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은 여주에게 초콜릿을 주니 위스키가 생각이 난다는 말을 듣고 취임식이 어느 정도 끝나면 여주와 위스키를 마시려고 생각을 했었다. 나 회장이 부르기에 다른 기업 경영인들과 인사를 하고 적당히 대화를 하며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즘에 여주에게 같이 나가자며 얘기를 하려고 여주를 찾으니 여주가 안 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연회장을 꼼꼼히 살펴봤지만 여주는 안 보이고 연회장을 나서려는 지환이 재민의 눈에 들어왔다. 빠른 걸음으로 지환을 쫓아가 여주의 행방을 묻자 일이 생겨서 먼저 갔다는 대답에 맥이 빠졌다. 취임식을 끝마친 재민은 자신이 가끔 머무르는 룸으로 바로 올라갔다. 집까지 돌아가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룸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한 바퀴 돌리던 재민은 겉옷은 대충 던져놓고 소파에 풀썩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간다고 연락이라도 남겨주지.”





작게 중얼거리던 재민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또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과 함께 얼마 안 지나서 들려오는 여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먼저 갔다더니 그 일이 안 좋은 일이었나. 여주의 기분을 바로 알아챈 재민은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묻지 않았다. 자신의 그늘을 보이기 싫어하는 여주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간 줄도 모르고 위스키나 같이 마시려고 했다 얘기하자 여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다음에 마셔야겠다고 말하는 대답을 듣고 재민은 여주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알아챘다.





재민은 좀 전까지 피곤해서 바로 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겠냐는 여주의 말에 재민은 바로 옆에 던져놨던 겉옷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여주에게 위치를 묻고 지금 바로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나서 겉옷을 입고 호텔 룸에서 나왔다. 이미 취임식 행사 때 샴페인을 몇 잔 마셨던 터라 택시에 올라탔다.





여주가 있는 룸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턱을 괴고 있던 여주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재민을 보고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빨리 왔네? 재민을 주려고 얼음이 담긴 새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 얼마 안 남은 술을 다 마시는 여주의 모습에 재민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시 보게 된 여주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가라앉아있었다. 그저 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재민은 같이 마실 사람이 생겨서 신이 난 여주에게 천천히 좀 마셔. 취하는 속도도 같아야 재밌지. 하며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드는 여주의 손을 잡으며 진정시켰다.





“재민아.”


“응. 왜?”


“너는 힘들 때 어떻게 버텨?”


“갑자기?”


“그냥...”





내가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재민을 쳐다보지 않고 물어오는 여주의 질문에 재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낙천적인 성향을 가진 재민이라도 힘든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살 끝 무렵, 통보 아닌 통보를 받고 유학길에 오른 재민은 그곳에서 많은 경험과 감정을 느꼈다. 그곳에서 오로지 혼자 겪고 버텨야 했고 외로워도 재민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고. 재민은 그곳에서 가깝게 지냈던 여주를 많이 떠올렸었다. 전화는 물론 메일 한 통도 여주에게 못 보냈다. 초반에 모든 통신 수단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재민은 어떻게든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그곳에서 노력했다. 관심이 없던 경영에 대해 공부하고 배웠다.





“어떻게 버티긴, 힘들다고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참는 거지.”


“....”


“그래도 여주야. 네가 방금 말한 대로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우리는 서로 밖에 없잖아.”


“....”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숨겨도 우리 서로한테는 숨기지 말자.”







너도 나도 숨 쉴 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살아가지. 재민은 고심하고 고심해서 한 말이었다. 재민의 말에도 여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잔만 쳐다봤다.






*






천천히 드는 정신에 여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우리 집 조명이 아닌데. 아직 잠이 덜 깨 사고회로가 느렸다.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게 정리가 된 여주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들려오던 물줄기 소리가 멈췄다.





"일어났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 재민을 보며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은 괜찮아? 뒤이어 물어오는 질문에 여주는 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하고 재민이 건네는 생수를 받았다. 차가운 물을 마시고 나서 여주는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지금 상황을 재민에게 듣고 싶었지만 여주는 먼저 스스로 떠올려 보려고 했다. 어제 좀 많이 마시기는 했지.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있었지만 우선 재민은 어제 여주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틴 건 여주 자신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집에 안 가겠다고 고집 부린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아예 끊겨버렸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물기를 제거하며 나왔다. 기억이 안 나는 건 물어보면 되지.





