지만 미소를 띤 채 그저 유중혁을 기다렸고, 유중혁은 가끔 요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런 김독자와 눈을 마주쳤다. 더 이상 누구를 죽이거나 누구와 싸울 필요가 없는 오후 한 시쯤의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평온했고, 괜찮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종종 유중혁은 요리를 하다 말고 김독자를 보기도 했고, 또 요리를 하다 말고 창 바깥을 보기도 했다. 그러면 참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과 함께 평온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종종 미아를 비롯하여 생존자 가족들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보였다.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풀밭 위에서 흐드러지게 뒤섞이면 유중혁 역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시나리오를 깰 때는 날이 꽤나 추웠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저렇게 잔디가 돋을 만큼 따뜻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은 그 위명답게 여기저기 새싹을 밀어올리고 꽃망울을 맺게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인류가 죽어 사라지고 방치된 서울 구석구석의 폐허에는 꽤 많은 식물이 무성하게 자리를 잡았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는 마치 현대 예술이 남긴 기하학적 화분 같았고, 그 사이로 꽃이 잔치처럼 피어올랐다. 우울하게 무너진 석조와 철근들이 잎사귀와 꽃 밑에 덮여버리자 그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나날이 좋아져갔고 대기도 한결 나았다. 숨쉬기가 편했고 날은 선선했다. 바람이 잘 불고, 따뜻해졌다. 삼한사온을 이룰 꽃샘추위는 멸망을 이겨낸 인간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단 하루조차 오지 않고 빠른 입퇴장을 한 모양이었다. 날은 매일 따뜻했다. 유미아는 어느새인가 점점 더 햇볕에 피부가 그을려 왔는데, 그것이 퍽 건강해 보였는지 유중혁은 그런 유미아를 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이길영이나 신유승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사실 세상의 재건을 위해 무슨 거처를 만든다 어디 농사를 짓는다 하던 어른들은 더했다. 김독자 역시 그런 사람들을 창문 너머로 보고, 눈이 마주칠때마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창문 가까이 피어오른 개나리와 진달래 덕에 꽃내음이 물씬 시야에 풍겨오는 나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요리를 하던 유중혁은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침 김독자는 유중혁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불에 파묻힌 채 창 밖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계절에 맞춰 갈지 않은 솜이불 아래로 드러나보이는 앙상한 발목들 주변으로, 흰 피부에 대비되게 푸른 핏줄들이 겨울 나뭇가지같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이 붙으면 어지간해선 저렇게 뚜렷이 보일 일 없는 부분들이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먹여도 먹여도 김독자는 늘 입맛이 없었고 살이 잘 찌지도 않았다. 타고난 체질의 문제일까 생각해도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런 두루뭉술한 운명론적 이야기로 퉁치기엔 결과가 너무 불만족스러웠다.

소풍이라도 가보는 게 어떤가.

어?

밖에 나가보자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너랑 놀고 싶어하고. 지금 바깥에 꽃도 꽤 많이 피어서 제법 예쁘다.

유중혁은 말을 이으면서도 김독자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유중혁이 말을 걸고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끔씩 김독자가 저럴 때가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아주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으로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유중혁이 유일하게 김독자의 면면 중 싫어하는 단 하나의 모습이었다.

......

김독자.

......

김독자, 듣고 있나?

어디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육은 여기에 있는데 영만 어디 멀리 날아가버릴 것 같은 모습.

어? 어. 꽃이 예쁘다고 했지...응, 예쁘겠네.

김독자는 창문에 걸쳐 있는 개나리꽃 가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부아가 치미려는 것을 참았다. 저렇게 창문 코앞의 꽃만 보고 만족했다는 듯 웃음짓는 건, 나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해도 해도 심했다. 벌써 두 달이었다. 김독자가 싫다면 굳이 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곁에 있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몇 달 내내 밖에 나가지 않고도 괜찮은 인간이 있는가, 유중혁은 확신이 없었다.

나가서 직접 볼 생각은 없나?

...별로.

산책이라도 좀 하는 게...

......

김독자.

유중혁은 기어이 버너를 끄고 웍을 내려놓았다.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며, 기름에 붙어 볶아지던 것들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들러붙었다. 유중혁이 뚜벅뚜벅 김독자에게 걸어가자 김독자는 웃으며 침대 옆으로 살짝 움직여 자리를 내 주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런 식의 행동은 유료화 시기에는 없었던 자연스러움이 있긴 했다. 누가 와도 크게 경계하지도 않고, 속의 꿍꿍이 없이 진실하게 웃으면서 마음을 내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에 마치 딱 하나 불순물이라도 낀 듯 '외출하지 않음'이 들어가버린 김독자는 전보다 더 수상해 보였다.

나가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나?

아니, 그냥......

