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Molly Kate Kestner - Prom Queen

슈갈님 :)

06




   람보르기니에 앉은 여주는 옆자리에 올라타는 피아오를 쳐다봤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은 피아오가 고개를 돌려 여주를 노려보았다. 여주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자꾸 나를 괴롭히는 게 디 때문이에요?"

"..."

"디를 이기고 싶어서?"



   여주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피아오의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여주는 피아오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호텔 방에서 본 모습으로 추측은 거의 확신으로 변해있었다. 잘 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시위라도 하는 거냐는 디의 말에 피아오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피아오가 쥔 칼날이 목에 닿아있었기에 그 느낌이 아주 잘 전달되었다.

   피아오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비서가 황급히 뒤를 돌아 불을 붙여주었다. 피아오가 여주를 쳐다보며 연기를 뿜었다. 여주는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피아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피아오가 고갯짓을 했다.




"거기 앞에. 꺼내 봐."

"..."



   여주가 앞에 놓인 갈색 서류 봉투를 가리키며 피아오를 쳐다봤다. 피아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봉투에서 핸드폰과 호텔 카드 키, 그리고 현금이 쏟아졌다. 여주가 차 시트에 흩어진 홍콩달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걸 나한테 왜 주는 거예요? 아까까지만 해도 죽일 것처럼 그러더니…."

"방금 디한테 다녀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

"..."

"조커를 죽이는 머저리는 없거든."

"제가 조커 패라는 말이에요?"



   궁금하지? 왜 네가 조커인 건지. 피아오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주가 입을 꾹 다문 채 피아오를 쳐다봤다. 그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옆에서 말만 잘 들으면 알려줄게."

"그것 때문에 옆에 붙어있기는 싫은데요. 모르면 그만이지."



   네 빚을 다 갚아준다면 말이 달라질 텐데. 피아오의 말에 여주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처음 들은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와닿는 건 그때와는 달랐다. 확실히 광기가 서려 있기는 했지만, 그때보다는 여주를 감정적으로 다루는 느낌이었다.



"네가 빌린 것도 아닌 돈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 지겹잖아."

"..."

"때가 되면 도망도 가게 해줄게."



   …도망. 여주는 태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냥 반갑지 않은 구원인 건 태형이나 피아오나 마찬가지였지만, 여주는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태형이 주겠다는 기약 없는 미래를 기다리다가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태형의 양아치 짓이 디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구원은 꼼짝없이 시궁창에 처박힐게 분명했다. 여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건지만 말해줘요."

"오늘로써 확신이 들었거든. 디의 전략이 블러프라는 게."

*블러프(Bluff): 포커에서 자신의 패가 좋지 않으면서도 패가 좋은 것처럼 액션을 취하는 전략.



   블러프에 속을 만큼 어리숙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야. 피아오가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며 중얼거렸다.








   태형이 거칠게 쪽방문을 열었다. 물건들이 형편없이 어질러져 있었고 여주는 없었다. 불어 터지지 않은 나머지 한쪽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 저를 뒤따라 쪽방으로 들어온 파에톤 사장에게 태형이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태형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들을 내던졌다. 사장은 태형이 쪽방을 전부 뒤집어엎을 때까지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태형이 사장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태형을 죽기 직전까지 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사장은 그저 얌전히 멱살을 잡히기만 했다.



"피아오의 결정을 내가 번복할 수 있는 게,"

"그 개새끼 지금 어디 있어요."



   태형이 바이크 열쇠를 챙기며 물었다. 피아오의 거처는 나도 몰라. 사장의 말에 태형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쪽방을 나섰다. 파에톤 직원 하나가 태형을 쫓아 나와 말렸다. 태형의 팔 한쪽은 부러져 있었고, 다리도 성치 않아서였다.



"这样你会受伤. 너 이러면 다쳐."




"꺼져. 밟히기 싫으면."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위협적인 바이크 소리에 결국 직원이 뒤로 물러섰다. 태형은 그가 비켜 서자마자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태형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우지만의 다 쓰러져가는 집에 도착한 태형이 바이크를 내팽개치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평이 겨우 될만한 공간 그 어디에도 여주의 짐은 없었다. 태형은 차오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악을 질러댔다. 집 밖으로 나온 태형은 쓰러진 바이크를 세워 생각을 정리했다. 필로테스가 떠오른 건 금방이었다. 여주가 어디 있을지 감이 오지 않으니 일단 피아오를 만나야 했다. 씨발, 어떻게 해서든 라이런으로 가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태형이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라이런(来人): 심부름꾼



"谁来了? 누가 왔다고?"



   피아오의 물음에 직원이 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부서질 듯 굉음을 내며 열렸다. 태형을 보니 피아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안나 어딨어. 이 개새끼야."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 치고는 예의가 너무…. 그럼 내가 알려줄 마음이 있다가도 싹 사라지잖아."



