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옷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주워입었고 -그 결과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패션센스를 얻었다- 가끔 침대까지 가기 귀찮은 날엔 현관 앞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귀찮아 안에 받쳐입은 흰 반팔티 차림으로 나갈 때도 많았으며 일교시였던 수학책 하나로 사교시까지 버틴 적도 있었다. 물론 걸리면 혼났다. 그래도 가만히 꾸중을 듣는 건 생각보다 그리 귀찮지 않아서 견딜 만했다.


귀찮은 게 싫다는 것은 주변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지훈의 경우엔 주변을 넘어 본인에게까지도 해당됐다. 박지훈은 잘생겼다. 그래서 인기가 많았다. 본인도 잘생겼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건 그닥... 고백도 많이 받아봤고 애인도 몇 번 사겨봤지만 여전히 큰 흥미는 없었다.


학교엔 박지훈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에 비해 박지훈이 아는 사람은 반도 안 됐다. 같은 반 애들 이름 외우는 데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려서. 굳이 외워야 할 사람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게 편했고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걔의 존재도 몰랐다. 지훈의 바운더리에 들어온 적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박지훈이 대놓고 인기가 많은 타입이라면, 얘는 은근하게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된다던. 박지훈은 고삼이 되어서야 그 애를 알았다. 이름이 특이했다.





한순간을 스치고 1

W. 스킨





또 지각이었다. 지각생은 벌점 3점과 함께 미술실 청소 임무를 부여받았다. 미술실 청소는 남들 다 청소하는 시간에 하면 됐고 그닥 지저분하지도 않아서 할 만했다. 쌓인 벌점 몰아서 청산하는 게 좀 귀찮긴 했지만... 박지훈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귀찮은 건 없었다. 하도 상습이라 이젠 혼나지도 않았다. 꾸중인 듯 아닌 듯 눈을 부라리는 선생님과 여유로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정문을 통과하자 운동장에 있던 누군가가 박지훈을 불렀다. 자세히 보니 같은 반 애들이다. 오늘 일교시 체육이었나? 지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었는지 시간표가 바뀌었다는 친절한 설명이 돌아왔다. 여즉 졸린 이에겐 실망스런 소식이었다.


"아 체육복..."


교실에 가방을 두자마자 도로 나왔다. 이미 수업이 한창인 복도는 조용했다. 수업 중인 교실에서 대뜸 체육복을 빌릴 수도 없고. 난감해서 머리를 긁적이다 옆반부터 천천히 순회 돌 듯 걸었다. 창문 너머 마주친 익숙한 얼굴들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박지훈은 킥킥 웃으며 더 웃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웃으면 너네가 손해지 내가 손해냐.


선생님 눈치를 보며 웃음을 감추는 친구들을 휙휙 지나다 빈 교실을 발견했다. 이동수업 중인지 텅 빈 5반. 5반이면...오케이 박우진네. 운좋게도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바구진, 바구진. 박지훈은 조용히 제 친구 이름을 발음하며 사물함을 열었다. 은근히 깔끔한 성격답게 가지런히 갠 체육복이 놓여있다.


"나 좀 빌린다."


역시나 당사자는 모를 허락을 구하곤 넥타이부터 조끼, 와이셔츠까지 거침없이 벗어냈다. 반팔티는 입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길진 않았다. 요새 체육만 끝나면 땀 식히느라 바빴어서.


그렇게 제 집처럼 웃통을 시원하게 까버렸을 때, 열린 뒷문 사이로 누군가 들어왔다. 같은 교복을 입은 동급생이었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키 크다. 그리고 하얗다. 박지훈은 살짝 흠칫했지만 상대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곤 평정을 되찾았다. 상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웃통 까고 있는 사람만큼이나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그저 지훈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그대로 내려가는 듯하던 시선이 훤히 드러난 쇄골즈음에서 멀어진 게 다였다. 부끄러워서 혹은 민망해서라기보단 그냥 정말 볼 이유가 없어서, 의 느낌이었다.


“아 미안 체육복 좀 빌려야 돼가지구.”


