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후.




미희야.

이왕 사는 거,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지내던 보육원 선생님이 해 주신 말이 떠올라서 눈을 떴다. 평생 잊고 살던 말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니 커튼 사이로 새벽 하늘이 보였다.


행복하고 의미있게...


이 나이 먹고도 모르겠는 말을 어린애한테 왜 해 주셨던 건지. 한숨과 함께 다시 똑바로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 있다. 은퇴한 군견은 끝까지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아무리 사료를 많이 주고, 푹 쉬게 내버려두어도 제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양만 먹는다고.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도 새벽 6시면 눈을 뜨는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험을 무릎 쓰고 피 냄새가 차마 떠나지 않은 정장을 챙겨입은 채, 또 다른 피를 묻히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 바라던 건데 동시에 살아있어 뭐하나 싶었다.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죽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이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해는 어제와 똑같고 내일도 같겠지. 모든 목적과 방향을 잃어 헤매는 느낌이다.

예전이었으면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간단히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한 뒤 출근을 했을 거다. 하지만 ‘출근’이라는 막대한 일이 사라진 지금. 어떤 의욕도 들지 않은 채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는 게 일과가 되어버렸다. 2시간 정도 멍하니 천장만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뜰 때 즈음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창문을 열면 따뜻하고 마른 모래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어온다.


이젠 정말 더워질 일만 남았구나.

코끝을 맴도는 봄 공기는 겨울의 공기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

 

창문을 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가 내 곁을 떠난 이후, 3개월이 넘게 흘렀다. 이제 눈은 내리지 않고 4월의 차갑고도 따뜻한 공기가 만연하다. 바뀐 건 계절만이 아니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게 낯설었다. 그에게서 간혹 잘 지낸다는 메시지가 오고, 벼리씨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자주 바꿨다. 잔디밭에 놓인 운동화 2쌍. 그림자 2개. 얼굴이 대놓고 나오진 않지만 누가 봐도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며 막연히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잘 지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결국 모두가 원하던 결말에 도달했다. 여전히 서로가 소중하고, 이젠 한 발자국 정도 떨어져 안부를 전한다. 감옥에 간 가림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가령이 뒷바라지를 잘 해 주고 있어서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가령은 내가 걱정할 걸 알고 가림을 보고 올 때마다 연락을 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림에게 갔다 온다고 하길래 이번 주말에는 나도 면회 한 번 가야지. 라며. 문자 답장을 보냈다.

가령에게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이번엔 전화가 왔다. 핸드폰 액정에 뜬 여섯 글자에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리지안 선생님’


아무래도 가장 많이 변한 건 선생님이었다. 그는 하루에 못해도 꼭 2번씩 내게 전화를 걸었다. 평일에는 출근할 때 한 번, 퇴근할 때 한 번. 주말에는 늦잠 자고 일어나서 오전 10시 쯤 한 번, 잠들기 직전인 밤 11시 30분에 한 번. 하루종일 문자를 한다던가, 특별히 만나서 어딜 간다든가 하진 않았다. 그저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고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게 다였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오전 8시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습관처럼 목청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으니 그 활기찬 목소리가 차마 가시지 못한 잠을 깨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희씨. 일어났어요?”


이제 막 집을 나섰는지 전화기 너머로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 방금요. 출근하세요?”

“지금 나왔어요. 아침은 먹었고?”

“아... 이제 먹어야죠.”

“꼭 챙겨 먹어요. 그럼 오늘은 뭐 할 거예요?”


그의 집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가는 고작 10분 남짓한 그 거리가 우리가 아침 안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장 보고... 운동 하지 않을까요. 시간 남으면 뜨개질 좀 하고...”


최근에 녹색 실을 사서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었다. 그라면 길고 두꺼운 목도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열심히 뜨고 있긴 한데 시간이 영 오래 걸린다. 이러다 진짜 한여름에 주게 생겼네. 나는 괜히 속이 간지러워서 침대에 도로 누웠다.


“아. 뜨개질 하는 미희씨 봐야 하는데!”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울린다. 놀리는 게 분명한 그 말에 나는 속으로만 앓는 소리를 냈다.


“놀리지 마세요...”

“그래도 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직접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네?”

“그런 게 있어요.”


말이 좀 의뭉스럽다. 찝찝하긴 하지만 쉽게 알려줄 것 같진 않아서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내일이 벌써 토요일이죠?”

“네. 시간 빠르네요.”

“주말에 뭐... 어디 가거나 그래요?”


그가 이런 걸 묻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전화통화만 하고 직접 만나자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기에. 놀란 마음에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어, 예? 어... 별거 없긴 해요.”

“그쵸? 다행이네요. 아. 나 이제 차 탔어요. 이따 저녁에 다시 전화 할게요.”

