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경기가 끝나, 사람들은 관중석을 일어나며 밖을 나가기 시작했다. 태섭은 땀에 젖은 목에 수건을 걸었다. 코트를 벗어나 대기실로 이어진 통로로 들어왔음에도 방금 전까지 코트 위에서 뛰던 것처럼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었다. 흥분을 진정하기 위해 태섭은 주먹을 쥐었다. 이 떨림이, 태섭을 언제나 주저앉지 않게 했다. 바닥에 농구공 튀기는 소리, 골대에 들어갈 때 나는 소리, 슛할 때 나는 소리. 그는 피곤해서 눈을 작게 뜨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멤버들을 향해 뒤 돌았다. 잘했어, 모두들. 

스코어는 87대 83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북산고가 이겼다. 전반전에서 육영고의 높은 패스 성공률에 역전 당할 뻔 했으나 태섭의 속공과 대만의 연속된 3점 슛이 빛을 발했다. 백호는 전반전은 벤치에 있었다. 백호의 등 문제로 그 대신 전반전 대부분을 은퇴를 앞둔 준호가 맡았던 것이다. 벤치에서 궁시렁대던 백호는 후반전에서 다소 파울을 받았으나 후반전에서 상대의 리바운드를 제압, 골로 연결시켜 득점했다. 경기가 끝나는 신호를 보자, 태섭은 웃으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후. 힘들어서 쓰러질 뻔 했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땀방울을 연신 닦아냈다. 대만이 뒤에서 “정말 죽을 뻔 했네.”하고 거의 정신으로 바닥을 버티고 서 있었다.    

처음에 코트 위에 들어섰을 때, 상대팀원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키가 커서 태섭은 조금 위축됐다. 170대도 없는 듯 했다. 저 장신들을 계산하며 슛과 패스를 성공시켜야 해. 그러나 태섭은 긴장되어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묘하게 가슴에서 올라오는 열감을 어찌하진 못했다. 오랜만의 전신을 일깨우는 경기를 그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 한다.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모두들 정말 잘해줬어. 기자들이 12월 윈터컵의 강자로 염두해 두기까지 하고 말이야.”

한나가 기쁘게 이야기했다.

“아직 모자라. 근소한 차이로 이겼어.”

하지만 잘했다. 엄한 치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날은 모두 늦게까지 자지 못했다. 비록 연습경기라 해도 그들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머쥐다니, 그곳에서 오는 쾌감이 컸다. 관중석 대부분은 육영고 학생들이었다. 응원이 거셌다. 교통비 때문에 오지 못한 호열 무리의 빈자리가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도 있는 힘껏, 잘난 척을 한다. 태섭은 언제나 그렇듯이 허세를 부리며 긴장을 숨겼다. 그리고 이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에서 입을 막고 구토를 참던 소년은 코트 위에서만큼은 의기양양해보였다. 

다음날은 하루 간 대절한 버스를 통해 못 가본 명소 세 군데를 돌았다. 태섭은 벌써부터 내일이 다가온 것 같아 심장이 계속 빨리 뛰는 중이었다. 그는 창가에 턱을 괸 채 밖을 보았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버스는 상점거리를 지나치고 커다란 쇼핑센터를 막 지나가는 중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서 있는 사람을 보는 태섭은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머리를 바짝 깎은 사람이 눈에 띄면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저녁에는 숨겨진 현지 맛집이라는 곳에서 냉모밀과 돈까츠를 먹었다. 조용한 주택단지에 있는 식당은 나무 테이블이 5개 정도 있는 곳으로 아담했다. 그리고 안쪽에 다른 방 하나가 있어 태섭네는 그곳에서 먹었다. 

“와. 맛있다.”

“그러네.”

“하나 더 먹을래!”

백호의 말에 준호가 웃으며 “그래, 더 추가하자.”하고 말했고 태섭과 대만과 태웅이 모두 손을 들었다. 나도. 치수도 뒤늦게 말했다.

“와. 오늘 날씨 짱이다. 서늘한 바람 불고.”

“그러게나 말이야. 여기 술 시켜도 돼요?”

“고등학교 1학년이잖아, 너. 제정신이냐.”

치수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옆 테이블에 있던 안 감독이 “농담이 참 재밌군요.”라며 푸근하게 웃었다. 대만이 “저거 장난 아니에요. 감독님…….”하고 말했으나 안 감독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조용한 식당이 단체로 온 농구선수단으로 시끌시끌했다. 테이블 맨 끝에 앉아 물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명헌이었다. 태섭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식당을 나와 전봇대 옆에 선 태섭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번엔 이태섭?”

“……송태섭이거든요?”