어정쩡히 가슴께를 가리며 먼저 말을 텄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박지훈은 고이 개어진 체육복 상의를 잡아들며 키 크고 하얀 놈을 쳐다봤다. 쇄골까지만 훑고 멀어진 시선은 박지훈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뭔가를 가지러 온 듯, 시원시원한 걸음이 교탁으로 향했다. 다리가 되게 기네. 분명 단정히 입은 교복인데 그 속에서 묘하게 풍기는 날티를 느꼈다. 박지훈은 순간 옆 반 양아치 김원성네 무리를 떠올렸다. 심심하면 지들끼리 우글우글 모여서 담배나 피우러 가던 양아치 새끼들. 복도에서 놀고 있으면 가끔 장난스레 박지훈의 엉덩이를 터치하며 낄낄거리던 놈들이다. 하도 좆 같이 생겨서 그 새끼들 얼굴은 다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멀쩡한 놈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김원성 무리엔 죄다 교복 어디 한 군데씩 팔아먹은 그지들뿐이었지. 박지훈은 금방 생각을 접었다.


저 키 크고 하얀 놈이 누구인지 파악하기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짧은 생각을 마치는 동안 그 애는 교탁 아래 놓인 종이 뭉텅이를 들었다. 그러고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퇴장. 박지훈은 어쩐지 머쓱해졌다. 지금 상황에 대화하고 자시고 하는 것도 웃기다만, 뭔가 개무시 당한 것 같은 이 기분... 이 반 반장은 약간 안일한 스타일인가 보다. 뒷문이고 앞문이고 죄다 열어뒀다. 뒷문으로 들어와 앞문으로 나간 그 애가 피곤한 듯 목을 뚝뚝 꺾으며 창문 밖으로 유유히 지나갔다. 멍청하게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되게 갸름하네. 턱에서 미끄럼틀 타도 되겠어. 이런 뜬금없는 생각도 했다.


“문은 좀 닫고 갈아입지.”


그러다 뒷문을 지나친 녀석이 뒷걸음 몇 번으로 돌아와 뒷문을 닫아 줄 때는, 체육복을 손에 들고 호다닥 다가갔다. 닫히기 무섭게 도로 열린 뒷문에 키 크고 하얗고 다리 길고 얼굴 갸름한 놈은 살짝 주춤했다. 박지훈의 눈을 지나 내려오려던 시선이 또 쇄골쯤에서 멈칫. 그대로 저 멀리 떨어졌다.


박지훈은 그 애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검정색 줄이 새겨진 3학년 명찰. 거기에 박힌 넉 자는 익숙지 않아 신기했다. 강다니엘? 외국앤가? 그러기엔 아까 한국말 너무 잘했는데? 머리가 또 뻘생각으로 돌아갔다. 제가 어떤 차림인지도 잠시 잊었다. 주춤하던 강다니엘의 손가락 끝이 벗은 어깨 끄트머리를 살짝 밀어냈을 때야 알았다.


“...옷 입어.”
“어? 헐. 아 어.”


조금 당황해 허둥거렸다. 박지훈은 그 앞에서 손에 든 체육복을 입었다. 다시 저기까지 가서 입긴 귀찮으니까 일단 여기서 입고 얘랑 좀 더 대화해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실패했다. 머리부터 우겨넣어 잠시 막혔던 시야가 뿅하고 맑아지는 순간 강다니엘이 뒷문을 닫았다. 쓸데없이 매너가 좋았다. 급하게 양 팔을 쑤셔넣으며 뒷문을 열어제꼈다. 야 너 미국에서 전학왔어?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널따란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강다니엘은 어어, 답하고는 사라졌다. 쟤 지금 약간 나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아니겠지. 그나저나 미국 전학생은 또 언제 왔나 모르겠다. 접때 일교시부터 사교시까지 내리 잤을 때 그때 왔나? 워낙 소식에 어두운 지훈이라 알 길이 없다.


“미국은 향수도 좋은 거 쓰나 부네.”


약하게 남은 그 애의 잔향에 코를 킁 마시며 교복을 정리했다. 궁금한 게 생겼다.


-


어 강다니엘 왜? 미국 전학생? 뭔 개소리야?


몇 명에게 물어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5반에 강다니엘이라는 애 있잖아. 언제 전학왔어? 미국에서 왔담서 한국말 되게 잘하던데. 질문을 들은 애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우그러뜨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뭔 개소리야? 를 표정으로 말하면 딱 이런 얼굴이겠다. 일단 물어보는 족족 그가 누군지는 알았다. 그게 누구냐는 반응은 하나도 없었다. 나만 몰랐나 봐. 왠지 좀 뒤떨어진 듯한 느낌이 별로다.


