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 생일을 기념하여 중독온에서 배포하였던 원고입니다.
*전독시 완결까지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김독자가 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지금 발을 딛고 선 곳이 현실임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느 날 나타나고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무수한 상상에서도 감히 바란 적도 없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선이 짙고 수려한 옆모습을 흘긋거리며 손등이나 팔 안쪽의 연한 살을 몰래 꼬집어보고는 했다. 그것을 알아채고는 희미한 멍이 남은 손등을 감싸며 환상이 아니라고 거듭 말해주는 사내의 얼굴은 그가 활자를 읽으며 그려왔던 것처럼 무심했으나 차갑지 않아 그만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김독자는 더 이상 제게로 향하는 시선의 다정함과 저를 다독여주는 손의 온기가 실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이 시작되었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지하철 역 승강장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 ‘괴물’이 있었다. 두개의 뿔과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두 쌍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괴물은 김독자를 오시하며 그에게 날카로운 칼을 겨누었다. 꿈이었음에도 괴물이 품은 부정적인 감정은 신기할 만치 선명했다. 김독자는 칼끝과 함께 자신에게 향한 적개심이나 증오, 원망 같은 것들의 총체에 붙은 이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살의다. 이 괴물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괴, 괴물…….”
“그래, 괴물이야.”

폭력에 익숙한 소년에게도 자신에게 향하는 짙은 살의는 공포스러웠다. 그는 분명 언젠가, 삶에서 달아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단지 그가 발붙일 곳이 없었던 탓이었다.

생존 본능과 맞닿은 감정에 몸은 자연스레 반응했다. 괴물은 김독자가 몸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내어놓은 말을 긍정했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못이 박힌 듯 옴짝달싹 할 수가 없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공포에 질려 몸을 움츠리고 익숙한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것이었다.

“나,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그러는 동안에도 괴물은 천천히 김독자에게로 다가왔다. 예리하게 빛나는 칼과 그보다 선득한 살기가 느리게 가까워지며 그의 숨통을 죄었다. 여전히 자신을 향하는 눈에 넘실거리는 감정이 버거워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허억…!”

김독자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꿈에서 깨어났다. 또 같은 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가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꿈에서 느꼈던 감정을 증명하듯 식은땀에 젖은 등이 축축했다. 김독자는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한 빛에 의지하여 바라본 방은 얼마 전까지 친척집을 전전하며 머물렀던 비좁고 살풍경한 방들과 달리 그의 물건들로 채워진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최근 계속해서 반복하여 꾸는 꿈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 꿈은 한낱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일이었다.

“대체 왜….”

꿈에서 느낀 공포는 선연했지만 어디까지나 꿈속의 감정이자, 그저 과거의 일이었다. 김독자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의 인상에 깊이 남은 것은 자신을 죽이려 들던 괴물이 아니라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들어온, 꿈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유중혁이었다. 몇 번이고 그를 구원했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마주했을 때 그는 더 이상 괴물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꿈은 몇 번을 꾸어도 그저 괴물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 유중혁이 나타나기 전에 끝이 났다.



“피곤해 보이는군.”
굳은살 박인 손끝이 눈가를 살며시 매만졌다. 흉터가 곳곳에 새겨진 커다란 손은 남자가 거쳐 온 역경을 짐작케 했지만 김독자에게는 그저 다정하기만 했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맡긴 채 김독자는 유중혁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표정한 얼굴에 깃든 걱정을 발견했다. 활자에서는 읽어낼 수 없던 다정함이었다.

“으응, 잠을 설쳐서.”

별 일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저은 김독자가 어리광 부리듯 유중혁의 손에 뺨을 비볐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유중혁에게 처음으로 만든 비밀이었다. 여태 비밀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그저 감추거나 속여야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의 앞에 나타난 유중혁과 ‘멸살법’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김독자가 그들에게 그러하듯 이미 그가 거쳐 온 삶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이후의 시간에서 그가 유중혁에게 감추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루 중 긴 시간을 함께 보내니 딱히 비밀로 삼을 만한 것이 있지도 않았지만 꿈은 아무리 함께 산다고 해도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공유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감추어야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이유로 감춘 사소한 비밀이었다.

