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네라도라











유리창에 비친 창섭이 강아지 같고 걸음걸이도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어디 가?"

"서점. 집 책장이 너무 텅 비었더라."

"야, 서점은 좀... 나 책 안 읽는 거 알잖아."

"그래서 너 책 좀 읽히려고 가는 것도 있지."


이제 나 없으면 외롭기도, 무섭기도, 고통스럽기도 할텐데 그때마다 책 읽으면서 잠시라도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았으면 좋겠어.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이게 내 진심이야.
또 히죽 웃곤 창섭을 책이 수북한 곳으로 데려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둘은 본격적으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맛본다. 책의 표지를 보고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며, 놀란 눈으로 페이지를 넘겨보기도 하는 창섭이다. 그 반대편엔 창섭을 카메라를 찍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눈에 담고있는 성재가 있었다.

책에 집중하느라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귀엽고, 목을 45도 정도 기울여 책을 읽는 모습이 이창섭 답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책 쥐어주면 세상 모르고 집중해서 읽을 거면서. 짜증만 내던 미간을 필 줄도 알면서. 아이처럼 웃는 법도 알면서. 내가 너무 모질게 대했나... 그래서 다 감추고 지냈나.


"뭐하냐."

"어?"

"뭘 그렇게 행복하게 보고 있어? 뭐 있어?"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제 뒤를 확인한다. 창섭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짝다리 짚고있던 다리가 휘청였다. 헛기침을 하며 없어. 하곤 책꽂이가 모여있는 곳을 벗어난다.

그런 성재를 보며 어깨를 으쓱, 한 창섭은 다시 책에 집중했다.


-


"밤길 같이 걷는 거 오랜만이네."

"...그러게."

"1학년 때는 매일 붙어다녔는데..."


성재의 말에 창섭은 맞장구를 치다 이내 대학 새내기 시절의 기억까지 불러냈다. 그날 밤의 일은 이제껏 창섭만 마음 속에 담고 있었기에 성재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지. 너 그때 기억 나냐? 동창회 때 너 만취한 거 내가 집까지 끌고왔던 날."

"그랬냐. 내가 술 취해서 너한테 끌려온 게 좀 많아야지."

"그때 나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알긴 하냐?"

"당황?"

"너 그날 유난히 나한테 앵겨붙더니 그, 키... 그거까지 했었어. 내가 이젠 담담히 말하는데 그 날 생각하면 아주-"

"키? 키 뭐."

"키 그거 있잖아... 막, 막 닿아서-"

"키스...?"

"...그, 그래. 그거!"

"내가? 너한테?"

"너도 끔찍하지? 나도다. 이 새끼야."


말도 안 돼. 언제? 내가 왜?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키스가 웬말이냐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성재는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그는 눈이 동그랗게 뜬 채 창섭을 바라보았다.


"넌... 기억 안 나나보네."

"...."

"야, 심각할 거 없어! 사람이 살다보면 꽐라도 되고, 그러다 보면 실수도 하는거지."


창섭은 표정관리 안 되고 안절부절인 성재를 힐끗 한 번 보곤 픽 웃은 후 덤덤하게 말했다. 마치 본인은 괜찮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조금은 깊었었다. 단언컨대 내가 살아 오면서 가장 짙게 한 키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육성재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긴, 얜 연예인 뺨치는 얼굴 덕에 여자친구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바꿨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허구한 날 새로운 여친과 그런 키스를 하고 기억 못해도 그만이었겠지. 결국 내게만 유의미한 입맞춤인가 보다. 그래도... 그래도. 하는 마음이 쓸데없이 계속 들었다.


"왜 말 안 했어...?"

"응? 그냥... 말 해봤자 넌 기억 못하는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야, 그래도-"

"됐어. 이미 지나간 일 들춰서 뭐하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치맥 콜?"

"안돼. 나 또 술 먹고 그런 짓 하면 어떡해."

"...."


다시는 그런 실수 하기 싫었다. 안 그래도 벅찬 마음 술김에 해서 받아줬다는 창섭과의 키스로 희망고문 당하기도 싫고. 아니, 그냥 맨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섭이한테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술김에 하는 건 좀 아니잖아.


"그렇게 싫나..."

"응?"

"아니야. 너가 그런 반성의 마음을 가진다면 다음에 먹지, 뭐."


성재를 보며 해사하게 웃은 창섭은 이내 앞을 보고 걷는다.
걸을 때마다 찰랑이며 흔들리는 머리칼이, 그런 머리칼로 덮인 동그란 뒷통수가 성재의 마음을 또 한번 간질였다.
귀엽다... 저런 애가 나 없으면 많이 울까? 아니, 어쩌면 안 울지도 모른다. 살아생전 창섭이에게 내가 그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아, 그런데 내가 죽었다는 말에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내가 조금 슬플 것 같다. 그렇다고 저 아이가 우는 모습은 하늘나라에서라도 보기 싫으니 조금만, 눈물도 아주 조금만 흘릴 정도의 아픔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내가.


-


"오늘 시간 되지?"

"안 되는데."

"또 뭔 약속인데."

"오늘 과 모임 있어. 이번엔 선배들 다 계신 거라 못깬다."

"...."


성재가 또 어떤 무기를 들고올지 몰라 미리 선수 치는 창섭이다. 그러자 성재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창섭의 의도가 그에게까지 보였나보다.
입을 잠시 굳게 다물고 있던 그가 입을 땐다.


"같이 가. 나도 껴줘. "

"뭐, 뭐래 얘가. 너 우리 과도 아니면서 끼긴 뭘 껴."

"뭐 어때. 나 친화력 좋아서 다들 너보다 날 더 좋아할 걸?"

"개소리 말고 따라오지 마! 안 돼!"

"네가 그래도 갈건데?"

"너 진짜 따라오면 죽여버린다."

"어차피 너네 과 모임 자주 꼈어서 다들 아는 얼굴일텐데 못 갈건 뭐냐?"

"그리고 ㄴ, 너 또 만취하면 누가 데려가라고."

"술 안 마실게."

"안 돼. 그래도 절대 안 돼."


뭐야, 뭐 숨기고 싶은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왜 이래. 아무래도 수상한데...
꽤 단호한 창섭에 성재는 입술을 지긋 깨물더니 포기했다는 듯이 침대에 눕는다. 그를 본 창섭은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곤 나갈 채비를 마쳤다. 곧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성재는 재빠르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몸에 걸쳐진 것들은 모두 창섭이 좋아했던 옷가지였다.

창섭과 같은 과 친구한테 메시지로 과 모임 장소를 알아내고 본인도 합석 되는지 허락맡은 성재다. 그는 창섭 모르게 은밀히 작전을 진행했다.
그치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해도 그리 싫어했던 창섭이 순순히 옆자리를 내줄 리는 없으니까 하는 짓이다. 이렇게 붙어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다른 누구에겐 별 거 아닐지 몰라도 그에겐 큰 이유겠지.


"나한텐 시간이 없거든..."


액자 속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을 보며 읇조리듯 말하는 성재였다. 눈은 슬펐고, 입꼬리는 싱긋 올라갔다. 막힘없이 창섭을 쳐다보는 눈빛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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