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유진은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언가는 시간일 수도, 사람일 수도, 혹은 그 외의 무언가 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정해진 시간이 오면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장소로 이동할 것이고, 배워온 것처럼 웃고, 정제된 언어를 쓰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마치 잘 만들어진 태엽 인형처럼 보이겠지. 습관과도 같은 일은 확신할 필요조차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될테니 받아들이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유진은 이런 일에 인내심이 깊어, 화는 커녕 짜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만 오늘처럼 해가 따뜻하다거나, 바람이 적당하다거나, 말로 다 할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주 작은 태엽부터 차근차근, 다시는 이전과 같지 못하게.


1.

그는 종종 악몽을 꾸곤 했다. 선물받은 인형 사이에 앉아있는 진을 누구도 찾아내지 못하는 꿈이었다. 악몽은 인형들 사이에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인형을 진이라 부르며 데려가는 것으로 끝나고는 했는데, 깨어나면 한참 울적한 기분에 잠기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단순하기 그지 없는 꿈이 이토록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 한참 고민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다.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공포. 이전에도 인형과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으나 인정하고 난 이후를 감당하기 싫어 외면했던 것. 진은 그림 같은 저택에 사는 인형이었다. 타인의 의지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인형. 그것을 인정하자 세상은 숨이 막힐 만큼 좁아졌다.


2.

말했다시피 진은 인내하는 일에는 익숙했다. 그것이 아무리 싫은 일이더라도 웃으며 해낼 정도는 된다 자부할 만큼. 그렇지만 한 번, 세상의 바깥을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두 번이라고 보고 싶지 않을까. 아니, 과연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원하는 대로 인형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저 걷게 해준다면 종종 바깥을 내다보며 그것을 부러워 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은 정말, 완벽하게 해낼 자신도 있었다. 선을 보라고 하기 전까지는.


3.

어쩜 이리도 멍청한 사람들만 제게 들이밀었는지. 진은 세번째 남자를 눈 앞에 둔 채 수줍은 양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얼굴에는 과시욕을 대변한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지도 모르고 자기 자랑만 들어놓는 남자는 형편 없다는 말도 아까웠다. 돈이라면 이쪽도 얼마든지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돈 자랑 하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매너는 오는 길에 버리고 왔나? 이 자리에 유진 대신 곰인형을 앉혀둬도 똑같은 태도일 것이다. 애초에 두 번 만날 생각은 없었으나 이토록 고역인 자리라면 한 번도 사양이다. 진은 나이프를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고 어머, 하고 입을 가렸다.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어쩌죠, 이만 가야 할 것 같은데… 진은 한껏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상식이라도 있으면 이런 일이을 붙잡지는 않겠지. 휴대폰을 붙잡고 급히 답장을 넣는다. 실은 운전사에게 넣는 문자지만, 무슨 상관이람.


"아쉬운대로 다음에 또 연락 드릴게요. 하하!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어서 가보세요."


사람 좋은 양 웃는 얼굴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자신에게 취한 것일테지. 부담스러운 제스처는 정말 얼른 자리를 뜨고 싶게끔 했다. 진은 급히 일어서며 단 한 줌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좋았어요. 실례할게요."


상대의 말이 끝나자 그는 미소를 짓고 자리를 떠났다. 꿉꿉한 날씨만큼 최악인 만남이었다.


4.

그 뒤로 진은 엇비슷한 만남을 멈추기 위한 방법을 골몰했다. 손실은 최소, 이득은 최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불이 나면 맞불을 놓아서 막는다. 태울 것이 없도록 미리 태워버리면 불은 자연스레 꺼지게 되어있다. 진은 제 나이 또래의 미혼 남성, 그리고 집안이 비슷한 수준의 집안일 것을 기준으로 직접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아,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붙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보기 그럴듯 할 것.'


그렇게 찾아낸게 최유권이었다. 어렵사리 맞춘 조건이었고, 적어도 당시에는 이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유권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냈기 때문이겠지. 유권은 꽤 그럴듯 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머리가 꽤 좋았으니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여러 방법을 쓰는 것도 그랬고…


'어쩐지 마음이 쓰여서.'


구체적으로 이유를 대자면 제대로 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쓰일만한 구석이 어디 있지? 진은 유권을 꼼꼼히 뜯어보고 살펴보다가, 제가 그에게 이입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공통적인 정서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게 한다. 진은 그를 동정했다. 그를 동정하며 자신을 동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주지 않는 것이 되도록 나을테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조심해서 나쁜 일은 없었다.


5.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애써 슬퍼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애도할 것은 너무나 많았다. 순응해야만 했던 시간과 어쩔 수 없이 그만 두어야 했던 것. 또는 그만 둘 수 없던 것. 애도의 시간은 언젠가 끝나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6.

종종 서류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궁금해 하게 되었다. 높다란 성벽 뒤의 유권을. 약혼까지 해가며 피하고자 하는 것의 연유를.


7.

그래도 진은, 그와 있을 때면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었기 때문일까. 유권 앞에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무대에 올라가더라도 함께 올라가는 동등한 위치라 더더욱 그랬는지 몰랐다. 최악의 수로 시작했으나 앞으로 괜찮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꿈결 같았다. 오래 취해서는 아니 될 해로운 것임을 알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진이 현실에 안주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머릿속에서 고요한 사이렌이 울렸다. 붉은 빛이 번쩍일 때마다 눈이 따끔거렸다. 눈이나 혹은 그 엇비슷한, 마음과 바깥을 잇는 것은 모두 쓰라렸다. 아마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되 신뢰하지 못하는 채로 관계를 끝내게 될 것이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평행선처럼 영영 마주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언젠가 끝날 관계에 마음을 여는게 아니였다. 진은 능숙한 연기자처럼 무대에 올랐으나 완벽한 무대에 잠시 현실을 잊었던 것을 후회했다.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복잡한 감정에, 진은 익숙한 시구를 읊조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러나 영원히 슬픈 자는 행복할 수 없다. 추상적인 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8.

인형의 집은 무너질 것이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 분명 쇠하리라. 그때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영권이 넘어오면 그때는.


그때는…


진은 기다렸다는 듯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이 집의 온기가 떠나는 것을. 웃을 때면 드러나는 송곳니를 더는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말소리가 사라진 이후를. 누구의 영향 아래에도 있지 않아 진짜 자신이 되는 것을. 홀로 된 자유를.


더는 상상하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윤동주, 팔복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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