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리진, 바비안님과 함께했던 교우 트리플북 <Coloring>의 원고입니다.





 

 

 유사연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녀와 암수가 짝을 지어 노니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라 젊은 남녀가 단 둘이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있으면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당연히 애인인가보다 라고 생각조차도 안 하고 넘길 거다. 젊은 남자 둘이서 그러고 있으면 친구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한 번 더 쳐다본 적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 마라. 뭔가 연인들끼리 있어야 할 공간이라든가, 연인들이 할 것 같은 일들을 남자 둘이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이진 않더라도 어색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쉽게 하는 착각이라면, 남녀가 그러고 있다 해서 꼭 연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과 남남이 그러고 있다 해서 꼭 친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 두 남녀는 사실 친구사이고, 저 남남은 알고 보니 연인사이일 수도 있다고.

여기서 발견한 게 또 하나 있는데, 애인과 친구는 그 ‘마음’ 하나 빼고는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거다. 물론 섹스를 포함한 스킨십은 제외해야 되겠지만. 어쨌거나 애인이랑 할 수 있는 건 친구랑도 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라는 점이, 아마 내가 녀석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좋아하게 만드는 데 나름 영향이라면 영향을 줬을 거다. 신혜성과 어울려 다닌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난 가끔 이게 친군지 애인인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신혜성 얘기가 나왔으니 녀석과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 번 훑어줄 필요가 있겠다. 신혜성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지금이야 신혜성 정수리가 나보다 한 뼘 위에 있지만 그때만 해도 녀석과 내 등치는 비등비등했다. 차라리 체격은 내가 더 좋았었다. 깡 말라가지고 얼굴도 조막만한 신혜성은 마른 멸치 같았다. 그 당시 별명이 매직 핸드―녀석의 손에 쥐어진 건 꼭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일만큼 뭐가 됐든 잘 흘리고 다녔던 탓에 나는 마치 형처럼 신혜성을 챙겼다. 실제로도 내가 생일이 더 빨라서 4달 형이다. 내가 4달 형이라고 하면 지금 신혜성은 웃으면서 아이구, 형 소리가 듣고 싶었쪄요? 라는 반응이지만 100일이 넘게 차이난다고! 난 백일사진 찍고 있을 때 넌 아직 양수를 헤엄치고 있었다고!

아무튼 중학교 때부터 주구장창 붙어 다니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신혜성이랑 내가 왜 친해졌는지 그게 기억이 잘 안 난다. 뭐 같은 반이어서 친해지긴 했겠지만 숫기도 없고 친해지기 전까진 말도 없는 신혜성이랑 그 정반대인 이민우가 어떻게 스물다섯인 지금까지도 죽마고우라고 붙어 다니게 됐는지.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그 조용하던 신혜성이 내게 먼저 다가와 수줍게 말을 건넨 것밖엔 없다.


‘저기…. 민우야.’


이상하게 그 나이 또래의 사내새끼들은 남자든 여자든 친구 이름을 부를 때 ‘이름’으로만 부른다는 거에 알레르기라도 있는지 꼭 성까지 붙여서 부르곤 했는데, 녀석은 굉장히 수줍은 얼굴을 하고 내 이름을 불렀었다. 덕분에 나도 괜스레 부끄러워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이름을 그렇게 간지럽게 부르는 건 신혜성 뿐이다.

 


* * *

 


-민우야.

“…….”

-이민우?

“어어. 어, 왜.”

-나가는 길이야?

“용화가 불러서. 요 앞에 맛나에 있대.”


중학교 때보다 굵어졌지만 여전히 미성인 신혜성의 목소리가 부르는 내 이름에 그제야 옛 생각에 잠겨있던 정신을 뭍으로 끌어낸다. 맞다, 신혜성한테 전화 왔었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꽤 쌀쌀한 밤기운에 어깨를 움츠렸다.


-치맥이나 할라 그랬더니.

“난 하러 가지롱.”

-치킨 사서 우리집 와.

“싫어. 그냥 네가 맛나로 오면 되지.”

-용화 있으면 주연이도 있을 거 아냐. 걔네 싸우는 거 들어주는 것도 지겹다. 치킨 값 줄게. 한 마리만 사와라. 응?

“배달인데 더 챙겨주셔야죠. 심부름값 없어요?”


아마 한 한 시간 뒤면 간장 치킨 한 마리 사들고 신혜성네로 향하고 있겠지만 괜히 튕기면서 연기를 해댔더니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새끼는 왜 웃는 소리조차도 사람을 간지럽게 할까. 내 귀에 대고 웃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으로 듣고 있는 건데도 간질간질하다. 운동화 속 발가락이 꿈틀거릴 것처럼.


-오징어 구워놓고 맥주 세팅해놓을게.

“오케이, 콜.”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를 손수 구워놓겠다 하니 더 이상 튕길 이유가 없다. 맛나 앞에 다다라 전화를 끊으려 하니 웃음기 가득 머금은 신혜성의 목소리가 또 내 발목을 잡는다.


-아 맞다. 아저씨, 오는 길에 이민우도 한 마리 갖다 주세요. 귀여운 놈으로.


이게 나를 또 동물 취급―주로 개새끼―한다. 지 할 말만하고 끊겨버린 전화를 붙잡고 나는 한동안 가게 앞에 서있었다.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을 보며 멍하니 서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처박고 가게 문을 열었다.


나는 가끔 신혜성이 이럴 때마다…. 네가 이럴 때마다 우리가 친군지 애인인지 헷갈린단 말이야.

내가 신혜성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신혜성을 단순히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중학교 때도 신혜성을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굳이 짝사랑의 기간을 늘리고 싶진 않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신혜성은 그동안 축적이라도 해뒀는지 한꺼번에 키가 쑥쑥 커버렸다. 아줌마는 신혜성이 그렇게 클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바짓단을 크게 한 번 접을 만큼 큰 교복을 녀석에게 사줬고, 녀석은 2학년 1학기가 시작할 때쯤 이미 바짓단을 다 내리고도 복숭아 뼈가 보일랑 말랑 했다. 그때부터 나랑 한 뼘 차이가 나기 시작했을 거다. 그래도 갑자기 크는 바람에 체력은 뒤따라가지 못해서 마른 멸치인 건 여전했다.

사실 지금도 마른 편이긴 하지만 수능 끝나고 열심히 운동하더니 몸이 꽤 좋아졌다. 근육 키워서 몸매 만드는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그냥 제 얼굴에 어울리는 잔근육, 생활근육만 유지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이제 마른 멸치는 절대 아니다. 요즘 여자들이 좋아할법한 슬림하고 탄탄한…. 음, 대놓고 내 취향이기도 하다.


얼굴도 몸매도 다 내 취향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신혜성의 그런 점들을 보고 좋아한다고 자각했던 건 아니었다. 좋아하고 나중에서야 내 취향이 신혜성 스타일이란 걸 안 거지. 그렇게 나보다 한참 커버린 신혜성은 제가 형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반대로 날 챙기기 시작했다. 어설프지만 나를 신경써주려 하는 녀석의 노력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던 시절이었다. 왜 내 키는 안자라는 거냐고 투덜대는 나에게 매일 아침 꼬박꼬박 우유를 들고 기다렸던 신혜성. 너 지금 나 작다고 놀리는 거냐 버럭 화를 내면 눈치를 보다 네가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사왔다며 배시시 웃던 신혜성. 흰 우유도 아니고 바나나우유가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매일 그렇게 챙기는 게 기특해서 나는 그걸 또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던 나 때문에 학주가 교문을 지키고 서있을 땐 잽싸게 바지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 매주던 신혜성도 있었다. 제 넥타이를 풀어서 매줬다면 아마 내가 더 훅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예 내 넥타이를 따로 챙겨 들고 다닌 걸 보면 신혜성이 머리가 좋긴 하다.

굳이 나열하기 번거로울 만큼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바퀴벌레 한 쌍 마냥 붙어 다니던 고1의 우리를 보며, 동네친구이자 신혜성 외에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세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구용화는 그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 차라리 둘 다 호모였으면 좋겠다. 경쟁자가 둘이나 줄어드니까. 그런 오해를 살 정도로 붙어 다니던 신혜성과 이민우라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혜성은 문과, 나는 이과로 갈리며 각자 친한 무리들을 형성해나갔다. 우리 둘 사이의 우정은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환경이 바뀌니 전처럼 바퀴벌레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을까. 체육복을 빌리러 녀석의 반으로 가던 나는 다른 친구들과 눈가에 주름이지도록 웃고 있는 신혜성을 보고 문 앞에 멈춰 서버렸다. 뭐랄까.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이랑 더 친해보여서 질투가 나는 수준이 아니라…. 이상하게 가슴이 쑤시더니 나도 놀랄 정도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다. 신혜성이 저렇게 웃어주는 게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내가 아니어도 신혜성은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하는. 단순히 친구사이에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감정들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그것이 우정이 아니라 연정임을 깨달았다.

 


“야, 임누.”

“…….”

“야, 야! 이민우!”

“…어. 왜.”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냐고.”


용화의 부름에 또다시 과거에서 헤엄치다 빠져나왔다. 거품이 다 사라진 맥주를 몇 모금 홀짝이며 두 사람의 눈치를 대충 살폈다. 이미 내가 들어올 때부터 주연이는 인사 한마디 건네곤 뭔가 화난 듯 입을 다물고 있었고 쿠―구용화를 부르는 애칭이다―이 새끼는 눈치 없이 자기 혼자 떠들기 바빴다. 니 여친 화났잖아, 쿠. 나도 아는 걸 남친인 구용화만 모른다. 내가 슬쩍 눈짓으로 주연이 좀 보라고 신호를 줬더니 그제야 주연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구용화가 왜 그러냐는 듯 미간을 좁힌다.


“너 왜 그러는데.”

“뭐가.”

“왜 삐져있는데?”

“…궁금하긴 하냐?”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내가 자리를 뜨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오빠 어제 술 마셨지?”

“마셨지.”

“누구랑 마셨어.”

“말했잖아. 강미영이랑 마신다고.”

“오빤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꼭 걔랑 술을 마셔야겠어?”

“야, 너보다 언니거든? 걔가 뭐냐, 걔가. 내 친구한테.”

“오빠 친구지 내 친구냐?”


저 눈치 더럽게 없는 구용화는 거기서 또 언니라 부르라며 제 여친의 심기를 건드리고 3살이나 어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나도 포스에 기죽을 때가 있는 한주연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쳐온다. 이 커플사이에서 내가 할 일은 그냥 조용히 맥주만 마시는 거다. 누구를 거들든 피곤해지는 건 나라는 걸 이제 터득했다. 제발 나한테 말 안 걸었으면 좋겠다….


“너는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미영이랑 나는 그냥 친구라니까? 저스트 프렌드.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오빠야 그냥 친구라지만 난 그래도 단둘이 만나는 거 싫다니까? 그걸 왜 이해 못해?”


구용화와 한주연 사이의 파이트 주제는 주로 여사친인 강미영이다. 또 강미영이랑 술 한 잔 한 것 때문에 이 난리인가보다. 왜 얘네는 지네 싸울 때마다 날 가운데 앉혀놓는지 모르겠다. 나랑 만날 때마다 싸우는 건지, 싸우는데 나를 부르는 건지 원…. 빨리 맥주만 다 비우고 신혜성네로 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숨을 푹 쉰 쿠가 도와달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 보지 마. 투명 인간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야, 임누 네가 말 좀 해줘라. 나랑 강미영이 둘이 만난다고 무슨 일 생길 사이냐? 내가 미쳤다고 걔를 여자로 봐?”

“그건 아니지.”

“거봐!”


용화와 마찬가지로 동네친구 중 하나인 미영이와는 진짜 무슨 썸이라고 생길만한 건덕지도 없는 친구사이긴 하다. 나랑은 당연히 생길 일 없고 구용화와 강미영은 고딩시절에도 앙숙으로 유명했다. 싸우다보면 정들지 않을까 했는데 얘넨 그냥 서로를 남녀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도 만나면 술 마시다 싸우는 사이인걸. 나는 싸우는 거 말리는 게 지겨워서 그 자리에 안 끼다보니 둘이 만나게 되는 거고.

제대하고 복학하자마자 파릇하던 후배 주연이를 낚아채더니 나나 신혜성, 강미영의 예상을 뒤엎고 생각보다 오래 사귄다 했는데. 이 둘도 싸우긴 겁나게 싸운다. 앞으로 이 술자리에도 끼지 말아야겠다. 내가 용화 말에 수긍하자 주연이가 도끼눈을 뜨며 나를 쳐다본다. 정말로 빨리 닭 들고 튀어야겠는데. 이러다가 나까지 잡아먹을 기세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니까? 내가 만약에 민우오빠랑 단둘이 밥 먹고 카페 가서 커피마시고, 영화보고 술 마신다고 해봐.”

“이민우라면 문제없지. 게인데.”

“하…….”

“얘랑 무슨 일 생길 게 있냐?”

“그래. 내가 예를 잘못 들었네.”

“너네 지금 나 게이라고 무시하냐? 나같이 잘생긴 게이면 오히려 여자들이 더 넘어오기 쉽거든?”


이것들이 꼭 지들 싸움에 나를 끼워 넣는다. 내가 만만해? 내가 여자한테 고백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신혜성에게는 차마 못했지만, 아니 안하겠지만. 이 갑갑한 마음을 어디 털어놓을 곳이라도 있어야 속병은 안날 것 같아서 용화한테 제일 처음 커밍아웃을 했었다. ‘나 남자 좋아해.’ 내 말에 처음엔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더니 조용히 나가서 캔맥주를 사온 쿠는 조심히 물었다. ‘설마 나는 아니지?’ 덕분에 가슴 졸이고 있던 나도 웃음이 터졌었다. 넌 친구로는 참 괜찮은 놈이지만 내가 눈이 삐지 않는 이상 너를 좋아하진 않을 거라고 했더니 쿠는 그거 왠지 기분 나쁘다며 나를 더 웃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커밍아웃을 했는지 모르겠다. 만약 용화가 나를 이해 못하고 멀어지거나 했을 수도 있는데. 물론 얜 알아도 그냥 ‘그랬냐?’ 하고 넘길만한 놈이라고 믿었기에 털어놓은 거였지만. 주연이한테 처음 나를 소개시켜 줄때도 ‘얘 게이니까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지 마.’ 라며 나랑 주연이를 동시에 당황시켰던 놈이었다. 웃긴 게 그 남친에 그 여친인지 그때부터 둘이 사사건건 내 연애사에 간섭을 해왔다는 거다. 거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건 고맙지만 가끔 쌍으로 달려드는 것이 꼭 시누이가 둘 있는 기분이랄까. 시누이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지만 왠지 결혼 안한 시누이가 둘이나 있으면 피곤할 것 같긴 하다.


“아무튼 내가 오빠 모르는 다른 남자랑 그런다고 생각해보라구.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겠어?”

“…친구라면 뭐.”

“다른 사람들이 나랑 그 남자를 애인이라고 볼 텐데? 진짜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겠어? 요만큼도?”

“…….”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구용화를 보면서 나도 같이 혀를 차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냐는 듯 동시에 날 쳐다보는 둘에게 해결은 둘이 보라며 미리 주문해놨던 닭을 받아왔다. 그래도 한 시간 채웠다. 오래 버텨준 거란 말이야.


“뭐야, 어디 가는데.”

“신혜성네.”

“아이고, 또 사들고 배달 가냐?”

“이거 신혜성이 사는 거야.”

“아주 신혜성이 부르면 싫다는 법이 없지. 나한테도 좀 그래봐라.”

“가끔 보면 오빠 둘이 사귀는 것 같아.”


용화한테 가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도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만 했지 그게 신혜성이라고는 말한 적 없어서 주연이의 말에 뜨끔했지만 날 숨기는 거에는 도가 터서 티는 내지 않았다. 닥치고 둘이 싸우던 거나 마저 싸우고 만약 둘이 진짜 헤어지면 연락하라 하고 냉큼 나와버렸다.

용화한테 커밍아웃까지 했으면서 신혜성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걸 말 안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럼 날 진짜 불쌍하게 볼까봐.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도 고백 한 번 못하고 옆에 있는 날 불쌍하다 생각할까봐.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건 나 하나면 충분했다. 남한테까지 동정 받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구용화는 알았으면 말은 안하더라도 아마 신혜성 앞에서 엄청 티났을 새끼라 안 된다. 입은 무거운데 도통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니.


내가 당사자인 신혜성에게 고백을 않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친구사이가 멀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하나는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였다. 어쨌거나 십년 넘게 친구로 지냈는데 어느 날 내가 좋아한다 말하면 그때부턴 모든 게 지금과 다를 거였다. 고작 그 한마디가 바꿔버릴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티를 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녀석의 옆에서 상처받거나 지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내 마음만 앞세울 순 없었다. 나한테도 신혜성과의 우정은 중요했다. 그걸 유지하는 것도.

그렇게 8년 가까이 끝이 언제인지도 모를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고백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아예 상처받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정말 너는 아니라는, 너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상처가 곧 아물겠지-하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혼자 앓고 혼자 털어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같이 있는 순간, 순간 갑자기 고이 키워온 내 마음을 말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다 이게. 결국 신혜성을 잃는 게 싫어서. 세계가 바뀌어버리는 게 무서워서.


“어, 엉아 이제 간다. 준비해둬라.”

-벌써 준비 옛날에 끝났다, 인마.

“올, 빠른데.”

-총알같이 튀어와,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음. 뭐 닭보단 네가 아주 쬐금 더 보고 싶긴 하겠지?

“…….”


이렇게 아무 사심 없는 신혜성의 말에 몇 번이고 혼자 설레고 상처받으면서도 접지 못하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건….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알았다. 얼른 가서 얼굴 보여줄게.”


버스를 타려다 택시를 잡으며 전화를 끊었다. 뭘 얼마나 더 빨리 가서 보겠다고 이러는지 스스로도 한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신혜성이 좋다는데.

 

 

 



* * *

 

 

 


 

“치킨 배달 왔습니다.”


벨을 누를 필요도 없이 거의 공용이나 마찬가지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이미 혼자서 맥주 한 캔을 깐 신혜성이 발딱 일어나 다가온다. 날 반겨주나 했더니 냉큼 치킨봉지만 채가선 제자리로 돌아가 까기 바쁘다. 도대체가 왜 택시비를 날리며 달려왔는가 싶어 한숨이 푹 새어나온다. 신혜성도 내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는 편이지만 가끔 이러는 나를 볼 때면 주인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개가 된 기분이다. 실제로도 신혜성이 나를 대형견 취급할 때도 있지만. 손을 닦고 알아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와 신혜성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취생 주제에 평면 TV를 집에 들여놓는 사치를 부린 신혜성은 드라마를 보며 이미 닭다리 하나를 뜯는 중이었다.


“무슨 드라마야?”

“몰라. 나도 오늘 첨봐.”


치킨대신 오징어 다리를 들고 질겅질겅 씹으며 묻자 신혜성은 드라마를 보다 말고 오징어를 들곤 가스레인지 쪽으로 가버린다. 오징어가 식어서 다시 구워줄 모양이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이런 게 문제라는 거다. 이런 사소한 걸 챙겨주는 신혜성 때문에 나는 마음을 접을 생각을 않나보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로 갈지, 어디로 튈지 예상 할 수 없는 거니까. 한 번도 내 마음에게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 또 그 여자랑 같이 있었어? ]

[ 언제까지 그렇게 신경 쓸 건데? 내가 그냥 친구라고 했잖아. ]

[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며 말 한마디 안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신혜성과 나는 서로에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알고지낸 시간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었다. 물론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건 절대 모르지만. 어쨌거나 척하면 척, 서로의 생각 같은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궁금한 게 생길 때도 있긴 했다.


“넌 남녀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봐?”


드라마를 보니 문득 용화랑 주연이가 날 세우며 으르렁거리던 것도 생각나고 해서 물어봤다. 난 쿠랑 강미영이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주연이 입장에선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물론 주연이도 친구가 될 수 없단 입장이 아니라 그냥 제 남친이 ‘여자’랑 단 둘이 만나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러는 것 같긴 했지만. 나한테 대입해서 생각해보려 해도 나한테 여자는 정말로 저스트 프렌드라 이입이 되질 않는다. 남자랑 여자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없는 건가? 친구라 해도 언젠가 충분히 다른 감정이 끼어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여사친 많은 남친이나 남사친 많은 여친을 그렇게 불안해하고 간섭하는 걸까.

내 물음에 뜯고 있던 닭을 내려놓으며 휴지에 슥슥 손가락을 닦은 신혜성은 캔에 남아있던 맥주를 전부 비워냈다.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건데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신혜성을 보고 있자니 다른 것도 물어보고 싶다. 넌 남자랑 남자 사이에 꼭 친구만 있다고 보냐. 그러고 보니 10년을 넘게 보면서도 한 번도 그런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먼저 꺼내는 건 왠지 찔리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다. 신혜성은 애초에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누가 하는 연애가 됐건 아예 연애 자체에 관심이 없는 놈이었다.


“음…. 난 될 수 있다고 봐.”

“…….”

“어차피 남자랑 여자도 사람 대 사람 사이인거 아냐? 남녀를 붙여놓는다고 그 사이에 무조건 애정이 싹트리란 보장은 없지.”


신혜성의 말도 맞는 말이다. 남자랑 여자 사이에 친구가 없었다면 모두가 전부 양다리, 삼다리 씩 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남녀사이의 친한 사이란 불을 붙이지 않은 폭죽과 같다.’ 라고. 얼마든지 친한 친구사이가 될 수는 있지만 어떤 계기만 생긴다면 충분히 다른 사이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게 남녀 사이 같았다. 역시나 여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지만. 지금껏 보아온 내 주변의 사람들이 그랬고, 그냥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았다.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불만 당기면 활활 불타오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다. 10년이 넘은 친구 사이여도 살다가 어쩌다 한 번쯤은 이성으로서 설렘을 느껴볼 수도 있다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관계가 급 진전 될 수도 있는 거고.


“친구로 지내다가 다른 감정이 싹트면?”

“뭐…그럴 수도 있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친구사이에서 애인이 되는 것도 그럼 오케이야?”

“난 좀 오래보고 사귀는 게 좋아서. 막 몇 번 만나고 사귀는 거 별로지 않아? 오랫동안 곁에서 좀 지켜봐야 될 것 같은데, 나는.”


그러면서 다시 닭을 뜯기 시작한 신혜성과 달리 나는 도통 치킨에는 손이 안 가고 맥주만 벌컥벌컥 들어갔다. 오기 전에 좀 먹었더니 배가 불러 그런 건지, 아님 입맛이 없는 건지. 어쩌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너 왜 안 먹어.”

“…나 먹고 왔어.”


치킨이고 오징어고 더 이상 손댈 생각도 않고 맥주만 들이키는 게 수상했는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신혜성은 곧 별다른 반응 없이 눈길을 돌렸다. 용화랑 주연이 사이에서 몇 개 집어먹긴 했지만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는데. 손이 가질 않는다.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면 신혜성에게 ‘여자란 무조건 이성적인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고 좌절했을 텐데. 친구에겐 절대 호감이란 게 생길 수 없다고 대답했으면 더 좌절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 반대의 대답을 듣고도 기분이 별로인 건 전부 내 탓이다. 어디에도 나는 해당하지 않아서. 나는 친구지만 신혜성이랑은 절대 애인사이로 발전할 수 없는 ‘남자’고, 남녀사이에 친구가 가능하지만 신혜성에겐 남남은 당연히 친구‘만’가능한 사이니까. 살다가 한 번쯤 설렘을 느낄만한 가능성조차도 없는 게 이민우와 신혜성의 사이다. 그 모든 게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신혜성을 좋아하면서 여자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내 성적취향이 동성애자인거지 정체성이 흔들린 건 아니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능성이 생긴다는 건 부러우면서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남자인 게 싫었던 적은 없었다.


“오늘 자고 갈 거지?”

“집에 갈라 그랬는데?”

“그냥 자고가. 뭘 또 피곤하게 이 시간에 또 나가냐.”

“나 집에 가서 과제해야 함. 노노.”

“웃기네. 네가 과제는 무슨.”


네가 언제 과제를 제때 해갔냐고 코웃음을 치는 신혜성에게 욱해서 진짜 갈 거라고 벌떡 일어섰더니 녀석이 잽싸게 발목을 붙잡는다. 발을 빼려고 끙끙거리는 나를 결국 넘어뜨리더니 제 다리 사이에 내 다리 하나를 끼워 넣곤 꽉 잡아 붙든다. 못 이긴 척 자고 간다며 그만 좀 놓으라고 꿈틀대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 다리에 힘을 준다. 그러고선 아무렇지 않게 치킨을 마저 주워 먹는 신혜성을 보며 나도 포기하고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누웠다.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신혜성이 놓아 줄때까지 그렇게 내내 우리 다리는 엉겨있었다.


내가 여자가 되고 싶지 않은 데엔 어쩌면 이런 것도 해당될지 모른다. 내가 여자였으면 신혜성네 집에서 자고 가는 것도, 이렇게 엉겨 붙어서 아무렇지 않게 텔레비전을 보는 일 따윈 못했을 테니까. 물론 여자랑 남자도 친구 사이에 스킨십도 있을 수 있고 서로 집에서 자고 가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쩐지 그건 남들 보기에 친구가 아니라 애인도 뭣도 아닌 애매한 사이로 보이지 않나.

만약에 쿠가 강미영네서 자고 온다면 나야 별 생각 없어도 주연이는 뒤집어질 게 뻔했다. 나도 만약 내 애인이 여자 사람 친구 집에서 외박했다 하면 괜히 양성애잔가 의심 갈 것도 같고. 양성애자여도 상관없지만 나 만나면서 동시에 여자 만나는 거면 면상을 갈겨줄 거다. 사귀면서 마음 한 구석엔 늘 신혜성이 존재하는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품는 게 죄가 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신혜성이랑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고 자시고,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하나 확실한 건 신혜성은 이민우랑 노는 걸 제일 좋아한다. 이건 자만이나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쿠랑 다른 친구들 중에서도 최고는 이민우. 아마 녀석이 여자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이민우일 거다.


“너 내가 그렇게 좋냐.”

“어.”

“미친놈.”

“지도 좋으면서 튕기긴.”


내가 좋냐는 물음에 망설이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해오는 저 멍청하고 이상한 놈. 남자들끼리 서로 좋다고 애정 표현하는 일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신혜성은 저렇다. 나를 좋아하는 걸,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걸 숨기지 않는다. 물론 그 ‘좋아한다’는 의미가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말이다. 난 튕기는 게 아니라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진심이 밖으로 드러날까 몸 사리는 거라고, 이 답답아.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닌데. 지금껏 신혜성이 내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건 내가 엄청나게 잘 감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신혜성에게 이민우는 논외의 대상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랑 자기랑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여서 그 외에 다른 눈으로 나를 관찰해본 적도 없을 거다. 이민우를 다르게 생각해보거나 우리가 친구라는 것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본 적 없을 신혜성. 그래서 더 무서워진다. 신혜성이 내 마음을 혹시라도 알게 되는 날에 우리가 어떻게 될까 싶어서.


입대하기 전 술자리에서였나. 술에 거하게 취해 평소보다 더 오글거리는 말을 던지던 신혜성이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나를 끌어당기더니 어깨에 기대왔다.

‘민우야, 나는 네가 진―짜 좋다.’

그땐 지금처럼 미친놈이라고 쿨하게 욕 한 번 해주고 받아줄 만큼 단련이 되어있던 때가 아니었다. 나도 알딸딸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신혜성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백할 뻔 했었다. 나도 널 정말 좋아한다고.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째선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몇 년을 감추고 키워온 마음을 아무 준비 없이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아무 말도 못한 게 다행이었다. 이어서 흘러나오는 신혜성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네가 내가 죽을 때에도 내 옆에 있어 줄 친구여서 진짜 좋다. 내가 진짜 너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 아이가!’

서울놈 주제에 뜬금없이 사투리를 쓰며 마치 영화 ‘친구’를 생각나게 하던 신혜성은 정말로 마이크를 잡고 친구의 ost인 ‘Bad case of loving you’를 열창했다. 제대로 술에 취했구나. 그래서 그냥 나도 같이 장단을 맞춰주며 어깨동무를 한 채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날 깨달은 게 있다면, 아마 난 기회가 주어져도 절대 고백은 못할 거란 거랑 신혜성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친구라는 거였다. 그 믿음을 배신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구.

 


“나 먼저 씻는다.”