박지훈은 조금 전 끝난 체육시간의 여파로 후덥지근한 반팔티를 펄럭였다. 그래도 빌린 옷인데 땀 묻히는 건 예의가 아니니 들어오자마자 체육복부터 갈아입었다. 와이셔츠 조끼 따윈 쿨하게 생략. 얇은 흰티 멱살을 잡고 바람을 만들며 친구들의 정보를 주워들었다. 가장 큰 정보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이겠다. 강다니엘이 어어, 그러길래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귀찮음에 대충 대답하는 듯했던 뉘앙스가 진짜였던 모양이다.


"나 5반 갔다온다."


강다니엘이라는 토픽 하나에 이야기 장이 열렸다. 어차피 박지훈이 궁금한 건 언제 미국에서 전학 왔는지, 이게 전부였기에 그 외의 것들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모두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강다니엘은 미국에서 오지 않았고 미국인도 아니며 1학년 입학식 때부터 쭈욱 있던 애였다. 반이 겹친 적도, 이래저래 부딪힐 일도 없어 그 존재를 몰랐던 것뿐.


“바구지인.”


이동수업을 끝낸 5반도 박지훈네 못지 않게 어수선했다. 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가며 박우진을 찾았다. 뒷문에 달라붙은 박지훈의 등장에 우리 왕자님 와쪄 우쭈쭈! 하고 온갖 혀 짧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른 반에 놀러가도 비슷한 반응이긴 하다만 여기가 유독 심했다. 타고난 먹금력으로 무시를 해도, 똥 씹은 얼굴로 노려만 봐도 귀여워 죽겠다며 뒤집어졌다. 짓궂은 얼굴로 박지훈을 귀여워하기 위해 우다다 달려오는 놈들은 죄다 남자. 그렇다고 여학생들은 박지훈에게 관심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니겠다. 아닌 척해도 시선은 박지훈에게 있었다. 그래서 5반에 오는 건 늘 조금 부담스럽다. 이렇게 박우진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더더욱. 아 좀 떨어져 더워! 들러붙어 볼따구를 만지는 놈들을 한 대씩 후려주며 교실을 스캔했다. 박우진 어딨어 왜 안 보여. ...그리고 걔도 없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박지훈이 은연 중 찾던 그 애가 들어왔다. 옆을 스치며 흘리듯 퍼진 향기 때문에 알았다. 살면서 후각이 유독 발달됐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박지훈은 주렁주렁 매달린 애들 사이로 다급히 손을 뻗었다. 눈길도 안 주고 지나가는 강다니엘의 팔뚝을 덥썩. 여러 개의 시선이 어리둥절하게 쏠렸다. 돌아보는 얼굴에 답지 않게 당황한 박지훈은 목소리 볼륨 조절에 실패했다.


"너, 야 너 미국에서 온 거 아니잖아!"
"......"
"...왜 거짓말을 치구...그러냐."


왼쪽에 매달려있던 이봉훈이 뭔 소리야? 하고 속닥거렸다. 너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재빨리 머리를 털어 소름의 근원지를 물리쳤다.


"...박우진 화장실에 있던데."


말하며 강다니엘은 잡힌 팔을 슥 빼냈다. 박지훈도 뻘쭘해져서 곧장 손에 힘을 풀었다. 강다니엘의 시선은 박지훈 품에 들린 체육복, 거기 새겨진 박우진 이름에 가 있었다. 미국에서 온 거 아니면서 왜 거짓말했어, 에 대한 대답이 박우진 화장실에 있던데, 라니. 완벽히 동문서답이지만 딱히 답할 말이 없었을 거라 이해한다.


"어... 그래."
"사물함에 넣어줘?"
"응."


체육복을 건네받는 과정에서 아주 잠깐 본 손도 딱 지 첫인상처럼 길고 하얗고 그랬다. 그 손을 쳐다보다 고개를 올렸다. 이번엔 오른쪽 눈 아래 선명하게 찍힌 눈물점이 들어온다. 애가 약간... 뭐라해야 하지. 매력될 부분이 많네. 하고 보니 좀 머쓱한 생각에 일부러 애들 장난이나 받아줬다. 강다니엘은 체육복만 받고 미련없이 등을 돌렸고 사물함을 눈으로 훑다 박우진 자리에 안전하게 넣어주었다. 그 애의 자리는 뒤쪽 창가자리였다. 처음 보는 순간 느꼈던 은근한 날티와 어울리는 자리다. 숱 많은 머리를 훌훌 털며 앉자마자 사방에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까진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튼 반 애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장난도 치는 것 같고. 웃기도 잘 웃고.


