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삼도천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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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마마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

“지난 을축년 겨울, 연왕께서 조선에서 온 비를 맞으셨다는 것도, 지나간 비들과 달리 그 이는 운명의 반륜마냥 깊게 총애한다는 것도.”

“……하지만 세상천지에 연왕의 비가 목을 매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사람이 저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

“대체 언제부터……어떻게,”



경수의 물음에 송이훤은 말없이 희미한 웃음을 웃었다. 경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은가락지가 어둠 속에서 달의 조각처럼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어디서부터인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가. 

이젠 경계조차 흐릿해진 기억의 여로를 더듬더듬 거슬러 가다 보면 ㅡ 햇살 가득 내리던 어화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곳엔 분명 생애 처음 만난 봄처럼 화사하게 웃던 어린 황후가 있을 테다. 



평생을 맹세한 단 하나의 주군이 제 혼의 조각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유일한 여인. 꿈처럼 화사하던 계절의 정경. 모든 것이 넘치도록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음에 족적을 남기던 물망초 향기. 바람마저 허리 굽혀 입 맞추던 연한 색의 머리카락과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두 개의 은가락지. 선과 색이 선명한 입술과 그 입술이 머금던 부드럽고 나지막한 소리들. 설렘이 붉게 번진 두 뺨 위로 얼비치던 잎새들의 잔영까지도. 

돌아보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반짝이기에 가슴이 시렸다. 낮게 뜬 별 같고, 이르게 맺힌 이슬 같던 그 두 눈. 정오의 빛을 담뿍 머금어 투명하게 속을 다 내보이는 그 눈이.



울겠구나, 생각하였다. 


많이 울겠구나. 

아주 많이 울게 되겠구나. 

눈이 저리 맑게 반짝이는 것을 보니, 울 일이 많겠구나. 눈이 저리 청아하게 빛나는 것을 보니, 필시 우는 날이 많겠구나. 

돌아보는 두 눈이 이토록 아리땁고 찬란하니, 필시 앞으로 서러운 날들이 많겠구나. 


아프도록 눈부시던 그날의 첫 감각은 결국 틀리지 않았다. 송이훤의 예상대로 물 같고 별 같은 눈을 가진 어린 황후는 위국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섰으나 ㅡ 자주 불행했고, 자주 숨죽여 울었다.





[장군은 특별한 눈을 가졌습니다.]

[제 눈 말이십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후마마.]

[양안의 색이 다르니까요.]

[하하, 천한 색목인의 피를 받은 돌연변이 눈이라 어렸을 적부터 보는 이들마다 모두 불길하다 손가락질 하였는 걸요.]

[한쪽은 갈색, 한쪽은 파란색. 한쪽 눈에는 땅을, 한쪽 눈에는 하늘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

[평범한 이들의 눈은 한 가지 색이라 자기 자신 하나 밖에 보지 못하지만 장군은 아주 많은 것들을 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 남들이 지나친 것들, 남들이 간과하는 것들……]

[……]

[그 건 바로 세상 천지가 모두 장군의 눈 속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눈입니다.]



한쪽은 갈색, 한쪽은 파란색. 

저주받은 눈이었다. 평생의 천형이었다. 위국인과 색목인의 혼혈,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늘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보는 이마다 침을 뱉고 욕을 하기에 한동안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다니기도 했고, 차라리 없어지길 바라며 제 손으로 거듭 찌르기도 했다.

그런 눈을 보며, 어린 황후는 서슴없이 귀하다, 아름답다 말해주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고. 그러기에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리 말해주는 그 눈이 지나치게 어여뻐 태어나 처음으로 울고 싶었다. 그리 웃어주는 그 모습이 지나치게 찬란하여 이대로 영원까지 눈멀고 싶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정녕 귀하고 아름다운 눈은 당신의 눈이라고. 당신의 눈이야말로 새벽녘 가장 이르게 맺힌 이슬보다, 밤하늘 가장 높이 뜬 별보다 귀하고 또 아름다운 눈이라고.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목이 메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더랬다. 연정이었던가. 연민이었던가. 제가 배운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이 물처럼 눈가에 여울지던.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자꾸만 범람해 견딜 수가 없던 어느 젊은 봄날.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

[내가 내 아이를 지키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

[부디 나를 도와주세요.]



비에 젖어 있던 그 목소리는 어제처럼 귓가에 선명하다. 울지 않으면서도 늘 울고 있던 그 목소리가. 