처음으로 김독자가 말을 어물어물거렸다. 그 벽인지 뭔지 하는 스킬이 사라져서인지 이럴 때의 김독자는 전보다 표정에서 티가 났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곤란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유중혁은 가끔 김독자가 아예 걷지를 못하게 된 것이 아닌지 걱정했으나 제 몸으로 스스로 일어나 집안에서 물도 떠오고 화장실도 가는 걸 보면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나가기 싫은가?

김독자는 한참 고민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창백하고 핏기 없는 입술이 작은 두 앞니로 처참하게 짓눌렸다. 이유를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입술 깨물지 마라. 유중혁은 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로 김독자의 입술을 만져 행동을 저지하고는, 짧게 입을 맞추었다 뗐다. 멸망이 끝난 이후 김독자는 쉽게 울고 웃었고, 조금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유중혁은 조금 미묘하게 변해버린 애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그대로 유미아를 상대할 때처럼, 어린아이 다루듯 차분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집안에서만 데이트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사람들도 너를 기다리고 있고.

응.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그에 대한 대답은 수월했다. 본인도 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나가지 않는다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고, 아예 집 안에 틀어박혀있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힘을 들여 설득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나갈 수 있겠나?

응. 나가야지, 나아지면...

나아지면?

......

김독자는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유중혁은 당장에 김독자의 손목을 붙잡고 나가 엑스레이나 CT라도 찍어보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멸망 이후에 그런 장비들이 제대로 기능할 리가 없었다. 그에 필요한 약품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는 편이 아니었으니 그저, 유료화 이전 스킬들의 감각을 되새기며 맥을 짚는 게 전부였다. 김독자의 몸에 특별한 병이나 이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은 더 중구난방이었다. 피곤함, 스트레스, 기력이 없다 정도가 증상 원인의 전부일 환자에게 무슨 약을 처방하겠는가. 한참 표정이 심각해지는 유중혁의 걱정을 끝내기라도 하려는 듯 김독자가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좀 괜찮아지면 나도 나갈게. 내 발로.

유중혁은 그 정도 답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유중혁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불 꺼진 버너 위에서 식어가는 것들을 제대로 다시 볶아서 김독자에게 먹여야 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이틀 또 이렇게 지나다 보면ㅡ멸망 이전의 김독자가 숨기던 감정들을 지금의 김독자는 제법 잘 나타내게 된 것처럼, 또 몇 달 뒤의 김독자는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고, 조금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부대낄 것이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나아지기 위해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기름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재료들이 웍 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김독자가 다시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자 사람들은 입을 옷을 바꾸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멸망 시절에 쓰던, 보온과 냉방 기능이 있는 아이템들을 여전히 걸치는 자들도 있긴 했으나, 결 이후 그 기능은 현저히 낮아져서 좋든 싫든 계절에 따라 옷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새롭게 반팔과 반바지에 해당하는 옷을 만들기도 했고, 개중에 직조가 어려운 바람에 있던 멀쩡히 있던 옷의 팔다리를 일단 잘라내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가 좋은 이들은 무너진 건물에서도 어떻게든 기성 의류 매장들을 찾아내서 또 창고 안의 여름 재고를 꺼내와 입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시나리오에 매여 죽은 탓에 발굴되지 못한 보물 같은 문명의 잔재들이 미래의 후손을 어느 정도는 먹여살렸다. 홧김에 옷의 팔다리를 반으로 잘라내버린 신유승을 보며 이길영이, 너 또 긴팔 긴바지 필요하면 어쩔 거냐고 놀리다가 한 대를 맞았다.

날은 더 따뜻해지다 못해 조금 더울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 덥지는 아니하였고 꽤 좋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비는 최소한으로 내렸고 홍수나 태풍 같은 재앙은 오지 않았다. 봄이 도래한 이후 날씨는 끝없이 따뜻해지고만 있었다. 유중혁은 옷장에서 동료들의 옷을 정리하다가 문득, 올해에는ㅡ정확히 말하자면 결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날이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밖에서 놀던 유미아가 잔기침을 하며 들어오는 일도 없었고 다른 아이들이 벌벌 떨며 추가로 걸칠 것을 찾지도 않았다. 매일같이 조금은 과하게 일하는 어른들마저 감기에 걸리는 일은 없이 건강했다. 날이 충분히 포근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결의 기적 이후에 세계의 기후는 내내 그들에게 상냥하게 온난했다. 유중혁은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반 년간 거의 입지 않은 두꺼운 겨울옷들은 여전히 다시 겨울이 올 때를 대비해 차곡차곡 접혀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긴팔과 긴바지도 거의 모두가 찾지 않았기에 그 옆 상자 안으로 정리해 넣었는데, 딱 한 부류, 김독자의 옷들만 예외였다. 그때까지도 김독자는 긴팔과 긴바지만 입었고 당분간도 계속 그럴 듯이 보였으므로.


