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나랑 놀자!”

“그래, 그래.”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기억. 통통한 두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고선 매일 같이 집 앞 놀이터에 앉아있는 저를 찾아왔던 동생과 동갑내기인 꼬마.

 

“누나! 나 다 크면 누나랑 결혼할래!”

“뭐? 풋..”

“아, 왜 웃어! 난 누나랑 결혼할 거야! 두고봐, 반드시 누나의 가족이 될 거라구!”

 

결혼하자고, 반드시 가족이 되고 말 거라며, 당차게 외치던 게 얼마나 귀여웠던지. 꼬맹이, 아니 순영과 함께 있을 때면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권순영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노골적인 차별로 가득한 집안도..폭언과 방임을 일삼는 부모도..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동생마저도 전부 잊을 수 있어서.

 

그래서 좋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백기는 있을지언정 끊어지지 않았던 마음.

 

“그, 그럼 나랑 결혼하자!”

 

그리고,

 

“내가 꼭 5년 안에 성공해서 돌아올게!”

 

어느새,

 

“돌아온 걸 환영해.”

“..응. 고마워. 진짜 돌아온 것 같다.”

 

권순영은 정말로 저의 가족이 되었다.

 

“누나.”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돌고 돌아 저에게 전해진 그 마음은 아주 따스하고 보드랍고, 좋았다.


家族になってください

가조쿠니 낫테쿠다사이

 

08화. 돌고 돌아,

 

“야, 너 그 기사 봤어?”

“무슨 기사?”

“그거 말이야! 호시 일반인 폭행해서 경찰서 갔대!”

“헐....”

 

12월 31일. 그리고 1월 1일. 2024년의 첫날이 밝기 무섭게 펑! 하고 터진 폭탄에 연예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순영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순영의 소속사는 물론이요 가수 호시의 팬덤도 난리가 났다.

말 그대로 연예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는 소리.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몰려든 기자들에게 순영은. 호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팬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제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결코 저에게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쿵. 연예계가 뒤집어지는 소리였으며, 가수 호시의 수많은 팬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야!!! 너 제정신이야?!”

“.....”

“미쳤어? 뭔 정신으로 그딴 짓을 해!!”

 

1월 1일. 오전 10시. 기사가 나고 1시간 뒤, 순영의 집에 들이닥친 지혁이 순영의 멱살을 잡았다. 온유한 성격의 그가 이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몇 달 전, 순영과 여주의 관계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새해 여행으로 다낭에 간 터라 전날인 12월 31일에 언론사의 연락을 받고 날아온 것이었는데, 쾡한 눈 밑이 그 동안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형, 잠시만. 잠깐만..!”

 

뒤늦게 달려온 지훈이 뺨이라도 칠 기세인 그를 말렸지만(크리스마스 때부터 본가인 부산에 내려가 있는 상태여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조금 걸렸다.), 지혁은 차마 욕지거리를 뱉지는 못하지만 그보다 더한 말을 뱉을 것만 같은 얼굴을 했다.

 

“권순영. 나는 널 믿었어. 고딩 때부터 봤고, 그래서 유명 가수가 된 것도 너무 자랑스러웠고, 한국에서 데뷔를 우리 회사를 통해 하겠다고 해서 정말..너무 고마웠는데..”

“.....”

“이젠..잘 모르겠다. 네 꿈을 응원하는 게 맞을지..널 믿는 게 맞을지.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지혁이 결국 무너져내렸다.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순영이 잠시나마 인상을 찌푸린 것도 그때였다.

 

“하..권순영. 너 이제 어쩌려고 그래. 기껏 이룬 꿈을 이렇게 포기할 거야?”

 

감정이 북받쳐 숨을 헐떡이는 지혁을 살피던 지훈이 말했다. 차디찬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애정과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지훈은 진심으로 순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다 못해 뭔가 변명이라도 해봐. 흔해 빠진 미안해라는 소리라도 해보라고.”

 

입에 자물쇠라도 건 것 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순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딱 한마디믜 대답만 내어놓았다.

 

“미안해.”

 

하아...지훈과 지혁의 한숨소리가 더욱 커졌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고민이었고, 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문 친구의 입을 어떻게 열지도 고민이 되었다.

 

“으..으음...”

“..! 누나.”