그리하여 부러 물기 하나 없이 밝고 맑은 날에만 떠올리려 했다. 사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이 울었으니, 더는 젖지 말라고. 비 오는 날에는 기억으로라도 찾아오지 말라고.





“은가락지의 원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아,”

“그 분이 궁에 오신 날부터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곁을 지켰지요.”

“……”

“처음 마마를 만난 날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순간의 허영과 물욕에 눈이 멀어 도적질을 한 궁인은 아닐까, 저를 찾아내 죽이고자 효 황제가 보낸 간자는 아닐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지요.”

“……”

“허나 얼마 전 마마께서 하셨던 말, 정인이 북평에 있고, 그 은가락지가 본디 정인의 모친 것이란 말에 비로소 확신했습니다.”

“……”

“……그 은가락지를 갖고 있었을 이는, 천지 간에 오직 단 한 분 뿐이니.”



소연황후의 은가락지를 갖고 있었을 이는 그녀가 남긴 유일한 아이. 온갖 질시와 핍박을 받으며 어둠 속에 웅크려 살아야 했던 비운의 황자. 등 뒤에 어떤 고통이, 어떤 절망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상에 처음 서린 빛처럼 마냥 해사하게 웃던 아이. 

구중심처 단 하나의 숨길이었던 어머니를 잃고, 수족처럼 아끼던 이들을 잃고, 심장을 내어준 이에게 버림받은 채 의지할 데 하나 없이 홀로 소리 죽여 울던 소년. 궁을 둘러싸고 피어오르던 시뻘건 불길과 그 불지옥 한 가운데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타들어 간 어린 사랑. 

어찌 잊을 것인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 황제의 교지를 받들어 장안을 떠나면서도, 정현의 군사들을 피해 인적 드문 험지를 전전하면서도, 깨어 있는 순간 늘 염려하였다. 


늘 기도하였다.


반드시 살아 남으시기를. 무탈히 장성하시기를. 끝까지 이겨내시기를. 대무녀가 예언했던 천명이 꼭 실현되기를. 위국의 역사가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주군이 남긴 최후의 선택이 헛되지 않기를. 


부디 예견된 운명처럼 아름답고 강건하시어, 

ㅡ저승에서라도 그녀가 더는 울지 않기를.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주군의 명을 지켰습니다. 무인의 피로 맺은 맹약을 완수하고자 제 이름도, 제 가족도, 제 가문도 버렸지요. 재산과 명예……하물며 이 목숨조차 아낌없이 내던질 각오를 했습니다.”

“……”

“평생을 모신 주군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위국의 내일과,”

“……”

“……젊은 날의 연정을 바친 한 여인을 위해서.”



송이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경수에게 건넸다. 낡고 헤진 가죽과 무명천으로 겹겹이 싸인 보퉁이였다.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비밀. 낮이고, 밤이고 한시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던. 생의 사명이었고, 살의 일부였던, 그 것을 경수에게 바친 송이훤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수겹의 허물을 풀어헤치니, 긴 시간 세상의 수면 아래 고이 잠들어 있던 전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부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경수는 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

“부디 연왕께 선황의 교지를 전해주십시오.”



하늘 아래 가장 높고 귀한 자를 상징하는 황금빛의 권축. 무 황제의 친필로 쓰이고, 무 황제의 옥새가 찍힌, 세상으로부터 영영 자취를 감췄다던 무 황제의 교지. 


이제는 유언이 되어버린, 

무 황제의 마지막 전언.



“그 교지는 돌아가신 태조 무 황제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으로,”

“……”

“어떤 이도 감히 은폐하거나 곡해할 수 없는 위국의 정사正史이며,”

“……”

“이 길고 참혹한 전란에 마지막 획을 그을 것입니다.”




……………………

…………

..


………정현은 타고난 성품 자체가 교만하고 패려 하여 칼을 휘두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시기, 질투 또한 극심하다. 재물을 탐하고 미색에 집착해 저자의 음인들을 함부로 범하고 음란한 짓을 일삼는 등 여염에 폐단을 끼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뿐인가. 인애와 덕을 몰라 윗사람에게는 불순하며, 아랫사람들을 향한 행실은 패역하기 그지없다. 고작 제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천 리를 피로 멸절시키고 인륜마저 저버리니 궁궐 뒤 뜰엔 이유도 모르고 비명에 간 원한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죄악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가 어찌 장차 한 나라의 황제로서 백성들을 아끼고 보듬어 살피겠는가. 이리 흉악하고 잔혹한 성품을 가진 이가 보위에 올라 어찌 황실의 안녕을 꾀하고 종묘사직을 충실히 받들 수 있겠는가. 참으로 실망스럽고 비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처음부터 천명은 정현에게 내리지 않았으되, 그걸 알면서도 지난 세월 사사로운 육친의 정에 이끌려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모든 게 짐이 부덕한 탓이다. 