   예의? 지금 예의라고 했어? 태형이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올라가 피아오의 멱살을 잡았다. 가드가 태형을 떼어내려 했지만 말린 건 피아오였다. 피아오는 태형에게 멱살이 잡혀있는 와중에도 여유 있는 표정으로 술잔을 흔들었다.



"그래. 예의 차려서 다시 물어볼게. 안나 어딨어, 이 씨발새끼야."

"오해가 있는 모양이야. 왜 나한테 화를 내는지 진짜 모르겠는걸."

"몰라? 모르면 알게 해줄게."



   피아오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가드가 움찔거리며 태형을 잡아끌려고 했지만 또 한 번 피아오의 제지가 있었다. 태형은 그게 더 열받는 표정이었다. 여주를 빼돌리니 맞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태형의 눈이 번뜩였다.



"틀린 건 정정해야지…. 내가 잡아간 게 아니라 스스로 온 건데."

"...뭐라고?"



   한 번 더 피아오의 얼굴을 날리려던 태형의 주먹에 힘이 풀렸다. 피아오가 피식 웃으며 흐트러진 셔츠를 잡아당겼다.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묻은 피를 닦기도 했다. 태형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피아오가 말을 이어갔다.



"딱 이랬는데…. 내가 넘어갈 수밖에 없는 제안을 했을 때, 하여주 표정이."

"..."

"우린 거래를 했어. 거래를 승낙한 건 그 애고."



   피아오의 말에 태형의 팔이 힘없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피아오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바짝 돈을 빼돌려 함께 떠나고 싶었다. 태형은 여주도 분명 그걸 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여주가 제 의지와 다르게 피아오에게 잡혀갔을 거라 생각했다.



"넌 하여주를 구원하지 못한 거야."



   把他抻出来. 끌어내. 피아오의 말 한마디에 가드 두 명이 태형을 끌어냈다. 태형은 반항 한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필로테스 밖으로 끌려나갔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피아오의 말이 맴돌았다.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쩐지 사실인 것만 같았다.

   침대 위에서 여주에게 사랑을 퍼부을 때 느껴지던 뭔지 모를 공허함이 태형을 에워쌌다.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온전히 여주를 안지 못하던 불안감이 그를 잠식했다. 여주에게서 느껴지던 공허함과 불안함은 그저 처한 상황을 향한 그녀의 반감일 거라고 믿었다.

   도로 위를 달리던 바이크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어서 바닥에 긁히는 것쯤이야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을 듯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저를 향한 여주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동질감과 약간의 애정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Charlotte Lawrence - Joke's on you






   우락부락한 덩치들 사이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알엠이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에 손짓했다. 돈을 세던 기계가 멈추니 요란하던 소리가 뚝 끊겼다. 정적 속에 문이 열렸다. 피아오의 등장에 알엠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죠, 피아오."



   피아오는 대꾸 없이 알엠 앞에 돈 가방을 던졌다. 알엠은 옆에 서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홍콩달러가 다발로 들어있었다. 이게 뭐냐는 물음에 피아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안나 빚. 청산하러 왔어. 이자까지 쳐서."

"일단 앉아요, 피아오. 누추한 곳까지 왔으니 술이라도 대접해드릴게요."



   눈을 찡긋거리며 여유롭게 답하는 알엠의 표정에 피아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보드카? 와인? 알엠이 양손에 술을 든 채 물었다.



"답 없으시면 그냥 제가 먹고 싶은 거 깝니다, 피아오."

"말 길어지는 꼬라지 보아하니 애초에 글러 먹은 것 같네."



   피아오의 손짓에 비서가 덩그러니 놓인 가방을 안아 들었다. 빈 잔에 보드카를 따르던 알엠이 어어, 하며 떠나려는 피아오의 발걸음을 묶었다.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겁니다. 알엠의 말에 피아오가 성가시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더 이상 제게는 주도권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르마의 이쪽 관련 일은 전부 네가,"

"안나의 빚은 보스가 직접 처리합니다. 저도 조금 전에 통보받은 일이라서."

"아.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비싼 술 못 먹고 갈 뻔했잖아."



   피아오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알엠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피아오의 얼굴에 흥미가 가득 묻었다. 알엠은 술을 들이켜며 피아오의 얼굴을 살폈다. 디가 안나의 이자를 모조리 탕감하고 직접 일을 처리한다고 할 때 들었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디는 언제나 피아오보다 한 수 위였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왜 안나의 빚을 직접 갚으러 오셨는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해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알엠은 실망감조차 들지 않았다. 피아오는 그 독한 보드카를 한입에 들이켜고는 알엠에게 빈 잔을 건네며 말했다.