“어. 아, 맞다. 수건 다 나와 있으니까 건조대에서 하나 들고 들어가.”

“너 또 쌓아놨다가 한꺼번에 돌렸지?”

“그래도 세탁기 돌린 게 어디냐. 잔소리는 이제 사절한다.”


매번 젖은 수건을 잔뜩 쌓아놨다가 더 이상 쓸 수건이 없을 때가 돼서야 세탁기를 돌리는 신혜성 때문에 곰팡이가 펴서 버린 수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군대 제대하고 반년 뒤에 부모님이 집을 천안으로 옮기면서 그걸 기회 삼아 냉큼 자취방을 구해 나온 신혜성은 어느새 자취 2년을 향해 가는데도 이런 기본이 엉망진창이다. 기본 중에 기본인 밥도 가끔 태워먹을 때가 있다. 1인용 밥솥 태워먹은 것만 해도 몇 개더라. 도대체가 물 넣고 시간만 맞춰주면 되는 걸, 뭘했길래 태워먹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예 그냥 큰 밥솥을 사놓고 내가 올 때 밥을 해놓고 가기로 했다. 해서 1인분씩 담아 냉동실에 얼려놓으면 밥 먹을 때마다 해동해 먹는 식으로. 우렁 각시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다. 물론 난 몰래 해놓고 가진 않는다. 신혜성이 고마워하도록 티 팍팍 내고 하지.


치킨을 다 해치우고 이젠 재방송중인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남은 치킨 무를 주워 먹는 신혜성을 쳐다보다 욕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레 녀석의 칫솔과 같이 꽂혀있는 내 칫솔을 집어 들었다. 이 집엔 온통 이민우 흔적 투성이다. 내 칫솔, 내 옷, 내 모자, 내 책, 내 양말, 내 속옷 등등. 누가 보면 같이 사는 지 알정도로 내 물건들 투성이. 방학 땐 거의 살다시피 눌러앉아 있을 때도 있었고 아무래도 자주 오다보니 물건이 하나, 둘 늘어난 거지만.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내가 궁금한 건 이게 ‘보통’의 친구사이에도 가능한 일이냐는 거다. 물론 자취하는 친구 집을 자기 집처럼 쓰는 애들이야 충분히 있을 법하지만. 쿠 말대로 나랑 신혜성은 좀 유별난 친구사이 같기도 하고. 우리 같은 남자애들이 또 있다고 하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길 텐데.


“아, 뭐에!”

“맥주 먹은 거 올라왔어.”

“나 나아고 사!”

“내외 하냐. 새삼스럽게스리.”


내가 좋다고 한 향의 바디워시를 사다놓은 신혜성을 생각하며 멍하니 이를 닦고 있는데 반쯤 열려있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신혜성이 추리닝 바지를 내린다. 거품이 입에 있는 채로 소리 지르니 발음이 이상하게 나가는데도 신혜성은 그걸 또 다 알아듣는다. 쪼르르 경쾌하게 울리는 물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묵묵히 거울을 보며 이를 마저 닦기로 했다. 중딩 때부터 지금까지 신혜성 거시기를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제와 부끄러워하며 피하는 게 더 이상하다.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은 같이 찜질방에 가거나 목욕탕에 가는데. 맨몸도 보는데 거시기 보고 놀랄 건 또 뭐야.

그러나 나도 남자인지라. 그리고 게이인지라. 신혜성이 홀딱 벗고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거나 거시기를 본다거나 하면 당연히 흥분할 때도 있었다. 지금이야 자제하는 법을 익혔지만 신혜성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고등학교 시절엔 한창 불타올라서 신혜성을 떠올리며 자위도 해봤고, 심지어 같이 자다가 잠든 신혜성을 보면서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들킬 것 같아서 처리는 화장실에 가서 했지만. 지금은? 지금은 뭐 그래도 나름 흥분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가려서인지 본다고 늘 거기가 서진 않는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의 맨몸을 보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수행의 결과라고밖엔…. 아,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대단하다. 생리적인 현상은 진짜 어쩔 수 없는 건데! 신혜성한테 혹시 들키거나 의심이라도 받을까봐 그걸 조절 해내다니.


“이 적당히 닦고 얼렁 나와. 코빅 이번주꺼 재방한다.”


손을 닦다가 내 턱으로 새는 거품을 자기 손가락으로 슥 닦아주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훌쩍 나가버리는 신혜성을 보다 입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을 퉤, 모두 다 뱉었다. 아니, 글쎄. 보통 남자들은 저런 거 닦아주고 그러지 않는다니까? 이건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신혜성이 이상한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 진짜 저 이상한 새끼.”


물을 오물거리며 입안을 헹구면서 내내 이상한 놈이라고 구시렁거렸지만. 사실 저런 놈을 좋아하고, 것도 모자라 저런 놈이랑 이러쿵저러쿵 하는 불순한 상상까지 하는 내가 제일 이상한 놈이다.

 

* * *

 

보통 중고딩 친구들은 대학가면 예전처럼 안 붙어 다니던데. 물론 여전히 절친이지만 대학교를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수업 시간도, 어울리는 사람들도 다 제각각인데 전처럼 만나서 논다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자고로 ‘절친’ 정도로 불릴 친구라면 한 달에 한 번을 보든 반년에 한 번을 보든, 또는 1년에 한 번을 보든 편안하고 어색하지 않은 사이여야 했다. 나도 신혜성을 필두로 그런 친구가 몇 있긴 하지만 놈들을 신혜성 만큼 자주 만나진 않았다. 동네야 다 거기서 거기에 산다지만 학교도 다르고, 각자의 생활 패턴이 있어서 다 같이 모이는 건 미리 약속을 잡아야했다. 사실 그게 보편적인 현상인데 말이지. 나도 지금 신혜성과 바퀴벌레 한 쌍 호흡을 보여주던 중딩 때만큼 붙어 다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일주일에 못해도 네 번은 보는 것 같다. 애인 사이에도 이렇게는 안볼 것 같은데.


“민우야, 이거 어때? 괜찮을 것 같아?”


신혜성이 내미는 사진과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굴에 안 어울릴 머리는 또 뭐겠냐. 짧은 머린 좀처럼 하지 않았던 신혜성인지라 입대 할 때 잘라놓으면 엄청 웃겨지는 거 아니냐고 내심 기대하던 쿠는 입대 전날, 또 한 번 좌절을 맛봤었다. 타고난 새끼들은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모델 같고 무슨 머리를 하든 빛나는구나. 나도 내 얼굴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살지만 가끔 신혜성을 보면 현실성이 없을 때가 있다. 순정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서.

이걸로 해달라며 디자이너와 사라지는 신혜성을 보다 나도 염색이나 해볼까하고 컬러를 고르기 시작했다. 참…. 신혜성이랑 내가 아직도 이렇게 자주 붙어있는 걸 보며 너흰 치킨과 맥주 같은 놈들이라며 징하다고 하는 친구들의 말처럼, 나도 가끔 이해안갈 때가 있다. 둘이 잘 맞으니 붙어 다니는 거겠지만 ‘보통’ 동성 친구들끼리, 아니 정정. ‘보통’ 남자애들이 우리처럼 노느냐가 문제인 거다. 왜 우린 중고딩도 아니고 스물다섯이나 먹었는데도 아직 이러고 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머리하러 갈 때 따라가는 거.


“저 염색 좀 해주세요.”

“컬러 고르셨어요?”

“음…. 이거 너무 밝을까요?”

“아니에요. 실제로 하면 그렇게 밝진 않아요. 모발 상태에 따라 다르긴 한데…. 이 색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이런 데에선 팔랑귀인지라 그냥 그걸로 해달라며 겉옷을 벗고 주섬주섬 스텝이 주는 가운을 걸쳤다. 신혜성과 좀 떨어진 곳에 앉아 녀석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이내 다가온 직원에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보통 남자애들이 친구 머리하는 데 따라 가냐고. 물론 같이 머리 자르러 갈 수는 있다만. 중딩 때처럼 규제가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미용실에 같이 가던 때가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가 왜 한 놈 머리할 때 한 놈은 할 일 없이 그걸 구경하고 있거나 잡지를 보고 있는지…. 여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사실 여자들은 머리하는 데 오래 걸려서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같이 가는 일이 없는 것 같긴 하다―그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왜 내가 하고 있느냔 말이다. 더 웃긴 건 신혜성이 같이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나서는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싫은 게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남들이 보기에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신혜성이나 나나 서로 머리 할 때 같이 가주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다는 게 가끔 이해가 안갈 뿐.

 

중딩 때를 회상해보면 그땐 어떻게든 머리를 기를 수 있을 때가지 기르다 검사에서 걸리면 그제야 미용실에 몰려가곤 했다. 당시 남자애들은 이발소에 가면 기계로 정말 스포츠머리를 만들어놓을 거란 불안함 때문에 여자만 간다고 여겼던 미용실로 다들 옮겨가는 추세였다. 나도 학생 주임 선생님한테 걸려 결국 신혜성 포함 다섯이서 미용실로 향했고 뭔가 이발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다들 쭈뼛쭈뼛 거리며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첫 타자로 나선 건 나였다. 뒷머리는 목을 덮지 않아야 하고, 앞머리는 눈썹이 보여야하는 두발규정에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슬퍼하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다듬어주겠다고 바리깡을 집어든 미용실 아줌마의 손길에 그나마 내 마지막 희망이던 구레나룻까지 잘려나가자 내 얼굴은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아줌마! 구레나룻은 살려주셨어야죠! 차마 소리 지르지 못하고 일어나선 굳은 얼굴로 계속 거울을 보며 구레나룻이 있던 자리를 매만지는 나에게 다가온 신혜성은 왜 그러느냐며 물었다.

‘나 머리 완전 호구 같지?’

내가 그렇게 묻는다고 어 그래, 너 호구 같다고 대답할 신혜성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지금 내 소중한 구레나룻이 날아갔으니 신혜성이 뭐라고 대답하든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신혜성의 대답은 나를 벙찌게 만들었다.

‘아니, 내 눈엔 그냥 귀여운데.’

뭐랄까. 그때의 기분은 참 설명하기 힘들다. 그때야 신혜성을 좋아할 때도 아니었고, 내 성적 취향을 자각했을 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애들끼리 농담 식으로 ‘이 새끼 귀엽네.’ 하는 느낌도 아니고, 무슨 강아지 새끼 귀엽다고 하듯 진짜로 귀엽다고 하는 느낌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땐 키도 비슷하고 신혜성 체격이 외소해서 마른 멸치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내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놈에게서 귀여운 취급을 받다니. 그것도 웃으면서 진심으로 내가 귀엽다는 듯 날 쳐다보는 신혜성 때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귀만 새빨개졌었다. 쿠가 나한테 귀엽단 소리를 했으면 징그럽다, 미쳤냐, 돌았냐, 소름 돋았다 같은 말을 쏘아댔을 텐데. 신혜성에겐 그런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때부터 이미 신혜성은 예외였나?



“염색하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신혜성에게 고개를 끄덕이니 가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 사진을 찍는다. 찍어놓고 귀엽다는 신혜성에게 중딩 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머리 올백으로 죄다 까고 랩 뒤집어쓰고 있는 내가 귀엽냐? 차라리 잘생겼다고 해주던지. 귀엽다고 하면 진짜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아니 도대체가 어떤 남자들이 지 친구한테 귀엽다 그러냐고! 그게 흔해? 아니라고!


직원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 신혜성을 보다 짧은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가끔 신혜성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착각 아닌 착각을 할 때도 있었다. 혹시 녀석도 나한테 조금은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오랜 시간 알아오면서, 신혜성은 본래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랑은 좀 더 친하고, 잘 맞고, 또 평생을 갈 친구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니 아주 조금 더 특별했을 뿐. 그 조금이란 것이 나에겐 굉장히 큰 착각을 하게 만들었던 거였다.


“다 됐습니다.”


머리를 말리면서 살짝 다듬기까지 마치고 거울을 보는데, 아까 머리 감고 왔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머리가 생각보다 밝다. 군대 다녀와선 한 번도 염색을 안 해서인지 오랜만에 한 밝은 머리가 영 어색하다. 괜히 했나? 머리를 털며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거울로 신혜성 얼굴이 보인다. 웨이브 포마든지 뭔지 하는 머리를 한다더니. 그동안 안하던 스타일이라 색다르긴 한데 결론은 똑같다. 진짜 순정만화 왕자님 같네.


“머리 잘 됐네.”

“진짜? 괜찮아?”

“엉. 이미지 달라 보인다, 뭔가. 나도 그냥 머리나 할 걸 그랬나. 내 머리 너무 밝지 않아?”


여전히 염색이 너무 밝게 된 것 같은 머리가 신경 쓰여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거울을 보는데 신혜성이 너무 아무렇지 않을 얼굴로 그러는 거다.


“예쁜데? 머리?”


나한테 예쁘다 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예쁘다는 건데. 그리고 진짜 나한테 예쁘다 했어도 남자가 그 소리 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근데 또 그게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싫진 않다. 다른 표현 다 두고 예쁘다고 하는 게 어색 돋고 오글거리긴 하지만, 짝사랑 하는 사람 눈에 내가 그렇게 비춰진다는 게 싫을 리는 없다.

오랜 시간 끌고 온 짝사랑이기에 좋아하는 것에도, 그 감정이 주는 느낌에도 익숙해져버린 나였지만.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게 해주려는 듯 이렇게 가끔 두근거리는 때가 오면 설렘과 동시에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직은 포기가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 가?”

“…어. 가, 가.”


문을 열고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는 신혜성이 멍하니 서있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신혜성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신혜성이 방을 비울 생각이 없다고.

 

 

* * *

 

 

가을이 절정이 이를 이 시즌에 나는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상태가 좀 안 좋은데, 계절을 타서도 아니고 옆구리가 시려서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가져다 붙이자면 아버지 기일이 있어서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년 정도 됐는데도 아직 이런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랑 사이가 그렇게 친밀했던 것도 아닌데.


“아들, 밥 안 먹어?”

“밥 생각 없어.”

“또 입맛 없어?”

“지금 배 별로 안 고파서 그래. 좀 있다 먹을게.”

“…고구마 쪄놨으니까 굶지 말고 그거라도 먹어.”


침대에 엎드려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짧은 한숨과 함께 엄마의 모습이 문 사이로 사라진다. 괜히 또 울 아줌마 걱정시키기 싫은데. 왜 이렇게 의욕 없이 축축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요 며칠 잠이 잘 안와서 제대로 못 잤는데도 피곤하기만 하고 졸립단 느낌은 안 든다. 빨리 가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불면증이 오면 생각도 너무 많아진단 말이야.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피곤하게 살기 싫은데.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엄했다. 늦은 나이에 본 외동아들이면 더 애지중지 할법한데, 다른 사람에겐 안 그러면서 나에겐 유독 엄했다. 엄마한테는 엄마라 불렀지만 아버지한텐 아빠라는 말도 안 나왔다. 아니, 못 썼었다. 아버지한테 존댓말을 하는 게 당연한 거였고 어렸을 때 뭣 모르고 대들다가 혼나던 기억 때문인지 클수록 아버지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밖에서 재잘대기 좋아하는 나도 집에서는 영 말이 없었고, 아버지는 과묵 그 자체였다. 덕분에 우리는 대화가 많은 부자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디 드라마에서 볼 법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에게 고민 상담을 해본 적은 당연히 없고, 아버지가 먼저 내게 고민이 있느냐 다가온 적도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가 자기 얘길 하는 일도 없었다. 그게 너무 익숙해서 바꿔봐야겠단 생각도 못했었다. 나도 아버지에게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고, 아버지도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엄마한테 어떻게 저렇게 무뚝뚝하고 과묵한 아버지랑 결혼을 했냐, 안 답답했냐고 물으면 엄마는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살다보면 그냥 다 어찌어찌 맞춰가며 살게 된다고. 그게 인생이라며.


그러다 고3이 됐을 때였다.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버지와 마주칠 일이 더 없을 때. 어느 날 야자까지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안 분위기가 평소보다 가라앉아있음을 직감했다. 엄마의 얼굴은 운 것처럼 퉁퉁 부어있었고, 다녀왔냐는 인사조차도 없었다. 침울한 표정의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평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마지막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했다.

‘췌장암 말기란다. 네가 엄마 좀 잘 챙겨라.’

마치 가벼운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나도 처음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췌장암이란 단어와 아버지가 죽는다는 생각을 연결 짓지 못했었다. 췌장암은 발견하기도 힘들고, 말기면 더 이상 손 쓸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엄마에게 듣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좀처럼 들어오는 일 없던 내 방에 들어와 자는 나를 한참을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깨있었지만 일어나서 아버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저 이유 없이 눈물이 터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때 무슨 말이든 해볼걸. 왜 엄마랑 나만 두고 먼저 가냐고 화라도 내볼걸.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검은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서있을 때도 나는 아무 것도 실감하지 못했다. 이젠 정말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그 무뚝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도, 그 무엇도. 엄마는 처음 아버지의 병을 알게 되던 날부터 조금씩 정리를 하고 마음을 비운 듯 그때처럼 우울해하지 않았다. 바쁘게 사람들을 맞이했고 아들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그냥 병풍처럼 서서 인사를 하고, 절을 하고, 그들의 위로를 들으며 기계적인 대답만 하고 있었다. 고3이라 중요할 때인데 흔들리지 말고 기운 내라는 어른들의 말에 ‘네.’ 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그러다 신혜성과 구용화를 비롯한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나를 보는 신혜성의 눈을 보자마자 울컥 목구멍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상주인 나보다 더 처연하고 슬퍼 보이는 신혜성의 눈이 꼭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았다. 결국 맞절을 하다가 눈물이 터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신혜성은 꽉 껴안으며 제 가슴팍에 내 눈물을 다 받아냈다. 소리 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우는 나를 감싸며 신혜성은 한참을 내 등을 쓸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이 울어주었다.

아마 내가 신혜성에게 마음을 더 주게 된 것도 그때일지 모른다. 그 뒤로도 이 시기의 내가 어떤지 엄마만큼 잘 아는 신혜성은 알게 모르게 나를 챙겼다. 지금처럼.

 

-어디야. 집이야?

“…엉.”

-나와. 만나자.

“왜.”

-우리가 이유 있어야 만나는 사이냐?


받기 귀찮아서 씹었는데도 그만둘 생각을 않고 계속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전화를 받으니 신혜성은 대뜸 만나자는 말부터 꺼낸다. 나가기 귀찮은데. 중얼거리는 내 소리를 들었는지 잔말 말고 빨리 나오라며 닦달이다. 내가 또 집에서 넋 놓고 하루 종일 굶을 걸 알고서 이러는 걸 거다.


-피크닉 가자.

“무슨 피크닉이야, 피크닉은.”

-한강 가자. 바람이나 쐴 겸.

“추워, 한강.”

-아직 안 추워. 옷 입고 2시까지 여의나루로 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간다고 대답도 안 했는데 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신혜성일지라도 지금은 만사가 다 귀찮은데. 한 5분을 핸드폰을 보며 멍하니 누워 있다가 결국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귀찮긴 해도 진짜 올 때까지 기다릴 새끼라 안 갈 수가 없다. 이러는 것도 나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거기다 대고 짜증을 낼 수가 없잖아. 대충 모자나 뒤집어쓰고 나가려다가 문득 피크닉이라 그런 신혜성 때문에 도시락이라도 싸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진짜 도시락을 싸가는 건 좀 오바고. 데이트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결국 엄마가 쪄놓은 고구마 몇 개를 봉지에 담아 덜렁덜렁 들고 집을 나섰다.

멍한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여의나루로 가는 내내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누가 엉덩이를 잡아온다. 진짜 확 정신이 들어서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신혜성이 웃으면서 엉덩이에 있던 손을 떼고 내 어깨에 팔을 걸친다.


“아, 뭔데.”

“뒤에서 보니까 엉덩이가 엄청 매력적이길래.”

“…내가 한 엉덩이 하긴 하지.”

“그치. 힙 업 하나는 끝내주지.”


신혜성한테 이런 칭찬 듣는다고 기분 좋을 리…. 사실 좋긴 하다. 신혜성이 게이였음 더 좋았겠지. 계단 위로 올라서니 벌써부터 강바람의 찬 기운이 몸을 감싼다. 강 쪽을 향해 걷다가 문득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신혜성의 손을 살피니 진짜 아무 것도 없다. 이 새끼는 자기가 피크닉 가자고 해놓고 돗자리 하나 안 챙겨왔어.


“피크닉 가자며.”

“어. 왔잖아.”

“돗자리도 없냐?”

“돗자리씩이나 챙겨오냐, 어떻게.”

“난 고구마라도 싸왔지 넌 가져온 게 뭐야.”

“나도 역에서 신문 가져왔어. 그냥 대충 이거 깔고 앉자. 대신 내가 맥주 사올게.”


바지 주머니에 대충 돌돌 말아 꽂아 넣은 신문지의 용도가 돗자리였나 보다. 그래, 어차피 돗자리나 도시락을 챙겨올 정도로 섬세한 남자들이 아니니. 우리가 무슨 돗자리 펴놓고 도시락 까먹으면서 진짜 피크닉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신혜성이 맥주를 사러 간 사이 대충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햇빛에 반사 돼 반짝거리는 한강을 쳐다봤다. 흘러가는 강을 보고 있으려니 또 멍해진다. 내가 원래 좀 델리케이트 한 남자긴 하지만…. 아무래도 빨리 겨울이 와야 할 것 같다. 감수성이 이렇게 풍부해서야.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 흘릴 태세다.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가는 것만이 방법이다.


“으앗, 차거!”


슬금슬금 뒤로 다가와 맥주를 목 부근에 가져다대는 신혜성 때문에 또 놀라며 몸을 피했더니 녀석이 좋다고 깔깔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어린 게 확실해. 저는 나보고 동생 같다 우쭈쭈하지만 나보다 키만 컸지 확실히 신혜성이 어리다. 딱 네 달 만큼.


“왜 이렇게 멍 때리고 있어. 역에서도 그러더니.”

“…엉아가 요즘 생각이 많아서 그래.”

“그러셔요.”


오징어 안주도 센스 있게 사온 신혜성에게 대신 고구마 하나를 까주며 내미니 자기 손으로 먹을 생각은 않고 한 입 베어 문다. 먹여주는 것 같아서 느낌이 묘하다. 신혜성은 어디 고구마냐며 맛있다고 나중에 좀 갖다 달라는 소리나 늘어놓고 있지만. 너가 알아서 처먹으라고 고구마를 봉지위에 내려놓고 나는 오징어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나올 때 귀찮았던 거에 비해 확실히 나오니까 더 낫긴 하다. 바람 쐬면서 탁 트인 곳에 있으니까 가슴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도 조금 가벼워진 것 같고. 맥주도 시원하니 좋고.


“나밖에 없지?”

“뭐가.”

“이 엉아가 너 생각해서 준비했잖아.”

“허, 네가 뭘 준비했는데. 하다못해 돗자리라도 하나 챙겨오든지.”

“야, 너 또 나 아니었음 하루 종일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을 거잖아.”


신혜성은 정말이지 날 너무 잘 안다. 내 마음 빼곤 다 알 거다. 이 소중한 공강 날을 널 위해 쓰고 있다며 자꾸 뻐기는 녀석에게 알았으니 그만 하라고 고구마를 입에 쑤셔 넣으니 그제야 조용해진다. 사실 우리 사이에 고맙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왠지 어색하고 쑥스러워 표현하진 않아도 늘 녀석에겐 고마워하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함께 울어준 것도. 그 뒤로도 신혜성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대학 갈 생각도 못했을 거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를 옆에서 붙들어주고, 챙겨준 것도 모두 신혜성이었다.

 

‘나는 너랑 같이 대학생 돼서 서로 학교도 놀러가고 캠퍼스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으면 좋겠어. 시험기간엔 같이 밤도 새고, 시험 끝나면 밤새도록 진탕 술도 마시고. 축제도 보러 다니고.’

 

별거 아닌 말들이었는데 그땐 그게 굉장히 큰 힘이 됐었다. 너와 같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신혜성의 말들이 나한테는 힘내라는 말보다 더 동기부여가 되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이렇게 매번 내 정신이 딴 데 가있을 때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를 잡아주고, 챙겨주는 녀석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옆에서 기운 내라, 힘내라, 위로를 하며 같이 우울해하고 있었으면 아마 힘이 더 빠졌을 텐데.


“혜성아.”

“왜. 너무 다정하게 부르니까 닭살 돋는다.”

“…….”


고맙다고 한 번쯤은 말하고 싶은데. 너무 친한 사이라 그런지 말이 더 안 나온다. 그 말이 맞나보다. 친한 사이일수록 고맙다, 미안하다 말하는 게 더 어렵다는 거. 불러놓고 아무 말도 못하는 내 맘을 다 안다는 듯이, 신혜성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린다. 왠지 모를 민망함이 몰려와 먼저 휙 눈을 피해버렸다. 그런 나를 더 민망하라고 뚫어져라 쳐다보던 신혜성이 들고 있던 캔맥주를 내려놓더니 휙 내 앞으로 고개를 내민다. 놀라서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더니 이젠 갑자기 내 머리를 아래로 잡아 누른다. 힘에 밀려 어정쩡하게 옆으로 누운 상태가 되어 신혜성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게 되자,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급격히 부끄러워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래. 일어나려고 했더니 녀석이 제대로 누우라며 머리를 누른 손을 치울 생각을 않는다.


“왜. 뭐하는 건데.”

“빨랑 제대로 누워봐. 내 다리 베고.”


남자 둘이서 한강변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뭐하는 건가 싶은데 자기 말대로 안하면 안 놔줄 것 같아서 결국 몸만 돌려서 제대로 누웠다. 그제야 손을 치운 신혜성은 내 모자를 벗겨 눈 위까지 살짝 덮도록 얹어준다. 설마 여기서 자라고 이러는 거냐.


“너 지금 눈 완전 토끼눈이야.”

“…….”

“또 잠 못 잤을 거잖아. 눈만 봐도 피곤해 보이는구만. 눈 조금만 붙여.”


역시 척하면 척이라 내 눈만 보고도 요즘의 상태를 진단해낸다. 자라고 해주는 건 고마운데 지금 네 허벅지 베고 여기서 자라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남들 눈에 우리가 얼마나 웃기게 보일지 상상해본다. 벤치나 돗자리에 남녀가 무릎베개 해주고 누워있는 건 봤어도 남자 둘이서 신문지 깔아놓고 잔디밭에 누워있는 모습이라니. 지나가면서 한 번쯤은 돌아볼 광경이다. 애초에 남자들끼리 한강 오는 건 한 잔 하러 오는 거 아니면 자전거 타러 오는 거, 운동하러 오는 거 말곤 다른 목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분명한 건 특이한 경우 아니곤 남자들끼리 피크닉 하러 오진 않을 거다. 그리고 확신하는데 서로 무릎 빌려주면서 누워있는 경우는 더더욱 없을 거다.

일어날까 생각했지만 베고 누운 신혜성의 다리가 꽤나 편안해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 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머릿속이 이미 알 수 없는 생각들로 포화상태에 신혜성 때문에 가슴도 평소보다 빠르게 쿵쾅대는데 거기에 다른 것들까지 끼워 넣을 자리가 없다.


“그럼 나 딱 15분만.”

“오케이.”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하긴 피곤하니까. 눈이라도 감고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아서 15분만 그러고 있기로 했다. 다행이도 오늘 강바람이 그렇게 쌩쌩 불진 않는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팔짱을 낀 채 누워서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는 신혜성의 목이 꿀렁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저만치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소리, 다리 위로 지나가는 차들 소리. 이런 저런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지만 어느 순간 주변이 고요하게 느껴지더니 남은 건 내 심장 소리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신혜성의 소리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소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진 않을 테니.

집에선 밤새 눈을 감고 있어도 오지 않던 잠이 어째서인지 2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솔솔 몰려오기 시작한다. 진짜로 잘 거냐, 이민우? 스스로 어이가 없어 묻는데 이미 반쯤은 잠이 든 건지 점점 정신이 몽롱해진다. 내게 신혜성은 아무래도 그런 존재인가 보다. 며칠간의 불면증을 없애줄 만큼 편히 기댈 수 있으면서도, 무릎을 베고 눕는 순간부터 내내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

 

그래서 내가 널 아직도 놓지 못하나보다.

 


* * *

 


“또 혜성이 만나러 나가?”

“응.”

