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매우 어두웠다. 비구름에 가려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굵은 빗방울들이 미니애폴리스 그랜드 호텔 최상층의 객실 유리창을 쉴 새 없이 딱딱 때렸다. 창밖 멀리, 암흑 속에 가로등 몇 개가 드문드문 서서 새카만 지상에 밝은 빛을 토하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빗방울이 그 빛 속을 칼날처럼 가르며 떨어졌다. 가로등 주변의 빌딩 윤곽이 빛을 받아 엷게 드러났다.


큰길에는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험악한 빗줄기와 뭉툭한 윤곽들뿐.


한니발은 팔짱을 끼고 창문 앞에 서서 미니애폴리스 도심에 내리는 새벽 세 시의 겨울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컴컴하기는 했지만 눈에 익숙한 조감도였다. 한니발은 자연스럽게 베토벤 교향곡 8번 1악장의 용맹하지만 조심스러운 도입부를 회상했다. 그건 저쯤 어딘가에 위치한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홀에 앉아 들었던 곡이었다.


그즈음 읽었던 기사 내용을 한니발은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당시 기자는 미네소타 관현악단에 새로 취임한 음악 감독의 신상을 거침없이 써냈다.


그는 미네소타 관현악단과 과거 2년간 객원 지휘자로 호흡을 맞추었으며 당시 독특하고 뛰어난 고전파 음악의 재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던 바 있다. 젊은 나이임에도 베토벤 전문 지휘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특히 강도 높은 리허설로 유명했는데, 한 번은······.


한니발이 그 감독의 실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유럽에서였다. 그때 그는 아직 어딘가의 상임 부지휘자였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독히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그는 먼 도시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어느 지휘자 대신 단상에 오르는 행운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아마 그때의 관객들은 지금까지도 그가 지휘했던 베토벤 교향곡 8번의 전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때의 사건이 너무 대서특필되었던 탓에 타국인 이곳에서 시기와 질투를 끈기 있게 경험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천박한 소문들이 담쟁이덩굴처럼 무성하게 자랐다. 객원이던 시절에 고아원 소년을 추행했다던가, 혹은 그게 처녀 여럿일지도 모른다던가······.


그 요지경 같은 소문들마저 죽어버린 뒤의 그의 삶은 오로지 내리막길이었다. 재기는 없었다.

그런 삶의 하강 속에서도 그는 연주자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몰입했다. 공연의 질도 나아졌고 어떤 연주자는 드디어 좀 유명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은 계속 무성한 소문에 가려졌으며, 그가 이곳에서 이룩한 성과 중 어떤 것도 의미 있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미네소타 관현악단 역사에 길이 남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던 날에도 그는 외롭고 쓸쓸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니발은 우산을 들고 퇴근하는 그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도망치듯 오케스트라 홀의 뒤편으로 나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단상 아래에서의 그는 싱그럽지만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한니발을 본 체 만 체하며 비를 맞으며 그 곁을 지나갔다. 뭐, 그쯤이야.


그날 한니발은 그를 뒤쫓아 가 기꺼이 술을 사 주었다. 또 몇 번 그가 공연을 끝내고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한니발의 그런 행동은 이 음악 감독의 영혼을 달래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는 젊고 외로웠기에 마음의 울타리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니발은 그에게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해 줄 수 있었다. 우리의 식도락가께서 그걸 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젊은 음악 감독의 실종 사건도 그의 실력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한니발은 이곳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새로 부임했던 음악 감독은 너무 형편없었으니까.


‘맛이 꽤 좋았었지.’


한니발은 팔짱을 풀며 창유리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외부 전경에서 초점을 떼자 창문에 흐릿하게 반사되어 보이는 침대가 눈에 띄었다. 초대형 더블침대였다. 베개 네 개 외에도 쿠션 두 개가 더 있었는데, 그 중 검정색의 정사각형 쿠션에는 이 호텔의 휘장(Emblem)인 수사슴의 실루엣이 하얗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는 또 한 마리 사슴 같은 남자가 힘없이 누워 있었다.


윌 그레이엄이었다.


그는 넓은 침대 한가운데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꺾고 잠들어 있었다. 뇌염 때문에 이따금 몸을 떨며 신음을 냈다.


“으응.”


혹은 무어라고 작게 말하기도 했다.


침실 벽부 등이 흐릿하게 빛을 뿜어 방을 침침하게 밝히고 있었다. 한니발은 바지 주머니에 부드럽게 양손을 넣었다.


“렉터 박사······.”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손끝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날 도와줄 거면 미네소타로 보내줘요.”


열네 시간 전, 윌이 한니발을 찾아왔다. 경찰을 제대로 때려눕히고 왔을 것이다. 그는 이수(移囚) 중이었으니까. 한니발은 책상 앞에 막 앉은 참이었다. 그때 오래된 섬유에서 풍기는 낯선 냄새―그건 죄수복에서 나는 것이었다―와 그에 덧씌워진 익숙한 땀 냄새, 숨 냄새가 복층에서부터 그의 머리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윌 그레이엄, 이 어설픈 탈주자는 재빠른 몽구스처럼, 한니발의 애장품처럼 복층 책장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층으로 내려와 한니발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 말했다. 뇌염으로 몸을 벌벌 떨면서.


윌의 무단침입과 명령이라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한니발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생각했던 흐름보다 참신해서 좋았다. 그래서 그가 반가웠고 그의 말을 듣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윌은 겁에 좀 질려 있었다. 탈주에 협박까지 하는 자신이 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딱한 윌.


그는 눈앞에서 떨고 있는 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윌, 힘내요. 필요한 일입니다.’