 

그때였다. 살짝 덜 닫힌 방문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움직인 순영이 그 방 안으로 쏙 들어간 것이다.

 

“.....”

“.....”

“권순영, 너...”

“..미안해.”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지혁과 지훈은 그 권순영이, 그 누구보다 꿈을 사랑하는 그가 왜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사랑 때문이었구나.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 때문에.

 

.

.

.

 

“...왜 그렇게 봐. 그렇게 안 째려봐도 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어.”

 

순영이 손에 든 컵을 내려놓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쯤 되니 다들 감정이 사그라들어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선..정말 미안해. 사정이 있었다곤 하지만 내가 큰 폐를 끼쳤어.”

 

하얀 백열등의 빛을 받은 얼굴이 무척이나 까슬거려 보였다.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은 얼굴. 하지만 한편으론 후련해보였다.

 

“사과는 됐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그건 됐으니까,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그 이유를 듣고 싶어.”

 

두 눈이 퉁퉁 부은 지혁이 대고 있던 얼음팩을 떼곤 이유를 물었다. 그 차분한 얼굴은 고등학생 시절에 본 그대로라서 순영은 안심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순영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가수가 아니라 여주 누나랑 결혼하는 거였어.”

 

지혁과 지훈은 순영의 입에서 장장 17년의 세월이 딱 하나의 단어로 귀결되는 것을 보았다.

외국에 가고, 가수가 되고, 한국에 온 이유도..

 

그 모든 것이.

 

“..내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그 사람들이 누나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야.”

“.....”

“그 사람들 때문에 누나는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를 잊어버렸어. 이제야 겨우,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따스하고 부드럽고 촘촘하게 짜인 목도리와도 같은 사랑.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다 포기할 수 있어. 꿈이든, 명예든.”

 

순영은 머리가 덜 자랐을 때부터 누군가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삶과 꿈은 그 모든 것을 지켜봐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도와줘.”

“.....”

“내 평판이나 명예는 아무 상관 없어. 하지만 이대로라면 누나가 슬퍼할 거야.”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 앞에 뻣뻣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결코 없을 것이다.

 

**

 

시간을 돌려, 2023년 12월 31일. 쉬는 날이었지만 이른 시간에 깬 여주는 옆에서 이불에 파묻혀 곤히 자고 있는 순영을 바라보았다.

 

“..잘 자네. 귀엽게.”

 

자연스럽게 휴대폰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걸려온 욕지거리가 가득한 전화를 끝으로 무섭도록 조용한 가족들이 신경 쓰였지만 여주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순영아.”

“..웅?”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순영이 일을 쉬는 날이었고, 순영의 제안대로 새해 맞이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일어나. 짐싸야지.”

“어엉..”

“여행 가자며.”

 

잠이 덜 깨서는 퉁퉁 부은 얼굴에 까치집 투성이인 남편을 본 여주는 아무런 걱정 없는 것처럼 웃었다. 

 

비록 문제가 많은 인생이었으나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래! 우리, 여행 가서 즐겁게 놀다 오자! 먹고 싶은 것도 잔뜩 먹고! 한우 오마카세 갈까?”

 

그리고 가족이, 어느새 사랑하게 된 사람이 제 곁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싶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아주 작은 미련은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

 

“누나, 아침 먹고 출발하자. 내가 만들게.”

“응? 너..순영이 네가 만든다고..?”

“응. 내가 프렌치 토스트 만들어줄게.”

“아..안 돼! 다쳐! 부엌 청소할 시간 없다고!”

 

그래서 쓸데없이 비장한 얼굴을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순영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누나, 누나. 이게 어울려, 이게 어울려?”

“둘 다 이뻐.”

“아아아아! 딱 하나만 골라줘어!”

“음..난 이쪽..? 여행이니까 편한 옷이어야지. 그리고 회색이 더 잘 어울려.”

“앗, 그래?”

“응. 햄스터 같잖아.”

“내가 그 소리 싫다고 했는데...”

“농담.”

 

패션쇼를 하려는 순영의 옷을 세심하게 골라주었다.(+ 놀려먹고.)

 

“누나~ 다 챙겼어?”

“응. 이것만 챙기면 돼.”

“뭔데?”

“카메라랑 사진 인화기. 여행 사진 찍어서 간직하고 싶어서.”