"우리 쥬니 자꾸 어디 봐."


햇빛을 받아 더 뽀얘진 얼굴이 웃기까지 하니까, 뭔가... 5반 놈들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모른 채 가만히 그 애만 쳐다봤다.


“박지훈 니 또 뭐 빌리러 왔냐.”


뒤늦게 나타난 박우진이 또 볼이며 팔뚝이며 조물거려지고 있는 박지훈을 익숙하게 커버치며 말을 걸었다. 근데 어째 애 상태가 이상했다. 왜 이래. 아침 안 먹음? 대꾸도 없이 뭔가를 가만 쳐다보고 있는 게 이상해 눈길을 따라가보니 그 시선이 닿아있는 건 창가 어딘가. 눈이 커서 그런가 시야가 닿는 면적도 넒게 느껴져서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이 어려웠다.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창밖에 붕붕 띄워진 정체 모를 하얀 깃털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창가자리에 앉은 하얀 강다니엘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야. 야, 야. 박우진은 제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평소 -치킨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던 박지훈이다. 한 사람을 이렇게 뚫어져라 본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는 거다. 혹시 빌려준 돈을 못 받았나. 아님 복도 지나가다 어깨빵이라도 당했나.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려보지만 박지훈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에 대입하자니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박지 종쳤다. 이제 니네 반 가.”
“...있잖아 우진아.”
“있긴 뭐가 있어, 없어.”
“너 쟤랑 친해?”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게 낮춘 목소리와 함께 둥그런 손끝이 슬쩍 가리킨 건 강다니엘이 맞았다. 여태 아무런 접점도 없던 애를 갑자기? 박우진은 뭐 그냥저냥, 하고 대답했다. 같은 반으로서 체육 때 같이 뛰고 가끔 장난치고. 딱 그 정도 사이라 그냥저냥이란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질문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답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창가자리에 굳세게 꽂혀 있었다. 강다니엘이 사물함에 가려 일어섰을 땐 훌쩍 높아진 그를 따라 박지훈의 눈동자도 함께 올라갔다.


“나 쟤랑 친해지고 싶다.”
“갑자기?”


박우진은 반사적으로 반응했고 박지훈은 히 웃으며 손바닥을 파닥이다가 그대로 슝하니 사라졌다. 확실히 빌려준 돈을 못 받았다거나 어깨빵을 당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보다 훨씬 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



이것저것 재는 것. 귀찮다. 걔를 보고 있으니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러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수업 집중은 잘해?”
“아 내가 걔보다 앞에 앉는데 그걸 우째 아냐고.”
“손 들고 발표도 하구 막 그러냐?”
“니 강다니엘이랑 친해지고 싶담서.”
“응.”
“근데 이런 게 대체 왜 궁금한 건데? 알면 뭐 달라지는 게 있나?”


그냥 뭐... 이왕 친해질 거 정보 많이 알고 있음 좋잖아. 박지훈은 머쓱함에 코를 훌쩍였다. 박우진이 왜 저런 반응인지 충분히 이해갔다. 본인조차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묻고 있지 싶었으니까. ‘걔랑 어떻게 친해지지? 친해지려면 나 어떻게 해야 돼?’ 와 같은 질문은 차마 던질 수 없어서 그랬다. 자존심인지 뭔지 그냥 좀 쪽팔렸다. 재수없는 소리일지 몰라도 박지훈은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다. 가만 있으면 호감어린 눈빛을 담은 이들이 다가왔고 그에 적당히 응했을 뿐이다. 그러다 마음 맞으면 그게 친구가 되는 거고, 아주 간혹 다른 의미로 맞으면 애인이 되기도 했고.


박우진이랑은 어떻게 친해졌더라. 중학교 체육대회 때 경쟁상대로서 목숨을 걸고 참여하다 이상한 정이 들어버렸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참 좋은 친구임은 확실하다. 쏟아지는 질문 폭탄에 짜증스런 얼굴을 하고서도 꼬박꼬박 답을 해줬다. 역시 좋은 친구가 맞다.