태섭이 작게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뭐해요……?”

“너랑 전화하지. 뿅.”

“아 맨날 그렇게 답하더라. 뭐하고 있는지 제대로 말 안 해?”

“숨어 있어용.”

“왜요.”

“전화하려고.”

그건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태섭은 웃으며 뒷목을 긁었다. 고개를 숙이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자기의 작은 발이 보였다.

“그거 진짜예요?”

“뭐가.”

“산왕공고 애들은, 일 년에 딱 두 번만 나올 수 있다던데.”

“맞아.”

“헉. 그러면 나는 어떻게 만났어요?”

“3학년이니까. 봐주는 거지. 게다가 난 우수 장학생이니깐.”

“부럽네, 부러워.”

“너도 할 수 있어, 뿅.”

“난 공부를 못 해서…….”

낙제생인 태섭은 간신히 밤샘 공부를 하여 어떻게든 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내년에도 공부를 할 생각하면 암담했다. 

“하면 되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다 그러더라.”

“너 가르치면 잘하잖아, 뿅.”

처음에 이해를 못했던 태섭은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리곤 온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때 명헌과 통화로 자위를 한 뒤 엄마 몰래 새벽에 이불을 빨고-심지어 욕조가 없는 화장실이라 더 힘들었다- 콜라를 쏟았다는 변명을 하며 얼마나 식은땀이 났던가. 

“다음에는 안 해요.”

“또 한다고 안했어.”

“할 거잖아.”

“지금 할까?”

“윽.”

태섭이 신음을 내더니 누가 옆에 있는 것처럼 휙휙 주변을 보았다. 그러다 자기가 한심해져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됐어요, 끊어요.”

“하하.”

웃었다. 태섭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명헌이 웃었다. 손목 안쪽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태섭은 손목을 바지에 쓱쓱 비볐다. 마찰때문에 그곳이 복숭아처럼 분홍색으로 옅게 물들었다. 

그때 옆의 벽 위에 작게 난 조그마한 창문에서 멤버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 소리에 태섭은 창문을 올려다봤다. 천장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즐거운 얘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시끌거렸다. 

“무슨 소리?”

명헌의 목소리에 태섭은 창문에서 다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다 같이 식당에서 저녁 먹고 있거든요.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왔어요.”

“뭐 먹었는데?”

“냉모밀하고 돈까츠랑 닭튀김이랑 새우튀김.”

“많이도 먹는다 뿅.”

“한창 크는 고등학생이라고요.”

“크는 거 맞아?”

그 말에 잠시 흥분한 태섭은 곧 가다듬고 화제를 돌렸다. 

“아키타는 뭐가 유명해요?”

“음. 쌀.”

“뭐?”

“쌀.”

“…….”

“쌀, 뿅.”

뿅 소리만 들으면 태섭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뿅.”

“그만해요. 알겠어요.”

“사실 여기는 아키타현에서도 완전 시골이야. 아마 너 오면 놀랄 걸.”

“그래도 좋아요.”

“…….”

“만나는 게 난 좋은 거니까…….”

“…….”

“그.”

태섭은 계속 생각하던 걸 드디어 꺼내기로 했다. 그의 입이 머뭇거리며 열리다 말기를 반복했다. 내가 사는 곳까지 와줘서 고마웠어요. 



센다이시에서의 여정이 모두 끝났다. 안 감독은 유명한 사람인지, 어떤 한 사람이 깔끔한 고급 식당에서 마지막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그걸 끝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다행히 가마쿠라로 바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태섭뿐만이 아니었다. 치수와 준호는 함께 도쿄를 놀러가기로 했으며 대만도 도쿄에 있는 친척네에 놀러간다고 했다. 백호는 왜 자기가 태웅과 같이 가나가와로 돌아가야 하냐고 투덜거렸다. 한나가 ‘내가 있잖아.’하고 백호의 등을 팡팡 쳤다.

 혼자 센다이에 남아 여행한다는 태섭을 보며 멤버들이 또 다시 의심하려 하기 전에, 태섭은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사귀기 직전이라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연기자처럼 연기했다. 아 다음 달에 고백할 거야. 이번엔 성공할 거라고. 늘 차이는 태섭을 아는 멤버들은 그 말에 슬슬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어제 새벽까지 자지 않고 노느라 다들 피곤해 보여 태섭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백호가 웃으며 ‘역시. 모태솔로 태섭군에게 여자 친구가 생길 리 없지.’하고 좋아했다. 이번에 차이면 20번 아니냐? 대만이 지나가는 말투로 성의 없이 말했다. 11번이거든요. 짜증나네, 저 사람. 태섭은 더 짜증이 치미기 전에 얼른 안 감독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촉박한 터라 마음이 초조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 갔다. 아슬아슬했다. 아키타로 가는 버스는 1시간 20분마다 한 대씩 있었다. 한 대를 놓치면 그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거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허둥지둥 터미널에 도착한 태섭은, 이제 막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아키타행 버스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빠르게 내쉬며 멈춰 섰다. 