지금이라도 뒤틀린 운명을 시정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자 하니, 태자 정현을 폐위하고, 황자이자 친왕의 신분으로 강등하니라. 그리고 소연황후의 소생이자 삼 황자인 연왕 백현을 위국의 새로운 태자로 봉하니라.




송이훤의 말이 맞았다. 무 황제의 마지막 교지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순간, 태자 정현, 즉, 효 황제가 제 것이라 주장하는 위 왕조의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애초부터 폐위된 태자 정현에게는 황위 계승권이 없고, 제좌에 정해진 자는 따로 있었으니까. 

무 황제의 유언으로 북서전쟁은 이제 더 이상 한 때의 반란反亂이 아닌 ‘그릇된 것을 바로 잡는’ 정란靖亂의 의미를 갖는다. 

연왕은 더는 역적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교혁한 영웅이자 진정한 위국의 황제가 되며, 효 황제는 더는 천자가 아니라 아우의 황위를 찬탈하고자 패륜을 저지른 역적이 된다. 

이 교지는 지금의 연왕에게 없어서는 안될 거병의 명분이 되고, 엎드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도파 대신들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당위가 될 것이다. 

경수가 천천히 손을 뻗어 권축을 손에 쥐었다. 설과 송이훤, 어느새 선잠에서 깬 아진까지 모두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떠나야 할 시간. 또다시 거대한 운명을 마주한 옆얼굴로 희미한 서광이 서리고 있었다.




비로소, 새벽이었다.




*






동이 트자마자 경수와 설은 청성을 떠나 낙양으로 향했다. 

연왕군이 정비를 마치고 장안으로 진격하기 전 대열에 합류해야 했기 때문에 한시가 급했다. 그간 정들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 

황궁을 떠날 때 챙겨 나온 여비나 패물도 얼마 없었지만, 그마저도 오는 길에 죄다 백성들에게 나누고 베풀다 보니 남은 게 거의 없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고작 서너 벌의 옷가지와 간단한 먹거리, 말과 활, 송이훤이 건네준 권축 뿐. 

최소한의 조촐한 여장을 지고, 경수와 설은 설익은 새벽빛을 좇아 길을 나섰다. 송이훤은 어린 아진을 두고 청성을 떠날 수 없었기에 이번 여로에도 둘 뿐이었다. 몇십 번의 어둠과 몇백 번의 악몽, 몇천 번의 눈물을 지나 장안에서 도망쳐 나왔을 그때처럼.




예로부터 진퇴양난이란 말을 풀어보면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했다.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또 하나의 신령한 산. 오악의 하나이자 강호제일산이라 불리는 숭산은 태산만큼이나 높고 험준한 산이었다. 

첩첩이 등을 세우고 엎드린 72개의 봉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장벽처럼 이어져 속세와의 괴리를 만들고, 인생사 크고 작은 소란들을 차단하니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과도 같았다. 

크고 묵직한 빗근을 드러내고 하늘을 떠받치는 산령들과 이끼에 푸르게 젖은 암벽들. 사방으로 퍼져 나가 구불치는 개울이 산의 맥박을, 나그네에겐 모질기만 한 무수한 기암괴석들이 산의 관절을 이룬다. 온갖 꽃과 풀과 나무들이 계절의 입맞춤을 따라 쉴 새 없이 피고 지니 찰나마다 다른 정경이 펼쳐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 순간 드나드는 바람마저 길을 잃는 산이었다. 

경수가 2년 넘게 숭산에서 지냈다지만, 워낙 산세가 복잡하고 골이 깊은 탓에 숭산에 존재하는 수많은 샛길 중 반의반의 반도 걸어보지 못했을 테다. 청성마을에서 낙양으로 내려가는 길 또한 귀로만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초행이나 다름 없었다. 

건장한 양인 사내의 걸음으로 대략 이틀은 걸린다 하니, 경수와 설의 속도로는 (운이 좋아 길을 헤매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꼬박 사흘은 걸릴 거였다.



물론 은하 밖을 떠돌며 살다가 다시 세상의 궤도로 들어가는 일이 어찌 그리 간단하겠는가. 별과 달조차도 제 몸이 하얗게 부서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거늘. 죽기를 각오하고 내디딘 걸음이었으나, 여정은 예상보다 더욱 녹록지 않았다. 