“그리고 니 쉬는시간마다 허탕치는 거, 그거 아마 당분간 계속 그럴 건데.”
“맞다 걔 쉬는시간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무슨 갈 때마다 없어.”
“뭐 자소서 검토받으러 문학 쌤한테 간다든데. 확실한진 모르고 나도 들은 거.”
“자소...자소서를 왜? 벌써부터?”
“야 걔 생긴 게 좀 날라리 같아서 글치 공부 존나 잘한다. 쌤들도 다 좋아하고.”


좋은 대학 갈라고 그런가 보지. 박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마이쮸를 입에 넣었다. 박지훈에겐 심히 아득한 존재인 대학을 벌써부터 준비한단다. 공부도... 잘하는구나...? 이 포인트에서 또 하나의 매력이 추가됐다.


강다니엘이란 존재를 알게 된 것이 바로 어제. 어제는 유독 지훈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본격적인 치댐에 실패했다. 말로는 이래도 막상 실제 상황에서 박지훈이 어디까지 행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박지훈의 모든 주변인은 입을 모아 박지훈의 만렙 생활애교를 외쳐대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세상에 다신 없을 상남자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더군다나 먼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도,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처음인지라 행동은 더욱 삐걱거렸다. 그렇게 하루를 그냥 보내고 다음날이 된 오늘, 예외없이 지각을 하고 일교시 쉬는시간부터 오교시인 지금까지 5반 출석도장을 찍었건만 가는 족족 허탕이었다. 근데 그 이유가 강다니엘이 워낙에 바르고 완벽한 모범생이어서래. -그렇게 말한 적 없음- 그래서 그런가. 살면서 처음 보는 완벽한 인간의 등장이 신기해서 막 친해지고 싶고 그런 건가.


“올라면 쫌 더 빨리 오든가. 그럼 교무실 가는 얼굴이라도 볼 거 아냐.”
“야 내가 무슨 걔 얼굴 보러 오는 줄 아냐?”
“그럼 뭔데.”
“...그냥 말 걸고, 그러는 거지. 친해져야 되니깐.”
“아 그러십니까. 쩌어 오네.”


복도 벽에 기대있던 몸이 꼿꼿이 세워졌다. 오늘 처음 보는 강다니엘의 얼굴이다. 5반 오기 전에 화장실도 들르고 들러붙는 친구놈들 퇴치도 하고 여러 가지 할 거 다 하고 와서인지 올 때마다 강다니엘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길쭉한 손에 들린 종이뭉치는 박우진이 말한 자소서가 맞는 것 같았다. 대충 눈으로 훑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이대로 가다간 곧바로 들어가게 생겼다.


박지훈은 또 다급해지고 만다. 앞에선 친구가 빨리 뭐라도 해보라고 손짓하지 뒤에선 친해지고 싶은 애가 나 따위 좆도 신경 안 쓸 무심함으로 무장한 채 다가오지. 반복해 말하지만 박지훈은 이런 게 처음이다. 친구 사귈 땐 원래 이렇게 떨리는 거야? 언제 한번 박우진에게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지금 급한 건 이게 아니니까. 부끄럽지만 목소리 한번 가다듬고. 몸을 돌렸다.


“...안녕?”
“......”
“......”
“안녕.”


...받아줬다. 받아줬어.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뻐? 박지훈은 기뻐 날뛰는 제 감정이 낯설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듯 찌푸린 듯... 아무튼 요상했다. 강다니엘은 그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얘가 왜 이러나 싶었겠지. 아주아주 어린 시절 아역배우 경험이 있는 박지훈은 그때의 짬을 발휘해 표정을 갈무리했다. 침착해지고 보니까 이제 뭘 해야 하지 싶다. 딱 마주쳤고, 안녕 인사했고. 그 다음은?


박지훈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삐죽 튀어나온 덧니부터 눈에 들어왔다. 쟤 지금 나보고 웃음 참고 있는데. 급 나빠지는 기분에 인상을 팍 써주곤 고개를 원위치했다.


“그... 쉬는시간마다 엄청 바쁜가 봐?”


차라리 ‘나 너 보려고 쉬는시간마다 니네 반 왔다’ 고 광고를 할 걸 그랬다. 뱉자마자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엎지른 물은 닦을 수라도 있지 이미 뱉은 말은 덧붙이면 덧붙일수록 불필요한 것만 쌓여간다. 그래서 침묵을 택했다. 니 알아서 듣고 싶은 대로 들어라... 다행히 강다니엘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응. 그냥 좀.”