“후. 큰일날뻔 했네.”

 그는 5천 엔을 육박하는 버스비를 계산하고 차표를 받았다. 그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지갑을 꺼내 손바닥으로 가리고 돈이 얼마가 있는지 보았다. 만 엔, 천 엔, 오백 엔……. 에엑. 

“이것만 있다고?”

그는 다시 셌다. 계산에 약해서 삼천 엔을 덜 셌던 걸 발견했다.  

“아. 젠장맞을. 거기서 미친놈처럼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태섭은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만 어제 오락실 게임장에서 투지에 불타올라 팀원들과 누가 더 농구공을 많이 넣는지 내기를 했던 것이다. 농구 게임기에 넣던 동전들과, 동전 교환기에 넣던 지폐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뭐에 씌인 사람마냥 ‘더 해. 더 해. 더 해.’하며 농구 게임기에 동전을 계속 투입했다. 나중에는 준호가 ‘네들 셋 정말 그만해…….’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는 바보야……송태섭, 너 왜 사니? 죽자.”

그는 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혼잣말했다. 아아. 등신, 송태섭. 강백호 말대로 나는 좆태섭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태섭을 잠시 흘낏 보았다. 이거 다 쓰면 내내 알바 해야지. 그는 잠시 입을 벌리고 미간을 모으며 아키타에서 쓸 돈을 계산했다. 숙소는 미리 전화로 한 게스트 하우스에 예약했다. 8명이서 한 방에 자는 기숙사 같은 숙소였다. 블로그를 보니 악명이 좀 높긴 하던데 선택권이 없었다. 귀신이 나온다고 하던데……설마. 하하……. 태섭은 웃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벤치에 가방을 툭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버스 직원이 버스의 앞문에 서서 아키타행에 탈 사람들을 모았다. 

아키타로 가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태섭은 안쪽 자리에 앉았다. 명헌에게서는 아직 답장이 없었다. 바쁜가……. 그는 창가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잠시 후, 급하게 올라탄 사람을 끝으로 버스는 센다이 터미널을 서서히 떠났다. 그는 분주히 오가는 차들과 터미널을 바라봤다. 안녕, 센다이. 또. 보자- 뭐. 또 올 일이 있으려나.  

한 시간 가량 태섭은 밖을 보았다. 그러다 잠을 좀 잤다. 목이 너무 아파서 깼는데 아직도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우와. 이거 진짜냐……. 그는 아픈 목을 주무르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아……. 풍경이 변했구나’

태섭은 달라진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눈동자에 밝은 정경이 비춰 그의 눈은 마치 반짝이는 것 같았다.


막히지 않은 도로 상황에 버스는 예정시간에 맞춰 터미널에 도착했다. 태섭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아. 멀다, 멀어. 하지만 그는 곧 미소를 크게 지었다. 여기가 아키타구나. 왠지 가슴이 벅차고 설레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명헌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명문 농구가 있는 곳이었다. 평생 농구만 해왔고, 농구가 인생의 전부인 태섭에게 그건 꽤 큰 의미를 차지했다. 수많은 농구 스타들을 배출해낸 지역……. 어찌 안 설렐 수가 있을까. 태섭은 백팩의 두 끈을 잡고 터벅터벅 걸었다. 

“형도 왔으면 좋았을 거야.”

잠시 태섭의 갈색눈에 옅은 물기가 찼다. 

“아! 여기서 어떻게 가더라. 잠시만!”

그러나 곧 그는 우왕좌왕하며 메모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태섭이 묵기로 한 숙소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일단 거기에 가서 짐을 풀고 명헌이 있는 산왕공고 근처로 갈 생각이었다. 명헌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 학교 학생이라면 모두 그래야 했다. 그때 어깨가 턱 잡혔다. 강한 악력에 불쾌감을 느낀-게다가 시비가 자주 털려 이런 것에 예민한- 태섭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내뱉었다. 

“뭐야, 시발?” 

“시발?”

담백한 목소리가 내는 욕은 무게가 남달랐다. 

“……어.”

“왜 전화를 안 받아.”

태섭은 키 큰 명헌이 싸늘한 얼굴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어 깜짝 놀랐다. 태섭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검은 티에 흰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있는 명헌은 태섭을 추궁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어. 내가 알아서 간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요, 그쪽 마중 나왔죠. 보면 모르시나?”