시선마다 날을 세운 바위들이 철벽 요새를 이루는 망정 계곡을 지나나, 금방이라도 태양의 배를 가를 듯 맹렬한 기세로 솟아난 검은 대나무들의 군락이 드넓게 펼쳐졌고, 이어 돌 틈마다 꽃무릇이 붉게 멍울진 비탈이 앞을 가로 막았다. 

워낙 폭이 좁고 다니는 이들이 적은 초로인지라 말을 탈 수도 없었고, 산짐승들 덕에 길이 지워지거나 끊기기도 했다. 옷이 찢기거나 더러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끄러지거나 넘어져 다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또다시 기약 없이 쓰디쓴 그리움만 삼켜야 할 테다. 

잠깐 멈춰 목을 축이는 시간, 잠깐 앉아 끼니를 때우는 시간, 잠깐 누워 눈을 붙이는 시간까지 아끼고 아껴 걷고 또 걸었다. 

별들의 소음마저 희미해져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지는 밤이 되어서야 근처 바위나 나뭇등걸에 기대어 지친 발을 쉬게 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의 깃이 서늘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왕께서 설마 아기씨를 잊진 않으셨겠지요……?”

“……”

“다른 이랑 혼인을 했다거나, 후궁을 들이셨다거나, 그런……”

“……곧 황제가 되실 분이다. 새로운 비를 맞거나, 후궁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천하가 그 분의 것인데, 취하지 못할 이가 어디 있겠느냐.”

“그래도……그래도 말입니다……”

“……”

“아기씨가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먼 길을 찾아오셨는데……”

“……”





차라리 그랬다면.

차라리 나를 잊으셨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경수는 백현을 잘 알았다. 그가 감내한 고통의 기억을, 수년 간 홀로 오롯이 삼켜내야 했던 서글픈 진실을. 불안과 절망, 길고 긴 하루 끝 여상한 낯으로 깨어나 심장 가장 연한 곳을 무참히 도려내는 그 지독한 통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렇기에, 그래야만 했다. 반드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마음의 문을 닫을 것이다. 저를 만나기 전 그랬던 것처럼,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아끼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천년의 빙하도 녹일 듯 따스하고 다정하던 눈빛도, 뭇별에 불을 켜듯 아름답고 눈부시던 미소도,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다시 스스로를 바닥 없는 심연에 가두고 매일 밤 새롭게 눈 뜨는 악몽에 피 흘리며 몸부림칠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그를 지키고 싶었다.



이 길고 긴 여행의 끝에서 그를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다. 고백하고 싶었다. 나, 당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단 하나의 기억과 단 하나의 믿음을 붙든 채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우리가 나눈 단 하나의 약속을 지키고자 여기까지 왔다고. 

당신이란 이름의 기도, 오직 그 하나의 바람으로, 나, 여태껏 살아왔다고.



“아기씨. 저기, 낙양성이 보입니다……”

“……”

“……이제 다 왔습니다……이제 정말, 끝이 보입니다……청룡의 깃발입니다, 연왕군의 깃발입니다……”

 


앞장 서 걷던 설이 환희와 감격에 겨운 얼굴로 경수를 돌아봤다. 그때였다. 경수가 설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는 찰나, 문득 목 근처에 차고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 칼이었다. 

경수는 본능적으로 발을 멈췄다. 


순간, 두 겹의 시간이 동시에 제 몸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게 찰나에 일어났으나, 눈앞의 풍경은 아주 천천히, 천천히 시야에 새겨지고 있었다. 설의 눈과 입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로 벌어지고, 팽팽하게 경직된 광대가 기이한 모양새로 도드라졌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양 살쩍을 거세게 잡아당기듯 볼품없이 구겨지는 이마. 눈썹산에서부터 일어난 미세한 경련이 삽시간에 파도처럼 몸집을 불려 곁 뺨을 덮었고 ㅡ 이내 창살보다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살랐다. 비명은 통증보다 빨랐다. 

저를 보는 설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인간 세상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적이라 하지.]

[예를 들자면, 다 이긴 승부가 갑자기 뒤집히는 일. 다 만든 밥상이 갑자기 엎어지는 일. 공들여 쌓은 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일. 또……죽었던 이가 살아서 나타나는 일 같은.]



[약속하지.]

[내가 있는 한, 위국에 더 이상의 기적은 없을 것이다.]










+

긴 여정의 끝이 보이네요. 다음편에는 드디어 기다리시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약속의 25편으로 신년에 찾아 뵙겠습니다. 올 한 해도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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