그 말엔 답할 말이 그렇구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또 난감해졌다. 그러면 말이 또 끊길 건데 다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그래서 또 침묵을 택했다. 이러면 더 뻘쭘해질 줄은 몰랐다. 뒤에서 풉 웃어버리는 것까지 들렸다. 시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꾹 닫힌 입안으로 육두문자가 날라다녔다. 강다니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뭐 더 할 말이 있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할 말이 없긴 한데 만들고 싶긴 해. 눈으로 말하면 알아먹어 줄까 살짝 기대했는데 당연히 기대에서 그쳐야 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내려다보는 행동에서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이만 들어가겠다는 속내가 엿보였다.


하루가 지나 다시 보는 강다니엘은 여전히 키가 크고 하얗고 다리가 길고 얼굴이 갸름했다. 눈물점은 어제보다 더 선명해 보였고 피부도 되게 좋았다. 어깨도 많이 넓고 종이를 든 손등 위엔 핏줄이 적당히 솟아 있다. 미국 향수라 이렇게 좋은가 싶던 그 향기도 여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도 여전했다. 지나가는 친구의 인사를 받아주며 웃는 그 얼굴도. 어제 이 얼굴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 느꼈었지. 그 여전한 모습을 보는 박지훈의 마음도 여전했다. 진짜, 진짜 진짜 친해지고 싶다.


“청소시간에도 교무실 가?”
“내가 교무실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바... 박우진이 말해주던데.”


미안해 우진아 넌 정말 좋은 친구고 내가 좀 이따 등짝 내줄게.


“아니. 청소시간엔 안 가.”
“아...”
“왜?”
“아니... 청소 열심히 하라고.”
“...그래. 너도.”


별로 많은 대화를 해보진 않았지만 그 안에서도 느낀 게 하나 있었다. 일단 지금까지 본 강다니엘은 말을 길게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해야 할 말만 하고 굳이 부연설명이나 질문을 덧붙이지 않는 스타일. 최대한 많은 대화를 해보고 싶은 박지훈에겐 더없이 힘든 상대가 아닐 수 없다. 강다니엘은 쫑난 대화를 끝으로 교실로 휘적휘적 들어가버렸고 남은 건 박우진의 매운 손바닥뿐이다. 니가 물어봐서 말해줬드만 그걸 그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뭐가 되노! 많이 사라진 듯했던 토종 사투리가 여과없이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피실피실 웃는 게 기분 나빠 미간을 구겼다. 아까부터 왜 자꾸 웃냐 너는? 박우진은 단단한 손으로 박수를 치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니 분위기가 존나 이상하잖아. 친해지고 싶다드만 뭔 쑥쓰럼을 타고 앉았노.”
“...아니이! 쑥쓰러운 게 아니고 아직 안 친하니까 낯가려서 그래. 나 낯가리는 거 알잖아 너도!”
“알았다 알았다. 성질을 내고 그러냐.”


정곡을 찔리면 성질 내는 병이 있다. 박지훈은 지금껏 제가 느낀 감정 중 가장 큰 것이 쑥쓰러움이었다는 걸 갑자기, 정말 갑자기 깨달았다. 쑥쓰러움... 내가 왜?


“청소시간에도 올 거냐?”
“아니? 쟤랑 얘기했잖아. 그거면 됐어.”
“니 솔직히 오늘 강다니엘이랑 얘기한 것보다 효길 쌤이랑 얘기한 게 훨 길지.”


효길 쌤이란 늘 정문에서 학생들의 복장불량 및 지각을 잡아내는 학년 부장 선생님을 말한다. 오늘 지각하면서는 부쩍 따땃해진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 강다니엘보다 훨씬 더 많은 얘기 심도 깊은 얘기 나눴다 어쩔래. 하여간 박우진, 정곡 찌르는 덴 선수다. 맞는 이야기에 맞다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자존심 상해 박지훈은 괜히 박우진의 탄탄한 팔뚝을 찰싹 때려주고 등을 돌렸다.


“나 청소시간엔 안 온다.”


진짜다.







안녕하세요 저는 또 이렇게 질러버렸구...
아마 그리 길진 않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녤윙만세

스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