“아주 둘이 사겨라, 사겨. 너네 그러다가 결혼해서도 옆집에 살겠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또 신혜성 만나러 간다니까 핀잔을 주는 엄마에게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 신혜성은 몰라도 나는 결혼 할 일이 없을 텐데. 엄마 미안. 이럴 때마다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엄마랑 살건데?’ 하면 엄마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심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신혜성이랑 어울리는 것도 말만 저렇게 하지 사실 녀석한테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 내가 힘들 때 신혜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엄마도 잘 알고 있어서 그럴 거다. 만날 신혜성이랑만 노냐고 핀잔을 주긴 해도 녀석이 놀러오면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이 달라지는 걸.

맛있는 거나 사먹으라고 용돈까지 쥐어준 엄마에게 사랑의 하트를 날리고 발걸음 가볍게 집을 나섰다. 내 기분 풀어준다고 한강에서 만났던 날, 한강 둔치에서 15분만 잔다던 게 30분은 넘게 잔 덕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신혜성이 결국 다리가 저려 날 깨웠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해서 그러게 15분 뒤에 바로 깨우지 왜 놔뒀냐고 내가 더 큰소리 내긴 했지만. 신혜성은 몸 바쳐 베개까지 돼줬으니 너도 뭘 내놓으라며 손을 내밀었다. 뭘 달라고! 괜히 버럭 거리는 나에게 보고 싶었던 영화가 개봉하니 그거나 보여주라고 구체적으로 딜을 하는 신혜성은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해놓는 저 치밀한 새끼.


어쨌거나 개봉 날 저녁 때 보자는 신혜성 말에 맞춰 예매해두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도로 나가는 길이었다. 그냥 학교 끝나고 다른 데서 시간 좀 때우다가 만나러 갔어도 되는데 왜 굳이 집에 들렀다 가냐 하면…. 옷을 너무 춥게 입고 와서 갈아입으러 왔다고 엄마한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신경 써서 입고 싶었던 것 같다. 신혜성한테 잘 보일 게 뭐 있다고. 잘 보인다고 신혜성이 나를 다르게 볼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썸타는 남녀 데이트도 아니고. 그저 친구 둘이서 평소 했던 것처럼 영화 보러 가는 것뿐인데 나도 참 답이 없다. 그렇게 신혜성이 좋나?

만나기로 한 영화관 앞을 서성거리며 기다리는데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사이로 신혜성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갑자기 괜히 옷을 갈아입었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걸치고 있던 야상을 여미며 최대한 안의 옷을 가리려 했으나 이미 신혜성도 내 옷을 본 후였다.


“어? 우리 옷 똑같다.”

“…그러네.”

“커플 티다, 커플 티.”


그걸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말아줄래. 하필 오늘 신혜성도 이 옷을 입고 올 건 또 뭐야. 신혜성이 입은 옷은 내가 녀석의 생일 선물로 사준 맨투맨 티였다. 그리고 내가 입은 옷도 녀석의 옷과 같이 내가 산 거였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커플 티가 맞긴 맞았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만 약간 다른 옷이었고, 신혜성에게 나도 이 옷을 샀단 말은 안 하고 선물했던 거였다.

형제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똑같은 옷 맞춰 입고 영화 보러 온 남자 둘. 의도치 않게 자꾸 이상한 상황이 생긴다. 남들이 보면 쟤네 뭔가 싶을. 신경 쓰이는 나와 달리 신혜성은 역시나 아무 생각 없는지 들어가자며 혼자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래, 누가 우리 옷을 신경 쓴다고. 나도 쓸데없는 데에서 소심해지는 것 같다니까.

 

예매해둔 표를 인쇄하고 팝콘을 사고 있겠다던 신혜성 곁으로 다가서는데, 카운터에 팔을 걸치고 서있는 녀석의 얼굴이 어쩐지 평소랑은 다르다. 그러고 보니 영화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말 한마디 없었고. 자기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으니 원래라면 영화에 대해 나한테 주절주절 떠들었을 신혜성인데. 얼굴이 썩 좋아보이진 않아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금세 웃으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한테 음료 하나를 내밀더니 팝콘을 들고 영화관 쪽으로 걸어간다. 저거 아무래도 이상한데.


“너 진짜 어디 아파?”

“아니라니까. 왜 그러는데.”

“얼굴이 영….”

“내 얼굴이 왜. 나는 늘 잘생겼는데.”

“…말을 말자.”


지가 잘생긴 건 알아요, 또. 재수 없지만 반박할 수 없기에 그냥 나도 앞을 보고 앉았다. 은근히 식탐이 강해 광고가 나오는 동안 팝콘 3분의 1은 혼자 해치우던 녀석이 오늘은 팝콘에 손도 안대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이상하긴 한데. 자기가 아니라는데 계속 묻기도 그렇다. 실내가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내내 앞만 보고 조용히 있는 신혜성이 수상하긴 했지만 나도 그냥 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화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신혜성을 흘깃거리는 것도 그만두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어깨에 툭, 기대오는 신혜성의 머리에 놀라 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갔다. 이건 또 뭐야? 왜 이래? 하고 고개를 살짝 돌려 신혜성을 보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눈을 감고 더운 숨만 작게 내쉬고 있다. 슬쩍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더니 식은땀까지 났다. 열도 나고. 어쩐지 계속 이상하더라니. 이 미련한 새끼가. 아프면 아프다고 했어야지.

데리고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어깨에 더 편히 기대도록 몸을 신혜성 쪽으로 살짝 틀었다. 지금 데리고 나가면 영화 보는 사람들한테도 피해를 줄 것 같고, 이 기다란 놈을 당장 어디로 데리고 갈 곳도 없었다. 영화 끝날 때까지 그냥 여기서 편히 쉬는 게 나을 듯싶었다. 만날 때부터 별로였던 걸 보면 집에서 나올 때 이미 자기 상태를 알았을 텐데. 그냥 약속 취소하고 나중에 보자 해도 됐을 것을 미련하게 여기까지 나와서 더 악화시키는지. 개봉하기만을 기다려온 영화를 보러 와서 내내 내 어깨에 기대 잘 정도로 상태가 안 좋으면서 말이다.


신혜성이 아픈 게 싫어서 나도 괜히 툴툴 대는 거지 아픈데도 굳이 기어 나온 신혜성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마 나도 그랬을 거라서. 나도 진짜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면 신혜성과의 약속을 깨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나왔을 거였다. 물론 나는 ‘신혜성과의 약속’이라서 이고, 신혜성은 ‘내 제일 친한 친구’와의 약속이기 때문이지만. 결국 그 뒤론 영화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신혜성만 보다가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몸을 살짝 흔들자 천천히 눈을 뜬 신혜성은 영화가 끝난 걸 보곤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 계속 잤어?”

“어. 야 인마, 아프면 말을 하지. 왜 자꾸 아무 것도 아니래.”

“…갑자기 상태가 확 안 좋아져서 그런 거야. 진짜 괜찮았어.”

“그냥 별로면 집에 있을 것이지. 굳이 보겠다고 나와선 이게 뭐냐.”


걱정돼서 더 틱틱대게 된다. 신혜성을 부축하듯 어깨동무를 하고 영화관을 나서며 참았던 구박을 쏟아냈다. 그 구박이 걱정이라는 걸 아는 신혜성은 내 틱틱거림에도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자고 한 건데 취소하기 미안하잖아. 너도 영화 제대로 못 봤지? 나중에 내가 다시 보여줄게. 미안.”


그러니까 이런 소리나 하고 있지.


“됐어.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가서 빨리 쉬기나 해.”


아픈 게 자기 잘못도 아니고. 미안할 것도 많다, 신혜성은.

사람 많은 영화관 앞에서 겨우 택시를 잡아 신혜성을 먼저 밀어 넣었다. 머리만 대면 눈부터 감기는 신혜성을 대신해 알아서 주소를 말하고 집으로 향하며 괜히 속상해진다. 나 때문이 아닌 걸 알지만 나 때문에 밖에 나와서 더 아픈 것 같아서. 나도 신혜성도 서로에게 미안해 할 일이 아닌데. 왜 미안해지지.

집 앞에 도착하고 아까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진 신혜성은 이제 거의 나한테 기대다시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취방에 들어서자 겨우겨우 신발을 벗고 흐느적거리며 침대로 걸어간 신혜성은 겉옷도 안 벗고 그대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한테 잘 가라 마라 인사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몸살인 것 같으니 약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서 구급상자를 뒤지는데 사다놓은 건 다 먹은 모양이다.


“신혜……. 아니다.”


약 좀 사오겠다고 말하려는데 이미 뻗었는지 미동도 없다. 발소리도, 문을 닫는 것도 조심스러워져서 최대한 소리를 줄여 나왔다. 약국 갔다가 죽도 좀 사다놔야겠다 생각하며 걷는데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신혜성이 무슨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다. 지나가는 몸살이면 어차피 약 먹고 하루 푹 자면 어느 정도 떨어질 텐데. 응급환자라도 된 것 마냥 뛰어다니며 약을 사고, 죽을 사고 하는지…. 신혜성 미련하다고 욕할 게 아니다. 미련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을 짝사랑을 몇 년이나 하고 있는 이민우가 여기 있는데. 어우,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미련하다. 네가 아무리 신혜성한테 잘해도 너는 신혜성한테 절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그걸 알면서 왜 그러냐, 이민우….


이제와 내 마음 탓해서 뭐하나 싶다. 이젠 그럴 때도 지났지, 뭐. 나올 때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발소리도 죽이고 신혜성 곁으로 다가갔다. 깨워서 약이라도 먹고 자라고 하고 싶은데 괜히 잘 자는 사람 깨우기도 그래서 옆에 약이랑 죽 봉투를 내려놨다. 이거 말곤 이제 더 해줄 것도 없는데. 내가 옆에 있는다고 뭐 빨리 낫는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 물 한잔 떠다놓곤 현관으로 발을 돌렸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책상에 널려있던 종이 하나를 집어 ‘죽 먹고 약 꼭 먹어.’ 라고 꾹꾹 눌러썼다. 침대 옆 서랍 위에 종이를 올려놓곤 잠시 멍하니 서서 신혜성을 내려다봤다. 십 년 넘게 보아온 익숙한 얼굴을 다시 기억에 새기듯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야 돌아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마 종이에 다 적지 못한 말들을 가슴에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나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무겁단 말이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처럼 떠나지 않도록.

 

 



* * *

 

 

 

 

나는 신혜성과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날 때 웬만해선 항상 10분 먼저 나가있는 편이었다. 만나기로 한 곳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 그 주변에 숨어서 신혜성을 기다렸다. 그리고 신혜성이 도착해서 날 기다리는 걸 지켜보곤 했다. 어떻게 보면 좀 변태 같거나 무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 내 짝사랑의 버팀목이었다. 나를 기다리며 핸드폰도 보고 시계도 보고, 가끔은 머리도 매만지는 신혜성의 모습들을 보는 게. 신혜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자체가 나한테는 설레는 일이었다.

별거에 다 설렌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원래 짝사랑이든 연애든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고 설레는 일인데. 지켜보다 한 5분 늦게 도착한척 나타나면 신혜성은 맨날 늦냐고 면박을 주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신혜성이 나를 보는 눈에서 다른 감정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녀석은 누군가를 볼 때 누가됐든 설렐 정도로 참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라 나도 가끔은 그 눈길을 받으며 착각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더 그런 착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건 신혜성이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귄 적 없는 이른바 모태 솔로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인 나도 몇 년을 좋아하게 만들 만큼 멀쩡한 녀석이 스물다섯 해 동안 솔로인 건 오로지 본인의 의지였다. 중고등학교 때 고백을 받는 걸 본 것만 해도 열 번이 넘었고 가끔 같이 다니다보면 헌팅을 당하거나 번호를 따러 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매번 거절이었다. 같이 있던 나야 당연히 여자한텐 관심이 없으니 거절이었고. 다른 친구들이 넌 왜 연애를 안 하냐고 물어보면 신혜성의 대답은 간단했다. 별로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어찌 보면 재수 없게 여유가 넘치고 가장 솔직한 대답. 신입생 때도 선배들이 억지로 끼워 넣은 미팅이 아니고서는 소개팅이든 미팅이든 나가는 법이 없었다. 나도 가끔 궁금해서 물어보면 신혜성은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다는 몹시 어린애 같은 대답을 내놨었다. 나한테는 다행인 말이었지만.

 


신혜성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예 내 성향 자체가 남자한테만 끌리는 게이란 게 확실해진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난 남자가 드글드글한 공대에 갔고 간혹 가다 신혜성과 비슷한 체격을 가졌거나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내가 여자를 만나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나도 모쏠인 줄 아는 친구들―여기엔 신혜성도 포함이다―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연애도 했었다. 어떻게 신혜성을 짝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이랑 사귈 수가 있었냐! 라고 따지고들 사람은 없겠지만 스스로 해명하자면 그랬다. 사람 마음이 한평생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오랫동안 신혜성을 짝사랑했고 그건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렇다고 신혜성에게만 모든 걸 다 바치는 순정파는 아니었다.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아는데 평생 신혜성만 좋아하다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늙어 죽을 수는 없었다. 나도 혈기왕성한 젊은이인데! 내가 왜! 좋아하는 거와는 별개로 이렇게 평생 모쏠로 내 젊음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물론 연애를 많이 한 건 아니고 해봤자 가벼운 만남 정도였다. 밥 먹고,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같이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그냥 친구랑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그러다 어느 날은 모텔도 가고. 첫 동정을 뗀 날은 좋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꿈에서 상상해봤던 건 신혜성과의 첫 키스, 신혜성과의 첫 섹스였지만 그건 진짜 꿈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처음이 신혜성이 아니라 엄청나게 좋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은 다른 데 가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살을 맞대고 있는 게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 파트너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남자와 자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울기도 했던 것 같다. 마음은 온통 신혜성에게 줘놓고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고, 다른 사람이랑 자는 내가 못됐지만 불쌍해서.


신혜성을 생각하며 처음 몽정을 하던 날은 어땠더라. 아마 지금보다 더 혈기왕성했을지도 모를 낭랑 18세 시절. 신혜성을 좋아 한다 자각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점점 더 신경 쓰이고, 나름 내적 갈등과 방황도 많이 했었다. 일단 신혜성에게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내겐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혜성은 그때에도 어찌나 뚝심 있는지 지금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각자 친한 무리를 형성해나가면서도 항상 ‘가장 친한 친구’ 자리는 서로의 것이었다. 붙어 다니는 건 변함없었단 소리다. 신혜성에게서 느끼는 것이 우정이 아니라 연정임을 깨달은 그 시점이후 어느 날 부턴가 신혜성의 별거 아닌 스킨십에 흠칫하는 일이 늘어났고, 최대한 티를 안내려 했지만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어느 포인트에 집중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 포인트가 무엇이냐-하면 이민우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혜성 3종 세트 정도 됐는데, 첫 번째는 신혜성의 섬섬옥수 같은 손…이 아니라 그 손까지 뻗어나가는 핏줄이었다. 팔뚝에 솟은 핏줄. 당시의 신혜성은 마른 주제에 팔뚝은 꽤 단단해보였다. 말라서 핏줄이 보이는 게 아니라 힘을 주거나 물건을 들 때 힘이 들어가면 솟는 핏줄이었다. 근육이 울룩불룩하고 까맣고 섹시하게 탄 팔뚝도 아니고, 그냥 하얀 팔뚝 위로 솟는 거였는데 거기에 왜 그렇게 눈이 갔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휜 거 없이 곧은 손가락과 커다란 손은 신혜성의 얼굴만큼이나 단정해서 어쩌면 팔뚝에 더 시선이 갔는지도.


팔뚝 말고 나머지 두 가지는 키가 훌쩍 자라버린 탓에 바지 아래로 튀어나온 신혜성의 복숭아 뼈와 길고 얇은 목 덕분에 움직임이 더 잘 보이는 목울대였다. 그냥 내가 그런 거에 꽂히는 타입인가 했는데 다른 애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신혜성한테만 그랬던 걸 보면 이민우를 자극하는 포인트는 맞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면 나도 모르게 계속 신혜성의 포인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은 적도 있었다. 그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 어느 날 밤은 결국 신혜성 꿈까지 꿨었다.

‘아…. 하지 마….’

‘뭘 하지 마. 이렇게 흥분했는데.’

꿈속의 신혜성은 현실에선 상상 못할 정도로 낮고 섹시한 저음으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커다란 손은 내 바지 안에 들어가 있었고, 신혜성의 손에서 흔들리는 내 페니스는 이미 완전히 발기 상태였다. 내 거시기를 쥐고 흔드느라 핏줄이 선 신혜성의 팔뚝이 그렇게 흥분될 수가 없었다. 신혜성에게 매달리듯 목을 껴안고 있던 나는 어느새 신혜성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분위기에 한껏 취해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뀐 장면에선 홀딱 벗은 내 몸 위에 올라탄 신혜성이 자기 페니스와 내 페니스를 한꺼번에 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 게이들은 거기로 섹스를 한다는 말만 들어봤지 야동을 봤다거나 상상을 해봤을 리 만무했던 나한테 꿈속에서 펼쳐진 영상은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그 흥분도 어마어마했다. 웬만한 야동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언제 사정했는지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축축해지고 몸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나는 눈을 떴다. 내 거시기를 주무르던 신혜성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였다. 찝찝한 팬티만 남아있을 뿐.


‘민우야!’

‘…엉. 왔냐.’

‘뭐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

‘……큰일을 치렀더니.’

‘큰일?’

‘그런 게 있다.’


나 혼자만의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니 신혜성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새벽에 몰래 팬티를 빨며 자괴감도 들었지만 솔직히 다시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자기 친구를 반찬 삼아 그런 꿈을 꾸고 사정까지 했으면 양심에 찔려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볼 텐데. 늘 등교를 같이 하는 사이에 갑자기 쌩을 까며 피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신혜성만 보면 미안해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생각만 했지 언제 신혜성한테 이걸 드러내거나 말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새벽에 팬티를 빨아놓고 신혜성을 한 번 더 반찬으로 써먹으며 마스터베이션을 하고도 뻔뻔하게 굴었다. 물론 신혜성의 웃는 얼굴을 볼 때면 가끔 아주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더라. 어느새 7년은 된 일이다. 그 뒤로도 신혜성이 내 마스터베이션의 주인공이 됨은 물론이오, 게이 야동의 신세계를 알고 난 이후엔 아예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하다 꿈에서 진짜로 떡을 쳤던 적도 있었다. 신혜성이 알면 기절초풍하겠지. 그때 다짐했을 거다. 혹여 신혜성한테 고백하는 날이 오더라도 이 사실만은 평생 함구하며 살아가겠다고. 만나는 사람이 있을 땐 거의 안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혜성이 내 반찬이란 사실 역시 절대, 절대 말할 일은 없을 거다.

 



 

“민우야.”

“…어.”


나도 모르게 또 넋을 놓고 신혜성 손이나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녀석의 부름에 좀 놀라긴 했지만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혹여 신혜성이 내가 저를 보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던 걸 알아채지 않도록.


“요즘 용화한테 연락 와?”

“엉? 아니. 그러고 보니까 맛나에서 본 이후로 술 먹자고 안 불러내네. 내가 주연이랑 헤어진 거 아니면 연락하지 말랬거든.”

“하하, 구용화 그런 건 말 잘 듣는다.”


웃으면서 시간을 확인하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신혜성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만나고 나서 유난히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본다. 워낙에 스타일 자체가 핸드폰을 항상 손에 쥐고 있는 타입이 아니라 내버려두는 타입인데. 저렇게 신혜성 손에 핸드폰이 계속 들려있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남자들 취미치곤 그다지 흔하지는 않은 취미를 신혜성과 나는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도 그 취미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디저트라는 걸 굳이 따로 챙겨먹지 않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나 찾아서 올법한 디저트 카페를 가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녀석이나 나나 일단 비주얼이 좋아야 손도 가는 스타일이라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사진까지 보고나서 직접 먹으러 찾아다니는 게 취미였다. 디저트 말고도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 역시 소소한 낙이라면 낙이었다. 쿠는 도저히 사내새끼들끼리 이건 못하겠다며 한 번 꼈다가 바로 빠졌다. 자기는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여자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거무죽죽한 남자 셋이 있는 풍경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며. 아무튼 오늘도 같이 페이스북에서 보자마자 여기 가보자며 벼르고 있던 케익 전문점에 왔는데…. 남자의 촉인지 게이의 촉인지는 모르겠으나 느낌이 좋지가 않다. 평소랑 뭔가가 다른데 뭐가 다른지 모르겠단 말이지.


“민우야.”

“엉.”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이름을 많이 부르는지 모르겠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간지러웠지만, 순간 이 다음 말이 뭘까 초조해졌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은 없었는데.


“사실 오늘 할 말이 좀 있는데….”

“말해. 뭔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사실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왠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 신혜성이 입을 열려는 타이밍에 누군가 우리 테이블 옆에 다가섰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돌린 내 눈에 청순하다는 말이 잘 어울릴법한 여자가 들어왔다. 긴 웨이브의 머리에 한 눈에 봐도 말랐지만 그렇다고 빈약한 건 또 아닌. 내가 여자였다면 부러웠을 법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서있었다. 분위기부터가 나 여자예요- 하면서 한껏 여성성을 풍기고 있었다. 또 번호라도 따러왔나 싶어서 관심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는데 내 앞에 앉은 신혜성의 얼굴은 어째 그 여자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 건. 이 자리를 무조건 피해야 할 것만 같았던 게.


“나 잠깐….”

“민우야. 사실 오기 전에 말하고 싶었는데….”

“…….”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손을 잡아끌더니 제 옆으로 오게 한 신혜성은 나를 내려다보며 수줍은 듯 웃었다. 마치 나한테 처음 말을 걸던 그때처럼. 내 이름을 부르던 그때처럼. 나는 그저 내 앞에 선 두 남녀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여긴 권하림. 하림이야.”


결국 내가 걱정했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신혜성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는 순간…. 이 아니라 내가 이 짝사랑을 끝내야 하는 순간.

 


 

지금까지 신혜성이 고백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녀석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예상하면서도 불안했다. 신혜성이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귄다 하더라도, 그리고 신혜성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더라도 내겐 그 마음을 방해하거나 원망할 자격도 권리도 없었다. 내가 녀석을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해서 신혜성이 나한테 상처 주지 말아야 한다며 배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한 번도 밖으로 꺼내놓은 적 없는, 나 혼자만 아는 마음을 가지고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며 신혜성에게 따질 자격 같은 건 내게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았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좋아한 건데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할 수 있었을까. 혼자 한 사랑을 보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젠간 신혜성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사귀는 사람이 생기겠지. 신혜성이 불감증도 아니고 언젠간 분명 녀석도 친구보다 여자친구랑 알콩달콩 노는 게 재밌을 때가 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하더라도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니 준비할 수는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당장 그 상황이 닥친 게 아니니 그걸 보면서도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신혜성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지내긴 힘들 테니, 자주 만나기 어려울 테니 나도 조금씩 마음 정리를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했었다.


생각만 하던 것이 막상 현실로 닥치니 아무래도 조금씩 접는 게 아니라 끝내야한다는 걸로 결론이 난다. 이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민우야.”

“…어.”

“놀랐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신혜성이 자기 입으로 제일 좋아하고, 제일 친한 친구라고 내 소개까지 하고 서로 인사한 다음 자리에 앉았지만 이젠 앞에 있는 맛있는 케익을 보면서도 입맛이 떨어진다. 나란히 앉아있는 신혜성과 여자친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콕콕 쑤셨다. 저릿한 것 같기도 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 여러 느낌으로 오고 있는 듯했다. 마치 옛 연인의 현재 애인을 소개 받는 기분 같기도 하고. 내가 한때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이,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짝사랑 주제에 무슨. 네가 그런 기분이 왜 드냐. 어이없네, 이민우.


“어…좀 놀랐지.”

“괜히 소개부터 시켰나? 말하고 나중에 소개시켜줄 걸 그랬나?”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죄송해요 오빠….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제가 혜성오빠한테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졸랐거든요.”


하림이라고 했던가. 처음 보는 나한테도 싹싹하게 잘 대한다. 청순한 스타일이라 생각했는데 웃는 얼굴은 귀엽다. 그래, 신혜성 스타일이 이런 거였구나. 이런 여자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네. 알아봤자 뭐하냐. 이제 신혜성에 대해 뭘 더 알든 나한텐 별 보탬이 안 되는 걸.

보통 절친이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줬다면 아마 이것저것 물었을 거다. 거기다 친구의 첫 여자친구라면 더. 어떻게 만났냐, 만나지 얼마나 됐냐, 혜성이 어디가 좋냐 등등등 아마 더 들떠서 물어봤어야 정상인 것 같은데. 쿠라면 그랬을 거다. 지금쯤 호구조사까지 들어갔을지도. 부모님은 뭐하시냐, 형제는 몇이냐, 어디에 사냐- 하면서. 그러고 보니 쿠가 알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드디어 신혜성이 모쏠에서 탈출했다며. 나에게 전화해서 신혜성도 제 임 찾아 떠나가는데 넌 뭐하냐며 닦달을 했을 거였다. 자기가 아는 게이는 없으니 차마 소개를 시켜주진 못하겠고, 어쨌든 나가서 좀 놀고 애인도 만들라며 우리 엄마도 안 하는 걱정을 하고 있을 용화였다.


“죄송해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예요.”

“괜히 제가 불편하게 만들어드렸나 해서….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그리고 오빠, 말 편하게 하세요.”


오늘 처음 만났고, 아직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을 편하게 하냐. 나도 넉살 좋고 친화력 좋다는 얘긴 많이 듣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부담스럽게 들이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편하게 하라고 한다고 그 사람이 날 편하게 느끼는 것도 아닌걸. 그 말을 들으니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지금 내 맘이 온통 베베 꼬여서 그런 걸까. 하긴 짝사랑한 기간만 몇 년인데 멀쩡한 것도 이상하다. 난 사실 내가 지금 여기서 버티고 잘 앉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신혜성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는데.


“근데 오빠 진짜 용화오빠 말대로 잘생기셨어요.”

“…용화 만났어요?”

“아, 사실 하림이 소개시켜준 게 용화였어.”

“…….”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나한테 말도 안하고 소개팅 주선했더라고.”


와― 이씨. 이 개새끼. 구용화 이 새끼가 원인이었구나.

순간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겨우 삼켰다. 제대 이후 신혜성한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 노래를 부르던 새끼가 요새는 좀 잠잠하다 했는데. 신혜성이 워낙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소개팅 자리라 하면 안 나올걸 아니까 아예 위장을 했나보다. 이게 전부 구용화 탓 같아서 화가 나고 속이 뜨끈뜨끈하다. 맹물을 한 컵 다 비우고 나니 금세 그 불이 꺼졌는지 이젠 속이 허하고 비어버린 것 같다.


사실 누구한테도 화를 낼 수 없었다. 화낼 자격도 없었다. 용화는 내가 신혜성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소개팅을 시켜줬을 뿐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그럴 놈이 아니었다. 그저 쿠는 모쏠인 친구를 안타까워하는 오지랖 넓은 놈일 뿐이었다. 그리고 소개팅은 나서서 시켜줬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신혜성이 상대랑 잘 맞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고 소개팅 한다고 다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저 둘이 사귀게 된 건 구용화의 뜻이 아니라 신혜성의 뜻이라는 소리다. 선택한 건 신혜성이었다. 바로 그 사실에 더 화를 낼 수 없다. 신혜성이 나 아닌 누군가를 택한다 해서, 누군가를 보며 웃는다 해서 내가 화를 내거나 원망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실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밖에 안되긴 했는데…. 그래도 너한텐 가장 먼저 말하고 싶어서.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고. 용화는 소개시켜준 거니까 빼고.”

“……그래.”


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도저히 멀쩡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가질 못하겠다. 나름 그동안 숨기기도 기가 막히게 잘 숨겼고, 신혜성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거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생리적 현상마저, 본능마저 제어할 줄 알았던 이민우였는데 이 상황에선 내 마음을 속이질 못하겠다. 솔직히 너무 힘들다.

사귄 지 일주일밖에 안됐고, 용화가 소개팅 해줬다고 한 게 언젠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간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한 게 왠지 서운하기도 하다. 짝사랑하는 입장에선 차라리 계속 몰랐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지만. 친구로서 서운한 마음과 이젠 더 이상 품지도 말아야 할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씁쓸함 등이 뒤섞여 나도 이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근데 진짜 혜성오빠 그동안 여자친구 한 번도 안 사귀었어요? 용화오빠도 그러고 오빠도 그러긴 하는데, 저 솔직히 안 믿었거든요.”

