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각색된 부분이 있습니다.


"여보세요?"

"형,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네. 잠깐만, 딴 게 아니고 형한테 볼일 있는 분이 계셔서 전화했어요."

   사회초년생 시절, 함께 인턴을 했던 J에게 전화가 왔다. Y부장이랑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는 중인데, 그분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전화 연결을 부탁했단다.

"네, 부장님."

"어, **씨. 잘 지냈어요? 아니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아, 내가 번호를 바꿨지... 미안,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요즘 어떻게 지내?"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그게 핸드폰이던 유선전화던 잘 안 받는다. J에게 전화가 오기 전 낯선 핸드폰 번호가 하나 찍혔었는데, 그게 Y부장이었던 거다.

   Y 부장, 벗어진 이마에 듬성듬성 나 있는 새치는 그가 이 바닥에서 꽤나 경험 많은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인턴으로 첫 출근을 한 날 헐랭이 대리 L에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일을 아직도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라고 침 튀기며 폭풍 잔소리를 하는 그를 보았다. 

   ‘만만치 않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J나 나 같은 햇병아리들에겐 꽤나 친절했고, 인턴 기간 내내 옥상으로 불려 가는 일 없이 무난하게 생활했다.

"아, 그래? 그러면 **씨는 거기로 가면 좋겠네. 축하해! 그동안 성실하게 해 줘서 고맙고, 생각나면 연락하라고!"

   인턴 마지막 주 어느 날 대리 L은 오후 2시가 되면 회의실로 가보라고 했다. 노크를 두 번 하고 회색 문을 슬쩍 여니 테이블 위에 하얀 종이컵이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믹스커피 두 잔, 그리고 Y 부장. 새삼 인턴 기간 마지막인 것이 실감 났다.

   정규직으로 함께 일했으면 한다고 운을 띄우는 그에게 ‘감사하지만 저는 B 쪽에서 채용 제의가 와서 그쪽으로 가겠노라’고 정중히 대답했다. Y 부장은 ‘거기서도 잘할 거다’라며 결정을 응원해주었다.

   몇 년이 지났다. 몇 가지 이유로 퇴사를 결정했다. 일을 아예 쉴 생각은 없었는데, 먼저 제의가 온 C와 D 모두 말을 번복했다. ‘일을 하나만 하는 건 아니니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불러주는 곳이 없으니 마음은 크게 불안해졌다.

   그때 마침 다른 곳으로 간 나 대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던 J에게 연락이 왔다. 자주는 아니지만 연락을 종종 하고 지냈는데, 얼마 전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걸 기억하고 Y 부장에게 내 소식을 귀띔한 거다.

"응, 그러니까. 그 친구가 갑자기 유학을 간다지 뭐야? 우리는 참 난감하지... 그래서 말인데, **씨, 여기로 오면 어때?"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전임자가 떠나기 2주 전, 정식 출근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꼬박꼬박 출근 도장을 찍으며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턴 때 배웠던 일과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아주 달랐으니까.

"어, 엄마. 나 그때 거기 있죠, 인턴으로 일했었던. 응, 거기서 일해요. 아니, 당장은 아니고 다다음주부터. 지금은 인수인계 때문에 왔다 갔다 하긴 하지. 응, 유학이랬나? 나간대요."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불안하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이참에 기도 좀 하라고 했다. '아 엄마는...' 하며 말을 흐렸다.

"아 씨, 몇 시야?"

   이참에 새벽기도나 나가볼까 생각했다. 그만큼 자주 깼다. 다시 일하게 된 건 다행이지만, 혹시나 실수하진 않을지, 잘못해서 업무에 펑크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은 매일 밤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내 모습이 마치 이에 물린 어떤 남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유별나게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청소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집안은 늘 광이 났다. 아침저녁으로 목욕을 하고,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비누로 손을 씻었다.

"어? 이게 뭐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가려움을 느꼈다. 허벅지와 발목에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있다. 밤새 이가 남자를 물었다. 그것도 두 군데나!

   남자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가 들어와서 자신을 문 건지, 한 마리가 아니라 몇 마리가 벌써 들어온 건 아닌지, 더욱이 이에게 물린 자기 몸이 한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으아, 온갖 깔끔은 다 떨었는데 이게 알려지면 쪽팔려서 어떻게 살지?"

   이에게 단 두 번 물린 일 때문에 남자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침대에 눕기는커녕,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병원에 실려 갔다.

- 라퐁텐 우화 중 ‘이에게 물린 남자’ - 


"내일 발표 때 피피티가 잘 안 넘어가면 어쩌지?"

"가스불을 잠갔던가?"

"부모님은 좀 괜찮으시려나... 전화해볼까?"


   살다 보면 염려하고 걱정할 일 투성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면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은 걱정을 우리의 오랜 친구로 만들었다. 

   티베트 속담처럼,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우리에겐 걱정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걱정만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게 없다. 이에 물린 그 남자는 이걸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니 밤이고 낮이고 물린 곳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겠지.

   그럼 어떻게 하냐고? 차라리 잊어버리거나 걱정하는 일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라. 나 같은 경우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서 오는 불안은 잊는다고 해결되지 않으니까.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말이 조심스럽지만, 생각보다 할만하다. 피곤한 것도 괜찮다. 다만, 글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아 초조했다. 그 초조함 역시 잊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을 내서 글을 쓰니 묵혀있던 불안함이 내려간다. 


다시, 글도 쓰고 일도 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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