아니, ‘같은 꿈’은 아닌가? 오믈렛을 잘라 입에 넣으며 김독자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꿈에 나오는 것은 여전히 같은 장면이었다. 괴물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증오 어린 살의에 김독자의 몸은 어김없이 몸이 얼어붙었다. 뿔과 두 쌍의 날개를 지닌 거대한 형상은 또렷했으나 오직 얼굴만은 역광에 그림자가 드리운 듯 오직 살의 어린 두 눈을 제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날 분명 괴물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았으나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똑같은 꿈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며칠 전부터였다. 불분명하던 괴물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알아차린 것은 새하얀 코트자락이었다. 흰 코트라니, 늘 새카맣게 덧칠된 듯한 형상을 떠올리면 의외였다. 괴물이 걸음을 뗄 때마다 뇌편이 어지러이 그 주변을 휘감아대는 모습은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꿈속의 ‘김독자’는 공포에 얼어붙어 있었지만 익숙한 꿈에서 깨어난 그는 팔락거리던 코트자락을 떠올렸다. 그 날을 기점으로, 꿈속에서 괴물의 외형이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거대하다고 생각했던 괴물은 고작 성인 남성 정도의 키로 그가 기억하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몇 번의 꿈을 거친 후에는 거대하다고 느꼈던 몸집도 호리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고 흰 날개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그 형상 탓에 커다랗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가 기억했던 것이나 꿈속에서의 인지와는 차츰 드러나는 모습은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괴물보다….

“유중혁이 더 큰 것 같아.”

김독자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사내를 떠올렸다. 고개를 젖혀야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키와 칼날 같기도 하고 맹수 같기도 한 크고 단단한 몸,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강함만을 견주었을 때에는 유중혁이 더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감이 어렵지 않게 들 정도다. 무섭지 않은 것은 그저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제게는 단 한 번도 위협적으로 군 적이 없던 까닭이었다. 김독자를 향해 혐오감과 적대심을 품은 괴물과는 다르게 말이다. 뿔과 날개 따위의 형상도 그의 두려움을 자극했지만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부정적인 감정들이 선연히 깃든 눈이었다. 여전히 생김새가 불분명한 존재에게서 처음부터 형형하게 빛났던 눈만은 경멸 어린 친척들의 표정이나 조롱 담긴 또래의 언행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동시에 기시감이 느껴지는 바닥없는 증오를 김독자에게 향했다.

이유 없이 행해지는 부당함은 얼마 전까지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김독자는 괴물이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들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유중혁과 그를 만나게 하기 위한 개연성일 수도 있었고, 그저 아무 맥락 없이 제 삶에 나타났던 불운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반복해서 꿈을 꾸던 어느 순간부터 궁금해진 것이 있다면 오직 괴물의 모습이었다. 같은 장면의 반복이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씩 모습이 드러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잘 자라.”
“잘 자.”

어린 아이에게 하듯 침대 맡에서 밤 인사를 건넨 유중혁이 나선 방 안은 온통 고요했다.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을 잠시 응시한 김독자가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잠이 들면 딱히 즐거울 것 없는 꿈을 꿀 것이다. 아직 얼굴을 비롯한 일부가 흐릿했으나 이제 형상이 거의 다 드러난 괴물의 꿈을. 아직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괴물은 그가 처음 상상했던 것처럼 흉측하거나 기괴한 생김새를 지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존재는 날개와 뿔을 제하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지하철 플랫폼이었다. 무릎 위에 놓인 노트를 들여다보던 김독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 역시. 어제까지도 흐릿하던 괴물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괴물은 처음의 상상과는 무척 거리가 먼 외양이었다. 새까만 머리칼이나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창백한 얼굴에서는 삶이 고단했던 이 특유의 예민함과 희미한 피로가 묻어나왔다. 잘게 떨리는 손은 금방이라도 들고 있는 검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그 모든 모습에서 김독자는 앞선 꿈들보다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내 떨림이 멎은 손으로 단단히 검을 틀어쥔 괴물은, 남자는 예정되어 있던 연극을 수행하듯 김독자에게 다가왔다. 외면하고 싶었으나 고개도 눈도 당시의 일을 재하듯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김독자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과 만났던 날 괴물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 기시감이 그 날보다 더욱 오래된 시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이 괴물은….