“뭐…. 맞아요. 하림씨가 첫 여자친구.”

“진짜구나…. 용화오빠한테 그 말 듣고 나서 오빠한테 고백할 때 그래서 좀 망설여졌거든요. 오빠가 과연 받아줄까 해서.”


여자 쪽에서 먼저 고백했나보다. 그래, 신혜성한테는 빈번한 일이긴 하지.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었지만. 내가 신혜성과 알고지낸 12년의 시간만 봐도 고백을 받아주는 일도, 고백을 하는 일도 없었는데. 게다가 몇 번 만나고 사귀는 건 좀 별로라던 신혜성이 아니었던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녀석이 고백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만큼 저 여자가 정말로 좋았다는 거겠지.

 

“민우야, 저녁 뭐 먹을래?”


둘을 보며 앉아있는 게 그동안 혼자 짝사랑해왔던 시간보다 더 힘들다고 느껴졌던 자리였다. 자꾸 뭔가 묻고 말을 시키는 둘한테 꾸역꾸역 대답을 해주며 겨우 버티고 밖으로 나왔더니 신혜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뭘 먹겠냐고 묻는다. 옆의 여자친구를 보니 갈 생각은 없어 보이고. 그럼 지금 또 나보고 셋이 같이 가자는 말인가.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놈으로 보이냐. 데이트 하는 남녀사이에 껴서 밥까지 같이 먹고 있게.


“아냐. 나는 먼저 갈게.”

“왜요, 오빠. 같이 저녁 먹어요.”

“아까 먹은 거 얹혔는지 속이 좀 매스꺼워서. 혜성아, 나중에 보자. 하림씨 나중에 봐요.”

“민우야! 이민우!”


신혜성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도망치듯 뒤돌아서 앞만 보고 걸었다. 걷다가 또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고 있을 신혜성이 마음에 걸려 멈춰 서 뒤를 돌아봤다. 난 괜찮으니 가라고 손이라도 흔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돌아선 내 눈에 보이는 건 두 남녀의 등이었다. 무슨 얘길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란히 걸으면서 여자는 올려다보고, 남자는 내려다보는 그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 정말 바라봐서도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 같으면 내가 속이 아프다고 먼저 가버렸으면 괜찮냐고 계속 귀찮게 물으며 따라왔을 녀석인데. 이제 신혜성한테 나는 완벽하게 정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다시 돌아서서 뭔가 울컥 차오르는 걸 참고 열심히 걷기만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정류장을 네 개는 지나쳤을 즈음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맨 뒷자리에 앉아 어느새 해가 제 모습을 거의 다 감춘 하늘을 보다 멍하니 빠르게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데, 겨우 눌러놨던 것이 다시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다. 진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아예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까만 눈앞으로 신혜성의 등이 새겨진다. 왜 이렇게 고백했다 차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구질구질하게.


생각해보면 이게 내 첫 실연이긴 하다. 한 번도 내 마음을 고백해본 적 없었기에, 그동안은 실연을 당할 일도 없었다. 표현을 한 적이 없으니 거절을 당할 일도 없었는데. 고백 한 적도 없지만, 이건 말로 하거나 표정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거절이었다. 나는 너랑 잘 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이제 나를 넘보지 말라는. 신혜성과 이민우 사이에는 요만큼의 가능성조차도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거절이었다. 어차피 뭘 바라고 한 짝사랑은 아니었어도 이젠 그 마음도 포기하고 그만 접으라는 뜻이니 나에겐 실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신혜성이 사귀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내가 표현하거나 티만 내지 않으면 계속 신혜성을 좋아하는 건 자유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후…….”


우는 소리는 낼 수 없다고 그냥 한숨을 내쉰 거였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터졌는지 모를 눈물이 감은 눈 사이로 줄줄 새고 있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눈물을 수습해봤지만 역부족이다. 나도 내가 진짜 울 줄은 몰랐는데. 힘들긴 힘든 가보다. 이런 거구나 실연이란 게.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고백이라도 하고 실연당한 거면 차라리 속이라도 후련했을까? 아니지. 그랬으면 난 친구도 하나 잃게 되는 건데. 사랑이 끝나고 친구도 잃었으면 지금보다 더한 좌절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신혜성이 나를 찬 것도 아니고, 나를 배신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내가 녀석에게 느끼는 감정을 종합해서 한마디 하자면….


“나쁜 새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작게 읊조린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나쁜 새끼라고. 친구인 나한테 어장관리를 한 것도 아니었고 신혜성이 나를 가지고 논 것도 아니지만 그동안 나와 신혜성이 함께 했던 시간을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기대하거나 착각하고 싶게 만드는 일 투성이었다. 그래놓고 소개팅 한 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사귀기 전까지 못해도 3번은 만났을 텐데 그동안 아무 말 않고 티도 안 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신혜성과 하하 호호 거리고 있었는데. 신혜성을 원망할 생각은 없지만 오늘 만큼은, 아니 지금 만큼은 녀석을 욕하며 울기라도 해야겠다. 그러지 않고선 그간 고생했던 이 마음을 달래줄 길이 없다.

언젠가 이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 클 거라고는 예상 못했었다. 짝사랑의 느낌마저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모든 게 내 착각이었구나. 착각 투성이. 오늘까지만, 딱 오늘까지만 울고 그 다음은 나중에 생각해야지. 지금은 내 마음 달래기도 버거우니까.

 

계속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힘들어도 좀 참아봐. 좀만 더 버티자.

그럼 편해질 날도 오겠지. 언젠가는.

 

나도 이민우처럼 열심히 나를 바라봐 줄 누군가를 만날 날이 오지 않겠어? 이젠 꿈에서라도 그게 신혜성이길 바랄 수는 없지만.

 

 


* * *

 


 

사랑이 끝난 뒤 그 여파가 바로 몰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남자의 경우 대부분이 처음엔 실감이 잘 안 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별이란 것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쫙 밀려온다고 한다. 뭐,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짝사랑도 어쨌거나 사랑이긴 해서 그 여파가 없을 수는 없었다. 신혜성에게서 녀석 25년 인생의 첫 여자친구를 소개받은 날. 그날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찔끔찔끔 눈물을 흘려보내고 나니 그래도 속에 몇 년간 꽁꽁 묵혀왔던 것은 어느 정도 내보낸 것 같아서 차라리 좀 낫긴 했었다. 그 다음날부턴 눈물은 안 나왔다. 그냥 신혜성이 연락을 할 때마다 흠칫하게 되고 울컥하긴 했어도. 물론 눈물이 안 나온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한 번 실컷 울었다고 해서 모든 게 싹 다 잊혀질 정도의 마음은 아니었으니까.

이성 끼리든 동성 끼리든 친구사이에 고백을 하기 망설여지는 건 마찬가지일 거다. 고백을 해서 잘 돼도 그게 영원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나중에 헤어지면 결국 우정도 사랑도 잃게 되고, 차이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사이가 이상해진다. 안 볼 수도 없는 사이이면 더욱. 쿨하게 잊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친구로 지내자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서로 애인이 생기면 모를까. 마음속엔 은근히 불편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끔가다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민우 너 삐졌냐?”

“뭔 개소리. 내가 삐질 일이 뭐가 있는데.”


나 혼자서 앞으로 조금씩 마음 정리를 해가자고, 정말 친구로만 신혜성을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고 다짐까지 했지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게 아니었다. 고백하려고 맘 먹어본 적도 없었건만. 강제로 사랑을 끝내고 친구로만 지내자고 하니 요놈의 마음이 주인의 말을 듣질 않는다. 언제 내 뜻대로 움직였던 적도 없지만.

쿠의 말에 얼음을 아그작, 아그작 씹다 말고 뭔 소리냐고 눈을 치켜떴더니 녀석이 턱짓으로 옆을 가리킨다. 쿠의 옆엔 내 눈치를 보는 신혜성이 앉아있었다. 신혜성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딴 데를 보며 눈을 돌리고 만다. 그래, 이게 문제라고! 난 실연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를 가슴 아프게 한 그 상대를 피할 수가 없다고! 나는 도대체가 왜 친구를 좋아했을까. 신혜성은 왜 하필 내 절친일까! 왜 남자일까! 아우, 진짜 이런 시발 같은 생각하는 나도 짜증난단 말이야!

귀찮아죽겠는데 자꾸 나오라고 끈질기게 연락을 해대는 쿠 때문에 억지로 끌려나온 거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신혜성도 같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온 건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고, 다 잊고 괜찮아질 때까지 안 볼 수도 없었다.


“너 신혜성 여친 생겨서 지금 삐진 거 아냐?”

“내가 그걸로 왜 삐지는데.”

“신혜성이 혼자 모쏠 탈출해서?”

“날 그렇게 쪼잔한 놈으로 보는 거냐?”

“너 나한테도 삐진 거 아냐? 신혜성만 소개팅 시켜줬다고.”

“이게 점점 나를 쪼잔이 아니라 치졸로 몰아가네.”


용화가 한마디 할 때마다 스팀이 팍팍 오르려는데 그 옆에서 아무 말도 않고 나만 보고 있는 신혜성과 눈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게 된다. 신혜성은 왜 또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걸까. 사람 마음 심란하게.


“너 요즘 연락하면 자꾸 읽씹하고. 나오기 싫다 하잖아. 신혜성한테도 그랬다며.”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니네.”

“민우야.”

“…….”


쿠한테는 따박따박 쏘아붙이던 것이 신혜성이 부르자마자 입을 딱 다물게 된다. 안 그러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아주 동네방네 나 지금 너한테 불편한 거 있어요 소문을 내고 다녀라, 이민우.


“너 혹시 내가 너한테 늦게 말해서 서운해서 그래?”

“…뭘 서운해 했다고 그래 내가.”

“그동안 하림이 만난 것도, 사귀게 된 것도 말 안 해서 섭섭했나 싶어서….”


그러면서 신혜성은 진짜로 미안한 표정을 해 보인다. 그게 왜 미안해 할 일이냐. 나한테 뭐든지 실시간으로 다 말하고 보고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신혜성이 저러니까 내가 진짜 그런 것 때문에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는 못난 놈이 된 것 같다.


“야, 나야 하림이한테 들은 거고. 신혜성이 지 입으로 직접 말한 건 네가 처음인데 그걸 또 서운해 하냐?”

“아니라니까. 내가 언제 서운했다고 그랬냐고. 왜 그렇게 몰아가는데.”

“내가 오해한 거면 미안하긴 한데…. 너 그날, 하림이 만난 날 얼굴도 좀 안 좋고 먼저 가버리고 해서. 난 또 네가 서운했나 싶었지.”


아, 진짜 못났다. 신혜성이 그렇게 죄다 알아챌 정도로 티를 냈나 보다. 이민우 어쩌다 이렇게 못난 놈으로 찍혀버렸냐. 친구가 첫 여자친구 생긴 거 축하는 못해 줄망정 먼저 말 안 해줬다고 서운해 하는 놈이 되어버리다니. 아니라고 하니 구용화는 옆에서 저 새끼 이제 혼자만 솔로라고 지금 삐진 거라고 자꾸 거지같은 소리만 해대고.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왜 신혜성한테 소개팅 시켜준 건데. 진짜 욕이라도 해줄까보다.


“너네 둘 다 진짜 그렇게 나 몰아갈 거면 나 그냥 간다.”

“야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앉아.”


이젠 짜증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녀석들한테 살짝 서운해져서 가려고 일어서니 쿠가 붙잡으며 억지로 앉힌다. 여기서 뿌리치고 가버리면 정말로 쪼잔한 놈이 될까봐 못 이기는 척 앉긴 했지만 사실은 정말 가고 싶었다. 신혜성의 얼굴을 당분간은 안 봤으면 싶었다. 저 얼굴 보면서 내가 어떻게 정리를 하냐고.


“그나저나 나도 내가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신혜성이 진짜 사귈 줄은 몰랐는데. 드디어 신혜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가 나타나다니.”

“뭘 그렇게 거창하게 갖다 붙여.”

“야, 그럼 그동안 그렇게 관심 없어하고 귀찮아하던 놈이 25년 만에 세 번밖에 안 본 여자랑 연애를 하겠다는데 안 신기하냐. 임누 너도 놀랐지?”


진짜로 세 번 만나고 사귀기로 했나 보네. 내가 게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애가 신혜성 여자친구여서 그런 건지, 그날 무슨 매력을 느끼진 못했는데. 뭐 한 한 시간 본 걸로 판단할 순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세 번 만나고 고백했는데 신혜성이 오케이 할 정도면 진짜 무슨 매력이 있긴 한가 보다. 갑자기 기분이 또 확 다운 된다. 아…진짜. 이런 얘기 하기 싫다고! 신혜성이 걜 몇 번 만났고 만나서 뭘 했고, 뭐에 끌려서 사귀게 됐는지 그런 거 난 하나도 안 궁금하단 말이야!

대답이 없는 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신혜성은 멋쩍은 듯 웃다가 맥주를 들이킨다. 나도 속이 끓어서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나는 왜 신혜성을 좋아했을까. 사서 고생일 걸 뻔히 알면서.


“그냥….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 그랬는지.”

“왜 그러긴. 그냥 딱 꽂힌 거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끌리더라고. 한 번도 그래본 적 없었는데. 그때 소개팅 하고 연락 와서 만나자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러자고 대답하고 있더라.”

“신혜성 짝은 없는가 했더니 있긴 있었구나.”


‘그냥 끌렸다’라…. 참 지금 상황에서 그것만큼 나를 씁쓸하게 만드는 말도 없다. 내가 지난 몇 년간 물론 티는 안냈지만, 그렇게 신혜성의 옆에서 누가 보면 연애하는 줄 오해할 법한 짓들을 함께 했어도 녀석은 내게 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텐데.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여자에게 그 끌림을 느끼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게 왠지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제 나랑 하던 것들을 여자친구랑도 하겠지.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도 슬프다, 왠지.

 

내가 저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녀석과 내가 하는 것들을 모아놓고 보면 꼭 연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사내새끼들이 무슨 자기 전에 전화를 붙잡고 두 시간씩 통화를 해대며, 아침마다 서로 모닝콜을 해주냐 이 말이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는 늘 둘이서 같이 봤고, 밥이나 한 번 사주고 퉁치는 남자들과 달리 생일엔 꼬박꼬박 서로가 갖고 싶은 선물을 챙겨줬다. 뭐 이정도면 그냥 진짜 죽고 못 사는 절친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군복무 시절, 이주에 한 번 꼴로 서로에게 편지를 써댔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오바다. 아는 여자애들에게 연락을 돌려 편지를 써달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똑같은 군바리한테 귀중한 주말시간을 투자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들은 내 주변엔 절대 없었다. 서로 술에 취해 데려다주겠다며 싸우는 놈들도 없었다. 그래서 난 가끔 신혜성과 내가 연애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허나 25년 모쏠을 자청하던 신혜성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는 순간, 나와 신혜성이 했던 짓들은 ‘유사연애’로 판명 났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지금 기분이 굉장히 거지같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좆같다. 그리고 이 기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당분간 신혜성을 멀리하다보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멀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껏 해온 것들이 있고, 익숙해진 것들이 있는데. 내가 과연 그걸 단칼에 무 자르듯 잘라버릴 수 있겠냐고. 솔직히 자신은 없다. 마음 정리를 하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면서도 뭐부터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혼자 한 사랑이니 혼자 정리하면 그만인데. 혼자 한 사랑 주제에 같이 했던 추억들이 너무 많다. 뭘 골라내어 버려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친구로 시작했으니 다시 친구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친구로 시작해서 나는 혼자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래서. 스킨쉽은 어디까지 나갔는데.”


이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줄 해답 따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맥주로 배나 채우고 있는데 이런 저런 얘기―주로 연애 얘기였다―를 하던 용화가 신혜성한테 묻는다. 신혜성은 뭐 그딴 걸 묻냐고 그냥 넘기려 했지만 쿠는 진짜 궁금했는지 캐내듯 계속 물었다. 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 술자리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도 안 궁금한 것들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냐고! 구용화가 진짜로 슬슬 얄미워지려고 한다. 신혜성을 나한테서 앗아가게 만든 주범! 이 나쁜 놈.


“아아, 알았어. 팔짱까지 꼈어.”

“엑, 꼴랑 팔짱?”

“우리 사귄지 이제 2주밖에 안됐걸랑?”

“난 주연이랑 2주는커녕 1주도 안돼서 키스했던 것 같은데.”

“너네가 빠른 거지. 그리고 학교 선후배로 원래 알던 사이었잖아. 나랑 하림인 아예 모르는 사이였고.”


지 스킨십 진도까지 나불거리는 쿠를 보며 이걸 주연이한테 일러버릴까 잠시 고민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친구들끼리 스킨십 한 얘기나 잠자리 얘기 떠벌리는 거 진짜 싫어한다던데. 뭐 남자라고 여자들끼리 그런 얘기하면 좋아할 리 없겠지만. 여자들이 남자가 잘하네 못하네, 크네 작네 하면 어느 남자친구가 좋아하리. 진짜 주연이한테 꼬질러버려?


“야, 근데 너 하림이가 첫 여자친구인 거면…. 키스까지 나가면 그게 첫 키스겠네?”


쿠 이 새끼 입을 다물게 할 만한 뭔가가 없을까.


“어……. 그런가.”

“뭐야, 너 첫 키스는 벌써 했어?”

“아니, 첫 키스는 아니고…. 입술에 뽀뽀까진?”

“아깐 팔짱까지 꼈다며!”

“하림이랑 말고. 전에. 어렸을 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내가 아는 한 중고등학교 시절의 신혜성에겐 썸 비슷한 것도 없었는데. 관심 없는 척하더니 뒤에서 호박씨라도 깠나.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쿠는 누구랑 했냐며 또 열심히 캐묻는다. 누군지 안 말해줄 거면 언제였는지 라도 말해달라며 조르는 용화에게 신혜성은 결국 중학교 3학년 때라고 대답했다. 왜 대답을 하면서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인가. 누구지. 신혜성한테 고백했던 애들을 죄다 떠올려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을 만한 애가 없다. 역시 신혜성도 연애에 관심이 없었을 뿐, 혈기왕성한 소년인 건 마찬가지였던 건가. 호기심에 누구랑 해본 걸까?


“뭐야, 왜 이민우 보면서 웃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


나도 아는 사람이냐고 물은 것뿐인데, 웃고 있던 신혜성의 얼굴에서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더니 정말 기억 안 나냐는 듯한 얼굴로 바뀐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맞긴 맞나 보네.


“민우 너 기억 안나?”

“뭐가? 진짜 내가 아는 애야?”


내가 봤던가? 아님 신혜성이 나한테 얘기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근데 진짜 기억나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데.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중학교 때라 그런가. 아닌데, 중학교 때여도 웬만한 건 다 기억하는데. 신혜성의 첫 뽀뽀 얘기를 내가 잊을 리 없다.


“너 그때…. 아니다. 그냥 기억 안 나면 말고.”


뭔가 중요한 걸 잊은 느낌이다. 아니, 근데 내가 신혜성이 처음으로 뽀뽀한 사람까지 꼭 기억하고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앞으로도 첫 키스가 언제고 첫 섹스가 언젠지도 전혀 알고 싶지 않다. 이건 진심이다. 이젠 더 이상 신혜성에 대해서 더 알게 되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만 해도 충분한걸.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다.

또 연애 얘기로 돌아 가버리는 대화에 아예 포기하고 혼자 술만 마시기로 했다. 그래도 꼴에 연애 선배라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하는 용화를 보며 혀를 찼지만 날 모쏠이라고 생각하는 쿠는 오히려 그런 내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젓는다. 저 새끼가 왜 저렇게 날 불쌍하게 보는데. 아, 기분 진짜 더럽네. 여기서 내가 나 사실 연애도 몇 번 해봤고 키스는 물론이거니와 섹스도 해봤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차라리 쿠만 있었으면 말했을지도 모르는데. 신혜성까지 알게 되는 날엔 그동안 자기한테 어떻게 한 마디도 안 할 수가 있었냐고, 왜 안 보여줬냐고 서운해 할 게 뻔하다. 나한테 지 첫 여자친구 제일 먼저 소개시켜주는 걸 보면 서운해 하고도 남는다.


“그나저나 신혜성도 탈출했는데 이민우는 언제쯤 탈출하는 거냐?”

“관심 끄세요.”

“엉아가 소개팅 시켜줘?”

“…닥쳐라.”


저 새끼가 지금 누구 놀리나. 나 게이인 거 뻔히 알면서. 소개팅은 무슨 소개팅이야. 소개시켜줄 남자라도 있냐? 내가 그만 하라고 째려보자 이게 술이 올랐는지 진짜 소개팅 시켜주겠다고 난리다. 저러다가 진짜 신혜성 앞에서 나 남자 소개시켜주겠다고 말할까봐 조마조마해진다. 이런 식으로 신혜성한테 커밍아웃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신혜성은 평생 내가 게이인 걸 몰랐으면 좋겠다. 신혜성이 내가 게이라고 해서 편견을 갖거나 나를 다르게 대할 놈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평생 몰랐음 싶다. 그래서 내가 저를 바라보던 눈빛이 어땠는지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으면 좋겠다.


“난 됐다고. 관심 없다고.”

“왜, 너 아직도 그 짝사랑하는 사람 좋아해?”

“야!”


아주 소문을 내라. 그만 하라고 빽 소리를 질렀더니 그제야 쿠도 정신을 차렸는지 신혜성 눈치를 보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안 말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쿠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며 털썩 뒤로 기대는데 커다래진 신혜성의 눈이 나를 향해있다. 살짝 놀란 얼굴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민우 너 짝사랑하는 사람 있었어?”

“……어.”

“진짜? 근데 왜 그동안 말 안했어?”

“그냥 예전에. 예전에 잠깐 좋아했던 사람이었어. 지금은 아냐.”


그 잠깐이 거의 8년이지만. 사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결론내리지 못하겠다. 이렇게 신혜성 보는 게 힘들고, 신혜성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조마조마한 걸 보면 끝내기엔 아직 글렀다. 내 말에도 신혜성은 뚫어져라 날 쳐다보며 한껏 서운한 표정을 해보이더니 이내 저도 술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쿠도 아는 걸 가장 친한 자신이 몰랐다고 생각해서 서운한가보다. 내가 별로 미안해 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미안하다 혜성아. 사실 네가 모르는 가장 큰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아니 두개 있는데, 난 절대로 너한테는 말 안 해줄 거야.

 

그래도 너무 서운해 하진 마.

이 모든 게 널 위해서니까.

 



* * *

 



속이 타들어가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눈치 없는 신혜성 새끼는 자꾸 지 여친이랑 노는데 나를 끼워 넣으려고 연락을 해댄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밤에 나한테 전화를 한다. 물론 통화시간은 한 시간으로 줄었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지 여친과의 얘기지만. 연애를 하려면 혼자 하든가. 연애도 하고 연애 비슷한 것도 하려는 욕심 많은 새끼. 그런데도 신혜성을 끊어내지 못하는 건 녀석이 알고 그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연애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이민우가 신혜성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사연애라고 해놓고 보니 그동안 내가 진짜 뭘 했는가 싶어서 한심하긴 한데, 진짜 그 말이 딱이다. 신혜성이랑 이민우 사이는. 신혜성은 아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이는 그렇다. 우리가 남녀였으면 아마 주위에서 욕하고도 남았을 거다. 내가 여자였다면 저것들은 여친 있는 남자애가 여사친이랑 밤에 통화도 한 시간씩 하고, 거의 매일 만나고, 술도 단 둘이 마시고, 밥도 영화도 놀러가는 것도 둘이 다닌다고. 집에까지 놀러 다니는데 말만 사귀는 거 아니라고 하지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거 아니냐고. 저게 유사연애질이 아니면 뭐겠냐고. 내가 남자인 까닭으로 그 누구도 우릴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민우오빠 일찍 나오느라 피곤한가 봐요.”

“…에, 뭐.”


그건 여친이란 사람도 마찬가지다. 신혜성이 데이트 하다가 날 불러내거나 아예 셋이서 만나자고 하는데도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내색을 않는 것뿐인가.

오늘도 신혜성은 늘 그래왔듯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자며 나한테 연락을 해왔다. 정말로! 진짜로 나오기 싫었지만 ‘나올 거지?’ 하고 조르듯 묻는 신혜성의 목소리에 차마 싫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조조영화를 보겠다고 아침부터 바쁘게 나왔는데 이제 우리 둘이 하던 것들 사이엔 늘 하림이―세 번째 봤을 때부터 하도 원해서 말을 놓기로 했다―가 있었다. 아니, 둘이 하는 것들 사이에 내가 끼게 된 건가. 정말로 보기 싫다,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는 걸 너무 얼굴에 드러냈는지 팝콘을 사러 간 혜성일 기다리던 하림이가 묻는다. 그냥 피곤하기만 한 거면 좋겠다. 이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치 제대를 코앞에 두고 유격에 끌려간 기분이다.


“오빠 근데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혜성오빠 혹시 좋아하는 브랜드나 특별히 모으는 거 있어요?”

“…왜?”

“다음 달에 오빠 생일 있잖아요. 사귀고 첫 생일인데 뭔가 주고 싶어서요.”


그렇구나. 이젠 생일도 나랑 안 만나고 하림이랑 만나겠구나. 같이 하던 것들이 하나 둘 줄어간다. 차라리 나한텐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좀 거리를 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니까. 이렇게 데이트 할 때 나 좀 안 불러냈음 싶은데.

대충 신혜성이 자주 입는 브랜드를 읊어주고 좋아하는 스타일도 말해주니 ‘오빤 정말 혜성오빠에 대해 모르는 게 없나 봐요.’라며 나를 뜨끔하게 할 만한 말을 내뱉은 하림인 웃다가 뜬금없이 내 생일까지 묻는다.


“내 생일을 왜?”

“오빠 생일도 알아두면 좋죠!”

“…뭐가 좋은진 모르겠지만 7월 28일이야.”

“오빤 더울 때 태어났구나…. 기억해둘게요.”


지 남친 생일이나 기억하지 남친 친구 생일까지 왜 기억한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예의상인가. 오늘로 한 다섯 번째 보는 것 같은데 볼 때마다 내가 베베 꼬여서 그런 건진 몰라도 난 정말로 이 애의 친화력이 부담스럽다. 생글생글 잘 웃고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하는 건 좋은데…. 뭐랄까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애교부리는 느낌이다. 아, 나 또 이러네. 음모론 그만 좀 하라고, 이민우! 그냥 사람한테 잘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잡는다. 너 진짜 점점 초라해지는 거 아냐, 민우야.


“가자. 자, 민우야 나쵸.”


자연스럽게 나쵸를 내게 내미는 신혜성에게 얼떨결에 나쵸랑 음료를 받아들고 그래도 내가 영화관 오면 꼭 나쵸먹는 거 잊지 않고 챙겨주는구나 살짝 뿌듯한 것도 잠시. 신혜성에게 팔짱을 끼며 앞서나가는 하림일 보고 있자니 둘을 뒤따르는 내가 진 기분이다. 뭘 지고 이기는지는 몰라도. 근데 그것보다 더 초라한 기분이 든 건 영화관 안에서였다.


“왜 내가 가운데 앉는데. 둘이 같이 앉아. 나는 여기서 본다니까?”

“아니에요, 오빠. 제가 여기서 봐도 돼요.”

“그래, 민우야. 네가 가운데서 봐.”


도대체! 왜! 왜 그래야 하는 거냐고. 둘이 데이트하러 온 거 아니야? 당연히 둘이 나란히 앉고 내가 어디가 됐든 끝에 앉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굳이 가운데 앉으라며 나를 몰아넣는 둘 때문에 결국 커플 사이를 가르며 내가 가운데를 차지했다. 지들딴엔 나름 나를 배려한다고 가운데 앉으라고 한 것 같은데. 이게 더 불편할 거란 걸 정말 모르는 거냐? 둘 다?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데도 영화 시작한다며 열심히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신혜성이 왜 하림일 선택했는지 알겠다. 아주 잘 맞는구만. 끼리끼리 만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어쩜 이렇게 둘 다 눈치가 제론지.