굉장히 무서운 얼굴로 명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은 안 웃고 입만 웃으니 졸라 무섭다. 태섭은 침을 삼켰다.

“아 그런데 표정이 왜 썩었어?” 

“늦으면 늦는다고 말하는게 어려워? 전화는.”

“어? 나 예정대로 도착했는데.”

태섭은 우기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다 부재중 통화 5통을 보고 눈이 커졌다. 거의 십분, 삼십분 간격으로 한시간 반 전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 그나저나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어이없네. 그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태섭이었다. 

“자 봐봐! 6시 반에 도착한다고 보냈잖아. 그쪽이 못 본 거지. 내가 내 문자 항상 보라고 했지? 답장도 늦고!”

그러나 문자에는 ‘5시 반 도착 예정이용.’하고 적혀 있었다. 명헌이 가만히 태섭을 보았다. 태섭은 문자를 보고 다시 명헌을 보았다. 

“어라리.”

“어라리.”

명헌이 표정 없이 태섭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이상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게. 이상하네.”

헉.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린 거야? 버스에서 내리고 화장실을 들른 후 터미널 안을 어슬렁거린 시간까지 있어 현재 시각은 6시 55분이었다. 

태섭이 두 손을 딱 부딪치며 고개를 숙였다. 

“아. 미안. 미안. 왜 6시 30분인데 5시라고 보냈지?”

“맞을까요?”

명헌이 주먹을 들었다. 

“미안합니다. 진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고 엉덩이나 까.”

“……아 한 번만 봐줘. 어떡해. 많이 기다렸어?”

태섭의 예상에 명헌은 분명 더 일찍 와서 기다렸을 테였다. 우수한 실력과 초고교급 농구선수인만큼 그에 맞게 시간개념도 정확한 남자였다. 적어도 명헌은 태섭을 이 터미널에서 두시간을 기다렸다는 소리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뿅.”

“데리러 올 줄 몰랐지. 내가 알아서 찾아가려고 했는데.”

명헌이 대답없이 태섭의 백팩을 낚아채갔다. 뒤에서 태섭이 안절부절 못 하며 말했다. 

“미안해…….”

 휴대폰을 그렇게 처음에는 붙잡고 있었는데 왜 나중에는 진동으로 한 채 가방에 처박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안하면.”

“응.”

“여기서 머리 박고 엎드려뻗쳐해.”

“헉.”

“농담이야. 그만 미안하다고 해. 어차피 카페에 앉아있었어.”

“아니, 진짜 할까?”

태섭이 망설였다. 명헌이 갑자기 “하.”하고 하관을 굳혔다. 그리고는 태섭의 목울대를 엄지로 강하게 문지르고 손을 뗐다. 그가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태섭은 그의 옆에 가 붙었다. 

“참 그 목은 깜찍한 소리를 다 하네. 뿅.”

명헌이 말했다. 그러다 태섭은 옆에 지나가는 사람하고 부딪칠 뻔 해 명헌의 셔츠자락을 붙잡았다. 시야가 내려가면서 명헌의 발이 보였다. 흰 실내운동화였다. 

“그런데 신발이 왜 그래?”

“아.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렸어, 뿅.”

“뭐?”

“탈주.”

“…….”

“가는 김에 운동화 좀 사자.”

“그거 신고 나 만나러 온 거야?”

태섭의 목소리가 축축해졌다. 상남자, 태섭은 의외로 감동을 잘 먹는 유형이었다-물론 좋아하는 여자한테 차일 때도 잘 울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태섭의 가슴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을 만큼 두근거리게 하고, 먹먹하게 만드는 남자는 오로지 이명헌뿐이었다. 송태섭의 일생에서. 게다가 태섭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준 사람도 명헌이 처음이었다. 태섭은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감동에 겨워 눈물을 주륵 흘려대더니 곧 꼴사나울만큼 폭포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흡. 끅. 백호가 봤으면 쌩쇼하냐고 하는 그런 눈물이었다. 

“뭐해, 뿅.”

“…….”

“나 참.”

“…….”

“기다리는 거 별 거 아니야.”

무심하게 말하는 명헌의 허리를 붙잡은 태섭은 끕, 끅, 거리며 울었다. 

“침대에서도 잘 울지만 밖에서도 잘 우네.”

“고마워…….”