“나…?”

덜덜 떨리는 입술에서 처음으로 그날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 떨림조차 이전의 꿈과는 다른 이유에서 온 것이었다. 김독자의 이를 인지하지 못했으나 입 밖에 내어놓은 순간 그의 감각은 그가 차마 단정 짓지 못한 것을 확고히 했다. 조금 더 성숙하고, 더 예민하고 더욱 지쳐 보였지만 괴물의 얼굴은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래, 나는 너야.”

괴물 역시 앞선 꿈들과 다른 대답을 했다. 나긋나긋하지만 온기가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는 마치 선고를 내리는 듯 했다. 괴물과 김독자, 아니 ‘김독자’와 김독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와 같은 감정을 담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증오와 혐오감이 금세라도 넘칠 듯 눈 안에서 일렁였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고 있었다. 왜? 작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무수한 감정과, 독백 같기도 하고 문장 같기도 한 것이 그의 머리에 흘러들었다.

“아,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흘러든 감정들은 낯설었으나, 김독자에게도 익숙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김독자’가 겪어온 불행과 ‘멸살법’을 읽으며 받은 위안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유중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김독자 역시도 그리 살아왔다. 익숙한 감정의 편린들이 지나가자 이내 형언하기 어려운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가 막을 길 없이 김독자를 휩쓸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들은 구체적이고 제대로 된 정보값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인식하는 게 아니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짙은 죄책감, 자조,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어떤 숭고한 이야기로 지탱되었던 한 사람의 삶과…, 그 보잘 것 없는 삶을 위한 누군가의 고난과 불행.

「그 괴물이 아이의 미래였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듯 문장의 형태를 띤 말이 김독자의 뇌리에 선명히 박혔다. 괴물은, ‘김독자’는 소년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김독자는 여느 꿈에서 그러했듯 그가 다가오는 것을 붙박인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발을 묶은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칼이 제게로 날아드는 순간, 김독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운 채 숨을 몰아쉬던 그는 제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흑…! 억누른 흐느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나, 였어….”

김독자는 괴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의 형태로 느낀 것이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유중혁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 자신의 삶이며 그것이 ‘김독자’가 저를 죽이려 든 이유였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어째서 나를 데리고 왔을까. 왜 나에게 잘 해주는 거지? 예전에 묻어두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혹시 유중혁은 김독자가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구원했던 이야기와, 따뜻한 손을 떠올린 김독자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에 손을 뻗으면 눈을 감고 얼굴을 내어주던 것,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고, 이따금 모르는 척 허리를 끌어안으면 마주 안아 잘 자라며 인사해주는 그 모든 다정이 이제는 죄스러웠다.



“유중혁, 혹시….”
“무슨 일이지?”
“아니야, 아무것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다물렸다. 김독자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머그컵 속 조금도 줄지 않은 코코아에서는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건네어 받을 때부터 마시기 좋은 정도로 식어있었으니 아마 이제는 차가워졌을 것이다. 채 꺼내지 못한 말이 목에 걸려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그가 하려던 말은 그저 혹시 그 날 마주했던 괴물의 얼굴을 기억하느냐는 비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유중혁이 괴물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혹시라도 그 물음에서 수상함을 찾아낼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독자.”
“…….”
“내키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새로 타줄 테니까.”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에 김독자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맹수보다 감각이 예리하고 노련한 사내가 김독자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나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다. 김독자는 거짓말이 서툴었고 지금은 아마 표정도 제대로 감추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것을 추궁하거나, 김독자가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독자는 만약 자신이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유중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개의 충동이 그의 내부에서 부딪혔다. 만약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유혹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열망이었다.