한니발은, 윌 그레이엄이 한니발 렉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 동하기를 바랐다. 윌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기를 기대했다. 어느 쪽으로든 변화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도와주는 이 순간이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네소타까지 가려면 열다섯 시간이 넘도록 운전을 해야 했다. 고된 여정이었다. 한니발은 잠깐의 주저함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한니발이 벤틀리의 액셀러레이터를 한참 밟다가 돌아보니 윌은 고독과 겁에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당신은 곧 내가 한 짓들을 알게 될 겁니다.’


한니발은 잠든 윌의 얼굴에서 눈을 떼었다.


‘그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니발을 홀린 것은 오로지 그 궁금증 하나뿐이었다. 연민이나 우정도 작용했겠지만 그러나 그 어떤 감정보다도 윌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등을 가장 세게 떠밀었다.


출발하던 때에는 우윳빛이었던 하늘이 금방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한니발이 처음 주유소에 들렀던 때에는 장대비가 한창이었다.


그의 동승자는 계속, 기절한 듯 자고 있었다.


주유 중 한니발은 윌의 볼과 귀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미지근하고 진득한 물기가 제법 묻어났다. 식은땀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뇌염 때문일 것이다. 한니발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두 번째로 주유소를 찾아 들어갔을 때에는 밤 열 시가 가까웠다. 그는 차를 세우고 점잖게 기지개를 켜며 숙박 문제를 고민했다.


이대로 쉬지 않고 간다면 애비게일의 옛집에는 이른 새벽에 도착할 것이었다.


‘잭은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나 오겠지······.’


한니발은 멍청한 FBI가 운 좋게 자신을 도와주게 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자면 시간을 좀 유용(流用)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윌의 상태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어쩌면 가까운 모텔을 허겁지겁 찾아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확인 차 이름을 몇 번 불러 보았지만 윌은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정말 딱하고 고맙게도.


그를 좀 눕혀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한니발은 밖으로 나가서 조수석 문을 열고 윌의 의자 등받이를 뒤로 좀 젖혔다. 유입된 찬 공기를 맞은 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니발은 조심스럽게 그와 이마를 맞대어 보았다. 출발하던 때보다 열이 좀 더 올라 있었다.


그러나 모아 쥐어 본 그의 양손은 꽤 차가웠다.


일순, 그 차가운 감각이 한니발의 손바닥으로부터 팔과 어깨를 타고 그의 심장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지금처럼 그가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날이 있었다.


한니발의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그날이 팍 떠올랐다.


오래전 그날이었다. 눈이 스노글로브(Snow Globe)처럼 펄펄 내리던 날이었다. 새하얀 눈밭 위에는 나이 든 사내들이 바글거렸다. 그들 모두가 어린 한니발의 여동생이 죽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 손의 보드라움은 잊었지만 그 상실감은 한니발의 손끝에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미샤.’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 한니발의 심장에 충동이 끓었다. 그건 윌을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다는 그의 진심어린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추위와 굶주림에 대한 그의 증오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했다. 미샤는 배를 곯다 얼어 죽었다. 그 사건은 한니발에게 흔히 증오라고 하는 여생의 율법을 만들어 주었다. 그 강력한 율법은 한니발의 거의 모든 것을 강제했다. 예컨대 그의 만찬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없애고 상실감을 다독이는, 혼자 된 자의 새로운 식사 방식이었다.


“윌, 떨지 말아요.”


한니발은 윌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도로변 모텔은 안 될 것 같았다. 좀 더 따뜻하고 근사한 곳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비록 먹지 못할지라도 좋은 식사가 준비되는 곳에서 쉬게 하고 싶었다.


‘오늘은 당신을 편히 재워 주겠습니다.’


한니발은 근처 대도시까지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새벽 세 시 즈음 미니애폴리스 도심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니발은 4성급인 그랜드 호텔에 전화를 걸어 베리 레이트 체크인(very late check-in)을 부탁했다. 예전에 그가 애용했던 5성급 로우즈 호텔은 이미 만실이었다.


각설, 비를 흠뻑 맞은 한니발의 벤틀리가 그랜드 호텔 정문에 도착했던 때는 정확히 새벽 세 시였다. 조수석 쪽으로 다가오는 도어맨에게 한니발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차창을 내리면서 점잖게 말했다.


“휠체어가 필요할 겁니다.”


로비는 넓지 않았지만 깔끔했고 조명이 부드러웠다. 한니발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자 프런트에서 잠을 쫓고 있던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 숙박부를 건넸다.


“좋은 밤이에요, 렉터 선생님이시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곧 얼굴을 붉혔다. 휠체어 쪽을 쳐다보니 ‘좋은 밤’이라고 인사한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윌은 눈을 감은 채 약간씩 몸을 떨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부드럽게 흘려 쓰며 답례했다.


“좋은 밤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보통 때보다 더 잠겨 있었다.


“저, 선생님. 친구분께 의사를 불러 드릴까요?”


의사?


한때 외과 의사이기도 했던 이 정신과 전문의는 그녀가 왜 의사를 한 명 더 부르겠다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다녀왔던 응급실에서 과분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도 따라서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다지 노련치 못한 아가씨군.’


한니발은 숙박부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전화를 받아 줘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그녀는 신이 난 듯 방긋 웃으며 ‘$599.99’가 적힌 영수증을 내보였다.


“제일 좋은 방이랍니다. 나머진 전부 만실이에요.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조식은 방에서 먹겠습니다.”

“새벽 여섯 시부터 주문하실 수 있어요.”

“그럼 그때 전화를 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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