꼭 내가 데이트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으니 나도 그냥 영화나 보고 얼른 들어가자 하는 생각만 든다. 영화보고 점심 먹자고 할 게 뻔하니까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를 해봐야겠다. 방심하다간 저번처럼 반나절을 이 커플 사이에 껴서 같이 보내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방법을 생각해보자 할 때는 언제고. 어느새 나도 영화에 몰입해서 열심히 영화를 보다 내 오른쪽에 있던 음료수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하림이의 손이 닿아 깜짝 놀라 옆을 보니 하림이도 놀랐는지 나를 보다가 음료를 보곤 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엄청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착각하고 내 콜라를 계속 먹은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하려는데 갑자기 훅 내 옆으로 다가오는 하림이의 얼굴에 놀라 뒤로 살짝 몸을 뺐더니 손을 가리고 속삭이듯 말한다.


“오빠, 죄송해요. 착각했었나 봐요…. 콜라 다 마신 것 같은데. 어떡하죠?”

“괜찮으니까 그냥 영화나 봐.”


그 말을 굳이 영화 보는 도중에 할 필요는 없는데.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이면 내가 당황하겠냐고 안 하겠냐고. 그깟 콜라 때문에 내가 물어내라, 사와라 할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하고나서도 자꾸 나를 보는듯한 하림이의 시선을 무시하며 앞만 보고 있는데 이젠 아예 양옆이 따갑다. 그러고 보니 신혜성의 시선도 언젠가부터 나를 향하고 있다. 나를 향하고 있는 건지 하림일 향하고 있는 건지 굳이 확인하고픈 마음은 없어서 진짜 스크린에 빨려들어 갈 정도로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어떻게 해서든 가운데 자리는 피했어야 하는 게 맞는 거였어.


근데 말이다. 진짜 내가 음모론을 안 펼치려고 해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우다. 여우짓을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성격 자체나 하는 행동들이 의도치 않게 여우처럼 보이는 것 같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내 생일을 기억하겠다고 하질 않나, 지 남친도 옆에 있는데 나한테 귓속말을 하질 않나. 내가 게이란 걸 알고 있는 주연이가 그러면 충분히 아무렇지 않지만 얘가 그러니까 무슨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아서 괜히 찝찝하다. 나만의 착각이라면 할 말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도 30분 만에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더니, 세 번째 봤을 때는 오빠 말 편하게 안하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며 은근히 징징대고. 아니 도대체 내가 말을 안 놓는다고 그게 왜 자기가 어쩌지 못할 일이냐고. 얼굴도 세 번밖에 안 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슥슥 말이 잘 놔지는 것도 아닌데. 결국 말을 놓긴 했지만 여전히 하림이가 나한테 친한 척 말을 걸면 부담스럽다.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혜성 여자친군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대할 수가 있을까. 나한텐 연적―나 혼자만의―이나 마찬가지인데! 제발 이런 생각 좀 안 하게 나를 불러내지 말라고. 왜 연애를 하면서도 나랑 하던 것들을 그대로 하고 있냐, 신혜성. 나까지 그대로 두고.


물론 신혜성도 연애를 시작하면서 바뀐 것들이 있긴 있다. 예를 들면,


“뭐 먹을래?”


이제 메뉴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게 내가 아니라는 것 정도? 하림이에게 먼저 묻고 나한테 묻는다. 그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나 싶지만 어찌됐든 권하림이의 등장 전엔 신혜성에게 우선순위는 항상 이민우였다.

진짜 열심히 영화만 보다가 나와서 나는 슬쩍 빠질 타이밍을 보고 있는데 나는 약속 있어서 가보겠다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하림이가 나는 뭘 먹고 싶냐고 묻는다. 남친이 자기 생각해서 먼저 물었는데 왜 또 굳이 나한테 그걸 넘기는지 모르겠다. 괜히 나만 눈치 보이고 불편하게.


“아, 나는 좀 있다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밥 먹고 갈 시간 없어?”

“어. 바로 가봐야 돼. 둘이 남은 데이트 잘해. 나 갈게.”

“아쉽다…. 오빠 나중에 봐요, 그럼!”


아쉽긴 개뿔.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라고 빠져주는데 속이 시원하겠지.
딴에는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일 지는 몰라도 진짜 예민하거나 질투 많은 남자들이었으면 자기 여친이 저러는 게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자기 친구들이랑 여친이랑 잘 지내는 건 좋지만 이게 너무 친해지면 꽁기한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같이 불안할 거 없는 남자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구용화가 내가 주연이랑 둘이 만나든 말든 신경도 안 쓰지.


냉큼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데, 바쁘게 움직이던 다리가 점점 느려진다. 아- 진짜 이런 기분 별로다. 간다 그러면 한 번 이상은 붙잡았을 신혜성인데 오늘은 그러지도 않는다. 확실히 여자친구 생기더니 변하긴 변하는구나. 이런 거에 일일이 씁쓸해하면 안 되는데. 앞으로도 내가 신혜성이랑 연을 끊지 않는 한 이런 일을 몇 번이고 겪을 텐데. 이것도 익숙해지겠지, 언젠가는. 짝사랑이란 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행복할 때가 있지만, 그 상대가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이별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는 게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하는 일인지 요즘 깨달아가는 것 같다. 나는 늘 옆에 있었는데 그 사람과 나란히는 설 수 없다는 게…. 아, 됐다. 이놈의 감성 팔이는 그만 좀 해야지.


나도 이제 슬슬 신혜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는 걸까. 연애라도 해야 신혜성이 차지하는 자리가 조금은 줄어들까.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말도 있으니까.


“어, 쿠 오늘 저녁에 뭐하냐. 나 좀 놀아줘.”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됐으니까. 일단은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하는 걸로 해봐야지. 방을 빼려면 짐도 정리하고, 싸고 해야 하니까. 내 마음 속에 살던 세입자는 이미 몸만 훌쩍 나가버렸는데 혼자 정리하려니 뭐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차차 정리해나갈 여유가 언젠가는 생기겠지. 언젠가는 다 내다버려서라도 잊고 싶은 날이 올 테니까. 지금은 잠시만 보류해둬야겠다. 그리고 다음부턴 꼭…. 전부 다 세를 주지 않고 월세로 돌릴 테다. 잠깐 들어왔다가 또 바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 * *


 

“이민우 오늘 뭔 일 있었냐?”

“왜.”

“술을 왜 이렇게 마셔?”


결국 저녁에 쿠를 불러내서 맛나에서 한 잔 하자며 초저녁부터 달리기 시작한지 어느새 두 시간이었다. 웬만해선 소주로만 달리는 건 잘 안하는데. 오늘따라 술이 쭉쭉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그간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만나자 그래도 귀찮다 그러더니 오늘은 웬일로 먼저 만나자고 했냐며 은근히 기뻐하는 얼굴로 온 쿠는 내내 술만 마시는 날 보더니 이 새끼 자기 술 먹는 거 구경하라고 불렀냐며 구시렁댄다. 그간은 짝사랑의 실연을 제대로 털어 내거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커플 사이에 껴서 눈치 보고 속으로만 삭혔더니 힘들어 죽겠다. 오늘은 힘든 티 좀 내고 싶다. 나 지금 되게 거지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힘들다고.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없어.”

“깐다. 뭔 일 있구만.”


사실 조금만 더 쿡, 쿡 찌르면 나 힘든 거 징징대듯이 다 불 것 같긴 하지만 쿠까지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짝사랑하던 사람이 신혜성인데, 지가 소개팅 시켜준 사람이랑 잘돼서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 겉보기와 달리 마음 약한 쿠는 저도 덩달아 힘들어할 거였다. 자꾸 자작하며 빠르게 잔을 비우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며 같이 잔을 부딪쳐주던 쿠도 단 시간에 꽤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주를 네 병 깠을 쯤엔 아 이제 여기서 더 달리면 오늘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잠시 잔을 내려놨다. 잠이 오는 건 아닌데 온 몸이 힘없이 늘어지는 게, 자꾸 어딘가 기대고 싶어진다. 의자에 기대 고개를 푹 숙이고 둘이서 묵념이라도 하듯 한숨만 푹, 푹 쉬어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확 내리친다. 느릿느릿 고개를 드니 우리 둘을 내려다보며 주연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다.


“둘이 뭐하는데. 고사 지내냐?”

“어…주연이 왔네.”

“얼씨구. 아니, 내가 둘이 맛나 왔다고 연락받은 게 두 시간 전인 것 같은데. 도대체 몇 병을 비운 거야? 둘이 오늘 날 잡았어?”


용화를 안쪽으로 밀며 자리에 앉은 주연이는 이미 비운 병들이 예쁘게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는 걸 보곤 혀를 찼다. 쿠나 나나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닌지라 웬만해선 이렇게 마시는 일도 없었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는 쿠와 역시 반쯤 맛이 가기 직전인 나 대신 주연이는 테이블에 병 좀 치워달라고 하더니 생맥주 500을 시켰다. 둘 다 헤롱거리니 데리고 나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마실 동안 술이나 깨라고 쿠의 등을 퍽퍽 내리친 주연이는 참…. 용화 여자친구여서가 아니라 그냥 봐도 성격 하나는 정말 좋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주연이나 하림이나 내 친구들 여자친구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느낌이나 대하는 태도가 다를까. 물론 하림인 ‘신혜성’의 여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 느낌만 떠올려봐도 주연이랑 하림인 전혀 달랐다.


“주연아.”

“응.”

“하림이 네 친구라고 했지?”

“친구라기엔 좀 그렇고.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언니가 재수해서 동기지.”


용화가 소개팅을 주선하긴 했지만 하림인 주연이가 소개시켜 준거라고 했었지. 주연이랑 친한 줄 알았더니 동기라고 딱 끊어내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가보다. 친한 친구였음 저렇게 심드렁하게 대답하지도 않았을 텐데.


“안 친해?”

“그냥 딱 동기 수준. 그 정도야. 워낙에 친한 무리가 달라서.”

“근데 어쩌다가 혜성이 소개시켜줬어?”

“용화오빠가 주위에 예쁜 애 좀 데려와 보라고 난리쳐서. 자기가 내 카톡 뒤져서 프사 보다가 하림언니 찍더라고. 얘 괜찮다고.”


역시 구용화 이 새끼 탓이다. 휙 옆을 째려보는데 이미 상에 반쯤 엎드려있다. 우리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사실 이걸 용화한테도 물어볼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던 거긴 한데. 그래도 용화보단 하림일 더 오래 본 주연이의 의견이 더 정확할 것 같아서 겨우 텁텁 말라오는 입술을 뗐다.


“하림이…어때?”


내 조심스런 물음에 자기가 새로 시킨 안주를 덜어가던 주연이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내가 묻는 의도가 뭔지 파악하려는 듯 빤히 쳐다보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주연이는 용화를 살짝 한 번 보곤 입을 열었다.


“오빠가 뭘 묻는 건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과 사이에선 그렇게 썩 평판이 좋진 않아.”

“왜?”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싹싹하고 친화력도 좋고. 잘 웃고 다녀서 교수님도 선배들도 좋아하는 언니긴 한데….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질투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좀 여우과 같아.”

“여우?”

“응. 뭐 대놓고 여우짓하는 애들이랑은 다르긴 한데. 처음엔 모르다가 나중에 가서 보면 뭔가 아? 하는 느낌이랄까. 막 꼬리치는 것도 아닌데 의도하지 않은 행동들이 어장관리처럼 되는 느낌도 있고…. 그래서 처음에 언니한테 고백했던 선배들이나 동기들도 꽤있었는데, 자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라면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 거절도 잘 못해서 그러다 사귄 사람도 있었고. 근데 다 오래가질 못해서 그런지 솔직히 요즘 그렇게 평판이 좋진 않아.”


역시 내가 느끼던 게 그냥 음모론은 아니었구나. 한편으론 내가 심사가 뒤틀려 괜히 그렇게 보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하필 그런 애가 신혜성의 첫 여자친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뭐 누가 됐든 신혜성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 나한텐 그닥 좋은 일이 아니지만. 엄청 괜찮은 애였다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지켜보면서 더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난 상대도 안 되겠구나, 진짜 빨리 마음 접어야겠구나 했겠지.


“야-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한주연 너도 그런 거였냐.”

“뭐가. 술 쳐드셨으면 그냥 곱게 주무세요.”

“하림이 싹싹하고 예쁘기만 하던데. 뭘 또 여우냐? 너 하림이한테 자격지심 느끼는 거 아냐?”

“와, 이것 봐. 남자들은 이렇다니까. 여자가 무슨 다른 여자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하면 다 질투하고 자격지심 있어서 그러는 거 같냐?”


주연이한테 괜히 물어봤나보다. 술 취해서 자는 줄 알았더니 엎드려서 다 듣고 있었는지 쿠가 하림이 편을 들자 주연이의 주위에서 순식간에 냉기가 느껴진다. 구용화 저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는 멍청한 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거기서 왜 또 주연이 심기를 건드는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들리잖아. 여자들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냐?”

“그만 해라 구용화. 나랑 싸우고 싶은 거 아니면.”


화가 나면 오빠고 뭐고 위아래가 없는 주연이인지라 여기서 더 건드렸다간 진짜 용화랑 대판 싸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중간에 껴 말리니 쿠도 제가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치를 보며 찌그러진다. 화를 다스리는 듯 숨을 크게 쉬다 남은 맥주를 원샷한 주연이가 바로 소주 1병 더 달라며 소리친다. 쿠는 술을 갖다 주자마자 제가 받아들더니 주연이 잔에 따라준다. 3살 어린 여자한테 눈치를 보며 살살 기는 게 눈에 보이지만 주연이랑 만나면서 자존심은 엿 바꿔 먹은 녀석이라 그러려니 싶다. 가끔 괜히 객기를 부려서 이렇게 싸울 일을 만들긴 해도 쿠가 얼마나 주연이를 좋아하는지는 나도 알고, 주연이 본인도 알고 있다.

주연이 잔이 비면 열심히 채워주며 안주도 챙겨주는 쿠를 보고 있자니, 웃기기도 한데 둘의 그 사이가 참 부럽기도 하다. 투닥투닥 싸워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죽도 잘 맞는 두 사람. 함께 하는 시간이 이젠 일상 같지만 여전히 서로를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간 신혜성이랑 했던 것들도, 함께 보낸 시간도 어떻게 보면 연애와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의 마음이 달랐을 뿐. 나도 신혜성이 아닌 누군가와 그런 연애를 할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 지금은 자신이 없다. 신혜성을 언제쯤이면 완전히 잊을 수 있을지, 완전히 잊을 수 있긴 한 건지도.

 

“오빠…. 울어?”


놀란 듯한 주연이의 목소리에 손으로 슥 볼을 닦아냈더니 정말로 물기가 묻어난다. 얼레. 진짜로 눈물이 나네. 뜬금없이 왜 눈물이 나오나 싶어서 두 손으로 눈을 꾹 누르는데 좀처럼 멈추질 않는다. 용화랑 주연이 눈길이 죄다 나한테 쏠린 게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술 마시다 말고 갑자기 눈물 쏟는 내가 두 사람 눈에 얼마나 이상할까. 아무래도 술 마신 게 확 올라오는 모양이다.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것들까지 죄다 끌고 올라왔는지 진짜 다 털어버릴 수 있을 때까지 울고 싶어진다.


“야, 임누…. 뭔데. 왜 그러는데. 너 진짜 힘든 거 있어?”

“오빠 말해봐. 뭔데. 응?”


초장에 내가 술만 마시던 게 다시 생각났는지 용화는 진짜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주연이도 내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어선지 진짜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조심스럽게 묻는 것 같았다. 진짜 걱정시키거나 내 짐을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힘들다.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더 힘든 것 같다. 오랫동안 너무 혼자 삭히고, 앓아 와서 이제는 좀 털어놓고 싶다. 그간의 내 마음고생에 대해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도닥여줬으면 좋겠다. 신혜성한테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으니까.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으니까 다른 누군가라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겨우 눈물이 멎고 나서야 코를 훌쩍거리다 고개를 들어 둘을 쳐다봤다. 한껏 걱정스런 눈빛으로 ‘뭐든지 말해라, 다 들어줄 테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둘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내가 동성애자란 걸 알고도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던 두 사람인데. 생각해보니까 신혜성한테 다 내주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용화랑 주연이 덕분이기도 한 것 같다.


“야, 이제 다 울었으면 말해봐. 엉아가 다 들어줄게.”

“…됐다. 엉아는 무슨.”

“우는 걸 촬영해놨어야 하는데. 이민우 질질 짠다고 신혜성한테 보여주게. 이거 나름 놀림거린데.”

“신혜성한테 행여나 나 울었다고 말하지 마라. 절대로.”

“왜? 둘이 싸웠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너 도대체 왜 울었는지 좀 알자. 나 진짜 궁금하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거든?”


주연이는 자꾸 보채지 말라는 듯 용화의 팔뚝을 살짝 내리쳤다. 그런 주연이와 용화를 번갈아보다 겨우 입을 떼는 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 아래로 떨어진다. 말하면서도 이걸 진짜 말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아직도 들었다.


“사실…. 나 그 짝사랑한다던 사람한테 실연당했어.”

“뭐야, 고백한 거야?”

“아니. 고백도 못하고 끝.”

“왜!”

“그 사람한테 여자친구 생겨서.”


그럼 노말 좋아했던 거냐고 지가 더 흥분하는 용화와 달리 주연이는 뭔가 알아차렸는지 길게 한숨을 쉬며 뒤로 기댄다. 그러더니 갑자기 맥주잔에 소주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걸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는 주연이에 놀란 용화가 손을 잡으며 막자 주연이의 미간이 한껏 좁아진다.


“한주연 너는 갑자기 왜 이러는데.”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하….”

“왜, 뭔데. 나만 모르는 뭐가 있어?”

“……오빠 좋아하던 사람 설마 혜성오빠였어?”

“뭐어! 진짜?”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쿠한테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입을 다물지 못하던 녀석도 주연이와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며 복잡한 듯 머리를 턴다. 역시 괜히 마음 불편하게 만든 것 같다. 나 힘들다고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니었는데.


“그동안 왜 말 안했어.”

“…좀 그렇잖아. 친구 사이에. 신혜성도 눈치 챌까봐 조심스럽고.”

“야, 네가 진즉에 말했으면 소개팅…. 하, 아니다. 지금 와서 말해봤자 뭐하냐.”


내가 진즉에 말했으면 신혜성한테 소개팅 같은 거 안 시켜줬을 거란 소리겠지만 용화가 그랬든 아니든 아마 크게 바뀔 건 없을 거였다. 단지 신혜성이 하림이랑 만나지 않고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됐을 거고, 그 시기가 좀 더 늦춰졌을 지도 모른다는 것뿐. 신혜성이라고 언제까지 연애도 않고 살리는 없으니까. 두 사람이 괜히 나한테 미안해할까 싶어 괜찮다고, 이제 정리하면 된다고 하는데 말처럼 편히 웃지는 못했다. 그런 나를 보는 주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용화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더니 제 잔에도 가득 소주를 채워 입에 털어 넣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오고가지 않다가 마침내 입을 연 용화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나는 다시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들었냐.”

“…….”

“말도 못하고…. 친구 자리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너.”


그러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이게 얼마나 힘든 건지 양으로 따지진 못하겠는데…. 그래도 그걸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니 갑자기 앞으로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인생에 평생 사랑이 신혜성 하나 일리는 없잖아. 그러니까 차차 괜찮아지겠지.


혼자만 지켜오던 것이 이젠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어쩌면 언젠가 신혜성도 이 비밀들을 다 알게 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걱정이나 고민보단 내가 말없이 울어도 뭐 때문에 우는지, 다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을 둘이나 얻었으니까. 나도 이제 힘들다고 소리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이렇게 하나하나 덜어내다 보면 언젠가 신혜성도 완전히 털어낼 날이 오지 않을까?

 

 

 

 

* * *

 

 

 

 

나중에 생각하니 용화랑 주연이 앞에서 그렇게 질질 짠 게 좀 민망하고 쪽팔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신혜성과 권하림의 커플 어택 사이에서 구해줄 지원군을 얻고 나니 그나마 좀 나았다. 내가 또 그 커플 사이에 끼게 되면 전화해서 날 구해주기도 했고, 신혜성한텐 아예 한소리 한 모양이었다. 내가 괜히 실수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만 둘이 보기에도 좋아하는 사람과 그 사람 연인 사이에 껴있는 내가 어지간히 불쌍하고 안 돼 보였었나보다.

‘너는 아무리 연애가 처음이라고 해도 그렇게 눈치가 없냐. 둘이 데이트 하는데 도대체 이민우를 왜 갖다 집어 넣냐? 하림이가 그걸 좋아서 계속 같이 다니는 거겠어? 그리고 임누는 어떻고. 커플 사이에 껴서 다니는 게 이민우라고 편하겠냐고. 신혜성 너 그거 민우랑 하림이 둘 다 불편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거야, 인마. 그만 좀 해라.’

라고 신혜성한테 쏴댔다면서 ‘나 잘했지?’ 라고 마치 적진에서 아군을 구해온 용병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용화한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긴 했지만. 그 뒤로 신혜성이 나한테 만나자고 전화하는 횟수가 준 걸 보니 효과가 있긴 있었나 보다. 근데 이게 또 묘한 감정이 든다. 둘을 보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서 좋긴 한데, 신혜성이 나를 찾지 않으니 한편으론 기다려지기도 한다. 연애하면 친구들한테 소홀해진다더니. 신혜성은 날 좀 소홀하게 여겼으면 하고 바라긴 했지만 막상 나는 이제 단물이 빠진 껌 같아서 불쌍하기도 하다. 당연히 예전처럼 지내진 못하겠지. 연애하기 전이랑 똑같이 굴면 그건 진짜 아니다 생각했음에도 마음은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질 못한다.


“신혜성은 주말에 지 여친이랑 놀지 왜 이러고 있냐.”

“그러는 너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냐.”

“와- 너 진짜 은근히 이민우랑 나 차별 둔다?”

“은근히가 아니고 대놓고였는데 이제야 눈치챘냐.”


이번 주말엔 꼭 집에 오라고, 하도 졸라대기에 알았다고 하긴 했는데 막상 혼자 신혜성네 가서 둘만 있으려면 마음만 싱숭생숭해질 것 같아서 용화까지 달고 온 참이었다. 신혜성은 용화는 왜 데리고 왔냐며 달가워하지 않는 티를 팍팍 냈지만 거기에 기죽을 구용화도 아니었다.


“너 모르는구나. 나랑 임누랑 완전 짱친, 절친인거. 우린 이제 어딜 가든 세트로 다니기로 했다.”

“그래봤자 이민우는 나랑 더 짱친이거든?”

“아니거든? 요즘 대세가 달라졌어요. 야, 임누 말해봐. 나야, 신혜성이야?”

“…개소리들 작작해라.”


구용화 이건 같이 가서 신혜성네서 빨리 탈출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불렀더니 별 시답잖은 소리나 더 늘어놓고 있다. 내가 대답을 회피하고 텔레비전 보는 데에만 집중하자 쿠는 뭐 먹을 거 없냐며 냉장고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신혜성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다 말고 내 앞을 가로막고 앉는다. 대놓고 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통에 뭐냐고 미간을 좁히며 뒤로 물러났더니 손가락으로 용화를 가리키며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너 진짜 똑바로 말해봐. 구용화야 나야.”

“너까지 진짜 왜 그러는데. 대답을 하라는 거냐?”

“당근. 너 원래라면 바로 나라고 했을 거잖아.”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

“와, 이민우 진짜 이러기냐. 너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


서운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는 널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게 문제지. 내가 왜 이딴 질문이나 받고 있어야 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누구랑 더 친한지 묻는 게 꼭 쟤가 좋냐, 내가 좋냐 묻는 것 같아서 기분도 이상하고. 애도 아니고 누구랑 더 친한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거참. 물론 예전 같았으면 마음은 이미 신혜성이었겠지만. 아마 은근슬쩍 신혜성이라고 하면서 용화를 놀렸을 거다. 내가 그만 귀찮게 하고 좀 가라고 몸을 밀었더니 쭈그리고 앉아있던 신혜성이 옆으로 넘어가며 눈을 흘긴다.


“근데 너 이거 도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거냐? 우리는 왜 불렀고?”

“내가 넌 안 불렀다고 했지.”

“이 새끼 진짜 치사하게 구네. 나 진짜 서운해지려고 한다, 너?”


용화가 부엌을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뒤적거리자 냉큼 일어나 부엌으로 간 신혜성은 주워 먹지 말고 저리 가라며 쿠를 내쫓았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오늘 왜 오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불러놓곤 부엌에서만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뭔가 만들고 있고. 그동안은 밥도 태워 먹는 주제에 신혜성이 요리를 해줄 리는 만무했다. 그냥 간단한 라면은 끓여도 ‘요리’ 란 것은 신혜성과 거리가 멀었다. 바쁘게 움직이며 그래도 뭔가 볶기도 하고 나름 냄새를 풍기며 만드는가 싶더니 한참을 배고프다고 징징대던 쿠와 내 앞에 놓인 건 해물까지 들어간 파스타였다. 신혜성이 진짜로 요리를 하는 날이 오다니. 별일이다.


“뭐냐 진짜? 요리 해주려고 불렀어?”

“일단 먹고 맛 좀 봐봐. 괜찮은지.”


먹을 걸 해주겠다고 나를 불렀단 것도 의외지만 진짜 요리다운 요리를 해올지는 정말 몰랐었다. 일단 먹으라니까 먹긴 하는데, 입에 넣는 순간까지도 온통 의문 투성이었다. 나한테 먹을 것 좀 해달라고 부르는 일은 있어도 자기가 나서서 뭘 해주겠다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신혜성이 왜? 그것도 그냥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음식도 아니고 파스타라니. 머릿속엔 온통 의문만 가득했지만 일단 먹으라니 먹었다. 생각보다 괜찮아서 입모양으로 오, 했더니 녀석이 맛있냐며 들뜬 표정을 짓는다. 쿠는 진짜 괜찮다며 크게 떠서 쩝쩝 거리기 바빴다.


“민우 넌 어때. 괜찮아?”

“뭐…. 괜찮은데?”

“역시. 내가 그동안 안 해서 그렇지 감은 있었군.”

“근데 왜 갑자기 웬 파스타? 요리에 취미라도 들렸냐?”


궁금한 건 쿠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 묻는다. 나도 본격적으로 좀 더 먹어볼까 하고 손을 뻗는데 이어지는 신혜성의 말에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진다.


“내일 하림이 놀러온다는데 시켜서 먹긴 그렇고. 뭐라도 해줄까 싶어서. 그나마 덜 복잡하고 여자애들이 좋아할만한 건 이런 거더라고.”

“야- 신혜성 많이 변했네. 여친 해주겠다고 음식까지….”


재잘대던 쿠는 내 얼굴이 살짝 굳는 걸 눈치 챘는지 말꼬리를 흐리며 접시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은 여자친구 때문이었구나. 난생처음 제가 먼저 나서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바쁘게 움직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겐 해주고 싶은 게 많아지나 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안하던 짓도 하게 되고. 근데 그걸 왜 나 먼저 시식해보라고 불러대는지. 이래서 짝사랑이 서글프구나.

뚝 떨어진 입맛 덕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아 멈춰있었더니 신혜성은 왜 더 안 먹냐고 재촉해오고. 오기 전에 뭐 좀 주워 먹었더니 잘 안 들어간다고 거짓말 하며 꾸역꾸역 입 안에 집어넣는데, 이러다 오늘 제대로 얹히겠구나 싶다. 슬쩍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와 속을 달래듯 가슴을 문지르며 거울의 나를 보니, 얼굴이 죽상이다. 이젠 태연하게 나를 감추던 것도 영 능력발휘를 못하네.


“하…….”


땅으로 꺼질 만큼 깊게 한숨을 쉬다 일단 들어왔으니 뭐라도 하는 티를 내야 될 것 같아 물을 틀어 놨다. 그나저나 이젠 집도 놀러올 만큼 가까워졌나보다, 이 둘도. 화장실 곳곳에 있는 내 칫솔, 내 면도기, 내가 사다놓은 방향제를 보며 이제 곧 여기서도 내 흔적은 하나 둘 지워지고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더 씁쓸해진다. 이젠 정말 나도 정리를 시작해야 될 것 같은데. 뭐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민우- 쿠가 다 먹는다. 얼른 나와라-.”


일단 저 신혜성부터 좀 안 봐야 뭘 시작하든 말든 할 텐데.


“어- 나가.”


내가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 * *

 


정리해야겠다는 생각과 달리 마음은 아직 자긴 준비가 덜 됐는지 여전히 따로 노는 요즘. 요즘 내 상태가 어떻냐 하면…. 밤에 나한테 전화해서 하림이랑 뭘 했고, 하림이랑 뭘 먹었는지 보고하듯 말하는 신혜성 때문에 잠까지 설칠 지경이었다. 어디까지 진도 나갔는지 그거 말 안 하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애인이랑 뭘 했는지 시시콜콜 듣고 있어야 하는 건 정말 곤욕이었다. 신혜성은 갈수록 눈치를 엿 바꿔 먹었는지 내 가슴만 더 뒤흔들어 놓았지만.