“어... 네. 조심해서 가세요.”

“네. 좋은 하루 보내요.”


말을 마치고도 그는 잠시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가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지안씨도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괴롭지. 이 나이 먹고 침대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머리를 싸매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정신 차리고. 일단 아침부터 먹어야 겠다. 챙겨 먹으라 했으니 챙겨 먹어야지. 슬슬 바닥을 보이는 냉장고를 뒤져 아침을 해 먹는 동안 조금은 기분이 들떴다.

들뜨는 마음과 별개로 오늘 하루는 어제와 같았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시 운동하러 공원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TV를 틀어놓은 채 뜨개질을 했다. 취미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일상이 더 지루할 뻔했다.

내일도 오늘 같겠지. 3개월 동안 이렇게 살다보니 회복이 되는 것 같아 좋긴 한데 잘 모르겠다. 모아둔 돈뿐만 아니라 그가 내 곁을 떠나면서 몰래 계좌에 넣어준 돈도 있었다. 다시 돌려주겠다 했지만 그랬다가는 영원히 안 보고 살거라 으름장을 놔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줄었다.

그래도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어디 직장이라도 알아볼까. 중졸에, 경력이라곤 조폭 일밖에 없는 나를 받아줄 곳이 있긴 할까 싶지만.


씁쓸한 생각이나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선생님께 전화 올 시간이 된다. 병원에서 퇴근하고 돌아와 주차를 마치는 시간. 오후 7시 30분. 하지만 오늘따라 전화가 늦는다. 7시 50분. 8시. 8시 30분. 9시.

거실 불을 켜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걱정되는데. 먼저 해 볼까? 하지만 왠지 용기가 안 났다. 일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 버린 거야. 이러다가 그새 또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에 전화가 올 게 뻔해.

 

하지만 그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까지도 그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결국 아침 9시 쯤 먼저 전화를 걸어봤다. 짜증과 졸음 섞인 목소리라도 괜찮으니까 받아주길 바라며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안내음만이 이어졌다.

처음에 느낀 감정은 서운함이었고, 이제는 슬슬 걱정됐다. 가뜩이나 잠을 설쳤는데 생각이 많아지니 더 피곤했다. 심지어 아침 일찍부터 옆집에서는 이사를 오고 있었다. 최근에 옆집 노부부가 이사를 가서 빈집이었는데 그새 또 새로 입주하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한숨만 내쉬다가 이왕 일찍 일어난 거 운동이나 하고 오기로 했다. 공원 한 바퀴, 아니, 두 바퀴 뛰었는데도 그에게서 전화가 없으면 다시 전화 해 보는 거야. 마음먹으며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갔을 때였다. 열심히 상자를 나르는 이삿짐 센터 직원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티 없이 맑은 인상. 가끔 안경 너머로 드러나는 삼백안. 늘 걸치고 다니는 긴 카디건.


“서... 선생님?”


꿈인 줄 알고 눈을 두어번 비볐다. 내 부름에 그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운동 나가요?”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내 옆집으로 이사 오는 중이라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옆집으로 이사 오시는 거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상자 하나를 든 채 웃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이사 준비 하느라 바빠서 연락 못한 건 미안하다 했다. 이제 막 이사 온 사람더러 다시 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뭣보다 반가웠기에 나는 달아오르는 귀를 감추려고 묶었던 머리카락을 도로 풀었다.


병원에서는 조금 멀어졌지만 그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마트도 크고, 뭣보다 아파트 앞에 강변 공원이 있어서 좋다고.


“나 퇴근하고 가끔 공원에서 산책 할래요? 병원만 왔다갔다 하니까 체력이 떨어져서 안 되겠어.”


그렇게 매일 밤,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1시간 저녁 산책이 시작된 거다.

이사 온 바로 그날 밤부터 시작된 산책을 이용해 그에게 조깅하는 법과 공원에 있는 철봉으로 턱걸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조깅은 곧잘 하는데 턱걸이는 영 못해서 일단 기초 체력부터 기르는 걸 목표로 잡았다.


“이거, 철봉이 별로라서 그래요.”


턱걸이를 처음 해 보던 날, 손에 묻은 쇠 냄새를 킁킁대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철봉 멀쩡해요...”

“장인 답게 도구탓 해야죠. 오래된 거라 그런지 영...”


그 헛소리마저도 우스워서 한참이나 심호흡하며 웃음을 삼켜야 했다.

확실히 같은 동네, 그것도 옆집에 살다 보니 마주칠 일이 늘어갔다. 그가 이사 오고 바로 다음 날이었을 거다. 갑자기 편의점 음료수가 마시고 싶어서 이온 음료 몇 가지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그가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멀리서 나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활짝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만나네요! 편의점 갔다 와요?”