제일 먼저 이상을 감지한 것은 이설화였다. 과거 문명이 남겨준 약들도 쓰고 있었고, 새로운 약들도 끊임없이 만들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새 세상에서 끝없는 의약품의 수급은 너무나 중요했다. 의료팀은 다같이 힘을 모으고 지식을 모아 옛날 민간에서 처방하던 요법까지 동원해 여러 가지 상비약을 쟁여놓기에 필사적이었다. 졸지에 민간요법인지 웰빙식품인지 의약재인지 모를 만한 재료들이 뒤섞여 박스째 쌓이고 있었다. 이설화는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 그 재료들의 전체 분량과 출입도 관리하고 있었는데, 재료가 어째 좀 이상한 것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재료들이었다. 이설화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원 수급 담당 팀에게 물어물어 가면 갈수록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들이나, 그곳에 사는 동물들을 구하기 어려워짐을 알았다. 그 대신 온대와 열대 기후에서 자라나는 것들은 차고 넘치도록 들어왔다. 물론, 지구가 공평하게 망한 것은 아니니 사라지고 가라앉은 영역 중에 냉대 기후를 포함한 대륙이 있는 것도 맞았고 그래서 원래 재료 수급에 편차는 있었지만, 그게 멸망 이후 반 년도 안 되어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추운 지방에서 자라나는 것들이야 양이 많지도 않고 보편적으로 쓰일 일도 없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설화는 조금 의아했다.

그러면 지금 냉대 기후가 사라지고 있다는 건가요...?

네, 지금 현재 연락이 닿는 인류 대부분이 사는 지역들에서는...추운 날씨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구 온난화?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개념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설화가 말을 꺼내자마자 수급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지구 온난화의 경우 겨울은 더 추워지고 여름은 더 더워지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는 방식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겨울도 따뜻했고, 지금 어중간하게나마 날씨 연구하는 사람들이 예측하기로는 다음 겨울도 크게 추울 것 같지도 않대요. 게다가 남극과 북극은 더 추워져서 어마어마하게 추워지고 있다고 하던데요. 빙하가 녹기는 커녕 다시 얼어붙을 지경으로 보인다고...솔직히 인류가 멸망했는데 이제 무슨 이산화탄소가 있어요, 물론 살아있을때 누적해놓은 수치야 남아 있겠지만, 더 심해질 이유까진 없죠.

그렇네요.

어쨌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 터를 잡든 먹을 게 잘 자라나서 괜찮은 것 같아요. 냉대 기후에서 자라나는 약초들 중에 대체할 수 없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게 더 관리가 편하지 않은가요?

이설화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맞는 말이다. 비슷한 효능을 가진 자원들이 하나의 종으로 대체된다면 관리하기는 너무나 쉽고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말인즉슨,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는데 지구 어디에선가 원인 모르게 특정 기후의 모든 종들이 멸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변화는 꾸준히, 보이지 않게, 그러나 아주 성실하게 진행되었다. 북극과 남극 쪽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생전 처음 겪는 따뜻한 기후에서 편안하게 농사를 짓고 열리는 과실을 누렸으나, 별개로 자신들이 먹던 익숙한 맛의 곡식들과 생선들이 모두 사라지자 어색하고 불편해했다. 바다가 낯설게도 따뜻했다. 그런데 더 기묘한 것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바다를 조금만 벗어나도 날씨가 무섭게도 추워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기후가 따뜻하면 북극이나 남극 쪽도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정 반대였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각 극점의 추위는 강해져서, 이제는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람들이 육안으로도 저 멀리에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얼음조각들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지구온난화는 옛말이었다. 

그 해 여름은 따뜻하고 살짝 덥기만 할 뿐 폭염은 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임시 학교들은 관습처럼 여름방학을 주었으나 방학이 의미가 없었다. 공부하기 힘들 만큼 더운 것도 아니었고, 그냥 세상을 재건 중인 어른들을 도우라고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답답해했으나 그때까지 김독자는 방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길영과 신유승은 같이 집 안에 틀어박혀 김독자와 끝없이 보드게임을 했다. 체스 같은 것들은 수작업으로 만들었어도 제법 그럴듯하게 멋들어진 말이 있었다.