"디한테 전해."

"..."

"더 이상의 블러프는 안 통한다고."

"보스랑 포커도 치세요?"



   피아오는 대꾸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알엠은 옆에 서 있던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는 황급히 알엠에게 귀를 가까이 갖다 댔다. 당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전해.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방금 피아오가 한 말도 같이."



   알엠이 남아있는 술을 한입에 털어내며 덧붙였다.








   인간은 무서운 동물이었다. 여주는 금방 호텔 생활에 익숙해졌다. 부모가 제정신이 박혀있을 때 누렸던 부와 편리함을 몇 년 만에 마주하니 몸이 늘어졌다. 부모가 죽고 나서 산더미 같은 빚을 만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아늑함이었다. 이 아늑함을 준 피아오에게 털끝만 한 고마움이 생길 정도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에 늘어져 있던 여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털끝만 한 고마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호텔 방을 준 건 고마운데, 피아오는 시도 때도 없이 여주의 방에 들이닥쳤다. 네가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것도 순전히 나 때문이야,를 각인시키려는 행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처리 끝났어."



   그게 아니면 그냥 예절이라고는 못 배워먹은 놈이거나. 여주가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제 앞에 쌓여있던 빚을 탕감해 준 건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었다. 저를 조커니 뭐니, 포커 패에 비유하며 손안에 굴리려는 것만 빼면.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오늘따라 하나만 묻겠다는 새끼들이 많네."

"총 얼마였어요? 이자까지 다 합쳐서."



   피아오가 잠시 여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주의 빚을 탕감한 건 피아오가 아니라 디였기에 정확한 금액을 몰랐다. 그러나 그 사실을 여주에게 말할 생각 따위 없었다. 겨우 손에 넣은 조커 패였다. 피아오는 대강 알엠의 계산법을 고려해 말을 뱉었다.



"사천만."

"미친."

"원금이 얼마랬지?"

"오백만."

"미친놈들 맞네."



   피아오는 아무렇게나 말을 뱉으면서 머리로는 디의 속셈을 파악하려 애썼다. 여주의 빚을 디 쪽에서 처리한다는 건 피아오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피아오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만약 추측이 틀렸다면 그건 블러프가 아니라 피아오를 나락으로 밀어 넣을 디의 슬로우 플레이일 것이다.

*슬로우 플레이(Slow Play): 강한 패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한 것처럼 위장하여 플레이하는 행위.



"내일 뭐 해?"

"여기에 박혀있겠죠."

"그럼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요."

"포커 치러."



   그 말인즉슨 여주를 어딘가에 이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여주가 인상을 찡그리니 피아오가 제 볼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뷔가 찾아왔어. 피아오의 말에 여주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찾아와서, 뭐라고 했어요? 여주가 물었다.



"내가 널 잡아갔다고 생각하더라."

"..."

"아니잖아. 내가 너 잡아 온 거."

"…아니죠."



   여주가 손가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처음 태형을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구원자였다. 반가우면서도 경멸스럽고, 고마우면서도 미웠던. 지금 피아오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딱 맞았다. 아. 그래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순수했던가.

   태형에게 향하던 동질감과 동정심, 그에 뒤섞여있던 약간의 사랑은 빛을 바랜지 오래였다. 만약 네가 조금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난 네게 묶여있었을지도 몰라. 여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동아줄이라 생각했던 그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얇은 낚싯줄과 다름없었으며, 살기 위해 더 굵고 두꺼운 것을 찾는 건 당연했다. 여주는 미안함이 듦과 동시에 저를 달래기 바빴다. 태형을 향해 남아있던 감정의 형태는 이상하게 그 모습을 바꿔갔다.





"..."



   피아오가 생각에 잠긴 여주의 표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늘 하루 여주의 일을 처리한다고 바빴는데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그 기분의 중심에는 하여주가 있었다. 매력적인 조커였다.





Stephane Pompougnac - Orsten -Fleur blanche






   여주는 불편하게 몸을 감싸는 치파오를 끌어당겼다. 가자고 한 곳이 이런 곳일 거라고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구렁텅이에서 이제야 막 벗어난 여주는 아직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따라가기 벅차했다. 피아오를 따르는 직원들이 챙겨준 옷을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여주가 어색하게 몸을 까딱였다.

   람보르기니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지아린(驾临)이라는 화려한 궁이었다. 청나라 누르하치 황제와 태종이 건립한 선양 고궁(瀋陽故宮)을 본떠 만든 곳으로, 카르마의 소유였다. 여주는 홍콩에 디의 소유가 아닌 곳이 몇이나 될지 잠시 고민했지만, 곧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접었다.