“네. 음료수 좀 사려고...


힐끔 보니 그가 들고 있는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힘에 부치는지 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다. 나는 선뜻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방 안 무거우세요? 들어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양쪽에 하나씩 드는 건 어떠냐고 할 참이었다. 갑자기 가방에서 작지만 선명한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야옹.


“...고양이 있어요?”

“네! 인사할래요? 맹지라고 해요. 올해 5살 정도 됐고. 공주님이에요. 새 동네로 이사 온 김에 근처 동물병원에 갔다 왔어요.”


그 말에 나는 무릎까지 꿇고 가방을 살폈다. 이제보니 가방에 쳐진 그물망 사이로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에 생김새가 제법 귀여워서 넋 놓고 바라보는데 아까 그가 말한 것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5살 정도요?”

“아. 얘가 길거리 출신이거든요. 병원 앞에 자주 찾아오던 친구인데 정들어서 그만 데려와 버렸어요. 그래서 정확한 나이를 몰라요.”

“아하...”


그래서 귀 끝이 조금 잘려 있었구나. 호기심에 그물망 쪽으로 손가락을 내미니 맹지는 내 손가락에 제 얼굴을 비볐다. 이 모습에 그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원래 낯 가리는데 신기하네. 미희씨가 좋아?”


그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맹지는 길고 선명하게 울었다.


“어떡해. 미희씨 좋대요.”


괜히 머쓱하다. 나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수줍게 웃었다.


“이왕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갈래요? 집들이 겸.”

“어, 괜찮은데...”

“마침 어제 연어 사다 놨는데 너무 많이 사서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해요.”

“어...”

“안 될까요?”


부탁하는 모습이 마치... 아까 애교 부리던 맹지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표정에 홀린 게 문제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그의 집에 와서 연어 스테이크를 얻어먹고 와인까지 한 잔 마신 뒤였다.


“오늘 재밌었어요.”


선물도 준비 못 하고 와서 대신 설거지를 해 주는데 그가 갑자기 내 등 뒤로 오며 말했다.


“뭘... 저야말로 잘 먹었어요.”

“다음에 오면 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알겠죠?”


그가 미소지었다. 그 미소 한 번에 얼굴로 피가 확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무장갑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네.”


가까이 사니까. 행동반경이 겹치니까. 우연이라 이름 붙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눈치 보며 일궈낸 하나의 결과라는 것을. 내가 아무리 거리를 두자 말해도 그는 순진하게 웃고 말 테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말만 되새기다 보니 어느새 그는 내 바로 옆에 앉아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맹지 잘 놀아주고 있어야 해요!”

“네.”


가끔 그가 출근할 때마다 맹지를 봐 주는 게 내 일과가 되기도 했다. 활기찬 고양이랑 놀아주다 보면 사람 체력이 먼저 빠진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낚싯대, 오뎅꼬치,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쥐 인형. 지루하지 않도록 번갈아 가며 흔들다 보니 항상 먼저 드러눕는 쪽은 맹지가 아니라 나였다.


“좀... 쉬자...”


내가 그의 집 거실 바닥에 드러누우면 맹지는 조심스레 내 머리에 제 머리를 비비곤 내 팔 사이로 들어와 누웠다. 은근슬쩍 조금씩 다가오는 게 꼭 제 주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언제 한 번은, 그 부드럽고 따듯한 촉감에 까무룩 잠이 든 적이 있었다. 한참 뒤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눈을 떠 보니 퇴근하고 돌아온 그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내 맞은편에 누워있었다. 가운데에 껴 있는 맹지와 그새 잠든 그의 숨소리. 거실로 들어오는 달빛.

차마 깨울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맹지를 먼저 쿠션에 눕혀주고 그도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갔었다.


“미희씨...”


잠결에 중얼거리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 계속 주무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세상모르고 잠든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이 아니라, 눈이 녹아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만져보면 차가울 것 같은데 그 투명한 곳에는 햇살을 담고 있어서. 따스한 온가를 안은 채 흐르고 또 흘러 만물을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그 이상하고 묘한 사람은 언제나 내게 애정을 아까지 않았다.

이런 나를 왜 좋아해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정도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아니었음에. 그저 가끔 놀랄 뿐이다. 누군가에게 이 정도의 다정함을 받은 건 처음이라서.

악의 없는 애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마음도 결국엔 소모품이라 상대에게 주고 나면 다시 받고 싶어진다던데. 그는 그것조차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받아주기라도 해서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을 볼 때마다.

그 눈빛에서 따스한 햇살과 물이 스밀 때마다.

찬란한 녹음이 내 속에서도 솟아오르는 거다.


“날씨 좋네요.”


매일 밤 8시 30분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만나 근처 공원을 몇 바퀴 돌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네요.”