-학교지?

“…어.

-나 지금 너네 학교 앞이야. 수업 끝났지? 나와.

“…….”

-들었어?

“…너만 있어?”

-엉. 혼자.


오늘은 달고 온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결국 싫다는 소리 한마디 못하고 신혜성에게 가고 있다. 12년을 붙어 다녔고 8년을 좋아했는데 어떻게 한순간에 다 정리하고 마음을 접냐고. 그게 되면 더 이상한거지. 부르면 거절 못하고 나가고 마는 내 이 못남을 들키지 않으려 나름 핑계를 대본다. 일부러 나 만나러 학교 앞까지 왔다는데 쌩깔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나저나 웬일이지. 요샌 약속을 미리 하지 않는 한 갑자기 둘이 보는 일 거의 없었는데. 이런 걸로 괜히 들떠하는 걸 보니 마음 정리를 시작도 못하는 데엔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게 맞다.


“민우야!”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신혜성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데 그게 뭐랄까…. 순간 굉장히 오래되고 아련한 추억같이 느껴졌다. 모든 게 다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 신혜성과 이렇게 서로를 마주보는 것도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진 왜 왔어?”

“여기 근처에 맛있는 스테이크 가게 있더라고. 같이 가자고.”

“밥 먹으려고 온 거?”

“어. 너랑 밥 먹을라고 왔지. 거기 값도 저렴한 편이고 가격대비 맛도 진짜 괜찮대.”


어디 또 인터넷에서 봤는지 사진을 쫙 보여주며 맛있어 보이지 않냐고 만나자마자 밥 얘기부터 해대는 신혜성에 난 도대체 여기서 또 뭘 하는 건가 싶다. 둘이 맛집 찾아다니고 먹으러 다니고 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걸 또 나랑 하려고 이러는 건가 신혜성은? 애인 생겼다고 친구랑 놀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신혜성이랑 내가 하던 것들 중 몇 가지는 쟤네 지금 뭐하냐 싶은 것들도 있는데. 내 의사 따윈 상관없이 앞서 나가는 신혜성을 따라 나도 결국 걸음을 옮겼다. 어찌됐든 오늘은 사이에 낀 게 아니라 마음은 한결 낫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둘이 머리를 맞대고 메뉴판과의 씨름 끝에 그냥 제일 잘 나가는 걸로 시켜놓고 기다리며, 이상하게 나만 쳐다보는 신혜성의 눈길에 모르는 척 할까 하다가 휙- 눈을 마주치니 녀석이 움찔한다.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보는 걸 보면 쉽게 꺼낼 말은 아닌 것 같다.


“뭔데. 할 말 있어?”

“…어.”

“말해. 답지 않게 눈치 보지 말고.”


갑자기 하림일 처음 소개시켜주던 날이랑 오버랩 되긴 했지만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상처에 무뎌져서 또 생채기 하나쯤 생기는 건 우습지도 않다.


“내가 요즘 너한테 눈치 없이 굴고, 소홀하게 한 것 같아서.”

“…그래서. 미안하다고?”

“미안하기도 하고. 나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으면 하는데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됐어. 그래 뭐 네가 눈치 없긴 했어도 내가 무슨 관리하고 챙겨야 할 사람도 아닌데. 설령 소홀하게 대했다고 내가 서운해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운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냐? 미안해 할 일 아닌 것 같아,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아, 아무튼 우리 문제없는 거지?”


우리 사이가 뭔데. 아오, 그렇게 생각 안 하려고 하는데도 자꾸 신혜성이 나한테 달래듯이 이렇게 말해오고 우리는 변하지 말자 같은 오글거리는 말을 해대면 꼭 내가 세컨드가 된 기분이다. 애인 있는데 나랑 바람피우면서 ‘애인이 있든 없든 우리 사이는 여전 한 거지?’ 하고 찾아오는 것 같단 말이야. 연애도 하고 연애 비슷한 것도 하고. 신혜성이랑 내가 하는 게 후자 쪽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신혜성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안했지만 녀석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듯했다. 문제가 없긴 왜 없냐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그래봤자 나만 피곤해질 텐데. 서운한 거 있음 말하라고, 자기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대답해 줄 때까지 캐물을 것 같아서 차라리 이렇게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신혜성에게 한 번도 내 마음을 드러낸 적 없었던 건 그 후에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온 추억과 시간, 세계가 바뀌어버리고 우정마저 잃게 돼버릴까 두려워서였는데.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우정이란 것이 지금 묘하게 틈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는 손을 놓고 있다. 그 틈보다 잔뜩 헤집어놓은 내 마음 돌보는 게 더 중요해서인가.


“괜찮지?”

“맛있네. 오랜만에 고기라 그런가.”


사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그냥 씹고만 있었지만 더 이상 신혜성이 필요 이상으로 나한테 신경을 쓰거나 내 눈치를 안 봤으면 해서 일부러 더 맛있게 먹는척했다. 그동안도 내 마음 안 들키겠다고 연기를 해왔었지만 그건 좋은 걸 감추려는 거였지 나를 감추려는 건 아니었다. 신혜성을 대했던 모든 말들과 행동 중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없었다. 근데 지금은 이게 뭐냐고. 억지로 행동하고, 거짓말 하고. 아- 진짜 이 상황이 너무 싫은데 무조건 피할 수도 없는 게 답답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신혜성한테 이럴 거냐고 스스로한테 물어도 내 마음이 어쩌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민우야, 여기.”

“뭐?”

“…묻었다고.”

“…….”


정신이 딴 데 가있는 채로 기계적으로 씹고 넘기고, 씹고 넘기고만 반복하느라 입에 뭐가 묻는지도 몰랐나 보다. 묻었으면 그냥 묻었다고 말해주면 되지 굳이 자기가 손을 뻗어 닦아주는 신혜성 때문에 달아났던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댄다. 아오, 진짜! 이런 거 남자들끼린 안 한다고! 나 좀 그만 흔들란 말이다, 신혜성아. 속으로 씩씩거려봤자 나만 더 열이 오를 뿐이지 신혜성은 태연 그 자체다. 신혜성이 저러니 내가 어떻게 그동안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겠냐고. 유사연애란 것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혹시 신혜성은 진짜 나를 연애 연습 정도로 생각했는지도. 너무 나갔나. 하지만 진짜로 주위 친구들 중에 나한테 하는 것처럼 대하는 경우는 못 봤다고!

만약 연습상대였다면 진짜로 내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다. 생각일 뿐이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왜 스스로를 그렇게 불쌍하게 만들려고 하냐. 짝사랑을 너무 오랫동안 하고 혼자 참고, 삼키는 것도 너무 많이 했더니 이젠 무슨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불쌍한 쪽으로만 몰아가게 되나 보다. 이 얼굴에 이 성격인데! 지금 클럽 한 번 돌면 번호 따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을 했더니 덩달아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내 자신감을 충전해줄 무언가가 필요하겠다고 진짜 클럽이라도 놀러갈까 고민하며 가게에서 나오는데 어느새 추워진 날씨 덕에 나도 모르게 몸이 확 움츠러든다. 주머니에 손을 꼽고 어깨를 한껏 올렸더니 그걸 보던 신혜성이 자기 목도리를 주냐며 풀려고 한다. 이런 짓은 네 여자친구한테나 해라, 제발.


“됐어. 네가 나보다 추위 더 타면서 무슨.”

“와, 근데 이제 겨울이긴 겨울인가보다. 안에 있다가 나오니까 확 춥네.”

“그러게.”


됐다하니 냉큼 다시 목도리를 싸매는 신혜성을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 것도 잠시,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그나마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바닥을 친다.


“그나저나 여기 괜찮지? 나중에 하림이랑 와야겠다.”


그냥 애초에 하림이랑 올 것이지. 나한테 왜 오자고 해서. 맛있는 데를 찾았으면 앞으로 하림이랑 가라고. 자꾸 나 불러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괜찮아 질라 하면 나타나서 또 흔들고. 이게 몇 번째 인줄 아냐, 이 나쁜 새끼야. 와, 아까 했던 생각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니까 먹었던 것도 다 올라올 것 같다. 저번엔 불러서 지 여친한테 해줄 요리도 연습해보더니. 내가 테스트용도 아니고…. 내가 진짜 연습 상대냐.

신혜성한테 화가 나는 건지, 나 자신한테 화가 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신혜성 얼굴을 보는 게 싫어져서 혼자 걷기 시작했다. 내가 빨리 걷는다고 생각했는지 밥 먹고 운동하는 거냐고 뒤따라오던 신혜성도 내가 대꾸도 않고 걷기만 하자 이상한 걸 눈치 챘는지 달려서 내 앞을 가로막더니 피해 가려는 내 팔을 붙잡는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어?”

“놔. 나 좀 가게.”

“아니 갑자기 왜 그러냐고. 뭐 내가 실수했어?”

“아니라고. 급한 일 생각나서 그래. 나 먼저 간다.”


신혜성의 팔을 뿌리치고 아예 정류장까지 내달리기 시작했다. 몇 미터 따라오던 신혜성도 포기했는지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신혜성도 당황스럽겠지. 밥 잘 먹고 나와서 갑자기 돌변하더니 화내듯 가버리는 놈을 당최 누가 이해하겠냐고. 하….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확 뿌리치고 와버렸나 싶지만 그래도 신혜성 잘못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모르고 그러는 거라지만 신혜성 옆에 있으면 앞으로도 마음 다칠 일만 가득할 것 같다. 그렇다고 끊어버릴 수도 없고.


“하아…. 하.”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다 꺾였던 무릎을 겨우 피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근처 정류장에 있으면 금방 신혜성이 뒤따라 올까봐 어디든 더 멀리 가야할 것 같았다. 점차 가슴도 제 속도를 찾고, 숨소리도 잦아들고 나서야 주머니 속 손끝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굳이 안 꺼내 봐도 신혜성인지라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이젠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혜성을 무시하고, 안 보고 그렇게 살다보면 마음 심란할 일은 없겠지만 녀석과 정말로 멀어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된다. 신혜성도 욕심 많은 새끼긴 하지만 나도 어지간히 욕심을 못 버린다. 내 마음 다치기 싫어하면서 신혜성도 완전히 놓지는 못하고. 너도 참…. 모르겠다, 이제 나도.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얼른 자야지. 오늘은 아무 생각 않고 자는 거다. 생각은 내일 해도 되는 거니까.

 

단순해지자, 이민우. 제발!

 

  

 

* * *


 

 

신혜성이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며칠이나 지났던가. 오는 연락 다 씹고 그 와중에 용화한테 한 번 신혜성이랑 무슨 일 있었냐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평소랑 다를 건 없었다. 그냥 앞으로 신혜성한테 줬던 마음 좀 거둬들일라고. 그 말에 용화는 별다른 말없이 수긍하는 듯했다. 아, 진즉에 말할 걸. 이렇게 편한걸. 다른 말로 둘러대거나 꾸며내지 않아도 되고. 나만 편할 수도 있다. 용화랑 주연이는 나도 신경 쓰이고 신혜성도 신경 쓰여서 힘들 수도 있을랑가.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해대던 신혜성도 내가 일부러 저를 피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이젠 하루에 한 번 정도만 한다. 신혜성의 뚝심이란.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이틀째에 화나서 포기하고 안 할 텐데.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전화하는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하다. 근데 나 같음 직접 찾아가지 이렇게 전화만 해대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맘먹고 진짜 집에 가서 바로 씻고 자는 나를 보며 엄마는 이게 잠귀신이 붙었냐며 무슨 벌써 자냐고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일찍 누워서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마음이 지쳐서인지 누워있으니 잠은 솔솔 잘 오더라. 중간에 한 번 깨지도 않고 아침까지 쭉 잘 자고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그거였다. 앞으로 나를 좀 아끼며 살자고. 스스로 나를 불쌍하게 만들지 말자고.

오랜만에 푹 자고 일찍 일어났더니 몸도 한결 가볍고 정신도 맑아진 것 같아서 뭐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기말고사도 다가오는데 그동안 몹시 손 놓고 있었던 공부라도 해볼까 해서 일찍 도서관에 가서 자리까지 맡는 열의를 보였다. 물론 앉은 지 30분 만에 졸았지만. 내가 공부를 안 했던 게 아니라 어려운 게 맞구나.

 

나름 며칠 째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도 먹고 바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엄마 눈엔 의아했는지 요즘 해가 서쪽에서 뜨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나도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아보려고 엄마. 이게 며칠이나 갈지는 솔직히 나도 자신 없지만. 어쨌든 최대한 신혜성 생각도 안하고, 마주칠 일도 없게 만드니 이렇게 살다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생긴다.

지금껏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도 그런 적 없었는데. 신혜성에게 첫 여자친구가 생긴 지 한 달 만에 내 안에 많은 것들이 흐트러졌었다. 짝사랑일지라도 신혜성에겐 내가 늘 1순위라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게 무너져버렸고, 그 결과 신혜성 앞에만 가면 자꾸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말 한마디 못해보고 바라보기만 하면서도 내가 초라했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가끔 불쌍했던 적은 있어도.


어느 순간 신혜성 옆에 가면 점점 작아지고, 불편해지기만 했다. 아무 말 안 해도 같이 있는 게 편하던 우리였는데. 신혜성도 나도 변한 게 없는데 그 사이에 다른 사람 하나가 꼈더니 이렇게 망가져버린다. 내가 신혜성을 피하는 건 더 이상 우리의 우정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비록 내 오랜 짝사랑은 여기서 끝이 나더라도 그간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마저 망치고 싶진 않아서. 이런 마음을 신혜성이 알아줄 것 같진 않지만. 말도 않고 피하기만 하니 신혜성 입장에서도 답답하겠지. 나중에 다 털어놓고 말할 날이 올지는 몰라도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의 방법 같다. 내가 먼저 마음을 다잡고 정리가 돼야 신혜성과 똑바로 마주볼 수 있으니까. 나만 제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신혜성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로.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좀 가만 놔뒀음 싶은데 말이지.

 

“아- 그냥 나 빼고 만나라니까?”

-야, 네 마음 나도 아는데 그래도 신혜성 생일인데 그냥 좀 와라.

“매년 챙겨줬는데 올해 한 번 건너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신혜성 이번에까지 네가 쌩까고 넘어가면 진짜 너 안 볼지도 몰라.

“…….”

-도대체 자기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다가 이젠 이민우한테 자기 보기 싫은 거면 말이라도 하라고 전해달라더라.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아직 준비가 안 된 것뿐인데. 용화도 중간에 껴서 입장이 애매한지 목소리가 영 피곤하게 느껴진다.

달력을 볼 때마다 시험기간이 곧 다가온다는 생각보다 신혜성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부터 들긴 했지만 이번 생일은 아무래도 축하해주기 힘들 것 같았다. 남친 생일인데 하림이가 안 올 리도 없고. 보통 생일엔 친구들이랑 여럿이서 만나 밥이나 먹고 술 마시다 헤어지는 코스였다. 신혜성이나 나나 서로 생일 선물은 꼭 챙겨줬었고. 올해 생일엔 신혜성한테 운동화 받았는데. 나도 뭘 해주긴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만나서 전해주는 건…. 글쎄다. 겨우 제 패턴을 찾은 생활과 잘 달래놓은 마음이 다시 흔들릴까봐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암튼 와라. 알았지? 너 온다고 신혜성한테 말한다?


나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뚝, 끊겨버린 전화에 한숨만 새어나온다. 당장 오늘인데 어쩌라는 거야. 생일 선물도 안 샀는데. 생일 선물 안 사왔다고 쿠사리 먹일 신혜성은 아니지만. 저녁 7시라고 하니까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사서 가면 될 것 같긴 하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선물 뭐 살지 고민하면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 나를 보며 답이 없어서 저절로 혀가 차진다. 이민우 제발 도루묵 시키지만 말아라. 정신…이 아니라 마음 단디 붙잡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일단 밖으로 나와 홍대로 향했다. 신혜성한테 받은 만큼 뭔가 해주고 싶긴 한데 학생인지라 돈을 열심히 모으지 않는 한 카드 긁을 때마다 손이 덜덜 떨린다. 있는 돈 쓰는 것도 손 떨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언제 와도 북적거리는 홍대 거리를 걸으며 한참을 여기저기 기웃거린 끝에 가게 한 곳으로 들어갔다. 겨울이면 긴 목 때문인지 유난히 추위를 타며 목을 꽁꽁 동여매는 신혜성을 떠올리며 목도리를 사기로 마음먹긴 했는데…. 겨울 느낌 물씬 나게 생긴 목도리들 사이에서도 또 몇 분을 고민하고 들었다 놨다, 해봤다 풀렀다 하고나서야 하나 고를 수 있었다. 어차피 목만 따듯하게 해주면 그만인데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디자인들 사이에서 뭘 또 이렇게 고르고 골랐는지, 원. 그래도 흔한 니트 목도리도 아니고 고심해서 골랐으니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거울을 보다 그제야 나도 목이 허전하다는 걸 깨닫곤 하나 더 골랐다. 신혜성꺼랑 비슷한 듯 다른 걸로 하나. 이 정도면 저번처럼 커플 티다 하는 소리는 안 하겠지.

덜렁덜렁 목도리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걷다가 시간을 확인하곤 발걸음이 급해진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도 많아서 인파를 파헤치고 겨우 홍대를 빠져나왔다. 만나기로 한 데가 합정동이니까 슬슬 걸어가면 될 것 같다. 걸어가면서 그제야 드는 고민은 가서 신혜성한테 제일 처음 무슨 말을 해야 하느냐 이다. 그간 연락은 왜 죄다 씹었는지, 그날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 사실대로 설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데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왔나. 이제 걱정 좀 그만하고 생각도 단순하게 하랬다고 너무 단순해져버렸나 보다. 이민우 너 진짜 가서 뭐라고 그럴래. 어?


뭔가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신박한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네가 연애 시작하고 나 너무 홀대해서 좀 삐졌었다. 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쪼잔한 놈이 되어버리고. 너네 다 연애하는데 나만 솔로라 만나기 싫었다고 해도 불쌍해지고. 더 이상 내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초라하게 보이는 만드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담 이 이유가 그나마 그중에 제일 나을 것 같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했어.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나 자신도 돌아보고.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혼자 있고 싶었던 거야.

이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나를 추스르고 재정비하며 보내려고 애썼으니까. 이정도면 신혜성도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지. 나도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가게 입구 근처에서 속으로 몇 번 연습해본 뒤에야 계단을 오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8시다. 쿠가 안 오냐고 전화 안한 걸 보면 한창 마시고 있는 모양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가게 문을 열며 들어가 몇 번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는데 나를 먼저 발견한 용화가 손을 흔든다.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며 슬쩍 목도리가 든 봉투는 뒤로 숨기고 눈으로 사람 수를 세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건 꼴랑 넷. 신혜성, 구용화, 한주연 그리고 권하림. 그걸 확인한 순간 이대로 뒤로 돌아 나가고 싶었다. 도대체가 날 왜 부른 거야. 두 커플들 사이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보라는 건가. 쿠 이 새끼마저 나를 이렇게 엿을 맥이려고 그러나?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하던 말 다 멈추고 나한테 집중된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안녕이라고 하며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이거.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목표였는데. 어제 그제도 계속 만났던 것처럼. 연습했던 말은 아직 써먹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입주변이 굳어 가는지 도통 웃지도 못하겠다. 이게 내 착각이었으면 싶은데 말이지.

그렇게 네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겨우 나를 쳐다보는 신혜성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아- 지금이야 말로 내가 진짜 착각하는 거면 좋겠다고.

나를 쳐다보는 신혜성의 눈빛은 반가움이나 놀람이 아닌 ‘넌 왜 왔냐’ 라는 귀찮음과 무시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어쨌거나 살면서 신혜성에게서 저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음은 분명하다. 내가 자기 연락 다 씹고 잡수 탄 게 녀석한테는 그렇게 화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까?


“드디어 비싼 얼굴 보여주는구만. 나는 너 절 들어간 줄 알았다. 무슨 수행하러 갔다 왔냐고. 어?”

“뭘 또 내가 어쨌다고 그러냐….”


멋쩍게 콧잔등만 긁적이는 나를 그래도 민망하지 않게 제 옆자리에 앉게 한 쿠는 잔을 더 갔다 달라며 직원을 불렀다. 선물은 등 뒤에 잘 놔두고 고개를 드는데 신혜성이랑 눈이 딱 마주쳐버린다. 무표정한 얼굴. 뭐 표정 없는 얼굴이야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그렇다 쳐도 저렇게 사람을 싸늘하게 볼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신혜성은 누구든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나한테 화가 나도 단단히 났나 보다.


“근데 다른 애들은?”

“어어…. 어떻게 하다 보니 시간되는 사람이 이렇더라.”


진짜 이게 끝이라니. 커플 둘과 게이 하나. 이 나만 불리하고 불쌍할 것 같은 조합이 정말로 끝이란 말이야? 슬쩍 옆의 쿠를 쳐다보니 쿠는 또 자기 나름대로 나를 오라 했던 게 찔려서인지 자꾸 먼 곳만 바라본다. 하…. 오자마자 축하한다고 하고 가버릴 수도 없고. 그건 안 오느니만 못한데. 딱 한 시간만 있다가 나가야지. 설마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까 싶다. 그나저나 생일 축하한다고 말 할 타이밍을 도저히 찾질 못하겠다. 신혜성도 나한테 말 한마디 안 거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오히려 녀석을 더 화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민우오빠, 근데 진짜 오빠 그동안 왜 이렇게 보기도 힘들고 연락도 안 됐어요?”


그걸 신혜성이 아니라 하림이가 물을지는 몰랐지만 뭐 누가됐든 내가 입을 열 수 있게 해준 건 고마웠다. 물론 연습과 달리 내 입에서 튀어나간 건 허접한 말이었다.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있고 싶어서 너네랑 다 멀리 하고 싶었고, 그래서 연락도 죄다 씹었다. 그렇게 대놓고 말할 것도 아니고.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혼자 있고 싶다고 말 한마디 없이 벽을 치고 들어가 있는 건 아니잖아. 벽치고 들어가 있을 거면 적어도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다. 그걸 다 거부하고 혼자만 돌봤던 게 주변 사람들에겐 걱정을 끼치는 일이나 화가 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왜 이제야 드는지.

신혜성 얼굴을 봐서 그런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이라도 했음 그렇게 끈질기게 전화하지 않았을 신혜성이다. 내가 전화를 받아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도 이해하고 내가 알아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줄 사람이 신혜성이었다.


“오빠랑 연락도 안 되고…. 혜성오빠가 오빠 연락 엄청 기다렸어요. 매일 핸드폰 보고 있고.”

“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지?”


나는 분명 스스로 이제야 정신 차리고 철든 거냐고 하며 지냈던 것 같은데. 왜 여기와선 또 내가 노력한 것들을 깎아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 이제 안 그러기로 했잖아 인마! 나를 좀 아껴주자니까? 물론 나를 돌보고 나를 다잡겠다고 쓴 방법이 다소 미흡했던 건 인정한다. 주위 사람 생각 전혀 않고 너무 나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신혜성의 기분과 마음까지 생각해줄 정도로 내가 여유가 있고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혜성에게 무작정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매일 녀석에게 오는 전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혜성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만 제자리로 돌아가면 우린 그냥 예전처럼 어울려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진다. 진짜 신혜성을 잃게 될까봐. 고백해서 거절당하는 것보다 이게 더 두렵다.


“자자, 고해성사는 그만하고 임누까지 왔으니까 케익이나 불자. 주연아, 직원한테 아까 맡긴 케익 좀 달라고 해.”


분위기가 축축 처지는 게 느껴졌는지 쿠가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서 또 미안해진다. 며칠간 자신감을 회복하며 바닥을 기던 기분을 겨우 끌어올려놨는데 이 자리에 온지 10분 만에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 가버린다. 신혜성에 대한 마음을 어디부터 차곡차곡 접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나로. 신혜성의 말과 행동에 오르락내리락 기분이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던 나로.

결국 와서 신혜성이랑 말 한 번 섞지 못한 채로 생일축하 노래까지 불러줬다. 신혜성이 초를 끄고 나서 선물 증정의 시간이 있었지만 쿠 성격에 그런 걸 챙겨줄 리 없고, 주연이는 쿠도 안 챙기는 걸 자기가 챙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하림이는…. 당연히 여자친구니까 챙길 테고.


“오빠 이거…. 내 선물.”

“오, 뭐냐 뭐. 여기서 개봉해보면 안 돼?”

“안될 건 없는데…. 근데 진짜 뭐 별 거 없어요. 오빠가 좋다 하면 풀어도 돼요.”


별 거 없다면서 아까 저 포장된 선물 꺼낼 때 백화점 봉투에서 꺼내던데. 저게 과연 진짜 별 거 아닌 게 맞긴 할까. 뭐가 됐든 백화점에서 산 거면 최소 5만원 이상일 텐데 말이다. 돈으로 선물의 값어치를 따질 생각은 없지만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남자친구의 생일을 하림이가 그냥 지나칠 것 같지도 않다. 나한테 신혜성이 좋아하는 브랜드까지 알아갔으니 뭘 사긴 샀겠지. 용화가 풀어보자고 졸라대는 통에 결국 포장을 뜯은 신혜성 손에 쥐어진 건 목도리였다. 내가 산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재질도 가격도 전혀 다를 목도리. 왜 또 하필 이러는지. 나를 얼마나 더 초라하게 만들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야- 이거 진짜 좀 비싸 보인다. 신혜성이 딱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구만. 연구 좀 했는데?”

“진짜요? 오빠는 어때?”


쿠의 말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신혜성을 보던 하림이는 녀석이 다른 말 필요 없이 직접 목도리를 해보이자 기분 좋게 웃었다. 나 때문인지 뭔진 몰라도 계속 딱딱하게 굳어있던 신혜성의 얼굴도 펴지는 걸 보니 정말 연애가 좋긴 한가 보다. 연애랑 유사 연애랑은 정말 다르구나. 아니, 애인이랑 친구는 이렇게 다른 거다. 결국은.


“임누 너는…. 아니다.”


쿠가 내 등 뒤에 감춰뒀던 선물 봉투를 본 듯 했지만 말없이 술만 마시는 걸 보곤 대충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넌 왜 안주냐는 눈치 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늘 챙겨왔던 신혜성의 생일이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이 살뜰히 챙기거나 선물을 고민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그렇게 신혜성을 챙기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지금은 그냥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사실 마음이 많이 쓰리다. 괜찮아질라하면 자꾸 마음을 들쑤시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니 생각보다 더 정리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어차피 신혜성을 좋아하면서도 할 건 다 하고 다녔으니 아마 조금만 지나면 누군가 벌써 만나고 있을 수도 있다. 단지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백퍼센트 다 주지 못한다는 것일 뿐. 신혜성에게 주었던 마음은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만큼 많았다.


“민우오빠 왜 이렇게 술만 마셔요. 안주도 좀 먹어요.”

“……그래. 고마워.”


연달아 자작을 하는 나 때문에 내 속사정 다 아는 용화랑 주연이는 눈치 보기 바쁘고, 신혜성은 뭐라 하고 싶지만 참는 듯했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나를 챙기는 하림이에 얜 진짜 뭘까 싶다. 물론 나를 챙겨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주연이가 챙겨주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다. 여자가 남자를 챙기려는 느낌이랄까. 원래가 이렇게 친절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챙기는 성격인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딱 오해사기 쉬운 성격이기도 했다. 굳이 안주를 덜어서 내 앞에 놓아 줄 필요는 없는데. 사람이 너무 잘해줘도 부담스럽다.

주연이랑 하림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이렇게 말없이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가려고 몸을 움직였더니 용화는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낌새였고, 신혜성은 휙 고개를 쳐들더니 오늘 처음으로 나한테 말을 걸었다.


“이민우.”

“…왜.”

“가려고?”

“너도 별로 내가 반갑진 않은 것 같고. 커플 사이에 껴서 내가 뭐하냐.”

“……너 진짜 왜 그래?”

“뭐가.”

“야야, 그만해. 유치하게스리 왜 싸우려고 그러냐.”