"배는 안 고파? 룸서비스 시켜줄까?"


"나 너랑 잤어?"





관계를 맺은 기억도 없고 옷도 그대로였지만 혹시나 싶었다. 돌직구로 들어오는 여주의 질문에 재민은 여주 너 때문에 미치겠다 중얼거리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며 웃었다. 어제 기억 안 나는 거야? 서운하게? 재민의 말에 여주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재민은 여주가 지금 당황했다는 걸 눈치챘다. 조금 더 놀려볼까. 재민은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여주에게 다가갔다. 둘의 사이가 좁혀졌고 여주는 재민을 그대로 올려다봤다.







"나는 술 마시고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


"맨 정신에 하는 거 좋아하지."


"...네 취향 물어본 적 없어."





여주는 재민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가깝게 붙어온 재민을 살짝 밀어내며 대답하자 재민은 작게 웃으며 어제 집 가기 싫다길래 여기로 온 거라며 자신은 소파에서 잤다고 말해왔다. 그럴 줄 알았다며 얘기한 여주가 머리를 말리기 위해 등을 돌렸다.






*






어제 동혁에게서 온 수십 개의 부재중과 메세지들을 확인한 여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을 보낼까 생각을 하다 접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신발장에 놓여있는 익숙한 신발. 여주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떴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동혁도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동혁은 잠을 못 잤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주는 동혁을 한번 슥 쳐다보고서는 네가 여기 왜 있어? 낮은 목소리로 묻고서 그대로 동혁을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향하려는데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온 거야? 전화는 또 왜 안 받고."


"그게 왜 궁금해?"


"...왜 그냥 갔어?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동혁아. 나는 지금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 되거든."


"...뭐?"





내가 전화도 안 받고 그래서 네가 걱정은 할 수 있는데 근데 우리 집에서 이렇게 밤새 기다릴 일은 아니지 않아? 여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동혁을 쳐다봤다. 여주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먼저 선을 긋고 지키자고 한 건 동혁이었다.





"아니면 나랑 자고 싶어서 기다렸니?"


"김여주."





여주를 쳐다보는 동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여주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여주도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선을 그어야 했다. 애매하게 선을 그었다 지우는 행동에 상처받는 건 오로지 여주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네가 걱정돼서 밤새 기다린 거야. 너랑 자려고 기다린 게 아니고."


"아, 그래?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오는 이유가 그거 말고는 없을 거라 생각해서."





허- 동혁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가 섞인 헛웃음을 내뱉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주를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우리 4년 동안 그런 사이였잖아."


"...그래. 그러자."





단번에 여주의 앞으로 다가온 동혁은 한 손을 뻗어 여주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동혁의 품으로 끌어진 여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는 여주의 목 근처를 이를 내어 콰득, 깨물었다. 단 한 번도 이런 행동을 한 적 없던 터라 당황하는 건 여주뿐이었다.





"아윽... 지금 뭐 하는...!"


"아, 여기에 남기면 보이려나."


"아니. 잠ㄲ...!"





동혁의 어깨를 밀며 틈을 내어보려고 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한 손으로 여주의 손목을 붙잡고서 아래로 내리고 어깨를 깨물던 입술을 그대로 목 선을 타고 올라가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동혁아. 잠깐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했다.







"왜. 여주야. 네 말대로 너랑 지금 자려고 하는데."


"...."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있는 힘껏 참았다. 그럼에도 붉어지는 눈가를 본 동혁은 살짝 몸을 물렀다. 여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려 동혁을 쳐다보지 않았고 그런 여주를 보던 동혁은 방금 제 자신이 한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후회 중이었다.





"...여주야. 내가..."


"동혁아. 그만 가주라."


"...."


"...그냥,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가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 여주는 그대로 뒤를 돌아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동혁은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작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욕을 읊조렸다. 조용한 집안에서 들려오는 진동소리. 여주의 휴대폰에 전화가 오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발신자의 이름. 나재민. 동혁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길게 울리던 진동이 멈췄다. 그리고 곧장 짧게 울리는 진동.





[집에 잘 들어갔나 전화했는데 안 받네.]





미리 보기로 메세지 내용이 떠버려서 의도치 않게 메세지를 보게 됐다.





[여주야. 귀걸이 한쪽 떨어뜨리고 갔더라.]

[너 가고 나서 호텔 룸 청소하다 발견했어.]







뒤이어 오는 메세지에 동혁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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