오늘 역시 그의 말대로 날씨가 좋았다. 날은 제법 따뜻해져 있었고 이젠 더워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전히 가끔은 ‘그가 지내는 곳에도 여름이 올까.’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지만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단 몇 초만에 사그라든다.


“내일 나 병원 쉬는 날인데. 집에 놀러 올래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연어 덮밥 어때요?”


연어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오늘 점심에도 연어를 먹어서 이틀 연속은 조금 물린다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굳이 그래야 할까 싶었다. 내가 뭘 먹는 상상만 해도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좋아요.”


내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기대해요!”


그 길로 공원을 2바퀴 더 돈 뒤 잠시 쉴 겸 벤치에 앉았다. 미리 싸 온 물을 그에게 건네니 그는 단숨에 들이켰다. 물을 마시고 땀을 식힐 즈음, 그가 나를 불렀다.


“맞다. 미희씨.”

“네.”


이름을 부르고도 한참이나 뜸을 들이길래 기다려 주었다. 그는 벤치에 앉은 채 다리를 까딱이다가, 물병을 꼭 쥐고, 다시 내려놓고,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가 똑바로 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생각해 봤어요?”

“어떤... 아...”


미희씨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꼭 말 해 줘요.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와 지금처럼 지내는 게 익숙해 지기도 했고 편하기도 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 역시 긴장되는지 나와 쉽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동안의 3개월은 미희씨가 휴식하고, 마음을 정할 수 있도록 준 시간이었어요. 물론 나한테도 해당하는 거고요.”


저 멀리서 흐르는 하천을 바라본 채 그가 말했다. 오래된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인 그의 표정은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진 어린아이 같았다.


“난 3개월 동안 짧게, 조금씩 통화하면서 마음이 더 커졌어요. 얼굴 안 보고 지내면 좀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애틋해진 거 있죠?”


그가 웃었다. 반면에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는, 그런 회피성 거짓말도 못하겠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있긴 해서 나는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


“더 오래, 많이 보고 싶어서 미희씨 옆집으로 이사까지 왔어요. 이게 내 대답이에요.”

“...”

“그래서 그런데. 이제는 미희씨도 말 해 줄 수 있어요?”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는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았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희씨는 나와 어떤 관계로 남고 싶어요?”


어떤 관계.... 연인으로 정의 내리고 싶다 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동안은 확신할 수 없었는데 내 옆에서 잠든 당신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고.

그 표정을 더 보고 싶어졌다고. 당신처럼 나도 당신을 더 오래, 많이 보고 싶다고.


“저는...”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 거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계속 좋아하고 있었어요. 같은. 흔한 고백으로도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둘의 관계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내게 고백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다. 감히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전해지지 못할 마음이지 않나.

이런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같이 있어 주세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되고.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그의 두 눈동자가 반짝인다.


“같이 있고 싶어요.”


살아오면서 배운 모든 다정함을 내게 쏟는 사람.

이제는 그 다정함에 보답할 때가 되었다.


내 대답을 듣자 그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이의 손끝에 내 손끝을 가져다 댔다.


...간지러워.

그런데 그게 썩 싫지 않다.


“같이 있어 줄게요.”


침묵 끝에 그이가 대답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그이는 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깍지 낀 두 손 사이사이로 온기가 전해진다.


“이왕 같이 있는 거, 나중에 나랑 꽃집 하나 열고.”

“네.”

“약속했으니까 무르면 절대 안 돼요. 은근슬쩍 발 빼면 맹지도 못 만나게 할 거예요.”

“알겠어요...”


그이가 웃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한참이고 앉아 있었다. 공원 야경이 이렇게 예뻤나. 작은 하천과 그 물에 비친 아파트 불빛들. 점점 무성해지는 수풀. 산책로 한쪽에서는 새로 심은 튤립 잎사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나는 천천히 내 어깨로 기대오는 그이를 막지 못한다.

 

겨울이 가고. 늘 그랬듯 봄은 찾아오고.

주위를 둘러싼 만물이 하얀색에서, 초록색으로 물들어 가고.

나의 세상 역시

물감이 번지듯

조금씩

그렇게.

 

피어오르겠지.

 

그런 내 세상 속에

이젠 그이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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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전 스타트는 지안과 미희였네요.

처음부터 분량조절에 대실패해서.... 네...

모든 외전의 분량조절 실패 상태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분량 많으면 좋죠, 뭐.


나머지 3개의 이야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모든 외전은 본편이 끝난 시점에서 3~4개월 후입니다. 딱 봄 즈음이겠네요.


외전1: 10월 16일

외전2: 10월 18일

외전3: 10월 20일

외전4: 10월 21일 

순서로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쓰고 싶은 걸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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