신혜성의 질문을 이해 못한 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꼬여서 요즘 그러는 거냐고 묻는 거겠지. 갑자기 화내고 도망 가버리고, 연락도 씹고. 질풍노도의 시기 때도 안 그랬는데 저 새끼가 왜 저러나 싶겠지. 신혜성이나 나나 화가 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서 그 자리에서 푸는 성격들이었는데 내가 말도 않고 이러고 있으니 오죽 답답할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용화가 중재를 하고 나섰지만 신혜성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나 보다.


“너 솔직히 내가 하림이 만나기 시작한 때부터 좀 이상해지긴 했잖아. 아니야?”

“내가 뭘 어쨌는데 도대체.”

“내가 하림이 만나는 게 싫어?”

“그게 내가 싫고 좋고 할 문제야?”

“아님 내가 여자친구 생긴 게 싫은 거야?”

“그러니까 그걸 내가 왜 싫어하냐고!”

“너만 혼자라 지금 그러는 거 아니냐고. 내가 먼저 여자친구 생겨서 아니꼽고 그래? 아니면 하림이한테 다른 생각이라도 들어?”

“하……. 너 진짜 나 이상한 놈 만든다.”


난 신혜성이 나를 저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놈이라 생각했고, 짝사랑 상대이기 이전에 내가 가장 믿는 친구였다. 근데 나를 저따위 질투나 하면서 남이 잘 되거나 행복해하는 걸 배알 꼴려하는 못난 놈으로 만들다니. 더 가관인 건 자기 여자친구한테 내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고 있나 의심하는 거다. 충격이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내가 뭐 때문에 그랬는지 1프로도 모르는 놈이 나를 몰아가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내가 이렇잖아. 내가 뭘 어떻게 더 해줘야 하는 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피하려고 할수록 자꾸 일이 꼬여간다. 신혜성을 좋아한 내 탓인가. 이게 전부 나 때문에 꼬여버린 일이라고 한다면 더 억울하다. 난 그냥 누군가를 좋아한 죄밖에 없고 그 누군가가 남자에다 친구고 신혜성일 뿐이었는데.


용화는 이 상황이 답답한지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앉아있었고 자리로 돌아오던 주연이와 하림이는 분위기를 살피더니 각자 자기 남자친구 옆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혼자 남은 기분이다. 나는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울컥 한다. 우정도 사랑도 전부 잃어버린 느낌.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뭐지?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친구한테 애인 생겼다고 질투나 하고 아니꼬워하는 그런 놈이라서 이러나 보다. 맘대로 생각해.”

“이민우, 너 진짜….”

“근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자. 내가 네 여자친구한테 다른 맘 품을 가능성은 제로니까 그딴 더러운 오해는 하지 마.”

“…….”

“더 확실히 말해줘? 나 게이니까 그런 걱정 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으로 신혜성한테 커밍아웃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젠 더 감출 것도 없었다. 물론 녀석을 좋아했던 사실은 죽어도 말하지 않을 거지만.

내 갑작스런 고백에 신혜성이 놀라는 것은 물론이오, 알고 있었음에도 용화와 주연이 모두 다시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끝까지 말할 생각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결국 이렇게 욱해서 말해버리는 날이 올 줄이야.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내가 신혜성을 완전히 잊고 아무렇지 않을 때가 온다면 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긴 했었지만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둘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하림이까지 있는 자리에선.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신혜성에게 너 주려고 사온 거니까 버리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종이봉투를 집어던지고 나왔다. 패기 있게 뛰쳐나온 것 까진 좋은데…. 근데 막상 나오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집에 가면 그만인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에 가서 씻고, 자려고 누우면 그 순간 오늘이 꿈이길 바라며 후회할 것만 같았다. 지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날 두고 무슨 얘길 하고 있을지 두렵기도 하고, 신혜성의 생일을 완벽히 망쳐버렸으니 아주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신혜성 말고 용화랑 주연이한테.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나 혼자 도망치는 것 같아서.


신혜성한테는 미안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미안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이젠 미안할 필요도 없다. 제멋대로 그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그걸 입 밖으로 낸 건 신혜성이니까. 지금까진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입장이었고 녀석은 몰랐다 하더라도 어찌됐건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하단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하는 신혜성의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으니. 내 커밍아웃에 신혜성이 어떻게 반응할진 몰라도 지금 당장은 무슨 반응이 나와도 똑같을 것 같다. 나를 이해 못하고 멀어지든, 아니면 변함없든 간에 우리 사이가 달라질 것은 분명했다. 아무리 신혜성이 아무렇지 않게 대하더라도 이젠 내가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신혜성을 좋아했던 걸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행동이든 말이든 더 조심스러워지고 의식하게 될 거였다. 그렇게 벽을 치다보면 어느 샌가 우리는 멀어져있겠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야 신혜성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니, 정리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걸 보니 말이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것을, 생각만 하고 실천은 전혀 하지 못하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이번이 아니면 난 또 핑계를 대며 신혜성에 대한 마음에 미련을 가지며 질질 끌고 있을 테니까.

 

한참을 하얀 입김만 허공에 뿌려대며 걷다 사람에 이리저리 치이며 홍대까지 지나치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려대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용화든 신혜성이든 받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할 생각도 않고 일단 배터리부터 분리한 다음 다시 주머니에 처박았다. 당분간은 정말 혼자 있고 싶다. 이미 요 며칠 혼자 있다 나온 거였지만 이번에야 말로 혼자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정말 떠나보내야지.

 


안녕, 내 미련한 짝사랑.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

혹시 내가 다시 붙잡지 않도록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길.

 

잘 가.

 

 

 

* * *

 



연애 비슷한 것에도 헤어짐은 있었다. 그게 썸이 됐든 뭐든 간에 서로 간만 보다 끝난 사이라 할지라도 헤어짐의 후폭풍이 없지는 않았다. 사귀자는 소리만 안했지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 같던 두 사람이 결국 결실은 맺지 못한 채로 헤어졌다면 사귀다 한 이별과 별 다를 게 없을 거였다. 상대방과 나누던 대화가 가득한 카톡방을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서로 주고받은 것들을 보며 버릴까 말까 갈등도 해봤을 것이다. 같이 갔던 장소를 가면 상대방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런 시간들을 겪다가 어느새 새로운 사랑 앞에 한때 사랑하던 사람, 한때 좋아하던 사람, 한때 썸타던 사람으로 변해버리겠지. 사귀는 것도 뭣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할 건 다 하면서 왜 정작 사귀자는 소리 한 번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서로를 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신혜성이 연애를 했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혼자만의 일방적인 사랑이어도 나름 사랑이었던 만큼 정리해야 할 것도 꽤 많았다. 이를테면 군복무 시절 신혜성과 주고받았던 편지라든지.


“아, 진짜 이건 골 때리네.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그래봤자 고작 3~4년 전 편지인데 도대체 이 시절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손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것도 같은 군바리끼리. 서로 안부라고 해봤자 군대 이야기밖에 더 있었나. 같은 군인 이야기 듣는 게 뭐 그리 재밌다고 꾸준히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엄마보다도 편지를 더 많이 보낸 게 신혜성이었고, 나 역시 신혜성에게 그만큼 편지를 보냈었다. 동반입대까지 할 정도로 신혜성과 나는 끈끈한 사이였다. 그 끈끈함에 나는 흑심을 더 집어넣었지만.

침대 밑에 들어가 있던 박스를 꺼내 하나 둘 먼지 쌓인 추억을 들여다보며 정리란 걸 해보기로 한지 30분. 편지를 하나, 하나 뜯어보며 오글거린다고 팔뚝을 긁고 편지는 모두 폐기처분을 위해 종이봉투에 하나로 모으는 중이었다. 어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모아서 불에 태우는 일 따위 할 수 없었다. 일단 불법이고 그렇게 했다간 재도 겁나 날릴 테니. 추억도 분리수거해서 버려야하다니. 역시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거다.


“헐, 나 이렇게 소름끼치는 놈이었나.”


편지는 대충 해두고 다른 건 뭐가 있나 보는데 신혜성의 것으로 추측되는 머리카락도 나온다. 헐. 미친, 이런 것도 간직했단 말이야? 나 뭐야. 누가 보면 진짜 스토커나 또라인 줄 알겠다. 짝사랑이 집착으로 가는 데에는 진짜 한끝 발 차이다. 나한테는 오랜 순정이어도 누가 보면 오랜 집착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다행히 머리카락 이후론 소름끼칠만한 건 나오지 않았다. 신혜성의 고등학교 명찰, 고등학교 마이 단추, 신혜성이 챙겨줬던 내 교복 넥타이, 신혜성이랑 치던 배드민턴 공, 신혜성이 사준 500원 짜리 손난로―이젠 쓰지도 못한다― 신혜성이 잘 말려서 줬던 은행잎, 신혜성이 바다 가서 주워 온 조개껍질 등등. 엄마가 봤으면 웬 쓰레기를 이렇게 잔뜩 모아놨냐 할 정도로 상자엔 온갖 것이 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은….


“하…….”


녀석과의 추억이었다.

그 잡동사니들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짝사랑 한다 자각하기 이전에도 모아왔던 추억들이, 차마 무엇을 골라내 버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이 기억은 버려야 해, 이건 정말 내가 신혜성을 좋아했기 때문에 했던 행동들이야, 짝사랑의 상처만 되새길 추억이야, 하고 단정 짓기엔 어려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정리를 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1시간도 안돼서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가능성 없는, 힘든 짝사랑을 했었는지도 깨닫는다. 이렇게 친구로서 신혜성과 함께하며 다져놓은 관계와 그 위로 쌓은 추억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르게 변형하거나 다른 결말이 나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실연으로 달려가는 짝사랑이었을 뿐이구나. 다른 결말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신혜성과 하던 온갖 것들이 연애와 비슷하다고 느꼈으니까. 연애는 아니지만 연애와 비슷한 것.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짐정리나 추억 정리가 아니라 마음 정리였다. 근데 사실 마음 정리란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젠 정말 신혜성은 아니다. 그렇게 굳게 마음먹는 거 말곤 지금 상황에선 달리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람 마음이 ‘오늘부터 좋아하지 않는 거야!’ 라고 한다고 해서 내 뜻대로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냥 이젠 마음 단단히 먹고, 포기와 단념이란 걸 조금씩 익히는 수밖에.

정리고 나발이고 지금은 그냥 혼자 마음 다스리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대로 다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침대에 널브러졌다. 나처럼 침대 위에 널브러진 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하다. 신혜성 생일날, 그날 그렇게 가버린 후에 몇 차례 계속 걸려오던 전화도 이튿날부턴 조용해졌다. 신혜성에게서도 용화에게서도 아무 연락이 없다. 없는 게 다행인지 서운해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뒤흔드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날 집에 와서 배터리를 다시 끼우자마자 카톡도 지우고 일단 연락해서 바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싹 다 지워버렸다. 안 보고, 안 궁금해 하는 게 혼자 하는 이별의 첫 단계였다. 그동안은 너무 자주, 오래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동 않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문득 어느새 올해도 1달밖에 남지 않았음을 자각한다. 시험 얼마 안 남았네. 잠깐 반짝여서 공부하더니 또 놓고 있었다. 올해에도 작년과 같은 후회만 늘어놓으며 연말을 맞이해선 안 되는데. 어떻게 매년 똑같은 생각만 반복하는지. 뭉그적대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어디 뒀는지도 모를 강의 계획서를 찾아 헤맨다. 그래도 예의상 시험 범위를 한 번쯤은 들여다보고 시험을 보든지 해야지. 엄마가 내주는 등록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에이, 못난 놈.


나는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강의 핸드아웃을 보며 억지로라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다 책상 한쪽에 자리 잡은 액자로 눈이 간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 역시나 내 옆엔 어깨동무를 한 신혜성이 서있다. 겨우 스물다섯이긴 해도 내 인생의 절반을 녀석과 함께했다. 내가 빛나던 순간에도, 어둠 속으로 도망치던 순간에도, 그 모든 순간에 신혜성이 함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살지, 삶의 목표가 없을 때 나를 잡아준 건 신혜성이었다.

‘이제 매일 보진 못해도 내가 연락했을 때 씹으면 죽어.’

‘알았다고. 아, 무슨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전화하래.’

‘맨날 보다가 안 봐봐. 안 그립겠냐?’

졸업식 날 매일 연락해라, 자기 연락 씹으면 죽는다- 하며 남들이 들으면 쟤네 뭐냐 싶을 정도로 간지러운―나한텐 간지러웠다―말들을 내뱉으며 신신당부하는 신혜성에게 나는 툴툴 대며 대답했지만 내심 좋아했다. 멀지 않은 곳에 살더라도 대학에 가면 좀처럼 학창시절 친구들과는 어울리기 힘든데. 신혜성 만큼은 절대 그럴 일 없겠구나 싶었다. 내 짝사랑도 허무하게 멀어지면서 끝나버리진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다. 차라리 자연스레 끝나버렸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지금처럼 억지로 끊어내려 하지 않고.

 

마음고생도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갑자기 변화와 함께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를 덮친다. 모든 시간이 항상 좋지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고 나니 새해 목표는 딱 하나로 정해진다.

 


이민우,

새해엔 나를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좀 더 아끼면서 살자!

 


* * *

 


「 만나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바다. 이 문자를 씹을 시엔 너희 집으로 쳐들어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불어버릴 것이다. 아줌마 민우가 사실 남자를 좋아한다는데요, 민우 저한테 주십시오 제가 잘 데리고 살겠습니다 하고 내가 무릎을 꿇는 경악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너는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이다. 오늘 시험이 끝난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오늘 저녁 8시에 맛나로 나와라. 이상 끗. 」


“뭐 이런 거지같은 협박이 다 있어….”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대뜸 협박문자 같지도 않은 협박문자를 보내온 구용화에 강의실을 나가다 말고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시험 끝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대. 가만 보면 이 새끼도 날 너무 좋아한다. 신혜성 만큼은 아니었지만. 아, 또 신혜성 생각한다.

 


나름 시험다운 시험을 보기 위해서 군 제대 이후 복학한 첫 학기에나 하던 밤샘까지 해가며 공부를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졸업할 때 다가오니 이제야 정신 차린 거냐고 혀를 찼다. 그래도 밤 샌다고 야참까지 챙겨준 걸 보면 우리 엄마도 츤데레 끼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물론 그렇게 공부한다고 해서 벼락치기가 큰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백지로 내고 나왔을 수도 있는 거, 그래도 몇 자 쓰고 나왔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나름 대학생의 시험기간을 보내고 나니 시간이 훅 가있더라. 다른 생각 안 하고 시간이 빨리 간 건 나한텐 좋은 일이었다. 이를테면 신혜성 생각이라든가, 또 신혜성 생각이라든가, 아니면 신혜성 생각이라든가. 결국 신혜성 생각을 하는 일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다는 소리다.


신혜성은 물론, 용화한테도 연락은 없었지만 이젠 그렇다고 서운하다거나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진짜 친구라면 언제 갑자기 연락을 하든 어색하지도 않을 것이요, 불시에 찾아와도 불편하지 않을 거였다. 신혜성이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만약 이번 일로 우리가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어진다면 우리 사이는 딱 그 정도였던 거다. 진심을 다해 신혜성을 좋아했지만 나도 녀석과 완전히 담을 쌓고 멀어지고픈 마음은 없었다.

녀석의 생일날 처음엔 나를 고작 그 정도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지금껏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마음을 감춰왔나 싶었다. 근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정리하겠다고 다른 일에 집중할수록 더 확실해졌다. 내 일상에서 신혜성이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서 내가 얼마나 미련하게 스스로 상처받기를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신혜성도 나에게 나와 똑같은 양의 마음을 주었는데 그걸 다르게 받아들이고 혼자 상처받고 혼자 회복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건 나였다. 뭐 그렇다고 나한테 그날 했던 말들을 그냥 용서해주진 못하겠다. 나쁜 새끼.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서며 시간을 확인했다. 집에서 한숨 자다가 나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 너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 쿠에게 답장을 보내고 찾아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지는 신혜성의 번호를 떠올리다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처박았다. 내가 고민하는 만큼 신혜성도 타이밍을 보고 있을까? 나는 생각 안 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신혜성은 조금이라도 내 생각 해줬으면 좋겠다.

 




집에 와서 기절하듯 자다 8시가 다 돼서 눈을 뜨곤 부랴부랴 맛나로 달려 나갔더니, 쿠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사장님한테 포장을 취소해 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구용화는 너 안 나오는 줄 알고 치킨 싸들고 집으로 쳐들어갈 작정이었다며 진짠지 뻥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곤, 오자마자 미리 시켜놓은 생맥주로 건배를 하게 만들었다. 이제야 맘 편히 이런저런 얘기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나도 편하긴 한데 구용화는 가끔가다 불안하단 말이지. 무슨 얘기까지 할지 몰라서. 쿠랑 만났으니 오늘 신혜성 얘길 안 하는 건 무리고. 그동안 아무 말 없다가 나한테 뭔 얘길 하려고 그런 괴상한 문자까지 보내가며 만나자고 했는지 아주 쬐끔은 걱정된다.


“이 자식은 형님한테 살아있다고 생존신고는 했어야지.”

“나보다 생일도 느린 게 자꾸 형님이란다.”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냐?”

“야, 우리가 얼마나 자주 연락하던 사이라고.”

“서운하네- 이민우. 그래도 그날 그렇게 사라졌으면서 궁금하지도 않았냐? 너 진짜 먼저 연락 한 번 안 하더라.”

“미안하단 소리 들으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내가 너한테 미안하단 소릴 왜 듣냐.”


생맥 500을 순식간에 비우고 나서 바로 또 한 잔을 더 시킨 쿠가 빨리 마시라고 재촉하듯이 혼자 짠을 하더니 미간을 찌푸린다. 어쨌든 일은 다 벌려놓고 장본인이 혼자 쏙 빠져나가버렸으니 용화도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곤란하긴 했을 거니까.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서 미안하긴 미안하다. 쿠는 그런 나한테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오히려 따져 묻지만.


“어떻게 할래.”

“뭘.”

“술 좀 알딸딸해졌을 때 말해주랴, 아님 그냥 지금 할까.”


무슨 말을 하려고 술을 마시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멀쩡할 때 듣나 취해서 듣나 괴로운 건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그냥 멀쩡한 정신에 듣고 나중에 거하게 취해 필름이라도 끊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냥 읊어보라고 하고 물마시듯이 맥주를 꿀꺽 꿀꺽 삼켰다. 이정도 맥주 가지곤 취하기는커녕 괜히 배만 부르지만 쿠가 저러니까 왠지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다.


“너 그날 그러고 간 다음에.”

“엉.”

“신혜성 진짜 한마디도 안 하더라.”

“…충격 먹어서?”

“충격을 받은 건지 뭔진 모르겠는데 하림이가 말 거는데도 입 딱 닫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날은 그렇게 파토난 거지.”

“뭐야? 그게 끝?”


뭔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그날은 그렇게 자리가 파토나고 끝났다는 게 전부라니. 고작 이거 말하려고 술을 먼저 마시네 마네 한 거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역시 뭔가 더 있었는지 쿠가 입을 마저 열었다. 아무튼 나도 성질만 급해가지고. 한국인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거늘!


“12월 되고 신혜성이 먼저 만나자 하더라고. 왜 너한테 만나자 안 하고 나한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났지. 만나서도 한참 술만 마시다가 겨우 묻더라.”

“…….”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뭐를?”

“너 게이인 거.”


어쩌면 신혜성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알아온 절친한 친구의 진실.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이 거짓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속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알게 된 사실이 보통 놀라운 거였어야 말이지.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말했지. 안지 몇 년 됐다고. 그랬더니 이자식이 술을 더 마시는 거야. 물론 신혜성 주량이 보통은 넘지만 무슨 놀면서 죽자고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 없이 그러고 있으니까 존나 무섭더라. 나 쫄았잖아.”


신혜성 고거 속이나 멀쩡했을지 모르겠다. 나랑 주량도 크게 차이 안 나는데. 술 마실 때 얘기 많이 하면서 밤새도록 마시는 타입인 것도 나랑 비슷한데 단시간에 그렇게 마셔댔으면 분명 그날 편하게 잠들진 못했을 거다. 용화 말을 듣고 있을수록 어쩐지 나도 술이 땡겨서 어느새 잔을 비운지 오래였다.


“아무튼 뭐라 말은 해야겠어서 이민우 좀 이해해줘라- 했더니 이 새끼가 대뜸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자기가 설마 이민우를 이해 못하겠냐고.”

“…그래.”

“민우를 알아도 자기가 더 오래 알았고 친해도 더 친했는데 동성애자라고 해서 자기가 민우를 이해 못할 거라고 생각 하냐고. 자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이해할 수 있대. 사람한테 해 끼치는 범죄만 아니라면. 아니다. 범죄를 저질러도 자긴 다 이해해줄 수 있다 그랬나.”


참…. 신혜성의 저 맹목적인 우정도 대단하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하고 내가 어찌됐든 간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신혜성이 아직 나를 저버리거나 믿음이 깨져서 돌아선 게 아니라.


“근데 그래서 화가 난대. 자긴 널 그렇게 생각하는데 넌 아니었던 것 같다고. 지금까지 왜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서운하고,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인데 자기만 몰랐다는 것도 엄청 서운한 것 같더라.”

“하아….”

“그러고 나서 전에 너 짝사랑하던 사람 있었단 얘기까지 기억해내면서 그 사람도 남자냐고 묻길래 남자는 맞는데 나도 누군지는 모른다고 딱 잡아 땠지. 뭐 어쨌든 자긴 그것도 전혀 몰랐는데, 이래저래 임누 네가 자기한테 비밀이 그렇게 많았던 게 서운한 모양이더라.”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항상 붙어 다녔는데 티낸 적도 없고 말 한 번 꺼내본 적 없었으니. 내가 스스로 신혜성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모르는 게 없는 죽마고우라고 자청했던 것처럼, 신혜성도 아마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이민우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는 제 것이라고 여기며 지금껏 지내왔을 텐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비밀들이 속속 밝혀지니 화도 나고 서운했을 게 당연하다. 쿠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걸 자기만 몰랐다고 생각하니 더 그럴 테지.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말해주고, 틀어진 걸 똑바로 맞춰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신혜성한테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대자니 딱히 이유라고 댈 만한 것도 없다. 차라리 내가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고, 처음으로 밝히는 거였으면 그냥 지금까지 왜 말 안 했냐- 잠깐 서운해 하고 넘어갔을 텐데. 좀 섭섭하긴 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엔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이해하고 넘어갔을 거였다. 근데 이미 이 모든 사실을 다른 사람은 알고 있었다는 게 신혜성한테는 가장 섭섭한 일인 모양이다.


“그 말 말고는…. 뭐 다른 말은 없었고?”

“어. 그냥 그러고 술 좀 더 마시다 들어갔어.”

“너는 뭐 더 말한 거 없는 거지?”

“그-으럼. 아무 말 안 했어.”


그럼이란 대답이 영 시원찮았지만 어쨌든 나대신 신혜성한테 불려나가서 열심히 술을 마셔준 쿠를 닦달할 수는 없었다. 아, 그나저나 이 상황이면 내가 먼저 연락해야 되는 것 같은데. 그동안 말 못해서 미안하다. 너를 속인 건 아니다. 그냥 말할 타이밍이 없었다고 해야 되나. 갑자기 또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제 마음은 어떻게 혼자 추스르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은데 다시 신혜성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이젠 그냥 무조건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나? 지나가는 농담처럼 사실 내가 좋아했던 게 너야! 라고 말해볼까…했지만 역시 이건 아니다. 그래도 몇 년을 고이고이 키워온 마음을 그런 식으로 장난삼아 말하고 싶진 않다. 앞으로는 더 키울 일 없을지라도. 지난 일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고백하고 싶진 않다.

 

아무튼 그렇게 용화와 술을 마시며 취해서 앞으로 신혜성 잊고 나도 새로 시작하겠다 어쩌겠다 떠들어대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 신혜성한테 슬쩍 연락이라도 먼저 해봐야겠다―생각하는 순간 쿠에게서 날아든 문자 한통에 술이 확 깨버린다.


아……. 구용화 이 골 때리는 새끼!

 

「 근데 나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왠지 신혜성한테 그날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 신혜성이라고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미안하다 이미누 」

 

 

* * *

 

 

신혜성이 진짜 내가 자기 좋아했던 거 알았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연락 안 하는 거면 어떻게 하지. 나는 연락해서 뭐라 그러지. 모르는 척해? 그냥 태연하게 연락해서 일단 만나자 해? 어차피 벌어진 거 그냥 대놓고 고백이라도 해볼까? 어차피 대답 바라고 하는 고백도 아니고, 그냥 과거형으로 너 오랫동안 좋아했었다! 근데 지금은 맘 접었다! 이렇게만 말해도 되잖아. 설마 그래서 불편해지고 멀어지는 건 아니겠지? 와, 나 진짜 어떻게 하냐.


쿠가 자기가 술 취해서 다 불었을지도 모른다고 문자를 보낸 뒤에 맘 같아선 쫓아가서 탈탈 털어주고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용화를 탓해서 뭐하나. 이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신혜성을 어떻게 볼지나 걱정해야지. 이대로 연락 안 하다간 새해로 넘어가고, 그러다 보면 어색하게 사이만 벌어질까봐 먼저 연락해야겠다 맘은 먹었는데 시작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대뜸 전화해서 나와라! 하면 이유 없이도 그냥 나오던 신혜성과 이민우였는데. 어쩌다가 전화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만나는 데에도 일이 있어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는지. 이거 은근히 씁쓸하다.

일단 신혜성이 진짜 알았든 아니든 만나서 해명 아닌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우선……. 염탐을 하기로 했다. 웬 뜬금없는 염탐이냐 하면,


“뭘 하고 사는지 좀 알아야 만나서 말을 하든지 하지.”


신혜성 생일 이후로 싹 끊었던 sns를 다시 하나씩 살리며 들어가 본다. 요즘 이것만큼 편하게 남 사생활 엿볼 수 있는 것도 없단 말이지. 신혜성이야 워낙에 페이스북 이런 거랑은 거리가 멀긴 하지만. 남들 페이스북에 가끔 태그 되거나 하는 것들로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했다.


“이게 무슨 구남친 돋는 짓이냐….”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마음에 염탐하는 것도 아니고. 페이스북이며 카톡이며 뒤지는데 어째 카톡 목록에 신혜성이 없다. 신혜성도 지웠나. 페이스북엔 역시나 아무 업데이트도 없고 신혜성이 태그 된 일도 없다. 그저 담벼락에 남겨진 쿠의 한마디만 있을 뿐.


‘술 사줄게 짜샤. 힘내라.’


뭔가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무슨 힘든 일이 있기에 술을 사주겠다 하는지. 혹시…? 라는 못된 생각이 드는 건 아직도 신혜성에게 미련이 많이 남아서 그러는 걸까. 에이, 그래도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은 건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신혜성한테 모르는 척 연락해볼까. 잘 지내냐. 요즘 어떻게 지내냐……. 이런 고민 할 필요 없이 쿠한테 물어보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대놓고 신혜성한테 무슨 일 있냐, 헤어졌나 물어보면 너무 속보일 것 같으니 그건 안 되겠다. 신혜성 잊고 새 출발하겠다 했던 게 엊그젠데 신혜성의 불행을 기뻐하는 건 안 되지. 암. 설령 진짜 신혜성과 권하림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 아닌가?

 


“어, 쿠 난데.”

-엉야.

“나……. 혜성이랑 얘기 좀 해보게.”

-근데?

“네가 혜성이 좀 데리고 나오면 안 되냐?”

-네가 연락하면 되잖아?

“아 뭔가 지금 연락하기 그래. 누구씨가 내가 신혜성 좋아했다고 떠들어놔서.”

-……알았다. 안 그래도 신혜성 술 사주려고 했는데. 그럼 어디서 볼래.


지겹도록 자주 가는 맛나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기 전에 왜 신혜성한테 술 사주려는 거냐―묻고 싶었지만 너무 속보이는 질문 일까봐 그만뒀다. 어차피 만나면 알게 되겠지. 아, 근데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왜 신혜성이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까 내 입꼬리는 자꾸 올라가는지.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남의 불행이나 슬픔을 은근 좋아하지 말라고, 이민우. 신혜성이 헤어졌든 아니든 이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스스로를 타박해봤자 결국 아직 신혜성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다 접진 못했다는 걸 계속 되새기는 꼴밖에 안 된다. 어차피 한순간에 모두 다 잊겠다, 버리겠다 했던 것도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래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점점 무덤덤해지고 조금씩 무뎌져 가는 거지. 나도 나 혼자만의 이별 앞에서 이렇게 점점 익숙해져가니까, 신혜성도 첫 연애와 이별 앞에서 언젠가 이렇게 되겠지.