“그때 그 괴물, 나, 나였어. 나, 는, 너를 불행하게 만들 거야. 어쩌면 이미 나 때문에 불행해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기만을 깨달은 유중혁이 나를 경멸하는 상상을 하며 살아가고, 감히 그의 불행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까. 김독자는 자신이 결코 그리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수한 역경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내의 숭고한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유중혁이 마침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의 고난이 반드시 행복이라는 형태로 보상을 받았으면 했다. 토해내듯 담아놓은 비밀을 토해낸 이후 김독자는 두서없이 사과와 자책을 늘어놓았다. 유중혁이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그가 떠나는 것이 더욱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로 괴물 같았다.

머그컵을 든 손이 잘게 떨렸다. 고개를 숙인 채 떨림을 멈추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손이 그의 뺨을 감싸 들어올렸다. 김독자의 시야에 들어온 유중혁의 얼굴에는 경악이나 원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중혁의 눈은 그저 그의 손처럼 다정한 온기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김독자일 뿐이다. 나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흐윽.”
“언젠가는 불행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 광활한 세계의 밖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네가 그러했듯 나도 너의 삶을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온통 눈물로 시야가 흐려진 탓에 김독자는 유중혁이 어떤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가 ‘멸살법’에서는 단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괴물에게서 전달받은 감정과 비슷하게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전하고 싶었던 감정은 무척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눈물로 젖은 얼굴로 김독자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진다 싶더니, 겨우 울음을 그치고서는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중혁의 품에 파고들어 눈물을 쏟아내던 김독자는 어느덧 자신이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밤에 잠든 것이 아니더라도 꿈은 반복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칼을 든 괴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바라보아도 자신과 같은 얼굴에 김독자는 복잡한 감정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표정이 없는 밀랍 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괴물도, 괴물이 제게 보여주었던 감정에 깃든 기억의 편린도 두렵지 않았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제 곁에 있겠다고 했고, 자신은 결코 유중혁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기억에 의거해 떠오르는 일말의 공포를 누르며 김독자는 자신을 향하는 살의 어린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 안에 일렁이는 감정에 더는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공포로 떨리던 과거와 달리 흔들림 없는 눈이 그 분명한 살의를 피하지 않고 받아칠 듯 마주했다. 괴물의 눈에 비치는 소년의 모습은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 깨달음은 섬전처럼 찾아왔다. 괴물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김독자가 아니다. 괴물의 살의가 향한 것은 김독자가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괴물이, ‘김독자’가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것은 작고 무력한 모습의 소년이 아니라 ‘김독자’ 자신이었다. 더 큰 충격에 밀려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이 명료해지며 김독자는 괴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다’를 되뇌며 겨우 하루를 견뎌내던 때엔 그 스스로도 수없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서 김독자는 우습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괴물도 ‘김독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야.”

나는 괴물이 아니야.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당연한 명제를 읊듯이 말했다. ‘김독자’와 자신은 분명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아니었다. 김독자가 겪은 일이 ‘김독자’의 것이 아니듯 ‘김독자’의 감정이나 죄책감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너는 김독자일 뿐이다. 분명하게 그리 말해준 사람도 있었으니까. 말을 마친 김독자는 상대의 화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김독자’의 입술이 아주 미약한 호선을 그렸다. 미소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희미한 웃음이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야.”