   피아오와 함께 등장한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여주에게 쏠린 시선은 엄청났다. 여주는 처음부터 조커패를 내보이는 피아오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인이 조커인 이유도 모르는 판국에 구태여 말을 보탤 생각은 없었다.



"또 보네요, 우리."



   여주는 제게 반갑게 말을 건네는 남자를 기억하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에톤에서 만난 남자였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그런 여주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제 명함을 건넸다.

   에르메스, 진. 에르메스라면 여주도 신문을 통해 많이 접해본 곳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디와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건가.



"파티는 즐길만해요?"

"..."

"피아오가 워낙 인기가 좋아서, 여기저기 다니죠?"



   숙녀를 혼자 두면 쓰나. 진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주가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런 남자가 제게 아는 체를 해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주는 경계 태세를 갖추며 진을 올려다봤다. 진은 그런 여주의 표정이 기분 나쁘지도 않은 건지 실실 웃기만 했다. 화려한 파티에 홀로 덩그러니 놓이니 자연스레 피아오를 찾게 됐다. 이 모호한 관계에 진저리가 나면서도 여주는 눈으로 지아린 내부를 훑었다. 조커라면서, 왜 홀로 내버려 둔 거야.



"어이."



   진의 부름에 디가 고개를 여주 쪽으로 돌렸다. 눈으로 피아오를 찾던 여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디의 시선이 진득하게 여주의 얼굴에 붙었다. 금방 돌아갈 줄 알았던 디의 시선은 진의 옆에 올 때까지 계속 여주에게 붙어있었다. 여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가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 계속해서 시선을 맞췄다.



"그때 파에톤에서 만났던 한국 여자, 기억해?"

"어. 며칠 전에 피아오랑 있는 것도 봤어."

"와, 정말?"



   디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진은 비서의 부름에 고개를 뒤로 주욱 뺐다. 지금 가야 해? 나 얘기 중인데. 곤란하다는 듯한 진의 말에도 비서는 고집을 부렸다. 피아오 앞에서 당장이라도 죽는시늉을 할 것 같던 비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실례. 결국 진이 자리를 떴다. 디와 여주, 둘만 남았다.

   대체 어딨는 거야, 피아오는. 여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방 자리를 뜰줄 알았던 디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피아오가 의도한 조커패가 테이블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거나 다름없었다. 와서 나를 좀 뒤집어줘. 여주가 속으로 간절히 생각했다.



"피아오랑 같이 왔다고."

"..."



   디가 여주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여주는 왼손에 쥐고 있던 진의 명함을 대충 손으로 구기고는 그 위로 디의 것을 받았다. 올블랙의 빳빳한 명함 가장자리에는 금박으로 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D, 알파벳이 박혀있었다. 명함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에 소름이 돋았다.



"하준우, 윤정아."

"..."

"네 친부모지?"



   놀란 여주가 명함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 이름이 디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였다. 디는 뿐만 아니라 여주의 양부모 이름까지 줄줄이 뱉었다. 명함을 쥔 여주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어떻게 알았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피아오가 보면 혀를 찰 광경이었다. 제 앞에서 돈을 찢던 패기는 어디 가고 이렇게 벌벌 떠냐고 핀잔을 줄게 뻔했다.



"네 빚, 이제 내 쪽으로 청산해."

"...네?"

"알엠과는 이미 얘기 끝났어."

"무슨,"



   여주가 멍한 얼굴로 디를 쳐다봤다. 빚은 피아오가 전부 갚아주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디는 피아오와 얘기를 나눈 적 없는 한국의 빚까지 언급했다. 상황 판단이 잘 서지 않은 여주가 머리를 살짝 털어댔다. 어지러웠다.



"피아오가 이미 갚았다고 했는데…."



   보스. 어디선가 디의 비서 호석이 나타나 그를 불렀다. 디는 귓속말로 호석이 전해주는 소식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여주는 제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 답답했지만 말을 더 꺼내지는 못하고,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비서가 사라지자 디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여주를 쳐다봤다.





"살고 싶으면 모른척해."



   아니, 뭘…. 여주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떼기도 전에 디가 자리를 벗어났다. 여주는 멀어지는 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상황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피아오가 갚았다던 빚을 어떻게 디가 처리했는지, 왜 디가 그걸 갚았는지, 그리고 디의 마지막 말까지. 의문투성이였다.



"가자."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어요?"



   여주는 어디선가 나타나 제 팔을 당기는 피아오에게 말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굴 만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 당신이 알기라도 한다면 이렇게 태연하지는 못할, 여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파에톤 사장이 죽었어."



   곧 여기에도 경찰이 들이닥칠 거라는 피아오의 말 때문이었다.





* 하단은 소장용 결제창입니다 *

구매하시면 글이 삭제되어도 열람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1 공백 제외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