 

추억을 간직하게 도와줄 카메라와 인화기도 챙겼다. 처음 하는 것투성이라 낯설지만 무척 설레었다.

 

“네, 매니저님~ 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네? 누가 와요?”

 

하지만..

 

“여~ Long time no see, 오랜만이야.”

“김하주..?”

“안녕, 권순영. 그리고..안녕, 누나?”

 

“...하주야.”

 

애써 무시했던 불행의 늪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있었다.

 

숨이 막힌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아..

 

--

 

곤란하게도 소속사 로비였다. 기자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순영의 후배 그룹의 안무촬영과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순영, 아니 호시 씨.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순영의 곤란해하는 기색을 읽은 여주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지인이 찾아왔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고서 너무 놀라 회사로 거의 날아오다시피 한 순영은 정신이 없을 게 뻔했고, 회사의 대표도 자리를 비운 이 상황에 일이 터지면 직격타를 입는 건 순영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했으니까.

 

“아..네. 그럼..가죠.”

“우와..드디어 집 구경하는 건가?”

 

키득거리는 하주의 얼굴을 본 여주는 난생 처음으로 그를 때리고 싶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순영을 지켜야만 한다는 마음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호시 씨, 제가 가서 차에 시동 걸게요.”

“네.”

 

누가 봐도 매니저와 연예인인 것처럼 연기를 했다. 순영이 응해줘서 다행이었고, 화난 기색을 감춰줘서 다행이었다.

 

“누나.”

 

붙잡힌 손목을 따라 올라가자, 방긋방긋 웃고 있는 하주가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맑게 웃는데..괴로울 수가 있지.

 

“여주 누나.”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가..분명 순영과 똑같이 누나, 라는 호칭으로 절 부르고 있는데..

 

“5년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이런 거라 그렇긴 한데..내가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게 좀 많았거든?”

“.....”

“한우도 먹고 싶고, 차도 사고 싶고 그랬는데. 누나랑 권순영, 아니 매형이 안 만나주잖아. 용돈도 안 주고. 5년만에 만난 동생인데 안 보고 싶었어?”

 

역겨웠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저 목소리가 너무나도..

 

“그래서 엄마아빠는 좀 화가 났는데..내가 설득했어. 솔직히 누나가 자식 노릇, 누나 노릇 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시대에 옛날처럼 할 수는 없는 거니까.”

“.....”

“누나가 매형 설득해서 동생하고 부모님한테 용돈 좀 줘. 누나 말은 들을 거잖아.”

 

예쁘게 웃는 하주의 눈은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응? 누나.”

 

원하는 것을 제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면..모든 것을 망쳐버리겠다는 뜻을.

 

“...그건,”

“.....”

 

“누나.”

 

...순영아. 그때였다. 곁으로 다가온 순영이 하주와 여주 사이를 갈랐다. 그만 가자. 선을 긋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뭐야..가족끼리 이야기 좀 한다는데 섭섭하게.”

“네 번호로 연락할 테니까 계좌 보내.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흐음..? 그래, 역시 말이 잘 통한다니까? 뭐, 얼마나 줄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넌 상상 못할 정도. 살면서 본 돈 중에 가장 클 걸.”

 

딱 잘라 말하는 싸늘한 말투. 그러나 성공한 사람의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하주는 애써 입술을 짓씹으며 민망한 걸 넘기는가 싶더니 순영의 곁으로 바짝 붙어 속삭였다.

 

“있지..거지 같은 우리 누나 데려가줘서 고마워. 근데 넌 비위도 좋다. 저딴 거랑 같이 살고 싶어? 아, 맞다. 너도 5년 갔다 왔지. 하하, 나도 참 당연한 걸. 그럴 리가 없지.”

“.....”

“김여주도 남편 잘 만나서 팔자 펴네. 와이프 친정에 잘해줘? 그래야 김여주도 사랑 받는 딸이 되지. 혹시 알아? 외조가 한심한 저 여자 인생을 바꿀지.”

 

익숙하고, 또 익숙한 말. 그러나 지금 들으면 더 마음 아픈. 하지만..괜찮다. 상처 받는 것쯤이야...지금의 행복을 지킬 수만 있다면-

 

퍽!

 

“아악! 아..으으..”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보여서 꼭 꿈처럼 느껴졌다.

 

하주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순영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꿈..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지독한 현실이었다.

 

끝.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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