자신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김독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마에 돋았던 뿔은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었고, 더 이상 ‘김독자’의 등 뒤에는 날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그저 흰색의 코트를 걸친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뿐이었다. 마치 그것들이 짐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김독자’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독자는 이 꿈이 더는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완전한 작별이었다.



[억지를 들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치 은혜라도 베푼 듯 말하는군. 네놈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누가 먼저 원했던 건지는 분명하지.]
“네놈이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나도 더는 이곳에 올 생각 따윈 없다. 네놈과 얼굴을 마주볼 생각은 더더욱 없고.”

얇은 장막 너머에서 똑같은 두 개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날을 세웠다. 목소리만큼이나 똑같은 외양을 가진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개연성 스파크가 커다랗고 단단한 몸에서 이따금씩 튀어 올랐다. 꿈을 통로로 삼았다 해도 두 세계를 잇는 것은 제법 막대한 개연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눈꺼풀 위부터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지닌 유중혁이 손을 저어번쩍이는 스파크를 뿌리쳤다.

[그 말, 꼭 지키기를 바라지.]

한때 ‘은밀한 모략가’로도 불리었던 사내가 더는 아무런 볼일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마 곧 잠에서 깨어날 자신의 김독자에게 가는 것일 터였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 연결을 유지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다가왔다. 팔을 뻗어 허리를 감싸 당기자 김독자가 자연스레 탄탄한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힘을 푼 몸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렸으나 유중혁의 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야기는 끝났나.”
“응. 조금 미안한 짓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심술을 부려놓고는 새삼스러운 소릴 하는군.”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스타스트림 시스템 밖의 세계로 떠난 ‘가장 오래된 꿈’을 만나겠다고 한 것은 김독자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유중혁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구겼으나 김독자를 말리는 대신 함께 오기를 택했다.

스타스트림 시스템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불안정했고, 심지어 그들이 머무르는 세게는 아예 시스템을 벗어난 곳에 있었기에 지불해야할 개연성은 상당했다. 게다가 세계가 제대로 이어지기까지도 제법 시간이 걸려, 꿈의 내용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 며칠이나 같은 장면을 반복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사과를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

김독자는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후회하지 않는 일에 하는 사과에 의미가 있을 리 없고, 그것은 김독자가 고를 수 있던 최선의 방법이었다.

“유중혁, 너는 ‘은밀한 모략가’가 너라고 생각해?”
“헛소리 하지 마라. …놈도 ‘유중혁’인 건 맞지만 결코 ‘나’는 아니다.”
“나도 그래. 그래서, 매듭을 지으러 온 거야.”

설마하니 먼저 그 말을 해버릴 줄은 몰랐지만. ‘은밀한 모략가’와 ‘3회차 유중혁’의 시작은 같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별개의 존재였다. 유중혁이 김독자를 만나 만들어낸 이야기는 ‘은밀한 모략가’가 걸은 길과 달랐고 둘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설화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김독자와 ‘가장 오래된 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앞으로는 더욱 더 별개의 존재가 될 테니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증오가 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기억을 떠올려 내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기 전에 그것을 확인시키고 싶었다. 미노소프트의 계약직 직원이었고 멸망한 세계의 동호대교 위에서 유중혁을 만난 김독자와, ‘유중혁’과 함께 세계 밖으로 걸어 나간 김독자는 더는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특별하며 유일한 유중혁이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유중혁 뿐이듯이, 그도 그러하겠지.

“키스할까.”

김독자가 잊고 있던 것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유중혁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어떠한 되물음도 없이, 유중혁은 더욱 오래 전부터 유일했던 자신의 김독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생각해둔지 좀 되었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김독자의 생일에 맞추어 완성할 수 있어 다행이고 또 기쁘네요. 비록 제대로 표현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하는 마음만은 유중혁이 김독자를 생각하는 것 만큼은 아니어도 진심입니다.

원래 생각해두었던 제목은 '잊혀질 꿈' 이었습니다. 여러사정으로 지금의 제목이 되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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