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망대에서 다시 그를 마주쳤다. 그는 정운의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그가 정운을 알아보고 머플러를 벗으려다가, 정운이 다른 머플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한동안 하고 다녀도 되냐고 물으며 머플러를 고쳐 맸다. 그가 품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꺼내어 정운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고 나란히 난간 앞에 서서 캔 커피를 홀짝였다. 품 안에 계속 넣어두어 아직 식지 않은 그 온기를 정운은 꼭 쥐었다. 조용히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점점 해가 빨리 지네요, 날이 점점 추워지네요. 같은 담담한 말을 주고받았다. 그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 동네 사세요?”

   그는 여전히 사진을 넘기며 대답했다.

   ”뭐... 산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그가 여간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가 자꾸 만드는 의도적인 침묵에, 정운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전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동네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혹시 근처 사시면 좋겠다 했죠.“

   그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정운을 보았다.

   ”제가 여기 살면 좋겠어요?“

   ”네 뭐… 가끔 커피도 한잔하고, 동네 지리도 좀 알고… 그러면 좋잖아요.“

   가볍게 대답하는 정운의 말에, 그가 전망대 아래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정운에게 물었다.

   ”저어기 대충 어디쯤 사세요?“

   정운이 팔을 올려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어느 즈음을 가리켰다.

   ”저어기, 저 쪽! 보이시나요? 큰 건물 있고.“

   ”어디? 어디요?“

   두 사람이 보는 시점의 위치가 다른 탓에 정운이 가리키는 곳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정운의 바로 앞까지 와서 그를 등지고 섰다. 정운이 여전히 들고 있는 오른팔 바로 밑으로 그가 팔을 따라 붙이니 두 사람의 팔이 같은 각도로 놓였다.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으응... 초등학교 뒤쪽 동네 사시는구나.“

   ”네. 역시 동네를 잘 아시네요. 여기 자주 오시는 거 맞죠?“

   그가 정운을 마주 보며 돌아섰다. 워낙 가깝게 서 있던 탓에 그가 몸을 돌리자 움찔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그가 의도적으로 만든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조심스레 호흡을 멈추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세상이 눈동자에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잠시 정운의 기색을 살피던 그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사 올까 봐요, 근방으로…”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쭉 뻗었던 팔이 접히며 그의 어깨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문득, 왜 내가 그와 대화를 이어가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지거나 묻거나 하는지 전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일까. 그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진 않으면서도, 몸을 물리지도, 대화를 피하지도 않고 전망대에 계속 나타났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아, 저는 이 정운입니다.“

   그가 잠시 머뭇이다 대답했다.

   “권 수해입니다.”

   드디어 이름을 말해준 건가. 정운은 수해가 뒤로 물러나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때문에 이사 오시려구요?”

   괜히 시시한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상대는 분명 웃으며 에이 그건 아니죠 라고 할 것이다. 큰 의미 없는, 분위기를 풀기 위한 가벼운 농담이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수해는 정운을 보고 씩 웃었다.

   “에...?”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당황해 그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수해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정운 앞으로 걸어와 섰다.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정운 씨랑 이 밑에서 만나면 어떤 모습일지.“

   수해가 먼저 떠나려는 듯 몸을 돌려 내려가다, 정운을 돌아보았다.

   “같이 내려가시죠.”


***


   둘레길처럼 적당한 경사로 이루어진 산책로를 내려오며 정운은 갑자기 일어난 변화를 돌아보았다.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수해라는 남자는 오늘 내게 이름도 알려줬고, 내려오는 길에 동행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여기로 이사를 오겠다느니 하는 말들은…

   채 되씹기도 전에 수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산책에 꽤나 열심이신 것 같아요. 거의 매일 오시는 거 보면.“

   ”아 네. 여기가 전망이 좋잖아요. 하늘이 탁 트여서 잘 보이거든요.”

   수해가 터벅거리며 거칠게 걷다가 정운을 곁눈질했다.

   “운동 꽤나 하셨을 것 같은데. 런닝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하늘을 보러 오시는 건가요.”

   그 말에 조금 멋쩍어져,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 운동… 예전엔 많이 했었어요. 지금은 할 일이 없어서 쉬고 있지만…“

   습관처럼 쓰다듬는 뒷머리지만 이제 까슬함은 없다. 군 복무 중에나 짧게 유지하던 머리이고, 지금은 어느새 자라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에 감기는 감각이 익숙지 않아 괜히 몇 번 더 쓸어보았다.

   ”군인이셨어요?“

   예상치 못하게 들어오는 질문에 정운이 마치 마술이라도 본 것 마냥 눈을 크게 떴다.

   ”어… 떻게 아셨어요?“

   수해는 그저 웃으며 어깨를 곧게 펴는 시늉을 한다.

   ”아직도 각이 딱 잡혀 있는데요.“

   ”아… 아직 티가 나는구나.“

   사회로 나온 지 그래도 한 달 남짓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일반인들이 보기엔 아직 한참 물이 덜 빠졌나 보다. 왠지 쑥스러운 마음에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었다. 

   수해는 딱히 운동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마른 체형인데 마냥 힘이 없어 보이진 않고, 오히려 다부진 것이… 생활형 실전 근육이랄까. 이런 것만 보고 불쑥 노가다 좀 하셨나 봐요? 라고 물을 수는 없겠지. 정운은 그냥 잠자코 있기를 택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수해가 걸음을 멈추고 정운을 보았다. 이제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정운이 쉽게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이제 아마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수해도 금방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목에 감고 있던 정운의 머플러를 만지작거렸다. 왜 유독 이 사람을 만나면 헤어짐이 자꾸 미적미적 늘어질까. 꼭 떠나기 아쉬워하는 것처럼 괜히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고. 더 놀고 싶고. 정운은 수해가 자기 또래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숱하게 수업을 빼먹고 어디로 놀러 다녔을 그런 친구가 됐겠지.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무료하게 흐르는 시간을 함께 견디는. 꼭 지금처럼 말이다.

   정운이 주머니를 뒤적여 명함을 꺼내 수해에게 건넸다.

   “저… 나중에 또 이 근처에 오게 되면 연락 주실래요. 같이 커피라도 한잔해요. 명함은 예전에 쓰던 거라… 지금 맞는 건 이름하고 핸드폰 번호 뿐입니다.“

   명함을 건네면서도 정운은 나중에 연락하라는 자신의 말이 꼭 필요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들릴까 신경이 쓰였다. 이 행위에 어떤 의도가 담겼든 아니든,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연락처를 건네며 다음 만남을 말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사람을 주변에 잘 들이지 않는 정운에게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명함을 받아 든 수해가 앞뒷면을 확인하더니 싱긋 웃었다.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던가, 알겠다는 의례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그동안 계속 기다렸던 새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명함을 점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지퍼를 올렸다.

   ”아주 감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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