그렇게 집 안으로 틀어박혀도 창문 너머로 세상의 변화는 뚜렷이 보였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질 생각을 안했고 매미들은 끝없이 울어댔다. 분명히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꽃이 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지질 않았다. 김독자와 게임을 하던 아이들은 다시 개교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꽃도 해도 하늘도 그대로였다. 늘 그 하늘에 늘 그 구름이었다. 그 해 과일들은 유난히 볕을 잘 받고 잘 자라서 무척이나 달고 컸다. 그리고 수확한 이후에도 날씨는 변하지 않았다. 몇 달이 가도 단풍이 시작되지 않았다. 날씨 역시 여전히 따뜻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여름이었다. 몇 달을 그렇게 버티자 몇몇 나무들은 저들도 헷갈렸는지 희미하게 잎 끝이 노래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완연한 단풍은 그 어디에서도 시작되지 않았다. 계속, 여름이었다.

여름이라고 느껴진지 세 달이 지나서도 날씨가 계속 덥자 그제야 사람들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몇몇이 지구온난화를 입에 올렸으나 사람들의 토론 끝에 이것은 지구온난화와 양상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폭염이 오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한파가 오지도 않았고, 모든 기후가 정상인데 마치 온대-열대 기후의 그것처럼 유지될 뿐이었다. 북극과 남극이 지나치게 추워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그 어떤 결과도 도출해낼 수 없었다. 온난화라면 오히려 빙하가 녹아야만 했다. 사람들은 날씨를 통해 그 어떤 불편도 느끼지 않았고 병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 해에 그 누구도 감기에 걸린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안온한 날씨 속에서 건강했다. 계절이 바뀌지 않으니 환절기도 없었고 그에 따라 컨디션이 나빠진 걸 느끼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건강 상태가 계속 안 좋아보이는 것은 오로지 김독자 뿐이었다. 하늘은 항상 맑았고, 구름은 일정했고, 나무들은 울창하고, 꽃은 예쁘게 폈고, 모두가 건강하고, 날이 따뜻하고, 바람이 선선하고...

사람들은 마치 인간에게 상냥한 온실 속 화초같이 길러지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다. 가을이 오지 않고, 계속 여름이었다.


이제는 김독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은 상태였다. 그래도 유중혁과 동료들은 꾸준히 시도했으나, 조금이라도 김독자에게 신체적인 강압을 할라치면 김독자가 정말 공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포기했다. 그 누구도 김독자의 기분을 그렇게 상하게 하면서 밖으로 내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운동이 될 만한 기구들을 집 안에 들이는 걸 택했고, 유중혁은 이제 요리 말고도 다른 것에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소기구를 가지고 하는 가벼운 운동들을 그럭저럭 해냈다. 몇 주가 지나자 제법 그 동작들에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의외로 김독자는 그 운동들을 하는 것을 조금 반기는 눈치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살은 붙지 않았다. 유중혁은 이젠 그게 김독자의 체질이려니 하고 수용이라는 이름의 포기를 조금 납득하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단풍은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날이 추워지면 죽거나 동면에 들어가는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어리둥절해하다가, 더 활개를 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람쥐는 제 습관대로 도토리를 잔뜩 모았으나 여전히 먹을 것을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어서 신이 나 있었고 철새들은 살던 곳을 떠나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할 필요성이 없어진 새들이 피둥피둥 살이 쪄서 호숫가 주변을 계속 배회하는 통에, 사람들은 조금 더 먹을 것을 구하기 수월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오리 고기 같은 것들을 요리해 먹으며 몇 점 남겨 개한테 던져줄 정도의 여유도 갖고 있었다. 여전히 날은 덥고 따뜻했고 사람들은 반팔에 반바지를 가지고, 땀을 닦을 손수건 한 장 정도를 주머니에 챙긴 채 가볍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픈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요새 꼭, 에덴 동산에 사는 것 같다니까.


김독자는 여전히 긴팔과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느 날 유중혁이 그것을 깨달은 계기는 우습게도, 성적 충동 때문이었다. 결 이후 두 사람 다 지쳐서 쉬느라 그랬던 것인지, 평온한 상태가 되어서 위기감에서 돋워지는 성적 충동이 잦아든 건지 전혀 섹스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김독자의 마른 몸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유중혁이 더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했다. 키스는 잦았으나 애무에서 본격적인 섹스로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문득, 김독자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김독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쳐다보았고, 엉뚱하게도 김독자의 침대의 이불이 너무 두껍다는 점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여전히 솜이불이었다.

김독자는 이 여름에 여전히 겨울 솜이불을 덮고, 긴팔과 긴바지를 입으며 자고 있었다.

유중혁은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위화감에 눈을 깜박였다. 덥지 않을까, 침대로 걸어가서 혹시 땀이라도 흘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몸을 두껍고 답답하게 덮고 있는 솜이불을 잡아 살짝 걷었다. 김독자의 마른 두 어깨가 드러났고, 이불이 젖혀지는 순간 두 몸이 훅 움츠렸다. 그리고 정말ㅡ

목 뒤에 약간 땀까지 배던 유중혁이 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질 것 같은, 이상한 말을 뱉는 것이다.



...추워......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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