하아. 명헌이 한숨을 미약하게 내쉬더니 태섭의 머리를 눌러 자기 가슴에 묻게 하고는 태섭의 어깨를 감싸고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태섭은 눈을 감은 채 명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앞이 안 보이는데도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분명 눈을 감고 걷는데도 무섭지 않고 안심이 되었다. 아주 안전한 곳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계속 걸었을 때였다. 아예 밖에 나온 듯 했다. 태섭은 훌쩍이고 있었다. 

“콧물 묻는다.”

그 말에 태섭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들었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세수를 한 것 같았다. 그는 티셔츠를 올려 얼굴을 닦았다. 아 개쪽팔려. 새 옷 가져온 거 안 입고 챙겨둬서 다행이다. 태섭은 안도했다. 

“그러면 터미널에서 신발이라도 사지……. 왜 그거 신고 있었어.”

“괜찮아. 이제 사러 가면 되니까. 여기 근처에 나이키 있어. 가자. 뿅.”

“발바닥 아픈 거 아냐?”

“맨날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단련됐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너도 산왕 합숙 훈련해봐. 그렇게 돼.”

그러며 명헌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역 바로 근처에 번화가가 있었다. 나이키에 거침없이 들어간 명헌이 남자 운동화 코너 앞에 섰다. 태섭은 너무 오랜만에 이런 매장에 들어와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가격을 보고 뒷머리만 쓸어내리며 체념할 따름이었다. 

“나한테 뭐가 어울릴 거 같냐, 뿅.”

그 말에 직원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왠지 창피해져서 “작게 말해.”라고 했으나 명헌은 상관하지 않았다.

“뿅.”

“……이거.”

“이거?”

“응. 그쪽처럼 단정해.”

태섭은 새로 나온 에어포스 모델을 가리켰다. 와. 하얀 게 참 삐까번쩍하네. 죽인다. 와. 태섭은 눈이 휘둥그레해졌지만 최대한 참으며 속으로만 난리를 치고 있었다. 전국 고교 농구대회에서 저 신발을 신은 선수들을 꽤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가격에, 명헌에게 괜히 비싼 걸 가리켰나 싶어 그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명헌이 말했다.

“이거 주세요.”

직원이 그 말에 사이즈를 물었다. 명헌이 자기 사이즈를 말하더니 눈만 움직여 태섭의 신발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다른 하나는 신어 볼게요. 그러며 그는 직원에게 태섭의 사이즈를 정확히 말했다. 

“어. 뭐야.”

“네 거 뿅.”

“이런 거 받지 못해. 괜찮아.”

“받아.”

“아. 그런 게 아니고.”

당황한 태섭이 횡설수설했다. 이런 비싼 걸 사준다고? 직원이 물건을 가져오려다가 태섭의 행동에 선뜻 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명헌이 작게 말했다. 이상하게 보잖아. 뿅. 그 말에 태섭은 입을 다물었다. 태섭은 직원이 재고 창고로 간 사이에 명헌에게 따졌다.

“못 받는다고. 저거 얼마나 비싼데.”

“…….”

“지금 못 들은 척 하기야?”

“응. 알면 조용히 해라 뿅. 눈치가 없네.”

“아 씨.”

“커플 신발.”

“어?”

“커플 신발이야.”

무표정으로 명헌이 답하며 그가 시선만 내려 태섭을 보았다. 그는 태섭을 너무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그만 태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토마토처럼 색이 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장 나 버린 태섭은 직원이 가져온 신발을 얌전히 신었고 그대로 가격표를 떼고 나왔다. 

태섭은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이게 꿈인가? 커플 신발? 그리고 확실히 착화감이 너무 푹신하고 좋았다. 우와. 짱이다. 태섭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당장이라도 숙소까지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상 나이키 신발이라니. 꿈도 못 꿨다. 

“이제 그거 신고 농구해.”

“안고 잘거야.”

“풉.”

“비웃어?”

“이응, 이응.”

“뭐?”

“뿅.”

“아, 응이라고 할 때마다 그러지 좀 말라고.”

“삐뇽.”

태섭은 더 뭐라 하기를 그만두고 딱 멈춰서서 두 발을 모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흐뭇해서 입가가 자꾸 양옆으로 당겨졌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새 운동화가 반짝이며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똑같은 신발을 신은 명헌의 큰 발이 있었다. 

“모아봐, 모아봐.”

신난 태섭이 말했다. 명헌이 그 말대로 발을 모아 태섭의 발 옆에 갖다놨다. 태섭이 밝게 외쳤다. 

“치-즈.”

태섭은 휴대폰으로 발 네개를 사진 찍었다. 나이키 에어포스 두 켤레가 번화가 바닥 위에 찍혔다. 그리고 맨 옆에는 언제 했는지 모를, 명헌의 브이자한 손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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