나도 그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게 익숙해질 날이 오겠지?

 


* * *

 


용화 먼저 만나고 있으라고 하고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맛나로 가는 길. 신혜성과는 11월 말 이후로 안 봤으니 거의 3주를 넘게 안 보고 지낸 거였다. 군대에 있을 때 빼곤 이렇게 오랫동안 안 봤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너무 자주 보긴 했었다.


맛나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한 열 번은 고민하다 소심하게 구는 내 자신이 싫어 속으로 구시렁댔다. 신혜성한테 커밍아웃하고 말하고 선물 던지고 오던 패기는 어디 갔는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눈치를 보고 소심하게 굴어. 신혜성이랑 구용화 만나러 가는 걸 왜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냐며 스스로 달래고 나서야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 오랫동안 서있어서 차가워진 몸을 손으로 비비며 안을 둘러보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역시 사람이 많다. 나를 먼저 발견한 쿠가 손을 흔드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혜성 앞에 섰을 때, 가슴이 발밑까지 훅 꺼졌다가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오랜만.”


우리의 기준에서 오랜만에 보는 신혜성의 얼굴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지 못했다. 무슨 마음고생을 했는지 살이 빠져 가뜩이나 작은 얼굴은 더 작아지고 뾰족해진 느낌이었다. 푸석푸석한 얼굴에 며칠 잠을 못잔 듯 생기 없는 눈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 잠시 커졌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 얼굴을 보니 확실해진다. 헤어졌구나.


“내가 임누도 불렀어. 야, 너네 언제까지 유치하게 누가 먼저 연락하나 재고 있을래. 그냥 남자답게 털어버려!”


그러더니 자긴 남자답게 화장실에 털어버리고 오겠다며 사라지는 쿠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주 앉은 신혜성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아서 얼른 입꼬리를 원위치 시켰지만. 아무래도 그간 진짜 맘고생 제대로 한 모양이다. 첫 연애와 첫 이별이니 사랑한 기간이 얼마나 됐든 간에 나름 힘들긴 했을 테니까. 하지만 고작 100일 정도의 시간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사랑으로 발전시켜줄 수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과연 서로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사랑에 무슨 정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신혜성의 저런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내 맘도 편치는 못하다. 신혜성이 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웃던 상황과는 또 다르다. 신혜성이 불행하길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었고, 신혜성이 슬퍼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불행하길 바라겠냐고. 신혜성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게 내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한들 신혜성이 하루 빨리 헤어지길 바라거나 하진 않았다. 신혜성의 옆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던 때에도 내가 바라던 건 신혜성이 행복한 거였다. 그 옆에 내가 있든, 없든.

상해버린 신혜성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신혜성도 마찬가지 일지 모른다. 이제 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망설여지겠지. 그래도 이렇게 마주앉아서 어색하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 버티기가 힘들다.


“잘 지냈어?”


그래서 한마디 내뱉었는데 고작 잘 지냈어? 라니! 저 얼굴을 봐라. 잘 지낸 것 같냐. 질문을 골라도 너무 형식적인 질문을 골랐다. 내 물음에 신혜성은 피곤한 눈을 또르르 굴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꼭 ‘보면 모르냐.’ 하는 느낌 같아서 괜히 주눅이 든다. 뭐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너는. 잘 지냈어?”

“나야 뭐….”


나는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다. 오랜만에 공부란 것도 좀 해봤고 네가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려 애써봤던 것 같다. 지금까진 열심히 사랑―짝 사랑도 사랑이니까―하며 살았다면, 지금은 다른 것도 좀 열심히 하며 살아보려 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열심히 하는 건 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거지만.

끝을 흐린 말속에 담긴 의미를 ‘그럭저럭 잘 지냈어.’ 라고 알아들은 듯 신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다 쉽게 나오질 않는지 혀로 입술을 훑는다.


“할 말 있으면….”

“…….”

“해.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고.”


이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으니까. 아직 나도 마음의 준비가 완벽하게 되진 않았지만 신혜성이 묻는다면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다. 비밀이 있었더라도 그간 신혜성에 대한 내 마음은 솔직했다. 항상 진심이었다.


“진짜로…. 나 좋아했어?”

“……응.”


신혜성이랑 이런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오다니. 난 아마 우리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상상했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신혜성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신혜성은 다음 질문까지 또 한참을 망설이면서도 나를 보는 시선을 거둬들이진 않았다.


“안 힘들었어?”

“…….”


참, 신혜성이나 구용화나. 진짜 좋은 친구들이긴 하구나. 힘들지 않았냐고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걸 보면. 게다가 당사자인 신혜성까지 이렇게 물어줄 줄은 몰랐다. 나는 네가 어떻게 해도, 어떻게 봐도 친구야. 그렇게 선을 그어주면 차라리 알았다고 물러서고 무슨 수를 써서든 나도 친구로만 남으려 더 애를 썼을 텐데. 힘들었냐고 물어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속으로 삭히며 혼자 힘들진 않았냐고 오히려 나를 생각해주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더 어려워진다. 이러니 내가 너를 안 좋아하고 배기겠냐고.

괜찮다고 대답하려 하는데 목이 꽉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내가 늘 바라보던 상대가 나를 알아봐주며 힘들지 않냐고 도닥여주니 더 울컥했나 보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끓어오르는 울음을 참으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꼭 쥐었다. 청승맞게 울고 싶진 않다. 울어서 가뜩이나 힘든 신혜성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나를 다 안다는 듯 신혜성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화장실에 간다던 구용화는 일부러 피해준 건지 감감무소식이고, 신혜성은 확 올라왔던 내 눈물이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주며 혼자 술을 마셨다. 여러모로 지금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마음이 복잡할 게 신혜성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 생각한 친구가 사실 남자를 좋아하고, 거기다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안지 얼마 안됐고, 첫 연애는 끝이 났다. 나까지 짐을 얹어준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진다.

이제 나는 다 진정이 됐다는 뜻으로 신혜성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니 나를 힐끔 본 녀석이 너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묻는다. 굳이 물어서 상처를 들추거나 확인 사살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정말 끝난 건지 아주 쬐금 궁금하긴 하다.


“…헤어졌어?”

“응.”

“……왜?”

“끌리는 것도 그냥이더니 헤어지는 것도…. 그냥이더라.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너무 빨리 끌려서 빨리 식은 것 같기도 하고.”


정말 헤어졌구나. 헤어진 사람치곤 남의 일처럼 너무 무덤덤하게 말해서 딱히 위로를 한다거나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얼굴은 저 모양 저 꼴을 하고 헤어짐을 말하는 건 너무 태평하다.


“힘들지?”


묻지 않아도 이미 겉모습만 보고도 대답을 알 수 있을 만한 질문이긴 하지만. 신혜성은 대답대신 씁쓸하게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힘들었지.”

“…….”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갑자기 왜 얘기가 그리로 튀는지 모르겠다. 이게 또 오글거리는 병이 도졌는지 저런 질문이나 해대고 있다. 살만은 한가보다.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며 쳐다보는데 진심으로 물은 건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한다. 글쎄다.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며 지냈지만 순간, 순간 얼굴이 떠오른다거나 전화번호가 눈앞에 아른 거리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십년 넘게 붙어 다녔는데 며칠 못 봤다고 보고 싶겠냐.”

“와, 너무하네.”


분위기를 바꿔보려 하는 건지, 아님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건지 신혜성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다. 나도 평소에 그랬듯 자연스럽게 받아쳐줄까 했는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신혜성이 그러는 거다.


“난 그렇게 자주 보던 너랑 못 보니까 더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러던데.”


이게 내가 자길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뱉은 말이면 지랄을 한다며 괜히 더 세게 반응하고, 오글거린다며 팔뚝을 벅벅 긁었을 텐데. 내가 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혹할 만한 말을 내뱉는 신혜성한테 나는 도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까. 일부러 이러는 건가. 어쩌라는 거지.


“그랬냐.”

“…민우야.”


그렇게 부르지 좀 마. 왜 신혜성이 저렇게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흠칫하며 내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듣고 있어야 하냐고.

갑자기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쿠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게 된다. 신혜성이 무슨 말을 할지 점점 무서워진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과 지난번 녀석의 생일날 서늘하게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겹쳐진다. 그때 신혜성의 본심은 뭐였을까. 진짜로 나를 그렇게 의심했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때 일에 대해 사과 한마디 못 들었네. 이 새끼 이거 그냥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잠깐만.”

“어?”

“나 묻고 싶은 거 또 생겼는데.”

“어, 말해.”

“너 네 생일날 나한테 한 말. 진심이었어?”

“무슨……. 아, 그거.”


아무래도 신혜성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내가 내뱉은 말이 파급력이 컸던 건 인정하지만 나한텐 그 말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상처 되는 말이었다. 순간 짜증나서 내뱉은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그런 놈으로 생각했다면 신혜성한테 좀 실망할 것 같기도 하다.


“진짜 나를 친구 여자한테 딴 맘이나 품는 개새끼로 생각한 거야?”

“그게 아니라…. 아, 뭐부터 말해야 되냐 진짜.”

“뭘 뭐부터 말해. 그냥 딱 그것만 말해보라니까?”

“아니, 그때 사실…. 좀 헷갈렸어.”

“뭐가. 내가?”

“아니. 내 마음이.”


마음이 헷갈릴 게 뭐가 있어. 나를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의심했다면 헷갈린 게 아니라 그냥 끝난 거지. 잘 생각해서 대답하라는 뜻을 담아 눈을 치켜뜨고 노려봐줬더니 이젠 신혜성이 슬쩍 시선을 내리깐다.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걸 보니 진짠가. 내가 자꾸 자기 피하고 연락 씹어서 욱했던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화낸 거란 말이야?


“어떻게 그딴 오해를 할 수가 있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근데 왜 눈을 피해. 네 마음이 뭐 어떻게 헷갈렸는데. 말을 해봐.”


내 닦달에 눈치를 보던 신혜성은 마침내 무언가 결심했는지 휙 고개를 들더니 나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순간 멈칫하긴 했지만 나도 피하지 않고 같이 바라봐주니 신혜성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몸을 탁자 위로 내밀며 얼굴을 들이민 신혜성이 주변을 휙휙 살피더니 도대체 이 새끼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고 의아해하는 내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른다. 중학교 시절, 그때처럼.


“민우야.”

“왜 말을 돌리….”

“우리 뽀뽀 한 번만 해보자.”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뜬금없이 뽀뽀 타령을 하고 있는 신혜성을 어찌 하오리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냐고 화를 내려는데 그보다 먼저 신혜성의 입술이 가볍게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다. 살짝 엉덩이를 들어 얼굴을 쭉 내민 채 다가온 신혜성을 피할 새도 없었다. 지금 뭐가 눈앞에 펼쳐진 건지, 입술에 닿았던 게 뭔지 알면서도 믿기 싫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내가 신혜성을 좋아하는 입장이더라도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이런 식으로 구는 건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남자들끼리 뽀뽀 그까짓 거 장난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었다.


“너 지금 뭐하는데.”

“내가 그랬잖아. 헷갈렸다고.”

“헷갈리는데 뭐 어쩌라고. 이러면 뭐가 확실해져?”

“나도 확실히 알아보려고 한 거야.”

“와― 나 진짜. 이런 식으로 내 마음 농락당할지는 몰랐네.”

“무슨…. 민우야!”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멍청하게 앉아 신혜성 하는 소릴 다 들어주며 바보가 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리는 나 때문에 당황했는지 겉옷은 입지도 못하고 손에 든 채 밖으로 따라 나온 신혜성이었지만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하든 다 나를 열 받게 하는 소리일 것 같았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역시 얘기 하라고 피해준 게 맞았는지 용화가 얘기 다 잘 했냐며 다가왔지만 대답 않고 걷기만 했다. 저를 지나쳐 훅 가버리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던 쿠는 뒤따라 나온 신혜성을 보곤 대충 상황을 이해했는지 그 이상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신혜성만 내 뒤를 밟을 뿐.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삭히고, 지켜온 마음인데. 비록 이제 정리하자고 결론을 내렸어도 상처받은 순간의 추억까지도 소중한 내 마음이었다. 그걸 뜻하지 않게 신혜성에게 말하는 순간이 오긴 했지만 신혜성한테 보여준 건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내가 널 어떤 맘으로, 어떻게 좋아했는데.

 

“민우야.”

“…….”

“이민우―”

“…….”


집을 향해 앞만 보고 걷는 나를 뒤따라오며 신혜성은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언젠가 한 번은 돌아보겠지, 멈춰 서서 그만 좀 부르라고 화라도 내겠지 하는 심보인 것 같았다. 내가 언제까지고 너만 쳐다보고 있을 줄 알았냐.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는 놈이라고.


그나마 사람이 좀 지나다니던 중심가를 벗어나니 간혹 한두 사람 마주칠까 말까한 골목길이 나왔고, 신혜성은 여전히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뒤를 밟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늘 이랬다. 내가 자기 연락 다 씹고 잠수 탈 때에도 신혜성은 끈질기게 연락만 해댔지 내 앞에 나타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도 내 앞을 가로 막고 멈추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다지 간절하지도, 절박하지도 않기 때문일까.

이제 집까지 한 100미터 쯤 남았을 때였다. 어느새 하늘에서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는 가 싶더니 금세 그 숫자가 많아져 머리에도 쌓이고 발에 밟히기 시작하자 신혜성은 그제야 뒤에서 나를 붙잡아 돌려 세웠다. 눈을 내리깔고 딴 데만 보려는 나한테 대뜸 자기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해주더니 머리에 쌓인 눈을 툭, 툭, 무심한 듯 부드럽게 털어준다. 내가 목도리를 도로 풀려고 하니 그 손을 저지하며 내 손목을 잡아온다.


“뭐하는 건데.”

“이거 목도리. 네가 준 거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고 보니 내가 생일날 던지고 간 거다. 그날 신혜성꺼랑 같이 산 내 목도리는 방 안 어딘가에 처박혀있는데. 보면 자꾸 그날이 떠올라서 하고 다닌 적도 없었다. 내가 냉랭하게 말을 하든 말든 신혜성은 그 특유의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멍청한 건진 몰라도 나는 진짜 신혜성이 뭘 바라고, 뭘 바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뜬금없이 뽀뽀를 하고 내 손목을 휘어잡는다고 설레거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민우야.”

“그래, 무슨 말 하는지 오늘 딱 여기까지만 들어줄게. 해봐.”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여기까지 쫒아왔는지 들어나 주자 싶어서 눈을 마주치니 신혜성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신혜성이 말을 고르는 사이에도 눈은 어느새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나 아까 그거…. 첫 뽀뽀 아니다.”

“장난해?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왔어?”

“아니, 들어봐 봐. 내가 전에 그랬잖아. 중학교 때 해봤다고.”


그러고 보니 전에 쿠가 캐물어서 진도 어디까지 나갔나 말할 때 그런 말을 했었다. 근데 지금 상황에서 왜 또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그 일이 지금 나와야 할 타이밍인가?


“근데. 그게 왜?”

“너 진짜로 기억 안나?”

“뭐 나는 네가 처음으로 뽀뽀한 날까지 기억하고 있어야 되냐?”

“그래도…. 너랑 한 건데 기억이 안나?”

“……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다. 나랑 했다고? 나랑 중학교 때 뽀뽀를 했다고? 키스도 아니고 고작 뽀뽀이긴 해도 엄연히 입술에다 하는 거였는데 내가 신혜성이랑 그런 짓을 해놓고 기억 못할 리 없었다. 무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인데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다고? 이건 신혜성의 착각이거나 혹은 조작이 아니고서야….


“중3때, 우리 기말고사도 다 끝나고 처음으로 몰래 술 마시던 날. 이래도 기억 안나?”


친구들끼리 모여 몰래 처음으로 음주 한 번 해보겠다고 집에서 술 한 병씩 훔쳐 마침 비어있던 신혜성네 집에 모였던 일을 기억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다 술을 처음 마셔본 탓에 자기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취해서 기절해 있다가 다음날 점심때가 다 돼서야 깼던 기억이 전부다. 그날 내가 기억 못하는 뭔가가 있었던 건가.


“그날 너 취해서 나한테 그랬어.”

“…….”

“키스해본 적 있냐고. 없다고 그랬더니 자기가 한 수 가르쳐주겠다면서 대뜸 입술에 뽀뽀만 하고 떨어지더라. 내가 벙쪄서 있으니까 넌 웃기만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고.”


그런 쪽팔린 기억이 있었던가. 술에 취해서 기억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잊어버리고 싶어서 일부러 삭제한 것도 같고. 그땐 신혜성을 좋아할 때도 아니고, 그냥 술에 한껏 취해서 그랬던 것 같긴 한데…. 내가 그랬든 아니든 그래서 지금 신혜성이 이러는 이유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가 싶다.


“내가 헷갈렸다고 했잖아.”

“…어.”

“하림이 만날 때도…. 가끔 하림이가 너한테 가깝게 다가가거나 챙기고, 친근하게 굴 때 사실 신경 쓰였어.”

“…….”

“네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냥 자꾸 신경이 쓰이더라고.”

“야, 그건….”

“알아. 네가 아니라 하림이가 문제였다는 건. 근데 점점 그 신경 쓰이는 게, 하림이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 헷갈리더라고. 둘이 붙어있을 때 자꾸 신경 쓰이는 게 누구 때문인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지금은…. 알겠어?”


마음이 헷갈렸단 소리가 이 뜻인가 보다. 여자친구랑 가장 절친한 친구가 같이 있는 게 신경 쓰였는데 그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더라. 자기도 자기 맘이 헷갈렸는데, 그래서 그거 시험해 보려고 나한테 다시 뽀뽀라도 했다 그건가. 그럼 이제 결론이라도 나야지. 나는 잘 정리해놓고 있던 거 다시 다 엎고 엉망이 된 느낌인데.


신혜성은 바로 대답은 않고 내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곤 자기 머리에 쌓인 눈은 휙 한 번 크게 털고 나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아까 처음에 나 봤을 때, 어때 보였어?”

“……힘들어 보였어.”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진 몰라도 일단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맘고생 좀 했구나 싶은 얼굴이었지. 딱 실연한 얼굴 같았다. 내가 신혜성의 첫 여자친구를 소개 받은 날 거울에서 보던 내 얼굴.


“그럼 지금은 어때 보여?”

“…추워 보이는데.”


둘 다 마찬가지겠지만 밖에서 오래 있는 데다 눈까지 와서 얼굴이며 몸이며 다 얼어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귀만 빨간 것이 엄청 추워 보인다. 신혜성 눈에 비친 나도 그러겠지.


내 대답에 신혜성은 굳어버리기 시작한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살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살 것 같아.”

“…….”

“너 만나니까.”

 

가슴이 크게 쿵! 하고 누군가 때린 것처럼 흔들리더니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진짜 심장이 빨리 뛰는지 온몸으로 피가 막 도는 것처럼 따듯한 무언가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슴 뛰게 하는 말임에는 분명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저만 쳐다보는 나를, 신혜성은 내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꺼내 맞잡더니 천천히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신혜성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진짜로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냥 순간, 순간 벅찼을 뿐.


“네가 게이라고 말해서도 아니고, 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여서도 아니고.”

“…….”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아서도 아니고.”

“…….”

“그냥 솔직한 내 마음이야. 그게.”


집 앞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할 말을 정리하기엔 그 거리가 너무 짧았다. 손을 놓고 먼저 들어가라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는 신혜성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은데 선뜻 입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신혜성의 말이 내 마음을 받아준다, 나도 너와 같다 하는 의미도 아니고 연애를 하자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그냥 그 말이 지금까지의 내 마음 고생을, 신혜성을 좋아했던 그 오랜 시간을 다 보상해주는 것만 같다.

 

“들어가.”

“…응.”

“연락 씹으면 죽는다.”

“…알았다.”


내일이 되면 또 이전처럼 돌아가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들어가라니까?”

“알았다고. 너나 먼저 가라고.”

 

네가 먼저 들어가라, 너 먼저 가라, 하며 몇 분을 대문 앞에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들을 보며 생각한다.

 

 


그냥 우리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겠다고.

 

 

 

 

 

 

 

 

 

 

<숨은 이야기>

 


 

혜성은 가끔 민우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전 같으면 맛있어 보이는 걸 발견하면 서로 같이 가보자 하곤 했는데, 요즘은 영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민우가 좋아할만한 걸 혜성이 일부러 찾아 보여줘도 민우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밤에 전화를 하면 잘 거니까 전화하지 말라며 거절을 누르기도 했다. 만나자고 하면 이제 4학년이라 신경 좀 써야 할 때 아니냐며 작작 좀 놀자는 답지 않은 소리를 했다.

어디 아픈가, 처음에 든 생각은 그거였고. 그 다음은 이제 내가 별로 안 좋나, 였다. 설마 이제 정말 마음 정리를 다 한 건가. 나를 포기하기로 한 거야? 아, 왜! 아깝지도 않나!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정말 주먹이 날라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혜성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작년 제 생일을 기점으로 뜻하지 않게 민우의 비밀을―용화도 주연이도 아는 비밀이어서 사실 엄청 서운하고 화도 났었다―두 개나 알게 되면서 혜성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첫 연애에 실패했고 거기다 자기 인생에선 없을 거라고 살짝 자만했던 차임을 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민우에게 신경이 쏠려 여자친구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인 건 좀 억울했다. 나중에 주연이에게 들어보니 자신과 사귀는 중간에도 학교에서 하림과 묘한 기류가 흐르던 남자가 여럿 있었다고 했다. 혜성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림이 민우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친하게 굴 때마다 신경이 쓰였던 게 역시 민우 때문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둘째로 제가 얼마나 눈치 없는 놈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그마치 8년을 민우가 제 옆에서 그런 마음을 키워오는 동안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니. 민우는 넌 날 다른 눈으로 본 적 없으니 당연한 거라고 했지만 어쨌든 혜성은 자신의 둔함에 한숨이 나왔다. 하림이와 사귈 때도 굳이 민우까지 같이 만나고 싶어 했던 제가 얼마나 눈치 없는 놈이었는지 깨달았다.

셋째로 자신이 생각보다 더 민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친구로서 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확신은 못 내렸지만 어쨌거나 지금도 앞으로도 민우가 제게 1순위임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그걸 대놓고 민우에게 이야기 했지만 별로 좋아하는 반응도 없다는 것에 살짝 상처받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민우에 대해서 이젠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취향이나 성격, 기본적인 호불호가 아니라 민우의 마음을 알기가 힘들었다. 척하면 척, 눈빛만 봐도 안다는 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진짜 알았으면 민우의 마음도 이미 옛날에 눈치 챘을 거였다. 어쨌든 요즘처럼 민우 마음을 알기 힘든 때도 없었다.

 


“너 진짜 왜 이렇게 어려운 남자가 됐냐.”

“뭐가.”

“언제부터 이렇게 알기 힘든 남자가 된 거야.”

“아, 자꾸 뭔 소린데.”


봄이라도 타나, 요즘 기분이 별론가 싶어서 일부러 유명한 초콜렛 집을 찾아 민우를 끌고 왔지만 오늘은 단 것도 안 땡기는 모양이었다. 초콜렛에 풍덩 빠져있는 아이스크림만 죽사발을 만들어놓으며 몇 입 먹지도 않는다. 나한테 서운한 거라도 있나. 아님 진짜 이젠 내가 별로 안 좋다든지? 자긴 나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민우의 반응은 좀처럼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게 신경이 쓰여서 구시렁거리게 된다.


“나랑 만나는 거 싫어?”

“아닌데?”

“그럼 요즘 왜 그래?”

“……네 주위를 좀 봐봐.”


갑자기 주위는 왜?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별로 특이할 건 없다. 그냥 다들 민우와 저같이 먹고 있을 뿐. 뭐가 문젠데. 하고 다시 민우를 쳐다보니 짧게 한숨을 쉰 민우가 됐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큼 뒤를 따라 나가 나란히 걸으니 걸음을 빨리한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고 같이 빨리 걸었더니 몇 미터 가지도 않아서 금세 또 나란히 걷고 있었다. 민우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멈춰 서서 혜성의 어깨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덕분에 뒤로 밀려난 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 어깨를 매만졌다.


“왜 때리는데!”

“너는 진짜…. 아, 나야 말로 널 모르겠다.”

“뭐가, 왜.”

“너 아까 거기서 우리처럼 남자애들끼리 온 테이블 봤어?”

“…아니. 못 본 것 같은데.”


그게 뭐 문제가 돼? 라고 눈으로 묻는 혜성에게 민우는 좀 전보다 더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넌 아직도 우리가 지금까지 하던 거, 해왔던 거 그대로 하려고 하잖아.”

“그게 왜?”

“……그럼 변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기운 없게 들려서 혜성은 걷다 말고 민우의 얼굴을 살폈다. 민우도 무슨 사이가 됐든 둘이 같이 있으면 됐다 했지만 사람이란 게 점점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요즘처럼 혜성이 제 가슴을 뒤흔드는 말을 자주 해댈 때면.


“짝 없는 것들끼리 연애는 아니고 연애 비슷한 거 한다고 용화가 그러던데.”

“…….”

“그거랑 관련 있는 거야?”


민우가 대답이 없자 혜성도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는지 잠시 생각하다 멈춰 서서 민우를 불렀다.


“민우야.”

“왜.”

“그럼 우리 연애하자.”

“…….”

“하는 거?”


이 새끼가 자기 첫 연애가 너무 쉽게 시작해서 싱겁게 끝났다고 연애를 그냥 밥 먹고 영화보고 커피 마시고 이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민우의 손을 낚아챈 혜성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덩달아 혜성에게 이끌려 걸으면서 민우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듣고,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손은 좀 놓고 걸어.”

“왜. 연애의 첫 단계는 손잡기라며.”

“…하아-”

“바로 뽀뽀로 넘어갈까?”

“…초딩이냐. 뽀뽀가 뭐야. 키스 정도는 해야지.”


이거 진짜 사귀자는 거야, 뭐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가 혜성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민우가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받아치자 혜성은 멈춰 서서 바로 들이댈 태세로 한쪽 손으로 민우의 목을 감쌌다. 놀란 민우가 혜성을 밀어내며 미쳤냐고 눈썹을 꿈틀거리자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하자며!”

“누가 여기서 하재? 길에서 대놓고 구경거리 될 일 있어?”

“알았어. 그럼 숨어서 하자.”


그러더니 민우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걷다 주택가가 나오자 골목길을 이리저리 따라 들어가다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찾았는지 멈춰 서는 혜성이었다.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민우는 혜성이 정말 진심으로 이러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민우가 고민하는 사이 숨을 고른 혜성이 민우의 손을 놓으며 돌아서서 점점 다가오자, 민우는 순간 긴장하며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 치다 담장에 기댄 것은 결코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다.


민우에게 몸을 가까이 붙인 혜성은 민우의 턱을 가볍게 쓸다 한 손으로 목을 감쌌다.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혜성의 얼굴에 민우는 심장이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진짜 하려는 건가.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거였지만 실제로 하게 될 날이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했었고, 게다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 아니냐고, 이건.

혜성의 입술이 닿는 순간 자연스레 눈이 감겼고, 전에 잠시 입술이 닿았던 감촉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 민우를 뒤흔들었다. 키스라고 해봤자 아마도 첫 여자친구―생각하기도 싫지만―랑 해본 게 전부일 혜성이기에 입술이나 혀를 쓰는 것도 모두 서툴기만 했지만 민우에겐 모든 것이 달게만 느껴졌다. 직전에 초콜렛을 먹다 와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제 혀가 혜성의 혀와 닿는 느낌이 마치 처음 키스하는 것 마냥 생소하게 느껴졌고 서로의 입술을 살짝 살짝 빨아들일 때면 거친 키스가 아님에도 황홀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꽤 길게 이어지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니 아쉽다는 생각과 동시에 엄청나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민우는 얼굴을 혜성의 어깨에 기댔다. 혜성은 은근 가빠진 숨을 내쉬며 민우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그러자 개미만한 목소리로 민우가 답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좋아서.”


그 말에 혜성이 어깨를 흔들며 웃자 덩달아 민우의 몸도 흔들렸다. 웃다 말고 민우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이는 혜성에, 민우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며 웃고 말았다.

 

‘내가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너도 엄청나게 잘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 더 하면 안 돼?’

 


그런 건 묻지 말고 하는 거야. 이 무드 없는 놈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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